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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약을 어떻게 설교할 것인가?

by 【고동엽】 2021. 11.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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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약을 어떻게 설교할 것인가?
김성수 교수(합신)

1. 신약과 구약의 관계를 규명하기 위한 접근.


* 접근의 방식


구약을 어떻게 설교할 것인가? 라는 이 질문 자체가 신구약의 차이를 의식한 질문이다. 신구약의 관계를 말할 때 가장 정당한 접근방법은 신약과 구약이 동일하게 증거하고 있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하여 신약과 구약이 각각 어떻게 다르게 증거하는가, 그리고 그 증언의 방식과 내용 등에서 어떤 차이와 대조를 이루는가를 살펴보는 것이라 하겠다.


그러면서 동시에 이러한 시각과 매우 긴밀한, 불가분의 관계를 맺고 있으면서 신구약의 대조를 더욱 선명하게 드러내는, 조금 다른 관점은 이스라엘과 교회라고 하는 대조적 관점에서 신구약의 차이를 바라보는 것인데 이러한 시각도 신구약의 관계를 이해하는데 매우 유익하리라 생각된다.


* 역사적 맥락 속에서 접근


신약과 구약이라고 할 때 제일 먼저 연상되는 것이 이스라엘과 교회라는 존재일 것이다. 구약은 이스라엘을 주된 대상과 내용으로 하고 있고 그에 대응하여 신약에는 교회가 있다는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이런 시각으로 접근하게 되면 신구약의 관계를 다룰 때 자연히 이스라엘의 identity가 무엇인가? 라고 하는 것에서부터 시작이 되고 그리고 역사적으로 그 후에 등장하게 되는 신약의 교회와 이스라엘이 어떠한 관계를 갖는가? 라고 하는 문제로 자연히 발전하게 된다.


말하자면 신구약의 관계 내지 차이의 문제는 역사적으로 먼저 존재하게 된 이스라엘과 그 후에 등장하게 된 신약교회를 중심으로 논의될 수밖에 없고, 그리고 이 둘은 각각 긴밀한 내적 상호관계를 맺고 있으면서 또한 역사적 선후관계에 있는 만큼 자연히 이 문제는 역사적 맥락과 틀 속에서 논의되고 이해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물론 신구약의 관계 내지 차이를 얘기할 때 이것은 반드시 역사적 관점에서만 얘기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여러 다른 면에서 그리고 본질적인 면에서 그 차이와 관계성을 말할 수 있다. 그러나 다른 차원의 차이 내지 관계까지도 항상 역사적 틀 속에서 적어도 역사적 맥락과 관련해서 논의되고 이해되어야 할 것이다.


이것이 하나의 주장처럼 들릴지 모르겠으나 이 주장에 대한 근거를 제시하라고 하면 구구한 말들을 많이 해야 하기 때문에 여기서는 구체적인 언급은 피하고자 한다. 그것은 성경의 내용을 익히 알고 있는 사람이라면 이 말의 의미를 잘 이해할 것이고, 또 이 견해에 대해 그렇게 반박할 사람이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 역사적'이라는 의미 - 하나님의 경륜


그러면 신구약의 관계는 역사적 틀, 역사적 맥락 속에서 논의되고 이해되어야 하는데, 이것을 우리 신학적인 입장에서 얘기하면 간단한데, 신학이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는 것을 총망라하고자 할 때는 역사적 틀, 역사적 맥락 속에서 신구약의 관계를 논의한다는 것은 그렇게 간단한 문제가 아닌 것이다. 왜냐하면 역사적이라는 말의 의미가 사람에 따라 너무 다양하기 때문이다.


우선 역사적 틀, 역사적 맥락이라 할 때 그 개념이 하나님의 경륜의 시각에서 이해되는 역사를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이다. 역사라고 할 때 그것이 최근에 와서 중요시 되는 것은 역사의 주체로서 인간의 역할이 특별히 강조되는 때이기 때문이다.


이런 것을 염두에 둘 때, 역사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의 실현, 곧 경륜의 실현이라고 하는 것을 염두에 두고 역사라는 말을 사용하고 있고, 신구약의 관계를 역사적 틀에서 이해되어야 한다는 말은 결국 하나님의 경륜 안에서, 경륜에 비추어서 이해되어야 한다는 말과 다르지 않다. 결국 같은 말이지만 말뜻을 분명히 하기 위해서 하나 덧붙인다면 하나님의 역사적 경륜에 비추어서 이해되어야 한다는 뜻이다.


* 역사적 맥락 속에서 신구약의 관계- 논한다고 할 때 가장 적합한 성경 본문은?


하나님의 경륜에 비추어 신구약의 관계를 논의 내지 이해한다고 할 때 우리는 불필요한 작업들을 생략할 수가 있다. 흔히 배경사라고 하는 부분이나 일반 세속사가들에 의해서 재구성 된 여러 가지 사료들을 우리는 지나쳐 버릴 수가 있다.


그리고 우리는 모든 관심과 작업의 범위를 성경 내에 국한시킬 수가 있게 된다. 그런데 이것은 어떤 의미에서 부담을 지우게 되는 것이기도 하다. 무슨 말인가 하면 역사적 맥락과 틀 내에서 신구약의 관계 또는 차이를 이해하기 위해서 우리는 역으로 성경 내에서만 어떤 자료들을 뽑아내어서 그 원리를 추출하고 이해를 형성할 수밖에 없다는 긍정적인 부담을 지게 된다.


그래서 우리는 자연히 신구약의 관계를 논하고 있는 성경본문들을 채워야 되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넓게 얘기하면 성경전체가 바로 이 문제를 다 다루고 있고 이 문제에 관심을 두지 않는 부분은 또한 성경에 전혀 없다.


좀 더 분명하게 많이 얘기하느냐, 아니면 적게 얘기하느냐 하는 차이는 있을지 몰라도, 성경의 모든 부분이 이에 대해서 얘기하고 있고, 특히 구약에서도 선지서 부분에 오면 그것이 더욱 두드러지게 나타나고 있고 신약에 오면 어느 성경을 택하더라도 거기에서 신구약의 문제와 부딪히지 않을 수가 없게 된다고 말할 수 있다.


복음서에서 보면 예수님의 유대인과의 논쟁, 충돌, 갈등에서 항상 문제가 되는 것이 신구약 관계의 문제에 대한 상이한 이해가 바로 갈등의 원인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그 후에 사도들이 교회를 세우고 복음을 전하는데 있어서도 항상 이 문제가 유대인과의 논쟁의 발단이기도 하고 원인이 되기도 했다.


어느 본문을 택해도 이 문제에 접근할 수 있지만 가장 간략하게 요점만을 비교적 제한된 범위의 본문에서 추출할 수 있게 하는 편리한 성경 본문이 어디일까?
생각해 보면 사도행전에 나타난 베드로와 스데반과 바울의 설교가 아닌가 생각된다.




2. 베드로의 설교
* 베드로설교의 배경


역사적으로도 사도행전은 하나님의 구속역사의 새 시대의 시작과 한 시대 이후의 역사를 기록하고 있다.


사도행전 초두를 보면 익히 아는대로 누가가 먼저 써 보낸 서신을 언급하면서(행1:1-2 "데오빌로여 내가 먼저 쓴 글에는 무릇 예수의 행하시며 가르치시기를 시작하심부터 그의 택하신 사도들에게 성령으로 명하시고 승천하신 날까지의 일을 기록하였노라") 그 서신에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의 일부에 대해서 써 보낸 것이고 이후의 사역도 그와 같은 사역의 계속임을 암시하는 내용이 그 속에 들어 있다고 할 수 있다.


이 사역의 본질에 대해서 암시하는 표현들이 그 후에 쭉 나타나는데 예수께서 부활하신 후 40일 동안 제자들과 말씀 하셨는데 이 말씀의 내용에 대해서 요약하고 있다.


누가는 그 구체적 내용은 밝히지 않지만 그것이 결국 무엇에 대한 내용이었는가에 대해서 하나님의 나라에 관한 것이었다고 얘기한다.(행1:3 "사십일 동안 저희에게 보이시며 하나님 나라의 일을 말씀하시니라") 그리고 승천하시기 직전에 사도들에게 말씀하시되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내게 들은바 아버지의 약속을 기다리라 요한은 물로 세례를 베풀었으나 너희는 여러 날이 지나지 않아 성령으로 세례를 받을 것이다."(행1:4-5) 라고 말씀하고 있다.


누가복음 기자가 이 서신을 기록할 때 물론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을 사실 그대로 기록했을 것이다. 그러나 사실과 서로 상관없는 단편적인 무엇으로 기록했다고 이해하는 것과 사실을 사실대로 기록하되 일관성 있게 상호 연관된 즉 연결된 전체로서 제시했다는 말과는 전혀 다르다.


