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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윗의 믿음(2) (삼하12:20-25)
가정의 달 5월이 시작되었습니다. 계절적으로 일년 중에 5월이 가장 좋은 달이라고 합니다. 이런 좋은 계절에 교회도 5월을 가정의 달로 정하고 가정의 소중함을 깨닫는 기간으로 보냅니다. 오늘은 어린이주일로 지킵니다.
많은 사람들이 요즘 아이들은 예전과 다르다는 말을 자주 합니다. 노는 거부터 다릅니다. 옛날에는 고무줄, 술래잡기, 숨바꼭질, 구슬치기, 땅따먹기놀이, 딱지치기, 오재미, 자치기, 팔방놀이, 연날리기, 말타기, 줄넘기, 공기놀이, 기차놀이, 돌치기, 꼬리잡기, 공놀이 등을 하고 놀았습니다. 가만히 보면 아주 다양한 놀이였고, 그리고 주로 밖에서 여러 아이들과 함께 어울려 놀았습니다. 하지만 요즈음 아이들이 노는 것은 아주 다릅니다. 주로 컴퓨터와 카드게임 등이 전부입니다. 종류도 다양하지 않고, 이젠 혼자 놀고, 집에서 노는 것이 익숙한 세상입니다. 다양하지가 않으니까 중독이 되는 경우가 많고, 혼자 노니까 이기적인 성향이 많이 나타나고, 안에만 있으니까 건강에도 적잖은 영향을 줍니다. 그래서 요즘 아이들은 순수함이 떨어지고, 내적으로 강하지 못하고, 어른 아닌 어른의 모습을 발견합니다. 종종 유치원 아이들이 한숨을 쉬는 것을 보면, 인생 다 산것처럼 느껴질 때가 있다는 것입니다.
페루에서는 희한한 일이 벌어진 것을 보았습니다. 6살 난 여자아이가 임신을 하여 아이를 낳았다는 것입니다. 믿어지지 않은 일인데, 실제로 일어난 일이라고 합니다. 물론 특별한 경우요, 기네스북에 올라갈 일입니다만 점점 아이들이 아이 같지 않은 어른 같은 모습에 놀랄 때가 있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아무리 시대가 변하고, 아이들이 예전과 같지 않더라도 아이들은 여전히 아이요, 자녀입니다. 오늘 어린이주일에 성경에서 말하는 자녀에 대한 교훈을 배워야 합니다. 우리는 지금 히브리서 11장에 나오는 믿음의 사람 다윗을 살펴보고 있습니다. 자녀를 대하는 것과 자녀를 신앙적으로 키우는 모습에 있어서도 다윗만큼 본을 보여준 인물이 없을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도 계속해서 다윗의 믿음, 특히 자녀를 대하는 믿음을 찾으려고 합니다. 다윗은 어떤 믿음의 사람일까요? 그는 자녀를 어떻게 대하고 사랑했을까요?
첫째, 기대감을 갖는 믿음입니다. 본문은 다윗의 생애가운데 가장 어려울 때 있었던 사건입니다. 다윗은 이스라엘의 2번째 왕이 되면서 그의 생애 전성기를 맞이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에게 위기가 찾아왔습니다. 모든 사람이 전쟁에 참여하여 피를 흘리고 있을 때, 그는 한가로이 왕궁 뜰을 거닐다가 한 여인의 목욕하는 것을 훔쳐보게 되었습니다. 결국 다윗은 그 여인을 왕궁으로 불러 간음죄를 짓고 말았습니다. 다윗의 범죄는 거기서 그치지 않았습니다. 그는 여인의 남편이 자기의 충신인 우리아인 것을 알고, 그를 전쟁터의 최전방에 세워 간접 살인을 했습니다. 간음죄와 살인죄, 다윗의 생애 지울 수 없는 범죄가 이어질 때 하나님은 다윗을 깨우치기 위해 선지자 나단을 보냈습니다. 다윗은 선지자의 책망을 받자 그 앞에 엎드려 통회하고 자복했습니다. 그런데 다윗은 용서를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징계를 받았습니다. 선지자는 다윗의 범죄로 태어나는 아이가 죽을 것이라고 선언합니다. 이 예언대로 다윗과 밧세바의 사이에 나은 아들이 태어났으나 병들어 죽어 가는 과정을 보여주는 말씀이 바로 본문의 배경입니다.
