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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개혁자 칼빈 (1509-1564) - 우리는 왜 여전히 칼빈을 주목하는가? / 비셔

by 【고동엽】 2021. 11. 11.
번역 : 이혜진(강변교회)
2009년 7월 10일은 프랑스에서 태어난 위대한 개혁자 존 칼빈의 탄생 500주년을 전 세계의 교회와 개인들이 기념하는 특별한 날이 될 것이다. 5세기 전에 태어난 사람이라면 대개 아무런 이목을 끌지 못한다. 그냥 잿더미와 망각 속에 머물러 있을 뿐이다.

그런데 존 칼빈의 경우는 그렇지가 않다. 그의 무덤에 500년간의 먼지가 쌓인다고 할지라도 그에 대한 기억은 가리지 못한다. 오히려 그는 여전히 역사학자의 호기심을 부추기고, 신학자의 도전이 되며, 사회학자의 관심을 끌고, 경제학자를 놀라게 하며, 출판업자를 즐겁게 한다. 이 오래전의 인물에 관한 수필과 논문과 서적은 실로 지난 수십 년간 꾸준히 쏟아져 나왔다.

이 명성과 관심을 대체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그는 왜 아직도 이렇게 주목을 받고 있는가?

그 질문에 답하기는 어렵다. 그것은 존 칼빈에 관하여 할 말이 없어서가 아니라 오히려 너무 많기 때문이다. 다면적인 개혁자였던 존 칼빈의 면모 중 몇 가지만 살펴보기로 하자.


성경적인 개혁자


칼빈의 생애와 업적을 조사하는 사람은 가장 먼저 그의 방대한 저술에 압도되고 만다. 칼빈은 성경의 거의 대부분을 망라하는 주석들을 내놓았다. 성경 본문을 다룬 그의 자세는 매우 주의 깊고 정중하며 학문적이었다. 그의 주석은 또한 성경의 주요한 언어들, 즉 히브리어와 그리스어를 풍부하게 언급하고 있다.


칼빈의 주석을 읽다가 어떤 사람은 그의 해석이 건조하다거나 지나치게 학문적이다, 또는 장황하다고 평할지도 모른다. 그들은 아마 적용이나 예화가 더 많기를 바랄 것이다. 그러나 칼빈 읽기에 도전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칼빈이 성경을 진지하게 대하고 성경이 말하는 바를 전심으로 찾아 적용하려고 한 것을 부인하지 못할 것이다. 또한 아무런 성과 없이 칼빈 읽기를 마치는 사람도 나올 수가 없다. 칼빈은 독자의 지성을 자극하고 영혼을 충만케 하는 진리와 교훈을 항상 드러내기 때문이다.


역사적인 개혁자

칼빈의 주석들에도 나타나는 점들이지만 특히 그의 『기독교 강요』에는 초대 교회의 교부들에 관한 언급이나 교회적인 논쟁과 과거의 쟁점들이 많이 나온다. 칼빈은 그의 목회 초기부터 스위스와 그 너머 지역에서 신학적인 토론과 논쟁을 벌였다. 그것을 목격하고 전한 많은 사람들은 그리스와 서구 교회의 교부들에 관한 칼빈의 광범위한 지식에 놀라워했다. 그는 암브로시우스, 아우구스티누스, 이레나이우스, 혹은 테르툴리아누스를 자유자재로 인용할 수 있었고, 또 자주 인용했다.


그 결과 칼빈의 논리는 결코 피상적이거나 사변적이지 않다. 그는 그 시대의 쟁점들을 교회사와 유력하게 접목시킬 줄 알았고 또 그렇게 했다. 칼빈과의 논쟁이 종종 칼빈 한 사람과의 논쟁이 아니라 과거 모든 교회와의 논쟁이 되는 것 같은 인상을 풍기는 것도 그 때문이다.


교리적인 개혁자


칼빈은 소책자와 논문, 그리고 교리문답과 예식서 등에서 교리에 대한 자기의 견해를 제시하였다. 그렇지만 그가 무엇을 믿고 고백했는가를 가장 상세하고 광범위하게 밝혀 주는 것은 역시 『기독교 강요』이다. 가장 유명한 그 저서에서 그는 매우 체계적이고 철저하고 정교하게 개혁 교리를 변론한다.


이 『기독교 강요』가 한순간에 쓴 것이 아니라 평생의 노고를 담고 있는 책이라는 사실을 아는 것도 유익할 것이다. 칼빈은 죽음의 문턱에 이를 때까지 자신이 비교적 젊은 시절에 집필했던 『기독교 강요』의 초판에 첨가와 삭제, 개정과 수정을 거듭했다. 그래서 유명한 칼빈학자 포드 루이스 배틀스(Ford Lewis Battles)가 쓴 『기독교 강요』의 발전사를 읽어 보면 참 흥미롭다.


