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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나단 에드워즈 청교도 신학의 특성 / 김영한 교수

by 【고동엽】 2021. 11. 13.

이 논문은 비교적 에드워즈 연구 초기에 쓰여진 것 같다. 그럼에도 에드워즈의 청교도적 신앙에 대해 핵심을 잘 설명했다. 신앙의 좌소가 머리가 아니라 마음에 있음에 대해 강조했으며, 그러므로 설교는 지성이 아니라 마음에 강한 인상을 남겨야 한다는 것은 잘 지적했다. 또한 부흥시 인간의 미흡함이 있음을 잘 지적했다. 에드워즈에 의하면, 광신주의가 부흥에 끼어들어 부흥을 방해하고 종료시키는 것은, 부흥에 있어 당연하다. 이것은 다음과 같은 유익이 있다. 부흥은 인간의 노력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관하시며, 광신주의와 같은 가라지가 섞일 때 철저히 하나님께 의존하게 되기 때문이다. 또한 냉랭한 지성주의자들의 부흥에 대한 비난의 여지를 줌으로서, 그들의 지성의 한계를 나타낼 수도 있다. 즉, 부흥은 알곡과 가라지가 섞이는 것인데 그것을 구분하지 못하고 도매급으로 비난하는 것은 그들의 지성이 얼마나 허무맹랑한지를 시사해주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조나단 에드워즈의 성령론에 대해서는 좀 거칠게 다룬 부분이 있다. 에드워즈 목사님이 성령론을 강조한 것은 사실이다. 그 자신이 성령의 내주와 충만을 체험하신 분이다. 그리고 성령의 역사에 의해 거듭남을 체험한 것이다. 하지만 에드워즈 목사님은 성령의 은사는 초대교회이후 사라졌다고 보았다. 외적인 성령의 역사보다 내적인 성령의 거룩하게 하심의 역사를 더 중요하게 생각했기 때문이다. 또한 청교도 전통에서 서 있었기 때문에 성령의 외적 역사에 대해 비중을 두지 않았다. 또한 현대의 청교도주의자들인 워필드, 개핀, 후크마 등의 성령의 은사중단론은 에드워즈 목사님의 영향이 크다. 더나아가 그런 부분은 청교도 전통과 연계되어 있다. 하지만, 성령의 내적 역사는 현대 청교도주의자들도 인정했던 부분이라고 생각한다.

 

 

조나단 에드워즈 청교도 신학의 특성1)

 

김영한 교수

 

머리말

 

미국 뉴잉글랜드의 목회자요 신학자 조나단 에드워즈(Jonathan Edwards, 1703-58)는 다방면의 모습을 가지고 있다. 그는 목회자로서, 신학자로서, 문학자로서, 설교자, 영적 각성가로서 다양한 모습을 가지고 있다. 이 가운데서 청교도로서의 에드워즈의 모습이야말로 그의 모습을 총체적으로 보여준다. 하나님의 사람 에드워즈의 신앙과 인격과 삶은 핵심적으로 청교도 신학으로 특징지울 수 있다.

그의 설교는 이성우위의 계몽주의로 인해 영적으로 싸늘해 가는 뉴잉글랜드지역에 대각성운동을 일으켜 그 시대 사람들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되돌아오게 하는 데 공헌을 했다. 그의 각성 운동은 현대의 감정에 호소하는 인위적인 부흥운동이 아니라 하나님의 절대주권을 강조하는 철저한 청교도적인 사상에 근거해 있다. 현대의 청교도 신학자 패커(J. I. Packer)는 에드워즈를 “성경을 사랑하는 사람, 칼빈주의자, 가슴의 신앙을 가르치는 사람, 열정과 능력의 복음설교자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리스도를 사랑하고 죄를 미워하고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사람”으로 평가하고 있다. 청교도 신학 사상은 무엇보다도 에드워즈의 신학 사상을 가장 특징적으로 드러낸다고 말할 수 있다. 필자는 이 논문에서 그의 청교도 신학의 특징을 드러내고자 한다.

 

1. 청교도적 생애

18세기 미국 대각성운동의 기수인 에드워즈는 1703년 10월 5일 코네티컷(Connecticut)주 원저(Windsor)에서 청교도 목사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부친 디모데 에드워즈(Timothy Edwards)는 윈저에서 약 60년 동안 목회에 평생을 바친 목사로서 독자 요나단이 1758년 3월에 별세하기 직전 1758년 1월에 89세의 나이로 소천하였다. 아버지의 신앙은 매우 경건하였으며, 실천적이었다. 어머니 에스더(Esther Stoddard)는 역시 노스햄튼(Northampton)교회에서 소천하기 까지 목회하였던 스토다드 목사(Solomon Stoddard)의 딸로서 매우 영적인 분이었다. 이러한 가정의 청교도적 분위기 가운데서 요나단은 성장하였다. 그는 이런 시절 하나님께 헌신하고 숲 속에서 기도하고 명상하며 하나님과의 깊은 영적 교제를 체험하였다.

 

1739년 그가 쓴 [자서전적 이야기](Personal Narrative)는 가족 기대를 넘어서는 영적 관심을 보여주고 있다. 사내로서 그는 기독교적 삶의 의무에 깊이 매료되었다. “나는 하루에 다섯번씩이나 은밀히 기도하곤 하였다. 다른 아이들과 같이 종교적인 대화를 하는데 많은 시간을 보내곤 하였다. 나는 종교 속에 있는 기쁨을 알지 못하는 것을 경험했다. 나의 마음은 종교로 많이 심취되었다. 스스로 의로운 기쁨을 가졌고, 종교적 의무 속에 충만하는 것이 나의 기쁨이었다. 나는 약간의 학우들과 같이 연합하여 아주 한적한 장소, 늪지에 기도처소를 위한 오두막을 지었다. 그 외 나는 숲 속에 나 개인의 은밀한 처소를 만들고 거기에 스스로 퇴각하여 시시때때로 많은 은혜를 받곤 하였다. 나의 정서는 생동적이고 쉽사리 움직였다. 나는 종교적 의무 속에 있을 때에 나에게 맞는다고 생각하였다. 나는 많은 사람들이 이러한 정서에 속임수를 당하며 내가 종교 속에서 가졌던 그러한 종류의 기쁨을 은혜로 오인한다고 생각하기에 이르렀다.”2)

 

요나단은 1716년 13살의 나이로 예일대학교에 들어가 신학을 전공하고 존 로크와 뉴톤 사상을 알게 되고 1720년 17세 때 졸업하였다. 그후 예일대학에서 2년간 신학을 더 공부한 후 1723년 석사학위를 취득하였다. 임시목사로 뉴욕에서 교회를 섬긴 후 1724년 21살 예일 대학교의 강사로서 2년 동안 봉직한다. 1727년 외할아버지가 목회하는 노스햄튼 교회의 부목사가 되어 교회 섬기던 중 2년후 외조부가 별세하자 26세에 담임목사가 되어 23년 동안 목회한다.

 

에드워즈는 설교에 있어서 “절도있고, 꾸밈없으며 평범한 스타일”(modest, unadorned, plain style)에 도달하고자 노력하였다.3) 이러한 스타일에 있어서 그는 청교도적 모델을 따랐다. 설교자로서 그는 마음에 감동을 주고 행동에 옮기도록 가슴을 움직이도록 노력하였다. 그는 하나님에 대한 봉사의 태도에서 웅변적이고 과장하는 단어를 피하였다. 그는 말씀의 종으로서 그 자신에 대한 관심이 아니라 그가 봉사하는 하나님의 영광에서 벗어나지 않으려고 하였다.

