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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약에 나타난 하나님의 나라 / 김성수 교수(합신대)

by 【고동엽】 2021. 11.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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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약에 나타난 하나님의 나라 / 김성수 교수(합신대)

 

 

차 례

1. 성경신학에서 본 성경의 중심사상 ------------------------------ 3

* 성경의 역사성 * -------------------------------------------- 3

* 성경의 역사관 * -------------------------------------------- 3

* 성경의 중심 사상 * ----------------------------------------- 5

* 아브라함과 족장 역사 * ------------------------------------- 6

* 종합 * ---------------------------------------------------- 8

2. 출애굽의 의미 ----------------------------------------------- 9

* 애굽으로의 이주 * ------------------------------------------ 9

* 모세 * ----------------------------------------------------- 10

* 10재앙의 의미 * -------------------------------------------- 11

* 광야 생활의 의미 * ----------------------------------------- 12

* 율법의 의미 * ---------------------------------------------- 13

* 성막(회막)의 의미 * ---------------------------------------- 16

* 레위기 * --------------------------------------------------- 17

* 종합 * ----------------------------------------------------- 19

* 민수기 * --------------------------------------------------- 19

* 신명기 * --------------------------------------------------- 20

3. 이스라엘 왕국 ------------------------------------------------- 22

* 여호수아 * ------------------------------------------------- 22

* 사사기 * --------------------------------------------------- 23

* 사무엘서 * ------------------------------------------------- 25

* 다윗 * ----------------------------------------------------- 27

4. 선지자의 역할(선지서의 의미) ---------------------------------- 30

* 다윗 왕국 * ------------------------------------------------ 30

* 북 이스라엘 * ---------------------------------------------- 31

* 아합과 이세벨 * -------------------------------------------- 33

* 엘리야 * --------------------------------------------------- 34

* 요나서 * --------------------------------------------------- 37

 

 

 

1. 성경신학에서 본 성경의 중심사상

 

* 성경의 역사성 *

성경의 대체적인 성격은 창세기로부터 계시록까지를 훓어볼 때(지혜서, 시가서 제외) 근본적으로 하나의 역사를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즉 하나님이 천지 만물을 창조하신 역사에서 계시록의 마감하는 역사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역사의 성격 중에 첫째로, 성경은 하나의 관념이나 사상을 이야기하기 보다는 옛 시간과 공간에 뿌리박은 하나님의 역사를 기록하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역사라할 때 대개 전제되는 것이 '시간'입니다. 시간의 흐름 속에서 사건들의 연속성을 역사라 하는데 이 역사라는 것을 어떻게 볼 것인가에 대해서 살펴보기로 합시다.

역사관에 대해서는 다양한 견해들이 있는데, 어떤 이는 '역사는 순환적이다'라고 말합니다. 역사를 마치 봄, 여름, 가을, 겨울의 자연계가 주기적으로 순서를 따라 반복되듯이, 어떤 사건이 반복되는 순환적인 것으로 보는가 하면, 어떤 이들은 '역사를 주기성이다'라고 합니다. 즉 역사는 일정한 주기를 따라서 쇠퇴와 생성 그리고 발전을 되풀이 한다고 합니다. 그 외에도 많은 사람이 역사의 성격에 대해서 다양히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이제 특별히 성경에 기록된 역사성을 살펴보기로 하겠습니다.

 

* 성경의 역사관 *

예수님께서는 요한복음 20:31에서 구약을 가리켜 즉, 창조로부터 이스라엘의 멸망과 회복 속에서 가리키는 하나님의 역사가 결국 예수 그리스도에 대하여 증거하는 것이라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성경이 말하는 역사의 근본적인 전제와 가장 핵심적인 사실이란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역사"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첫번째 성격이고, 두번째 성격은 "예언과 성취"입니다. 우리는 흔히 구약과 신약의 관계를 예언과 성취라 고하는데, 구약은 예언이며, 신약은 그 예언의 성취라고만 문자 그대로 이해하면 오해의 소지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구약은 예언하는 역사요, 신약은 성취되는 역사라 했을 때에 '구약 책 자체가 예언이다' 함과, '구약역사 자체가 예언역사다' 함은 다를 수가 있습니다. 흔히 구약을 예언하는 역사라 할 때, 구약 자체는 별 의미가 없고 신약만이 참으로 중요하다는 생각을 우리로 하여금 능히 가질 수 있게하여, 이것이 그대로 목회나 설교에도 반영이 되어서 대개 목사님들은 구약은 약간 제쳐놓고 예화정도만을 들고서 신약 중심으로 교리 설교를 하거나, 복음의 핵심 내용이 신약에 담겨 있다고 생각하고 신약만 이야기하는 편향적인 모습을 많이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사실 구약의 역사와 신약의 역사 자체만을 놓고 볼 때, 결국 구약의 역사는 예언의 역사만은 아닙니다. 구약 내에도 수 많은 성취 역사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신약도 순전히 성취 역사만은 아니어서 수 많은 예언이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특히 마태복음 등의 신약에서는 예수님에게 일어난 사건을 묘사하면서, 이것은 구약에서 예언한 '이러 이러한 말씀이 이루어지기 위함이라'는 표현이있는데, 대개 이러한 표현들을 너무 극단적으로 해석해서 구약은 순전히 예언의 책, 예언의 역사요, 신약은 성취의 역사라는 식으로 이해하려고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사실 그 '이러 이러한 사건은 하나님께서 예언한 그 예언의 성취'라고 하는 어법이나 표현도 신약에만 나타나는 고유의 표현은 결코 아닙니다. 열왕기하 17장에 보면, 이스라엘이 계속 패역하는 중, 하나님은 선지자를 보내서 계속 회개를 촉구하였으나 계속 완악하게 굴어 망해버리는 역사를 보고 성경기자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그 종 모든 선지자로 하신 말씀대로 심지어 이스라엘을 그 앞에서 제하셨다." 여기에서도 하나님의 말씀이 성취되었다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말씀이 성취되었다는 표현에서 단순히 "구약은 예언이요, 신약은 성취"라고하는 신약 편향적인 해석을 제할 수 있습니다. 여기는 하나님에 대한 깊은 진리가 담겨 있습니다. 다시 말해 '역사란 무엇이냐?'하면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의 성취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라함은 곧 하나님의 뜻과 계획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역사라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과 계획이 실현되는 것을 말합니다. 이와같이 역사라는 것은 '하나님께서 뜻하시고 계획하신 것을 선지자를 통해 알리시고, 말씀하신 그 말씀이 성취되었다'고 하는 표현은 선지자들을 통해서 성경에 아주 많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역사에 대한 두번째의 성격은 '역사라는 것은 하나님의 뜻의 실현이요, 말씀의 실현이며 이는 곧 하나님께서 진정한 역사의 주인이시다'라는 것입니다.

세번째 성격은 "역사는 종국(완성)을 향하여 진전(발전)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생각해야 하는 것은 어떤 의미에서 분명히 구약의 역사나, 신약의 역사나 다 하나님의 말씀이 실현된 역사이기에 이러한 의미에서 구약의 역사나 신약의 역사에는 질적인 차이가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 실현이라는 관점에서 보면 둘다 똑 같은 성격의 똑 같은 동질의 역사인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구약의 역사와 신약의 역사를 비교해 보면, 무언가 구약의 역사 자체로는 불완전한 면을 항상 갖고 있습니다. 그러한 면이 있기 때문에 더우기 마태복음과 같은 표현들과 사건들 '이것은 구약에서 말씀한 것을 이루게 함이라'와, 히브리서의 '신약의 그림자와 같다'라는 표현이 생겨나게 되었습니다. 신.구약 역사는 다 같이 하나님의 말씀의 실현이라는 똑같은 성격과 질(quality)을 갖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말씀과 뜻의 실현이라는 관점에서 보면 신.구약역사는 똑같은 성격과 질을 가짐에도 불구하고 서로의 역사를 비교해 볼 때 '신약 역사가 우월하다(표현에 어패가 있긴 하지만). 구약 자체는 불완전하여서 분명히 구약은 신약이 없으면 안되겠다'는 느낌을 갖게 됩니다. 그렇다면 이렇게 상반된 사실들을 어떻게 조화시킬 수 있을까?하는 문제가 생기는데, 이것은 역사가 종국(완성)을 향하여 진전하는 역사라하면 두 가지 다 수용할 수 있습니다. 똑같이 하나님 말씀의 성취 역사이지만 그것이 어떤 종국(완성)을 향해 나아간다 할 때, 그 전(前) 단계는 그 다음 발전 단계가 없을 때 그 자체는 불완전하게 되어있습니다. 왜냐하면 그 전체가 완성을 향해 발전해 나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역사도 마찬가지 입니다. 종국의 예수 재림을 치닫기 때문에 우리 역사 자체만을 볼 때는 무언가 불완전한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 성경의 중심 사상 *

또한, 역사관 자체에 이미 암시되어 있지만 성경의 역사가 어떤 시작점을 갖고 완성을 향하여 나아간다할 때, 그것은 중구난방식의 역사이며 아무런 상관도 없는 서로 다양한 여러가지 역사 흐름이 교차하고 서로 상호 연관성이 없이 진행되고 있는가? 아니면, 역사 전체를 꿰뚫어 본 중심적 흐름이 있는가?하는 것을 검토해 보는 것이 의의가 있겠습니다. 구약의 역사가 중구난방의 역사가 아니고, 여러가지 서로 교차하고 제각기 흘러간 역사가 아니라면, 그 역사 중심과 핵심적인 흐름이 무언가 있겠는데, 바로 그 역사 전체 중심을 꿰뚫는 것을 '하나님의 계획'이라 하겠습니다. 우선 이를 제일 먼저 암시하는 것은 성경에서 첫번째 성격으로 뽑았던, '구약의 모든 역사가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한다'는 말에서 이미 암시를 받을 수 있습니다.

모든 역사가 한 인격을 지시하며 증거하는 만큼 '그 역사는 동일성'을 갖습니다. 그런데 구약이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한다는 막연한 말 보다는 좀더 구체적인 중심 사상을 살펴보기로 하겠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라는 한 인격을 두고 볼 때 구약은 예수 그리스도를 직접적으로 이야기하지 않고 있기 때문에(예외:시편의 메시야 시, 직접 예언하는 선지서, 요한복음에서 예수님 자신이 '구약 역사는 자신을 증거한다'고 하신 말씀) 무엇을 매개로, 어떤 방식으로 구약의 역사가 예수를 증거하는지 관심을 가져봅시다.

마태복음 1장을 살펴보자면, 예수 그리스도의 역사를 기록하면서 하나의 족보를 보여주는데, 족보란 하나의 단순한 역사를 나타냅니다. 여기서예수 그리스도의 역사 근원을 살펴보면 아브라함으로 거슬러 올라 감을 볼 수 있습니다. 먼저 아브라함의 역사를 살펴보면 창세기 12:1-3절에서 하나님께서는 갈대아 우르를 떠나 하란으로 하란에서 다시 가나안으로 가라고 하시면서 "네 본토 친척 아비집을 떠나 ... 너로 하여금 복의 근원으로 삼겠다"고 하셨습니다. 여기에서 하나님은 어떤 땅에 어떤 큰 민족(nation)으로서 나라를 건설하시겠다고 이야기하고 있는데, 이는 창세기 11장의 바벨탑 사건과 대조를 이루고 있습니다. 창세기 11장의 나라 건설은 노아 이후의 도시 건설로서, 저주와 멸망으로 마쳐지는데, 창세기 12장의 또 다른 나라는 온 세계 민족의 축복이 된다고 선언합니다.

그러면 이 두 나라의 차이점은 무엇이겠습니까? 창세기 11장의 바벨탑사건에서 세워진 나라는 순전히 인간의 힘으로 건설된 인간 왕국이며, 창세기 12:1절의 왕국은 처음부터 끝까지 아브라함으로 하여금 '내가 네게 지시한 땅으로 가서' 세우는 철저히 하나님 자신이 세우시는 나라입니다. 이는 매우 의미가 깊은 내용으로서, 이 두 왕국을 대조시킬 때 그 둘의 운명은 11장의 인간 왕국은 하나님께서 악하게 보시어 다 멸하여 온 땅에 흩어지게 하는 심판과 저주로 끝마치는 나라인데, 12장은 그 흩어진 인간 세계에서 한 사람을 불러서 나라를 세우는 것으로 이 나라는 축복의 나라가 될 것이요, 온 세계 민족의 복의 매개체로서 복의 나라가 된다는 것입니다.

이제 성경(구약 역사)이 예수님을 증거한다고 할 때 어떻게 구약 역사와 관련이 되는가에 대해서 살펴봅시다. 마태복음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또 다른 근원은 다윗입니다. 다윗과 관련된 하나님의 역사 계획을 살펴보면 이는 하나님의 나라 건설입니다. 이런 맥락에서 살펴볼 때 마태복음 1:17절에서 족보에 대하여 세 부분으로 나누어서 구약 역사를 다룬 의미와 일치합니다. 즉 아브라함-다윗까지는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약속하며 선언하신 이스라엘 왕국 성립시기이고, 다윗-포로시대까지는 그 나라의 실패 역사이며, 포로시대-예수 그리스도까지는 하나님의 약속을 따라 하나님 나라의 회복이 시작되며 그 회복을 기다리는 시기입니다.

이는 곧, 마태복음 첫 부분에서의 예수님의 족보 자체가 '성경 역사는 하나님 나라 건설을 위한 역사'임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를 더욱 확인해 줄 수 있는 것으로서는 그리스도의 예비사역자인 세례 요한의 외침으로서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왔느니라"입니다. 여기에서 천국은 곧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또한 예수님 자신이 최초로 선포하신 메시지 역시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왔다"였습니다. 이는 곧 아브라함을 통하여 다윗에게서 건설된 그 나라가 불완전하고, 실패로 끝난 나라를 하나님의 은혜 약속에 따라서 다시 회복하고 완성하기 위해 오신 분이 예수 그리스도임을 말합니다. 예수 그리스도 사역 자체가 하나님 나라 건설임은 공관복음에도 역시 나타나 있습니다. 또한 사도행전 마지막 절에서 바울은 로마에서 전한 복음이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고 가르친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 외에도 예수 그리스도 사역과 사도의 사역이 하나님의 나라에 관한 것이라는 예는 성경에 많이 나타나 있습니다.

