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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혁신학의 광맥 [2부 2장 돌트 총회와 알미니안주의]

by 【고동엽】 2021. 11. 10.

 

2부 2장 돌트 총회와 알미니안주의.hwp
2장 돌트 총회와 알미니안주의
김주호


네덜란드 칼빈주의의 확산과 특징
교회와 세속 정치
중세 시대를 거치는 동안에 로마 가톨릭과 국가 권력은 상호 밀접히 연관을 맺고 도움을 주고받고 있었다. 타락한 로마 가톨릭 국가 내에 서는 종교와 사회가 모든 면에서 서로 얽혀 있었다. 그러나 16세기 중엽, 새로운 종교 개혁 운동이 벌어지게 되면서 이러한 통일성이 깨어지고 다양성을 용납해야 할 시대가 도래하였다.


저지대 국가의 종교 개혁
유렵의 북서부 저지대 지방은 벨지카로 알려진 통일 공국으로 존재했던 이곳은 로마 가톨릭을 강력하게 신봉하던 합스부르크 왕가에 속한 스페인의 지배와 통치하에서 많은 핍박과 영향을 받아왔었다.
‘공동생활의 형제단’의 영향을 입은 베쎌 간스포르트의 저서는 개혁신학을 형성하는 데 큰 영향을 주었으며, 루터의 영향을 크게 입었으며 쯔빙글리의 성찬 상징설, 그리고 상당수는 메노 시몬을 중심으로 한 제세례파의 영항을 많이 받았다. 점차 종교 개혁이 영향을 미치면서 로마 가톨릭과 스페인의 간섭으로부터 독립하려는 의지가 강하게 표출되었지만 그 지역을 다스리던 영주들은 개혁 교회가 자유를 획득하고 기존의 로마 가톨릭이 차지했던 수도원과 토지 등 가치 있던 재산들을 차지하는데 대해서 인정하지 않으려 했다.
1550년대와 1560년대에 칼빈주의 신앙인들이 급속이 증대되면서 필립 왕의 종교 정책에 대항하는 독립 운동을 전개하였다. 이런 입장을 대변한 신앙문서가 바로 벨직 신앙고백서이다.


벨직 싱앙 고백서
개혁주의 신앙 고백서로서 네덜란드 지역에서 가장 먼저 나온 문서는 프랑스어를 사용하면서 벨지움에 거주하던 드 브레가 개신교인들은 폭도들이나 반란군들이 아니라 법을 지키는 그리스도인임을 로마 가톨릭 군주에게 보여 주기 위해 작성한 것이다. 벨직 신앙 고백서는 두 가지 특별한 내용이 핵심 사항으로 담겨있다. 하나는 국가와 교회와의 관계를 제시한 것이다. 또 다른 하나는 교회의 본질을 바르게 정리한 것이다. 두 가지 내용을 제시하려 했던 작성 배경에는 재세례파와의 차별성을 부각시켜서 순수한 개혁 신앙을 인정받고자 하는 목적이 있었던 것이다.
총 37장으로 구성된 벨직 신앙 고백서는 칼빈의 ‘기독교 강요’처럼, 그 구성을 전체적으로 볼 때에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한 설명이라고 말할 수 있다. 첫째는 하나님에 대한 지식과 성경으로부터 하나님을 아는 것에 대한 설명이며, 둘째는 창조와 구속에 관한 그리스도의 사역이며, 성령의 성화와 교회의 사역에 관한 것이다. 벨직 신앙 고백서는 양심의 자유에 대해서 상당히 폭넓은 태도를 보이면서도, 참된 신앙은 오직 엄격한 칼빈주의임을 강조, 우상 숭배의 자유는 없다는 점을 천명하였다.
이 문서는 네덜란드 개혁 교회가 1618년 돌트 총회에서 공식 문서로 채택함으로써 하이델베르크 신앙 고백서, 돌트 신경과 함게 모든 네덜란드 개혁 교회의 표준 문서로 가르쳐져 왔고, 신앙의 동질성을 제공하는 기초가 되어 왔다. 벨직 신앙고백서는 로마 가톨릭과 다른 신앙을 가졌다고 해서 박해받고 있던 개혁 신앙을 가진 자들이 국가에 반항하거나 반역하는 것이 아님을 변호하기 위해 작성된 것이다.


