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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약 신학 (래드/ 레온 모리스/ 황창기)

by 【고동엽】 2021. 11.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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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 약 신 학

I . 서론


1. 읽어야 할 부분


1) 래드의 성경신학, 서론(14-45쪽)
2) 레온 모리스의 신약신학, 서론(9-25쪽)
3) 황창기의 성경신학은 무엇인가? 성경신학의 본질(35-54쪽:보스의 성경신학 서론)


신약신학 과목을 시작함에 있어 신약신학이 어떤 학문이며 무엇을 다루는가?라는 물음이 제기된다. 이 물음에 답하기 위하여 신학이란 무엇을 어떻게 다루는 학문인가를 규명하는 먼저 신학에 대한 정의를 바로하는 것이 중요하다 하겠다. 왜냐하면 우선적으로 신약신학은 신학의 한 부분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보다 더 중요한 이유는 신학에 대한 정의를 어떻게 내리느냐에 따라서 동이 서에서 먼 것 같이 아주 다른 신약신학이 존재하기(주장되기) 때문이다. 서로 다른 정의 아래 행해지는 신학이라 할지라도 '신학은 하나님에 대한 학문이다'는 점은 공통적으로 인정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음과 같은 점에서 근본적으로 상반된 정의가 내려짐을 본다. 그것은 신학의 주체가 누구이냐는 점이다. 인간이 신학의 주체가 된다고 전제할 때는 (a) 신학이란 인간이 하나님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여 왔으며 또한 생각하는가를 연구 하는 것이라고 정의할 수 밖에 없다. 그러나 하나님이 신학의 주체가 된다고 전제할 때는 (b) 신학이란 하나님께서 자신에 대하여 인간에게 계시하여 주신 것을 연구하는 학문이라고 정의한다.


얼핏 생각하면 신학에 대한 정의 (a)가 정의 (b)보다 더 정확한 정의처럼 보인다. 왜냐하면 공통적인 정의가 보여주는 대로 신학은 하나님이 하시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하나님에 대해서 연구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학의 주체가 하나님이라고 전제하며 신학은 하나님께서 자신에 대하여 인간에게 계시하여 주신 것을 연구하는 학문이라는 정의대로 하는 것이 신학 연구에 대한 바른 자세라고 하는 것은 다음과 같은 이유에서다.


비록 인간이 하나님에 대하여 연구한다 할지라도 하나님은 사물이 아니시고 인격적 존재이시기 때문이시다. 이에 대하여 게할더스 보스(Geerhardus Vos)는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비인격적인 대상들을 과학적으로 다룰 때는 그 대상들은 피동적이고 우리가 능동적이다. 즉 우리가 그것들을 다루고 검사하고, 실험하는 것이다. 그러나 영적이고, 인격적인 존재에 관해서는 사정이 다르다. 그럴 경우는 그 존재가 스스로 자신을 열어 보여 주시는 한에 있어서만 우리는 그분을 알 수가 있는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들의 최상의 개념 이상으로 무한히 높으신 존재이시다. 하나님의 내면적이고 감취어진 마음은 그의 편에서 자의적으로 열어 보이실 때만 사람이 알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자신의 성품의 비밀을 우리에게 열어 보여주시는 범위 내에
서만 하나님에 관한 어떤 지식을 얻을 수 있다"(성경신학, 이승구역, 19-20쪽).


다음으로, 하나님께서 신학의 주체가 되어야 하는 이유는 하나님은 창조주이시고 인간은 그의 피조물이기 때문이다. 이 말은 인간이 하나님과 동등한 관계에서 상관없이 존재하는 자가 아니라 하나님께 의존하여 존재하는 자이기 때문에 창조주 하나님이 피조물에 의하여 탐구되어지는 연구의 대상이 될 수 없다. 창조주 하나님에 대한 지식은 하나님 자신에게만 국한되었고 피조물인 인간이 창조되기 전에 하나님에 대한 어떤 지식도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Vos는 피조물의 창조는 '신외지식(extra-divine knowledge) 산출의 첫 단계'라고 말한다(20쪽).


한 걸음 더 나아가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관계가 죄로 말미암아 파괴 되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자신을 계시하시지 않는 한 하나님에 대하여 알 수 없기 때문이다. 인간은 죄로 인하여 비정상적인 상태에 빠졌다. 이 비정상적인 것을 교정하려면 하나님께서 주도권을 잡고 자신을 계시해 줄 때에만 가능하다. 인간은 하나님께서 자신을 알게 해주신 만큼, 계시해 주신 만큼 그에 대해서 알 수 있다. 그러므로 신학의 주체는 하나님이시지 인간이 될 수 없다. 이 점이 기독교와 다른 종교와 다른 점이다.


다음으로는 성경신학에 대해서 생각해 보기로 하겠다. 성경신학이란 말은 17세기부터 사용되었다(W. Jacab, 1629). 이렇게 늦게 사용되어 진 이유는 초대 교회 이후 중세 이전에는 성경 내용을 교회의 교의(dogma)와 일치시켰고 중세에는 교회 전통의 일부분으로 간주되었다.
종교개혁이 일어나면서 '성경만으로(sola scriptura)'의 원리가 제창되었다. 이때까지 성경신학이란 말을 사용하지 않았지만 이 원리에 의한 성경신학은 성경의 가르침과 성경 자체가 말하는 신학을 의미하였다. 성경신학이란 용어를 사용하기 시작할 때만 해도 성경신학은 초대 정통신교의 전통적 교리체계를 입증하는 증거본문들(proof-texts)을 제시하는 목적으로 사용되었다.
그러나 루터가 주창한 sola scriptura 내용 중에는 후대 자유주의자들이 성경의 권위에 도전할 요소가 내포되었다. 그는 성경과 그리스도를 구분시켜 그리스도를 보여주는 것만이 참 성경이라고 하였고 또한 율법과 복음을 구분하였다.
그 결과로 성경의 통일성에 의문을 던지게 하였고 성경 속에 성경(the canon within canon)이란 문제를 대두시키는 기초를 제공하였다(G. Hasel, NT Theology, p.15).


성경신학의 다음 단계는 성경으로 돌아가자는 독일 경건주의 운동의 영향이다. 이들의 주장은 "죽은 정통교리에서 성경으로 돌아가자"는 것이었다. 따라서 성경을 진지하게 연구하면서 정통교리 체계를 반대하게 되었다. 이러한 움직임으로 성경신학은 계몽주의 시대를 맞이하 면서 교의에 반하여 하나의 독립된 학문으로 발전하게 되었다. 이런사실은 J.P. Gabler 가 1787년에 Altdorf대학 취임연설에서 성경신학과 조직신학 간의 차이점이 무엇인가를 최초로 분명히 밝힘으로 구체화되었다. 그는 성경신학은 조직신학과 독립된 것으로 엄밀하게 역사적이어야 하며 이스라엘에서 사용된 종교개념들의 기원을 조사하면서 성경기자들이 종교적인 제 문제들에 관하여 어떻게 생각하였는가를 규명하는 것이라고 주장하였다(Ladd, 신약신학, 이창우역, 16쪽). 이런 주장은 인간 자율주의 즉 계몽주의의 영향으로 인간이 모든 것의 척도라는 주장과 함께 성경도 인간 이성의 판단을 받아야 한다는 사상으로성경을 연구하여야 한다는 경향을 말하여 준다.


성경도 인간 이성의 판단을 받아야 한다는 점과 동시에 성경신학은 역사적이어야 한다는 주장은 성경을 역사적 비평적 방법(historical critical method)으로 연구하여야 한다는 결론에 도달할 수 밖에 없다. 이 말은 성경은 순전히 역사적인 문서들로서 성경저자들의 생각을 기록한 것으로 다른 역사문서들을 연구하는 방법으로 탐구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주장은 성경신학을 조직신학에 대응하여 이스라엘 종교와 초대교회 시대의 인간 역사를 다루는 학문으로 전락시키는 것이다. 성경신학을 이렇게 하여야 한다는 주장은 위에 논한 신학에 대 한 정의 (a)와 상관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이 견해를 따르면 성경신학은 인간의 종교적인 생각을 다루는 인간학이요 역사학이며 따라서 종교사학에 불과한 것이다. 성경신학을 이렇게 정의하며 탐구하는 자들 사이에 심각하게 대두되는 문제는 성경이 역사적인 기록이 아니라 성경저자들의 생각이나 신앙을 기록한 문서이기 때문에 성경신학을 역사적으로 할 수 없다는 것이다. 따라서 성경신학의 무용론까지 대두된다.


E. Troeltsch(1865-1923)는 역사적 비평적 방법에 대하여 일반적인 세 가지 원리를 주장하였다. 첫째로 비평의 원리이다. 모든 역사적 서술에는 의문의 여지를 남기고 있다. 그것은 역사의 기록은 역사 자체가 아니라 서술자의 주관적 해석이기 때문이다. 그뿐아니라 그 기록이 당시의 현장 기록이 아니라 후대의 역사발전에 의한 재서술이기 때문에 비평을 받아야 한다. 그러므로 어떤 기록도 절대적인 진리로서 존재할 수 없다. 둘째로 유추의 원리이다. 이 원리는 과거의 경험은 현재의 경험과 결코 다를 수 없다. 그러므로 현재의 경험은 과거 경험의 판단 기준이 될 수 있다. 따라서 현재 경험되지 않는 성경의 이적은 거짓 기록이다. 그렇기 때문에 부인되어야 한다. 세째로 상관의 원리이다. 이 원리는 유추의 원리와 비슷한 원리로 역사상에 일어나는 모 든 사건은 인과관계에 의한 것이라는 주장에 근거한다. 그러므로 역사 적인 인과관계가 없으나 사실적인 것으로 기록된 사건들은 기록할 당시의 사람들(공동체)의 신앙을 기록한 것으로 경우에 따라서 역사상에 일어나지 않은 신화의 기록으로 취급하여야 한다.


성경신학의 이러한 새로운 연구방법은 자연적으로 성경은 성경저자들의 생각이나 신앙을 기록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 계시의 기록이라고 믿는 자들로부터 강렬한 저항을 받게되었다. 이렇게 주장하는 자들은 성경은 하나님의 구원역사를 기록한 책이라고 믿는 자들이다. 이들의 대답은 위와 같은 원리들은 성경에는 적용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 이유로서 성경은 역사를 초월하시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역사 속에 들어와 일하시는 하나님의 구속의 역사를 기록한 구속사이기때문이다. 자유주의자들은 초월하신 하나님은 인간 속에 내재할 수 없다고 주장한다. 그러면서 어떻게 초월하신 하나님께서 역사 속에 갇히고 제한받을 수 있겠는가?고 되묻는다. 그러나 우리의 대답은 하나님은 분명히 초월하신 분이지만 그분이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하여 역사 속에 들어 오셔서 일하신다는 것이다.