우리가 어느 쪽을 택해야 할 것인가? 어느 쪽으로 이해할 것인가? 그것은 후자 쪽이라고 생각된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40일간 그의 제자들과 충분히 하신 말씀 그 내용을 한마디로 요약하면 하나님 나라에 관한 것들 이었다. 그리고 이어서 말씀하시길 몇 날이 되지 않아서 성령으로 세례를 받을 것이라는 말씀을 하시는데, 그렇다면 이 기록된 말씀들이 즉 하나님의 나라에 관한 것들이나 성령 오심과 세례 받는 이런 모든 것들이 서로 상관없는 다른 무엇이 아니라 긴밀한 관계를 갖는 무엇들이란 것이다.


이 외에 많은 말씀을 하셨겠는데 이 말씀만 뽑아서 일목요연하게 복음에 대해서 서술하기 위해서 쓰고 있는 누가의 입장에서라고 하면 특별히 정신없는 사람이 아니라고 하면 모든 말들이 서로 연결되어 있다고 자신은 생각하고 서술했을 것이다.


그렇다면 앞에서 예수님이 하신 하나님 나라에 대한 말씀 그리고 성령세례 받으라는 말씀 이것은 서로 상관관계가 있는 것으로 하나님 나라와 매우 깊은 관계가 있는 사건으로서 성령오심에 대해서 말씀하셨다고 말할 수 있다.


* 제자들의 질문 - 하나님 나라와 성령 오심의 관계


그런 다음 제자들이 묻는 말이 나오는데 "이스라엘이 그 나라를 회복하심이 이때 입니까?" 라는 질문이 나온다. 얼핏 보면 이 말은 매우 엉뚱한 전혀 예수님의 의도와는 상관없는 질문 같다. 그래서 많은 이들이 이 부분을 해석하기를 아직도 정치적 메시아 상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한 제자들의 영적 무지를 드러냈다고 말을 하는데 그렇지 않은 것 같다.


앞에서 한 말 곧 하나님 나라에 관해 말씀하신 것과 그리고 성령오심을 예언한 그것과 긴밀한 관계가 있다고 생각한다면 제자들의 이 질문은 매우 타당한 질문이었다고 생각이 된다. 예수님께서 40일 동안 하나님의 나라에 관한 많은 말씀을 하셨고 그리고 그들에게 예루살렘에 머물라고 하셨는데 이런 예수님의 말씀을 들은 제자들에게는 이런 느낌이 들었을 것이다.


하나님의 나라를 말씀하시다가 성령오심에 대해 말씀하시니까 하나님의 나라에 있어서 이 성령오심의 의미가 무엇이었을까? 라는 질문이 자연히 그 속에서 생겨났을 것이다. 그래서 이런 질문이 이런 식으로 표현이 되었다고 본다. 즉 "하나님의 그 나라를 회복하심이 이 때 입니까?"


물론 그 다음 예수님의 대답을 미루어 봐서 제자들은 매우 성급한 종말론적 생각에 사로잡혀 있다고 생각할 수 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느닷없이 "때와 기한은 아버지께서 자기의 권한에 두셨으니 너희의 알 바 아니요." (행1:7) 이라고 하신 것으로 봐서 제자들이 임박한 종말에 대한 기대를 가졌다는 것을 읽을 수는 있다.


하지만 제자들의 이 질문이 문맥에 어긋난, 예수님께서 쭉 해오신 말씀의 의도에 전혀 어긋난 질문이었다고는 볼 필요가 전혀 없고 반대로 문맥에 적합한 질문이었다고 생각이 된다. 단지 그들은 임박한 종말의 기대가 성령오심은 곧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이스라엘의 완성을 뜻하는 것인가? 라는 식의 질문을 했다고 생각이 된다.


이에 대해 예수님께서는 종말에 관해서는 너희들이 신경 쓸 것이 아니다고 하시며 성령오심의 의미에 대해 하나님의 나라의 완성과 관련해서 말씀하지 않고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에서 시작해서 땅 끝까지 나를 증언하는 사역을 감당하게 되는 것과 관련 된 것임을 말씀하셨다. (행1:8)


즉 제자들의 질문과 예수님의 대답은 동일한 의도 속에서 진행됐다고 할 수 있는데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나라에 대해 말씀하실 때 앞으로 성령오심과 더불어 전개될 하나님의 나라의 새로운 역사에 대해 말씀하셨고 제자들도 이것을 다시 확인하고자 질문했었고 예수님께서도 그에 대해 더욱 명확한 대답을 들려 주셨다고 말할 수 있다.


오순절 성령께서 오셨을 때 그것이 예루살렘 한 복판에서 이루어졌고 그것을 목격한 사람들은 대부분 유대인이었다. 디아스포라 유대인이었든지 아니면 본토 팔레스타인의 유대인들이었든지 간에 오순절성령의 역사를 목격한 사람들은 대부분 유대인들이었다.


성령님께서 말하게 하심을 따라서 각국의 방언으로 하나님께서 행하신 위대한 구속의 일을 증언하는 놀라운 사건에 접하게 된 유대인들의 반응은 굉장한 놀라움 이었다. 이런 일이 무슨 일인가! 그래서 새 술에 취했다는 등 온갖 반응을 나타내었던 것이다.


* 베드로 설교의 내용 -성령오심이 무엇을 의미하는가?-


2장에 나타나는 베드로의 설교는 바로 이런 오순절을 배경으로 한 설교라고 할 수 있다. 특별히 성령 임하심과 사도들을 통한 성령님의 강력한 증언, 하나님께서 행하신 놀라운 일들에 관해 증언하시는 그 증언에 접하게 된 유대인들에게, 도저히 이해하지 못하고 그저 놀라워할 뿐인 이들에게 그들 가운데 지금 생겨난 사건, 즉 성령오심의 사건의 의미가 무엇인가를 밝히는 설교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이 설교가 왜 신구약의 관계 문제와 관련이 되는가? 그것은 베드로의 설교의 대상의 특수성에 있다. 그리고 시기의 특수성에 있다.


* 설교대상은 유대인이었다.


2:22절에 보면 베드로 사도께서 말씀하신 대상을 이렇게 부르고 있다. "이스라엘 사람들아..." 나중에도 이 말을 여러번 한다. 스데반 설교에서는 '형제들아'등 여러 가지 표현들이 나온다. 그래서 주된 대상이 물론 그 중에 이방인 곧 개종한 사람들이 끼어 있었는지 모르겠으나 여하튼 주된 대상은 이스라엘 사람들이었다는 것이다.


따라서 새로운 시대가 시작되는 특수한 시점에서 그 대상이 구약 언약백성인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새 시대의 시작을 알리는 이 사건의 의미를 설명하는 그 설교에서 우리는 신구약의 관계를 밝혀주는 어떤 암시들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하는 것은 조금도 무리가 아닐 것이다.


이것은 나중에 스데반의 설교나 13장의 바울의 설교에서도 등장한다. 이 세 분의 설교의 대상이 모두 이스라엘 사람들이었다. 그래서 이 세 분의 설교에서 신구약의 관계에 대한 중요한 실마리(암시)들을 얻을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가 전혀 무리가 아닐 것이다. 우리의 관심이 신 구약의 관계의 성격을 대체적으로 밝히는 것인 만큼 세세한 내용을 취급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 성령오심에 대한 구약의 인용의 의미 -이스라엘 역사와 성령오심-


우선 베드로 사도께서는 지금 그들 가운데서 일어난 놀라운 사건, 즉 성령오심과 그의 강력한 증언 이것을 두고서 구약성경(요엘서)을 인용하였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보내신 선지자가 예언한 그 말씀이 이루어진 것이 바로 이 사건이라는 뜻으로 이 말씀을 인용했다.


그러나 이런 묘한 이행기(과도기)에 있어서 특히 구약언약 백성인 이스라엘에게 그들 가운데 일어난 새로운 사건, 듣도 보도 못한 전혀 새로운 사건의 의미를 설명하면서 구약의 예언을 인용하였다는 것은 도대체 어떤 의미를 가질까? 이 사건은 바로 너희가 믿는 하나님께서 바로 그의 백성인 너희들에게 예언한 너희 역사 가운데서 선포하신 그 말씀이 이루어진 것이라는 의도를 그 속에 담고 있다고 생각할 수 있다.


그렇다면 이 말씀을 듣는 자 곧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어떤 효과를 나타내었을까? 신구약의 관계와 관련해서 이와 같은 구약의 인용은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어떠한 느낌을 주었을까? 이 사건은 우리와 별개의 사건이 아니요 바로 우리를 위해 우리 가운데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과 더불어 이루어 오신 그 역사와 관련해서 그 속에서 이루신 사건이다.


바로 이것이 우리의 역사라고 하는 것을 강조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이것은 이스라엘과 무관한 사건이 아니라 바로 너희에게 주어진 너희를 위해 일어난 사건이라는 것이다. 이런 의도를 깔고 청중들을 향해 '이스라엘 사람들아!' 라고 설교의 서두를 뗀 것은 매우 의미가 있다고 생각이 된다.


* 성령오심과 예수 그리스도


이렇게 서두를 뗀 다음에 베드로 사도께서는 오순절 성령오심의 의미를 좀 더 자세히 그 배경들을 설명하기 시작한다.