 

* 아브라함과 족장 역사 *

창세기 12장은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시겠다'는 하나님의 선포로 시작됩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을 부르신 사건의 의미와, 또 아브라함에 대한 그 선언 이후 어떤 사건이 일어났는가에 대해 살펴보기로 합시다. 아브라함이 롯과 사라를 데리고 하나님이 지시한 땅인 가나안 땅에 왔는데 이 땅은 창세기 12:6절의 그 땅이며, 하나님의 나라가 세워지는 땅이었습니다. 그 이후의 족장사를 대체적으로 살펴봅시다.

먼저 롯과 헤어지는 사건이 있습니다. 이 사건의 표면적 이유는 가축이었으나, 롯이 소돔과 고모라를 택하고 떠난 뒤에 즉시 하나님께서 '이 땅을 너와 네 후손에게 주리라'고 하셨는데 이는 곧 하나님과의 약속에서 롯이 제하여짐을 의미합니다. 이 외에 평생을 아브라함에게 충성한 청지기 엘리에셀도 제외됩니다. 이때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몸에서 난 자를 약속하셨습니다. 또한 사라는 경수가 끊어져 생산할 능력이 없자, 몸종인 하갈을 통해서 이스마엘을 얻었으나 교만해진 하갈은 좇겨나고 이 하갈에게 하나님의 사자가 나타나서 돌아가서 사라에게 복종하라고 명합니다. 이는 곧 이스마엘과 이삭의 관계를 예시합니다.

갈라디아서 5장에서는 하갈-노예, 사라-자유한 여인이라 표현했고 이렇듯 어머니의 관계를 주종관계로 묶으면서 이삭과 이스마엘의 관계를 확정하였으며, 오직 상속자는 이삭임을 말해줍니다.

야곱과 에서는 쌍둥이로서 이미 태중에서 아브라함의 후계자가 결정되어 하나님은 야곱을 선택하셨습니다. 이러한 족장사의 의미는 무엇이겠습니까? 곧 누가 아브라함의 후계자가 될 것인가?하는 문제입니다. 이는 곧, 하나님의 약속을 상속, 참여하는 자로서 누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삼을 것인가?하는 문제인데, 이것은 사람의 혈통으로 정해진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주권적인 행하심과 약속에 의해서만이 유업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특별히 이것이 가장 명백히 드러난 사건이 에서와 야곱입니다. 이 두 형제는 육신적으로나 혈통적으로 전혀 차이가 없었으나, 이미 태중에서 하나님의 주권적 선택과 은혜로 야곱이 상속자로 인정되었습니다. 바울의 선택교리는 로마서 9장에서 이삭과 야곱의 경우를 들어 설명하였고, 갈라디아서 5장에서는 이삭은 성령을 따라난 자, 이스마엘은 육신을 따라난 자로 표현하였습니다. 성령을 따라난 자란 다음과 같은데, 니고데모에게 예수님은 성령으로 거듭나지 않고는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가 없다고 말했는데, 바로성령으로 거듭난 것을 말합니다. 그렇다면 족장사의 최종적인 확정은 누구에게 돌아갑니까? 야곱입니다. 야곱의 이름은 후에 이스라엘로 바뀌는데, 그 의미는 하나님의 나라 약속을 상속 받을 자로서 그 백성은 이스라엘이며, 야곱의 12아들은 이스라엘의 조상이 되는 것입니다. 결국 족장사는 이스라엘이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그 상속자라는 것을 말해줍니다. 다음에는 요셉의 역사를 통하여서 이스라엘이 애굽으로 이주하게된 경위를 다루며 드디어 출애굽기에서 애굽에서의 이스라엘을 다룹니다.

 

* 종합 *

성경은 근본적으로 역사를 예언한다고 했고, 그 역사는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역사요, 하나님의 뜻과 말씀이 성취되는 역사이고, 하나님이 철저히 주관하시는 역사입니다. 또한, 역사는 종국을 향해 진전하는데 여기에는 그 중심을 꿰뚫는 예수 그리스도가 있습니다. 예수님으로 직결되는 하나님의 뜻과 계획의 구약역사를 연결시켜 보면 결국 하나님 나라의 역사였습니다. 또한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 나라의 회복, 완성하시는 분으로 오셨으므로 진정한 의미에서 하나님 나라를 실현하실 분은 예수님뿐이신 것입니다.

 

2. 출애굽의 의미

 

* 애굽으로의 이주 *

출애굽기의 서두는 "이스라엘 아들들의 이름이 이러하니라......"인데, 이는 창세기 46:9절의 "애굽에 내려간 이스라엘의 아들들 이름이 이러하니 야곱......"과 서로 연결된 암시의 구절입니다. 창세기 46장에서도 출애굽기 초두와 같은 표현이 나타납니다. 이전의 사건이 있었는데, 요셉이 살아있다는 소식을 듣고 야곱이 애굽으로 이주해가며 브엘세바에서 하나님께 묻는 말이 있습니다. 야곱에게 하나님은 말씀하시기를 "애굽으로 내려가기를 두려워말라 내가 거기에서 너로 하여금 큰 민족을 이루게 하리라 내가 너와 함께 애굽으로 내려 가겠고 정녕 너를 인도하여 다시 올 것이며 요셉이 그 손으로 네 눈을 감기리라"고 하셨습니다.

여기에서 야곱에게 하나님은 요셉을 통하여 애굽으로 이주시키는 목적이 무엇인가를 알리고 계십니다. 그것은 그곳에서 '너로 큰 민족을 이루게하리라'는 뜻입니다. 창세기 12장에서 아브라함에게 하신 약속 중에서 '너로 큰 민족을 이루게 하리라'는 그 약속이 애굽 땅에서 이루어질 것을 말합니다. 요셉의 파란만장한 역사는 바로 이 목적을 이루기 위함이며, 45장에서 요셉은 형들에게 '형들이 모함해서 억울하게 팔아 넘긴 것으로 생각치 말고 많은 생명을 하나님께서 구하시려고, 하나님의 나라 건설을 위해 나를 이곳에 내려보낸 것'이라고 이야기 합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 애굽으로 내려 보내신 목적이 큰 민족을 이루게 함임을 알 수 있는데 이와 관련해서 출애굽기 1장 초두에서 특히 숫자에 관해서 두 가지가 언급됩니다. 그 하나는 "70인이 내려가서 셀 수 없을만큼 중다해졌다"는 말입니다. 이는 결국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애굽으로 내려 보내신 목적이 달하였음을 이야기하며, 그 다음 단계인 하나님의 역사가 기대됨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이 짧은 표현은 출애굽이 하나님 나라 역사 건설에서 어떤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가를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별의 셀 수 없을만큼의 중다한 백성의 약속을 지키신 또 다른 배경은 요셉을 알지 못사는 새 왕조가 일어나서 이스라엘을 박해하리라는 것입니다.

첫번째는, 이스라엘은 중다해지고 이에 애굽은 그렇듯 중다해짐을 막으려고 고역을 맡기어 이스라엘을 괴롭히는 것 뿐만아니라, 애굽에 필요한 큰 건축을 위해 괴롭혔고, 두번째는, 산파를 매수하여 아이들을 죽이려 했으나 실패하자 온 사내를 강물에 던지라고까지 합니다. 이와같은 바로의 조처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중다케 하시는 일과 더불어 일어났다는 점에서, 애굽을 이 세상이라 하였을 때 하나님 나라가 건설될 때 하나님의 세력과 그것을 억누르려는 반대 세력이 충돌함을 시사합니다. 그리고 이스라엘 배후에는 하나님이 있고, 애굽 뒤에는 흑암 세력이 있기 때문에 애굽의 핍박은 단순히 정치적인 핍박이기 보다는 진정한 의미에서 하나님과 흑암 세력과의 대결이고, 직접적인 충돌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세상에서 중다한 민족으로 커지고 강대해져간 하나님 나라의 모습에서 세상은 이를 달가와하지 않고, 항상 이 둘 간에는 피비린내 나는 싸움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 모세 *

바로는 모든 사내아이를 강물에 던지라는 명령을 하고, 이러한 조처에서도 모세는 죽음의 강물에서 살아나고 애굽의 심장부인 바로 궁에서 자랍니다. 여기에서 하나님 나라와 세상 세력과의 투쟁은 어떻게 될 것인가?하는 의문에서, 세상 세력은 실패할 수 밖에 없다는 것을 예시해주고 있습니다. '모세는 바로 궁에서 자라며 학술을 다 배우고 행사에 능했다'는 표현을 받고 있는데, 이렇게 모세가 애굽에서 자란 과정을 '교육'이라고 볼 수 있는데, 왕자로서의 교육은 지도자의 통치 교육입니다. 하나님 나라 백성을 멸하려는 바로의 조치를 통해서 모세는 애굽의 심장부에서 최고의 지도자 교육을 받습니다. 그리고 모세가 백성의 고통 장면을 보고 살인하는 행위는 바로(애굽=세상)의 교육이 무엇인가를 암시합니다.

당시 세상 나라의 통치란 무력을 통한 것이기 때문에 모세는 이를 행하고자 했으나 도리어 실패하고 광야로 도망을 가게 되었습니다. 40년을 광야에서 양치던 모세는 비록 성경이 자세히 설명하고 있지는 않지만, 그 시간 동안 하나님이 교육하셨고, 모세는 변모된 모습을 보여줍니다. 하나님께서 보내시겠다 할 때, 극구 사양하는 모세의 모습은 과거 자신의 힘으로 백성을 구하려했던 모세의 모습과는 매우 대조적입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구원을 수행할 통치의 대리자, 중보자인 모세를 때가 차매 부르셔서 사명을 맡기시는데, 그것은 자유(해방)의 사명으로서 하나님의 백성을 짓누르고 멸하려는 세상 세력으로부터 구원시키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매우 흥미로운 점은 처음에 바로의 이스라엘에 대한 박대 의도, 즉 자신이 지배하고자 했던 그 의도는 이스라엘 백성의 숫적 번성에 대하여 완전히 멸할려던 것 보다는 자신이 control할 수 있을 만큼의 수로 줄여서 이스라엘을 다스리려 했던 것입니다. 이는 세상 세력이 하나님의 나라인 교회를 자기의 이용 목적을 위해서 사용하고자 하는 것을 말해줍니다. 결국 하나님은 세상 세력으로부터 이스라엘을 해방시키고 가나안에 정착시키려고 모세를 부르셨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에 있어서의 자유는 항상 부정적, 소극적인 의미의 자유가 아니어서, 즉 '...으로부터의 자유'가 아닌 '...으로부터 벗어나서 ...으로 향하는 자유'인 것입니다. 이와같이 가나안 땅을 향한 자유의 의미는 하나님께서 세우신 그 땅에서 하나님을 섬기는 자유임을 의미하고, 이는 신약에서도 그대로 적용되어서 죄에서 벗어나 해방된 우리를 하나님을 향해 의의 병기로 살게 하시려는 목적이요, 이것은 변함없는 하나님의 의지임을 볼 수 있습니다.

 

* 10재앙의 의미 *

사명을 부여받은 모세와 바로의 대립 장면은, 하나님의 대리자와 흑암 세력의 대리자와의 투쟁으로 시작이 됩니다. 열가지 재앙을 통해서 보여주신 것은 애굽의 풍요와 생명의 근원이라 믿었던 그 모든 것들(나일강, 토지 ...)이 하나님 앞에서 전혀 무력하다는 것을 보여주었고, 이 세상을 직접 다스리시는 분은 누구인가? 너희 인간의 모든 생사화복이 누구에게 달려 있는가?를 보여주셨습니다. 또한 그들의 모든 우상까지도 완전히 파괴하셔서 하나님만이 이 세상의 온전한 통치자이심도 보여주셨습니다. 이처럼 출애굽기 전체의 흐름이 하나님 나라와 이 세상간의 투쟁, 하나님과 흑암 세력과의 투쟁 역사라 할 수 있는데, 이 투쟁의 절정을 이루는 것이 유월절과 홍해 사건입니다.

이 둘은 결국 같은 것입니다. 유월절에서는 애굽의 장자들을 치는 것으로서, 시편에서는 이것에 관해 말하기를 '애굽의 기력의 시작을 치셨다'고 표현하고 있으며,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대적 세력인 애굽의 세력을 꺾으신 것'이라고 말합니다. 홍해 사건에서는 애굽의 군대를 모두 수장시킵니다. 이는 한 나라의 세력은 군사력으로 대변한다고 볼 수 있으므로 유월절과 홍해 사건은 하나님 나라를 멸하려는 세상 세력에 대하여 쳐부수심이요, 그 공통점은 죽음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 역시 죽음 직면의 위험에 처했으나 유월절에는 양의 대속적인 죽음으로, 홍해 사건에서는 하나님께서 마련하신 구원 중보자인 모세에 대한 믿음으로 죽음의 영역인 바다 속을 통과합니다. 그러므로 어떤 의미에서 이스라엘 역시 죽음을 통과한 것입니다. 이렇듯 유월절과 홍해 사건을 경험한 이스라엘에 대해서는 옛 애굽 생활의 종결이요, 옛 이스라엘로서는 죽었다는 의미이며 이제 이스라엘은 새로운 존재가 되었다는 의미입니다.

이렇기 때문에 고린도전서 10장에서는 홍해 사건을 세례로 비유합니다. 이 세례의 의미는 로마서 6장에서 옛 사람이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죽어버리고 그리스도의 부활 생명으로 새로운 존재가 됨을 말합니다. 그렇다면 유월절, 홍해 사건에 대응하는 신약의 사건은 무엇이겠습니까? 바로 그리스도의 십자가 부활입니다. 유월절의 경우는 하나님께서 그의 대적인 세상 세력을 가장 결정적으로 꺾으신 하나님의 전쟁 승리임을 보여주는 것이며, 십자가는 하나님의 백성을 노예로 삼고자하는 죄의 세력을 꺾으신 것이라고 이야기합니다.

 

* 광야 생활의 의미 *

홍해사건 이후 애굽 노예 생활에서 해방된 이스라엘의 존재 의미는 무엇인가? 이는 자유로운 삶인데 구체적으로 무엇을 위한 삶인가? 에 대해 생각해 봅시다. 이는 옛 존재를 벗어버리고 새로이 시작된 이스라엘 삶의 목적은 하나님을 섬기기 위한 삶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삶의 실제 모습은 광야 여행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은 애굽에서 해방된 후 이제는 자유로운 삶이라 여겼는데 실제 맞부딪힌 상황은 또 다른 형태의 죽음이었습니다. 그래서 차라리 애굽의 노예 생활로 되돌아감이 낫다고 여길만큼 고생스러운 생활이었습니다.