이제 성경은 하나님의 구원역사를 기록한 책이라고 주장하는 자들중에 몇 사람을 간단히 소개하고(이 부분은 Hasel의 NT Theology pp. 111-132쪽 참조). 마지막으로 G. Vos의 견해를 좀더 상세히 소개하겠다.


(1) O. Cullmann의 구원사적 접근은 1946년 출판한 Christ and Time 에 나타나 있고 그의 견해는 그후 1965년에 출판된 Salvation in History에 더욱 구체화되었다. 그의 주장은 역사의 중심(the center of time or the mid-point of time)은 그리스도이시라는 점이다. 그에게 있어 구원역사와 세상역사는 불가분리의 관계를 맺고 있다. 구원역사는 세속역사 속에서 구체화되며 이런 의미에서 구원역사도 세속역사에 속한다. 그러므로 세속역사에 속한 사건들일지라도 구속사적으로해석되어야 하고 그렇게 해석되어져 왔다고 주장한다. Cullmann에게서 문제가 되는 점은 과거의 구속사건들에 대한 해석들은 새로운 사건들에 비추어서 그 해석들이 수정되어야 한다는 주장이다(corrections of the interpretations of the past events are undertaken in the
light of the new events).


(2) G.E. Ladd의 견해는 1974년에 출판된 NT Theology에 나타나 있다. 그는 성경신학은 하나님과 인간과의 관계에서 먼저 죄를 전제하고 시작하여야 한다고 말한다. 달리 말한다면 성경역사는 일반 역사가들이 주장하는 방법에 의하여 재구성될 수 없다는 것이다. 비록 성경은하나님께서 일반 역사를 통하여 일하시는 분이심을 보여주지만 반면에 하나님께서 일하시는 역사는 일반역사를 초월하심을 말하고 있다. 그좋은 예로서 예수의 부활을 말한다. 과학적 역사적 비판의 관점에서보면 예수의 부활은 역사적일 수 가 없다. 왜냐하면 역사적 사건에 의하여 연유되지도 않았고(상관 원리) 또한 어떤 비슷한 사건도 역사상에서 찾아 볼 수 없기 때문이다(유추의 원리). 그가 Cullmann과 다른 점은 한마디로 과거 구속사건에 대한 수정적인 재해석을 인정하지 않는 점이다. 그의 표현대로 말한다면 기독교 선포의 본질은 '역사 속의 하나님의 행위의 사실들의 열거'(the recital of God's acts in history)이다. 그에게 있어 성경신학을 수행함에 있어 기억해야 할 중요한 점은 성경은 사건들을 해석하는 것보다 서술하는 것이 우선되어야 한다는 점이다. 그는 해석적인 면은 성경신학에서 보다는 조직신학에서 할 의무라고 규정한다.


(3) G. Goppelt의 견해는 그의 사후(1973)에 그의 제자 J. Roloff에 의하여 출판된 Theology of the NT(1975, 1976)에 나타나 있다. 구원사에 대한 그의 견해는 약속과 성취의 범위 내에 국한되고 있다. 그는역사적 비평적 방법을 배제시키면서까지 구속사를 주장하지 않는다. 그는 신약신학의 목표는 신약 각 권이나 신약 여러 권으로부터 예수의 사역 혹은 초대교회의 선포 내용에 대한 정돈되고 연관된 pictures을 끄집어 내는 것으로 정의한다. 그는 자신의 사역은 신약의 재구성이나 서술하는 정도에 머물지 않고 신약과 오늘의 사람들 사이에 서로간에 비판적 대화를 나누도록 하는데까지 넓히는데 있다고 한다. 그의 주장은 역사적 비평적 방식을 배제시키지 않으면서도 구속사적인 접근을하기 때문에 양편에서 그의 신약신학에 대하여 관심을 표명하고 있음
을 본다.


(4) Geerhardus Vos(1862-1949)는 1893년 가을 프린스톤 신학교에서 새로 설치된 성경신학 과목의 첫 교수로 취임할 때 한 '학문으로서 그리고 신학과목으로서 성경신학의 개념'(The idea dof Biblical Theology as a Science and as a Theological Discipline)이란 강의로 부터 개혁주의 성경신학 발전에 구체적으로 기여하기 시작하였다. 개혁주의 성경신학에 대한 그의 공헌은 구프린스톤신학교에서 1932년 은퇴하기까지 성경신학을 강의함과 동시에 수많은 논문들을 통해서 뿐만아니라 그의 소천 직전(1949)에 그의 아들 Jdhannes G. Vos에 의하여 편집되어 출판된 Biblical Theology : Old and New Testaments(1948) 을 통하여 더욱 뚜렷히 알 수 있다. 그는 분명히 '개혁주의 신학의 아버지'임에 틀림없다. 특히 그의 성경신학 1장에 나오는 '서론 : 성경신학의 본질과 방법'(Introduction : The Nature and Method of Biblical Theology)은 개혁주의 성경신학을 탐구하기를 원하는 자는 반드시 읽어야 할 부분이라 하겠다.


Vos는 "성경신학은 성경에 담겨진 하나님의 자기 계시의 발전과정을 다루는 주경신학의 한 분야"라고 정의하며 성경신학에 있어 주요한 사항들을 다음과 같이 열거한다.


1. 계시의 주요성격


첫째로, 계시의 역사적 점진성이다.
하나님의 계시는 그 자체로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일련의 연속행위 들과 관련되어 있다. 그 이유는 계시가 구속이라고 불려지는 하나님의 다른 행위와 불가분리의 관계를 맺고 있기 때문이다. 계시는 구속에 대한 해석이다. 따라서 구속이 점진적으로 전개되듯이 계시도 그럴 수 밖에 없다. 그러나 두 과정이 일치하는 것이 아니다. 구속은 객관적이고 중심적이면서도 또한 주관적이고 개인적이다. 구속이 객관적이요 중심적이라 할 때는 인간을 대신하여 인간 밖에서 일어난 하나님의 구속행위를 말한다. 예를 들면 성육신과 속죄를 위한 십자가의 죽음 그리고 그리스도의 부활 등을 말할 수 있다. 반면에 구속이 주관적이요 개인적이라 할 때는 인간 밖에서 일어난 하나님의 구속행위를 인간 주체 속으로 파고드는 하나님의 구속행위를 지칭한다. 이것은 중생,
칭의, 회개, 성화와 영화 등을 말할 수 있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구속 사업을 역사진행 과정 속에서 그리스도 사건을 통하여 이루시고 그 구속을 개인에게 적용시킬 때도 역사 진행과정 속에서 이루어 가신다(Robertson's spiral).


둘째로, 역사 안에서의 계시의 실제적 구현이다.
계시의 과정은 역사와 공존할 뿐아니라 역사 속에 실현된다. 성경속의 역사적 사건들 자체가 계시적 의의를 가진다. 계시는 행위계시와말씀계시로 구분할 수 있는데 이 둘은 서로 병행하고 있다. 계시의 일반적인 순서는 먼저 말씀계시가 나오고 다음에 그말씀 계시를 확증시키는 행위(사건)계시가 나오고 그 행위(사건)를 해석하는 말씀계시가 따른다. 구약은 예언적이고 예비적인 말을, 복음서들은 계시사건을 그리고 서신서들은 계시사건에 대한 최종적 해석의 기록이다.


세째로, 계시 속에서 관찰할 수 있는 역사 진행과정의 유기적 성격이다.
모든 증가는 점진적이다. 그러나 모든 점진이 유기적 성격을 지닌것은 아니다. 유기적 점진성이란 씨 형태로부터 성장하여 나무에 이르는 과정에 비유할 수 있다. 질적인 측면에서 씨는 나무보다 덜 완전하다고 말할 수 없다. 오히려 종자와 나무는 같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계시의 유기적 진행과정은 구속의 진행과정에 의하여 지배된다. 이말의 뜻은 구속의 진행과정이 느려지거나 어느 시점에 침묵하게 되면 계시도 그와 발을 맞추어 느려지거나 침묵한다는 것이다. 이러기에 계시의 획기적(epochal) 성격이 있음을 본다. 그 뿐아니라 유기적 점진을 인정할 때 다양성의 증가를 인정할 수 있다. 진리는 단순하다. 그러나 획일적으로 표현되기 보다는 복합적으로 표현된다. 그것은 인격적인 하나님께서 인격을 통하여 진리를 표현하시기 때문이다.


네째로, 성경신학의 실제적 적응성이다.
하나님의 자아계시는 지적인 지식을 주기 위한 목적을 가진 것이 아니다. 물론 경건한 성도가 지적 지식을 통하여 하나님의 계시를 깨닫고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기도 한다. 성경에서 말하는 지식(아는 것=영생)은 헬라적 의미로 이해할 것이 아니라 히브리적인 의미로 이해 해야 한다. 지식에 대한 헬라적 의미는 어떤 사물의 실재를 마음에 반영할 수 있는 정도이다. 그러나 성경에서 말하는 지식은 삶의 내면적 경험과 실제적으로 부합되어 있는 어떤 실재를 가진다는 말이다. 예를들면 성경에서 '안다'고 할 때 그것은 '사랑한다'는 뜻이다. 하나님께서는 이와같은 방식으로 자신을 그의 백성에게 알리기를 원하셨다. 그래서 그는 그의 계시를 한 민족의 역사적인 삶의 환경 속에서 일어나도록 하셨다.


2. 성경신학의 주요 원칙들


첫째로, 성경의 정확무오성의 인식이다.
만일 하나님이 인격적이며 의식을 가진 분이라면 그분의 자아계시의 어떤 형태에서도 자신의 본성이나 목적에 대하여 잘못이 없이 나타내실 것이 분명하다.


둘째로, 계시의 기본사역의 객관성을 인정해야 한다.
계시는 인간의 주관적 산물도 아니다. 그렇다고 받아쓰기 (dictation)식의 산물도 아니다. 이 말은 하나님으로부터 인간에게 오는 계시는 밖으로부터(ab extra) 옴을 의미한다. 물론 성경에 주관적계시라고 부를 수 있는 책들이 있다(잠언, 시편 등). 그러나 그것들은 성령의 내면적 사역의 결과이다. 그러므로 주관적 계시라고 부를 수있는 경우라도 절대적인 신적계시라고 불러야 한다. 만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계시를 주시기를 허락하신 경우 어떤 형태로 주실 것인가에 대해서는 인간에 의하여 결정되지 않고 하나님의 주권에 의하여 결정된다. 하나님의 위엄 앞에서 마땅히 할 일은 그의 말씀을 완전한 신적 가치가 있는 것으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세째로, 성경의 영감성에 대한 인식이다.
성경신학을 할 때는 그 주제를 하나님의 계시의 관점에서 생각하는 것이다. 신약이 구약의 영감을 말할 때 언제나 가장 절대적이고 포괄하는 언어를 썼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그러므로 영감에 관한 성경자체의 의식을 생각하면 완전영감을 믿든지 아니면 아무것도 영감되지 않았다는 것을 믿을 수 밖에 없다는 것을 배우게 된다. 달리 말한다면 어떤 부분은 영감이 되고 다른 부분은 영감이 되지 않았다고 말할 수없게 된다는 것이다. 또한 하나님의 계시는 말씀계시로서 머무는 것이아니라 역사적 사실들을 포괄하고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그러므로 계시가 일어나는 역사적 배경이 신임되지 않을 때는 그 계시 자체의 신임성은 허물어질 수 밖에 없다. 성경신학을 하는 자는 성경이 영감되어진 문서인 것이 하나님의 권위에 의해 보증되어짐을 인식하여야 한
다.