우선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과 고난 받으심, 죽으심, 부활하심, 그리고 승천하심과 뗄 수 없는 사건이라고 하는 것을 밝힌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말씀하되 '나사렛 예수'라고 말하면서 이 분은 하나님에 의해 너희를 위하여 정하신바 된 사람이라고 말하고 있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유대인들은 그의 하나님의 아들 되심과 메시아 되심을 거부했다.


다시 말하면 그는 도저히 하나님의 백성에 속할 수 없다고 생각해서 정죄하였던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켜 하나님께서 너희를 위하여 세우신 자라고 하면서 이스라엘의 참된 역사는 예수 그리스도를 떠나서는 의미가 없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즉 예수 그리스도는 이스라엘의 역사와 분리될 수 없는 분이시라는 것이다.


그리고 이적과 기사로서 그가 이러한 분이심을 분명히 밝히셨음을 얘기하면서 그러나 너희들이 그를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다고 말씀한 다음,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를 사망의 고통에서 해방시키사 그를 부활케 하셨다는 사실을 말하고 있다.


조금 전에는 예수 그리스도는 이스라엘의 역사와 분리될 수 없는 분으로 이스라엘을 위해 하나님에 의해 세우심 받은, 정하신바 된 사람이라는 정도만 얘기했는데, 그 다음에는 이스라엘과 예수 그리스도의 하신 일과의 관계에 대해서 좀 더 구체적으로 밝히는 구약 역사와 예수님께서 행하신 일의 관계를 암시하는 말씀들이 예수님의 부활과 관련해서 나타난다.


* 시16편에 대한 베드로의 해석


행2:25절 이하에 베드로는 시편 16편을 인용한다.("이는 내 영혼을 음부에 버리지 아니하시며 주의 거룩한 자로 썩음을 당치 않게 하실 것임이로다. 주께서 생명의 길로 내게 보이셨으니 주의 앞에서 나로 기쁨이 충만하게 하시리로다 하였으니") 이러한 내용을 담고 있는 시편을 인용하시면서, 바로 이 말씀에서 왜 예수께서 부활 하실 수밖에 없는가? 라고 하는 부활의 필연성의 근거를 채고자 한다.


시편 16편의 말씀 가운데 선다는 것은 일시적이라는 것이다. 그것은 존재의 잠정성을 염두에 두고 있는 말씀이다. '경건한 자로 썩음을 보지 않게 한다'는 말씀은 생명을 주시는 은혜를 뜻하는 것이다. 즉 이것은 영혼뿐만 아니라 육신까지도 썩음을 보지 않는 (영존하는) 생명의 은혜에 관해서 이야기 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이 시편 16편은 다윗의 시다. 그래서 일차적으로 생명의 수혜 대상, 곧 하나님의 이와 같은 영생의 은혜를 베푸신 대상이 누구인가? 일차적으로 이 시가 다윗이 지은 시니까 다윗이 바로 그 은혜를 받은 자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베드로 사도께서는 여기에 대한 논리를 반전 시킨다. 즉 "내가 분명히 말할 수 있는 것은 우리 조상 다윗은 죽어 그 무덤이 오늘날까지 우리 가운데 있다"("형제들아 내가 조상 다윗에 대하여 담대히 말할 수 있노니 다윗이 죽어 장사되어 그 묘가 오늘까지 우리 중에 있도다")(행2:29)고 말한다.


그렇다면 이 말은 무슨 뜻인가? 이 생명의 은혜가 다윗에게 해당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적어도 아직 까지는 다윗이 영생을 맛보지 못한 사람이라는 말이다. 영혼의 경우는 모르겠으나 육체적 썩지 않음의 은혜는(생명의 은혜) 받지 못한 자 라는 말이다. 그래서 이 시편 16편의 하나님께서 주시는 영생의 은혜에 관한 말씀이 다윗에게는 아직 성취가 되지 않았다는 것을 분명히 의미한다.


* 다윗의 선지자 됨


그러면서 30절 이하에 보면 이 시편이 궁극적으로 누구를 가리키는가에 대해 말씀 하시되 '다윗은 선지자였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그의 몸에서 날 자로 그의 위에 있게 하시겠다는 그 맹세를 알고 있었다'고 얘기를 한다.


여기서 하나 주의할 것은 다윗의 위라고 할 때 보통 위가 아니라 이스라엘을 다스리는 자로, 다시 말하면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그 나라(교회)를 다스리시는 왕권을 뜻한다. 그래서 다윗의 왕권이라고 하는 것은 특수한 왕권이다. 이러한 왕권에 다윗의 후손중의 한 사람이 앉을 것이라고 하나님이 맹세로 약속하신 것을 다윗이 알았고 그것은 그가 선지자였기 때문이라고 되어 있다.


그렇다면 선지자였기 때문에 이 말을 알았다는 것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그것은 다윗이 선지자였기 때문에 이것을 계시로 받았다는 말인가? 이것을 실제로 다윗에게 전한 사람은 누구였나? 나단이다. (사무엘하 7장 참조)


하나님께서 그와 같은 것을 맹세하셨다는 사실을 그 정도로만 알았다고 한다면 구태여 그가 '선지자였기 때문'이라는 말을 붙일 필요는 없을 것이다. 선지자였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이와 같이 예언하신 것을 알았다고 하는 것은 단순히 약속이 주어졌다는 역사적 사실만 알았다는 정도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맹세하신 그 약속의 깊은 의미, 그 약속의 참된 의미까지 알고 있었다는 뜻이 될 것이다.


그래서 이렇게 해석이 되어야 그 다음 말이 이해가 된다. 즉 그가 이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무엇을 미리 예언 할 수 있었는가? 예수 그리스도에 관하여서 그가 "미리 보는 고로 그리스도의 부활하심을 말하되 저가 음부에 버림이 되지 않고 육신이 썩음을 당하지 아니하시리라 하더니"(행2:31)라고 예언할 수 있었다.


어떻게 보면 논리적 비약 같은데, 그의 자손 중 한 사람이 교회를 다스리는 통치의 자리에 앉게 되는 것에 관해서 그가 '음부에 버림을 당하지 아니하고 육체가 썩음을 보지 아니 할 것'을 예언 하는데 까지 연결될 수 있는가?


이것을 제대로 연결시켜 주기 위해서는 좀 전에 언급한 선지자로서 알았기 때문이라는 그 말의 의미를 깊이 있게 이해할 필요가 있다. 그 맹세의 참된 의미, 곧 그 맹세가 진정 누구에게 적용 되는가 하는 것까지 그는 알고 있었다고 얘기 할 수밖에 없다.


이렇게 성경을 너무 비약해서 성경 본문에 나타나는 것을 마음대로 이해해도 좋은가? 라고 의문을 제기 할 수 있겠으나 예수께서 이 본문을 그의 신성과 관련해서 여러 번 인용하셨다.


복음서에 보면 예수님을 그저 한낱 인간으로만 알고자 하는 유대인에 대한 반박으로서 시편 110편 말씀("여호와께서 내 주에게 말씀하시기를 내가 네 원수로 네 발등상 되게 하기까지 너는 내 우편에 앉으라 하셨도다")을 인용하신 것을 볼 수 있다.


주님께서 말씀하시길, 다윗이 메시아에 대해 얘기 하면서 그를 자기의 주라고 얘기하고 있다.(시110:1) 분명히 예수는 다윗의 후손으로 오시는데 그 후손에 대해서 어떻게 '자기 주' 라고 부를 수 있는가? 라는 반문을 던지는 것을 볼 수 있다.


구약을 이해할 때, 신약을 너무 과도하게 구약 속에 읽어 넣어서는 안 된다고 하면서 역사적 상황에 맞게끔 적절한 구약 이해가 필요하다고 많이 이야기를 한다. 그러면서 구약 성도의 계시 이해 수준을 많이 낮추는 경향이 있다.


그런데 실제는 그렇지 않다. 여기 다윗의 경우를 봐도 다윗은 메시아에 대해 어느 정도까지 알고 있었는가 하면, 그는 직접 보았다. 하나님께서 메시아에 대해 '내 우편에 앉으라' 그리고 그 메시아에 대해서 자기(다윗)는 그를 '주'라고 불러야 할 분으로 그는 알고 있었다.(시110)


이런 것들을 모두 연관시켜 보면 선지자로서 다윗은 하나님께서 그에게 맹세하신 약속의 의미를 참되게 알았고 또한 앞으로 이 약속이 궁극적으로 누구에게서 성취될 것인가? 누가 이 약속을 참되게 이룰 것인가? 하는 것을 알았다고 보는 것이 적어도 사도행전 문맥에서 판단할 때 오히려 자연스럽다고 생각된다.


다윗은 이처럼 하나님께서 영원한 왕조를 약속하실 때 영원한 왕권, 즉 교회를 영원히 다스릴 그 왕이 누구신가? 또 앞으로 그 분이 자기의 혈통을 통해 나실 것도 알고 있었고 이 분에 의한 통치야말로 영원한 통치요, 이분의 왕권이야말로 영원한 왕권이며 하나님이 다윗에게 영원한 왕위를 약속하셨을 때 이것은 궁극적으로 그가 '주' 라고 불러야 할 그 분이 그의 후손으로 오실 그 때에 온전히 성취될 것이라고 하는 것을 그는 알았다고 봐야 할 것이다.


