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교도주의의 특성 / 피터 루이스
청교도주의란 단순히 일련의 율법이나 교리의 집합이 아니라 하나의 생명의 활력소이다. 거룩한 생활의 아름다움을 보여줌으로 그것을 향하여 움직이게 하고, 하나님을 중심으로 한 삶의 만족감에 대한 가능성을 감탄해 하며 희열을 느끼게 하는 비전이요 충동이다. 더욱이 엄격한 규율은 뜨거운 헌신과 어울러져서 청교도주의를 한편으로는 천박한 신비주의로부터 그리고 다른 한편으로는 세속적이며 피상적인 종교로부터 보호하였다. 바로 이 율법과 은혜의 절묘한 결합이 청교도적 경건 생활의 주된 요소였다.
삶의 모든 국면은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았다. 매일 매일의 삶을 눈여겨 살피며, 차분히 경건스러운 개인 및 가족들의 기도모임으로 시작되어 끝마쳐졌다. 직업전선에서의 일거리나 집안일이나 먹고 마시는 모든 일들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실행되었고 하나님의 완전한 뜻을 추구하며 행하여졌다.
사업상의 관계이든, 개인적인 친분관계이든 상관없이 모든 관계는 영적인 원리에 입각하여 규정되어졌다. 일하지 않는 시간은 기꺼이 그리고 아주 열심히 성경연구에 몰두하였고, 또 공(公)예배에 참석하였다. 그리고 ‘경건한 대화’를 나누거나 열정적인 간증을 나누었고 영혼의 유익을 주는 모든 다른 수단들로 남은 시간들을 보낸 것이다. 한마디로 말해서 ‘경건함의 위대한 업무’가 모든 열정적인 신자들의 야망을 지배하였고 그들의 모든 정력을 자아냈다.
청교도주의는 대부분 세속철학적이고 피상적인 사상들이 실패한 곳에서 성공을 거두었다고 말할 수 있다 왜냐하면 청교도들은 참된 교리를 구체화함으로 사람들 앞에 분명한 진리의 빛을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세상 사람들이 사는 삶과 무언가 다른 빛나는 삶을 보았으며, 깜짝 놀랄만한 풍경의 도덕적, 영적인 대륙으로 이끄는 삶을 보았던 것이다.
영적 삶의 생생함과 더불어서 성경적인 사상 위에 서있는 성경적인 삶에 기초를 둔 교리적 올바름과 견고함이 확실히 있었다. 리처드 백스터, “건전한 교리는 건전한 판단과 건전한 마음, 건전한 대화(삶)와 건전한 양심을 만든다”. 만일 그렇지 않다면 그 교리는 올바른 것이 아니든지 바르게 이해되지 못한 것일 것이다!
경건은 땅으로부터 솟아나는 것이 아니며 그렇다고 허공에서 떨어지는 것도 아니다. 참된 경건이란 신비적인 체험이나 단련된 교양에서 생겨나는 것이 아니라 진리와 은혜의 신실한 결합으로부터 탄생된다. 경건한 청교도들이 가졌던 진리와 은혜의 관계는 마치 떨어질 수 없는 부모와 자식과의 관계와 같은 것이다.
신학적인 사상에 있어서 다분히 칼빈주의적인 그들은 섭리와 은혜 가운데 나타나는 하나님의 절대주권에 대한 개념을 아주 높이 다루었다. 이것은 그들이 가장 어려운 역경의 체험 속에서도 자신들을 지탱한 그리스도 안에 있는 진정한 자유와 평강에 잘 반영되어 있는 사상이다.
하나님에 대한 교리가 그들을 고양시켰다면 죄에 대한 교리는 그들을 겸손하게 만들었다. 청교도들은 죄를 역명(逆名) 중의 역명이요 모든 악의 근원임을 서슴없이 밝혀내었다. 그들의 저술과 설교에 있어서 청교도들은 갖가지 모습으로 위장한 죄의 사악한 모습을 파헤치면서 자만심을 파괴하고 오직 은혜로 말미암는 구원으로 인간을 인도하였다.
청교도주의는 교회론에 큰 영향을 끼쳤다. 하나의 운동으로서의 청교도주의는 영국 교회의 얼굴을 개혁하려는 노력의 일환으로 시작되었다. 그 일을 행함에 있어서 그들은 성경을 따라 행하였고 오직 성경만으로 개혁을 단행하고자 하였다. 그들은 세속 정권이나 교권조차도 교회정치나 교회생활의 모든 양식에 있어서 신약성서의 충분하고도 맹백한 가르침을 더하거나 감할 권한이 없음을 주장하였다.
교회와 영적인 삶의 영역을 누가 통치하는가? 하나님인가? 사람인가? 청교도들은 물었다. 청교도들의 답변은 성경이라는 유일한 절대 권위하에 교회의 자유를 위한 분명한 선언이었다. 이것을 위하여 요지부동한 결단과 더불어 고통받을 준비가 기꺼이 되어 있었다.