3. 성경신학의 방법론


성경신학의 방법은 주로 역사적 점진성의 원칙에 의해 결정된다. 그러므로 계시과정의 구분은 몇 시기로 구분된다. 왜냐하면 계시가 역사진행 과정 속에서 언약들을 체결하여 나가면서 이루어 가는 구속사업과 불가분리를 맺고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한다면 역사적 점진성은 하나님의 약속과 선지자들의 예언이 성취되어가는 과정을 나타내는 것으로 주기성이 있음을 말한다. 이 말은 어느 시점에서 그 이전(과거)을 볼 수 있으며 또한 그 이후(미래)를 내다볼 수 있음을 의미한다.


4. 성경신학 연구의 실제적 유용성


성경신학은 특별계시에 관한 유기적 성장을 보여준다. 이 사실을 바로 이해하는 자는 성경을 가르칠 때 잎과 가지가 역할만 다를 뿐이지그 근본은 같은 것처럼 본문이 무엇을 강조하고 있는가를 분명하게 가르칠 수 있는 장점이 있다. 이 사실을 인정하지 않는 자유주의자들은 계시가 처음에는 불완전한 경향을 갖고 있었으나 시간이 지남에 따라 진화하여 완전한 것으로 변화되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미 언급한대로 씨와 나무는 양적인 면에서는 다를지라도 질적인 면에서는 동일한 것이다. 그러므로 씨는 불완전하고 나무는 완전하다고 말할 수 없다. 왜냐하면 씨 속에는 나무가 될 모든 요소들을 내포하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성경을 성경신학적 입장에서 바라보고 또 가르칠 때 진리에 대하여 새로운 생명력과 활력을 불어 넣어줄 수 있다. 성경의 계시 역사에 친숙해짐으로 성경 속의 사건의 구속사적 의의를 바로 볼 수 있고 성경의 사건 속에 나 자신이 입체적으로 들어갈 수 있다.


5. 성경신학과 신학의 다른 분야와의 관계


오늘날 신학이라 하면 조직신학, 역사신학, 실천신학, 선교신학과 주경신학으로 크게 구분한다. 성경신학은 주경신학에 속하며 구약신학과 신약신학으로 나뉜다. 주경신학에는 이외에도 성경본문 석의, 강해와 성경 해석학 그리고 신구약 서론 등이 포함된다. 조직신학은 성경을 완성된 작품으로 보고 여러 중요한 교리들에 대하여 성경의 가르침에 따라 조직적으로 재정리하는 학문이다. 성경신학이 구속역사를 밟아가는 선이라고 하면 조직신학은 원이라 하겠다. 자유주의자들이 말하는 조직신학은 성경을 아는 자들의 철학적 사고를 논리적으로 정리한 것이다. 역사신학은 과거 기독교인들의 교회 역사를 다루는 학문이다. 성경신학적 입장에서 말한다면 그 당시에 기독교인들이 성경을 어떻게 해석하고 그 해석을 통하여 깨달은 진리를 어떻게 삶에 적용되었는가를 규명하는 학문이다. 실천신학은 성경의 해석을 현재의 삶에 어떻게 적용할 것인가를 다루는 학문이다. 선교신학은 성경해석 적용범위를 넓혀서 나로부터 이웃을 넘어 만민에게 어떻게 적용시켰으며 적용시킬 것을 연구하는 학문이다. 이 모든 분야는 성경을 어떻게 해석해서 삶에 적용했는가와 적용할 것인가가 결부되어 있다. 성경을 바로 이해해야 신학과 삶이 바를 수 있다. 신학의 알파와 오메가는 성경이다.


6. 성경신학과 역사


성경신학과 역사의 불가분리의 관계가 있음을 이미 강조하였다. 성경신학은 성경 자체의 역사적 배경과 용어와 범위와 사고의 형식 안에서 설명하는 과제의 책임을 지고 있는 것과 인간의 구원을 위하여 역사 안에서 하나님이 행하신 활동에 관한 이야기를 하는 것이 바로 성경이 지닌 명료한 내용이다고 Ladd는 말한다(신약신학, 33-4쪽). 지금까지 성경을 이해하는데 있어 역사의 관점은 두 가지 면에서 경시되어왔다.


첫째는 하나님께서 인간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역사 선상에서 어떻게 행하셨는가 보다는 개인이 이미 그리스도를 통하여 이루어진 구원을 얻게 되느냐에 관심을 집중시켰기 때문이다. 이와같은 생각은 정통교회들이 오래 동안 가져왔던 견해이다.


둘째로는 성경을 통하여 그 당시 역사를 재구성할 수 없다는 생각과 그 필요성을 인식하지 않기 때문이다. 재구성할 수 없다고 생각하는 이유는 재구성하기에는 재료가 불충분하다는 것과 성경이 역사적인 기록이 아니고 신앙의 역사에 대한 기록이기 때문에 그러하다는 것이다. 필요성을 인식하지 않는 이유는 성경은 오늘날의 인간을 위한 것이기때문에 과거에 대해서 그렇게 심각하게 여길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런 주장은 특히 불트만에서 두드러진다. 그는 "지금 여기에서 나와 함께 활동하신다는 의미에서만 우리는 하나님을 활동하시는 분으로 말해야 된다"고 생각하였다(Jesus Christ and Mytholgy, 1958, p.78). 따라서 그에게는 구속사란 결코 존재할 수 없다. 역사과정 속에서 하나님의 활동은 어떤 특정한 시점에서 보편적인 역사경험을 초월적인 방법으로 개인적인 인간 실존에게만 가능하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주장들에 대하여 성경신학과 역사는 불가분리의 관계가 있음을 강조하는 자들의 대답은 무엇인가? 아니 성경이 무엇이라고 대답하는가? 성경은 하나님이 일반적인 역사적 사건을 통해서도 활동하시는분으로 말한다. 그뿐아니라 이 역사적 사건을 계시적 사건으로 사용하시기도 하신다. 이미 언급한대로 이와같은 경우 그 사건은 구속과 연관된 사건임을 알 수 있다. 특별히 성경의 역사관은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역사관이다. 이것은 예언과 성취의 성격을 갖고 있다. 대별하여 말한다면 구약은 예언의 역사요 신약은 성취의 역사이다. 물론 구약 속에는 성취부분이 없다는 말도 아니요 신약 속에는 예언부분이 없다는 말도 아니다(김성수 교수님의 강의 "성경신학에서 본 성경의 중심 사상" 중의 성경의 역사성 부분 참조).


그런데 이 부분에서 강조하여야 할 점은 미래의 사건(예수 그리스도의 사건)이 과거의 사건(구약의 사건)들을 지배한다는 점이다. 이 점은 일반 역사적 관점에서는 받아들일 수 없는 명제이다. 성경의 역사는 필연적으로 약속과 예언되어진 것이 성취를 향하여 점진되어 나가는 성격을 가진다. 그러므로 그 역사는 시작 전에 계획이 있었고 역사의 시작에서부터 성취를 위한 준비가 있었으며(구약), 준비가 완료된 후에 성취시키는 역사가 있었고(복음서), 성취 후에 그 성취의 결과를 적용시키는 역사가 있다(행전-계시록). 약속과 예언이 어느 한 시점에서 동시에 이루어진다면 그것은 약속과 예언이 필요없다. 성경신학에서 역사를 강조하는 것도 이 이유에서이다.


7. 성경신학에서의 신약의 위치


성경신학적(구속역사적) 입장에서 신약과 구약의 차이는 첫째로 구약은 천년 이상 걸려 기록되었다면 신약은 30년 즉 한 세대 안에 기록되었고 한 세기 내의 사건들에 대한 기록이라는 점이다. 신약은 구약보다 계시의 점진성에 대한 관심이 적고 계시 점진의 마지막 부분임을 알 수 있다. 물론 신약에는 계시의 점진성이 없다는 말은 아니다. 신약도 세례 요한의 사역을 기점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 교회의 설립과 성령의 사역을 통한 사도들의 사역으로 말미암아 이방에 복음이전해짐과, 하나님 나라가 최종적으로 완성되는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을 내다보는 점진성이 있다. 신약은 비록 구약을 통하여 약속되고 예언되었던 것들의 성취를 다루고 있기는 하나 바울이 엡 3:10에서 말한대로 전 시대(구약시대)에는 감추어졌다가 그리스도 안에서 계시되고 그것이 만방에 알려지고 그의 재림으로 완성되는 하나님의 각종 지혜의 구현이다. 신약신학은 계시역사의 완성으로서 그리스도 사건과 오순절 이후 그에 대한 다양한 증거와 그의 몸된 교회와 그의 재림에 관심을 기울인다. 구약에서와 마찬가지로 신약에도 비 역사적인 부분이 존재한다. 특별히 신약의 권고 부분이 그러하다. 그러나 이 권고 부분들도 구속역사를 전제하고 있다. 구원역사를 통하여 구원받은 자가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을 말하고 있다. 그 뿐만아니라 그 부분도 성령의 내면적 사역을 통하여 쓰여졌음을 명심하여야 할 것이다.


8. 신약의 구분


성경은 구약과 신약으로 구분되었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중심하여 약속과 예언이 성취된 것을 근거로 한 구분이다. 만일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시는 과정에 근거하여 성경을 세 부분으로 나눈다면 어떻게 나눌 수 있을까? 먼저는 구약을 한 부분으로 하고 다음은 복음서 마지막은 사도행전에서 계시록까지로 나눌 수 있다. 그렇게 나누는 근거는 무엇인가? 그것은 엡 1:3-14까지를 근거로하여 인간을 구원하시는데 삼위일체 하나님께서 하신 사역을 중심하여 구분한 것이다. 구약을 한마디로 말한다면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구원하여 하나님은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그의 백성이 되게 하여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 중에 거하시려는 계획을 하시고 그 일을 준비하는 과정의 기록이라 하겠다. 복음서는 하나님께서 준비하신 사역을 완성하시기 위하여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심과 십자자 사건을 통하여 완성하심(요 19:30)과 승천하심에 대한 기록이다. 사도행전에서 계시록까지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완성된 구원을 성령을 보내시고 사도들을 통하여 복음을 전파하게 하며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을 통하여 하나님의 구원 계획이 완성되어서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과 함께 살 미래에 대한 것까지를 기록하였다.