여기서 한 가지 분명한 것은 다윗이 이스라엘의 왕으로 세움 받았다는 것이다. 그런데 자신이 그 독특한 나라(하나님의 나라, 교회)의 통치자로 세움을 받았을 때 그는 자기의 한계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는 얘기다.


그는 자기에게 비록 영원한 왕권이 약속 되었으나 이것의 진정한 성취가 누구에게서 미래에 이루어 질 것인가에 대해 알았다. 우리는 이런 관계를 '예표'라고 표현하기도 한다. 자기가 지금 행사하는 하나님의 통치자로서의 왕권 행사의 한계를 그는 분명히 알고 있었다. 그는 약속의 참된 의미를 알고 있었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에 대해서 얘기할 수 있었다.


* 그리스도의 부활과 구약성도의 영생


시편 16 편에서 '나' 라고 표현하는 사람과 성도들, 곧 거룩한 무리라고 부르는 사람들의 긴밀한 관계, 서로 떨어질 수 없는 연합의 관계를 얘기하면서 '거룩한 자들' 이라고 불리우는 그 사람들과 분리 될 수 없는 '나' 라고 하는 사람에게 이와 같은 영원한 생명의 약속, 곧 영생의 기업이 주어졌다는 것을 얘기하고 있다.


그런데 베드로 사도는 이 시편을 어떻게 해석 하는가 하면 영생의 기업을 받을 자로서의 거룩한 무리와 분리 되지 않는 한 인물, 이 인물이 가리키는 궁극적인 분은 다윗이 아니다 라고 얘기한다. 다윗에게서는 이 약속이 성취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얘기한다. 그리고 다윗은 이 약속의 궁극적인 성취가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이루어질 것을 알고 있었다고 얘기한다.


그렇다고 하면 여기서 우선 알 수 있는 것은 다윗과 그를 포함한 영생의 기업을 약속으로 받은 성도의 무리들의 영생의 기업은 어떤 인물의 사건과 밀착되어 있다고 할 수 있나? 바로 예수 그리스도와 밀착 되어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들이 부활의 생명을 누리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사건과 뗄 수 없다라고 하는 암시를 우리에게 준다. 그래서 이 시편 16 편은 왜 베드로 사도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의 필연성의 근거로서 제시하고 있는가에 대한 설명이 된다.


* 예수 그리스도와 이스라엘과의 관계


이 본문이 상당히 의미가 있는 것은 나중에 베드로 사도께서 3장에서 유대인들에게 말씀 하시되 '너희가 죽인 그 예수 그리스도를 생명의 주로 세우셨다'고 하셨는데 이 생명의 주는 부활의 생명을 주시는 분이시라는 의미를 갖는 것이며 이것은 시편 16편 인용과 그에 대한 베드로 사도의 해석을 토대로 하고 있는 것이기 때문에 설명을 요하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신구약의 관계의 또 다른 한 일면을 엿볼 수 있는데 그것은 예표적 성격이라는 것이다. 3장에 보면 성전 미문에 앉은 앉은뱅이를 베드로 사도와 요한이 일으킨 사건이 나온다. 이 때 사람들이 놀라서 그들을 끌고 솔로몬 행각으로 가서 말을 듣고자 할 때, 이와 같은 능력이 나타난 연유에 대해서 설명하는 베드로의 설교 내용이 나온다.


구체적인 내용은 볼 필요가 없고 신구약의 관계와 관련해서 우리가 볼 것은 18절 이하에 보면 '하나님께서 모든 선지자들의 입을 통해서 그리스도께서 고난 받을 것에 관해 말씀하신 모든 것들을 이루신 것'이라고 하는 것과 19절 이하에 보면 '회개하고 돌이켜 죄사함을 받으라' 그리고 24절 이하에 보면 '사무엘부터 그 후 계속 모든 선지자들이 바로 이 때를 예언하여 왔다'라고 말하고 있다.


그 바로 전(22절에) 모세가 '나와 같은 선지자를 너희 가운데 일으키시리라'는 예언을 얘기 하면서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다시 살리사 먼저 너희에게 보내셨다고 말씀한다.


베드로 사도께서 강하게 말씀하고자 하는 것은 결국 '예수 그리스도는 이스라엘 역사에 있어서 이방인이 아니요, 상관없는 자도 아니며, 바로 이 역사 속에 보내진 분이요 그를 통해 이루신 하나님의 은혜의 역사는 바로 너희를 위한 것이며 모든 구약의 선지자들이 바로 이것에 대해서 말씀해 왔다'고 얘기하면서,'일차적 수혜자들이 바로 너희 들인 만큼 하나님께서 먼저 예수 그리스도를 부활케 하사 너희에게 보내셨다'라고 말씀하고 있다.


* 신구약의 연속성


여기서 신구약 관계와 관련하여 확인할 수 있는 원칙, 곧 기본적인 사실은 신구약간의 연속성과 긴밀한 관계성 또는 역사의 동질성 등을 확인할 수 있다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와 이스라엘의 (구약)역사는 결코 분리될 수 없고 어떤 의미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떠나서는 이스라엘의 역사 자체가 무의미해져 버린다는 사실들을 여기에서 확인할 수 있다.


설교를 할 때 제일차적 작업이 결국 본문 이해에서부터 출발 한다고 하면 특별히 구약을 설교해야 하는 설교자가 구약을 본문으로 택할 때 특히 유의해야 할 제일원리는 이처럼 신약과 구약은 불가분의 관계가 있다는 사실이다.


* 속성과 불연속성 - 결합된 원리


신구약의 연속성을 우리는 확인할 수 있었다. 그러나 연속성의 구체적 내용은 상당히 복잡하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스데반의 설교 내용에서는 그와 반대되는 경향, 즉 불연속성이라고 하는 신구약의 차이 혹은 대조가 분명히 강조가 되고 있겠지만, 그러나'불연속성' 그 말만 알아 가지고는 설교 하는데 도움이 되지 않는다. 불연속성이라 할 때 불연속성의 구체적 내용이 무엇인가 하는 것을 확인하지 않으면 설교할 때 도움이 되지 않는다.


사도행전을 통해서 확인할 수 있는 원칙 자체는 우리가 익히 듣는 것이다. 문제는 그와 같은 원칙들의 '구체적 내용'을 우리가 얼마나 아느냐가 중요한 것이며 그에 따라 구약을 신약과 연결 짓고 또한 설교에 사용 할 수 있는 범위가 정해진다고 할 수 있다.


엄밀히 얘기하면 연속성과 불연속성이 말 자체로는 서로 상반되는 어휘지만 실제에 있어서는 이 둘은 서로 상반된 말이 아니고 서로 결합된 말이다. 신,구약 관계의 복잡한 면을 대조적으로 드러내기 위해 편의상 택한 말이 연속성과 불연속성이지 실제로 이것은 서로 분리 되지 않고 결합되어 있다.


말하자면 성경전체를 얼마만큼 폭 넓게 깊이 이해하느냐에 따라서 신구약의 관계의 이해도 비례해서 깊어지고 정확해진다고 말할 수 있겠다. 흔히들 가장 좋아하는 것이 구약과 신약을 이해하는데 Key가 될 수 있는 어떤 공식을 알려 달라는 것이다.


어떤 공식들을 알고 그것을 대입하면 자동적으로 답이 나오는 그런 것을 가르쳐 달라고 하는데, 성경을 취급하는데 있어서 그런 것은 없다. 물론 초보 단계에서 가이드 라인으로서 연속성과 불연속성, 그리고 예표성 등등의 얘기를 하게 되는데 실제로 본문들을 취급 할 때 이것들은 따로 분리 되는 원리들이 아니고 하나로 결합된 원리들이기 때문에 이러한 것들을 성경 본문을 대할 때 스스로 확인해 가지 않으면 본문을 이해하고 설교 하는데 큰 도움은 되지 못하리라고 생각한다.




3. 스데반의 설교 -구약의 예표성-
* 스데반 설교의 배경


오순절 이후 사도들의 강력한 복음 선언과 그와 더불어 일어난 이적과 기사들을 통해서 유대인들 가운데 어떠한 일들이 일어났는가? 유대인들은 그것을 어떻게 받아들였는가? 하는 것에 대해 우리는 사도행전을 통해서 잘 안다.


특히 구약 교회 지도자들이 (유대 지도자들) 사도들을 잡아다가 성령님께서 그의 복음 사역자들을 통해서 강력히 역사하시는 그 역사를 막아 보려고 무진 애를 쓴다. 여러 가지 형태로 핍박을 가하고 나중에는 처치하려고 했지만 가말리엘의 신중론, 즉 '하나님께서 세우지 않은 것이면 망해 없어질 것이고 세우신 것이면 너희가 막지 못하리라'는 신중론 때문에 일단 가라앉은 듯 했지만 사도행전 6:8 절 이하에 보면, 그런 가운데 교회는 점점 흥왕해져 가고 스데반으로 인해서 많은 표적과 기사가 백성들 가운데 행해 졌는데, 이 때 외국에 거주하던 유대인들이 돌아와서 스데반과 논쟁을 하게 되었다. 이들이 크게 분노하고 소동을 일으켰는데 그 이유를 다음과 같이 정리 할 수 있을 것이다.