 

에드워즈는 1750년 7월 1일 그가 영저 각성운동을 일으킨 노스햄튼 교회에서 사임하게 된다. 사임이유는 에드워즈가 여태까지의 교회의 의례적인 관습과는 다르게 세례받는 자의 공개적인 신앙고백과 성만찬에 참여할 자들에 대한 자격으로서 성화된 삶의 열매를 요구했기 때문이다. 이를 발단으로 교회는 목사 신임투표를 하게 되었는데 230:23이라는 현격한 표차로 불신임 받아 교회를 떠나게 되었다. 에드워즈의 불신임은 그가 단지 회중들 보다는 하나님을 더 기쁘게 하고자 하는데 있었던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에 대해서만 철저히 헌신하고 그에게만 순종하고자 하는 하나님의 종이요 하나님 사람, 청교도인 에드워즈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다. 그러나 노스햄튼에서 그의 업적은 이곳에서 1734년에서 1735년 사이에 일어난 놀라운 부흥이었다. 그리고 1740년 영국에서 온 조지 윗필드 목사 일행의 방문과 더불어 일어난 대각성 운동에 참여한 것이었다.

 

에드워즈는 그해 12월초 노스햄튼에서 약 60킬로 떨어진 스톡브리지(Stockbridge)의 인디언을 위한 작은 교회로부터 청빙을 받았다. 그는 1751년 8월초 비로소 가족과 더불어 노스햄튼을 떠나 스톡브리지에 도착한다. 스톡브리지교회는 에드워즈에게 최소한의 일을 맡김으로서 그는 보다 많은 시간을 연구와 저술활동에 몰두할 수 있게 되었다. 여기서 그는 인디언 선교와 왕성한 저술활동을 하게 된다. 그리하여 에드워즈는 1757년 뜻밖에도 프린스톤 대학의 전신인 뉴저지대학(New Jersey College)의 총장으로 부름을 받는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부족을 내세워 처음에는 겸허히 거절한다. 그는 1758년 1월 총장으로 취임한다. 취임설교로는 “그리스도의 불변성”이라는 제목을 가지고 그는 2시간동안 설교한다. 에드워즈는 신학교에서 가르치고 행정하면서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면서 자신의 마지막 시간을 즐거워하고 있었다. 그런데 당시 유행한 천연두에 대한 예방접종의 부작용으로 1758년 3월 22일 55세의 성숙한 나이로 3개월간의 총장재직을 뒤로하고 일생을 마감한다. 한참 일할 성숙한 나이로 에드워즈를 부르신 하나님의 뜻은 신비한 가운데 있다. 지금 미국 프린스턴에 은퇴하여 계시는 교회사가요 선교학 교수인 사무엘 마펫(Samuel Moffet) 박사를 만나 이야기 가운데 필자는 에드워즈의 죽음에 관하여 질문을 제기하였다. 마펫은 필자에게 하나님의 생각은 우리 인간의 생각과 다르다고 대답하였다.

 

2. 하나님에 대한 절대의존 사상

에드워즈는 구원을 하나님과 인간이 협력하는 작품으로 보는 아르미니안주의(Arminianism)를 정죄하며 이성의 힘에 의존하는 계몽주의를 하나님을 거역하는 것으로 규정했다. 그는 당시의 영국의 신학자들이 가지고 있었던 자유롭고 보편적인 시각을 수용했던 아르미니안주의가 참된 신앙의 근본을 훼손하는 것으로 보았다. 그는 당시 아르미니안주의가 주장한 신인협력설(synergism) - 영적 진리의 확신은 하나님의 역사이나 회개자체는 인간의 역사 - 은 하나님을 하나님보다 못하게 만들며,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의존을 부정한다. 그리고 구원에 있어서 결정적인 행동을 모두 인간 자신의 사역으로 간주하여 인간의 오만한 마음을 만족시킨다고 비난한다. 그리하여 신인협력설은 신앙에 자기 의존을 도입하여 신앙을 비신앙이 되게한다.4) 에드워즈는 당시 아르미니안주의를 거부한 청교도 사상을 그대로 수용하고 있다. 그는 자유하시고 전능하신 하나님에 대한 인간의 완전한 의존사상을 강조했다. 이것은 그의 신앙관과 신학전체를 지배하는 지도원리이다.

 

에드워즈는 하나님의 말씀에 전적으로 헌신하는 설교로써 잘못된 그 시대사조에 강력히 맞섬으로써 미국 대각성운동(Great Awakening Movement, 1735-37)을 일으켰다. 에드워즈는 신학자로서 구원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절대주권에 속한 것이며, 하나님의 긍휼과 사랑만이 이미 지옥에 떨어져야 할 죄인들을 선택된 백성으로 되게 하신다고 주장하였다. 그는 설교자로서 오로지 은혜와 오직 믿음을 강조하면서 동시에 인간의 전적 순종과 신뢰를 강조하는 말씀을 선포하였다.

 

그는 철저한 칼빈주의자였으나 과격한 예정론을 배격하였다.5) 구원을 향한 인간의 존엄성은 언급될 수 없으며 하나님의 구원역사에 인간이 조그마한 부분이라도 참여할 수 없다고 역설하였다. 그는 알미니안주의를 배격했다. 에드워즈는 예정과 인간의 행위와의 관계를 극단한 이율배반으로 표현하고 있다: “유효한 은혜 안에서 우리는 단순히 수동적으로 되는 것은 아니다. 그렇다고 해서 하나님께서 어느 정도 하시고, 나머지는 우리가 하는 것도 아니다.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하시고, 또한 우리가 모든 것을 한다.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산출하시고, 우리 또한 모든 것을 행한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산출하신 그것이 바로 우리 자신의 행동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유일한 주체시요, 근원이시다. 우리는 다만 합당한 행동자이다. 우리는 여러 가지 서로 다른 국면 속에 있다. 전적으로 수동적이면서 전적으로 능동적이다”.6)

 

그의 유명한 설교 “성난 하나님의 손 안에 든 죄인들“(Sinners in the hands of an angry God)에서 에드워즈는 다음같이 말하고 있다.7) ”하나님의 의지란 선하신 무한한 의지며 어떠한 의무에도 구속되지 않는 하나님의 자의적인 의지를 말한다.“ 하나님의 의지는 어떠한 형태의 어려움에도 방해를 받지 않으며, 그 하나님의 선하신 의지가 아니라면 한 순간이라도 악한 자들이 보전될 길이 없다” “하나님의 능력있는 손으로부터 피할 수 있는 요새나 방어진지는 없다”. “부패한 본성들이 악한 자들을 지배하고 있으며, 그들을 장악하고 있다. ...그 본성들은 점점 더 폭력적이 되어가는 속성이 있다. 만약 그것들을 눌러 억제하고 있는 하나님의 팔이 없으면 그것들은 즉시 파멸되어 버리고 말 것이다.” “죄인들을 저 세상으로 보내는 모든 방법들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손에 있습니다. 그리고 모든 방법들은 하나님의 능력과 결정에 절대적으로 복종한다.” 인간의 자유가 구원을 향하여서는 전혀 작용할 수 없음을 선언하였다. 에드워즈의 설교는 오직 영광을 받으시는 하나님께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그의 설교는 감동적이고, 열정적이며, 능력있는 설교였다. 설교란 그에게 따뜻하고 진지한 것이었다.

