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직자가 다스리는 옛 체제를 지지했으며 뉴잉글랜드 청교도 중에서 가장 유명한 사람이다. 신비적 요소(마녀가 존재한다고 믿음)와 근대 과학(천연두 예방접종을 지지함)에 대한 관심을 함께 갖고 있었다. 카튼 매더는 1663년 2월 12일 보스턴에서 태어났다. 인크리즈 매더의 아들이며 존 코튼과 리처드 매더의 손자인 그는 일생 동안 보스턴에서 살았다. 12세에 라틴어 읽기·쓰기와 '그리스어 명사·동사 격변화시키기' 등 입학시험을 쉽게 통과해서 하버드대학교에 들어갔으며, 끊임없이 학업과 기도에 열중했다. 18세에 이 학교의 학장이었던 아버지에게서 직접 문학석사학위를 받았다.
자신의 삶이 "하늘과의 끊임없는 대화"라고 기록한 적이 있었지만, 자신이 지옥에 갈지도 모른다는 고민을 하기도 했으며, 천국에 갈 수 있다는 확신으로 기뻐하기도 했다. 말을 더듬기 때문에 목사가 될 수 없을 것을 걱정하여 의사가 될 생각도 했으며 일생 동안 의술에 관심을 가졌다. 그러나 "깊이 생각한 뒤 말하라"는 한 친구의 조언을 받은 뒤 말 더듬는 약점을 극복했으며 신학 수업에 다시 주력했다. 1680년 8월에 아버지 인크리즈 매더의 교회에서 처음으로 설교를 했으며, 같은 해 10월에는 할아버지 존 코튼의 교회에서 설교했다. 1685년 정식으로 목사 안수를 받았고, 아버지 교회의 협동목사가 되었다. 일생을 기도·설교·저술·출판에 바쳤으며, 자신의 삶의 주된 목표인 선행을 계속 실천했다. 그의 책 〈선행록 Bonifacius, or Essays to Do Good〉(1710)은 박애의 실천을 가르치는 책이며, 그중 어떤 내용은 당시의 사고를 훨씬 앞서는 것이었다. 예를 들면 학교 선생은 학생을 벌주는 대신 상을 주고, 의사는 질병의 원인일지도 모르는 환자의 정신상태를 연구하라고 가르치고 있다. 그는 사회복지를 위한 협회들을 설립했다.
그는 아버지와 함께 마녀 재판에서 판사가 '유령 증거'(자신이 알고 있는 어떤 사람의 모습으로 유령이 나타나 자기를 공격했다는 마녀 피해자의 증언)를 증거로 채택하지 못하도록 하는 일과 매사추세츠 주지사인 에드먼드 앤드로스 경을 주지사 자리에서 물러나게 하는 일에 힘썼다. 천연두 예방접종을 위한 투쟁의 지도자였으며, 이는 대중의 반발을 샀다. 천연두로 거의 죽어가던 자기 아들에게 접종했을 때는 주민 전체가 분노했고 침실 창문에 폭탄이 날아들었다. 이 시기는 그의 일생 중 매우 어려운 시기였다. 사탄도 그를 반대하는 사람들 편에 선 듯했다. 그의 가족 중 여러 명이 병에 걸렸고 죽은 사람들도 있었으며, 게다가 아들 인크리즈가 소동으로 체포되는 등 불행한 일이 계속 일어났다.
과학, 특히 미국에서 일어나는 여러 가지 현상에 관심을 가져 〈진기한 미국 Curiosa Americana〉(1712~ 24)을 출간했고 런던 왕립협회 회원이 되었으며, 천연두 예방접종에 얽힌 일화를 그 협회의 회보에 싣기도 했다. 또한 로버트 보일 같은 유명한 과학자들과 두루 편지를 주고받았다. 그의 책 〈그리스도교인 철학자 Christian Philosopher〉(1721)에서는 이 지구와 그 너머에 있는 우주의 경이로운 현상을 보고 하느님을 인정했다. 이 책은 철학적이면서도 과학적인 내용이었는데, 구질서에 대한 그의 집착에도 불구하고 아이러니컬하게도 18세기 이신론(理神論)을 예고했다.
일생 동안 400권 이상의 책을 저술하고 출간했다. 그중 〈미국에서의 그리스도 위업 Magnalia Christi Americana〉(1702)은 뉴잉글랜드의 성립에서 그가 살던 시대까지의 미국 교회사를 쓴 대작이다. 그의 책 〈성직자를 위한 안내서 Manuductio ad Ministerium〉(1726)는 목사가 되려는 젊은 신학교 졸업생을 위한 안내서로 선행과 대학에서 갖는 이성교제, 시와 음악, 멋에 대한 조언을 담고 있다. 20년에 걸친 그의 야심적인 성서 연구는 죽음으로 중단되었다. 40년 동안 동조자였던 아버지가 죽은 지 겨우 5년 만에 죽은 그는 3명의 아내 애비게일 필립스, 엘리자베스 허버드, 리디어 조지 사이에 15명의 자녀를 두었으며, 그중 그보다 오래 산 자녀는 2명뿐이었다.
두 할아버지 리처드 매더와 존 코튼에게서 활동적인 지성과 그 지성을 활용하고자 하는 의지를 물려받았는데 이는 그에게 행운이자 불행이기도 했다. 그는 두 할아버지가 이룬 위대한 업적의 그늘에 가려져 살았으며, 그 전통을 계속 유지하려 했고 청교도 사회에서 행했던 그들의 역할을 떠맡기를 원했다. 불행하게도 매더는 구질서가 사라지고 있다는 것을 눈치채지 못했다. 식민지 사회가 초기 정착시절의 고난에서 벗어나 점점 더 안정되어가자, 사람들은 현실에 만족했고 영적인 지도자를 필요로 하지 않게 되었다. 때로 좌절하고 때로 화를 내기도 하면서 코튼은 다스리는 성직자라는 옛 질서를 계속 유지하고자 했다. 그의 전기로서 중요한 것은 W.C. 포드가 편집한 〈일기 Diary〉(1911~12)와 배러트 웬들이 쓴 〈청교도 성직자 코튼 매더 Cotton Mather : The Puritan Priest〉(1891, 1926)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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