그러나 이 생활은 우선, 하나님의 임재 표시였던 구름기둥, 불기둥으로 하나님과 함께하는 여행(생활)이었고, 이 여행은 분명한 목적지가 있는 여행이었습니다(가나안). 이 죽음의 땅을 어떻게 여행했느냐 하면, 하나님의 이적적인 능력, 은혜 베푸심을 통해살 수 있었던 여행이어서 먹을 것이 없는 곳에서는 만나와 메추라기를 보내셨고, 도저히 물이 없었던 곳에서는 반석에서 생수를 내게하셨습니다. 결국 이것은 신약에서 상응되기를 히브리서에서 신자의 생활을 광야 생활에 비유하고 있으며, 하나님의 거룩한 계명 앞에 선 신자의 삶이란, 특히 악한 세상 가운데서 자연의 힘으로는 도저히 살 수 없으나 오직 하나님의 능력으로만 살 수 있다고 말합니다.

그 구체적인 모습이 성령의 생활입니다. 출애굽기 25:25절 이하에서 광야 생활의 또 다른 의미는 시험기간으로서, 이스라엘의 신앙을 시험하여서 연약한 신앙을 단련하는 기간이었습니다. 이와같이 광야 여행이 시작된 다음 도달한 것은 시내산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시내산으로 이스라엘을 부르사 19장 1-4절에 "이스라엘 자손이 애굽 땅에서 나올 때부터 제 삼월 곧 그 때에 그들이 시내 광야에 이르니라 그들이 르비딤을 떠나 시내 광야에 이르러 그 광야에 장막을 치되 산 앞에 장막을 치니라 모세가 하나님 앞에 올라가니 여호와께서 산에서 그를 불러 가라사대 너는 이같이 야곱 족속에게 이르고 이스라엘 자손에게 고하라 나의 애굽 사람에게 어떻게 행하였음과 내가 어떻게 독수리 날개로 너희를 업어 내게로 인도하였음을 너희가 보았느니라"고 하였습니다. 즉, 애굽에서 구해내셔서 이스라엘을 선택하신 목적은 우선, 이스라엘의 독특한 위치의 특권으로서 "세계가 네게 속하였음에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너희는 나의 특별한 소유물로서 세상과 구별되는 독특한 위치로서, 구체적으로 너희는 나에게서 제사장 나라가 되며 거룩한 백성이 되리라"는 것입니다. 이때 제사장의 의미는 하나님을 가장 가까이 모실 수 있는 특권과 하나님의 축복을 백성에게 선포, 전달하는 중보자의 역할 수행입니다.

이 제사장의 의미를 이스라엘 전체에게 여타의 민족과 관련시켜서 마치 제사장이 일반 백성과 다르듯이, 이스라엘이 다른 세계의 민족에 대하여 하나님을 섬길 수 있는 특권을 지닌 백성이라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특권은 이스라엘 자신을 위한 특권이라기 보다는, 이 이스라엘을 통해 모든 세계(민족)에 하나님의 축복을 전달케 하려는,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한 매개자, 전달자로서의 의무도 분명히 말하고 있습니다. 이 의무를 감당하기 위한 실제적인 방법에서의 제사장 나라로서 요구되는 가장 기본적인 자격은 "성결의 삶, 거룩한 백성의 삶"입니다. 특히 19장 이후에 나오는 십계명과 구체적 율법은 이스라엘의 구원에 있어서 제사장되는 이스라엘에게 하나님의 특별한 목적을 이루려 함인데, 그 뒤에 율법이 나오는 이유는 성결한 삶을 살기 위한 구체적인 방도이기 때문입니다.

 

* 율법의 의미 *

신약에서 바울이 너무 부정적으로 이야기했기 때문에 다소 피하려는 경향이 있습니다만, 사실 율법도 하나님의 법이고,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당연히 살아야하는 삶의 도리로서 그 자체가 나쁜 것이 아닙니다. 로마서 7장에서 바울도 율법은 분명히 신령하고도 선한 것이라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문제는 인간의 능력과 악한 의지 때문에, 그것을 거부하고 지킬 능력이 없기 때문에 그것이 우리에게 심판과 정죄가 되는 것이요, 부정적인 결과를 낳을 수 밖에 없습니다. 율법이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살아야 하는 당연한 삶의 도리라 한다면, 이는 삶의 원칙이며, 구속 받은 자(출애굽 경험), 새로운 삶을 시작하는 이스라엘에게서 하나님을 섬기는 원칙이며, 성도가 하나님의 섬김법도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이 율법을 주시기 전에 하나님은 확인하기를 "나는 먼저 너를 애굽 땅 종 되었던 집에서 인도한 여호와라"는 말에서 해방된 자로서의 새로운 삶의 주인이 누구라는 것을, 다시 말해 주인은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암시합니다. 그러므로 출애굽의 구원이란 다른 말로 '카나', 즉 '사다'라는 의미로서 고린도전서에서 피값으로 산 성도를 이야기함과 동일합니다. 즉 애굽의 종 되었던 너희를 해방시킨 하나님으로서의 첫계명은 '나 외에 다른 신을 두지말라', 즉 여호와만이 너희의 유일한 하나님이며, 하나님은 구원을 통해서 이스라엘에 절대적인 권리를 소유하고 있음을 의미합니다.

둘째 계명은 '너를 위하여 새긴 우상을 만들지 말고 또 위로 하늘에 있는 것이나 아래로 땅에 있는 것이나 땅 아래 물 속에 있는 것의 아무 형상이든지 만들지 말며...'. 마치 로마서 1장을 상기시키는 말인데, 피조물의 형상을 앞에 놓고 절한다는 것의 의미는 하나님을 피조물의 수준으로 끌어 내린다는 의미입니다. 즉, 하나님은 피조물과는 전혀 다르며, 비교될 수 없는 초월된 존재이심을 분명히 밝히십니다. 이 의미는 그 당시의 종교 상태를 생각할 때 매우 놀라운 말씀으로서 어떤 것이든지 가시(可視)의 상태로 형상화 말라는 것은, 하나님은 너희 이해 범위를 초월한 자이심을 분명히 밝히신 말씀입니다. 이방 나라의 우상과 하나님을 섬기는 방식에는 현격한 차이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나 여호와는 질투하는 하나님인 즉 나를 미워하는 자의 죄를 갚되 아비로부터 아들에게로 삼사대까지 이르게 하거니와 나를 사랑하고 내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는 천대까지 은혜를 베푸느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방 나라의 신 숭배는 어떤 형상을 만들어서 그 앞에서 의식을 행하면서 신을 섬기나,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계명을 지킴으로써 섬기라 하셨음에 매우 독특함을 보여주십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섬기는 삶의 핵심은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는 것입니다. 또한, 계명을 지키는 자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로, 계명을 지키지 않는 자는 하나님을 미워하는 자로 구별되면서, 계명을 지키는 그 동기를 감정적 차원까지 깊이 파고들고 있다는 점 역시 중요합니다. 이에 상응하는 신약적인 표현은 요한일서와 요한복음에서 발견할 수 있는데, 예를 들어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가 아니면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지 않는다' 등의 말씀이 그것입니다.

의무적인 것, 자기 의(Self-Rightneousness)를 이루기 위한 동기로서의 계명 준수란 하나님께 용납되지 않고 기뻐하시지 않는 것이요, 진정하게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우러난 계명 준수야 말로 하나님께서 받으실만한 것이라 말할 수 있습니다. 여기에서 주의해야 할 것은, 하나님께서는 초월자이심을 분명히 밝히셨고 절대적 섬김을 요구하신다는 것이며, 이 방식은 이방 종교와 달리 그의 계명 준수를 통해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을 분명히 인식해야 합니다.

흔히 이웃간의 계명이라 일컫는 "살인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는 계명은 남의 삶의 권리를 침해하지 말라는 것이 기본이요, "탐내지 말라"는 계명 역시 삶의 권리를 침해하지 말라는 근본 동기로 주어진 것입니다. 그러므로 남의 생명을 도적질하는 것이 살인이요, 생명보다 귀한 다른 남편, 부인을 도적질하는 것이 간음이라 할 수 있습니다. 또한 의식 영역을 언급하며 이웃 계명과 관련된 대인관계(21장), 예를 들어 남의 삶의 권리를 침해 말라는 원칙으로 자세히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21장은 노예에 관한 원칙들로서, 대개 남에게 빚을 지거나, 경제적인 이유로 인해서 자신을 노예로 파는 경우가 있는데 이런 경우 7년만에 놓아 보내라고 합니다. 이 의미는 어떤 인간이 다른 인간에 대해서 절대적인 소유권을 갖지 못한다는 의미, 즉 모든 인간은 근본적으로 하나님 앞에서 동등하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신명기에서는 '노예를 너희 형제라 이야기하면 그의 자립할 근거도 마련해 주라'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왜 여기에서 종의 경우를 언급했느냐를 보자면, '종을 놓아 주라'는 의미는 결국 종의 경우라도 삶의 권리를 박탈할 수 없으며, 어떤 인간도 다른 인간을 완전히 지배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즉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종일 뿐입니다. 7년만에 어떤 이유든지 종을 자유롭게 풀어줌은 종도 하나님 앞에서 자유로이 살 수 있는 권리 보장을 의미합니다. 인간 사회에서 현격한 신분의 차이 중 가장 낮은 계층이 노예이므로, 말하자면 노예까지도 벡성으로서의 근본 권리를 보장해줬다 함은 그 위의 모든 계층도 물론 하나님 앞에서 모든 권리를 보장 받았다는 것을 말합니다.

특히 여종의 경우에는 대개 첩으로 취해지는데 만일 아들에게 줄 경우에는 며느리처럼 대접했습니다. 당시 이방 풍습은 여자 노예에 대하여 완전히 물건 취급을 하였기 때문에 집안의 모든 남자가 관여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아들이 먼저 취했을 경우에 며느리 같이 대접함은 여자 노예도 인간이며 또 같은 형제, 자매다라는 사실입니다. 이는 하나님 백성으로서 삶의 권리를 보장 받았음을 의미합니다. 또한 이방 풍습에서는 싫증이 나면 노예를 다시 팔아버렸는데, 이스라엘에서는 만약 싫증이 나면 최소한 3가지 즉 먹을 것, 입을 것, 부부생활을 보장해 주도록 했습니다. 이는 아내로서의 권리 보장의 의미입니다. 당시 이방 사회 윤리에 대해 이런 윤리는 매우 놀라운 것이었습니다. 그러므로, 노예라는 가장 낮은 계급을 언급함으로써 예증적인 성격을 갖게 되어서 모든 신분의 상하적인 차이를 근본적으로 무시하고 '어떤 계층이든지 너희는 한 형제이다' 임을 이야기 합니다.

22장 25절에서 돈을 꾸이다가 옷을 저당잡거든 해가 지기 전에 돌려 보내라고 합니다. 이때까지의 이웃간의 윤리는 어떤 의미에서 상호 대등한 관계로서 상대방의 권리를 인정하며 보장하고, 침해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돈을 갚지 못한다면 나는 그 옷을 돌려주지 않아도 무방한 법적인 권리가 있습니다. 그러나 내가 오늘 밤에 그가 춥게 잘까를 우려하여서 돌려준다 함은 그를 불쌍히 여기는 긍휼을 아는 자만이 할 수 있습니다. 이는 하나님의 백성의 삶의 윤리 수준이 그저 give and take식의 '나도 너에게 해를 끼치지 않고, 너도 나에게 해를 끼치지 말라'는 윤리적 차원 이상의 것이어서 불쌍한 자를 불쌍하게 여기며 사랑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차원에까지 이르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이라는 맥락에서 이해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는 해도 좋고 안해고 좋은 것이 아니라, 해야만 하는 것이고 그렇지 아니했을 때 하나님이 책임을 물으시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결국 신약의 산상수훈의 윤리 수준과 모세의 윤리 수준이 조금도 다름이 없는 본질적으로 같은 것입니다.

24장에서 모세를 통하여 언약을 맺으시는데 그 핵심은 "나는 너희 하나님이 되고 너희는 내 백성이 되리라"입니다. 이는 하나님과 이스라엘 벡성이 왕과 그 통치를 받는 백성이 되는 관계를 의미합니다. 이는 하나님의 왕국 언약으로서 이 관계에는 하나님의 백성된 삶의 도리를 지키는 전제가 되는데, 이 언약은 피를 흘린 의식을 통하여서 확정지어집니다. 이스라엘은 모세를 통해 하나님의 순종 요구를 맹세함으로써 시내산 언약을 맺습니다. 25장부터는 성막 건설을 통한 헌금을 하도록 하는 하나님의 명령이 나오고, 31장에서 33장은 헌금을 받아서 성막 짓는데, 출애굽기는 성막을 지음으로 끝나집니다.

 

* 성막(회막)의 의미 *

성막은 하나님의 임재하는 처소로서 하나님과 백성이 만나는 곳이며, 출애굽기에서 성막의 배열 모습은 성막을 중심으로 이스라엘 백성이 둘러 싸여지는데, 이는 백성 가운데 거하시는 하나님의 모습임을 보여줍니다. 사실 이는 계시록 11장과 일치하여서 출애굽기 마지막에 성막의 완성 모습을 보여 줌은 큰 의미가 있습니다. 구원의 완성은 하나님이 백성 가운데 임재하심으로 이루어집니다. 그런데 성막의 구조를 살펴보면 대충 세마포 - 수양의 가죽 - 수달의 가죽의 세겹이고, 세마포 안장에는 그룹을 수 놓고, 전 벽은 금으로 둘러 싸여 있고 또 그룹들이 수 놓아져 있습니다. 법궤 덮개 역시 그룹들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 모습은 하나님이 계시고 그 주위에 천군 천사(Heavenly Being)로 둘러싸여 있는 것으로 이것은 온 세상을 통치하시는 하나님과 온 우주 만물을 통치하시는 통치자의 모습으로의 하나님을 의미합니다. 이사야의 성전 환상은 '만군의 왕'이라 표현하고 있습니다. 어떤 의미에서 성막은 하늘의 보좌(Heavenly Coat), 즉 모든 지상 역사를 통치하여 결정하는 하늘 어전의 모습을 따서 만든 것입니다. 그래서 히브리서는 성막을 하늘 성소의 모양이라고 말합니다.