교회의 개혁자


칼빈의 저서가 아무리 방대할지라도 그의 영향력을 단지 서재에 국한시킨다면 그릇된 일이다. 그가 성경과 교회사, 그리고 교부들에게서 배운 것은 교회로 넘쳐 흘러 들어갔다. 칼빈이 성경적인 설교를 강조하자 예배의 중심은 미사에서 하나님의 말씀으로 바뀌었다. 그는 로마 가톨릭의 의식(儀式) 그들이 고안해 낸 것들을 버리고 하나님의 말씀과 성찬, 기도, 헌상과 찬송이라는 성경적인 요소들을 되찾아 교회를 개혁하고 소생시켰다. 사제직을 폐하고 장로, 목사,교사, 집사로 구성된 성경적인 직분들도 부활시켰다. 마르틴 루터와 마찬가지로 칼빈 역시 사제-평신도라는 이분법을 비판하고 모든 성도의 직분을 강조했다.


예배의 개혁자


칼빈의 교회 개혁에서 주목해야 할 또 다른 부분은 예배 혹은 예식이다. 칼빈은 스트라스부르 시기(1538-1541)에 개혁의 동료이자 스승이기도 했던 마르틴 부서가 작성한 예식을 수정하여 채택했다. 칼빈이 강조한 것은 예배로 부름, 기도, 고백, 사죄의 선언, 십계명 낭송, 설교, 찬송 또는 시편 찬송과 축도로 이어지는 예배 순서였다.


칼빈은 시편이 교회에서 사용해야 할 현실적이고 진정한 찬송 책이라고 확신했다. 따라서 시편의 사용을 활발하게 장려했고, 제네바 교회와 종교개혁이 구약과 신약과 사도 시대의 교회를 따르기를 원했다. 1539년에는 18개의 시편이 담긴 책을 출판하기도 했는데, 클레멍 마로가 불어로 번역한 이 시편들에는 악보도 함께 인쇄되어 있다. 이후 제네바로 온 마로는 루이 부르주아와 더불어 더 많은 시편과 찬송을 내놓았다. 칼빈은 이 모든 과정을 지휘하며 스스로도 몇 개의 시편을 제네바 시편 찬송에 첨가했다.

논증적인 개혁자


칼빈은 사역자로서 한 치의 주저함이나 두려움도 없이 모든 비판자와 비방자와 맞서 개혁 신앙을 변호했다. 사돌레토 추기경이 제네바 시민들에게 로마 가톨릭으로 돌아오라고 권하는 편지를 보냈을 때 칼빈은 펜을 들어 그 유명한 『사돌레토에 대한 답변』을 썼다. 영혼이 잠을 잔다고 주장하는 급진적인 재세례파들에 맞서서 『영혼 불면(不眠)』이라는 소책자를 쓴 것도 그였다. 그는 피에르 카롤리라는 신교 목사가 자신을 아리우스파의 하나라고 공격했을 때 삼위일체에 대한 자신의 믿음을 변호하기도 했다. 칼빈이 이런 식으로 상대한 사람들은 이외에도 제롬 볼섹, 요아힘 베스트팔, 세바스티앙 카스텔리오 등 수없이 많았다. 칼빈의 펜은 거의 쉴 틈이 없었고, 그의 생애에 논쟁이 끼어들지 않은 때는 매우 드물었다.


온화한 개혁자


칼빈을 “온화한 개혁자”라고 부르는 것은 논란의 여지가 있는 일이지만 그래도 그럴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그에 대해서 사람들이 가진 일반적인 인상은 어떤 것일까? 보나마나 냉담하고 무자비하며 광신적인 사람이라는 것이리라.


칼빈의 초상화들 중 어떤 것들은 분명 그런 인상을 부추기기 쉽다. 그림에 나타난 그는 온화하고 친근한 인물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 눈과 입과 복장 등 모든 것이 사람을 매우 주눅 들게 한다.


또한 적어도 젊은 시절의 칼빈에게는 성마른 기질이 있어서 그것이 종종 부각되었던 것이 사실이다. 신앙을 변호하고 비판자들을 반박한 그의 소책자들의 언어는 강렬하고 단도직입적이며 거의 공격적인 수준이다. 칼빈의 시대에는 그 자신이나 그의 적수들이나 우리가 현재 사용하는 신사적인 토론 방식을 쓰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칼빈에게는 또 다른 면모가 있었다. 리샤르 스토페르(Richard Stauffer)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모르지만 분명히 있었던 칼빈의 이 면모를 그의 잘 알려지지 않은 저서, 『인간 칼빈』(The Humanness of John Calvin, 정음출판사, 1983)에서 예를 들어서 보여 준다. 칼빈은 스토페르가 인용한 자신의 편지들을 통해서 아내를 사랑하는 남편, 친절한 아버지, 신의 있는 친구, 그리고 섬세한 목사로 드러난다. 요컨대 그는 온화하기도 한 사람이었던 것이다.