야콥 알미니우스와 신학자들
처음에는 알미니우스도 열렬한 칼빈주의자였으나, 하나님의 은총에 대한 해석에서 다소 전통과는 다른 해석을 추구하였다. 종교개혁의 5대 교리를 받아 들였고, 아무런 문제가 없어 보였다. 그러나 그는 합리적이며 이성적인 논리를 갖고 나온 딕 크른헤르트와의 논쟁에서 종래의 정통 신앙이 가진 논리로는 합리적인 사람들을 성공적으로 설득하거나 변호할 수 없음을 알게 외었다. 그 이흐로 그는 자신이 배워 온 개혁신학을 재점검하고 다시 평가하여 의구심을 갖게 되었다.
첫째로, 알미니우스는 로마서 7장 14-25절은 회심 이전의 사울이라는 상태의 인간상이 담겨 있다고 주장하였다. 즉, 인간의 의지는 아직 완전히 타락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뜻을 따라서 살지 못하도록 망가뜨려진 존재는 아니다라는 결론에 도달한 것이다. 이는 칼빈주의에서 가르쳐온 ‘전적 부패’애 대해 정면으로 도전하는 것이다. 둘째, 알미니우스는 로마서 8장 29-30절을 다루면서, 하나님의 주권적인 은총에 기초를 둔 선택설을 부정하였다. 인간이 구원을 얻는 것은 하나님이 미리 보시는 믿음에 기초한 것이라고 하였다. 그의 신학의 배경 속에는 에라스무스의 기독교 휴머니즘, 카스텔리오 등의 유니테리언파, 소시누스와 같은 재세례파, 그리고 널리 퍼져 있던 로마 가톨릭 신학 등 각종 사상이 혼합되어 있다.
알미니우스의 신학을 체계적으로 정리한 시몬 에피스코피우스는 매우 위험한 사고를 가진 자유주의 신학자로서 소시누의 영향을 입어서 그리스도의 종속설을 주장했다. ‘항론파’ 혹은 ‘항의파’로 알려진 문서를 작성한 요한네스 위텐보가르트는 처음에는 제네바에서 베자에게 공부한 적이 있었으나, 신학이 변질되어 알미니우스 쪽으로 기울어졌다. 휴고 그로티우스는 유럽 전체에서 가장 뛰어난 신학자가 되었으나 안타깝게도 그의 탁월한 법학 지식과, ‘국제법의 아버지’라는 찬사에 걸맞지 않게 신학적인 입장에서는 알미니우스를 따르게 되어 정통신학에서 갈라서고 말았다. 그는 예수그리스도의 죽음을 죄에 대한 형벌을 대신 지불하신 형법적인 대속으로 받아들이지 않고 그저 예수의 죽음은 하나의 비극적인 성질과 죄라는 나쁜 본성에 대해서 형법적인 본보기라고 주장했다.


돌트 총회와 신경의 채택
돌트 총회의 결의 배경
알미니우스파에서 전국 총회를 소집하여 신앙 고백과 요리 문답을 갱신하자는 청원을 세속 정부에 계속 제출하였다. 칼빈주의자들은 전국적인 총회의 소집 여부마저도 교회가 스스로 결정하는 것이라고 맞섰으나, 네덜란드 지방에서는 알미니우스의 주장을 받아들여서 최고 의회에서 이를 허용한다는 결정을 발표하였다. 이 무렵, 알미니우스는 학문적인 주제 가운데 하나로 교회를 지배하는 국가의 권위에 대해서 옹오하였다.
1616년 이후로 반항론파가 늘어가기 시작했으며, 여러 지역의 호응자들을 규합하여 국가 전체 개혁 교회 총회를 개최하여 이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는 데 동감하였다.


대표적인 신학자들
전국 총회가 1618년 11월 13일에 돌트에서 모였다. 총회의 모임이 거듭 될수록 대표적인 신학자들의 면모가 차츰 드러났다. 의장인 요한네스 보거만은 회의를 압도적으로 주도한 매우 중요한 인물이었다. 성경적으로 알미니안들의 교리를 교정하고자 나선 칼빈주의 신학자의 대표는 프란시스 고마루스였다. 룹베르투스는 돌트 총회 초반에는 참여를 못했지만, 1619년 1월 17일 제 60차 회의부터 참가하여 예정에 관한 하나님의 작정 교리를 거부하는 이유를 밝히라고 주장했다. 지스베르트 보에티우스는 피란시스 고마루스처럼 엄격한 칼빈주의를 옹호하고 고수하였다. 그의 저술에서 청교도들의 영향을 보여 주었는데, 신학을 공부하는 사람들은 이론적인 학문성과 경건을 동시에 함양해야 한다고 강조하여 실천적인 신학을 주장하여 17세기의 대표적인 개혁 신학자로 손꼽히는 인물이 되었다.


