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왜 개혁주의자로 사는가?
학자의 혀
개혁주의, 개혁주의자란?
개혁주의...
나는 "개혁주의"란 말을 이해하게 된지 얼마 되지 않았다.
이제 막 1년 정도를 지난 것에 불과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스스로를 "개혁주의자"라 칭하며, 또한 "개혁주의자"로 살아가기를 원한다. 하지만 아직은 완전한 개혁주의자로 살아가고 있지 못할 것이라고 짐작한다. 왜냐하면 개혁주의를 깨닫기 이전의 삶이 이후의 삶보다 나를 지배한 시간이 더 오래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나의 신앙이 어디서부터 어떻게 잘못되었는지를 이제서야 하나, 둘 발견해 가고 있기 때문이다. 그동안의 신앙 여정 중 성경에서 이탈했던 많은 부분들을 성경에 합당하게 개혁해 가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내가 아직 인지하지 못한 많은 부분에서 개혁되지 않은, 즉 성경적이지 않은 부분이 많이 있을 것이다. 그래서 개혁주의 선배님들의 바른 가르침들을 받기에 힘쓰고 있다.
아직 불완전한 면이 더욱 많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스스로를 "개혁주의자"라고 말한다. 물론 공신력 있는 누군가로부터 개혁주의자라는 인정을 부여 받은 것은 아니지만, 나는 정말 개혁주의자이다.
이것에 대해 내가 근거로 삼는 것은 "역사적 정통으로 인정되어지는 개혁주의 신학과 신앙을 수납(受納)하는 것과 또한 그것을 실천하고 추구하며 살아가기를 간절히 원하는 나의 바램"이다.
내가 알고 있는 복음이 정말 바른 복음인가?
기독교 신앙을 한 단어로 축약(縮約)하자면 ‘복음(εύαγγέλιον; gospel)’이다. 우리 그리스도교 신앙은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시작해서 복음으로 끝난다. 우리 신앙의 핵심은 복음을 영접하고, 누리고, 감사하며, 전하는 것이다. 이것에 이의(異議)가 있는 기독교인은 단 한 명도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나 또한 복음주의자로 있을 때 "복음 중심의 삶"에 충실하고자 애쓰고 또 애를 썼다. 하지만 나에게는 오래 전부터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던 한 가지가 있었는데, 그것은 “내가 알고 있는 이 복음이 제대로 된 바른 복음인가?”하는 것이었다.
물론 그런 생각을 하던 시점에 나는 중생과 회심을 거친 후였다. 나는 캠퍼스에서나 어디서나 늘 “복음”을 전하기 위해 힘썼다. 하지만 열심히 복음을 전하면서도 늘 한편으로는 왠지 모르게 “내가 전하는 이것(복음)은 뭔가 아닌 것 같다.”라는 생각이 마음 한 편에 늘 자리잡고 있었다. 그렇다고 해서 내가 이단이나 사이비 단체에 소속되어 있었거나 뭔가 부족한 것이 아니었다. 나는 복음주의자들 속에서 복음주의자답게 성실히 살아가고 있었다.
나는 한국교회에서 가장 널리 보급된 4영리를 애용(愛用)했으며, 성경을 가장 열심히 공부하고, 가장 훈련이 힘들기로 유명하며, 최다 선교사를 파송했던 UBF(대학생성경읽기선교회)에 소속되어 열심히 활동을 했다. 어디에서나 열심과 노력을 인정받으며 복음주의자로 살아갔다.
하지만 그것과는 상관없이 내가 알고 있는 "복음"이 무언가 부족하다는 것을 짐작하고 있었고 나는 "복음을 더욱 바르게, 더욱 깊이" 알기를 원했다. 그래서 그것을 위해 많은 기도를 했고, 연구했고, 공부했다. 그러던 중 하나님의 섭리로 말미암아 만나게 된 것이 바로 "개혁주의(개혁신학)"였다.
그런데 개혁주의는 내가 보기에 너무 보수적이고, 극단적으로 보였다. 내가 그동안 알고 있던 복음, 내가 생각했던 복음과는 다른 가르침을 말하고 있었다. 하나님께서 구원하실 자를 예정하셨다니... 이것부터 이해 되지 않는 것이, 아니 인정 할 수 없는 가르침들이 많이 있었다.
개혁주의의 성경해석은 이해가 되지 않는 것이 많았다. 나는 당연히 거부감이 들었고, "개혁주의"와 맞서 싸우고 씨름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싸우다보니 "개혁주의"와 "복음주의"가 서로 다른 개념을 가진 부분이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러나 개혁주의와 싸우던 나는 중도적 입장을 취하기로 결정했다. 개혁주의와 복음주의의 중간에 서기로 한 것이다. 내가 보기에 그것은 타협이 아니라 가장 합리적이고, 가장 그럴듯해 보였기 때문이었다.(아마 많은 사람들이 이런 입장을 취하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전방위적(全方位的)으로 역사하셨다. 하나님께서는 한 두명, 한 두 통로로는 되지 않을 것을 아셨는지 여러 사람과 통로를 통하여 나를 압박하셨다. 마치 동서남북 사방으로 포위되어서 항복하지 않을 수 없는 것과 같은 그런 모습이었다. 그런데 깨닫고 보니 개혁신학은 복음을 가장 바르게, 성경을 가장 바르게 해석한 그것이었다.