* 성전과 모세의 율법에 대한 부정이라는 유대인의 오해


유대인들은 스데반과의 논쟁 중에 어떤 인상을 받았는가 하면 스데반은, 즉 그가 속해 있는 기독교는 모세와 하나님을 훼방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백성과 장로와 서기관들을 충동질해서 스데반을 끌고 종교 재판소(산 헤드린)에 끌고 가서 재판을 받게 한다. 거기서 정식으로 고소를 제기 하는데 그 고소 내용인 즉 두 가지로 크게 대별할 수 있을 것이다. 하나는 나사렛 예수라고 하는 사람이 성전을 허물 것이라고 하는 것이고, 또 하나는 모세가 우리에게 전해 준 여러 가지 관습들을 변개 하려고 한다는 두 가지다. 쉽게 말하면 성전을 부정하고 모세가 전해준 율법을 부정한다는 얘기가 되겠다.


그런데 모세가 전해준 율법과 성전이 이스라엘의 삶에서 차지하는 비중을 생각해보면 이 고소는 매우 심각하고 본질적인 고소라고 할 수 있다. 다시 말하면 스데반은 이스라엘의 전 역사를 부정하는 자라는 얘기다.


* 성전


이스라엘의 독특함이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그들 가운데 임재해 계신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의 가시적인 상징, 표시가 바로 성전인 것이다.


성전이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의 임재의 처소다. 그것이 이스라엘 가운데 거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구약의 율법을 보면 모든 이스라엘의 삶이 이 성전을 중심으로 이루어지게 되어 있다. 쉽게 말하면 성전을 부정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임재가 이스라엘 가운에 차지하는 의미를 부정하는 자라는 뜻으로 유대인들에게 비쳤을 것이다.


* 모세의 율법


그리고 모세의 율법이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의 계시하신 말씀이요 이 모세의 율법의 절대성에 대해서는 신명기에서도 여러 군데서 얘기 하고 있다. '가감하지 말라. 이에 어긋난 말을 하는 자는 선지자라 할지라도, 그를 통해 이적과 기사가 나타난다 할지라도 그를 죽여 없애라'(신13:1-5)고 했다.


이것은 모세를 통해 주신 율법 계시의 절대성을 의미하는 표현이라고 볼 수 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다스리는 구체적인 방법이 그의 계명을 주셔서(율법을 주셔서) 그 율법을 믿어 순종케 하심으로(말씀을 믿어 순종케 하심으로) 하나님의 통치가 이루어지는 것이라고 한다면 이 율법이 이스라엘의 삶에서 차지하는 의미라고 하는 것은 굉장한 것이요, 이것을 부정 한다는 것은 이스라엘의 존재 자체를 부정하는 것과 마찬가지가 되는 것이다.


따라서 여기서 유대인들이 거론한 두 가지 고소 내용, 즉 성전과 모세의 율법을 변개하려거나 허물려고 한다는 이 고소 내용은 매우 심각한 것이다. 유대인들로서는 목숨을 내걸고 싸움을 하지 않을 수 없는 심각한 문제였다고 기억할 필요가 있다. 이런 심각한 고소를 받고서 교회 법정에 선 스데반은 우선 그의 변명을 다음과 같이 시작한다.


* 스데반의 변증의 흐름 - 아브라함의 약속


우선 이스라엘의 역사의 근원으로부터 시작한다.(행 7장) 아브라함을 부르신 것과 그에게 이 땅을 약속으로 주신 하나님의 약속을 거론하면서, 그 땅은 오늘 우리가 살고 있는 바로 이 땅 이라고 얘기한다. 이것은 이스라엘의 역사와 그 의미를 간략하게 서술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스라엘의 역사가 어떻게 시작되었는가?


그것은 하나님께서 그 열조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그 약속으로 부터 시작한 것이요, 오늘 이 땅에서 이와 같은 이스라엘이라는 공동체로 존재하게 된 것은 바로 그 약속의 성취라는 것을 분명히 한 것이다.


좀 전에 얘기한 고소 내용의 본질을 한 마디로 얘기 한다면 이스라엘의 역사를 전적으로 부인한다 라는 내용의 고소였다. 이 고소 내용에 대해서 스데반은 우선 이런 얘기를 한다. 나는 너희들의 이스라엘 됨을 인정한다.


너희들의 역사는 아브라함으로부터 시작했고 그 약속의 성취로서 이 땅에 거한다는 것을 다 인정한다. 그러나 (7:5 절 이하에 보면 그 다음 단계의 역사과정, 곧 약속의 성취 과정에 대해 얘기하기를) 열조들(아브라함부터 모세 때까지), 더 좁게 얘기해서는 12 조상이 태어난 때, 즉 족장사 기간 동안에는 이 약속이 성취되지 못하고 오직 약속으로만 주어졌을 뿐이라는 것을 강조한다.


그리고 이 약속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12 조상이라고 하는 혈통을 통해서 계속 이어져 내려왔음도 8절까지 얘기하고 있다. 특별히 이 혈통을 가리켜 그에게 '할례의 언약'을 주셨다고 얘기하고 있고 아브라함이 그의 계승자인 이삭에게 할례를 행했고 이삭은 야곱에게 행했고 야곱은 12조상에게 행했다 라는 말을 함으로서 12지파에 이르는 혈통은 단순한 혈통이 아니라 언약의 혈통이라는 것을 분명히 밝히고 있다.


* 출애굽


이어서 모세의 등장과 그의 사역에 관한 부분이 상당히 길게 열거 되고 있다. 모세에 관한 얘기가 이렇게 많아진 이유는 물론 모세가 이스라엘에 차지하는 비중 때문이라 하겠으나 특별히 이 시점에서 모세에 관한 얘기가 많아진 것은 스데반을 고소한 내용이 바로 모세를 부정한다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모세의 출현 배경을 얘기하기를, 약속을 따라(하나님께서 미리 말하심을 따라) 어떻게 이스라엘이 애굽에 내려가게 되었고 거기서 종살이 하게 되었는가에 대해서 말하고 난 다음, 17절에 보면 '약속의 때가 이르매'라는 말로 시작이 된다.


그리고 모세의 출현을 다루는 출애굽은 즉 모세를 통해 이루신 하나님의 구원은 아브라함에게 하신 약속의 성취라는 것이다. 스데반은 이것도 인정하는 것이다. 출애굽은 어떤 의미에서 본격적으로 하나의 집단으로 독특한 공동체로 존재케 한 것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이 출애굽을 가리켜서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그 약속의 성취라고 그 약속을 따라 그 약속이 이루어진 결과가 바로 이스라엘의 존재라고 하는 것도 인정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모세의 이야기가 계속 나온다. 그가 어떻게 애굽 사람 손에서 그의 백성을 구원하려 했는가? 또 시내산에서 주의 사자가 나타나서 그를 부르신 내용들을 얘기하면서, 35절 이하에 보면 이스라엘 사람들이 거부한 이 모세를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의 통치자(구원자)로 세우셨다고 말한다.


이렇게 보면 스데반은 모세가 구약 이스라엘에 있어서 차지하는 독특한 지위를 그대로 다 인정하는 것이다.


* 모세는 누구인가?


구약 이스라엘에 있어서 모세가 차지하는 의미가 무엇인가? 그것은 교회의 통치자였다. 하나님께서 세우신 구원자였다는 것도 다 인정한다는 말이다. 그러면서 그 구체적 내용에 대해서 언급한다. 애굽에서 구원해 내고 홍해를 건너는 일들과 광야 40년 동안 있었던 일들을 쭉 얘기하고 있다.


그러나 37절에 보면 스데반은 여기서 매우 여운있는 한 암시를 덧붙이고 있다. 이 사람 모세는 어떤 사람이냐?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하나님께서 너희 형제들 가운데 나와 같은 선지자를 일으키리라고 말씀하신 바로 그 사람이다.


이런 말을 덧붙인 스데반의 의도는 모세 자신은 결코 자기 자신을 궁극적인 메시아(구원자)라고 생각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암시 하고자 하는 것이다.


그는 궁극적인 선지자가 올 것을 분명히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분의 일을 예표할 뿐이었고 그리고 그분이 올 것을 예언했던 사람이라는 것을 여기서 분명히 밝히고 있다. 말하자면 모세 자신은 결코 궁극적인 이스라엘의 구원자로 생각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 말은 하나님의 구속 역사는 결코 구약으로 종결되거나 완성 될 수 없고 어디까지나 완전한 것을 기다릴 수밖에 없는 미완의 시대일 수밖에 없다는 것을 구약자체가 스스로 증거하고 있다는 것을 여기서 분명히 밝히는 것이다.


38절에 보면 이 사람은 시내산에서 그와 함께 말씀하시던 천사(주의 사자)와 그리고 우리 조상들과 함께 광야에 있었던 자이며 생명의 말씀을 받아 우리에게 준 자라고 얘기한다. 특히 여기 보면 광야 40년 동안 모세의 또 다른 역할(직분)에 대해서 어떻게 얘기를 하는가?


