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이클 위글스워스는 시로 유명하게 된 청교도 목사였다. 그는 1631년 잉글랜드 링컨셔(Lincolnshire) 워러비(Wrawby)에서 성공한 상인인 에드워드(Edward Wigglesworth)와 에스더 위글스워스 부부에게서 태어났다. 1638년 위글스워스 가족은 종교적인 박해 때문에 요크셔를 떠났다. 그들은 매사추세츠 주, 찰스타운(Charlestown, Massachusetts)으로 가서 잠시 동안 머무르다가 코네티컷 주, 뉴헤이븐(New Haven, Connecticut)으로 이사를 갔다.
위글스워스가 일곱 살 때, 그의 부모는 위글스워스의 정식 교육을 위해 그를 에제키엘 치버로 보냈다. 그는 2년 후에 농장에서 부상당한 아버지를 돕기 위해 집으로 돌아왔다. 그러나 농장일이 그에게 맞지 않아서 1644년에 치바에 되돌아가서 공부했으며, 3년 후에는 하버드 대학에 입학했다. 처음에 그는 의사가 되고자 했다. 그러나 하버드에서 4학년 동안 회심했고, 목회를 위한 공부를 하기로 결심햇다. 그는 1651년 문학사 학위를 받았으며, 1652년부터 1654년까지 이 대학에서 선임 연구원으로 섬겼다. 그의 제자 가운데 한 명인 인크리스매더는 그의 평생 친구가 되엇다. 그후 곧 위글스워스는 매사추세츠 몰덴(Malden, Massachusetts)에서 설교직을 제의 받았다. 그는 하나님의 부르심에 대한 불확실해 하면서도 1년 이상 동안 몰덴에서 설교햇으나 전념하지는 않았다.
몰덴에 있는 동안 위글스워스는 질병(그의 일생을 통하여 어러 가지 육체적인 만성질환으로 괴로움을 당함)과 성적 투쟁 그리고 자기 소명에 대한 의구심 등으로 야기된 영적 불확실성을 일기로 계속 기록했다. 그 일기에 기록된 되풀이 되는 한 악몽은 양과 염소를 분리시키는 보좌 위에 계신 하나님을 보여 준다. 그 같은 환상은 위글스워스 안에 커다란 두려움을 촉발햇고 그것은 그의 첫번째 대작시의 주요한 이미지가 되엇다.
위글스워스는 일생 세번에 걸쳐 결횬했는데 첫번째는 1655년에 사촌 메리 라이너(Mary Reyner)와 결혼햇고, 1679년에는 Martha Mudge와 결혼했고, 1691년에는 Sybil Spearhawk와 결혼했다. 그는 그의 어머니와 누이 아비가일과 함게 몰덴에 정착했다. 이들 부부의 유일한 자녀인 머시(Mercy Wigglesworth)는 그 다음해에 태어났다. 두번째 부인에게서는 6자녀를 두었고 세번째 부인에게는 후일 목회자가 된 아들 Edward Wigglesworth(1693–1765)을 났았다.
16578년에 위글스워스는 비로소 정식으로 목사 직분을 받았다. 그 후 1년은 질병 때문에 그의 목사 직분을 완수하지 못햇다. 여러 해 동안 위글스워스는 허약한 건강과교회 의무들의 압박들과 싸워야 했다. 1659년 그의 부인이 죽어 어려움이 가증되엇다. 1661년까지 그는 교회의 회중과 사이가 좋지 않았고 자신과 그의 공동체의 영적 상태에 대해 심히 낙담하여 그는 심판의 날을 묘사한 시적 우화인 '최후 심판의 날(Ehe Day of Doom)'을 썼다.
1662년에 발표된 그 작품은 성공적이었다. 1,800부를 발행한 첫판은 1년 내에 다 팔렸다. 분명 이 시적 우화는 독자의 필요와 두려움에 호소력이 있었다. 위글스워스는 최후의 심판을 사실적으로 묘사햇는데 그는 운율과 내적인 운뿐만 아니라 친숙한 성경적 이미지들에 의존했다.이 시는 기억하기 쉬웠다. 그래서 많은 사람이 이 시를 암송했다.
'최후 심판의 날'의 세 가지 영국판과 두 가지 미국 판이 17세기 말 전에 출판되엇다. 위글스워스의 최종판은 18세기와 19세기에 여덟판이 더 출판되엇다. 위글스워스의 다음 시 작품은 '뉴잉글랜드와 하나님의 논쟁'이었다. 이 시는 이사야와 신명기의 언어를 사용하여 뉴잉글랜드 사람들에게 '많은 세대들의 햇수들'에 비추어 그들의 행동을 깊이 생각해 볼 것을 촉구했다. 위글스워스는 그의 공동체를 이스라엘의 공동체와 비교하고 뉴잉글랜드의 이주는 출애굽과 비교한다.