- 피터 루이스, 『청교도 목회와 설교』, 서론, pp 15-19
출처: http://blog.daum.net/kds2012/686
청교도주의란 단순히 일련의 율법이나 교리의 집합이 아니라 하나의 생명의 활력소이다. 거룩한 생활의 아름다움을 보여줌으로 그것을 향하여 움직이게 하고, 하나님을 중심으로 한 삶의 만족감에 대한 가능성을 감탄해 하며 희열을 느끼게 하는 비전이요 충동이다. 더욱이 엄격한 규율은 뜨거운 헌신과 어울러져서 청교도주의를 한편으로는 천박한 신비주의로부터 그리고 다른 한편으로는 세속적이며 피상적인 종교로부터 보호하였다. 바로 이 율법과 은혜의 절묘한 결합이 청교도적 경건 생활의 주된 요소였다.
삶의 모든 국면은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았다. 매일 매일의 삶을 눈여겨 살피며, 차분히 경건스러운 개인 및 가족들의 기도모임으로 시작되어 끝마쳐졌다. 직업전선에서의 일거리나 집안일이나 먹고 마시는 모든 일들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실행되었고 하나님의 완전한 뜻을 추구하며 행하여졌다.
사업상의 관계이든, 개인적인 친분관계이든 상관없이 모든 관계는 영적인 원리에 입각하여 규정되어졌다. 일하지 않는 시간은 기꺼이 그리고 아주 열심히 성경연구에 몰두하였고, 또 공(公)예배에 참석하였다. 그리고 ‘경건한 대화’를 나누거나 열정적인 간증을 나누었고 영혼의 유익을 주는 모든 다른 수단들로 남은 시간들을 보낸 것이다. 한마디로 말해서 ‘경건함의 위대한 업무’가 모든 열정적인 신자들의 야망을 지배하였고 그들의 모든 정력을 자아냈다.
청교도주의는 대부분 세속철학적이고 피상적인 사상들이 실패한 곳에서 성공을 거두었다고 말할 수 있다 왜냐하면 청교도들은 참된 교리를 구체화함으로 사람들 앞에 분명한 진리의 빛을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세상 사람들이 사는 삶과 무언가 다른 빛나는 삶을 보았으며, 깜짝 놀랄만한 풍경의 도덕적, 영적인 대륙으로 이끄는 삶을 보았던 것이다.
영적 삶의 생생함과 더불어서 성경적인 사상 위에 서있는 성경적인 삶에 기초를 둔 교리적 올바름과 견고함이 확실히 있었다. 리처드 백스터, “건전한 교리는 건전한 판단과 건전한 마음, 건전한 대화(삶)와 건전한 양심을 만든다”. 만일 그렇지 않다면 그 교리는 올바른 것이 아니든지 바르게 이해되지 못한 것일 것이다!
경건은 땅으로부터 솟아나는 것이 아니며 그렇다고 허공에서 떨어지는 것도 아니다. 참된 경건이란 신비적인 체험이나 단련된 교양에서 생겨나는 것이 아니라 진리와 은혜의 신실한 결합으로부터 탄생된다. 경건한 청교도들이 가졌던 진리와 은혜의 관계는 마치 떨어질 수 없는 부모와 자식과의 관계와 같은 것이다.
신학적인 사상에 있어서 다분히 칼빈주의적인 그들은 섭리와 은혜 가운데 나타나는 하나님의 절대주권에 대한 개념을 아주 높이 다루었다. 이것은 그들이 가장 어려운 역경의 체험 속에서도 자신들을 지탱한 그리스도 안에 있는 진정한 자유와 평강에 잘 반영되어 있는 사상이다.
하나님에 대한 교리가 그들을 고양시켰다면 죄에 대한 교리는 그들을 겸손하게 만들었다. 청교도들은 죄를 역명(逆名) 중의 역명이요 모든 악의 근원임을 서슴없이 밝혀내었다. 그들의 저술과 설교에 있어서 청교도들은 갖가지 모습으로 위장한 죄의 사악한 모습을 파헤치면서 자만심을 파괴하고 오직 은혜로 말미암는 구원으로 인간을 인도하였다.
청교도주의는 교회론에 큰 영향을 끼쳤다. 하나의 운동으로서의 청교도주의는 영국 교회의 얼굴을 개혁하려는 노력의 일환으로 시작되었다. 그 일을 행함에 있어서 그들은 성경을 따라 행하였고 오직 성경만으로 개혁을 단행하고자 하였다. 그들은 세속 정권이나 교권조차도 교회정치나 교회생활의 모든 양식에 있어서 신약성서의 충분하고도 맹백한 가르침을 더하거나 감할 권한이 없음을 주장하였다.
교회와 영적인 삶의 영역을 누가 통치하는가? 하나님인가? 사람인가? 청교도들은 물었다. 청교도들의 답변은 성경이라는 유일한 절대 권위하에 교회의 자유를 위한 분명한 선언이었다. 이것을 위하여 요지부동한 결단과 더불어 고통받을 준비가 기꺼이 되어 있었다.
- 피터 루이스, 『청교도 목회와 설교』, 서론, pp 15-19
출처: http://blog.daum.net/kds2012/6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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