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임스는 1625년 사망하였다. 그리고 찰스 1세가 왕위에 올랐다. 그는 인물이 잘 생겼고 품위가 있었으며 도덕적이었다. 그러나 찰스 1세는 엘리자베스 여왕이나 그의 부친인 제임스와는 달리 정치적 수완이 없었다. 특히 그는 청치에 필수적인 통제나 균형을 유지할 줄 몰랐다. 찰스는 당시에 프랑스를 다스린 루이 13세의 여형제인 앙리에따 마리아와 결혼했다. 앙리에따 마리아는 열렬한 로마 카톨릭 신자였다. 그녀는 국정에 참견했다. 그래서 의회와 백생들이 항상 오아비를 의심하게 되었다. 이러한 의심은 유럽의 개신교가 하강세를 보인느 위기 의식과 관련해서 더 짙어졌다. 유럽에서의 개신교 위축은 많은 개신교도들을 위험한 처지에 놓이게 하였다.
윌리엄 로드는 찰스가 신망하는 자문관이 되었다. 1625년 찰스가 왕위에 즉위한 때로부터 로드는 세력을 행사하였다. 이것이 공식화 된것은 그가 1633년 대주교가 된 때였다. 제임스 1세는 찰스 1세에게 로드가 스코틀랜드 사람들을 이해하지 못한다는 뜻으로 이렇게 경고하였다. '그는 스코틀랜드 사람들의 기질을 모른다니까.' 이 경고를 찰스는 귀담아 듣지 않았다. 로드는 청교도의 가르침을 모든 면에서 적대시하였다. 그가 대주교가 된 뒤에 시행한 첫 번째 일의 하나는 주일날 게임과 기타 놀이를 권장하는 것이엇다. 이것은 청교도들의 반감을 일으켰다. 그는 자유 의지를 강조하고 예정론을 배척하는 철저한 알미니안주의였다. 로드는 미신적이었다. 그는 로마 카톨릭의 예배 형식은 수용하면서 교황의 권위는 배격하였다.
그가 생각하는 '아름답고 거룩한 것'은 의식과 예식들로 짜여진 것들이었다. 오늘날가지 성공회 교회들 중에는 교회당 안의 동편 끝에 제단들을 가진 경우가 많다. 제단의 메시지는 희생에 대한 것이다. 로드는 제단이 '지상에 있는 가장 큰 처소이며 강대사보다도 더 큰 곳'이라고 믿었다.
유명한 토마스 맥콜린 경은 청교도의 영성을 이해한 사람이 아니었음에도 윌리엄 로드를 정확하게 파악하고 그에 대한 글을 썼다. '성공회의 모든 고위 성직자들 중에서 로드는 종교 개혁의 원칙에서 가장 멀리 이탈되고 로마에 가장 접근된 자이다. 그는 성격이 조급하고 화를 잘 내며 자존심이 강하고 다른 사람의 어려움을 동정할 줄 모른다. 그는 미신적인 사람들의 공통적인 특징인 거짓에 잘 이끌리는 경향이 있고 자신의 까다롭고 고약한 감정을 경건한 열정으로 착각한다. 그의 지시로 나라의 구석구석이 항상 조사를 받아야 한다. 그리고 분리주의자들의 소그룹들까지 샅샅이 뒤져서 다 해체시켰다. '맥콜리의 과장법은 박해자들의 열성을 정확하게 표현한다. 그러나 다행히도 분리주의자들의 회중이 그의 말대로 다 깨어진 것은 아니었다.
로드는 대주교로서 국교의 양식에 따르지 않는 자들을 체포하고 투옥시키는 권력 행사를 하였다. 그는 심문을 하고 박해를 하기 위해서 스타 쳄버라는 법정을 사용하였다. 로드의 잔인성의 한 실례로서 알렉산더 레이통 박사의 경우를 들 수 있다. 그는 잘 알려진 로버트 레이톤 대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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