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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저 윌리암스 (Roger Williams, 1603 - 1684)

by 【고동엽】 2021. 11. 16.

로드아일랜드 식민지 창설자이며 종교적 자유의 선구자이다. 재단사의 아들로 태어났으나 법률가 에드워드 쿡 경(卿)의 보호 아래 들어가 케임브리지에서 교육을 받았다. 목사로 있으면서 올리버 크롬웰이나 토머스 후커 같은 청교도 정치지도자들과 가깝게 지내던 그는 비국교도적인 뉴잉글랜드 식민지에 가서 영국 국교회와는 완전히 다른 자신의 종교적 이상을 실현시킬 목적으로 1630년에 자신의 직책을 윌리엄 매섬 경에게 넘겨주었다. 1631년 보스턴에 도착한 그는 영국 국교회 계통의 청교도와 협력하기를 거부하고 다음 해에 분리주의자들이 세운 플리머스 식민지로 건너갔다. 1633년 플리머스 식민지에서 그는 국왕의 특허권은 부당하며 인디언으로부터 토지를 직접 구입함으로써만 그 땅에 대한 소유권이 인정된다고 주장함으로써 플리머스 식민지인들과 불화를 일으켰고 그뒤 세일럼 시로 돌아갔다.

 

세일럼 교회의 초청으로 1634년 그 교회의 목사로 취임했으나 위험한 사상을 지니고 있다는 이유로 정부 당국에 의해 매사추세츠 베이 식민지에서 추방당했다. 그는 토지 소유권에 대한 견해 외에도 총독은 종교문제에 간섭할 권리가 없다는 견해를 가지고 있었다. 결국 1636년 1월 나라간세트 만으로 출발하여 그해 봄에 도착한 뒤 나라간세트 인디언 부족으로부터 땅을 사들여 프로비던스 읍과 로드아일랜드 식민지를 건설했다. 프로비던스 읍은 재세례파·퀘이커교도 등과 같이 자신들의 신앙을 공개적으로 나타낼 수 없는 교파의 피난처가 되었다. 윌리엄스는 잠시 동안 재세례파로 있다가 1639년 스스로 구도자(Seeker)라고 신앙고백하고 줄곧 칼뱅주의 신학을 확고하게 밀고나갔다. 1643년 로드아일랜드에 대한 특허장을 얻기 위해, 그리고 다시 1651~54년 이것을 확인받기 위해 영국을 방문했으며, 방문 기간중 시인 존 밀턴을 사귀게 되었다. 이 특허장에 따라 로드아일랜드의 초대 총독이 되었으며 죽을 때까지 공직에서 떠나지 않았다. 나라간세트 인디언 부족의 언어를 알고 그들로부터 신임을 받고 있었기 때문에 그들과의 중재역을 도맡아 로드아일랜드와 주변 식민지에 지속적인 도움을 주었다. 그러나 필립 왕 전쟁(1675~76) 기간에는 인디언들에 대항해서 로드아일랜드를 방어하기 위해 나섰다. 그는 1636년부터 죽을 때까지 농사와 교역을 통해 생계를 이어나갔다.

 

윌리엄스는 열성적인 논쟁가였으며 또한 많은 저작을 남겼다. 가장 뛰어난 작품으로는 〈잔혹한 박해 교리 The Bloudy Tenent of Persecution〉(1644)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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