다윗의 기록에서 자녀와 관련된 그의 이야기는 여기에서부터 본격적으로 시작이 되었습니다. 그의 범죄로 태어난 아이가 죽었지만, 하나님은 다윗을 사랑하셔서 죽은 아들 대신 다른 자녀를 선물로 주셨습니다. 그렇게 해서 태어난 아들이 바로 ‘솔로몬’입니다. 24절에서 그의 출생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다윗은 자녀가 태어날 때 그 아이의 이름을 ‘솔로몬’이라고 지었습니다. 이 이름의 매우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솔로몬이라는 이름의 뜻은 히브리어 ‘샬롬’으로서 ‘평화’라는 의미입니다. 다윗이 아들의 이름을 이렇게 지어준 것에서 우리는 다윗이 자녀를 향해 갖는 기대감이 무엇인가를 엿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오늘날이나 옛날이나 부모가 자녀의 이름을 지을 때는 아무렇게나 짓지 않습니다. 기대감을 갖습니다. 부모의 바램과 소망에 대한 기대감을 갖고 이름을 짓습니다. 다윗도 솔로몬의 이름을 그렇게 지은 것입니다. 그는 아이의 이름을 평화라고 지음으로서 자신이 얼마나 많은 피를 흘린 사람인지를 보여줍니다. 앞으로 솔로몬의 시대가 되면 이스라엘에 진정한 평화가 임할 것을 소망하면서 이렇게 이름을 지은 것입니다. 결국 다윗이 기대한대로 나중에 솔로몬은 평화의 시대를 열어 갔습니다. 다윗의 기대감을 갖는 믿음이 결실을 본 것입니다. 이처럼 자녀에 대하여 기대감을 갖는 것이 부모의 믿음 속에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참 귀한 믿음입니다.
솔로몬에 대한 기대감은 아버지 다윗만 가진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도 큰 기대감을 가졌습니다. 그래서 솔로몬은 ‘여디디야’로도 불렀습니다. 선지자 나단이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지어준 이름입니다. 그 뜻은 ‘여호와께 사랑을 입은 자’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솔로몬이 사랑 받기 위해 태어난 아이로서 하나님과 사람에게 인정받는 자가 되기를 간절히 바라셨던 것입니다.
기대감이 있으면 더 많이 관심을 갖고, 더 많이 사랑하고, 더 많이 이끌어 줄 수 있습니다. 기대감이 없으면 관심도 없고, 사랑도 없어지고 바르게 이끌지도 못하는 법입니다. 어떤 것에 대한 기대감이 이처럼 대상에 대한 장래의 길을 결정짓는 중요한 요소가 됩니다. 이것이 이 땅의 모든 부모가 자녀를 향해 갖는 마음이어야 합니다. 우리 모든 크리스천 부모들이 자녀에게 대한 믿음이어야 합니다. 여러분들은 자녀들에 대하여 어떤 기대감을 갖고 있습니까? 지금은 부족해도 부모와 어른의 기대 속에서 자라날 때 분명 아이는 성공할 것입니다. 이것이 자녀를 향한 우리의 믿음이어야 합니다.
자녀에 대하여 기대감을 가지십시오. 그리고 더 많은 관심과 사랑으로 잘 양육하고 이끌어 주십시오. 분명 우리의 소중한 자녀들이 앞으로 큰 일을 감당하는 뛰어난 인물들이 될 것입니다. 특히 우리 교회에 속한 아이들이 앞으로 크게 되는 기대감을 갖기를 원합니다. 하나님이 기대하는 자들입니다. 하나님의 사랑 받기 위해 태어난 아이들입니다. 그래서 여기에서 자라는 아이들이 나라와 세계와 열방을 향해 큰 일을 감당하는 탁월한 사람들이 될 줄로 믿습니다. 우리 모두 다윗처럼, 자녀에 대한 기대감을 갖는 믿음으로 우리의 자녀들을 잘 양육하고 바르게 이끌어 가시기를 축원합니다.
둘째, 책임을 지는 믿음입니다. 본문을 통하여 자녀에 대한 다윗의 귀한 믿음을 또 하나 발견하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다윗이 자녀에 대하여 책임을 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우선 그가 아이가 태어났을 때 태어난 그 아이를 자기가 책임지겠다는 자세가 확고한 것을 보여줍니다. 13절에서 다윗은 나단 선지자의 책망 앞에 이렇게 고백합니다. “내가 여호와께 죄를 범하였노라...” 이 말은 단순하지가 않습니다. 이 고백 속에 다윗은 자기가 행한 모든 것에 대한 책임을 지고, 또한 앞으로 태어난 아이에 대하여서도 책임을 지겠다는 의지를 보여준 것입니다. 또한 책임을 지는 다윗의 믿음은 아이가 태어났을 때 더 잘 보여줍니다. 아이가 태어났지만 하나님의 징계를 받아 심한 병에 걸렸습니다. 그러자 다윗은 그 아이를 위하여 이런 행동을 합니다. 16-17절입니다. “다윗이 그 아이를 위하여 하나님께 간구 하되 금식하고 안에 들어가서 밤새도록 땅에 엎드렸으니 그 집의 늙은 자들이 곁에 이르러 다윗을 일으키려 하되 왕이 듣지 아니하고 저희로 더불어 먹지도 아니하더라...” 다윗의 이런 행동은 무엇을 보여줍니까? 한마디로 책임을 지고 있는 모습입니다. 자기 때문에 태어났고, 자기 때문에 병들어 죽게 되었으니, 자기가 끝까지 책임을 지고 최선을 다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다윗의 믿음입니다. 비록 죄를 범했더라도 자기 죄와 자녀에 대하여 책임을 통감하며 끝까지 최선을 다하는 모습이 너무도 귀하고 아름답게 보이지 않습니까?
