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주제별 설교〓/설교.자료모음

리차드 매더 (Richard Mather, 1596 - 1669)

by 【고동엽】 2021. 11. 16.
리차드 매더는 잉크리즈 매더(Increase Mather)의 아버지이고 카튼 매더(Cotton Mather)의 조부이다. 그는 1596년에 랭카셔 로우튼(Lowton, Lancashire)에서 태어났다. 15세에 옥스퍼드에 진학할 준비가 되었지만, 부모들은 그를 그곳에 보낼 수 있는 경제적 여력이 없었다. 대신에 그는 리버풀(Liverpool) 톡스테스 파크(Toxteth Park)에 신설된 문법학교의 교사가 되었다. 가르치는 동안, 그는 교양 있는 청교도 농부였던 에드워즈 아스핀월과 함께 살았다. 그는 청교도 설교를 들었고, 청교도 신학자들이 쓴 글들을 읽었으며, 삼년동안(15-18세) 강렬하고, 장기적인 회심을 체험했는데, 그것도 "고전적인 청교도 양식"으로 체험했다. 즉, 하나님의 법에 순종하려는 자기의적인 시도들, 경험이 많은 성도들과 자신의 약한 노력들을 비교했을 때 느끼는 절망 그리고 마침내 성령이 복음적인 약속들을 그의 영혼에 부어주셨을때에 그 절망을 돌파하게 되었다.


1618년에 매더는 옥스퍼드의 브레이즈 노우즈 칼리지(Brasenose College, Oxford)에 진학하게 되었으나, 그의 공부는 톡스테스 사람들이 목회자로 되돌아와 달라고 요구했을 때에 중단되고 말았다. 그래서 1619년에 매더는 체스터의 주교인 토머스 모턴에 의해서 영국 국교회 목회자로 임직하게 되었다. 톡스테스에서 15년 동안 설교 사역하는 동안 그는 계속적인 성장을 경험했다. 위링턴의 청교도 목회자였던 윌리엄 겔리브랜드는 매더의 설교를 들은 후에 "그를 매더(Matter)라고 부르라. 믿으라. 왜냐하면 이 사람은 그 안에 실체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라고 말했다.


1624년에 매더는 랭커셔 베리 출신의 캐서린 호울트와 결혼했다. 두 사람은 여섯 아들을 낳았다. 하나는 어린 시절에 죽었고, 네 명은 목사들이 되엇다. 엘리에이저와 인크리스는 매사추세츠에서 잘 알려진 설교자들이 되었지만, 첫 두 아들, 새뮤얼과 나다니엘은 하버드를 졸업한 뒤에 영국으로 되돌아갔다.


토머스 모턴의 후임자인 존 브리지맨은 1633년에 영국 국교회의 의식들을 모욕한다고 매더를 정직시켰으나, 매더는 수개월 후에 다시금 설교단에 서게 되었다. 매더는 비국교회주의를 발전시켰고, 회중교회적인 교회 운영론을 지지했다. 1634년에 중백의(사제복)를 입는 것을 거절했다는 이유로 두 번째로 정직당한 후에는, 다시 강단에 서게 될 소망이 줄어들게 되었다. 그래서 존 코튼, 토마스 후커 그리고 다른 비국교회 지도자들은 미국으로 이민을 가도록 매더를 설득했다.


1635년에 매더는 미국으로 항해했고 매사추세츠만 식민지에 정착했다. 다음 해에 매사추세츠(Massachusetts) 도체스터 교회를 설립하는 일을 도운 그는 1669년에 죽으 ㄹ때까지 그 교회의 목회자로 사역햇다. 많은 첫 이민 세대들이 그러했듯이, 매더는 자신을 영국 내에 있는 문제들 때문에 피난 중인 영국 사람으로 생각햇다. 그는 영국을 싫어했기 때문에 뉴잉글랜드에 오지 않았다. 그는 그곳에 머무르는 것을 어렵게 만드는 어떤 관습들을 싫어했을 뿐이다. 그에게 뉴잉글랜드는 지리적인 장소라기 보다는 교회엿다.


매더는 '맷추세츠 만 시편책'을 만드는 일에 협력했지만, 1640년대에 확고부동한 스코틀랜드 장로교도인 새뮤얼 러더포드와 가진 논쟁들에서 교회 운영에 대한 "회중교회적인 방식"을 변호한 것으로 가장 유명했다. 매더는 매사추세츠만 식민지를 위한 교회 운영안을 초안했는데 케임브리지 회의에 의해서 수정된 후에, "교회 운영에 대한 케임브리지 강령"(1648)으로 공표되게 되었다.


매더는 뉴잉글랜드가 세계에 대해 영감과 모델이 될 수 있다고 확신했다. 그는 뉴잉글랜드의 첫 세대 청교도 목사 중 하나인 존 코튼의 친미리한 친구가 되엇다. 그러나 코튼과 달리 매더는 교회 안에서 반율법주의적인 경향들이라고 보앗던 것에 대해서 확고하게 반대했다. 그는 가시적으로 순결한 교회를 지지했고, 신앙 체험의 증언을 요구하는 엄격한 교회 회원권을 변호했다.


코튼은 매더의 입장이 극단적이라고 생각햇다. 한번은 코튼이 매더에게 한 사람의 그리스도인이라도 배제하는 것보다는 열 명의 위선자들을 허용하는 것이 더 낫다고 말했다. 매더는 위선자 하나를 허용하는 것보다는 많은 그리스도인들을 잘 지키는 것이 더 낫다고 응수했다. 교회의 가시적인 순결은 매더에게 청교도적 실험과 동의어였다. 교회의 순결이 유지될 수 없다면, 그때에는 모든 실험이 실패하고 말 것이다.


1655년에 아내가 죽은지 얼마되지 않아, 매더는 존 코튼의미망인인 세라 코튼과 재혼을 했다. 그는 1650년대 말 뉴잉글랜드 교회를 잠식햇던 세례 논쟁에 깊이 관여했다. 1662년에 개최된 "중도" 회의에 참석했고, 회의의 결정 사항들을 변호하는 논문을 썼다. 또한 그는 주로 교회론에 관련된 주제들을 다룬 10권의 책들도 저술했다.


매더는 강력한 설교자엿다. 코튼 매더는 그의 조부의 설교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그의 설교 방식은 매우 평범해서 청중들의 머리 위로가 아니라 마음 속을 관통하도록 자신의 화살들을 조준하여 발사했다. 하지만 그는 성경적이고 강력하게 평범한 설교를하여, 영국과 뉴잉글랜드 양쪽에서 많은 영혼들을 하나님께 회심하게 함으로 그의 노고의 큰 성공을 보았다."


1669년 보스턴에서 열린 교회 회의를 사회하다가, 매더는 신장 결석이 도졌다. 그는 도체스터로 되돌아 갓다가 한 주 뒤에 소천했다. 매더는 뉴잉글랜드의 회중 교회 체제의 강력한 지원자였고 부분적 언약 운동을 지지했다.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