선지자 곧 계시의 중보자로서의 독특한 역할에 대해서 얘기를 하고 있다. 그는 생명의 말씀을 받아 이스라엘에게 전한 자다. 말하자면 하나님께서 주신 계시를 받아 이스라엘에게 전달한 자로서의 독특한 위치에 대해 스데반은 모두 인정하는 것이다.


* 이스라엘 - 반역의 역사


그런데 그 다음 스데반은 이스라엘 사람들에게는 매우 뼈아픈 말을 덧붙이고 있다. 그것은 이스라엘의 반역의 역사에 대한 그의 증언이다.


그 계시의 말씀을 받고 있는 중에(모세가 호렙산에 올라가 있을 동안에) 너희 조상들이 어떻게 했느냐? 그 조상들은 금송아지를 만든 족속이었지 않느냐? 그리고 그 후에는 제대로 되었느냐? 여기서 스데반은 아모스 선지자의 글을 인용한다. 즉 계속 반역 또 반역하다가 결국 하나님께서 심판하시겠다고 선언 하신 것을 언급하고 있다.


이스라엘의 역사는 이처럼 반역으로 말미암아 심판으로 끝나버린 역사라고 말하고 있다. 이 말은 유대인들의 고소에 대해서 묘한 의미를 갖는다.


너희는 나를 가리켜 모세를 부인한 자라고 말을 하는데 그것은 그렇지 않다. 나는 이스라엘의 독특한 존재의 의미와 그들의 역사적 근원과 또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역사가운데 그의 약속을 이루어 오신 것을 모두 인정하는 사람이요 이스라엘을 이스라엘 되게 하시는 하나님의 역사 가운데서 모세가 차지하는 지위와 그 독특한 사역들을 모두 인정하는 사람이라고 말하면서 모세를 부정하는 사람은 내가 아니라 오히려 너희들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동시에 여기에서 한 가지 분명히 얘기하고 있는 것은 예수님 당시부터 유대인들이 갖고 있었던 뿌리깊은(이 이후에도 이것 때문에 계속 초대 교회에서 문제가 되지만) 오해가 하나 있는데 그것은 구약으로서 모든 것은 완결되었다는 것이다.


즉 모자잎 시스템(구약체계)은 변개가 불가능 하다는 것이다. 그것은 그것으로 완전한 것이요 가감하지 말라고 했으니 어떻게 더해 볼 수 없는 것이라는, 말하자면 그 이상의 더 완전한 것이 올 수 없다는 강박관념을 갖고 있었던 것이다.


이에 대해 스데반은 이 모자잎 시스템의 어떤 의미에서 창설자라고 할 수 있는 모세 자신이 더 궁극적인 선지자에 대해서 예언하고 있었다고 말한다. 그리고 역사적으로 보아도 이스라엘의 역사라고 하는 것은 배역하다가 심판으로 끝나버린 역사라는 것이다.


* 성전의 의미


44절 이하에 보면 스데반이 고소당한 두 번째 내용(성전을 부인한다는 고소내용)에 대한 변증이 나온다.


이 증거의 회막은 광야시대에 모세에게 말씀하시던 그분께서 보이신 식양대로 만들라고 하신 그 명령을 따라 만들어서 우리 조상들 가운데 있었던 것이다. 말하자면 구약의 성전이 존재케 된 역사적 과정에 대해서 얘기하고 있다. 다시 말해서 광야시대에 모세가 그 식양대로 만들라고 하신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서 만든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말이다.


이 성막을 조상들이 여호수아와 함께 가나안땅에 들어와서 열방들을 쫓아내고 그들의 땅을 차지하고 정착하면서 가지고 들어 온 것이라고 얘기한다. 그리고 성막의 존재로서 성전이 존재하게 된 것은 다윗 때라고 얘기한다.


그리고 솔로몬 때에 너희가 지금 말하고 있는 그 성전이 지어졌다고 말한다. 이 말은 성전이나 성막이 동일하다는 얘기도 되겠고 또한 구약성전이 역사적으로 어떻게 존재하게 되었는가 하는 것을 설명하는 말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48절에 구약 성경 이사야서를 인용한다.("지극히 높으신 자는 손으로 만든 어떤 장소에 거하지 아니 하신다") 그리고 솔로몬의 성전 봉헌식 때의 말을 인용한다.("하늘과 하늘들의 하늘이라도 주를 용납치 못하겠거든 하물며 내가 지은 이 성전에 참으로 주께서 거하시겠는가")


여기서도 모자잎 시스템의 미완적 성격(잠정적 성격)에 대해서 얘기하고 있다. 여기서 특별히 얘기하는 것은 그가 본 식양대로 (하나님이 보이신 식양대로) 만들었다는 것이다. 이것은 구약 성전의 상징성 그 자체는 실제가 아니고 실제를 상징하는 것이었고, 또 이것이 역사적으로는 앞으로 이루어질 진정한 성전을 가리키는 의미에서 예표적 성격을 갖는다는 것을 동시에 말하고 있는 것이다.


특히 "지극히 높으신 자는 사람이 만든 그 무엇에 거하지 아니하신다."는 이 말씀은 하나님의 처소는 인간의 능력으로 인간에 의해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고 함으로써 구약 성전이 진정한 성전이 될 수 없음과 성전의 실제(실체)는 따로 있다는 것을 분명히 가르치고 있다.


* 이스라엘의 배역


51절 이하에서 이스라엘 역사와 현재의 복음에 거스리는 유대인들까지 포함해서 그들은 끊임없이 하나님의 성령을 거스려 온 자들이요, 모세의 사역이나 성전, 이 모든 것의 참된 실체이신 그리스도를 전 역사를 통해서 거스려왔다고 질책하면서, 전 역사를 통해 어떻게 예수 그리스도를 거스려 왔는가에 대해 이렇게 얘기한다.


예수 그리스도에 관해 예언한 자 중에 너희가 핍박지 않은 선지자가 누가 있느냐? 그리스도에 대해 증거하는 모든 선지자들을 조상들이 핍박해 왔고 오늘날은 실제로 너희들이 그리스도를 잡아 죽였고 또 그의 복음을 전하는 사도들과 복음 전파자들을 핍박하고 있다고 얘기하고 있다.


* 구약의 예표성


여기서 우리가 신구약의 관계에 대해 몇 가지 알 수 있는 것은 구약은 그 자체로 종결될 수 없는 미완적 성격이라는 것, 그리고 그것의 상징성과 예표성은 실체가 아니라는 것이다. 즉 실체를 가리키는 상징이었고 앞으로 올 실체를 가리키는 예표였다는 것이다.


이런 예표적 성격에 대해서 좀 더 깊이 알기 위해서 히브리서나 다른 곳을 보면 잘 알 수 있다. 즉 땅의 차원으로 하늘의 것을 예표한 그 예표적 성격에 대해서 다른 성경본문을 통해서 보다 구체적으로 알 수 있을 것이다.


지금까지 우리는 두 가지 원칙(신구약간의 관계의 연속성과 동질성)을 확인했다. 이러한 원칙들은 따로따로 적용시킬 것이 아니고 언제나 결합되어 있어서 동시에 적용이 되기 때문에 실제로 이런 원칙들을 염두에 두고 성경을 해석하는 일은 매우 복잡할 수 있고 또한 미묘한 해석 과정일 수가 있다는 것을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이다.


그래서 구약의 본문들을 설교에 바로 능숙하게 사용할 수 있기 위해서는 성경 전체에 대한 깊고 넓은 이해가 필요하다는 것을 강조하고자 한다.


* 풍유적 해석과 예표적 해석


최근 해석학에서 논의 될 때 Allegorical(풍유적)해석은 Typological(모형적, 예표적)해석과 대조되는 것으로 많이 얘기가 되고 있다. 그러면 이 둘의 차이의 관건이 무엇인가?


예표적 해석은 역사적 성격을 고수하는 해석이고 풍유적 해석은 무역사, 곧 역사를 무시하는 해석이라고 얘기한다. 물론 이렇게 좁은 의미에서 풍유적 해석을 정의할 수 있겠지만 조금 넓게 해석하기를 원한다.


풍유적 해석에 대해, 예표적 해석과 대조되는 의미에서의 풍유적 해석이라는 주장에 대해 (강의자는)완전히 동의하고 싶지 않다.


* 배격할 풍유적 해석


그러면 어떤 의미에서 풍유적 해석을 배격하는가? Allegory란 말을 이렇게 정의할 때 배격 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Allegory라는 말 자체는 '다른 것을 말한다'는 어원적 뜻을 가지고 있다. 무슨 말인가 하면 본문이 말하지 않는 다른 것을 말할 때 이것을 어원적 Allegory의 뜻이 아닌가 생각된다.


본문이 말하지 않는 것을 말하고자 하는 것은 곤란하다. 그래서 이런 형태의 Allegory는 배격 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런 의미로 Allegorical해석을 정의 한다고 하면, 예를 들어서 라합이 내어 걸었던 빨간 줄, 그리고 두 정탐꾼을 진리와 사랑으로 얘기하는 것, 과연 본문자체에서 이런 의미로 얘기하고 있는 것인가?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을 얘기하기 위해서 반드시 그 본문을 택해야 하는가? 굳이 그 본문을 택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된다. 보혈에 대해 얘기하고 있는 본문이 구약 내에도 얼마나 많은데 왜 하필이면 본문에서 얘기하고 있지 않은 것을 택하는가 이 말이다.