 

3. 신앙에 있어서 정서(affection, 情緖) 강조

에드워즈는 참된 경건이란 교리나 윤리가 아닌 특성으로서 역동적이고 외적 역사에 있어서 강력하게 경험적인 초자연적 은사로 본다. 경건의 근원이란 복음에서 말해지는 신령한 하늘의 일들의 실재와 영광에 대한 마음의 확신이다. 이러한 확신은 기록된 말씀에 수반하는 직접적인 신적인 조명의 결과이다.

하나님이 주시는 신령하고 초자연적인 빛에 의한 심령의 변화에서 선행과 거룩한 정서들이 나온다. 당시 이성주의자들은 이러한 정서들에 대하여 회의를 품었고 광신자들은 이 정서들을 망상으로 변모시켰다. 그리하여 에드워즈는 1746년에 “신앙감정론”(religious affection)에 대한 논문을 발표했다. 감정이란 의지의 근본적 기능이며, 행동의 근원이다. 그래서 ”참된 신앙은 큰 부분에 있어 거룩한 정서에 존재한다.“ 이러한 경건과 관련하여 에드워즈는 거룩한 정서에 관하여 말한다.

 

에드워즈는 그의 저서 <신앙감정론>에서 정서에 관하여 깊이있게 논구했다. 정서는 두 가지로 나누어진다. 가까이 접근하려는 경향과 싫어하며 멀어지려는 성향이다. 전자는 사랑, 기쁨, 소망 등의 감정이며, 후자는 죄에 대한 혐오감, 미움과 무서움 등이다.8) 기독교 신앙이란 머리의 신앙뿐만 아니라 마음의 신앙이다. 그는 냉정한 도덕주의를 거부한다. 그는 가장 거룩한 정서를 보여주는 인물로서 다윗을 제시한다.

 

“첫번째로 주목할 사람은 다윗이다. 그는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자’로서, 시편을 통해서 자기 신앙의 생생한 모습을 보여주었다. 그가 남겨놓은 거룩한 노래들은 다름아닌 경건하고 거룩한 정서들의 표현이요, 속삭임이다. 또한 하나님께 대한 겸비한 뜨거움이요, 하나님의 영광스럽고 완전하심과 놀라운 행사에 대한 찬양이요, 하나님을 향하여 영혼이 간절하게 사모하고 갈망하는 것들이다. 하나님 안에 있는 즐거움과 기쁨의 표현이요, 하나님의 위대한 선하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온전히 드려지는 감사하는 마음의 표현이다. 또한 하나님의 은총과 충분성과 신실하심 안에서 영혼이 거룩하게 승화되고 승리한 것의 표현이요, 성도들에 대한 그의 사랑과 즐거움의 표현이다”9)

 

그는 설교에서도 정서(affection)의 역할을 강조한다. 정서란 오성(悟性)으로 인한 이해와 실천의지 사이에 있는 것으로 본다. 이해는 인간을 감동시켜야 하며, 감동을 받을 때 사람은 의지를 가지고 행위로 나아가야 한다. 이해는 머리를, 감동은 가슴을, 의지는 실천을 요구한다. 이 세 가지 요소가 설교에서 요구된다는 것이다. 신앙의 좌소는 마음으로 보았기 때문에 인간의 마음을 감동시키지 않고, 의지의 결단이 이루어지지 않는 채 끝나는 설교는 아름다운 성도의 모습을 제시하지는 않는다. 에드워즈는 신앙은 지성적 이해에 있는 것이 아니라 마음에 있으며 그것은 정서로 나타난 것으로 보았다.

 

그는 자기의 영적 체험을 다음같이 서술한다: “1737년 어느 날 건강을 위해 나는 말을 타고 숲 속으로 들어가 호젓한 곳에 내렸다. 경건한 묵상과 기도를 하며 걷는 것은 흔히 하는 나의 습관이었다. 그날 나는 내게는 특이한 한 모습을 보게 되었는데, 그것은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중보자이신 성자의 영광과 그의 놀랍고, 크고, 충만하며, 순결하고 감미로운 은혜와 사랑 그리고 온유하고 부드러운 낮아지심이었다. 그토록 고요하고 감미롭게 나타난 이 은혜는 하늘보다 높게 보였다. 그리스도의 모습은 형언할 수 없이 탁월하여 모든 사상과 개념을 삼켜버리기에 충분했다. - 이러한 광경은 내가 판단하기로는 거의 한 시간 동안 계속되었다. 그래서 나는 눈물로 뒤범벅이 된 채 소리쳐 울게 되었다. 나는 영혼이 열심히 텅비어 사라져 버리는 느낌을 느꼈다. - 그리고는 티끌 속에 앉자 오직 그리스도만으로 충만해지고 싶고, 거룩하고 순수한 사랑으로 그리스도를 사랑하고 싶고, 그리스도를 의뢰하고 싶고, 그리스도를 의지하며 살고 싶고, 그리스도를 섬기며 따르고 싶었다. 거룩한 하늘의 정결로 완전히 깨끗해지고 정결해지고 싶었다. 나는 이외에도 몇 차례 이와 아주 유사한 모습을 보았다. 그것들도 역시 동일한 효과를 내게 미쳤다“.

 

“나는 여러 차례 성삼위의 제삼위 되시는 성령의 영광을 감지했고 거룩하게 하시는 그의 직무를 느꼈다. 그리고 그의 거룩하신 역사를 통해서 영혼에 하나님의 빛과 생명을 전달하시는 것을 의식했다. 하나님께서는 성령의 교통하심을 통해서 신적 영광과 상쾌함의 무한한 샘으로 나타나셨고, 충만하며 내 영혼을 채우고 만족하게 하시기에 충분하신 분으로 나타나셨다. 그리고 은밀한 교통을 통해서 자신을 부어주셨고, 영광의 광채로 빛나는 태양처럼 생명과 빛을 달콤하고 즐겁게 나누어 주셨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이, 생명의 말씀과 빛으로 달콤하고 탁월하게 생명을 주는 말씀으로서 그 탁월함을 감지했다. 그때는 말씀을 간절히 갈망하는 심정도 함께 따라왔고 말씀이 내 마음 속에서 풍성하게 거할 수 있기를 간절히 바라는 마음도 수반했다“10) 이러한 영적 체험에 기초한 에드워즈의 신앙은 거룩한 정서에 기초하고 마음에 그 자리를 가지는 것이었다.

 

그는 말한다: “참된 덕이나 거룩은 본질적으로 머리보다도 마음에 있다는 것을 누구나 인정할 것이다. 그러므로 이것에서 나오는 필연적인 귀결은, 참된 덕이나 거룩은 주로 거룩한 감정에 있다는 것이다. 신앙에 속하는 것들은 사람의 마음에서 일어난다. 참된 덕이나 거룩에 영향을 받는 것은 아니다. 이해력이 주는 지식은 소용이 없다. 마음에 영향을 주지는 못하고 감정도 영향을 주지 못한다. 신앙에 있어서 고양된 감정을 가벼이 취급하는 신자들은 의심할 여지없이, 참된 신앙과 거룩은 마음에 자리를 잡고 있으므로 영혼 속에서 높은 차원의 일들과 활동을 할 수 있다고 믿을 것이다.”11)

 

이처럼 신앙을 마음에 자리잡는 것을 봄으로써 에드워즈는 설교란 지식의 전달이 아니라 마음에 “인상”을 남기도록 “뜨거워야 하고” “열정적이어야 하고”, “진지해야 하고” “능력이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설교의 강조점을 뜨거움과 감정에 두었다.