그렇다면 성막에 거하시는 하나님은 어떤 분이시겠습니까? 그 백성을 다스리는 왕으로서 임재하여 계신 분으로서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통치가 이루어지는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그러나 출애굽기의 모습에서 특징이 있다면, 모든 것이 이동을 전제로 하였기 때문에 성막은 임시 처소로서 잠정적인 성격을 가집니다. 스데반은 이런 진영으로 이동하는 것을 광야교회라 부름으로써 오늘날 교회가 어떤가를 시사해줍니다. 광야 생활의 목적은 이스라엘이 광야를 여행하면서 오직 하나님의 능력으로서만 생존이 가능하며, 이러한 악조건 가운데서 시내산에서 하나님의 율법을 받아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사는 법을 철저히 단련하는데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 가운데 거하시고 함께 진행하시며 그들의 대적으로부터 보호하시고, 그들을 먹이시고, 입히시는 자유로운 왕의 모습으로 부각되고 있습니다. 출애굽기 24장 이후에는 성막에 관한 것으로 계속됩니다. 출애굽기 25장은 성막 건설을 위한 헌금, 26장은 건설 방법, 31장은 기술자와 실행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성막의 건립이 중시되는 가운데 금송아지 사건이 일어납니다. 그렇다면 성막이 세워지는 도중에 금송아지가 왜 등장하는가 하는 의문과, 성막의 성격에서 금송아지에 대한 암시는 어떤 것인가에 대해 살펴 봅시다.

금송아지 사건은 모세가 시내산에 오른 후 빨리 내려오지 않자 백성들이 지쳐 금송아지를 만들었습니다. 모세는 이스라엘에게 하나님의 대리자로서 이적과 능력을 나타냈었기 때문에, 백성들은 가시적으로 하나님을 모세를 통해서 봤으므로 모세가 빨리 내려오지 않자 불안해지기 시작했으며, 무언가 보아서 확인 될 수 있는 형상을 원했읍니다. 산에서 내려온 모세는 이 모습을 보고 두 돌판을 깨뜨리고 백성들을 쳐 죽입니다. 그 후에 모세가 생명을 걸고 하나님께 간구한 뒤 이스라엘에 대한 하나님의 노를 거두고 나서 두 돌판을 다시 받게 됩니다.

모세가 두 돌판을 깨뜨린 이유는 두 돌판을 언약판, 증거판이라 성경에서 표현했으므로 이스라엘이 범한 죄의 성격이 제1계명을 범했기 때문에, 이 언약이 무효화 되었음을 이스라엘에게 행동으로 보여준 것입니다. 그리고 이스라엘이 깨뜨린 언약은 하나님께서 긍휼히여겨 용서하심으로 모세에게 다시 두 돌판을 깎아 오라고 명하십니다. 이는 언약 관계의 회복을 뜻합니다. 이 사건이 성막 건설의 한 과정 속에 있는 것은 하나님의 용서를 통해 깨어진 언약을 회복함을 암시합니다. 이것이 레위기에서는 속죄제 등 여러가지 제사 형태로 나타납니다. 이스라엘 한 가운데 있는 성막에 하나님께서 통치하는 왕으로 임재해 계시되 법궤 위(그룹 사이)에 존재하시는데, 이 법궤 안에는 증거판(십계명)이 있고, 십계명은 언약을 상징하며 이것은 이스라엘과 맺은 언약을 근거로 이스라엘을 통치하는 하나님을 상징합니다.

 

* 레위기 *

우선 레위기를 진행하면서 출애굽을 살펴보면 25장 전체는 성막을 언급하여 성막 완성으로 출애굽이 종결됩니다. 흔히 레위기는 제사 직분과 관련된 여러가지 규례라 여기는데 이는 잘못된 것으로 레위기는 시내산에서 받은 하나님의 율법이 계속됨을 염두에 두어야 합니다. 레위기 내용은 성막 중심의 하나님을 섬기는 삶을 이야기합니다. 먼저 지성소에서 이루어지는 여러가지 규례에서 공동체, 사회 생활에 관한 모든 생활의 규례로 확대됩니다. 그러므로 의식 영역에서의 하나님을 섬기는 삶(Courtesy Life)이 제일 초두에 성막에서 이루어지는 의식적 섬김의 삶으로 언급되었음은 매우 의미가 있습니다. 즉, 이는 예배의 의미입니다. 이스라엘의 섬김에서의 핵심은 성막에서 이루어지는 의식적 섬김의 삶이라는 것을 고려해 볼 때, 교회에서 드리는 예배를 가볍게 드려서는 안될 줄 압니다. 특히 선지서에서 '온갖 제물보다 하나님을 순종한다는 것이 중요하다'는 등의 표현이 의식적인 예배를 상당히 소홀코자 하는 충동을 느끼게 만드는데 이는 매우 잘못된 생각입니다.

성경 자체는 의식적인 예배를 매우 중요시하며, 여기에서 드린 여러 제사 - 속죄제,속건제, 화목제... - 들의 의미는 성소에서 이루어지는 하나님 섬김의 삶으로 항상 피(Blood)가 전제되어 있습니다. 이는 하나님이 성소에 임재해 계시고 제사장이라는 중보자가 있다해도 예배드리는 자가 성막에 찾아와야 만남과 교제가 이루어집니다. 이에 피가 필요하다는 것은 거룩하지 못한 백성이 하나님을 뵙기 위해서 필요한 전제조건이 되어졌습니다. 이렇게 속죄의 필요성 때문에 성막은 존재하게 되었습니다. 성막에서 속죄와 헌신, 감사, 화목제 등을 드리면서 제사장과 다른 사람들과의 서로 나누는 교제가 이루어졌습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헌신, 감사 등은 의식을 통하여 이루어지며, 또한 실제로 이러한 헌신, 감사, 용서, 교제 등은 우리 삶 속에서 이루어져야 합니다.

특별히 하나님의 성소에서 이루어지는 의식적 삶의 의미는 실제로 감사, 헌신, 교제, 용서 등이 우리 삶 속에 가장 밀도있게 이루어지는 순간이므로 이처럼 예배가 중요합니다. 이러한 예배가 진정한 예배가 되도록 가르치고 지켜야 할 의무가 있습니다. 선지자가 문제 삼는 것은 하나님 성소에서 이루어지는 의식적인 섬김의 삶이 우리 실제의 삶에서 이루어지는 하나님 섬김의 삶의 토대가 되지 않고 연결이 되지 않을 때, 겉으로만의 의식적인 예배가 무의미하다고 한 것이지 의식적인 형태의 하나님 섬김의 삶 전체가 무의미하다거나 별로 중요치 않다고는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대개 성소에서 의식을 통한 하나님의 섬김은 백성이 직접 참여하지 않고, 제사장이라는 중보자를 통했습니다. 이처럼 백성을 대신한 중보자인 제사장은 반드시 더욱 엄격한 성결이 요구되었습니다. 가장 명백한 사건은 나답과 아비후 사건입니다. 그런데 이 성결은 하나님을 가까이 하는 제사장이 본보기가 되어서 온 백성에게까지 확대 적용됩니다. 정결한 음식 등을 열거하며 제사장이 이를 백성에게 가르치라 했는데, 제사장은 백성에게 모범을 보여야함을 암시합니다. 또한 성결은 하나님을 가까이 모시는 사람은 성.속을 구별하라는 것으로서, 성.속을 구별함은 짐승과 부정한 음식, 피부병, 시체만진 것, 여자의 경우는 월경, 아이 낳고 난 뒤의 처리 등에서 말씀하십니다. 또한 불법적인 성관계도 포함됩니다. 왜 하나님은 성.속을 구별하기를 말씀하시면서 구체적인 세칙을 먹는것, 입는것, 씻는것 등으로 표현하셨을까요? 이것은 우리의 성.속의 삶은 이러한 것까지 철저히 하시기를 요구하시며 속사람의 성결이 이러한데까지 철저히 깨끗해야 한다는 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를 크게 오해한 사람들이 바리새인이었습니다. 이런 시각에서 본다면 부정한 것을 물로 씻으라는 것은 의식적인 행동을 하라는 것보다 먹고, 입고, 마시고, 잠자리까지 구별해야 하는 삶의 정결을 뜻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상징적인 의미는 성찬식 예로 계속되기도 합니다. 또한 성생활은 전통적으로 매우 터부시하는 경향이 있어서 실제 가르치기를 매우 꺼려하는데, 레위기에서 성생활에 대하여 많이 언급하고 있는 이유는 부도덕하고 타락한 사람의 타락이 성적인 영역에서 가장 두드러지게 나타나기 때문이라고 말할 수 있으며, 로마서에도 타락의 가장 극악한 경우를 동성연애로 이야기합니다. 그리스도인의 성결한 삶이 이런 부분에까지도 나타나야하며 특히 요즘같이 성윤리가 타락한 시대에서는 더욱 교회에서 철저히 가르쳐져야 합니다. 오히려 인간의 마음은 계명을 주면 그 계명을 틈타서 범죄케하는 경우가 있기는 하지만 이를 잘 피할 수 있도록 지혜롭게 신경써야 합니다.

이렇듯 하나님 섬김의 삶이 먹고, 마시고, 잠자리까지 철저히 성결이 이루어져야 하는 기본성격이 공동체의 삶, 경제적인 삶까지 확대되어서 노예해방, 토지를 쉬게하는 것까지 확대됩니다. 이와같은 제도 마련의 가장 근본적 성격의 하나는 인간의 죄로 말미암아 왜곡되고 뒤틀려 버린 하나님과의 관계, 즉 파괴된 삶의 질서를 회복하는 기능을 갖습니다. 희년제도, 안식년 등이 그 예인데 안식년에는 노예를 해방시켰습니다. 그 의미는 노예란 일시적으로나마 자신의 삶 질서를 다른 사람에게 유예당하고, 빼앗긴 자이므로, 그들에게 삶의 권리를 회복하는 기회를 희년제도가 준 것입니다. 특히 땅의 경우도 희년이 되면 다시 돌려 주었는데 이는 땅이란 삶의 터전으로서, 생계의 터을 받을 수 없으면 남의 종살이를 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땅을 돌려줌은 바로 삶의 터전을 잃어버린 자에게 그 삶을 회복할 수 있는 기회를 마련해 주는 것입니다.

 

* 종합 *

이제까지를 간추려보면 출애굽, 홍해 후에 새로운 삶을 살게 된 이스라엘을 시내산으로 부르셔서 하나님께서 그들을 구원하신 목적을 알리시고 그 목적 수행의 구체적인 방도로써 율법을 말씀하셨습니다. 그 율법의 내용은 십계명부터 시작하여 의식 영역에서 이루어지는 하나님 섬김의 삶을, 의식적인 형태로써의 하나님 섬김의 법도를 레위기에서 말씀하십니다. 특히 레위기에서 의식적인 형태로써의 하나님 섬김이 결코 가볍게 여겨져서는 안되며 중심을 차지해야 하는데, 이들이 실제 삶의 실생활에서 파고들지 않으면 전혀 무의미하며, 이와같은 섬김의 삶이 하나님과 가까이 만나며 오심으로 나타나야 하는데 이때, 가장 요구되는 것은 성.속을 구별한 성결의 삶으로써 그것이 의식 영역뿐 아니라 우리의 먹고, 입고, 자는 것까지 즉 실제 생활까지 확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 민수기 *

민수기는 이스라엘의 계수로 시작되는데, 하나님께서 시내산에서 삶의 도리를 주신 후 이스라엘의 조직화가 시작됩니다. 그런데 이 조직의 특징은 군대조직으로서 행진을 위한 조직이며, 성막을 중심으로 진을 친(움직임을 전제로한) 하나님께서 홍해사건, 유월절 이후 군대로서 이스라엘을 끌어내셨음을 의미합니다. 이 군대(쨔바: :Division)는 결국 이스라엘을 불러내신 목적이 하나님의 군대, 하나님의 전쟁을 수행해야하는 백성임을 밝혀줍니다.

시내산에서부터 광야 생활 중에 있는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군대로서 가나안 땅을 정복해야 했습니다. 그런데 이들은 팔레스타인 남쪽에 정착해서 12정탐을 보내 땅을 알아보게 한 뒤에 이스라엘은 가나안 땅에 들어가기를 거부합니다. 이 의미는 하나님의 목적을 거부하는 것으로서 이에 하나님은 다시 광야를 유리하게하여 불순종의 세대를 광야에서 완전히 제거하신뒤, 새 이스라엘을 형성하는 과정이 뒤따릅니다. 결국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불순종을 철저히 멸하셨다는 점에서 광야 생활의 새로운 의미가 덧붙여집니다.

이전의 광야 생활은 시험기간(Test Period)으로 이스라엘의 순종 여부를 단련하고 시험하는 기간이었고, 이 후의 광야 생활은 그 근본적인 의미 위에 심판적인 요소가 가미됩니다. 그 후의 역사는 계속해서 거듭거듭 이스라엘은 하나님께 반역을 하는데, 그 구체적인 형태로서 하나님의 통치대리자에 대한 즉, 모세에 대한 반기를 들었고 이에 아론과 미리암이 문둥병에 걸린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리하여 출애굽 제1세대는 서서히 죽게되고, 미리암, 아론역시 죽으며 출애굽의 마지막에 모세는 자신의 사역이 달했음을 알고, 눈의 아들 여호수아를 불러 후계자로 세우는 사건을 볼 수 있습니다.

여기에서 하나님의 심판의 독특한 성격이 나타나는데 불순종한 세대에 대하여 하나님은 광야에서 완전히 망하게 하셨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전체에서 보면 완전 멸망 상태라기 보다는 새로운 세대 곧 새 이스라엘을 생겨나게 하심으로 그들의 선대의 불순종과 이에 따른 하나님의 심판을 철저히 겪게 하심으로 심판은 광야 과정을 정화시키고 단련시키는 기간으로 이해되어야 합니다. 이는 상당히 중요한 것으로 뒤의 선지자들은 앞으로 오는 심판의 의미를 항상 광야 생활의 경험에 비교하여 이야기합니다. 그 대표적인 예로 호세아서를 들 수 있습니다. 특히 제1세대(불순종 세대)의 멸하심과 동시에 제2세대의 준비기간으로 두심을 단적으로 알 수 있는 것은 민수기가 새 인구조사로 끝남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그리하여 민수기의 첫 인구조사는 출애굽 제1세대, 민수기의 끝 인구조사는 새로운 이스라엘에 대한 인구조사입니다.