아울러 “내가 알고 있던 복음”이 성경에서 말하는 복음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정확히 말하자면 성경에서 말하는 정말 중요한 핵심들을 빠뜨린 “반쪽짜리 복음”, “인본주의적인 복음”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것이 내가 몸담고 있는 복음주의였다. 그것은 정말 충격이었다. 엄밀히 말해 복음주의의 복음은 복음이 아니다. 역사적으로 기독교에 그런 복음은 없었기 때문이다.
동시에 개혁주의는 복음을 바르게 담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또한 성경과 일치되지 않는 바르지 못한 부분이 발견되면 바르게 담기위해 언제든지 개혁하는 것이 개혁주의의 정신(motto)이라는 것을 알았다. 혹자는 이런 나의 말을 피상적으로만 이해하고, (개혁주의는) 너무 교만한 것이 아니냐고 반문한다. 하지만 전혀 그렇지 않다. 그것은 정말 내가 무엇을 말하는지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에 비롯된 오해이다.
개혁주의가 “성경을 완벽하게 해석”한 것은 아니다. 세상 그 어떤 신학도, 어떤 사람도 성경을 완벽하게 해석 할 수는 없다. 그것은 말도 안되는 교만이다. 개혁주의는 그 어떤 신학보다 그것을 잘 안다. 그래서 가장 겸손한 신학이기도 하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개혁주의가 현존하는 신학과 신앙 중 성경을 가장 바르고, 가장 깊게, 가장 탁월하게 해석하고 가르치는 것은 사실이다. (비교해 보면 알게 된다.)
아울러 기독교 역사를 공부해보니 개혁주의는 그 자체로 기독교였고, 기독교는 그 자체로 개혁주의였다. 우리 정통 신앙의 선배들은 한결같이 개혁주의자들이었고, 개혁주의를 지키고 가르쳐왔던 것이었다. 그래서 개혁주의는 정통 기독교 역사를 서술해 왔다. 내가 미처 알지 못하고 관심도 없었던 개혁주의가 바로 “역사적 정통 기독교”였다.
개혁주의자로 살아가는 이유
이와 같이 내가 개혁주의자로 살아가는 이유는 “그것(개혁주의)이 가장 성경에 충실한 가르침이자 형태” 그리고 “가장 바른 성경해석”이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개혁주의자가 된다"라는 것을 "어떤 신학사조의 논리를 따라 사는 것"쯤으로 오해해서는 결코 안될 것이다. 왜냐하면 개혁주의란 한 마디로 “성경주의”인 까닭이다.
세상에는 오랜된 기독교의 역사만큼이나 수많은 신학이 존재하고, 수많은 성경해석이 존재한다.
하지만 그 중에 어떤 것이 성경을 가장 바르게 해석한 것이고, 어떤 것이 가장 성경적인 것인가?
물론 나는 그런 것에 전혀 관심이 없었고 무지(無知)했다. 그저 잘 믿기만 하면 된다고 생각했고, 은혜나 감동 혹은 어떤 가시적인 현상이나 숫적 부흥과 같은 것만 있으면 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제는 그것이 전부가 아닐 뿐더러, 중요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그리고 이제는 100%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개혁주의가 성경을 가장 바르게 해석하였고, 성경에 가장 충실하다는 것과 역사성과 정통성을 가진 정통 기독교라는 것을 알았다.
만약 이러한 나의 말이 사실이고, 이것을 알았다면 어떻게 해야 가장 합당한 것이겠는가? 알게 된 것으로 만족하고 그쳐야 하겠는가? 아는 것과 행함이 다르다면 그것이 합당한 앎인가? 그것이 진리를 발견한 자의 바른 태도인가? 그렇지 않다.
알았다면 당연히 성경을 가장 바르게 해석한 그것, 개혁주의를 따라 개혁주의자로 살아가야 할 것이다. 이것이 내가 개혁주의자로 살아가는 이유이다.
하지만 현대 기독교는 시간이 갈수록 개혁주의자가 줄어 들고 있다. 아니 개혁주의라는 어휘를 아는 사람 자체도 줄어가고 있다. 내가 체감하기에는 개혁주의자는 거의 희박하게 존재한다. 실제로 내가 거주하는 지역에서 개혁신앙에 충실한 ‘개혁교회’를 찾아나서 봤지만 내 실력으로는 찾을 수가 없었다.(아마 있을텐데 내가 찾지 못한 것이라고 믿고 싶다.) 사실 개혁주의자들은 수치적으로는 늘어가고 있다. 왜냐하면 개혁주의를 표방하는 교단과 교회, 교인들의 숫자가 늘어가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겉으로 볼 때 개혁주의자의 숫자는 늘어나고 있는 셈이다. 하지만 자신들이 표방하는 그 개혁주의, 역사적 개혁주의를 깨닫고 진정한 개혁주의자로 살아가는 사람은 지극히 적다.