그러나 신약 자체를 나눈다면 크게 네 부분으로 구분할 수 있다.
첫째로 복음서이다. 복음서는 우선 간단히 예수 그리스도를 소개하기 위한 세례 요한의 예비사역이 기록 되었다. 나머지 전체는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역사로서 그의 생애, 사역(가르침과 이적), 죽음, 부활과 승천에 대한 것을 전하는 복된 소식이다.
둘째로 사도행전이다. 본서는 두 가지 점을 강조한다. 그 하나는 사도행전 1:8에 약속하신대로
사도들에게 성령이 임하심으로 권능을 받아 복음을 유대에서 땅끝까지 전파되어가는 과정을 기록하였다. 사도행전의 마지막은 바울이 로마옥중에서 복음을 증거하는 것으로 끝을 맺는다. 이것은 '모든 길은 로마로'라는 말이 보여주듯이 복음이 땅끝까지 이르게 되었음을 간접적으로 나타내어 주고 있다.
세째는 서신부이다. 그리스도 사역에 대한해석으로 복음을 전파하는 도구로 사용되었다. 서신서는 특정한 환경에 처하여 어려움을 당하는 성도들을 위로하고 격려하는 서신이거나 그들의 물음에 대한 해답적 서신이다. 그렇다면 이 서신부가 우리와 무슨 상관이 있는가? 비록 특별한 상황에 처한 성도들에게 보낸 서신이지만 영원한 진리에 근거하여 오고 오는 세대의 성도들을 위하여서도 기록하였음을 상기할 때 오늘의 성도들만이 아니라 내일의 성도들을 위한 서신인 것이 분명함을 믿게 된다.
마지막으로는 계시록이다. 기독교인의 생애는 소망의 생애이다. 한편 자유를 누리지만 완전히 실
현된 자유는 아니다. 그러기에 기독교인들이 가지는 소망이 흔들릴 위험성을 내포하고 있다. 그리스도 안에서 가지는 소망을 든든히 붙잡고 살아가도록 계시록은 미래의 소망과 영광을 보여주는 내용을 담고 있다. 심판에 대한 내용이 많을지라도 그것은 믿는 자들을 괴롭히기 위한 심판주가 아니라 그들을 구원하시기 위한 구세주로서의 심판을 말할 뿐이다.


9. 신약신학이란 무엇인가?


신약신학이 무엇이냐는 물음에 대해서도 신학의 정의에 따라 대답이 달라질 수 밖에 없다. 신학이란 인간이 하나님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해 왔으며 또한 생각하는가를 연구하는 것이라고 정의하는 자들은 신약신학을 다음과 같이 말한다.
신약신학은 첫째로 주후 1세기 기독교의 시작과 관련된 역사적 문서들을 다루는 학문이다고 정의한다.
둘째로 초대교회 기독교인들의 삶과 신앙의 주요한 근거가 되는 문서들을 다루는 학문이다. 그러므로 신약신학은 주후 1세기 신약의 저자들이 무엇을 어떻게 믿었느냐에 대한 기록을 연구하는 학문이다. 그러므로 신약신학은 신약 저자들의 신앙을 역사적인 안목을 가지고 기술하는 것이다.
세째로 성경신학의 주요 관심사는 신약저자들이 무엇을 어떻게 믿었는가를 연구하는 것이 아니라 신약의 저자들이 살고 있던 시대의 역사를 재구성하는 것이다. 달리 말한다면 위의 정의에 의하면 신약신학은 역사적인 연구가 주요 관심사이다. 신약신학의 주요 관심사가 역사적 연구일 경우 이미 언급한대로 20세기 사람들이 주후 1세기의 기독교 역사를 재구성하는 것은 재료도 부족할 뿐아니라 그 재료들도 역사적인 기록이라기 보다는 저자들이 당시 역사를 신앙의 관점에
서 해석한 기록들이며 저자들의 기록의 상이점들이 상당하므로 불가능하다는 주장이 대두된다. 이런 주장들과 함께 신약신학의 위기라는 말이 신학계에서 들려지고 있다.


다음으로 신학이란 하나님께서 자신에 대하여 인간에게 계시하여 주 신 것을 연구하는 학문이라고 정의하는 자들은 신약신학을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이 경우에 있어서도 하나님의 계시가 신약저자들에게 그들의 살았던 상황하에 주어진 것이므로 그때에 "그것이 의미하였던 바"(what it meant)와 지금 "그것이 의미하는 바"(what it means)를 연구하는 학문임을 인정한다. 이 일을 바로하기 위해서는 우선 그들이 살았던 상황을 바로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들이 살았던 상황을 바로 이해하기 위하여서는 그들의 역사적, 문화적, 종교적 상황을 바로 이해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들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시간적, 문화적, 종교적 장벽이 너무나 두텁기 때문이다. 또 한가지 고려되는 점은 이 모든 것들을 연구하여 일반적인 상황을 바로 이해한다고 해서
그것이 당시의 저자들이 처한 특별상황까지도 바로 이해할 수 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전자의 정의하에서는 "그것이 의미하였던 바"만을 강조하지만 후자, 즉 신약성경이 하나님의 계시라는 정의하에서는 "그것이 의미하는 바"도 역시 중요하게 강조된다. 왜냐하면 이와같은 견해하에서는 성경은 단순한 초대 교회의 역사나 저자들의 신학적인 사상들을 기록한 책이 아니다. 신약은 1세기 기독교인들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오늘과 내일의 하나님의 백성을 위한 영원한 진리의 말씀이라고 확신할 수 밖에 없다. "그것이 의미하는 바"를 바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성경 속에서과거(예: 구약) 에서 "의미하였던 바"를 그 당시 현재(예: 신약)에서 그것을 어떻게 해석하여 기술하고 있는지를 연구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러므로 이미 언급한대로 신약신학은 구약을 통하여 약속과 예언된 것들이 어떻게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성취되고(구원) 또한 그 성취된 것이 어떻게 성령님께서 사도와 제자들을 통하여 이방에 복음을 전파하시고 교회를 세워 나가시며 확장, 성장시켜 마지막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으로 최종적인 완성에 이르는 과정을 연구하는 학문이다.




II. 세례 요한


읽어야 할 부분 : 래드의 세례 요한(46-60쪽)


신약신학을 다루는 책들은 대개 세례 요한에 대한 것은 생략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그 이유는 예수 그리스도 사역에 비하여 그의 사역은 미미하다고 생각할 뿐아니라 그의 사역에 대한 관심이 적기 때문이다. 그러나 언약의 사자로서 하나님의 나라를 건설하실 예수를 소개하는 하는 사자요, 그의 백성을 예비시키는 준비의 사자(즉 광야에서 천국이 가까이 옴을 전파하며 회개를 촉구하며 길을 예비하는 사자)로서의 세례 요한을 고찰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 사역의 배경을 이해하는데 필요하다(참조 말 3:1). 그러므로 구속사적 관점에서 세례 요한의 사역을 그의 출생과 광야에서의 삶과 그의 천국에 대한 전파와 세례 베품과 예수님에 대한 증거, 그리고 그의 죽음과 관련하여 고찰하려고 한다.


1. 출생


(1) 약속의 아이
세례 요한은 천사 가브리엘에 의하여 그의 출생이 예고된 약속의 아이였다(눅 1:13). 그의 출생과 함께 주어진 약속은 "저가 주 앞에 큰 자가 되며...모태로부터 성령의 충만함을 입어...이스라엘 자손을 주 곧 저희 하나님께로 많이 돌아오게 하겠음이니라 저가 또 엘리야의 심령과 능력으로 주 앞에 앞서 가서...거스리는 자를 의인의 슬기에 돌아오고 주를 위하여 세운 백성을 예비하리라"였다(눅 1:15-16).


이 약속의 중요성은 첫째로 이 약속은 예언의 성취라는 점에 있다(말 4:6). 이 사실은 마태가 그의 사역, 즉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왔느니라"라는 전파의 사역(광야에 외치는 자의 소리가 있어 가로되 너희는 주의 길을 예비하라 그의 첩경을 평탄케 하라)이 이사야를 통하여 주신 예언의 성취임을 강조함에 더욱 두드러진다(마 3:3; 참조 사40:3). 말라기나 이사야 선지자를 통하여 주신 예언은 약속의 메시야의 오심 즉 메시야 왕국 시대의 임함 직전에 길을 예비하는 사자의 출
생(말 3:1)과 그의 사역(사 40장)에 대한 것이다. 따라서 이 약속은 메시야 왕국 시대의 임함과 불가분리의 관계가 있음을 말하여 준다.


둘째로 약속의 내용이다. 약속의 내용 자체도 메시야 왕국과 관계되 어짐을 말한다. 세례 요한은 모태에서부터 성령의 충만함을 입은 것을 말한다. 세례 요한의 출생 당시 유대인들은 선지자 말라기 이후부터 성령의 역사가 중단되었다고 생각하면서 메시야가 오면 성령으로 다스리며 성령의 사역이 다시 재개될 것을 내다보았다(솔로몬의 시편). 성령의 역사의 새로운 시작은 곧 새시대의 시작으로 그들은 간주하였다. 그러기에 쿰란공동체 사람들은 자신들의 공동체는 하나님이 거하시는 새언약 공동체라 하면서 그 증거 중의 하나로 하나님의 진리의 성령이 그들 중에 거하심을 내세운다. 그들의 문서를 보면 종말론적 메시야왕국이 그들의 공동체 내에 세워질 것이라고 주장하는 부분도 있는 반면에 이미 세워졌음을 암시하는 부분도 있다.


(2) 출생과 새 예언
많은 학자들이 지적하고 있듯이 유대인들은 선지자 말라기 이후 수세기 동안 예언이 그들 중에 나타나지 않았다고 생각하였다. 그들은 예언과 비슷한 현상이 일어날 때 그것을 그들은 예언이라는 말을 사용하지 않고 "딸의 소리(바트 콜)"라고 불렀다. 이런 상황에서 래드가 지적한대로 유대인들 사이에는 살아있는 예언의 소리 대신에 율법을 강조하는 서기관과 묵시주의자들이 나타나게 되었다. 래드는 쿰란공동체 역시 새 예언을 강조하는 것이 아니라 구약성경 속에 감취어져 있는 새 의미를 발견하여 그것을 지키는 율법주의 운동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므로 요한의 출생과 더불어 되어진 예언들과 "하나님 나라가 가까 왔느니라"는 세례 요한의 선포는 하나님 나라의 임함과 관련된 새 예언자로 소개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뿐아니라 세례 요한의 출생과 더불어 그의 아버지 스가랴까지 예언을 하였다고 기록한 것은 분명히 세례 요한의 출생은 새시대의 시작과 깊은 관련을 짓고 있음을 알 수있다.