 

* 신명기 *

신명기의 배경은 불순종의 세대가 어떻게 되는지를 철저히 경험한 새로운 이스라엘 세대와 가나안 정복을 눈앞에 두고, 제1세대의 마지막 사람이라고 볼 수 있는 모세가 새로운 이스라엘을 여호수아의 지도 아래 가나안 정복을 내보내면서 마지막으로 행하는 고별사라 볼 수 있습니다. 여호수아 24장 역시 여호수아의 고별사가 있게되고, 사무엘 역시, 예수 그리스도도 요한복음 마지막 부근에서 고별사를 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모세는 자신의 죽음을 앞두고 이스라엘의 가장 중요한 사건 내용을 유언하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가장 강조되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라 너희 생존, 생명이 어디에 달려 있느냐 하나님 말씀에 달려있다"입니다. 그런데 신명기 31:19절에서 흥미로운 점은 모세가 증거의 노래를 지어부르라 했는데 그 내용은 오히려 "이제까지 너희 생명이 하나님의 말씀지킴에 있다"고 그렇게 당부를 하면서도 29절에서는 "너희가 아무리 노력해도 너희는 끝내 하나님을 배역하다가 심판당하리라"는 이스라엘에 대한 예언을 하고 있습니다. 이것의 의미는 구약제도 자체가 갖고 있는 불완전성을 암시하는 것이며 또한 아직까지도 구약은 더 완전한 모습을 기다려야함을 암시합니다. 이 장의 의미가 구체적으로 드러난 것이 선지서입니다.

 

3. 이스라엘 왕국

 

* 여호수아 *

여호수아서는 가나안을 정복하여 하나님의 나라를 세울 땅을 정화하여 그 땅의 모든 더러운 요소와 하나님을 거스리는 요소들을 처단하는 정복사역에 대하여 다루고 있습니다. 우선 처음에 요단강을 건너는 사건, 하나님의 정복사역의 대리자로서 여호수아를 확인하는 내용이 있었고, 이제는 여리고, 아이성의 정복사역이 시작됩니다. 그런데 이 사역이 시작되기 전에 요단강을 건너서 길갈을 치는 동안 염탐꾼 2명을 여리고성에 들여 보내는데, 이는 모세 당시의 12정탐을 들여 보냄과 그 의미가 비교됩니다. 이는 당연한 전략의 필수적인 절차라고 표현하는 사람도 있어 하나님께서는 이적적으로 전쟁을 이기게 하시면서도 인간의 노력도 허락하시므로 우리의 신앙생활에서도 인간 노력의 필요성을 이야기하는 일부사람도 있지만, 그 의미 보다는 정탐의 목적은 단지 여리고성의 약점을 살피기 위함보다는 다른 무엇이 있습니다.

여호수아에게 돌아와서 보고하는 두 정탐꾼은 말하기를 "하나님께서 이 성을 우리에게 붙이셨다"고 확인하고 담대한 신앙을 얻고 왔습니다. 그리고 사실 두 정탐꾼은 어떤 군사적 형편을 살피고 온 것이 아니라, 라합의 신앙고백을 통하여서 가나안 백성의 마음이 이미 녹아났다는 것을 알았던 것입니다. 칼과 창을 사용했던 시기에서 심리전은 매우 중요하여서 심리전에서 졌다함은 벌써 전쟁에 졌음을 지적하는 것으로서 두 정탐꾼은 심리전에서 벌써 이겼음을 확인하고 왔을 뿐입니다. 성경이 심리전의 싸움을 어떻게 쓰고 있는가를 보면, 에이마( ;두려움)을 임하게 하셨다고 합니다. 이는 곧 항상 하나님의 전쟁을 묘사하는데 많이 쓰입니다. 하나님께서 홍해와 요단강을 이적적으로 건너게 함으로써 이미 심리전에서 하나님께서 전쟁을 수행하시고 가나안을 꺾어버렸음을 말합니다. 여리고성 싸움 자체에서 이스라엘은 전혀 힘쓰지도 않았으며, 철저한 하나님의 전쟁이어서 이스라엘은 고작 나팔만 불고 성을 돌다가 이미 공포에 질려버린 자들의 목을 베는 것 밖에는 없었습니다. 또한 가나안 정복이 오직 하나님에 의해서 진행된다는 것을 보여주는 사건이 있는데 그것은 여리고 싸움과는 정반대인 아이성 공략이었습니다. 이 사건은 가나안 땅에 자리잡을 이스라엘의 싸움은 그 숫자의 많고 적음에 있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서 이스라엘과 함께 하시는가, 하시지 않는가에 따라서 승패가 갈라집니다. 이 두 사건을 통해서 가나안 정복전쟁의 근본 성격이 누구의 전쟁인가를 분명히 보여주셨습니다.

이 두 사건과 더불어 재미있는 것은 라합의 구원과 아간의 멸망입니다. 본래 하나님은 명하시길 "가나안에 있는 것은 하나도 살려두지 말고 다 죽이라"고 하셨는데, 라합은 구원을 받습니다. 정반대로 아간은 본래 육신적으로는 하나님의 백성이었으나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고 금하신 것을 훔침으로 그 자신이 멸망합니다. 결국 이방인이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되는 것과 하나님의 백성 중 하나가 완전히 망하는 것을 통하여서 구약에 있어서도 진정한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것은 혈연적이고 육적인 조건이 아니라 신앙에 달려 있음을 분명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 다음에 뒤따른 이야기로서는 기브온 백성이 거짓으로 항복하고 화친하는 내용인데 이는 라합의 범주에 포함시킬 수 있는 사건이나, 더 중요하게는 이 사건이 계기가 되어서 주위 남쪽 지역의 유력한 왕들이 연합전선을 맺어 기브온을 치고 이스라엘을 치려는 일이 발생합니다. 그리고 흥미로운 것은 교회의 성결과 관련되어서, 가나안 백성이 홍해와 요단을 육지같이 건넜다는 소식을 듣고 다 전의를 상실했는데도 한 번 싸워볼 만하다는 결심을 굳힌 사건의 계기는 아간 때문이었습니다. 하나님 백성의 실패는 가나안 백성으로 하여금 이스라엘과의 싸움을 할 수 있도록 담력을 주는데, 기브온 항복사건이 계기가 되어 팔레스타인 남쪽의 왕들이 동맹을 맺고 싸움을 걸어와 여호수아가 나가서 쳐없앱니다. 그 다음에 여호수아가 치르는 싸움은 하솔 왕 야빈이 주축이 된 북방 연합군의 주요 점령지를 정복합니다.

그런데 가나안의 위치는 지리적인 위치가 팔레스타인의 중앙지였고 여호수아는 남쪽과 북방을 차례로 정복하여 팔레스타인 전역을 평정합니다. 그리하여 도면을 작성하여서 이스라엘의 열 두 지파로 하여금 성소에서 지역을 나누게 합니다. 그러나 팔레스타인 구석까지 온전히 정복함이 아니었고 주요 거점만을 확보한 원칙적인 정복이어서 기업 분배도 도면상의 분배였습니다. 이렇듯 원칙적으로 지역을 할당한 다음 그 지역에 가서 나머지를 완전히 정복해야 하는데, 나머지 정복사역을 다룬 것이 사사기입니다.

 

* 사사기 *

사사시대에는 원칙적으로 분배받은 기업 땅에 일일이 들어가서 정복사역의 미진한 부분을 완전하게 수행하는 사역이었습니다. 그럼 왜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땅을 남겨 두셨을까요? 사사시대에는 이에 몇 가지의 이유가 있는데 그 한 가지는 너무 갑자기 모든 것을 멸해 버리면 그 땅이 황폐하게되어 야생동물이 너무 많아서 오히려 해를 끼칠까봐이고, 또 다른 것은 이스라엘의 순종을 시험하기 위한 Test Period(시험기간) 성격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것과 덧붙여서 사사기에서 가장 큰 관심사의 하나는 사사기 제일 초두에서 여호수아가 명백한 후계자가 없이 죽자 이때 이스라엘이 성소에 모여서 하나님께 물은 내용은 '우리 중에 누가 먼저 올라가서 나머지 정복사역을 수행해야 하겠습니까?'였습니다.

이 질문은 지도자에 관한 문제로서, 이때 선택된 자는 갈렙이었습니다. 사사기 전편 이후의 이스라엘의 관심사는 계속해서 이스라엘의 통치자인 지도자에 관한 것입니다. 이렇듯 사사기에는 크게 두가지, 나머지의 정복사역과 지도자에 관한 관심사가 큰 흐름으로 대두됩니다. 먼저, 여호수아가 죽고 난 뒤 나머지 정복 사역은 유다지파인 갈렙이 올라가 다른 지파와 협력해서 처음에는 잘 됩니다. 그러나 갈수록 정복사역이 미진하게 되어 가나안 사람들을 다 쫓아내지 못하고 남겨 놓게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그들과 함께 살며 마지막 부분에서는 오히려 단지파 같은 경우 산으로 쫓겨나가 평야는 가나안인이 차지하는 경우까지도 볼 수 있습니다. 이러한 배경으로 중요한 사건이 보김 사건입니다. 보김 사건은 계속 지진한 정복사역에 대하여 하나님의 사자가 책망하기를 "여호와의 사자가 길갈에서부터 보김에 이르러 가로되... 내가 너희에게 세운 언약을 영원히 어기지 아니하리니... 이 땅의 거민과 언약을 세우지 말며 그들의 단을 헐라 하였거늘 내 목소리를 청종치 아니하였도다 그리함은 어찜이뇨"(삿2:1,2)하였습니다. 이스라엘의 불순종의 구체적 내용은 먼저, 그 땅 백성과 언약을 맺음입니다. 즉 이스라엘은 싸움에 힘이 부치자 가나안 사람들과 공존하는 정치적인 화친을 맺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의 단을 헐지 않음인데, 이는 종교적 공존을 허락하는 의미입니다.

하나님께로부터 가장 죄악이 관영한 팔레스타인 땅의 죄를 완전히 제거하고, 진정한 하나님의 전쟁을 수행할 백성의 사명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은 제대로 감당하지 못하여서 정치적, 종교적인 공존의 길을 택하였습니다. 성경이 이방결혼을 엄격히 금하고 있는 이유는, 인간의 가장 깊은 접촉은 부부관계에서 나타나며 종교적인 오염이 대개 부부관계에서 가장 심각히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방의 딸을 취하게 됨은 그들의 종교도 허락해야 했으므로 이스라엘 역시 바알의 종교가 성행케 되었습니다. 이와같이 하나님의 사역을 철저히 거부하고 공존하기를 택한 이스라엘에 대하여 하나님은 내가 가나안 백성을 쫓아내지 않겠다고 밝히고 있습니다.

이것이 너희 올무와 가시가 되리라는 말씀을 하셨고, 사실 이스라엘은 종교적, 정치적 공존으로 인해서 우상숭배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결국 사사기는 이스라엘이 종교적, 정치적으로 가나안과의 공존의 길을 선택함으로써 이 두 가지의 양보때문에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심판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각 이방족속들로 이스라엘을 치게 하십니다. 이방족속의 침략이 심해져서 견디지 못하면 이스라엘 백성은 그때야 회개하고 잠시 하나님을 부르짖으며, 하나님은 사사를 보내셔서 구원하시나 다시 타락케 되고 이러한 악순환의 반복이 사사기에 있게 됩니다.

또한, 사사기의 맨 마지막은 미가 신상 사건과 기브아 사건이 있습니다. 미가 신상 사건은 이스라엘의 종교타락이 어느정도인가를 단적으로 보여주며, 기브아 사건 역시 이스라엘이 도덕적으로 얼마만큼 타락했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줍니다. 특별히 제사장의 첩을 윤간하는 사건과 그 전의 베냐민 지파들의 남색의 풍경은 그 시대가 소돔과 다를바 없이 악하게 타락하였음을 보여줍니다. 사사기에서는 이렇듯 평화공존을 선택함으로 계속 타락하여서 후에는 완전히 이스라엘이 종교적, 도덕적으로 와해되버리는 모습을 보여주고, 이 과정에서 사사의 모습 역시 마찬가지여서 그 예로 드보라의 경우에는 당시에 제 구실을 하는 남자가 없기에 하나님은 여자도 들어 쓰시게 되며, 특히 입다는 자신의 딸을 제물로 바치겠다고까지 합니다. 이는 분명히 하나님은 모세 율법을 통하여서 인신제사를 금하셨는데도 이스라엘을 구원할 사사의 위치에서 이러한 타락상을 보여줍니다.

삼손의 최후 역시 마찬가지로 비참합니다. 물론 사사를 통하여서 구원의 역사를 이루시기는 했지만, 사사 자신의 모습이 점점 악화되고 부정적이며 그 마지막이 미가 신상과 기브아 사건으로 종결됩니다. 이렇듯 사사시대의 몰락을 그리면서 이스라엘 사역의 철저한 실패에 마지막을 암시한, '당시에 이스라엘에 왕이 없기 때문에 제 소견대로 행하더라'라고 하면서 지도자에 대한 문제를 분명히 거론하고 있습니다.