 

1742-3년의 [종교적 정서에 대한 논문](Treatise on the Religious Affections)에서 에드워즈는 세 부분으로 종교적 정서를 논하고 있다. 제 1부는 부흥을 반대하는 사람들이 감정이나 열정을 거부하는 데 대하여 정서가 종교에서 합당한 자리를 지니고 있다는 사실을 밝힌다. 제 2부는 “종교적 정서나 감정이 진정으로 은혜롭다거나 은혜롭지 않다는 것을 보여주는 표징은 없다”는 것을 밝힌다. 감정은 진실과 진리의 긍정적인 면과 부정적인 면을 모두 다룬다. 유창함이나 열렬함이 진실성이 표징은 아니다. 제3부는 진정으로 은혜롭고 거룩한 정서의 표징을 보여준다. “은혜로운 감정은 신적 영향에서 나온다.” “감정의 목적은 하나님께 속한 것들의 탁월성을 보여준다.” 이러한 종교적 체험에 있어서 에드워즈는 하나님의 지혜에 굴복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척도로 삼는 대신 한편으로는 자기의 체험을 척도로 삼아서 황홀경이나 영적 체험을 마귀에게 속한 것으로 간주하는 정통주의자들에게 성령을 소멸하거나 모독하지 말라고 경고하고 그리고 다른 편으로는 이러한 영적 충동에 순응하려는 광신자들을 경고했다.

 

4. 성령의 지속적 사역 강조

에드워즈는 성령이 사도시대 이후 오늘날에도 그의 교회에 역사하는 것을 믿었다. 그는 언약신학(covenant theology)을 믿었다. 그러나 불충분한 언약개념 - 언약에 대한 실천이 없는 자의 구원을 믿는 신앙 - 을 거부했다. 이것이 1750년 그가 그토록 오랫동안 섬기던 교회에서 불신임당해 물러나는 원인되기도 하였다.

그는 성화의 열매가 없는 신자의 자녀들에게 세례를 주지 않으려 했고 성찬에 참여할 수 있는 사람의 행동과 행위기준을 제시했다. 거기다가 그는 학습준비교육을 전혀 하지 않으려 했다. 이점에서 그는 청교도신학자 존 코튼(John Cotton)의 입장에 섰다. 에드워즈는 다음같이 말한다. “사람이 천국에 갈 자격과 권한을 얻는 것은 위대한 신적 감화를 단번에 엄청난 변화를 받음으로써이지, 사람들이 자신의 노력을 행사함으로써 이루어진다고 생각하는 점진적 변화에 의한 것이 아니다”12) 그는 부흥성회의 경험을 통해서 성령의 직접적이고 즉각적인 영향력과 갑작스럽고 극적인 회심을 믿었다. 그는 영국의 청교도사상을 네델란드에 전해주어 독일 개혁파 경건주의 태동에 영향을 준 윌리암 에임즈(William Ames)의 저작을 읽고 설교시 에임즈의 가르침을 많이 인용했다.13)

 

이러한 에드워즈의 성령의 지속적 사역의 견해는 개혁교회 정통주의에 의하여 차단된 성령의 사역에 대한 성경적인 청교도적인 수정을 해 준다. 현대의 정통주의 신학의 전통에 속하는 화란의 개혁주의 신학자 아브라함 카이퍼, 미국의 장로교 신학자 벤자민 워필드, 그랜드 래피즈 소재 칼빈 신학교의 은퇴 교수인 후크마(Anthony Hoekema)와 필라델피아 소재 웨스트민스터 신학교 신약 교수인 개핀(Richard Gaffin) 등은 성령사역을 제한시키는 은사중단설을 주장하기에 이르렀다.

 

카이퍼는 1888년「성령의 역사」(The Work of Holy Spirit)라는 저서에서 오순절 성령 강림을 단회적 사건으로 규정하고, “쏟아 부으심”(uitsorting)을 강조하여 오순절에 성령이 단번에 다 부은 바 되었고 이미 오셨다(kwam)고 주장하였다. 그러므로 카이퍼에 의하면 오순절 성령 강림은 다시 되풀이될 수 없다. 카이퍼는 “교회가 성령 강림의 반복을 기원하는 기도를 오순절에 드리는 것은 무의미하다”고 말한다.14) 워필드도 카이퍼의 성령관과 맥을 같이하여 예언, 방언, 병 고침 등의 특별한 은사는 사도 시대에 끝났다고 본다. 그는 1918년「가짜 기적」(Counterfeit Miracles)을 출판했다. 여기서 워필드는 “기적을 일으키는 교회”(a miracle-working church)인 것은 사도적 교회에 가장 합당하나, 기적적인 종류의 영적 은사들(charismata)은 “사도적 교회와 함께 불가피하게 지나가 버렸다”고 말한다.15)

 

후크마(Anthony Hoekema)는 「방언에 대한 견해」(What About Tongue Speaking?)에서 특별한 은사는 사도 시대와 더불어 끝났다고 하는 워필드의 견해를 되풀이하고 있다. 그는 방언(glossolalia) 체험의 여러 형식을 평가한 후에 방언이란 “심리주의적으로 설명될 수 있으며 일반적으로 영적 현상이 아니다.”라고 결론내리면서 “오늘날 우리가 보는 방언은 대부분이 성령에 의해 직접적으로 영감되지도 사탄에 의해 직접적으로 도출되지도 않았다. 그것은 심리주의적으로 도출된 인간 반응이다.”16)이라고 주장한다.

 

개핀(Richard Gaffin)도 그의 저서「오순절 사건에 대한 전망」(Perspectives on Pentecost, 1979)에서 카이퍼의 견해에 따라서 오순절 성령 강림의 단회성을 주장하며, 워필드의 견해를 수용하면서 초자연적 은사는 사도 시대와 더불어 끝난 것을 주장한다. 개핀은 오순절에서의 성령 강림은 단회적으로 일어난 사건으로서 다시 반복될 수 없으며, 성령의 세례는 처음 믿을 때 이 단회적인 오순절 사건에 경험적으로 참여함으로써 받은 것으로 보고, 방언과 예언 및 각양 은사들은 사도 시대와 더불어 지나가버린 것으로 본다.17)

 

이러한 은사중단론 때문에 개혁교회는 신론이나 기독론에 대부분의 분량을 할당하고 성령론은 아주 빈약한 분량을 할당하였다. 이러한 개혁교회의 성령론에 대하여 에드워즈는 이미 예언적으로 예시하고 있다. 에드워즈의 저서 [하나님의 성령역사의 두드러진 표시](The Distinguishing Marks of a Work of the Spirit of God, 1741)에 서문을 쓴 당시의 목회자 쿠퍼(W. Cooper)는 다음같이 밝히고 있다. "그러나 그동안 개혁교회들이 얼마나 죽어 있었고, 얼마나 메마른 상태에 있었는가? 황금의 소나기가 멈추었다. 성령의 감동이 중단되었던 것이다. 그 결과 복음은 탁월한 성공을 전혀 거두지 못했다. 회심도 드물었고 정말 그러한 일이 있는 지 의심스러울 정도였다. 하나님의 자녀로 태어나는 사람들이 거의 없었고, 그리스도인의 마음도 그전처럼 깨어 있거나 뜨겁거나 규례 등을 통해서 새로워지지도 않았다. 이것이 수 년 동안 이 나라에 사는 우리들의 서글픈 신앙상태였다 (때때로 긍휼의 소나기가 내렸던 특이한 한 두 장소로 제외하곤 말이다. 그 밖에 다른 마을들과 교회들은 그러한 비를 받지 못했다)“18) 에드워즈는 영적 각성을 통해서 전도는 바로 이루어진다고 보았다. 부흥 시에 성령의 능력이 운행함으로써 사람들에게 세속과의 결별 그리고 하나님을 향한 결단이 수행된다. 여기서 그리스도를 향한 결단이라는 종교적 정서가 수반되는 것이다. 성령의 부어주심으로 부흥은 일어나며, 신앙 공동체는 새롭게 되는 것이다.