다섯 가지 기본 교리
튤립 - TULIP (전적부패, 무조건적 선택, 제한적 속죄, 불가항력적 은혜, 성도의 견인)


예정론은 돌트 총회에서 다루어진 신학의 핵심이라고 말하는 것이 정확한 표현이다. 돌트 총회가 결의한 개혁주의 교리의 핵심은 예정론으로 시작하는 선택과 유기였다. 선택은 하나님의 주권적인 은총에 의해서 결정되는 것이요, 믿음을 예견하기 때문에 주어지는 것이 아니다. 선택과 유기는 늘어나거나 줄어들거나 할 수 있는 것이 아니요, 여기에서는 상호간에 어떤 변화나 교차하는 일은 결코 일어나지 않는다. 성도는 자신이 선택되었느냐에 대해서 알 수 있으며, 이는 거룩한 생활로 이끌어 주며, 타락하고 방탕한 생활을 하도록 유도하지 않는다. 칼빈주의자들에게 있어서 예정은 인간의 미래와 운명을 결정짓는 하나님의 절대적이며 무조건적인 결정을 근본적으로 높이려는 것이다.
두 번째, 핵심 교리는 그리스도의 죽음에 관한 논쟁으로서, 죄인을 위한 대속적인 죽음이 선택된 사람들만을 위한 것이냐, 아니면 모든 사람을 위한 것이냐가 문제가 되었다. 하나님은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특별한 목적으로 계획하신 것이요, 무한정으로 생각 없이 피를 흘리게 하신 것이 아니다. 죄에 대한 관리 신학, 혹은 통치적인 속죄설은 비성경적인 것이다. 속죄는 무제한적인 가치를 지니고 있으며, 모든 인류를 위해서 충분한 것이지만, 그 속죄가 적용이 되어지는 사람들만을 위해서, 즉 선택된 자들만을 위하여 특별히 의도되어진 것이다.
세 번째 교리와 네 번째 교리는 하나님의 은총과 인간의 원죄를 서로 연결한 것이다. 돌트 총회는 원죄와 타락한 의지의 전적 부패에 대한 개혁주의 교리를 확고히 세우고자 했다.
다섯 번째로, 성도의 견인에 대해서 확고한 교리를 규정하였다. 한번 선택을 받은 성도가 중생을 하였으면, 그 성도는 항상 그러한 믿음을 유지하는 것이다.


마우리스 이후의 관용 정책
1625년 마우리스가 죽자, 그의 후계자 프레데릭 헨리는 알미니안들에게도 자유를 허용하는 관용 정책을 펴나갔으며, 이로 인해 비밀리에 알미니안들의 집회가 성행하였고, 망명했던 목사들도 다수 귀국하였다. 이들은 후에 훨씬 더 자유로운 근대 합리주의의 영향에 휩싸이고 말았다.
돌트 총회는 또한 전반적으로 네덜란드어 번역 성경의 감수와 그 해석을 종합하는 임무도 맡고 있었다. 네덜란드어의 형성에 절재적인 영향을 미친 최초의 성경이 번역되었다.


개혁 교회의 발전
1648년 뮤엔스터의 평화 조약, 혹은 베스트팔리아에 소집된 회의에 따라서 스페인이 네덜란드의 독립을 인정하게 되자, 점차 안정 속에서 개혁 교회가 확산 되어서 연합 주 전체 인구의 절반 가량이 소속하였다. 점차 이 개혁 진영이 칼빈주의의 영향을 받아서 국가와 교회와의 관계를 정립하고 노력했다. 세속 정부는 전국적인 규모의 교회 회의가 결정한 사항들을 존중하도록 주장하게 되었다. ‘국가 교회’가 아닌 ‘자유 교회’라는 이름의 개신 교회가 네덜란드 칼빈주의 교회의 명칭으로 사용되어 지속적인 발전을 거듭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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