 

* 사무엘서 *

하나님께서 다윗왕국을 세우신 역사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사사시대와 다윗왕국의 연결을 해주는 책이 룻기입니다. 이 룻기는 현숙한 여인의 모습을 다루는 것이 그 내용이 아니라, 다윗의 계보를 분명히 암시하는데 중요점이 있습니다. 사사시대에 한 가정의 몰락이 기근, 즉 하나님의 심판으로 시작되어서 기업을 물을 수 있는 보아스와 몰락한 이스라엘을 예표하는 나오미의 가정이 맺어지면서 회복을 보게됩니다. 다윗은 사사시대의 몰락을 회복하는 사역으로 세움을 받습니다. 사무엘서의 처음은 출생으로 부터 시작하는데 한나의 기도(삼상 2장)를 살펴보면 사무엘의 근본 주제가 다윗왕국의 형성이라 하겠습니다. 그렇다면 사무엘의 사역은 어떤것일까요? 신약에서 누가복음 2장의 마리아의 찬양과 한나의 노래와는 매우 유사점이 많습니다. 누가복음 초두에서 세례 요한과 예수 그리스도의 관계가 다루어지고 있는데,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의 나라 형성을 위해 보내심을 받은 세례 요한과 예수 그리스도의 관계가 사무엘과 다윗 사이에 형성됩니다. 사무엘은 사사시대의 종언을 고하고 새로운 이스라엘의 왕국시대의 준비자로서 다윗을 왕으로 세우고 그의 사역을 마칩니다. 사무엘의 사역이 이스라엘의 왕을 세움과 관련이 있다는 것을 사무엘상 2장의 한나의 기도 후반부, "...땅끝까지 심판을 베푸시고 자기 왕에게 힘을 주시고 자기의 기름부음을 받은 자의 뿔을 높이시리로다"에서 결국 이스라엘의 왕, 메시야, 다윗에 대하여 노래하는 것을 보아 사무엘의 사역이 분명히 이스라엘의 왕인 다윗을 세움과 다윗왕국의 준비사역임을 볼 수 있습니다.

그 후에 사무엘의 사역은 다윗왕국 성립과 사사시대에서 왕국시대로 전이하는 과도기적 위치에 있어서 하나님께서 의도하신 사역을 감당케 됩니다. 처음에 사무엘은 엘리 제사장 가문과 대조적으로 나타납니다. 과도기적인 직분으로서 사무엘을 본다면 사사시대의 마지막 가문은 엘리가문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당시의 제사장 가문인 엘리에게서 사무엘에게로 제사장 직분이 넘어갔다는 것은, 먼저 그 당시는 영적 암흑시기였으며 이상이 희귀했습니다. 즉 계시가 없었음을 의미하며 이스라엘의 지도자인 엘리가문이 하나님의 계시를 받지 못함은 계시 중보자로서 지위를 박탈당한 것이며, 지도자로서 배척받음을 의미합니다. 이는 후의 사울에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계시는 사무엘에게 임하고, 사무엘이 하나님의 선지자로 세우심을 받았다하는 것이 이스라엘에 알려지고 이때부터 사무엘의 과도기적인 통치시대가 시작됩니다. 사무엘의 사역 때 이스라엘 백성의 반발로 왕을 요구하는 것은 사무엘의 사역이 끝나고 무언가 새로운 시대가 열리겠다는 것을 암시합니다. 즉 왕 통치시대가 시작됨의 시대적인 징조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스라엘이 왕을 요구함은 하나님의 통치를 거부함으로 보였기 때문에 하나님은 이를 큰 죄악으로 보신 것입니다. 이 문제에 관하여는 자유주의파나, 보수주의 내의 신학계에서 왕제도 자체가 하나님께서 본래 의도하신 바람직한 제도인가에 대하여는 논란이 있어왔습니다. 사실 특별히 기드온이 미디안 군사를 쳐 부수고 오래도록 사사로 다스리자 백성들이 당신이 대대로 세습적인 왕조를 세워서 다스려 달라고 요구하였을 때, '아니다!'라고 말함으로 이것이 이스라엘의 왕 제도는 하나님의 통치를 반대하고 역행하는 제도인 것으로 인상주어지는 충분한 근거로 여겨졌습니다.

뿐만아니라, 이스라엘의 가장 큰 세가지 직분인 제사장, 왕, 선지자에대해(신명기 17장부근) 말하면서 왕 제도에 대하여 상당히 부정적으로 얘기하는데 '후에 너희들이 분명히 왕을 세우려 할 터인데 왕은 이러이러한 사람이어야 한다'고 표현하기도 했습니다. 이렇듯 성경은 왕 제도에 대해서 상당히 부정적인듯 보입니다. 이 문제에 관해서 대개의 보수파들은 '이스라엘이 왕을 요구하였기 때문에 하나님은 하는 수 없이 결국 왕을 허락하셨다'고 해석합니다. 그렇다면 사무엘상 초두에서 사무엘의 탄생과 더불어 왕 제도에 관련된 어떤 것이 암시하고 있는 부분과 일치하지 못하게됩니다.

결국 이스라엘 백성은 이방과 같은 왕제도를 하나님께 요구하였습니다. 이스라엘에는 당시에 상비군이 없는 미약한 상태였으므로 이방의 왕처럼 영웅적이며, 군림하며, 전쟁에 앞설을 수 있는 인간적인 왕을 요구했습니다. 즉 백성이 원하는 타입이 곧 사울이었으며, 사울의 모습은 표현되기를 사울의 키가 장대하였고, 주위에 군사를 모으며 열방의 왕 모습 그대로 였음을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처럼 인간이 원하는 왕의 말로가 결국 어떻게 되리라는 것을 사울을 통해 보여 주셨습니다. 사울이 왕 자리에서 쫓겨난 가장 큰 이유는 하나님의 명령을 전달하는 선지자의 말을 듣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의 왕 조건에서 가장 큰 것은 율법책을 복사하여 구입하고 주야로 묵상하며, 그 통치 원리에 따라 다스려야 했습니다. 더구나 이스라엘 왕은 하나님의 율법시행자였을 뿐이었으므로 실지 이스라엘의 진정한 통치자는 하나님이셨습니다. 그러므로 사울이 하나님을 순종치 않았다는 것은 하나님의 통치를 끊어버리고, 자신이 스스로 이스라엘의 통치자가 되겠다는 의지였습니다.

우리들이 볼 때에 제사를 스스로 드린 이 사건은 매우 사소한 일인듯이 보이나 그것이 발전되면 완전히 하나님의 뜻을 배제하고, 자신의 뜻으로 하나님의 백성을 자신의 백성으로 삼아 다스리겠다는 의도가 충분히 있었습니다. 이 점은 목회자들이 가장 주의해야 할 점입니다. 목회자들이 다스리는 성도는 내 백성이 아니요, 내 양도 아닌 다만 하나님의 백성을 대신 다스린다는 점이며, 사울은 이 점에서 실패하였으므로 왕에서 쫓겨나는 비참한 말로를 맞게 됩니다.

 

* 다윗 *

이와 대조적으로 다윗은 소년 시절에는 자신의 아비에게 인정도 제대로 받지 못했던 목동 출신의 미약한 자였고, 골리앗을 쓰러뜨리기까지 그 어느 누구에게도 인정을 받지 못한 자였으나, 철저히 하나님을 의뢰하고 신뢰하여 그의 말씀에 순종하는 자였습니다. 사무엘상의 사울과 다윗의 상반된 모습에서 한 사람은 하나님의 명령을 거부하고, 또 한 사람은 철저히 하나님께 순종하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사울의 핍박과 고난,억울함을 받음에도 철저하게 하나님의 법을 순종하는 모습으로 다윗이 부각됩니다.

이 다윗을 가리켜 하나님은 내 마음에 합한 자라 말씀하셨고, 하나님이 선택한 왕이라 말씀합니다. 또한 사울이 실패했을 때 사무엘을 보내 기름을 붓게 하십니다. 다윗의 선택 의미는, 이스라엘의 내부를 평정하게 하고 안식을 주는 것입니다. 다윗은 하나님을 위해 성전을 짓겠다는 생각을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것을 매우 기쁘게는 받으시나, 집을 위해 염려하는 다윗에게 다윗집 곧 다윗왕조를 도리어 염려해 주시며 몰락하지 않을 영영한 왕조로 세우시겠다는 언약을 하십니다. 이는 곧 영원한 왕조의 언약입니다.

다윗과 솔로몬의 사역은 큰 구속사적 흐름에서 어떠한 위치를 차지하는가? 하나님께서는 세상 세력에서 노예 노릇하던 이스라엘을 구원하시고 이들을 불러 광야 여행을 하게 하시고 시내산에로 부르시어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아야 할 삶의 도리를 가르치십니다. 또한 다시금 광야 기간에 이어 가나안 땅의 정복 사역을 하게 하십니다. 이 정복 사역은 다른 표현으로 히브리서에서 여호수아와 예수님의 사역을 다같이 안식을 주는 사역으로 이야기합니다. 모든 하나님 나라 안에서 가나안 땅에서의 대적과 악한 세력을 근본적으로 평정시키고 그 땅에 안식을 주는 사역입니다. 그러나 여호수아의 안식 사역은 완전한 사역이 아니고, 원칙적인 승리요, 원칙적인 평화를 이룩한 사역이었습니다. 따라서 원칙적인 안식을 준 사역이었습니다. 그런데 사사시대에는 이 안식 사역을 잘 유지하지 못하고 오히려 온갖 대적세력이 다시 성행하여 백성들은 그 아래에서 고통하며 신음하고, 하나님의 나라가 완전히 와해된 시대에 도달했었습니다.

다윗의 사역은 이런 점에서 예수님의 사역과 일치되는데, 이스라엘의 실패에서 구원을 위해 보내신 대리 통치자가 사사들이었으나, 사사는 심판으로 말미암아 고통받는 이스라엘의 구원자로서 사역을 감당하였고, 다윗은 어떤 면에서는 사사시대의 절정(?)으로 완성된 모습이라고 볼 수 있을 것입니다. 다윗의 사역은 룻기에서 완전히 와해되버린 이스라엘의 몰락상태에 대하여 이스라엘의 생명을 다시 회복시키는 자로서 나타남을 볼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여호수아가 확립한 원칙적인 안식의 상태는 이스라엘의 범죄로 완전히 상실되었는데, 이를 다시 회복하면서 그땅에 완전한 안식을 임하게 하는 사역이 다윗의 사역이었습니다. 우선 다윗은 블레셋을 쳐부수고, 주위를 평정하여서 하나님의 약속의 땅에 온전한 안식을 가져다 주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다윗을 통해서 그의 백성으로 하여금 완전한 안식을 누리도록 온 땅의 대적을 파하고 그 땅에 온전한 안식을

이룸으로써 그 백성에게 완전하게 안식을 누리며 살게하셨습니다.

이때까지 다윗의 사역은 용사로서의 사역이었습니다. 대륙세력을 쳐 부수고 대륙세력인 가나안을 제거하고 하나님의 왕조 약속을 이룹니다. 이 땅에서 하나님을 대신하여 다스릴 때의 통치자로서 영원한 보장을 받은 다윗 왕조의 언약이 사무엘상 7장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리하여 솔로몬과 그 후대 대대로의 왕들이 하나님의 백성을 하나님의 통치자로서 다스립니다.

그 다음에 언급해야 할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집 건축은 솔로몬이 하게됩니다. 솔로몬의 의미는 자체가 평강의 뜻이고, 다윗이 용사로서 모든 세력을 쳐부수고 이 땅에 참으로 평화, 안식이 도래한 상황에서 다스리는 왕의 이름으로 평강이라 이름지은 것은 상당한 의미가 있습니다. 솔로몬의 중요한 사역인 성전 건축의 의미는, 이제까지 하나님은 장막에 거하셨는데 가나안의 정착 생활에서 그 장막이 성전으로 되었다함은 하나님의 정착으로서, 하나님께서 여호수아와 다윗에 이르러서 백성을 안식케 한 다음 안식을 하심입니다. 이는 6일 동안 창조하시고 안식하셨다가 하나님의 백성을 위해 모든 일을 행하신 다음에 친히 안식하셨다는 하나님의 안식을 의미합니다. 하나님께서 그의 나라를 세우시려고 선언하시고 이를 출애굽을 통하여 이루시고, 여호수아와 다윗을 통해 이루시어 백성들을 안식케 한 다음에 하나님께서 친히 안식하셨음을 말합니다. 이는 예수 그리스도에서도 반복됩니다. 결국 여러가지가 마태복음 초두에서의 아브라함과 다윗까지의 역사 부근으로서 그 의미는 이제 예수 그리스도에 의한 완전한 안식을 보게합니다.

 

4. 선지자의 역할(선지서의 의미)

 

* 다윗 왕국 *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하나님의 왕국이 족장사 ⇒ 출애굽 ⇒ 광야여행 ⇒ 가나안 정복 ⇒ 사사시대 ⇒ 다윗 ⇒ 솔로몬에게 이르러서 일단 완성된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완성된 것 같이 보이지만 이것 자체가 상당한 불완전성을 내포하고 있다는 것을 구약 군데군데서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우선 신명기 32장에서 이야기했듯이 그렇게 열심히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라고 해놓고서 그러나 너희는 결코 지키지 못할 것이다. 너희들이 완악한 것을 아는데 결국 하나님을 배역했다가 실컷 심판을 받고 나서야 돌이킬 것이라고 말씀하셨고, 더 거슬러가서는 출애굽기 24장에서 참 우리가 하나님이 명하신대로 다 지키겠다고 짐승을 잡아서 피를 뿌려가면서 맹세를 해놓고 바로 그 다음 순간에 모세가 안내려오는 동안에 배역해 버립니다.

뿐만 아니라 다윗 왕조의 약속 자체 "영원한 왕조"를 약속하시는데 이것은 완전한 무엇을 갖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 이 영원한 왕조가 완전무결한 왕조가 아니라는 암시를 "네 자손들이 범죄할 경우 사랑의 채찍으로 징책은 하겠으나 사울을 내 앞에서 쫓아낸 것처럼..." 이란 표현에서 보여줍니다. 따라서 다윗왕조 약속 자체가 영원성을 갖는 것과 동시에 그 자체로서 이미 어떤 약점들을 안고 있다는 것을 암시해 주고 있습니다. 이런 것들은 구약적 체계가 그 나름대로 불완전한 요소들을 갖고 있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이것을 가장 웅변적으로 말해주고 있는 역사가 다윗왕조 역사 그 자체입니다. 솔로몬 자신은 하나님께서 그 백성에게 온전한 안식을 허락하시고 평강의 왕으로 다스리도록 하신, 하나님의 안식의 처소인 성전을 짓게된 바로 그 왕이 타락하기 시작합니다. 솔로몬의 타락 원인을 대개 첩을 많이 둔 것이라고 하지만 이것을 윤리적인 관점에서만 이야기해서는 안됩니다. 왜냐하면 그가 정욕이 많아서 첩을 많이 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신명기에서 말과 금을 많이 두지 말라고 한 그것도 윤리적인 관점에서가 아니라 다른 측면에서 보아야할 것입니다. 솔로몬의 아내들을 살펴보면 대개 어떤 사람인가 하면 우선 애굽의 왕 바로의 딸을 들 수 있습니다. 그밖의 모압, 암몬 등의 귀인들의 딸과 공주들을 첩으로 맞아들였는데, 이것은 솔로몬 자신의 성적인 만족을 위해 불러들였다기보다는 정치적인 이유가 있었습니다.

