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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임스 1세의 통치

by 【고동엽】 2021. 11. 12.

엘리자베스 1세는 1603년 사망했다. 그녀는 잉글랜드를 대국으로 만들려고 힘썼는데 상당한 성과를 거두었다. 그년는 성격이 고르지 못한 편이었다. 때때로 역정을 부리고 기분이 언짢으면 말을 하지 않으며 사리에 맞지 않은 행동을 하였다. 그럼에도 그녀의 통치는 정치적으로 안정을 가져왔다. 이것은 곧 이어지는 17세기 후반의 상황에 비추어 보면 적지 않은 업적이다. 앞에서 살폈듯이 17세기 초반의 청교도는 잉글랜드 국효회 목회자들의 약 10퍼센트에 불과했다 청교도들은 새왕(스코틀랜드에서는 제임스 6세라고 부르고, 잉글랜드에서는 제임스 1세라 칭함) 이 장로교가 국교인 스코틀랜드에서 왔기 때문에 교회 개혁에 동조할 것으로 기대하였다.

 

그러나 그들은 매우 실망하지 않을 수 없었다. 청교도들은 1천명의 청교도들이 서명한 타원서(Millenary Petition)를 제임스 1세가 스코틀랜드에서 런던으로 내려오는 길에 제출하였다. 이 타원서는 교회 개혁을 촉구하였는데, 그 결과 햄튼 왕궁 회의를 열게 되었다. 이 회의는 런던에 있던 햄튼 왕궁에서 1604년 1월의 각각 다른 날에 세 번에 걸쳐 모였다. 제임스는 상당히 지적인 왕이었다. 그는 교회 행정의 민감한 부분을 잘 알고 있었다. 그는 신수권을 믿었다. 이것은 하나님이 국왕에게 나라를 다스리는 권한을 주었으며 따라서 왕에게 불복하는 것은 하나님게 불순종하는 행동이라는 주장이다. 제임스는 스코틀랜드에서 시비를 걸기 좋아하는 장로교인들에게서 많이 시달렸기 때문에 어떻게 해서라도 절대권을 유지할 생각이었다. 청교도들이 잉글랜드 국교회에 장로교를 소개할 의향인 것은 불을 보듯이 분명하였다.

햄튼 왕궁 회의가 진행될수록 제임스 왕은 점점 더 신경을 곤두세웠다. 그는 '감독이 없으면 왕도 없다.'고 하거나 '청교도주의와 군주제는 하나님과 마귀처럼 닮은 데가 업사.'는 등의 극언을 하였다. 그리고 그는 청교도 대표자들에게 협박을 하였다. '당신들은 속히 국교의 방침에 따르시오. 그렇지 않으면 나라에서 몰아내겠소!' 회의는 왕의 비위만 잔뜩 거스르고 끝나는 결과가 되었다. 반면 왕은 새로운 성경 번역 사역에 동의했는데, 이것이 1611년 완성된 흠정역(Authorized Version) 또는 킹제임스역(King James Version)이라고 부르는 역본이다. 왕이 허락한 다른 사항들은 얼마되지 않으며 별로 중요한 것들도 아니었다.

1604년과 1609년 사이에 약 80명의 목회자들이 국교의 방침에 순응하지 않는다고 파직되었다. 이들은 대부분 1607년 이전에 생계 수단을 박탈당하였다. 감독들은 성공회의 방침을 강요하지 말고 설득하라는 지시를 받았다. 한편 의회에서는 경건한 사람들이 보직을 박탈당한 목사들의 복직 운동을 벌였다. 제임스 1세는 도르트에 대표를 보냈다. 도르트 총회는 1618-9년에 네델란드에서 열렸는데 기독교 역사에서 매우 중요한 회의였다. 여기에서 하나님의 주권에 대한 알마니안주의에 반대하는 전통 칼뱅주의의 입장이 확정되었다.

제임스 알마니안주의가 칼뱅중의를 지지하였다. 그러나 나중에 이 문제에 대해 불분명하였다. 1624년 리처드 몬태규는 A New Gagg for an Old Goose 라는 반(反) 발뱅주의 글을 출판했다. 이것은 잉글랜드 국교회가 알미니안주의로 기울어지는 경향을 드러내는 한 단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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