2. 세례 요한과 광야의 전파사역


세례 요한은 광야에서 천국이 가까움을 전파하며 회개의 세례를 베풀었다(마 3:1-5; 막 1:4-6; 눅 3:3절 이하). 또한 그의 음식이 메뚜기와 석청이었다는 점이 그가 광야생활을 오래하였다는 것을 말해 준다(마 3:4; 막 3:6). 세례 요한의 광야생활과 그곳에서 회개를 촉구하며 죄를 자복하는 자에게 세례를 베푼 의의는 무엇일까? 그 의의를 고찰하기 위하여 세례 요한이 살면서 사역한 광야의 부근에는 메시야의 오심을 기다리며 공동생활하던 무리들이 있었다. 그들이 살던 공동체가 바로 쿰란공동체이다.


이 공동체가 사해 근처 유대광야에 그 공동체를 세우게 된 배경은구약 이사야 40:3과 아모스 5:26-27에 근거한다(참조 슥 9:1). 사40:3은 "외치는 자의 소리여 가로되 너희는 광야에서 여호와의 길을 예비하라 사막에서 우리 하나님의 대로를 평탄케하라"이다. 쿰란공동체는 메시야 시대가 도래하면 메시야가 왕의 고속도로(king's highway : 요단강 건너편 지금 요르단 산악도로)를 통하여 오신다고 생각하여 광야에서 기다리며 공동체 생활을 하였다. 또한 그들은 암 5:26-27에 근거하여 하나님의 성전이 예루살렘에서 자기들이 살고있는 공동체로 옮겨졌다고 생각하였다. 예루살렘의 제사장들이 범죄하므로 하나님의 영광이 예루살렘 성전에서 떠났다는 점을 이유로 든다. 그뿐아니라 자기들의 공동체에 하나님의 성령 곧 진리의 영이 거하시므로 자기들
의 공동체가 곧 하나님의 성전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므로 자기들의 공동체는 새언약 공동체로서 종말론적 메시야 시대가 그들의 공동체와 더불어 이루어져 가고 있음을 확신하였다.


세례 요한이 광야에서 외친 소리가 바로 사 40:3-40의 인용(마 3:3; 막 1:3; 눅 3:3)인 점을 위의 배경과 관련하여 살펴 볼 때, 그의 사역은 분명 메시야의 오심과 더불어 시작되는 새 시대와 관련되어 생각되 었음이 분명하다. 세례 요한과 쿰란 공동체와 어떤 연관을 맺고 있는가에 대하여 한동안 학계의 관심의 대상이 되었음은 이해할 만하다. 이사야 예언의 인용과 회개를 촉구하며 준비의 세례를 베푼 사실 또한 위와 같은 해석을 강력히 뒷바침한다.


3. 세례 요한의 세례


세례 요한이 베푼 세례의 의의는 크게 두 가지 측면에서 찾아야 한다. 첫째는, 하나님 나라를 맞이하도록 하나님 나라 백성을 준비시키는 측면에서 그의 사역을 고찰하는 것이다. 둘째는, 하나님 나라의 주인공되시는 예수님과의 관계에서 살펴 보아야 한다. 세례 요한의 세례 와 예수님과의 관계를 한마디로 말한다면 그가 세례를 주는 또 하나의 중요한 목적은 하나님 나라 주인공이 되시는 예수님이 어떤 분이시며 그의 사역은 무엇인가를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될 자들에게 소개하는 것이라는 점이다. 이 두번째 측면은 예수님의 사역을 고찰할 때 좀 더 자세히 다루기로 하고 여기에서는 생략하겠다.


세례 요한의 세례를 물세례라고도 부르며 회개의 세례라고도 부른다. 물세례라고 부르는 것은 그가 물로서 세례를 베풀기 때문이다. 물로 세례를 베푸는 것은 세례 요한에게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예를 들면 쿰란공동체에 들어오는 자는 물로 세례를 받아야 했다. 율법에도 물로 씻어 깨끗케하는 결례도 있다(레 11장; 민 19장). 유대인이 아닌 이방인이 유대교로 개종할 경우에 받는 개종자들의 세례도 있다. 래드는 세례 요한의 세례가 율법의 의식적 정결법에서 나왔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세례 요한이 베푸는 세례는 분명히 다른 세례와 다른 점들이 있음을 알 수 있다. 쿰란공동체와 율법에서 말하는 결례는 그 의식이 여러 번 계속적으로 되풀이 된다. 이 점만으로 단 한번의 세례인 요한의 세례와 다른 점을 볼 수 있다. 개종자들의 세례도 요한의 세례처럼 단 한번이나 요한의 세례는 유대인에게 베풀어진 반면에 개종자들은 이방인에게 베푼 점이 또한 다른 것을 알 수 있다. 세례 요한이 유대인에게만 세례를 베풀었다는 것과 더불어 세례 요한에게 있어 누가 유대인이냐는 물음은 던질만 하다. 왜냐하면 세례 요한은 유대인만이 아브라함의 자손만이 아니라고 하기 때문이다. 그는 유대인들이 자신들이 아브라함의 자손임을 교만스럽게 자랑함을 알고 마 3:8,9절에서 "그러므로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고 속으로 아브라함이 우리의 조상이라고 생각지 말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이 능히 이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게 하시리라"고 하셨다. 세례 요한의 세례와 더불어 아브라함의 자손에 대한 개념이 달라지고 있음을 본다. 어떻게 하나님께서 돌들로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게 하신단 말인가? 이방인은 개종의 세례를 받으므로 유대인과 동등됨을 받았다. 그러나 세례 요한이 강조하는 것은 분명히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베풀어질 성령세례로 말미암아 되어질 것을 의미한다고 본다. 그러므로 요한의 세례를 물세례라고 부른데 대한 의의는 이 표현은 앞으로 예수님에 의하여 베풀어질 성령과 불의 세례와 대조되는 점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또한 요한의 세례를 회개의 세례라고 부른다. 이렇게 부르는 것은 요한이 회개를 촉구하고 그의 말에 순종하여 죄를 자복하는 자에게 베풀었기 때문이다. 마 3:11에서는 회개케 하기 위하여 물로 세례를 준다고 하였다. 막 1:4은 죄사함을 받게 하는 회개의 세례라고 하였다. 이 표현들이 보여주는 의미는 요한의 세례는 첫째로, 회개의 표시로서 받는 세례라는 것이다. 둘째는, 세례의 결과로 죄가 사해지는 것이 아니라 회개의 결과로 죄가 사해진다는 것이다. 눅 24:47에서도 회개를 통한 죄사함을 말한다.


세례 요한의 세례가 물세례요 회개의 세례라는 두 표현을 한마디로 말한다면 그의 세례는 준비의 세례라는 점이다. 준비의 세례라는 말은 또한 무엇을 의미하는가? 달리 말한다면 무엇을 위한 준비라는 말인가? 하나님 나라를 맞이하는 준비를 하는 의미에서 준비의 세례라고 말할 수 있다. 세례 요한은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으므로 죄를 자복하고 세례를 받으라고 했다. 달리 말한다면 예수께서 성령과 불로 세례를 베풀 것을 준비하라는 의미에서다. 예수님께서 성령과 불로 세례를 베풀 것이라는 세례 요한의 예언에 대한 전통적인 두 가지 다른 해석이 있다.


세례 요한의 예언에 대한 한 해석은 예수님이 정결케 하는 세례를 베풀 것이라는 것이다. 이 견해에 의하면 순전히 은혜로 성령부어 주심을 말하는 것이다. 크리소스톰으로부터 시작하여 주로 로마교회가 이 해석을 따른다. 이 해석의 약점은 심판을 상징하는 불의 의미가 빠져 있음을 본다. 둘째 해석은 세례 요한의 예언은 두 가지 세례를 말한다는 것이다. 곧 의로은 자는 성령으로 세례를 받고 악한 자는 불(심판)로 세례 받는 것을 의미한다는 해석이다. 이것은 오리겐부터 시작하여 최근까지 많은 지지를 받고 있다. 이 해석의 약점은 세례 요한의 예언은 두 가지 해석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세례라는 점이 지적되면서 대두하게 되었다. 위의 두 해석을 주장하는 자들은 세례 요한의 예언이 오순절 날에 성취된 것을 해석의 정당성의 근거로 제시한다. 달리 말한다면 오순절에 제자들이 성령으로 세례 받은 것은 분명한데 그들이 받은 세례 또한 분명히 심판의 세례가 아니라는 점이다.


예수께서 성령과 불로 세례 줄 것이라는 세례 요한은 두 가지 세례가 아니라 하나의 세례라는 견해는 세례 요한의 예언의 문맥과 성령과 불이 구약에서 의미하는 바에 의하여 주장된다. 마 3:11절과 17절의 헬라어 성경은 다음과 같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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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본문에서 두 가지 점이 주목된다. 첫째는 마태가 보여주는 대로 요한의 세례나 예수님의 세례가 동일한 자들에게 베풀어진다는 점이다. 세례 요한은 예수의 세례는 자신의 준비의 세례를 완성시키고 성취시키는 것으로 소개하고 있음을 본다. 따라서 예수님의 세례는 요한의 세례를 대신하는 것도 아니며 또한 요한의 세례가 예수님의 세례를 피하기 위하여 주어지는 것도 아니라는 점이다. 둘째는 이 보여주는 대로 성령과 불의 세례는 하나의 세례라는 점이다(James Dunn, Baptism in the Holy Spirit, p. 11).