어느 문화권에서나 마찬가지로 당시에는 정치적인 동맹을 맺으면 정략 결혼을 하였습니다. 혈연으로 맺어두자는 긍정적인 이유도 있지만 인질 성격과 비슷한 것입니다. 이들은 전쟁이 나게되면 목이 날아가게 됩니다. 솔로몬의 결혼 역시 정략적인 것인데 이것은 맞아들인 첩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즉 바로의 공주를 예로들 수 있는데 당시 고대 근동지방의 가장 큰 세력이 애굽이었습니다. 애굽의 자존심이 얼마나 컸느냐 하면 미탄이라고 하는, 즉 앗시리아에 있는 열강들에 속한 나라들이 바로의 공주를 아내로 달라고 했으나 바로가 거절할 정도였습니다. 그런데 바로가 솔로몬에게 딸을 주었다는 것은 솔로몬을 굉장히 높이 평가했다는 말이됩니다.

그리고 바로가 솔로몬에게 공주를 주면서 정략적인 성격이 두드러지는 것은 지참금으로 게셀을 정복해서 주었습니다. 그리고 당시 솔로몬의 왕국은 요단강 이서 지방에만 속한 것이 아니라, 주변 에돔, 모압, 암몬, 길르앗 등 주변까지도 속했는데 여기에서도 공주들을 데려옵니다. 이 나라들은 솔로몬의 속국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정략결혼을 통해 타국의 귀인의 딸이나 공주를 데려 올 때는 그들의 종교을 인정해 주는 것이 상례였습니다. 내 나라에 와서 내 신부가 되었으니 우리 종교를 믿으라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종교를 인정해 주었습니다. 솔로몬이 한 일이 무엇이었는가하면 바로 공주의 궁을 따로 짓고, 산에다가 데려온 공주들의 종교의식을 거행할 산당들을 많이 지어 주었습니다.

정치적인 이유에서, 즉 많은 속국을 이끌고 있는 강대한 제국을 운영하다보니까 당시 습속에 따라 이스라엘의 심장부인 예루살렘에 이방신들을 섬기는 산당들이 생겨나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점차 발전하여 만년에 이르러서는 솔로몬 자신이 상당히 이교적인 종교 풍속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여러 번 경고를 하시는데 듣지않고 끝까지 거역을 하니까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왕국을 나누어 버리십니다. 교회의 분열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이 교회 분열, 즉 하나님 나라의 분열에 관련한 하나님의 뜻이 어디에 있었겠습니까? 왜 하나님께서 거의 대부분의 지파인 10지파를 택해서 따로 북쪽 왕국을 세웠을까요?

 

* 북 이스라엘 *

고대 사회에서 왕이라고 하면 거의 절대적인 권력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왕이라고 하는 것 자체가 가장 강력한 권력을 행사하는 상징의 인물이기 때문에 신명기에서도 그처럼 왕에 대해서는 철저하게 조심할 것을 요구하고 있으며, 특히 왕제도를 세우면서 사울이라고 하는 부정적인 실례를 택해서 교훈을 주시기까지 했습니다. 왕이 이처럼 종교적으로 타락하게 되면 그 나라는 곧 끝장나게 됩니다. 쉽게 말해서 교회 목사가 타락하게 되면 그 평신도는 어떻게 될 것인가는 자명한 것입니다. 이처럼 대부분의 이스라엘 지파를 갈라내어서 따로 나라를 세우게 한 것에는 다윗 왕가에 대한 징책을 의미하는 반면에 하나님은 다른 목적이 있었습니다.

타락한 왕조손에 이스라엘 백성을 맡겨 놓았다가는 하나님의 나라가 결단이 나게 생겼기에 따로 분리시켜서 이들만이라도 하나님의 나라다운 나라로서 그 순결성을 유지 시키기 위한 방책이었습니다. 이 목적을 위해 선택된 사람이 여로보암이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약속하시기를 "네가 다윗처럼 하나님 앞에서 순전하게 행하기만 한다면 너도 다윗과 같은 영원한 왕조를 세우게 되리라"고 약속하셨습니다. 이렇게 선한 목적을 위해 세워진 여로보암이 왕위에 오르자마자 타락하기 시작합니다.

고대국가에선 종교가 차지하는 비중이 굉장히 큽니다. 특히 이스라엘에서는 종교가 차지하는 부분이 대단했습니다. 이스라엘 자체가 하나님의 나라였으니까 교회와 종교가 차지하는 것은 그 전부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스라엘의 구심점이라고 할 수 있는 곳은 하나님이 계신 예루살렘 성전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런데 이처럼 두 쪽으로 갈라놓고 보니 여로보암에게는 큰 타격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자기 백성들이 예루살렘 성전으로 하나님을 뵈오려고 가는데 가만히 놓아 두었다가는 결국 남쪽 왕국의 르호보암에게 다 빼앗겨버리게 될 것 같아서 예루살렘에 가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 북쪽에다 불법적인 성소를 만들게 되었습니다. 금송아지를 만들어 벧엘과 단에 성소를 만들고, 평민으로 제사장을 삼고 철저히 붙잡기 위해 절기까지도 비슷하게 만들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 앞에 엄청난 죄악인 것입니다.

열왕기를 보면 단 7일동안 치리한 이스라엘의 왕에게까지 어떠한 죄목이 주어지는가 하면 "저가 여로보암의 죄에서 떠나지 않았다"라고 합니다. 금송아지를 만들어 놓은 것을 두고 한 말인데 이것이 북 이스라엘이 망하는 직접적인 이유가 됩니다. 이 금송아지 사건은 매우 흥미있는데 출애굽기 30장에서도 나타납니다. 그런데 이 금송아지를 왜 만들게 됐냐면 이스라엘의 영도자인 즉 하나님의 통치 대리자인 모세가 안보이니까 대신 만든것입니다. 그렇다면 금송아지 우상과 관련된 이스라엘의 신앙이라는 것은 어떤 것입니까? 완전히 다른 신을 섬기는 것인가 아니면 여호와를 섬기되 불법적인 여호와의 형상을 만들어 섬기는 syncretism(혼합주의)인가?하면, 혼합적인 신앙형태라 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래도 그들은 여호와를 섬겼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 섬기는 법도가 하나님께서 명하신 것과 달라졌습니다. 하나님은 어떤 것으로도 하나님의 형상을 만들지 말라 하셨습니다. 즉 하나님은 피조물의 형태로 형상화 될 수 있는 분이 아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은 피조물과 전혀 다른 초월자이신 것을 분명히 말씀하신대도 이들은 하나님을 형상화시키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의 역사를 보면 반역의 역사가 반복이 되고 있습니다. 왕위 쟁탈과 반역이 계속됩니다. 그러다가 정권을 쥐게 된 사람이 장성출신으로 오므리라는 사람인데 아합의 부친입니다. 세상적인 표준으로 볼 때 오므리는 상당히 영걸이었습니다. 이 시대에 이스라엘의 힘은 사방에 떨칠 정도였습니다. 그래서 주변 지역의 강대국이었던 앗시리아의 문헌을 보면 이스라엘을 가리켜 '오므리의 집'이라고 하고, '아합의 집'이라고 할 정도였습니다. 외국에 이름을 떨칠만큼 외적으로는 이스라엘이 강력했던 시기가 이때였음을 알 수 있고 겉으로 볼 때 오므리는 아주 훌륭한 인물이었습니다.

 

* 아합과 이세벨 *

그런데 이 사람이 취하게 된 정책중 하나가 두로와 시돈과의 화친이었습니다. 당시 가장 위협적인 세력은 아람이었는데, 아람은 본래 다윗에 의해 속국이 되었다가 솔로몬이 타락하면서 주위 속국들이 반란하기 시작하였고, 이때 아람 역시 반란하여 큰 세력을 갖게 되었고 아람이 당시 자꾸 이스라엘을 괴롭혔습니다. 아람은 이스라엘 동북쪽에 있는데 그 배후에 있는 것이 두로와 시돈이었습니다. 그래서 오므리는 두로와 시돈과 화친을 맺음으로 아람을 견제하였습니다. 그 후 오므리의 뒤를 이어 아합이 왕이 되었습니다. 왕상 16장 30-33절에 보면 "오므리의 아들 아합이 그전의 모든 사람보다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더욱 행하여 느밧의 아들 여로보암의 죄를 따라 행하는 것을 오히려 가볍게 여기며 시돈 사람의 왕 옛바알의 딸 이세벨로 아내를 삼고 가서 바알을 섬겨 숭배하고 사마리아에 건축한 바알의 사당 속에 바알을 위하여 단을 쌓으며 또 아세라 목상을 만들었으니 저는 그 전(前)의 모든 이스라엘 왕보다 심히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의 노를 격발하였더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여기에 보면 아합 때에 와서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하되 이전의 어떤 왕보다도 악을 행했다고 합니다. 이와같은 성경의 표현에서 뭔가 여기에서 결정적인 어떤 일이 일어날 것이라는 예감을 갖게 됩니다. 그러면 어떤 면에서 아합은 이전의 이스라엘의 열왕보다 가장 악했다고 설명하면서 "시돈 사람의 왕 옛바알의 딸 이세벨을 아내로 삼고"라고 했습니다. 오므리가 아람과 대적하기 위해 배후에 있는 두로와 시돈과 화친을 맺었다고 하는데, 대개 고대에선 화친을 맺게 되면 정략결혼을 하게됩니다. 그래서 오므리는 황태자인 아합에게 시돈의 공주인 이세벨을 아내로 맞게하는 정략결혼을 시도합니다. 이때의 관습 중 하나가 공주가 섬기는 종교를 인정해 주게 되었는데 이것이 화근이 되어서 오므리가 정책적으로 맞아들이게 된 이세벨도 당시 관습에 따라서 종교를 인정해 주게 되었습니다.

이 이세벨은 참으로 독사같은 여자여서 그저 자기만 섬기는 것으로 만족하지 않고 아합을 꼬득여서 이스라엘 전체를 바알을 숭배하는 나라로 만들고자 했습니다. 여기에서 바알을 숭배하게 된 사실이 무엇을 뜻하는가를 설명하기를 "여로보암의 죄를 따라 행하는 것을 오히려 가볍게 여기며"라고 합니다. 여로보암의 죄라는 것은 혼합주의 성격을 가지고 있는데 그래도 여호와를 완전히 떠난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바알 숭배라는 것은 완전히 여호와를 배척해 버리는 것입니다. 이것은 철저한 배도로서 완전히 하나님을 버리는 종교적인 죄를 지칭합니다. 왜 아합시대에 와서 아합을 평가하기를 이스라엘의 어느 열왕보다도 악을 행했다고 하시느냐하면 바로 이 종교적인 죄 때문에 즉 하나님을 철저하게 배도케한 그 사실 때문에 아합의 왕가를 그처럼 부정적으로 평가하시는 것입니다.

바로 이러한 어느 왕보다도 악했다는 것은 어떤 일이 일어날 것을 암시하는데 이것을 배경으로하여 선지자가 나타납니다. 그가 바로 엘리야입니다. 엘리야의 상황은 바로 이스라엘의 이와같은 상황, 곧 하나님의 나라로 세움받은 이스라엘이 진정한 통치자 여호와를 완전히 배역해버린 역사적인 상황을 전제로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엘리야의 사역의 의미를 어떻게 평가해야 하는가를 볼 때, 배도한 이스라엘 앞에 나타나서 하나님의 진노의 음성을 전한 능력있는 선지자로 보아야 할 것인가? 아니면 더 큰 의미를 갖는 선지자로 보아야 할 것인가?하는 시각을 위해 신약이 엘리야에 대해 어떻게 평가하고 있는가를 잠깐 살펴 볼 필요가 있겠습니다.

 

* 엘리야 *

신약에 보면 예수님의 사역과 세례 요한의 사역은 상당히 밀착되어 있습니다. 세례 요한이 예수님의 준비 사역자로 와서 사역하다가 예수님의 세례 사건이 있은 후 세례 요한이 체포됩니다. 그런데 세례 요한의 체포 사건을 듣고 예수님께서 그의 적극적인 사역을 시작하십니다. 세례 요한의 체포는 곧 그의 준비 사역의 기간이 끝났다는 것을 말합니다. 이제 예수님께서 본격적으로 사역할 때가 이르렀음을 말해 줍니다.

그런데 마태복음 14장에 보면 세례 요한이 헤롯에게 죽었다고 합니다. 이 소식을 듣고 예수님은 광야에 들어가시고 산에 올라가 기도하시는데 뭔가 평상시와는 다른 행동을 보이고 계십니다. 왜 예수님께서 세례요한의 죽음 소식을 들으시고 기도하러 가셨을까요? 세례 요한의 사역과 예수님의 사역이 밀착되었다고 본다면 세례 요한이 체포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예수님의 사역이 시작되었다고 한다면 세례 요한의 죽음은 곧 예수님 자신의 죽을 날도 가까왔다고 직감하신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그 이후의 사역을 보면 예수님께서 폭풍 위의 바다를 거닐으신 것이라든지, 오병이어의 기적 등을 볼 때 예수님은 사람이 아니시고 하나님이시다는 것을 자꾸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가이샤라 빌립보에서 예수님은 베드로가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고백케 하십니다. 그리고 사실 그 고백 다음에 예수님 자신이 잡히시고 죽으시고 부활하실 것을 가르치기 시작하십니다. 즉 예수님이 그 앞에서 기도하러 들어가시는 것이나 신자(神子)이신 신분을 자꾸 나타내 보이심은 죽으심에 대한 준비 사역이었습니다. 즉 예수님은 후에 낮아지심의 극치인 십자가 사건 전에 비록 십자가에 죽으시나 실지는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분명히 해야할 필요가 있으셨습니다. 이러한 예수님의 기도, 여러 이적, 메시야적인 모습들의 일련된 행동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사건을 의식한 행동이셨습니다.