너도 나도 개혁주의를 표방하지만 참된 개혁주의, 성경에 충실한 역사적 개혁주의가 무엇을 의미하고 어떻게 신앙하는 것인지에 대한 이해는 거의 전멸되어 가고 있다. 그래서 개혁주의라는 말처럼 다의(多義)적인 의미를 갖는 신학용어가 따로 없는 시대가 되어 버렸다.
개혁주의자라고 자칭하는 사람들은 많다. 하지만 개혁주의를 배웠다거나, 개혁주의를 가르치는 목회자나 신학교 교수님들 중에도 개혁주의를 이해하지 못하는 분들이 많다. 겉으론 개혁주의자이지만 속내와 행태를 들여다보면 분별력에 있어 미천한 내가 보기에도 그것(스스로를 개혁주의자라 칭함)이 진실이 아니라는 것이 금방 보여진다. 이것은 정말 슬픈일이다.
개혁주의자로 살아간다는 것은...
개혁주의자로 1년여를 살아본 소감은 아래와 같은데 전혀 생각하지 못한 것이었다. 개혁주의자로 살아간다는 것은 말 그대로 “좁은 길을 가는 그것”인 까닭이다. 이전에 나는 그리스도 예수께서 말씀하신 “좁은 길”을 간다는 것의 의미를 알고 있다고 생각했고 또 그렇게 좁은 길을 가고 있다고 믿었다. 물론 맞는말이다. 보편교회의 진정한 회원이 된 신자의 삶이 그러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개혁주의자로 살아가고자 이 길에 들어선 이후 "진정한 좁은 길”이란 무엇인지를 몸으로 깨닫고 체험하지 않을 수 없었다. 개혁주의자로 살아가기 위해 내가 지불해야했던 그리고 지금도 지불하고 있는 대가는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크고 많았다.
나는 개혁주의자로 살아가기 위해서 많은 것을 포기해야 했다.
많은 눈물을 흘려야 했고,
많은 억울함을 삼켜야 했다.
홀로 격리되는 외로움을 겪어야 했고,
굶주림도 각오하고 감당해야 했다.
개혁주의자로 살아가리라
그러나 이 길이 가장 힘들고 어려운 길이라고 할지라도
개혁주의자로 살아가는 것이야말로 성경에 가장 충실한 삶이라는 것을 나는 안다.
개혁주의자로 살아가는 것은 하나님께서 가장 기뻐하시는 일이라는 것을 나는 안다.
이 길 개혁주의는 사도들이, 초대교회 성도들이, 속사도들이, 교부들이, 종교개혁자들이, 청교도들이 생명을 내걸고 걸어간 길이라는 것을 나는 안다.
그래서 개혁주의자로 살아가는 것은 그 자체로 영광이요,
그렇게 그 길을 걸어가며 만나는 고난과 아픔도 영광이다.
어떤 고난과 아픔도 내가 가는 이 길, 개혁주의자로 사는 것을 결코 막을 수 없다.
찾는 이가 너무 적어서 외롭고,
가는 길이 너무 거칠어서 힘든 길이지만
그것에 상관치 않고 성경에 더욱 합당한 길,
진정한 개혁주의자로 살아가기를 간절히 바라고 원한다.
나는 지금 개혁주의자로 살아가는 이 길의 출발점에 서 있다.
그래서 아직도 갈 길이 한참이나 멀다.
이 길은 분명히 힘들고 어려운 길이지만 그래도 한 가지 소망하는 것은
더욱 많은 사람들이 나와 함께 이 길을 갔으면 하는 것이다.
그동안 1년을 돌아보건대 개혁주의자로 살아가는 것이 때론 너무 힘들어서 “도대체 왜 이 길을 알게 된거지?”하는 원망스러운 생각이 나도 모르게 스쳐갈 때가 있었다. 물론 진짜 원망스러워서 그런 생각을 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엄살일 뿐이었다. 하지만 그 엄살이 인간적으로는 이해되지만 본질은 하나님의 은혜를 감사하지 못하는 유치한 것이라는 것을 안다. 그래서 나는 100% 하나님의 은혜가 필요한 사람인 것이다.
아직은 많이 부족하지만 나의 가는 이 길을 주님께서 기뻐하시고, 복 주실 것을 믿는다.
주님께서 인도해 주실 것을 믿는다.
주님께서 책임져 주실 것을 믿는다.
그러므로 나는 오늘도 묵묵히 그리고 용기내어 이 길을 걸어가면 되는 것이다.
그러면 이 모든 것을 통해서, 이 모든 것에 대한 영광을 오직 하나님께서 받으실 것이다.
개혁주의자로 살아가는 나의 이 작은 삶을 통해 오직 하나님께서 영광 받으시기를...
Soil Deo Gloria in Aeternum!
영원히 오직 하나님께만 영광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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