문맥을 통하여 성령과 불의 세례가 하나의 세례로서 두 가지 면을 나타내고 있음을 주장하면서 구약에서 성령과 불이 구원과 심판의 양면성을 동시에 내포하고 있음을 제시한다. 성령은 구약에서 하나님의 영으로서 정화하는 사역과 심판하는 사역을 감당하고 있음을 말한다. 사 4:4절에서 여호와의 영이 정화하는 사역을 감당하는 것을 보여준 다. 여호와께서 "심판하는 영과 소멸하는 영으로 시온의 딸들의 더러움을 씻으며 예루살렘의 피를 그 중에서 청결케 하실 때"가 되었다고 한다. 또한 성령은 분명히 축복의 사역을 하고 있음도 말한다(사 32:15-17, 44:3). 반면에 사 11:4절과 15절에서는 동일한 영이 멸망시키는 사역을 하심을 말한다. 여호와께서 "그 입의 막대기로 세상을 치며 입술의 기운으로 악인을 죽일 것이며"; "뜨거운 바람을 일으켜서 그 하수를 쳐서 일곱 갈래로 나눠 신 신고 건너가게 하실 것이며". 이는 하나님께서 불의와 그를 대적하는 세력을 그의 영으로 멸망시킬 것을 말씀하심이다(참조 사 29:10). 하나님의 성령은 항상 축복의 사역만 하시는 분이 아니라 멸하는 사역도 하심을 본다. 하나님의 영의 멸하는 사역은 신약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사도행전 5장 1-11절의 아나니아와 그의 아내 삽비라의 사건을 통해서 잘 알 수 있다(참조 살후 2:8).


구약에서 불의 사역 역시 심판의 요소와 정화의 요소가 있음을 본다. 불에 심판의 요소가 있음은 분명하다(사 31:9; 암 7:4; 말 4:1). 그러나 불은 악한 자의 심판을 상징할 뿐아니라 의로운 자의 정화(심판이나 멸망은 아님)를 상징하기도 한다(사 1:25; 슥 13:9; 말3:2-3). 말라기 3:2-3의 불은 정화의 불임이 분명하다. 특별히 관심이 집중되는 것은 말 3:1에서 길을 예비하는 사자로서 세례 요한에 대한 예언과 언약의 사자로서 예수님에 대한 예언을 말한 뒤에 언약의 사자의 사역을 불로 정화시키는 사역으로 소개한 점이다. 세례 요한은 자신의 사역을 '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날'을 알리는 엘리야의 사역으로 인식한 줄로 생각된다(말 4:5). 그날에 예수님의 성령과 불의 세례는 회개하는 자에게는 심판이 아닌 축복과 정화의 성령과 불(구원)로서 임할 것을 고대하면서 회개를 촉구하며 세례를 베푼 것으로 생각된다.
이와같은 해석은 세례 요한이 세례를 베푼 물 자체가 심판과 구원의양면성을 지니고 있음을 통하여서도 알 수 있다.


구약에서 강이나 홍수는 재난에 대한 은유적인 표현으로 사용되었음을 본다(시 42:7, 69:2,15; 사 43:2). 반면에 물이나 강은 또한 정화와 축복의 상징이기도 하다. 아람나라 군대장관 나아만은 요단강에서그의 문둥병이 깨끗함을 받았다(왕하 5:14). 에스겔 선지자는 여호와의 언약 백성이 물로서 깨끗함을 받을 것을 내다 보았다(겔 36:25-27). 그는 또한 성전 문지방에서 흐르는 물이 축복의 물임을 말하였다(겔 47:3). 고전10:1-3에서 이스라엘의 출애굽 사건을 세례라고하면서 물세례 자체를 심판과 구원을 동시적으로 의미하는 것으로 이해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4. 세례 요한의 죽음


세례 요한은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한다"고 말한대 로 예수님에게 세례를 베푼 후에 성경의 기록에 관한 한 역사의 중심에서 사라져 감을 볼 수 있다. 그는 죽음의 직전에서도 간접적으로 예수는 그가 기다리던 메시야였음을 증거하였다. 그는 또한 악한 왕 헤롯에게 목베여 죽임을 당함으로 하나님의 아들되신 그 메시야는 악한자를 심판하는 자로서 또한 그의 연약한 백성을 구원하는 구원자로서 오셔야 할 분이심을 실증하였다. 세례 요한이 예수님에 대하여 증거한 부분이나 예수님이 세례 요한에 대하여 증거한 본문들을 살펴야 할 것이나 예수님의 사역을 고찰할 때 살피거나 생략하겠다(참조 M.L. Loane, John the Baptist as Witness and Martyr).


IV. 예수 그리스도의 잉태와 탄생


1. 마태복음 1장의 성경신학적 의의


성경은 구약과 신약으로 구분할 수 있는데 그것은 구약이 주로 약속과 예언의 책이라고 한다면 신약은 그 예언과 약속의 성취의 책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구약이나 신약이나 그 주제가 예수 그리스도인 점을 생각한다면 성경은 두 권의 책이 아니라 한 권의 책이라 하겠다. 마태복음의 특성이 구약의 직접 인용과 암시가 100회 이상 사용된 점을 볼때| 유대인들에게 복음을 소개하기 위하여 쓰여진 마태복음은 예수그리스도가 구약의 메시야 예언을 성취하신 이스라엘의 메시야이며 약속된 왕국을 세우실 그리스도라고 증거하는데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목적으로 기록된 마태복음은 한 권의 책으로서 구약과 신약의 내용의 흐름을 자연스럽게 연결시켜 준다. 이 사실은 마태복음의 첫구절인 마 1:1이 구약과 신약을 연결시키는 다리와 같은 역할을 하는점에서 잘 드러나 있다.


(1)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
마태복음은 예수 그리스도가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이라고 하면서 그의 족보를 소개함으로 시작되었다. 마태는 왜 족보로부터 마태복음을 시작하고 있는가? 족보의 의미는 무엇인가?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를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이라고 하였는데 아브라함과 다윗이 선택되어 지칭된 이유는 무엇인가? 마태복음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가 아브라함에게까지만 거슬러 올라간 것은 그가 그 이상은 거슬러 올라갈 수 없어서가 아니라고 생각된다. 누가복음에서는 예수의 족보가 아담에게까지 거슬러 올라감을 볼 때 그러하다(눅 3:23-38). 그러므로 마태가 그렇게 한 것은 분명한 목적이 있음을 알 수 있다.


마 1:1은 로 시작된다. 이것이 우리 성경에서는 계보 또는 족보로 번역하였다. 그러나 이 표현은 히브리어에서 온 것으로 구약에서 인류역사를 크게 구분짓는 분기점을 나타낼 때사용하였다. 족보는 가장 압축된 형태의 역사로서 어떤 역사의 줄기를시사해 주고 그 역사의 근원(혈통의 근원)을 제시해 준다. 족보를 언급하는 이유는 역사가 전환점을 맞아 새시대로 변혁되어 가려할 때 그역사의 근원과 이제 새롭게 시작되는 역사와의 연속성을 시사하기 위하여 제시되어진다.


그러므로 마 1:1의 족보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새 시대가 시작되는데 이 새 시대는 하나님께서 구약시대를 통하여 하신 약속과 예언의 성취의 시대인 것을 보여주기 위한 목적이 분명하다. 이 새 시대의 주인공이신 예수 그리스도는 이미 구약을 통하여 약속하신 여인의 후손이요(창 3:15), 만민이 그로 인하여 복을 받도록 약속되어진 아브라함의 자손이심을 보여주기 위하여 그의 족보를 아브라함에게까지 거슬러 올라감을 알 수 있다(창 12:1-4, 22:18; 갈 3:16).


(a) 예수 그리스도와 아브라함의 관계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를 아브라함까지만 거슬러 올라간 이유는 무엇인가? 달리 말한다면 그 의의가 무엇인가?
첫째로,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갈대아 우르에서 부르신 배경을 살펴보면 하나님께서 그로 더불어 새 시대를 시작하시기 위함임을 알 수있다. 창 1-11장은 하나님의 은혜에 대하여 인간의 배은망덕으로 인한인간의 삼대 실패을 보여준다. 아담과 하와의 범죄와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과의 결혼과 바벨탑을 쌓아 하늘에 닿게 하려는 계획(천국탈환 사업계획)이 바로 그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인간의 배은망덕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영원한 작정을 이루시기 위하여 실패한 인생을 찾아 오셔서, 하나님 자신이 실패한 그들을 통하여 새 역사를 이루시겠다고 언약하시고 그 언약을 이루어 가심을 알 수 있다. 아담의 범죄 후에 여인의 후손을 약속하셨다. 인류를 홍수로 멸망시키시면서 도 노아와 그의 가족을 보존시켰다. 바벨탑을 허무셨으나 아브라함을 부르셨다. 창 11장 후반부를 보면 셈의 자손들의 족보가 나온다. 모든 자손들이 자녀를 낳고 번창하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러나 아브라함만이 자녀를 낳지 못하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그 아브라함을 불러 언약을 맺고 그와 동행하심은 하나님께서 무능한 그를 통하여 새 역사를 이루심을 알 수 있다.


둘째로, 아브라함을 통하여 이루신 새 시대의 특징은 하나님께서 셈족속 가운데 한 사람을 택하여 그와 언약을 맺고 자신의 구속적 계시적 사역을 수행하여 나가시는 것이다. 아브라함과 맺은 언약은 그에게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 그의 자손에게도 계속되어졌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새 역사의 사역은 아브라함을 조상으로 한 한민족을 통하여 계속되어졌다. 그러나 기억하여야 할 중요한 점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선택하심은 새 역사가 아브라함과 그의 자손에게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 전 인류적이라는 점이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선택하심은 만민을 위한 목적을 향한 특별한 수단으로서의 선택이라는 점이다. 그 근거는 하나님께서 그를 부르실 때 "땅의 모든 족속이 너를(아브라함)인하여 복을 받으리라"고 분명히 말씀하심에 있다.


셋째로, 아브라함을 통하여 이루실 새 역사는 미래 지향적이라는 점이다. 그러기에 그 새 역사를 말할 때는 언약(약속)으로 밖에 할 수 없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 약속이 이루어질 때까지 가만히 계시는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그 약속이 최종적으로 성취되도록 하기 위하여 준비하여 나가심을 알 수 있다. 그 최종적 성취를 위하여 준비하여 나아가는 과정 속에서 그 약속이 점진적으로 성취되어 가고 있음을 알수 있다. 이 점진적으로 성취되어 가는 과정을 한 단면(cross- section)에서 볼 때는 새로운 역사의 시작으로 이해될 수 있다. 그러므로 아브라함에서 시작하여 다윗까지 14대는 이스라엘 왕국을 위한 배경사 즉 형성사로서 이해된다.


(b) 예수 그리스도와 다윗의 관계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으로 이어져 내려온 이스라엘은 하나의 민족을 이루어 출애굽을 통하여 하나님이 다스리시는 신정적 조직이 이루어진다. 모세와 여호수아와 사사들을 거쳐 사무엘 때에 와서 사울을 왕으로 세움으로 신정적 왕국을 새롭게 조직하게 되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왕을 구하는 것을 하나님께서 원치 않으셨음은 분명하다(삼상 8장). 그러나 하나님께서 왕국 자체를 원치 않으심은 아니라고 말할 수 밖에 없다. 왜냐하면 왕의 제도는 이미 신명기에서도 말씀하시고 있기 때문이다(신 17:14-20).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원치 않으신 것은 왕 제도 자체보다도 왕을 구하는 그들의 동기와 목적이 하나님의 마음에 합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할 수 밖에 없다(삼상 8:1-6). 따라서 사울을 그들에게 왕으로 세우심은 하나님의 마음에 합해서라기 보다는 열방과 같이 우리에게 왕을 세워 달라는 그들의 눈에 어느 정도 충족시키면서 그를 통하여 하나님의 왕국과 하나님의 마음에 맞는 왕의 참된 개념을 가르쳐 주시기 위한 것으로 이해된다. 이 사실을 배경으로 하여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부르심과 다윗을 세우심에 몇 가지 공통점이 있음을 알 수 있다.