 

5. 말씀 중심의 신학과 목회

 

에드워즈는 당시 신앙적으로 해이해지고 있는 뉴잉글랜드의 영적 상황을 향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있는 그대로 선포했다. 에드워즈의 유명한 설교 “성난 하나님의 손 안에 있는 죄인들”(Sinners in the hands of an angry God)은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하고자 하는 데서 작성된 설교였다. 그는 죄 가운데 죽어가고 있는 사람들에 대하여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을 경고하는 성경의 말씀을 그대로 믿었다. 에드워즈는 그것은 자기 말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믿었다. 1920년대 초반 미국에서 진화론을 가르치다가 “원숭이 재판”에 회부된 과학교사 스코프스(Scopes)를 변호한 다로우(Clarence Darrow)는 다음같이 썼다. “에드워즈가 세상에서 한 일은, 주로 어리석은 아녀자들을 겁주고 자기가 섬긴다고 고백한 하나님을 모독하는 것이었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혼동되었거나 병든 생각을 가진 사람이 아니고야 어찌 그와 같이 ‘진노의 하나님 손에 있는 죄인들'이라는 설교를 할 수 있겠는가?“19)

에드워즈 당시에 그의 설교를 향하여 쏟아진 비난들에 대하여 에드워즈는 다음같이 대답하였다. “만일 사역자들이 더 많은 빛을 비추고 진상을 보다 더 잘 이해함으로써 사람들을 두렵게 한다면, 그것은 전적으로 정당한 일이다. 성령에 의하여 양심이 크게 각성을 받는 것은 비추어진 빛 때문인데, 이 빛으로 인하여 사람들은 어느 정도 자기들의 실상을 알게 된다. 만일 더 많은 양의 빛을 비추면, 그들은 더 크게 무서워하게 된다. 그러나 양심에 더 많은 빛을 비추려 한다든지, 이미 비추고 있는 빛을 가리거나 방해함으로써 그들이 당하고 있는 고통을 경감시키지 않는다고 사역자들을 비난해서는 안된다. 주 예수 그리스도를 전혀 믿지 아니하는 사람을 향하여, 그가 처한 상황이 엄청나게 무섭다는 것을 말하지 않고 다른 것을 말한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말씀은 오직 진리만을 밝히기 때문이다. 그러한 행위는 그들을 기만하는 것이다.”20) 에드워즈는 말씀의 사람으로서 그에게는 영적인 것이 언제나 지적인 것을 통제했다. 그는 자기의 철학이나 사변을 성경에 굴복시켰고, 그것들을 단순히 종으로 여겼다. 모든 것을 하나님의 말씀에 복종시켰다.

 

6. 신앙의 영적 각성 필요성 강조: 신앙부흥의 신학

 

에드워즈는 30대에 쓴 초기저술에서 신앙부흥을 옹호하고 있다. <노스엠튼과 이웃도시와 마을의 수백명의 영혼들의 회개에 나타난 하나님의 놀라운 일에 대한 서술<( A Narrative of a Surprising Work of God in the Conversion of many hundered souls in Northampton and the neighbouring Towns and Villages, 1735), <하나님의 성령역사의 두드러진 표시](The Distinguishing Marks of a Work of the Spirit of God), 1741) [1740년 뉴잉글랜드의 신앙부흥운동에 대한 생각>(Thoughts on the Revival of Religion in New England in 1740, 1742), 그리고 <종교적 정서에 대한 논문>(Treatise on the Religious Affections, 1742-43)에 설교되고 1746년에 출판됨)들이다.

 

이 초기 저작에서 에드워즈는 신앙부흥이 단지 광신주의의 소요에 불과하다는 당시의 비난에 대하여 그것이 하나님의 역사라는 것을 완벽하게 변호하고 있다. 그리고 신앙부흥에 대한 두 가지 오해를 제시한다. 첫째는 종교적 감정에 대한 오해이다. 신앙부흥은 종교적 감정을 불러일으킨다는 것이다. 종교적 감정의 외적 표현 - 땅바닥에 엎드리는 것, 환상을 보는 것, 무아경에 빠져 찬송하는 것 등- 은 성령뿐만 아니라 마귀도 이러한 외적 형태를 만들 수도 있다. 마귀도 종종 기만적 광신주의 운동을 통해서 교회를 파괴하는 역사를 해왔다. 둘째는 낭만주의적 오해이다. 신앙부흥이 일어나면 모든 문제를 해결하고 교회의 모든 어려움을 제거하고 더 이상 우리를 머리 아프게 하는 것이 없다는 상상하는 것이다.

 

신앙부흥에 대한 에드워즈의 연구는 이러한 두 가지 착오에 빠지지 말아야 할 것을 알려준다. 에드워즈는 첫째, 성경적 원리에 눈을 돌리게 됨으로써 종교적 정서가 올바른가 아닌가를 판별할 수 있다. 둘째, 우리의 문제에 대해 지속적으로 주의함으로써 낭만적인 그릇된 생각에서 벗어날 수 있다. 에드워즈는 주장하기를 사단은 세상에서 가장 훌륭한 신학교에서 교육받은 자이기 때문에 하나님과 같이 보조를 맞추면서 창조주께서 행하시는 모든 것을 적극적으로 변질시킨다. 신앙부흥 운동은 항상 흠이 있는 하나님의 역사이다. 그것은 비록 하나님의 정화하시는 역사이지만 절대로 부수적인 결함이 없는 것은 아니다. 신앙부흥운동이 강력하면 할수록 더 많은 불명예스러운 흠들이 있다. 그래서 제한된 영적 통찰력을 가지고 있는 상당한 지위에 있는 목회자나 교인들이 신앙부흥운동을 무절제하다는 이유로 가혹하게 반대하는 것을 볼 때 놀랄 이유가 없다. 에드워즈는 자신이 대각성운동을 통해서 이러한 경험을 하였다. 그는 1741년에 “거침돌 없는 하나님의 역사는 절대로 기대할 수 없다. 우리는 아마도 신앙고백자들 가운데 더 많은 배교와 지독한 부정의 행위의 실례를 보게 될 것이다”21)

 

에드워즈는 신앙부흥의 본질에 대한 내적 원칙과 외적형태에 원칙을 제시한다.

 

<1> 신앙부흥의 본질에 대한 내적 원칙

첫째, 신앙공동체 내에서 경건의 활력을 되살리는 성령 하나님이 행하시는 비상한 역사이다. 열매가 없이 잠자고 죽어가고 있는 신앙 공동체에 대하여 성령께서 일깨우심으로 영적 감각을 되살리신다. 성령의 부어주심에 의하여 신앙이 부흥된다.

