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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엘리엇 (John Eliot, 1604 - 1690)

by 【고동엽】 2021. 11. 16.
존 엘리엇은 1604년 8월 5일 런던 북부의 허트포드셔(Hertfordshire) 아니면 에섹스(Essex)에 있는 그의 아버지의 농장에서 태어났다. 그의 가족들은 영적으로 경건한 사람들이었고 공적으로 사적으로 하나님을 경외하며 예배하는 사람들이었다. 그는 "처음으로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말씀과 기도를 드리게 된 것은 나를 향하신 하나님의 놀라운 은총입니다"라고 말한다. 엘리엇은 캠브리지(Cambridge)의 예수 대학(Jesus College)에서 수학했고 토마스 후커(Thomas Hooker)가 세운 캠브리지의 바도(Baddow)의 조만 학교의 교장이 되었으나 후커를 따라 뉴잉글랜드로 이주했다. 명백하게도 청교도 정신과 원리를 이어받은 엘리엇은 영국 국교회의 목사 안수를 허락하지 않았다. 결국 엘리엇은 하나님의 교회에 정기적으로 자유롭게 설교할 수 잇는 뉴 잉글랜드로 가는 것만이 유일한 대안이었다.


1631년 보스톤(Boston)에 도착한 엘리엇은 영국으로 사무를 보러 떠난 존 윌슨(John Wilson)을 대신해 보스톤에 있는 교회에서 처음으로 설교했다. 엘리엇의 목회사역은 대단히 큰 호응을 받았고 윌슨의 협력 사역자로 추천되었으며 후일 존 코튼이 그 자리를 계승했다. 그러나 엘리엇은 영국에 있는 성도들에게 뉴 잉글랜드로 이주해 오면 그들을 섬기는 목회자가 되겠다고 약속했다. 이 약속은 결국 보스톤 변두리에 있는 럭스버리(Roxbury)에 회중교회를 탄생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엘리엇은 그가 굳게 약속한 대로 그들에게 갔고 그로부터 60년 동안 그들과 함께 하나님을 섬기는 목사가 되었다.


1632년은 또한 엘리엇 개인에게도 중대한 시기였다. 이 때 그와 약혼한 여인이 바로 뉴 잉글랜드로 이주한 한나 몸포드(Hannah Mumford)였는데 이들은 바로 이곳 보스톤에서 결혼했다. 이 결혼생활은 1687년 한나가 하나님의 품에 안길 때까지 계속되었다. 엘리엇은 그녀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도했다. "여기 나의 신실하고 경건하며 총명하고 기도하는 아내가 누워있습니다. 그녀는 내게 다시 돌아오지 못합니다. 그러나 조만간 내가 그녀에게 갈 것입니다."


그의 목회사역 초기에 엘리엇은 많은 종류의 다양한 일들을 감당해야 했다. 엘리엇은 뉴 잉글랜드에서 사용하기 위한 시편 찬송가를 제작하는 일을 도왔고 이 찬송가는 미국 전역에서 사용되었다. 또한 엘리엇은 청교도적 경건의 전형을 보여주었으며, 종종 주중에도 강의를 진행했다. 그의 동시대 인물들 가운데 존 엘리엇은 단연 뛰어난 기도의 사람이었다. 이렇게 많은 업무와 사역들 가운데서도 인근에 있는 원주민들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해 엘리엇은 알로킨(Algonquin) 말을 배우는 일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엘리엇의 경건은 우리의 관심과 주의를 끌기에 충분하다. 엘리엇은 바쁜 일정 가운데서도 그의 뛰어난 경건으로 역대의 경건한 인물들의 전당에 기록될만한 인물이다. 코튼 마더(Cotton Mather)는 항상 엘리엇이 얼마나 기도하기를 간절히 열망했는지 또한 그와 가까이 하는 사람들에게 기도할 것을 격려했는지 잘 기록하고 있다. 엘리엇은 학식과 통찰력을 겸비한 설교자이자 다른 사람들의 설교를 잘 듣는 회중이기도 했다. 그는 또한 주중에도 다른 교회에서의 강의와 설교에 참석하기도 했다. 선교사가 된 이후에도 그는 언제나 하나님의 은혜를 말하곤 했다. 그는 또한 그의 교회에서뿐만 아니라 뉴잉글랜드의 교회들에서도 여전히 능력 있는 설교자였다.


엘리엇은 그의 성경을 너무나도 사랑했다. 코튼은 성경이 "그의 동반자이자 상담자"라고 말했다. 경건을 계발하는 것은 언제나 신실하게 하나님의 말씀을 경청하는 것을 요구한다. 그러므로 엘리엇은 주일을 성수하는 것은 대단히 중대하게 생각했다. 이러한 그의 열심은 그의 사역 하에 회심한 인디언들에게도 고스란히 전달되었다. 참으로 엘리엇은 하나님의 사람이었다. 그는 이러한 이유로 반드시 후대 사람들에게 교훈 되어야 할 인물인 것이다.