첫째로, 다윗도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택함과 같이 인간의 실패 뒤에 세움을 입었다는 점이다. 달리 말한다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이 원해서 세운 왕, 사울의 실패 후에 그를 폐위하고 다윗을 세워 새로운 역사를 시작하셨다는 점이다. 그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구해서 세운 왕이 아니라 하나님의 마음에 합해서 세움을 입은 왕이다(삼상 16장; 행 13:22).


둘째로, 아브라함과 맺은 언약은 그와 그의 자손에게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 온 인류에게 적용되어질 것을 약속했듯이 다윗과의 언약도 그와 그의 자손에게만 국한된 것이 아니다. 이 사실은 다윗의 족보 속에는 3명의 이방 여인들이 들어있는 점에서도 알 수 있다(다말, 라합, 룻). 또한 다윗의 뒤를 이어 이스라엘의 임금이 된 솔로몬을 보면서 도 알 수 있다. 솔로몬은 다윗이 이방 여인 밧세바를 통하여 낳은 아들이다. 다윗에게는 솔로몬 말고도 인간적인 면에서 볼 때 훌륭한 아들들도 많았고 서열적으로 볼 때도 솔로몬이 왕이 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방 여인을 통하여 낳은 솔로몬이 다윗을 이어 왕이 된 것은 분명히 위의 사실을 뒷바침 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에 이방 여인들이 포함된 사실들을 감추지 않고 드
러낸 이유는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만민이 복받을 사실을 보여준다.


세째로, 다윗과 맺은 언약도 그의 자손을 통하여 이루실 새로운 역사로서 미래 지향적이라는 점이다. 이 면에 대해서는 여러가지 증거를 제시할 수 있다. 비록 다윗이 하나님의 마음에 맞는 왕이라 하였을지 라도 하나님은 그를 통하여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 중에 거하시는 성전을 짓기를 원하지 않으셨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아들을 통하여 성전을 건축하도록 하셨고 그 아들은 또한 하나님의 아들이 되리라고 하셨다(삼하 7:14). 그러나 다윗의 자손 중에 솔로몬을 위시하여 그 어느 누구도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고귀한 개념을 완전하게 실현시킨 자는 예수님 이전에는 없었다. 이 사실은 다윗 이후 이스라엘 왕국은 쇠퇴의 길을 걷다가 결국 14대만에 바벨론에 포로되어 갔으며, 특별히 성전이 파괴되고 이스라엘은 멸망된 사실이 웅변적으로 증명한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다윗과 맺은 언약은 영원한 언약으로서 반드시 이루어지도록 되어있다. 이 영원한 언약의 성취를 위한 기간이 곧 바벨론 포로로부터 예수 그리스도까지의 14대로 이스라엘 나라의 회복과 완성을 위하여 최종적으로 준비하는 기간이요 메시야를 기다리는 기간이다. 이스라엘의 형성기간과 설립에서 멸망, 그리고 멸망에서 다시 회복되는 기간이 각각 14대가 되도록 하심은 우연의 결과가 아니라 하나님의 섭리하에 되어졌음을 강조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 기다림의 기간동안 유대인들은 고난의 나날을 보내었다. 유대인들은 고난이 더 할수록 그들의 기다림은 더욱 간절하고 애절하였다. 바벨론에서 포로귀환 이후 성전은 회복되었으나 과거에 이스라엘을 다스렸던 다윗 왕통은 바벨론 포로귀환 이후에도 회복되지 못하고 그 왕통은 평범한 한 평민의 가문으로 전락되어 버렸다. 성전회복과 더불어 새로운 통치세력이 형성되었는데 그들이 바로 제사장과 서기관 계층의 사람들이었다. 그 결과로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다윗에게 약속한 대로 인간 중에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고귀한 개념을 실현시킬 자는 반드시 다윗의 자손이어야 한다는 확신이 사라지는듯한 시기도 있었다.
그럴 때마다 하나님께서는 과거에 그러하셨듯이 이 사실을 짚고 넘어가심을 본다(중간사 시대 묵시문학, 참조 사 11장, 41:8, 55:3; 렘 23:5). 따라서 예수님 당시의 유대인들은 다윗 계통의 메시야를 기다림 속에 살고 있었다. 그들은 메시야가 오시면 이방을 멸하고 이스라엘 중에 죄를 제하여 이스라엘로 더 이상 하나님을 배반하지 않는 메시야 왕국을 건립할 것을 기다리고 있었다. 달리 말한다면 하나님이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께서 그들중에 거하시는 하나님의 나라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런 기다림 속에 있는 유대인들에게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으로 오신 예수야말로 그들이 기다리는 메시야이심을 마태복음 1장에서 소개하고 있음을 알 수있다.


(2) 메시야로서의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에 대한 예언
마 1:18에서 1장 마지막까지는 메시야이신 예수 그리스도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동정녀 마리아에게 나심으로 여인의 후손으로 오심을 말한다(롬 16:20; 계 12:9). 여인의 후손은 인류의 대표인 아담이 실패한 후 하나님께서 그의 영원한 계획, 즉 인류를 자기 아들로 삼으시고 영광을 받으시려는 계획을 이루시기 위하여 죄와 원수가 되시고 죄 문제를 해결해 주실 분으로 약속되어진 분이시다(창 3:15). 그러기에 하나님께서는 그의 사자를 통하여 마리아 모태에 잉태된 자는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으로 이름을 예수라고 부를 것을 현몽하셨다. 또한 그의 이름은 임마누엘로 저가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하신 결과로 자기 백성들이 그들의 하나님께서 그들과 함께하시는 임마누엘의 축복 누릴 것을 말하고 있다.


이 임마누엘의 축복은 하나님과 그의 언약 백성이 함께 사는 신인공동체를 이루는 축복이다. 이 신인공동체의 시작은 창조주 하나님과 피조물인 아담과 하와가 함께 살았던 에덴동산이었다. 그러나 이 최초의신인공동체는 아담과 하와의 범죄로 파괴되고 하나님과 그들은 이산가
족이 되고 말았다.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이 파괴된 공동체를 새롭게 건설하여 이산가족을 재결합시키기 위하여 구약을 통하여 준비하시고 이제 그 신인공동체를 완성하시기 위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세상에 보내심을 말씀하신다. 예수 그리스도는 여인의 후손으로 이 세상에 오셔서 자기 백성의 대표자로 그들의 죄를 대신하여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자기 백성의 죄문제를 해결하시고 신인공동체를 건설하셨다(눅 22:20; 요 19:30).


성경신학적 입장에서 주목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잉태 의의를 죄문제 해결과 신인공동체인 임마누엘에 있음을 말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과 더불어 이 모든 것이 완성되어짐을 내다본 점이다. 요한계시록 21장이 보여주는 대로 새 하늘과 새 땅에서 하나님의 장막이 사람들과 함께 하여 하나님께서 친히 그의 백성 중에 거하심으로 새롭고 영원한 신인공동체가 완성되어진다(계 1:1-3). 이 완성된 신인공동체에는 눈물이나 사망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않다고말한다(계 21:4). 달리 말한다면 그 공동체는 죄가 없으며 또 공동체 구성원들에게 죄지을 내적, 외적 요소가 없기 때문에 파괴될 수 없는영원한 신인공동체임을 알 수 있다. 아브라함이나 다윗을 통하여 시작된 새 시대는 미래 지향적이었다. 이 미래 지향적인 면이 예수 그리스
도를 통하여 성취되었다. 이 성취도 미래의 최종적 완성을 향하여 나아가고 있다. 그러나 미래를 향하여 나아감은 보완이나 수정이나 발전이 필요하기 때문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에 의하여 이룩된 성취를 만민에게 적용시키기 원하시는 하나님의 크신 사랑 때문이다.


(3) 결론
마태복음 1장의 족보를 보면 아브라함 이후 예수 그리스도까지 연결된 역사를 꿰뚫는 하나님의 일관된 뜻이 있는데, 그것은 창 3:15과 12:1-3의 약속으로서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게 하겠는데, 그 나라를 통하여 땅의 모든 족속이 복을 얻게 되리라"는 '하나님 나라 건설'이라는 것이다.


이 족보의 의미를 요약 제시한 부분이 1장 17절이다. 이 족보에서는 아브라함으로부터 예수 그리스도까지의 역사를 셋으로 크게 구분한다.
첫째는, 아브라함으로부터 다윗까지의 역사로 이스라엘의 형성사를 나타낸다.
둘째는, 다윗부터 바벨론 이거까지의 역사로 왕국의 쇠퇴와 멸망의 역사를 보여준다.
셋째는, 바벨론 이거부터 예수 그리스도까지 의 역사로 왕국의 회복과 그 완성을 기다리는 기다리는 때임을 말한다. 이러한 역사 구분의 의미를 한마디로 말한다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 나라 완성에 있음을 볼 수 있다. 달리 말한다면 모든 역사를 통한 일관된 하나님의 뜻은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이스라엘 백성(하나님의 언약 백성)을 통한 하나님 나라 건설이다.


구약 성경이 하나님 나라를 직접적으로 언급하고 있지는 않지만 주 하나님의 왕되심을 통하여 하나님 나라를 말하고 있음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주 하나님의 왕되심에 대하여 두 가지 의미로 선포한다. 하나는 하나님께서 천지를 지으신 창조주로서 전세계와 모든 국가 위에 임하시는 보편적 능력으로 통치하심을 의미한다(출 15:8; 왕상 6:5; 시 47:3, 103:19). 또 다른 하나는 이스라엘과만의 특별한 관계에서다. 이것은 구약에서의 하나님과 이스라엘과의 언약관계에 기초한 것으로 이스라엘이 곧 하나님 나라라는 개념이다(민 23:21; 삿 8:23; 삼상 8:7; 시 48:3; 사 41:21). 그러나 이스라엘에게 계시된 하나님의 왕되심과 실제적 역사 발전 사이에는 강한 긴장이 계속되었다. 이러한 긴장은 선지자들의 하나님의 왕되심에 대한 심판과 구원의 예언적 메세지에 의해 하나님 나라 오심에 대한 대망으로 승화되었다.