부모로서, 어른으로서, 자녀와 아이들에 대한 가장 소중한 믿음은 책임을 지는 것입니다. 지금은 너무도 책임을 지는 일에 대하여 소홀한 시대입니다. 사회에 이렇게 문제는 많은데 책임을 지는 사람은 없습니다. 정치에 이렇게 국민들의 신임을 받지 못하는데 책임을 전가합니다. 무엇보다도 가정에 큰 위기를 맞고 있는데 책임을 지지 않습니다. 어쩌면 이 시대의 비극은 책임을 지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런 시대에 성도들은 책임을 지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남에게 전가시키지 말고, 남의 탓만을 하지 말고, 나의 책임을 통감해야 합니다. 모든 문제의 해결은 바로 거기에서부터 시작됩니다.
가정에서 자라나는 자녀들에 대한 책임은 많은 부분에서 부모에게 있는 것입니다. 부모는 아이를 이 땅에 태어나게 한 것으로 그 역할을 다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 아이가 성인이 되어 자기의 의지와 판단으로 성숙한 사람이 되기까지, 아니 그 이후라도 부모로서의 역할과 책임을 성실히 감당해야 합니다. 그런데 아이가 날 때부터 너무도 무책임한 게 많다는 것입니다.
1970년대 이후 우리 사회는 빠른 속도의 산업화와 도시화에 따른 역기능현상이 나타났습니다. 그 하나의 대표적인 것이 서구의 성 개방 풍조가 급격히 밀어닥치게 된 것입니다. 그 영향에 따라 오늘날 미혼여성의 임신 및 10대 미혼모 문제는 심각한 사회 문제로 떠오르게 되었습니다. 특히 2000년대에 와서는 미혼모의 연령이 급격히 낮아지고 있습니다. 한국여성개발원의 통계에 의하면 현재 미혼모의 연령 중 15세에서 19세가 전체 48.3%라고 발표했습니다. 특히 미혼모의 문제는 낙태와 장애아 출산, 영아 살해까지 이어져 사회에 큰 문제를 주고 있습니다. 책임을 지지 않은 사람들의 무분별한 행동이 지금 이 나라에 심각한 사회문제를 만들고 있는 것입니다.
아동학대의 문제는 또 다른 의미의 무책임의 모습이라고 봅니다. 보건복지부가 지난 2006년 발표한 전국아동학대 현황보고서에 의하면, 우리 나라의 아동학대가 심각한 것으로 파악되었습니다. 피해아동의 연령분포는 초등학생에 해당하는 만 7∼12세의 아동이 전체의 50.2%를 차지한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특히 아동학대 발생장소를 분석한 결과, 80.9%가 가정 내에서 일어났고, 학대행위자의 대다수가 부모로 파악이 되었습니다. 이것이 지금 나라의 현실입니다. 힘이 없고, 저항을 못하는 아이들이 지금 이렇게 우리의 가정에서 병들고, 큰 고통을 받고 있습니다. 모두가 부모의 무책임한 모습입니다. 권리만 주장하고 책임은 없는 안타까운 현실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자녀를 낳고, 자녀가 하나님이 주신 소중한 인격체인 것으로 알고 책임을 갖고 최선을 다하는 것이 좋은 부모요, 좋은 믿음의 사람입니다. 너무도 무책임한 이 시대에 하나님은 우리를 책임을 지는 자로 부르셨습니다. 가정에서, 사회에서, 심지어는 교회에서도 내 책임을 통감하며 자기를 돌아보는 모습이 너무도 그리운 시대입니다. 우리 모두 다윗처럼 책임을 지는 사람으로, 특히 자녀를 책임지는 믿음으로 최선을 다하며 사시기를 바랍니다.
셋째, 하나님께 맡기는 믿음입니다. 자녀를 위한 다윗의 믿음은 기대감을 갖는 것과 자기의 최선을 다하는 것에서만 그치지 않았습니다. 이것은 일반 믿지 않는 사람도 할 수 있는 일입니다. 다윗은 여기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갔습니다. 다윗은 무엇보다도 자녀를 하나님께 맡겼습니다. 모든 것을 하나님의 뜻에 순종했습니다. 이것이 본문에서 돋보이는 다윗의 믿음입니다.