1663년 위글스워스는 건강 때문에 몰덴을 떠나 버뮤다로 갔다. 그러나 별다른 효과가 없었다. 다음 해에 그가 다시 돌아왔을 때, 몰덴에서 부목사 벤저민 벙커를 불렀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위글스워스는 공동체의 의학적 필요를 위해 섬겼으며 하버드 대학에 진학하고자 하는 지방 아이들을 개인 지도하기 시작했다.
1669년 위글스워는 '먹는 자에게서 나온 고기 혹은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임하는 고난의 필연성, 목적 그리고 유익에 대한 묵상들'을 썼고, 이 책은 1670년에 출판되엇다. '뉴잉글랜드와 하나님의 논쟁'과는 달리 '먹는 자에게 나온 고기'는 개개인의 영혼의 의식을 고양시키는 데 강조점을 두었다. 이 시는 열 개의 묵상들과 개개인의 고통을 정화하는 특성에 대한 결론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것은 성경의 의역과 암시들을 결합함으로써 영혼에 미치는 고통의효과를 설명한다. 이 시는 위글스워스가 생존해 있는 동안 네번 인쇄되었고, 1717년과 1770년 사이에 다시 인쇄되었다.
위글스워스는 1670년에 벙커가 죽었을 때 설교자의 의무를 다시 맡지 않았다. 4년이 지나서 벤저민 블랙맨이 도착하여 4년 동안 목회를 하고 1678년 떠났다. 그 다음 해에 인크리스 매더와 다른 사람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위글스워스는 젊고 세례받지 않은 젊은 가정부와 결혼하여 6자녀들을 두었다. 그 결혼 스캔들 때문에 위글스워스는 몰덴에서의 목사와 교사직을 사임하려 했다.그러나 그 마을은 그의 사임을 공식적으로 받아들인 적이 없다. 몇 년 후에는 위글스워스의 건강이 주목할 만하게 좋아졌다. 그 사이에 또 다른 목사인 토머스 치버가 몰덴에서 1680년에서 1686년까지 목사로 사역했다. 그가 떠난 후에 위글스워스는 몰덴에서 단독 목회와 교사의 직분을 다시 맡았다. 그의 젊은 아내가 1690년에 죽자 그의 의무들을 증가시켰다. 그는 유잉글래내드의 공무들에 관계하게 되었고 그 공동체의 영적 생활에 관심을 가지고 있는 보스톤 목회자들의 케임브리지 협회에 참여했다.
1691년 위글스워스는 조나단 에버리의 미망인인 시빌 에버리 스파호크와 결혼했다. 그들의 아들 에드워드는 후일에 하버드의 첫 번째 홀리스 교수가 되엇다.
위글스워스는 죽을 때까지 몰덴의 목사로 남아 있었다. 그는 만 식민지의 호라동적인 지도자였으며, 1697년에 다시 한 번 더 하버드 대학의 선임 연구원고 강사직을 맡았는데 그는 생을 마감할 때까지 이 직위를 가지고 있었다. 그는 또한 새뮤얼 시월과 다른 중요한 지도자들과 가까운 친구가 되엇다.
인크리스 매더는 위글스워스의 마지막 시간에 그와 함께 했다. 전하는 바에 다르면, 위글스워스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고 한다. "나는 50년 이상을 하나님과의 영적 삶을 바르게 유지하는데 함께 노력해 왔다. 그리고 나는 하나님께 감사드린다. 나는 지금 그 안에서 위로를 발견한다." 위글스워스는 1705년 죽었는데, 그는 영국에 살았던 아이작 촌시를 제외하고는 하버드 대학의 학우 어느 누구보다도 오래 살았다. 그의 경력 초기에 위글스워스는 잦은 우환으로 다소간 무시되엇지만, 그의 생애 마지막에 이르러서는 뉴잉글랜드의 한 조상으로 인정받았다.
오늘날 위글스워스는 대개 시인으로 기억된다. 그의 작품은 앤 브래드스트리트 혹은 에드워드 테일러처럼 시적 감수성을 보여 주지 않으나 그의 작품은 그의 청교도적 이상들인 하나님에 대한 사랑, 공동체 그리고 가정을 분명히 보여 준다. '최후 심판의 날' 때문에 위글스워스는 종종 기쁨이 없는 우울증 환자로 간주되엇다.그러나 위글스워스는 그런 사람이 아니엇다. 그는 철저히 창조적이고 건설적인 여가 선용과 삶의 숭고한 아름다움들을 즐겼다. 그는 심지어 꽤 낭만적이었다. 그가 시빌에게 청혼할 때, 그녀에게 '영원히 그대의 것'이라는 말이 새겨져 있는 라켓을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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