또한 하나님의 아들인 메시야적인 신분을 드러내는 결정적인 사건은 변화산 사건입니다. 여기에서 홀연히 변화되어서 모세와 엘리야와 더불어 말씀하십니다. 그때 하늘에서부터 음성이 있는데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는 너희는 저의 말을 들으라"(마17:5)고 하시는데 이것은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확인해 주시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러나 이 사건마저 예수님의 죽으심을 의식한 사건이었다는 것은 엘리야와 모세가 상의한 것이 예수님의 십자가를 의식한 것을 위한 것이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처럼 그의 지상 사역을 총 결정짓는 가장 중요한 지상사건인 십자가와 부활을 눈앞에 두고 엘리야와 모세와 더불어 어떤 일을 의논하셨다는 것은 바로 죽음을 의논하셨는데, 그런 장소 그런 시점에 모세와 엘리야가 나타났다는 사실은 굉장히 중대한 의미를 갖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모든 구속사의 종결이요 결정적인 사건이라 할 수 있는 그리스도의 사건과 거기에 나타난 인물들의 사역이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다는 암시를 주고 있습니다. 우선 거기에 나타난 인물 모세가 왜 나타났는가는 모세의 중요성은 익히 아니까 충분히 나타날만 하다고 인정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엘리야가 왜 나타났을까? 어떤 사람은 모세는 율법의 대표로 엘리야는 선지자의 대표라고 말하는데 그건 너무 단순합니다. 적어도 신약의 변화산 사건을 볼 때 엘리야의 사건을 그렇게 단순하게 취급할 수는 없습니다. 전 구속사적인 맥락에서 큰 위치를 차지하는 사역이라고 감잡을 수 있습니다.

그러면 조심스럽게 엘리야의 사역을 살펴봅시다. 그 배경을 살펴보면 아합 시대에 와서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완전히 버리고 완전히 배도해서 바알을 쫓는 상황에 처했는데, 이런 상황에서 엘리야의 사역이 곧 기근 선포였습니다. 약속의 땅에서의 기근은 특별한 의미를 갖습니다. 레위기 26장에 보면 약속의 땅에서의 전쟁과 기근은 우연히 천재지변으로 일어나는 것이 아니고 분명히 하나님 심판의 형태로써 나타난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엘리야의 기근 선포는 하나님의 심판이라고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3년 후에 다시 엘리야가 나타나서 아합에게 도전장을 던집니다. 그것은 바알 선지자, 아세라 선지자를 모두 모아 갈멜산에서 대결을 하자는 것이었습니다. 그 대결의 목적은 누가 참 신인가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바알은 아무리해도 응답이 없고 엘리야가 기도하자 하늘에서 불이 내려와서 모두 태워버립니다. 우선 갈멜산에서 나타나서 대결을 한 사건의 목적이 무엇인가 살펴보아야 하겠습니다.

왕상 18:36절을 보면 "저녁 소제 드릴 때에 이르러 선지자 엘리야가 나아가서 말하되 아브라함과 이삭과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여 주께서 이스라엘 중에서 하나님이 되심과 내가 주의 종이 됨과 내가 주의 말씀대로 이 모든 일을 행하는 것을 오늘날 알게 하옵소서"라고 하면서 "이 백성으로 주 여호와는 하나님이신것과 주는 저희의 마음으로 돌이키게 하시는 것을 알게 하옵소서"(왕상 18:37)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이 대결의 목적은 누가 참 하나님이신 것과 진정한 이스라엘의 통치자 즉 왕이신가를 밝히는 것과 동시에 이 사건을 통해서 이스라엘을 회개케하는 즉 이스라엘의 마음을 하나님께로 돌이키게 한 일이었음을 분명히 알려주고 있습니다.

엘리야의 사역을 흔히 회개의 사역이라고 말을 하는데 제2엘리야인 세례 요한의 사역이 회개의 사역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우선 이 사건이 하늘에서 불이 내리기 전과 후의 이스라엘의 태도를 비교해 보면 왕상 18:21절의 "너희가 어느때까지 두 사이에서 머뭇머뭇 하려느냐 여호와가 만일 하나님이면 그를 좇고 바알이 만일 하나님이면 그를 좇을 지니라"에서 하나님과 바알의 양자택일을 명하고, 이에 이스라엘은 엘리야의 도전에 매우 냉담하고 방관적인 태도를 취하나, 왕상 18:39절에서 하늘에서 불이 내려와 태우는 것을 보고는 모든 백성들이 "여호와 그는 하나님이시로다"고 하나님이 이스라엘의 진정한 하나님임을 고백합니다. 그리고 바알 선지자들을 모두 쳐죽이고 바알종교의 핵심을 쳐부셨습니다. 이때 엘리야가 기도하자 비가 내리기 시작했습니다. 처음 엘리야의 등장에 하나님의 심판으로 내려진 기근은 거두어지고, 이 비내림은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이 그쳤음을 의미합니다. 그후 아합은 이세벨에게 엘리야의 얘기를 해 주고 나니 이세벨이 대노하여 엘리야를 죽이겠다고 말합니다. 이에 엘리야는 브엘세바로 내려가서 광야 생활을 하면서, 매우 낙담하여 하나님께서 자신을 불러 가실 것을 기도합니다. 이때 실망가운데 있는 엘리야에게 하나님은 천사를 보내어서 음식과 물을 먹게 하시고, 그 힘으로 40일간 광야를 여행한 후 시내산에 이르게 합니다.

이 시내산은 이스라엘이 하나님과 언약을 맺었던 장소였으며, 이때 엘리야는 이스라엘 백성의 40년간 광야여행과 비교될 수 있는 어떤 상징적인 광야생활을 하였고, 이스라엘 백성의 대표로서 하나님께 간구합니다. 그런데 엘리야가 들어간 굴 안에서 하나님의 음성이 있기를 "네가 어찌하여 여기 있느냐"의 말씀에 엘리야가 대답하기를 "열심이 특심하여 나만 남았나이다"고 하였습니다. 이에 불, 바람, 지진 중에도 하나님은 계시지 않았고 마지막 세미한 음성 가운데 찾아오셨습니다. 엘리야가 하나님께 바란 역사의 개입 요청은, 짐작되기를 엘리야가 있던 굴 앞으로 지나간 바람, 불 지진과 같은 위엄찬 하나님의 강림으로 이스라엘에 강한 모습으로 개입되기를 바랬습니다.

그러나 이와같은 모습에서 하나님이 보이시지 않음은 하니님이 바라시는 역사개입은, 즉 세미한 음성 가운데의 하나님은 이스라엘에 대하여 침묵과 같은 모습에서 하나님의 계시를 선포하셨습니다. 그리고 엘리야에게 3가지 명하시며 - 엘리사, 예후, 하사엘 - 이스라엘을 철저히 심판하시되, 바알에게 무릎꿇지 아니한 경건한 칠천을 남기리라고 하셨습니다.

이 하나님의 계획이 당시의 엘리야와 근접에 국한 된 것인가? 아니면 좀더 내다본 먼 후대까지 계시된 계획인가는 생각해 볼 만한 것입니다. 특히 엘리야의 사역은 변화산 사건에서도 보았듯이 모세의 사역만큼 중대합니다. 엘리야를 뒤돌아 보면, 하나님의 천사가 공급한 음식과 물 즉, 하늘에서 내려온 식물로서 힘을 얻고, 40일간의 여행은 마치 40년간 만나와 생수를 먹고 광야를 여행한 이스라엘과 비교될 수 있습니다. 또 호렙산에서 돌아와서 엘리사를 후계자 삼고 승천까지의 여정을 살펴보면, 길갈-벧엘-여리고-요단강(승천)인데, 그런데 이 길갈은 이스라엘 정복시 본 진이 있던곳이고, 벧엘은 아이성과 매우 근접하며, 여리고-요단강 이 모든 과정은 이스라엘 백성이 약송의 땅을 정복하러 온 여행의 역순입니다. 그리고 모세가 죽은 부근에서 승천케 됩니다. 더욱 모세와 비교될 수 있는 사역이라고 여겨지는 것으로, 호렙산의 굴을 가리켜 "그 굴"이라고 특별히 지칭합니다. 더구나 그 굴에서의 신현현상 - 지진, 바람, 불...은 하나님의 영광의 표시이며, 모세가 호렙산에 올라갔을 때도 그러한 일이 있었습니다. 즉 하나님의 영광을 보여 달라는 모세의 요구에 '내 등을 보리라'하며 지나가셨습니다. 이때 바위 틈 - 원문에서는 움푹패인 구멍 - 은 수평이면 굴이 될 수도 있음으로, 모세가 들어갔던 그 굴이 바로 엘리야가 들어갔던 굴로 추측됩니다.

또 시내산에 올라간 근본 상황이 비슷합니다. 모세는 금송아지 우상 숭배를 한 배도한 이스라엘의 문제를 기도제목 삼고 하나님의 처리 문제를 물으러 올라갔으므로 '배도한 이스라엘'이라는 공통점을 갖습니다. 이에 대한 하나님의 응답에 있어서 엘리야에게는 남은 자는 구원하되 배도한 이스라엘을 철저히 심판하시겠다는 것과 훨씬 더 긴 역사의 과정을 지배하는 원대한 하나님의 계시에 대한 하나의 방책으로 하사엘, 예후, 엘리사를 세웠습니다. 모세에게는 시내산 언약으로 지키면 살고 깨뜨리면 죽는다는 원칙을 주셨습니다. 이 둘은 보자면 철저히 심판하시되 남은자를 남겨 어떤 희망과 여지를 남기는 심판이었습니다.

특별히 엘리야의 계시는 모든 선지서의 message의 모태로서 하나님의 처리 방침이 큰 전환점을 이루어서 이제는 이스라엘에 대하여는 철저히 심판하시되 남은 자만을 구원하시겠다는 것이고 실지로 이스라엘의 멸망이 있었습니다. 그리하여 결국,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이 모습이 나타나고, 후의 변화산 사건의 맥을 잇는 장면이 됩니다.

 

* 요나서 *

흔히 요나서는 니느웨에 가서 심판을 선고하라는 명령에 불복종하여 도망하다가 폭풍을 만난 요나가 물고기 뱃속에서 회개하고 돌이켜 니느웨로가, 니느웨의 회개를 촉구하는 내용으로만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나 요나서의 실제의 성경상의 의미는, 요나는 당시의 이스라엘을 대변하며, 하나님의 니느웨로의 명령을 거부하고 도망을 갑니다. 여기서 먼저 니느웨의 구원을 꺼려한 상황을 이해해보자면, 당시의 앗시리아는 팽창시기였고, 애굽은 다소 미약한 시대적 배경에 있었습니다. 더구나 팔레스타인의 지리적 위치는 주변의 작은 국가와 애굽, 앗시리아의 세력다툼에서 항상 괴로움을 겪었습니다.

즉 앗시리아의 팽창책은 향상 서향 전진 정책으로 ⇒ 서남진 ⇒ 애굽으로 향했습니다. 그러나 애굽의 팽착책은 그의 역행순이 됩니다. 이때 앗시리아의 세력이 강성해지면 팔레스타인의 주변국가들이 연합정책을 꾀하여 이를 모면했습니다. 아람은 앗시리아의 세력이 다소 약화되면 이스라엘을 유린했습니다. 특히 요나의 생존 당시의 시대적 배경은 매우 특별하게 되어서 앗시리아의 세력이 약해져서 물러간 다음에 아람의 하맷 왕국에서 내분이 일어난 사이에 이스라엘은 급히 팽창하게 되어, 옛 솔로몬과 같은 영토를 차지한 이스라엘의 제2황금기였습니다. 그러므로 주변 국가들과의 세력 분포도를 충분히 알고 있는 요나가 앗시리아에 가서 하나님의 구원을 외쳐 그들이 강성해진다면 팔레스타인에 미칠 영향이 충분히 예견되었고, 더구나 그는 이스라엘의 구원을 외친 사역자이었으므로 요나 자신이 니느웨 구원사역을 거부한 개인적인 상황은 이해할 수 있겠습니다만, 중요한 점은 하나님께서 이방에 대한 관심과 사랑을 표시하셔서 니느웨로 보내려 하는 것에 거부하는 자체를 어떻게 이해해야 하겠습니까?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부르신 목적은 세계 만민에게 하나님의 복을 전달하는 사역이었는데 이 사역을 거부한 것으로 보아야 할 것입니다. 이때 당시에 아모스서를 보면 이스라엘은 배타적인 선민의식에 있었음을 볼 수 있으며, 요나는 이스라엘의 태도를 잘 반영하고 있습니다.

대개 성경에서 풍랑은 정치적인 소용돌이를 뜻합니다. 요나가 배에서 맞은 풍랑은, 즉 이스라엘로 인하여 고대 근동지방이 큰 전쟁의 소용돌이에 말릴 것을 이야기합니다. 이 정치적 소용돌이에서 애매히 고난 받은 자들은 이방수부였습니다. 요나가 바다에 빠짐은 죽음을 상징하고, 확대하면 이스라엘은 죽음에 처하게 되리라는 것을 예시합니다. 요나는 물고기 뱃속에서 회개를 하게 되었습니다. 요나는 이를 음부(스올)의 경험이라고 표현합니다. 이것은 이스라엘이 심판(전쟁의 소용돌이)에서 완전히 침몰, 멸망될 것이나 요나가 철저히 회개함으로 살아난 것처럼, 앞으로 이스라엘 역시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 전혀 새로운 이스라엘로서 이방에 사랑과 복음을 전파하는 사역을 받을 것이라는 것입니다. 요나의 박넝쿨 사건으로서 하나님의 인류에 대한 깊은 사랑을 볼 수 있습니다.

선지서의 심판과 구원계시를 좀 더 자세히 설명한 것이 요나서인데, 심판을 통하여 이스라엘은 전혀 새로운 이스라엘이 된 것이고, 이 새로운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축복을 온 만민에게 고하는 사명을 감당케 될 것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어느 선지서를 보든지 철저한 심판 다음에 남은 자를 구원하되 항상 남은 자와 더불어 열방들이 그 구원의 축복에 참여됨이 보여집니다(보편적인 구원). 이런 의미에서 엘리야와 요나서는 선지서의 가장 기본이며 핵심 뼈대를 형성하는 message를 우리에게 줍니다. 이를 특별히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죽음과 관련해서 거듭거듭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 부활 후에 진정으로 복음이 온 세계 만민에게 전파되었다는 것은 상당히 깊은 의미를 갖는다고 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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