에드워즈는 요한일서 4장 1절을 주석함으로써 신앙부흥의 본질에 대한 내적 원칙을 제시한다. 1>십자가의 예수를 높이고 그가 구주요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선포할 때 그것은 올바른 신앙부흥이다. 이에 반해서 마귀는 그리스도를 존경하지 않고 그리스도 구속의 내용과 교리를 죽도록 증오한다. 2>성령의 역사는 인간들의 세상에 대한 기쁨과 소득과 존경을 작게 하고 미래의 신분과 영원한 행복에 대한 관심을 일깨운다. 죄의 무서움과 죄책과 죄의 비참함을 드러낸다. 미혹의 영은 죄를 품게 하고 세상 정욕을 품게 하고 인간의 모든 타락과 정욕을 만족시킨다. 3>성경에 대한 존경을 일으키고 진리 가운데 거하도록 하는 것은 성령의 사역이다. 마귀는 하나님 말씀에 대한 존경이 생겨나도록 하지 않는다. 그리고 성경에 기록된 하나님의 뜻을 구하도록 하지도 않는다. 4>하나님이 살아계시고 하나님은 위대하시고, 죄를 미워하시고, 인간이 본성과 실행에 있어서 죄악되며 무력하다는 사실을 깨닫도록 하는 영은 진리의 영이다. 미혹의 영은 이 사실을 부인한다. 5>그리스도의 뛰어나심과 독생자를 주신 하나님의 위대한 사랑을 말하고 죄인이여 원수인 우리를 대신하여 죽으신 그리스도의 대속의 사랑을 말하는 영인 성령이다. 6>사람들 가운데 다툼을 가라앉히고, 평화 친절의 정신을 주시는 영, 영혼의 구원에 대한 진지한 열망을 주시는 영은 하나님의 성령이다.

 

에드워즈가 제시하는 신앙부흥의 기준은 모임의 소동이나 무질서와 괴로움을 야기시키는 소란이 아니라 이러한 여섯 가지의 열매가 있는가 하는 것이다. 성부와 성자, 성경과 성경의 가르침에 대한 믿음과 사랑, 타인들에 대해 유익을 주는 선행이 나타나기 시작하는 곳에 신앙부흥이 있다고 단정한다. 에드워즈는 그의 저서 “신앙부흥에 대한 생각”(I:v)에서 그의 부인 사라의 경험을 예로 든다: "영혼은 빛과 사랑, 말할 수 없이 달콤한 위로와 영혼의 안식과 기쁨 가운데 완전히 압도되고 빨려들어 갔다. 이 큰 기쁨은 전율과 함께 하였다. 즉 하나님의 위대하심과 존엄에 대한 생생한 의식과 인간 자신의 극도로 작고 미천함에 대한 생생한 의식이 동반했다. 구속역사의 영광과 예수 그리스도에 의한 구속의 방법에 대한 압도적인 의식이었다.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를 찬양하며, 이 현세의 삶이 하나님께 드리는 계속된 찬송이 되기를 열망하며 큰 기쁨을 느꼈다.“ 22)

 

둘째, 신앙부흥은 하나님 나라의 확장이다. 이 하나님은 나라는 그리스도께서 갈보리에서 구속을 이루시고 그의 왕국의 승리를 통해서 실현된다. 이 하나님 나라의 확장과 실현을 위해 하나님은 성령을 보내어주시는 것이다: "하나님은 영원부터 자신의 사랑하시는 독생자를 영화롭게 하실 결심을 마음속에 갖고 계셨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그 목적을 위해 정하신 몇몇 특별한 시기들이 있는 데 하나님께서는 그 시기를 가운데 성자께 하신 자신의 약속을 성취하기 위해 전능하신 능력으로 나타나신다. 지금은 성령을 놀랍게 부어주심으로 그 나라를 발전시키는 때요, 성령의 능력의 시대다.“23) 에드워즈는 신앙부흥의 근거를 피니(Charles Finney)처럼 인간의 노력이 아니라 성부께서 성자를 영화롭게 하시고자 하는 영원한 결심에서 찾고 있다. 여기에 그의 칼빈주의적 신앙부흥관이 있다. 후천년주의자인 에드워즈는 성령의 부어주심으로 지구촌 각 지역에 전례 없이 선교가 진행되며 교회에 강력한 신앙부흥이 있을 것을 확신하였다.

 

셋째, 신앙부흥은 세상에서 행하시는 하나님의 모든 역사 중 가장 영광스러운 역사이다.

그는 피력한다: “이러한 역사는 그 본질과 본성에 있어서 하나님의 어떠한 역사 중에서도 가장 영광스러운 역사이다. 이 역사는 구속의 역사이며, 하나님의 모든 다른 역사들의 대 결말이며 이 역사에 비해 창조의 역사는 그림자에 불과하다. 이 역사는 옛 창조보다 무한하게 더 영광스러운 새 창조의 역사이다. 나는 한 영혼의 회심에서 하나님의 역사는 물질세계 전체의 창조보다 더 영광스러운 하나님의 역사라고 담대하게 말한다”24) 에드워즈는 뉴잉글랜드 지방의 대각성운동에 무관심하거나 기독교가 다른 문제에 전념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자들은 부끄러워해야 한다고 말한다. 왜냐하면 이들은 죄인을 구속하시는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역사를 과소평가하고 외면하기 때문이다.

 

<2> 신앙부흥의 외적 형태에 대한 원칙

에드워즈는 신앙부흥을 혼합역사라고 말한다. 그에 의하면 사단의 가라지는 철두철미하게 하나님의 알곡에 끼어든다. 이것은 하나님의 역사의 영광을 더 분명하게 한다. 하나님은 신앙부흥이 인간의 공로가 아니라 하나님 자신의 은혜의 사역에서 일어나는 것임을 보여주시기 위해서 인간의 약점과 죄가 참견하는 것을 허용하신다.

 

그는 피력한다: "하나님은 ...은혜의 역사를 시작하실 때 상당한 오류를 허용하시고 그들의 연약함이 나타나는 것을 용납하신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다루시는 방법이다. 그 이유는 그 역사의 시작에 인간의 엄청난 약점이 나타남으로 하나님께서 인간의 힘이나 지혜를 그 역사의 기초로 하지 않으신다는 것이 분명하게 드러나기 때문이다.“25)

 

“하나님의 능력과 은혜의 영광은 토기의 연약함과 동시에 나타남에 의해 더 큰 광채로 돋보인다. 대상의 연약함과 무가치함을 나타내시는 것이다 동시에 당신 능력의 뛰어남과 당신의 은혜의 풍성함을 나타내시는 것이 하나님의 기쁨이다.”26)

 

사단은 신앙이 부흥된 신자의 감정을 이용하여 기존 질서에 대하여 비판하고 성령은 자유롭게 역사한다고 유혹하며, 순간적인 충동의 자발성이 영성의 최고형태이며 조건이라고 미혹한다. 그리고 신자로 하여금 직접적인 지시와 영감으로 그들을 현혹하여 그들 마음 속에 나타나는 모든 생각과 성귀가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메시지라고 미혹한다. 이것이 바로 신앙부흥이 진행될 때 사단이 사용하는 통상적인 방법이다.

 

에드워즈에 의하면 신앙부흥의 외적 현상을 관찰하면 겉치례적이고 무분별하고 방종적이고 광신적 요소를 발견할 수 있다. 그러나 모든 소란과 무질서 가운데서 “하나님의 성령이 역사하고 있는 뚜렷한 표식들”이 있는 것을 관찰하면 그것은 성령의 역사라고 인정할 수 있어야 한다고 말한다. 에드워즈는 신앙부흥이 교회전통적으로 생각할 때 그 외적 모습이 조잡함과 엉뚱함 때문에 하나님의 역사가 아니라고 배척하는 경우가 있다는 사실을 주지시키고 있다. 에드워즈는 세계적인 신앙부흥을 위하여 기도하는 것은 신자의 의무라고 했다.

1차 대각성운동은 1735-1745년에 일어났고 2차 대각성운동은 1790년에 꽃피었다.