거기에서 말씀하고 있는 중요한 내용들이 얼마든지 있는데(물론 각자에 따라 다르겠지만) 그 본문에서 의미하는 바를 발견하지 못하겠거든 그 본문을 설교하지 않고 넘어가면 된다. 다른 곳에서 의미하고 있는 말씀을 붙잡고 하면 될 것이다.


* 실체와 상징


원칙을 얘기하자면 본질은 동일하다는 것이다. 즉 동일하다는 것을 구약이 가리키고 있다는 얘기다. 구약의 예표성이라고 하는 것은 상징성을 뜻한다. 상징자체는 실체가 아니다. 실체가 아닌 다른 것을 가지고 실체를 가리킬 때 상징이라고 한다. 그렇기 때문에 분명한 차이가 있다.


하나는 상징이고 하나는 실체다. 그러나 이 상징은 항상 실체를 가리키고 있기 때문에 어떤 차원에서는 동일한 것을 말한다고 할 수 있다. 이런 의미에서 구약과 신약은 동일하다고 얘기 할 수 있겠다. 그러나 다른 시각에서 보면 하나는 상징이고 하나는 실체이기 때문에 분명한 차이가 있다.


하지만 동질성의 한계와 차이의 범위를 설정하는 것은 case by case로 놓고 얘기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 성경자체를 깊이 있게 이해하고 취급할 수 있는 곳까지 나아가지 않으면 안 된다. 다시 말해서 성경전체를 넓게 깊이 이해하는 것만큼 그에 비례해서 신, 구약의 관계를 이해하게 된다.


* 사도들의 해석규범


사도행전 2장의 시편16편 인용에서 얼핏 보기에는 구약 본문이 전혀 말하고 있지 않은 것을 베드로가 억지로 확대해석하고 있는 것 같이 보인다. 그것이 정당한 해석이라고 하는 것을 얘기하기 위해서 거기에 얼마만큼 광범한 해석 원리가 적용되고 있는가를 충분히 이해하고 있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곡식을 떠는 소에게 망을 씌우지 말라는 신명기 말씀을 인용해서 사도바울은 Allegorical 얘기를 한다.( ) 또 하갈과 사라의 예를 들어서 사도바울 자신이 Allegory란 말을 쓰고 있다.( ) 이것은 Allegorical 해석이라고 얘기를 하지만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그런 면이 있는 것이 사실이나 사도바울이 분명히 밝히고 있는 바이다.


흔히들 말하기를 해석규범에 어긋나는 신약저자들의 구약해석이 많다고 얘기한다. 이러한 견해에 대해 보수주의에서는 "그것은 사도들의 영감된 해석이기 때문에 받을 수밖에 없다. 해석의 원리로는 받을 수 없으나 사도들의 영감된 말이니 받아야 된다"고 말을 하는데 그것은 잘못되었다고 생각된다.


모든 사도들의 성경취급은 우리가 이해를 못해서 그렇지 정당한 해석원리를 전제로 하고 있고 토대로 하고 있다고 생각된다. 그 한 좋은 예가 시편 16편의 인용이라고 생각된다.


* 정리


신구약의 관계를 이해할 때 여러 가지 시각에서 또는 길을 통해서 접근할 수 있겠으나 어떠한 차원(부분)에서 이 문제에 접근하든지 그것은 항상 역사적 선후관계를 맺고 있는 역사적 틀 내에서 역사적 맥락과 관련해서 이해해야 한다고 이미 언급했다.


신구약 전체가 이 문제에 대해서 다 할 말을 가지고 있으나 편의상 이 부분에 대해 가장 압축해서 실마리를 제공할 수 있는 본문이 있을까? 그것은 사도행전의 세 사람의 설교에서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베드로 사도는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과 죽으심, 부활, 승천, 성령 보내심이라고 하는 새로운 시대를 획하는 역사적 연결점에 서서, 이 시대의 본격적 시작을 알리는 성령오심의 사건을 경험한 유대인들에게 이 사건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가? 이 사건과 더불어 시작되는 새 시대의 의미가 무엇인가를 설명하고 있다.


성령께서 말하게 하심을 따라 통상적인 무엇으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현상을 접하게 된 유대인들에게 베드로 사도께서 성령오심과 그에 수반한 현상의 의미를 설명하기를,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과 죽으심과 부활과 승천과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다고 말한다.


인용된 시편16편 특히 110편과 관련해서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과 승천이라는 것은 결국 어떤 의미를 갖는가? 그것은 시110편에서 예언한 대로 교회를 다스리는 왕으로 세우심 받는 것이다. 시110편은 왕에 대해 이야기 하고 있는데 그 왕권의 특수성을 표현하기를 '제사장적 왕'이라고 표현하고 있다. 왕의 모습이 독특하다. 즉 두 가지 직분이 한 인물에 통합되어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시110편에서 내 우편에 앉으라고 말씀하신 그 분은 제사장이기도 하고 왕이기도 하다. 이런 왕으로 세우심 받은 분으로서 아버지께 성령을 받아 보내신 것이 바로 너희가 경험하고 있는 이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다시 말해서 성령오심의 의미에 대해,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인 그를 하나님께서는 주로 세우셨다 라고 분명히 말씀하면서 예수 그리스도의 왕 되심과 성령오심은 뗄 수 없는 관계가 있는 것으로 말씀하고 있다.


이것은 성령오심과 그의 사역의 의미를 우리가 어떤 시각에서 봐야 할 것인가를 가르쳐 주기도 하는 것이다. 즉 그것은 그리스도의 통치의 연장 곧 예수 그리스도께서 성령님을 보내셔서 그를 통해 그의 교회를 계속 다스리신다고 하는 의미를 오순절 성령오심에 부여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오순절 성령오심에 대해서 말하면서 특별히 구약의 언약백성이라고 할 수 있는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이 사건이 갖는 의미가 무엇인가에 대해서 2장과 3장에서 말씀하기를, 이 예수 그리스도는 이스라엘의 역사와 분리 될 수 없는 분이다.


이스라엘의 역사가 이때 까지 대망해 왔던 분이요 이스라엘 역사를 완성하는 분이다. 그래서 역으로 말하면 예수 그리스도 없는 이스라엘의 역사라는 것은 무의미해져 버린다고 말씀한다. 그러면서 몇 번이고 되풀이 되는 표현이 예수 그리스도는 바로 너희 이스라엘을 위해 세움 받으신 분이라고 거듭 거듭 강조하고 있다.


신구약이라는 역사적 선후 관계를 맺고 있는 두 다른 무엇에 대해서 또 그것이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는가에 대해서 사도 베드로의 설교를 통해서 확인할 수 있는 것은 둘은 뗄 수 없는 관계에 있다는 것이다. 즉 두 다른 무엇이 서로 불가분의 관계를 맺고 있다는 정도가 아니고 신약은 구약의 연장이요 완성이라는 동일성, 동질성을 매우 강조하고 있음을 베드로의 설교를 통해 잘 알 수가 있다.


그 다음 스데반의 설교를 통해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베드로 사도가 말한 그것을 다시 한번 재확인 하게 된다.


유대인의 고소 내용이 결국 무엇인가 하면 너는 성전을 부인하고 모세의 율법을 부인하는 자라는 것인데, 이것은 결국 이스라엘 역사 전체를 부인하는 자라는 것이다. 이에 대해 스데반은 긴 변명을 한다.


특히 모세와 성전(자기에 대한 고소내용이 그것이기 때문에) 그 둘을 이스라엘의 장구한 역사에 비추어 변명하는 가운데 이스라엘이 형성된 모든 역사적 과정을 근원에서부터 더듬어 가면서 말하는데, 하나님께서 의도하신 이스라엘의 의미, 곧 이스라엘의 존재의 독특함, 그리고 모세의 독특한 지위와 그가 하나님의 생명의 말씀을 받아 너희에게 전해 주었다는 것 등등 이 모든 것을 조금도 부정하는 자가 아니다. 이것을 내가 철저히 확인하는 바이라고 말한다.


문제는 어디에 있는가 하면 너희 자신에게 있다. 너희는 처음부터 내가 부정한다고 하는 바로 그 율법을 거스려 온 자요 그 율법의 참된 의미를 깨닫지도 못한 자들이었다고 말한다. 그러면서 그들의 영적무지에 대해서 이렇게 얘기한다.


너희들은 구약의 체계가 그 자체로 완결되었다고 생각을 하지만 구약 자체가 증거하기를, 어떤 의미에서 구약 체계의 창설자라고 할 수 있는 모세가 증거하기를 앞으로 나와 같은 선지자 하나를 일으키실 것을 친히 예언하므로서 구약 시스템 자체가 그 자체로 완결될 수 없다. 구약 시스템 그 자체는 항상 미완의 것일 수밖에 없다는 것을 구약 자체가 증언하고 있다고 얘기한다.