엘리엇의 경건은 특별히 인디언들을 위한 그의 노력을 위해 훌륭하게 사용되었다. 그것은 그로 하여금 인디언들에게 설교할 수 있도록 그들의 언어를 배우는데 사용된 것이다. 알로킨어는 결단코 습득하기 쉬운 언어가 아니다. 1643년경 엘리엇은 젊은 인디언을 그의 집으로 데려 왔는데 그에게 영어를 가르치면서 인디언 언어를 진지하고도 심각하게 연구하기 시작했다. 그러한 결과 1643년 엘리엇은 십계명과 주의 기도와 같은 성경의 일부분을 인디언의 언어로 번역할 수 있었다. 그는 또한 알로킨언어로 인디언들에게 직접 복음을 설교하기도 했다.
엘리엇이 그의 인디언 회중들에게 설교했을 때, 그는 매우 직설적인 방법을 사용했다. 그는 성경을 강해하면서 십계명을 가르쳤고 그것을 이해했는지 여부를 알기 위해 인디언들에게 질문하기도 했다. 그들에게 만족할만하게 가르쳤다고 판단되면, 그들의 신앙 성장에 방해가 되는 요소가 무엇인지를 찾기 시작했고 그것들을 인디언들에게 질문함으로 그들 스스로 그 문제들을 찾고 해결하도록 유도했다.


이러한 방법들을 사용하면서 엘리엇은 많은 인디언들이 신앙을 고백하고 그들을 에워싸고 있던 수많은 미신들을 타파하는 모습들을 생생하게 목격했다. 그들의 영적 성장을 위한 최상의 환경들을 제공하도록 노력하기 위해 엘리엇은 '기도하는 인디언' 공동체를 조직하기 위해 힘썼다. 그것들 중 일부는 아직도 보스톤과 케이프 코드 근처에 현존하고 있다. 엘리엇의 가장 큰 관심사는 복음 설교를 들음으로 말미암아 그들 스스로 교회를 관리하는 법을 가르치는 것이었다. 이렇게 해서 처음으로 설립된 교회가 바로 나티크(Natick) 교회이다. 그러나 뉴잉글랜드의 많은 교회들이 엘리엇의 이름으로 설립된 교회들이었다.


설교사역과 교회 설립 사역 외에, 엘리엇은 인디언들에게 자신의 땅에 모두 울타리를 만들게 했고 광범위한 지역에 곡물을 재배하게 했으며 지역 정부를 조직함으로 하나님의 놀라운 섭리적 축복을 목격하며 즐거워하게 만들었다. 엘리엇은 성경 전체를 인디언 언어인 알로킨어로 번역했다. 이 위대한 사역은 웨스트민스터 소요리문답과 리차드 백스터의 회심하지 않은 자들을 향한 경고, 그리고 그의 신실한 회심자와 함께 1660년도에 출판되었다.


그의 사역이 잊혀진 이유들을 생각하는 것은 대단히 슬픈 일이다. 필립 왕의 전쟁이라고 불리는 인디언 전쟁은 기도하는 인디언들과 영국인들 그리고 회심하지 않은 인디언 사이에 심각한 불신을 야기했다. 이 불신은 결국 엘리엇의 후반기 사역을 엄청나게 방해하고 말았다. 전쟁의 참화를 피해서 이주하는 인디언들이 늘어날수록 알로킨어는 점점 사용되지 않았으며, 알로킨어를 읽을 여유도 없었기에 알로킨어의 체계는 점점 잊혀져간 것이다.


복음전도에 관한 정착민들의 열정은 점점 식어갔고 이 사역을 지원하던 많은 영국의 후원 단체들은 미국에서의 사역에 관한 관심을 잃고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상황 속에서도 엘리엇은 결코 낙담하지 않았으며 끝까지 인디언들의 친구로 남아 있었다. 뿐만 아니라 엘리엇은 자신의 사역을 미국 정착기에 나타나기 시작한 아프리카 노예들에게까지 확장시켰다.


1687년에 엘리엇의 아내가 하나님의 품으로 돌아갔다. 엘리엇 자신도 나이를 먹어갈수록 점점 거동하기가 힘들어지고 있었다. 결국 그는 1690년을 꽉 채운 채, 그의 전 인생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살아드리고 평화롭게 하나님의 품에 안식했다. 그의 인생의 두 가지 동기들은 열정과 인내로 가득한 복음 설교와 경건의 삶이라는 두 가지 형태로 잘 표현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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