 

7. 불신자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의 설교

에드워즈는 불신앙자를 지옥에 던져 넣으시는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을 강조했다. 에드워즈는 당시 영국출신 조지 휫필드(George Whitefield, 1714-1770)와 더불어 ‘대각성운동’을 일으켰고 이 운동에 그의 유명한 설교 “성난 하나님의 손 안에 있는 죄인들”(Sinners in the hands of an angry God)은 큰 영향력을 주었다. 본문은 “그들의 실족할 그때에 갚으리로다”(신 32:35)이다. 이 설교는 에드워즈가 38세 되는 1741년 7월 8일 미국의 엔필드(Enfield)에서 선포한 설교이다. 역사적으로는 ‘대각성운동’ 시작된 지 7년째 되는 해에 행해진 설교로서 이 설교를 들은 많은 회중들에게서 회개의 역사가 일어났다.27) 이 설교는 에드워즈가 행한 설교 가운데 최고의 설교이면서 동시에 그 어느 누구의 설교보다도 감동적인 위대한 설교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이 설교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첫째, 지옥의 실재성과 심판 그리고 악마의 실재성을 말하고 있다. <1> “하나님은 패역한자들을 지옥에 던져버릴 수 있는 있을 뿐만 아니라 아주 쉽사리 그렇게 하신다.”

<2> “패역한 자들은 지옥에 던져져야 한다. 하나님의 공의가 살아 있기 때문이다”

<3> “하나님의 공의의 법이 패역한 자들에 대하여 이미 지옥행 판결을 하였다”

<4> “지옥의 불구덩이는 이미 마련되어 있다” “용광로는 이제 뜨겁게 달아 있으며 그들을 받아들일 준비가 완료되어 있다”

<5> “악마는 하나님께서 허락하시는 순간에” “패역자들을 자신의 소유로 삼아 지옥으로 삼키고자 한다”

<6> “육적인 인간들의 본성은 지옥고통의 토대가 된다” “부패한 본성들은” “지옥불의 연료가 된다” “죄악을 억제하지 못한다면, 그 영혼은 달아오른 용광로, 또는 유황불못으로 들어간다.”

<7> “회개하지 않은 자들은 지옥 구덩이를 덮고 있는 약한 뚜껑 위를 걷고 있으며, 그 뚜껑에는 그들의 무게를 견디지 못하고 무너져 내리게 될 지점들이 수없이 많다”

<8>“삶을 보전하기 위한 육적인 인간들의 신중함이나 보살핌은 그들의 삶을 한 순간도 안전하게 지켜주지 못한다” “갑자기 예기치 않은 죽음을 당할 수 있다.”

<9> “그리스도를 거부하는 한” “지옥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인간의 계략은 스스로를 속이는 것이다”. “죽음이 예기치 않게 오기 때문에 피할 겨를이 없다.”

<10> “육적인 자들은 지옥 구덩이 위에서 하나님의 손에 매달려 있다. 그들은 불타오르는 구덩이에 마땅히 들어가야 할 자들이며, 그러한 판결은 이미 선고되어 있다”

 

둘째, “적용”(application)에서 지옥을 구체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지옥은 “처참한 세계, 펄펄 끓어오르는 유황불못”, “하나님의 진노의 불꽃이 이글거리며 타오른 곳”이다. “거대한 진노의 용광로며 진노의 불꽃이 이글거리는 넓고 바닥이 없는 구덩이”이다.

 

셋째,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의 구체성을 말하고 있다.

<1> 진노란 “무한하신 하나님의 진노”요 “만왕의 왕의 진노하심으로서” 사람들이 무서워하는 지상의 왕들의 진노보다 “훨씬 더 무시무시한 것이다”

<2> 하나님은 죄인에 대해 마치 “진노의 포도주 틀을 밟듯이” 그의 진노의 맹렬함을 쏟을 것이다. “지금은 자비의 때이다”. “이 때가 지나가면 하나님의 진노의 폭풍이 순식간에 닥칠 것이다”

<3> “당신이 계속해서 회개하지 않는다면” “하나님의 무시무시함이 말할 수 없는 고통으로 당신에게 임할 것이다”

<4> “이 진노는 영원한 것이다...당신은 영원토록 그 고통을 당해야만 한다. 그 격렬한 고통은 끝이 없을 것이다”

 

에드워즈는 결론으로 회개하지 않는 죄인에 대해 마련된 이 지옥의 무서운 저주와 고통과 형벌을 말하면서도 “특별한 기회”를 말하고 있다. 그것은 회개하고 그리스도의 피로 죄 씻음을 받는 것이다. 지금은 아직도 회개하여 “주님에게 받아 여지는 큰 은혜의 때”이다. 그러나 회개하지 않는 자에게는 “이 때가 엄청난 보응의 때가 될 것이다.” 에드워즈는 역설한다. “그러나 그리스도 밖에 있는 모든 자들은 이제 깨어서 다가오는 진노의 심판을 피하도록 하시오.”

 

이 설교가 너무 강렬하고 충격적이라는 비난은 당시에도 있었다. 이 설교에 대해 자유주의자들이나 무신론자들은 비난하기를 주로 어리석은 부녀자들을 겁주고 그가 섬긴다고 하는 하나님을 모독했다고 한다. 이에 대하여 에드워즈는 다음같이 답변했다: “실제로 목사들이 진실 아닌 것을 가지고 사람들을 공포가운데로 몰아가는 일, 또는 과장하는 경우, 사실과는 다른 경우에는 마땅히 비난받아야 한다. 그러나 목회자들이 보다 더욱 진리의 빛을 비추어서 그들의 진상에 의해서 두려워하다면 이는 전적으로 정당한 일이다.”28)

 

맺음말

에드워즈는 열정적인 경건과 심오한 지성을 조화롭게 통합시킨 탁월한 신학자요 철학자요 하나님의 사람이었다. 그의 청교도 사상은 하나님의 절대주권의 신앙 속에서 성령의 현재적인 사역을 믿는 삶과 신앙이 통합된 사상으로 특징화 될 수 있다. 현대의 청교도신학자 로이드-존스(Lloyd-Jones)는 청교도들을 알프스, 루터나 칼빈을 히말라야에 비유한다면 에드워즈는 에베레스트산에 비유된다고 말하였다. 그는 에드워즈를 많은 점에 있어서 사도 바울을 닮은 사람으로 그리고 있다. 휫필드(G. Whitefield)나 다니엘 로랜드(Daniel Roland) 모두 능력있는 설교자이지만 에드워즈는 능력있는 설교자 외에 이 두 사람이 가지지 아니한 지성이나 신학과 철학에 대한 탁월한 이해력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당시 옥스퍼드나 캠프리지에 비하여 미진한 예일에서 공부했으나 그는 강한 지성을 발하고 명석한 상상력과 놀라운 독창성을 수반하고 있었으며 가장 정직한 주석을 했다. 그리고 빛나는 재능과 더불어 겸손과 온유, 탁월한 영성이 있었다. 그리하여 열정적인 경건과 심오한 통합된 지성을 조화시켰다. 그는 탁월한 부흥의 신학자요, 체험신학자요, 심정의 신학자였다.