정치 개혁자

칼빈의 또 다른 숨겨진 면모로는 그의 정치적인 영향력을 들 수 있다. 물론 그의 정치적인 영향력을 언급한다고 해서 칼빈이 정치에 관한 구체적인 글을 남겼다는 뜻은 아니다. 그러나 그의 저서들을 잘 살펴보면 그가 정치에 적합한 의견을 가지고 있었고 그중 많은 것들이 실제로 뿌리를 내렸다는 것을 알게 된다.

교회와 국가의 관계라는 골치 아픈 문제에 대해서 칼빈은 그 둘이 활동하며 세력을 미치는 영역이 각각 다르고 분리되어 있다는 입장을 분명히 취했다. 이것은 칼빈이 제네바 시의회와 길게 투쟁하는 가운데 특히 잘 표출했던 입장이다. 칼빈은 교회의 권징이 국가 관할권 밖의 문제라는 것을 여일하고도 줄기차게 주장했고, 신자들의 영혼의 안녕을 온전히 돌보는 일은 교회에 맡길 것을 시의회에 촉구했다.


칼빈이 관심을 가졌던 또 다른 주요한 정치 문제는 기독교인이 독재자에게 순종할 의무가 있는가 하는 것이었다. 이에 대해 칼빈은 통치자들은 하나님의 종이므로 그들에게 순종해야 마땅하다는 것, 그러나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분쟁이 일어난다면 하나님을 따라야 한다는 것을 말했다. 거기에 덧붙여서 그는 사악한 통치자들은 결국 전능하신 하나님의 심판을 직면하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저항이나 시민 불복종의 문제에서 국민을 보호하는 것이 하위 관리들의 의무이고, 이 하위 관리들은 저항이 불가피할 때 국민을 선도할 책임이 있다는 것이 칼빈의 생각이었다.


사회 개혁자


칼빈이 쓴 별도의 정치 논문이 없듯이 그가 쓴 별도의 사회 경제 논문도 없다. 그러나 칼빈의 주석을 잘 읽어 보면 돈, 빈곤, 부의 재분배, 이자율, 실업, 국가 지원 산업, 재산, 보수(報酬)와 무역을 넘나드는 영역들에 관한 다수의 적절한 의견이 드러나서 사회 개혁자로서의 그의 영향력을 가늠하게 된다.


이 영역들과 칼빈 사이의 연관성에 특별한 관심이 있는 사람은 앙드레 비엘러(Andre Bieler)의 매우 독창적인 저서 『칼빈의 경제 사회 사상』 (Calvin"s Economic and Social Thought, 제네바, 2005. 참조. 『칼빈의 경제 윤리』, 성광문화사, 1985)를 참고할 것을 권한다. 칼빈의 사회 경제적인 사고에 대해 훌륭하면서도 의외적인 식견을 얻게 될 것이다.


교육 개혁자


칼빈은 1559년 6월에 제네바 학당(Genevan Academy)을 세우고 베른 시에서 쫓겨난 많은 교수들과 설교자들을 그 교수진으로 불러들였다. 이들 가운데는 제네바 대학(University of Geneva)의 학장을 지내고 칼빈의 후계자가 된 테오도르 베자도 있었다. 일이 순조롭게 진행되어서 1564년에는 건물도 세웠는데 이 건물은 현재까지도 제네바 대학의 일부로 남아 있다.


제네바 대학은 보다 일반적인 교육을 제공하는 학과와 신학 교육을 전문으로 하는 학과로 확연히 이분되어 있었다. 신학 교육을 전문으로 하는 학과에 소속된 학생들 대부분은 외국인들이었고, 하나님께서는 이후 칼빈의 가르침을 다른 나라로 전하는 일에 이들을 크게 쓰셨다. 결국은 일반 종합 대학으로 발전했지만, 제네바 대학이 그 초창기에 유럽 전역에서 칼빈의 종교개혁을 추진하는 일에 미친 영향은 아주 현저했다.


결론적으로 지금까지의 글이 증명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칼빈에게 막대한 재능을 허락하셨다는 것이다. 칼빈의 가르침은 지난 500년 간 여러 영역에서 우리 생활의 형태와 서구 사회의 삶을 결정했다. 하나님께 그로 인하여 감사드리고, 또 급속도로 세속화하고 있는 우리 사회에서 그의 신앙적인 공헌이 잊혀지지 않기를 바라고 그것을 위해 기도드릴 이유는 이미 충분하다.*


* 원문 출처: Clarion, 58권 14호 (2009.7.3.) 326-328쪽. 번역: 이혜진 (안양: 강변교회 교인). 저자인 제임스 비셔 목사는 브리티시 콜롬비아의 랭리(Langley)에 있는 캐나다 개혁교회의 목사이며, 이 원문의 한국어 번역에 대하여 저자의 서면 허락을 받았습니다.


http://www.sybook.org/sub5_newsletter.asp?ccode=505&No=526&mode=read


[출처] 우리는 왜 여전히 칼빈을 주목하는가? (비공개 카페) http://cafe.naver.com/calgaryreformed/17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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