다윗이 최선을 다하여 살려달라고 몸부림쳤던 아이가 죽었습니다. 그럴 때 다윗의 행동이 무엇이었는가를 보십시오. 그는 원망하지도 않았고, 더 이상 실망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리고 자기 자리에서 훌훌 털고 일어나 몸을 씻고 의복을 갈아입고 음식을 먹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전에 들어가 경배합니다. 사람들은 앞에서 보여준 간절한 모습과 너무도 달랐습니다. 다윗의 이런 대조적인 행동에 대하여 잘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조심스럽게 다윗에 물었습니다. “신복들이 왕께 묻되 아이가 살았을 때에는 위하여 금식하고 우시더니 죽은 후에는 일어나서 잡수시니 어찜이니이까 가로되 아이가 살았을 때에 내가 금식하고 운 것은 혹시 여호와께서 나를 불쌍히 여기사 아이를 살려 주실는지 누가 알까 생각함이어니와 시방은 죽었으니 어찌 금식하랴 내가 다시 돌아오게 할 수 있느냐 나는 저에게로 가려니와 저는 내게로 돌아오지 아니하리라” 무엇을 보여주는 모습입니까? 다윗은 무엇이든지 최선을 다한 사람입니다. 그러면서 어떤 결과가 주어지든지 그것을 하나님의 뜻으로 겸허하게 받아드리고 순종한 사람입니다. 그러니까 그는 자기의 할 일을 다하고, 하나님께 맡긴 것입니다. 이것이 다윗의 믿음입니다. 특히 여기에서 자녀를 향한 다윗의 이런 믿음이 돋보이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모든 일에서 이런 자세가 필요합니다. 어떤 일이든지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힘을 다해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맡겨야 합니다. 하나님께 맡긴다는 것은 하나님이 어떤 응답과 결과를 주시든지 그대로 수용하고 받아드리는 것이고, 결과를 하나님의 뜻으로 알겠다는 것입니다. 이 두 가지는 항상 병행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내 최선만을 고집해서는 안됩니다. 그러면 나타난 결과에 대해서 모두 자기가 한 것으로 착각하여 교만하기가 쉽습니다. 모든 영광은 늘 하나님께 돌려야 합니다. 반대로 우리는 하나님께 맡기기만 하지도 않습니다. 하나님께 맡기고 나는 아무 할 일이 없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면 우리는 꼭두각시에 불과합니다. 내가 할 일은 아무 것도 없게 됩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이 두 가지는 함께 갑니다. 최선을 다하는 것이 필요하고, 하나님께 맡기는 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자녀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부모로서 우리는 자녀를 위해 기대감을 갖고 사랑해야 합니다. 최선을 다해 자녀를 신앙으로 양육해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맡겨야 합니다. 특히 자녀를 하나님께 맡긴다는 것의 분명한 의미는 적어도 부모는 자녀가 하나님을 잘 믿는 사람이 되도록 이끌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어려서부터 교회에 나오게 하고, 가정에서부터 신앙의 분위기를 접하도록 해야 합니다. 그리고 자녀들이 부모를 통해 하나님을 배우고, 신앙의 맛을 보도록 가정에서 본을 보여야 합니다. 기도하는 것, 예배드리는 것, 찬송 부르는 것, 교회를 섬기는 것, 하나님을 사랑하고 사람을 사랑하고 교회를 사랑하는 본을 보여야 합니다. 자녀는 바로 그런 부모의 말과 행동을 보면서 하나님을 알아가고, 참되고 바른 신앙을 배워 가는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 우리의 자녀를 하나님께 맡기고 있는 것입니까? 자녀들을 세상으로 나가게 하지 않고 교회로 이끄는데 최선을 다하고 있습니까? 가정에서 자녀에게 믿는 자의 본을 보이고 있는 것입니까? 우리가 앞서간 사람들의 영향을 받아 그들의 발자취를 따라가듯이, 우리의 자녀도 우리의 영향을 받아 우리의 발자취를 따라오게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말씀을 맺습니다. 오늘 우리는 자녀를 대하는 다윗의 귀한 믿음을 생각했습니다. 이제 자녀에 대하여 기대감을 가져야 합니다. 부모로서 책임을 통감해야 합니다. 그리고 자녀를 전적으로 하나님께 맡겨야 합니다. 어린이주일에 주신 이 말씀을 마음에 새기시고 이번 한 주간도 예수만 섬기는 행복한 가정을 위하여 힘있게 출발하시기를 축원합니다. (아멘)
출처/서해원목사 설교자료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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