 

그는 반지성주의자가 아니라 성령으로 불타고 성령의 충만한 지성의 소유자였다. 그는 두 전선에서 싸웠다. 신앙부흥에 대하여 하나는 정통주의자들의 반대였고 다른 하나는 광신주의자의 극단이었다. 전자는 감정을 싫어했고, 후자는 극단적으로 치우쳐 어리석음의 죄를 범했다. 에드워즈는 불타는 신학을 했고 그에게서 교리들은 단순한 이론이 아니라 성령의 불로 뜨거워져 있다. 에드워즈의 생애와 신학은 하나님의 영광을 추구했으며 우리 성도에게 약속된 복된 소망을 구체적으로 보여주었다. 그의 청교도 신학은 한편으로는 하나님의 말씀을 객관적 진리로서 제시함으로써 포스트모더니즘에 의하여 다른 한편으로는 성령의 지속적 사역을 강보함으로써 은사중단론에 의하여 신앙의 토대가 도전받고 있는 오늘날 개혁교회의 신앙과 신학에 여전히 활력의 방향을 제시한다.

 

주석

1) 본 연구는 숭실대학교 교내연구비의 지원에 의하여 이루어졌음.

2) Dale &Sandy Larsen, Jonathan Edwards. Renewed Heart, InterVarsity Press, Downers Grove, Illinois, 2002,, 1:14-15

3) Ralph G. Turnbull,, Jonathan Edwards The Preacher, Baker Book House, Grand Rapids, 1958,, 56

4) J. C. Packer, Among God's Giants. Aspects of Puritan Christianity. 박영호역, 청교도 사상, 기독교문서선교회, 422쪽

5) M. Lloyd-Jones, The Puritans, 1987, Edinburgh, 서문강역, 청교도신앙, 생명의 말씀사, 356쪽

6) D. M. Lloyd-Jones, The Puritans, 서문강역, 청교도신앙, 생명의 말씀사, 367쪽

7) Jonathan Edwards, "Sinners in the Hands of an angry God", in: The Works of Jonathan Edwards with a momoir by Sereno E. Dwight revised and corrected by Edward Hickmann, The Banner of Truth Trust, Pennyslvania 1995 (reprinted), Vo.2, 7-12 그리고 Jerry Falwell(edit.), 25 of the Greatest Sermons ever preached, 25편의 명설교, 생명의 말씀사, 1989, 10-25쪽

8) Jonathan Edwards, Faith and Affection, 서문강역, 신앙과 정서, 43-44쪽

9) Jonathan Edwards, Faith and Affection, 서문강역, 신앙과 정서, 44쪽

10) D. M. Lloyd-Jones, op. cit. 368쪽

11) D. L. Lloyd-Jones, op. cit. 368-369쪽

12) J. Edwards, Works II:557

13) Ralph G. Turnbull, Jonathan Edwards The Preacher, Baker Book House, Grand Rapids, 1958, 53

14) 카이퍼는 다음같이 말한다: “누구든지 그것을 위해 기도하는 자는 결국 오순절 이적을 부인하는 것과 같다. 왜냐하면 이미 오셨고 우리 가운데 계신 이는 또 다시 우리에게 올 수 없기 때문이다”(.A. Kuyper, Het Werk van den Heiligen Geest, 1888, p. 180. 영문판, 1900, 재판, 1946)

15) 그의 저서 「가짜 기적」(Counterfeit Miracles, 1918)은 [기적들:어제와 오늘, 참과 거짓](Miracles:Yesterday, and Today. Real and Counterfeit (Grand Rapids, Mich.:Eerdmans, 1965)]이라는 제목 아래 재출판 되었다. 재판. pp. 5-6 그리고 p. 21이하.

16) A. Hoekema, What About Tongue Speaking?(Grand Rapids, Mich.:Eerdmans, 1966-1973), p. 128, p. 105 이하. p. 129.

17) R. Gaffin, Perspectives on Pentecost:New Testament Teaching on the Gifts of the Holy Spirit(Grand Rapids, Mich.:Baker Book House, 1979), p. 102, 109-117:차영배, “오순절 성령 강림의 단회성에 관한 R. B. Gaffin 교수의 견해와 그 문제점”,「성령론」, pp. 48-49.

18) D. M. Lloyd-Jones, The Puritans, The Banner of Truth Trust, Edinburgh, 1987, 서문강 역, 청교도신앙, 생명의 말씀사, 362쪽

19) Lloyd-Jones, op. cit. 364쪽

20) Lloyd-Jones, op. cit. 365쪽

21) Henry Hickman(ed.), J. Edwards, Works II:273 (Banner of Truth: Edinburgh, 1974)

22) Jonathan Edward, op. cit. I: 376f.

23) J. Edwards, op. cit. I:380

24) J. Edwards, op. cit. I:379

25) J. Edwards, op. cit. I;374

26) J. Edward, op. cit. I; 380

27) Joseph Tracy, The Great Awakening. A History of the Revival of Religion in the time of Edwards &Whitefield, The banner of Truth Trust, Oxford, 1989, pp. 213-230

28) D. M.Lloyd-Jones, The Puritans:Their Origiins and Successors, The Banner of Truth Trust 1987, p. 354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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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 C. Packer, Among God's Giants. Aspects of Puritan Christianity. 박영호역, 청교도 사상, 기독교문서선교회

M. Lloyd-Jones, The Puritans, 1987, Edinburgh, 서문강역, 청교도신앙, 생명의 말씀사

D. M. Lloyd-Jones, The Puritans, 서문강역, 청교도신앙, 생명의 말씀사

Jonathan Edwards, "Sinners in the Hands of an angry God", in: The Works of Jonathan Edwards with a momoir by Sereno E. Dwight revised and corrected by Edward Hickmann, The Banner of Truth Trust, Pennyslvania 1995 (reprinted), Vo.2, 7-12 그리고 Jerry Falwell(edit.), 25 of the Greatest Sermons ever preached, 25편의 명설교, 생명의 말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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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 M. Lloyd-Jones, The Puritans, The Banner of Truth Trust, Edinburgh, 1987, 서문강 역, 청교도신앙, 생명의 말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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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 M.Lloyd-Jones, The Puritans:Their Origiins and Successors, The Banner of Truth Trust 1987

The Distinctiveness of Jonathan Edwards' Puritian Theology

 

Yung Han Kim,

Professor of Systematic Theology

Graduate School of Christian Studies

Soongsil University

The thought of Jonathan Edwards is to be characterized as a puritan theology. To him, the puritan faith, person and life were integrated. He broke through a awakening movement in the New England, which had become cold due to the reason-centered enlightenment trend. His sermon made contribution to having brought the contemporary people to the Word of God. His movement was not an artificial one to appeal to the human emotion, but was based on the puritan thought to give stress on the divine sovereignty.

The distinctiveness of the puritan theology is described as follows:

 

1) His life was a life of a puritan dedication to dedicate his life as the glory of God and his sovereignty. 2) He proclaimed the thought of God-absolute dependence, denouncing the arminianism. 3) He gave stress on the emotion in the faith, viewing the faith is not in the intellectual understanding, but in the mind, appearing as emotion. 4) Stressing the continual work of the Spirit, he asserted the Holy Spirit works in the church after the age of Apostles. 5) Conducting the word-centered ministry and theology he always controlled the intellectual with the spiritual. He subjugated his philosophy and speculation to the Bible, considering them mere as servant. 6) He suggested a theology of faith- revival, giving a stress on the necessity of spirit-awakening in the faith. He suggested an inward principle for the nature of faith-revival and the principle for its outward form. 7) He emphasized the anger and judgement of God putting the unbelievers into the hell, by preaching on the anger of God upon the unbelievers.

He harmonized the passionate piety and deep intelligence. He was an excellent theologian of revival, of the experience, and heart. His puritan theology has been making a dynamic direction for reformed church and theology challenged by the postmodernism on the hand by asserting the objective truth, and by the cessation doctrine on the other hand, by emphasizing the continuos working of the holy spiri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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