이 예언적 메세지에 대한 대망이 그 약속하신 하나님이 사람이 되어 아브라함과 다윗에게 약속하신 나라를 완성하시기 위하여 이 땅에 오셨다고 마태복음 1장은 알리고 있다. 하나님 나라 백성을 다스릴 왕이 예수(구원자)요 임마누엘(우리와 함께 하신 하나님)이란 이름으로 영원한 통치자로 오신 것이다. 그러므로 마태복음 1장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하나님 나라 건설이 완성되는 새 역사가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펼쳐지리라는 역사적 대 전환점을 알리는 빵빠레라고할 수 있겠다.


따라서 세례 요한과 예수님의 첫 메세지가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라는 선포였음은 지극히 당연하다. "때가 찼고"라고 말씀하심으로서 하나님 자신이 그 분의 왕적 영광을 충분히 계시하시겠다고 약속하신 그 거대한 전환점이 예수 그리스도 그분에 의해 이루어졌다고 밝히신다. 그러나 성경에서는 천국이 '왔다'는 말과 더불어 '올 것이다'라고 말한다. 이 표현들은 두 개의 천국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천국의 두가지 면을 의미한다. 즉 현재 실현된 천국과 미래 실현될 천국의 두 면을 말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나라 완성의 단계를 셋으로 나눌 수 있다. 첫 단계는 예수님 자신의 인격적 임재로 이루어진 천국이다. 둘째는 예수님의 부활로 높아지심 이후 재림 때까지 이루어갈 천국이다. 마지막 단계는 예수님 재림으로 이루어 질 천국이다.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시면 먼저 하나님과 그의 언약 백성의 교제를 파괴하기 위하여 온갖 방해 책략을 써왔던 사단을 완전히 멸하시고 적그리스도와 거짓 선지자를 불못에 던지실 것이다. 예수님 재림으로 이루어질 천국에서는 모든 대적을 멸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새 하늘과 새 땅에서 그의 언약 백성을 영원토록 통치하시고 그의 백성들은 신부가 그 신랑을 위하여 단장한 것처럼 하나님과 영원한 교제를 나누며 하나님이 지으신 만물을 다스리는 왕노릇을 할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이 모든 것을 요한에게 보이시고 속히 오시겠다고 하셨다. 사도 요한의 대답은 "아멘 주 예수여 어서 오시옵소서"이었다. 사도 요한처럼 아멘 할 수 있는 자에게는 그의 오심은 영원한 축제의 시작을알리는 빵빠레가 될 것이다.


2. 누가복음 1-2장의 성경신학적 의의


누가복음 1-2장의 특색 중의 하나는 성령의 역사하심이다. 세례 요한의 잉태와 예수님의 잉태에 성령님께서 역사하심이 그 예 중에 하나이다. 또한 성령의 충만함을 입어 예언하고 하나님을 찬양함도 그 예이다. 특히 이미 언급한대로 성령의 사역으로 인한 예언은 유대인들이 고대하던 메시야 시대의 중요한 특색 중의 하나이다. 따라서 성령의 역사하심의 재개에 대한 언급은 새 시대의 시작, 곧 예수 그리스도의 잉태와 탄생이 메시야의 오심과 관련지어 말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누가복음 1장에서는 세례 요한(예수 그리스도) 탄생 의의를 죄사함과 언약에 대한 구약의 약속의 성취와 관련짓고 있다. 특별히 1:69와 73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을 아브라함과 다윗과 관련시켜 말하고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언약을 기억하심으로 죄사함으로 인한 구원을 그의 백성에게 알게 하심이다. 누가복음 2장에서 시므온이 아기 예수를 안고 예수로 말미암는 구원은 이스라엘에게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 만민을 위하여 예비한 것임과 이방에 비추는 빛으로 소개하고 있다. 위의 예언은 성만찬 석상에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의 십자가의 죽음을 내다 보시면서 그의 피로 세우신 새언약과 오순절날 성령강림으로 성취되었다(행 2:1-4).


사도행전은 예수님의 승천 이후 천국의 두 번째 단계를 이루어나가 야 할 교회가 약속하신 성령에 의하여 어떻게 세계 열방에게 복음을전파하고 하나님 나라를 확장해 나갔는가의 과정을 기록하고 있다. 성령은 모든 민족에게 허락하신 약속의 성령이시다(행 2:39). 이 사실은 예루살렘에서와 동일하게 고넬료의 집에서 이방인에게도 성령의 부어주심을 통하여 알 수 있다(행 10, 11장). 이와 관련하여 누가복음에서도 마태복음에서와 같이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의 육신적 자손 밖에서도 아브라함의 자손으로 부르실 것을 말하고 있음도 주목된다. 이는 새 언약 안에서 즉 성령 안에서 유대인과 이방인이 하나가 되었다. 이제 예수 그리스도는 국적과 신분에 관계없이 믿는 모든 자의 구주와 통치자가 되셨다. 그리스도께서는 바울을 사용하여 성령의 능력으로 세계의 중심지 로마에까지 그의 통치가 임함을 말하면서 사도행전은 끝을 맺는다. 이는 그의 교회가 땅 끝에도 세워짐으로 그의 통치가 땅끝까지 임함을 말함으로써 그의 나라가 땅 끝까지 임함을 의미한다.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는 온 세상이 그리스도의 것이 되어지고 열방이 그를 영원토록 섬기도록 주님 오시는 날까지 이 세상에서 하나님 나라를 증거할 것이다.


요한복음 1장에서는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 자신이심을 말한다. 그는 하나님 아버지의 영광을 가지고 계시며 은헤와 진리가 충만하신 분이심도 말한다. 그런데 그 하나님이 사람들 가운데 거하신다고 한다. 하나님을 보는 자는 죽는다고 하였는데 어떻게 그 하나님이 죄된 백성중에 거하시며 왜 거하시는가? 이에 대한 해답은 그가 세상죄를 지고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으로 이 세상에 오셨기 때문이다. 마가복음 역시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시기 전에 그가 죄사하시는 권세를 갖고 있음을 말하였다(막 2:5-10).


이와 같이 복음서들은 동일하게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은 죄문제를 해결하시기 위함이며 그 결과로 하나님과 그의 백성이 함께 사는 것을 말한다. 복음서들은 초두에 이렇게 말하고 이어서 약속들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어떻게 이루어져 가는가에 초점을 맞추어 기록되어졌다.
이제부터 복음서가 강조하는 중요한 사실들을 고찰하기로 하겠다.


V . 예수 그리스도의 세례받으심


예수님은 세례 요한에게 세례를 받았다. 이미 살펴본대로 셰례 요한의 세례는 죄인들이 받아야 할 회개의 세례이다. 그렇다면 죄 없으신 하나님의 아들이 왜 죄인들이 받아야 할 세례를 받아야 했을까? 그것도 세례 요한이 그에게 강요한 것도 아니요 오히려 세례 받으려하는 것을 말렸는데도 말이다. 예수님은 겸손하셔서 그러했을까? 예수님께서 세례 요한에게 세례받은 의의는 무엇인가?


1. 예수님이 이스라엘에게 소개됨


세례 요한은 예수님이 그에게 세례 받으려 왔을 때 예수님을 말렸으나 요한복음에서는 그가 와서 세례주는 목적 중의 하나가 예수님을 이스라엘에게 나타내는 것이라고 하였다. "나도 그를 알지 못하였으나 내가 와서 물로 세례를 주는 것은 그를 이스라엘에게 나타내려 함이라"(요 1:31). 이 사실은 세례 요한이 예수님에게 세례를 베푼 후 역사의 장에서 사라져 감을 볼 때 더욱 그러하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세례 받으심으로 그가 이스라엘에게 어떻게 소개되었는가가 주목된다.


첫째로 세례 요한은 예수님을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으로 소개하였다. 이 소개는 문맥적으로 볼 때 예수님께서 세례 요한에게 세례 받은 것과 깊은 연관이 있음을 알 수 있다(요 1:29, 32-33,36). 예수님께서 죄인들이 받는 세례를 받으시므로 죄인들과 하나되신 분으로 소개되었다. 죄인들과 하나되셨을 뿐아니라 그들의 대표자가 되시어 그들을 대신하여 그들의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으로 소개되셨다. 달리 말한다면 요한에게 세례를 받음으로 백성들의 죄를 해결하실 대표자로 그의 백성들에게 소개되는 순간이었다. 이것은 예수님의 십자가를 통한 구속사역을 전제하고 소개하는 말이다.


둘째로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으신 후에 하나님의 아들로 소개되셨다. "성령이 형체로 비둘기 같이 그 위에 강림하시더니 하늘로서 소리가 나기를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눅3:22).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되심을 소개하는 하늘로서 들려진 소리는 두 부분으로 나누어진다. 첫째 부분은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이다. 이 첫째 부분은 내용적으로 시편 2:7을 인용한 것이다. 시편 2편은 하나님께서 열방을 유업으로 줄 다윗의 마지막 자손에 대한 예언이다. 이 다윗의 마지막 자손은 약속의 자손으로 그와 하나님과는 부자의 관계가 있음을 말한다(시 2:7-8, 참조 삼하 7:14). 하나님께서 그 아들을 오늘날 낳았다고 말한다. 그런데 누가복음은 예수님이 세례 받기 전부터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말한다(눅 1:35). 또한 세례 요한은 예수님을 가르켜 "그가 나보다 먼저 계심이라"(요 1:30)고 고백하였다. 그는 분명히 세례 요한보다 먼저 계셨다. 예수님은 자신이 아브라함이 있기 전에 있었다고 하셨다(요 8:58). 예수님은 영원 전부터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분명히 한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선언은 세례 받고 소리가 난 그 때부터 아들이 되었다는 말이 아니라 영원 전부터 아들되심을 세례 받으실 때 다시 한 번 확인하심이다. 그렇다면 "오늘날 내가 너를 낳았다"는 말은 어떻게 이해하여야 할 것인가?
이것은 영원 전부터 아들되신 하나님이 이미 위에서 말한대로 다윗과의 언약을 성취하시기 위하여 이 땅에 오셔서 메시야로 나심을 말한다. 이 사실은 두 번째 음성을 살펴보면 더욱 분명해진다.


하늘 음성의 둘째 부분은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이시다. 이 부분은 내용적으로 이사야 42:1의 인용이다. 이 구절은 이사야 후반부에 나오는 여호와의 고난의 종에 대한 예언의 한 부분이다. 사 42:1-40에 의하면 여호와께서 그의 종에게 열국에 공의를 베풀도록 그의 영을 부어주시겠다고 하신다. 여호와의 종은 복종(사 50:4-5)과 고난(사 53장)을 통하여 여호와께서 주신 신적 사명을 완수하실 것을 예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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