이것을 깨닫지 못한 너희들은 영적무지한 자들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러므로 이러한 영적무지의 근거로서 '옛 조상 때부터 계속 거스려 왔다'고 얘기한다.


성전에 관해서도 마찬가지다. 너희들은 눈에 보이는 지상성전이 참된 성전이라고 생각하나 구약자체가 그것이 성전의 실체가 아니라고 분명히 증거하고 있다고 얘기한다. 구약의 말씀 특히 이사야서 말씀을 인용해서 그 부분을 분명히 얘기한다.


구약의 지상성전(가시적인 성전)이라고 하는 것은 참된 성전(하늘의 것), 하나님께서 보여 주신 식양을 따라 베낀 모사에 지나지 않은 것이지, 그 자체가 결코 실체가 아니라는 것을 구약자체가 증거하고 있다고 말함으로서 이스라엘의 무지함을 일깨운다.


스데반의 변명에서 우리가 확인하는 것은 베드로 사도가 한 말,곧 예수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 승천, 그리고 성령오심으로 시작된 이 새로운 시대의 역사의 흐름은 옛 이스라엘의 역사와 단절되거나 이질적인 것이 아니라 그것의 계속이요 그것의 완성이라고 하는 점을 분명히 밝히고 있다. 그러나 동시에 그 차이점도 분명히 암시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구약 그 자체는 미완일 수밖에 없었다. 그리스도께서 오시지 않았다면 구약 역사 그 자체는 무의미할 수밖에 없다고 분명히 밝혔고 성전에 관해서도 보이는 지상의 그것이(구약적 형식 그 자체가 땅의 것으로 상징 예표 했던 그 자체가) 참 실체가 아니었다. 실체는 앞으로 올 것을 기대할 수 밖에 없는 미래의 것이었다는 것을 분명히 밝힘으로서 신, 구약의 차이점도 분명히 밝혔다고 할 수 있다.




4. 바울의 설교에서 본 구약과 신약의 관계(행 13장)
* 대상 - 이스라엘


13장에 보면 바울이 비시디아 안디옥에서 회당장의 요청을 받고 복음을 전하게 된다. 특별히 그 대상도 호칭에서 분명히 나타나듯이(16절 '이스라엘 사람들아 ...') 그 주된 대상이 역시 구약 언약백성인 이스라엘 사람들이었다.


이스라엘 사람들을 향해 그들이 전하는 복음이 이스라엘에게 어떤 의미를 갖는가를 증거하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 설교의 내용


16절 이하의 바울사도의 설교내용을 살펴보면 독특한 점을 볼 수 있다. 스데반 집사의 설교내용과 비교해 볼 때 이것이 우연의 일치인지 아니면 누가가 이 서신을 기록하면서 적절하게 요약한 결과인지 알 수가 없지만 스데반 집사의 변명을 보면 그 내용이 주로 모세와 성전에 집중하고 있다.


(고소 내용이 그러하기에) 그래서 스데반 집사의 설교내용을 보면 아브라함으로부터 시작된 이스라엘 역사에서부터 시작해서 비교적 상세하게 역사 흐름을 추적하면서 이것이 모세에게, 즉 자기의 고소내용과 직접 관련이 있는 모세에게 가까워 오면서 더욱 세밀해 지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리고 일단 모세에 관한 얘기가 끝나면 그 시대 이후에 대해서는 아모스 시대까지(주전 8세기) 매우 긴 몇 백년간의 역사를 '배역의 역사'라고 한마디로 줄여 버리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런가 하면 바울사도의 설교내용을 보면(17절 이하)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택하시고 그리고 애굽에서 구원해 내신 것 등 앞에서 다루었던 역사적 기간을 취급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되 그러나 매우 간략하게 한, 두 마디로 요약하고 있다. 그러면서 비교적 상세하게 다루는 부분은 가나안 입성부터 다윗왕권 확립 때 까지 시기를 중점적으로 다루고 있다.


19절 이하에 가나안 정복에 관해 얘기하고 사사시대에 관해서 얘기하고 있고 그 다음에 사울을 잠시 왕으로 세웠다가 다시 폐하신 것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고 그 다음에 하나님 마음에 합한 다윗을 이스라엘의 왕으로 세우신 것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 그리고 이 다윗에게 영원한 왕권을 약속하신 사실을 23절에 언급하고 있다.


그리고 이 언약을 따라 그 후손에게서 구원자 예수 그리스도를 일으키셨다고 되어있다. 다윗에 대한 하나님의 평가 곧 '내 마음에 합한 자'라는 말씀은 하나님의 뜻(하나님의 의도)에 맞는 자라는 뜻이다.


하나님께서 왕을 세우시는 의도에 충실한 왕권이요, 하나님의 통치의 대행자로서 메시아로서 적합하고 충성된 자임을 증거하신 것이다. 하나님의 모든 뜻을 실현할 왕, 특별히 사사시대를 배경으로 하고 있는 만큼 하나님의 백성을 대적의 수중에서 구원해 내어 안식을 줄 용사로서의 직분을 충성스럽게 감당할 자라는 평가다.


그 다음에는 구약에서 다윗왕권이 세워지게 된 사실을 잠깐 언급하고 이어서 이 약속을 따라 네 몸에서 날 자로 네 위에 앉게 하시겠다는 약속을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셨음을 얘기하고 있다. 이것은 결국 구약에서 다윗왕권 확립과 신약에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왕으로 세우심 받은 사건은 내적으로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우리에게 암시하고 있다.


그리고 이 둘을 병치시키는 것만 아니라 이 둘을 다윗자신에게 허락하신 약속이라고 하는 것에 연결시키고 있기 때문에 이 둘의 관계는 동시에 다윗에게 주신 왕권 약속의 궁극적인 성취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왕권이라고 하는 의미도 그 속에 들어 있다.


재미있는 것은 구약의 다윗왕권과 관련해서 사무엘을 등장시키고 사울의 경우는 진정한 참 왕권에 대한 대조적인 무엇으로 잠시 언급될 뿐이다.


그리고 사무엘과 다윗왕 이 둘이 짝지어져 있고 신약에서는 세례요한과 예수 그리스도가 짝지어져 있다는 것도 음미해 볼 만하다. 그래서 사무엘과 다윗의 관계는 세례 요한과 예수 그리스도의 관계와 비견될 수 있다. 이것은 신약에서 세례 요한의 사역을 우리가 새롭게 바라 볼 수 있는 하나의 시각을 제공한다고 할 수 있다.


26절에 보면 "형제들, 아브라함의 후예와 너희 중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들아 이 구원의 말씀을 우리에게 보내셨거늘" 여기서 '이 구원의 말씀' 이라고 하는 것은 다윗왕권이 구약 이스라엘에 가졌던 구원적 의미의 진정한 성취가 예수 그리스도의 왕권확립과 더불어 성취되었다고 이미 앞에서 말씀하고 있으니까 여기서 이 구원의 말씀이라고 하는 것은 다윗을 통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 베푸신 구원의 진정한 성취가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이루어지는데, 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이루어진 구원을 염두에 두고 여기서 '구원의 말씀'이라고 표현하고 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이루어진 이 구원이 누구에게 먼저 보내어 졌는가, 바로 너희(이스라엘)에게 보내어 졌다고 말하고 있다. 옛 선지자들로부터 세례 요한의 증거에 이르기까지 부단히 이 구원의 복음에 대한 예언의 말씀이 이스라엘에게 선포되고 이스라엘 역사 안으로 말씀되어 진 것을 여기서 암시한다고 할 수 있다.


이것은 베드로 사도나 스데반 집사가 이미 강조한 내용(신구약의 동질성과 연속성, 즉 하나의 동일한 역사라는 것)을 다시 한번 여기서 강조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세례 요한이 증거한 바로 그 왕(메시아)과 그의 구원에 관한 말씀(복음)이 옛 선지자들로부터 세례 요한의 증거에 이르기까지 부단히 이스라엘에게 선포되었으나 "예루살렘과 그 통치자들은 안식일마다 읽는 선지자들의 음성을 알지 못하고......",(27절, "예루살렘에 사는 자들과 저희 관원들이 예수와 및 안식일마다 외우는 바 선지자들의 말을 알지 못하고 예수를 정죄하여 선지자들의 말을 응하게 하였도다.")


여기서 바울의 설교와 관련해서 재미있는 것은 '안식일마다 읽는 선지자들의 음성' 이라는 표현이다. 즉 글을 읽는 것을 '선지자들의 음성'이라고 표현하고 있다. 이것은 살아있는 육성으로 이해했다는 것인데 오늘 우리가 하나님 말씀을 대언하는, 외치는 성격의 한 면을 우리에게 암시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생각해 볼 수 있겠다.


* 이스라엘 역사와 이방 복음전파


여하튼 안식일마다 읽는 선지자들의 글을 이해하지 못하고 그리스도를 정죄하여 죽였다라고 말하고 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신 것과 묻히신 것과 부활하신 것에 대해 쭉 말한 다음, 바로 우리는 이 '부활의 증인들'이라고 자신을 소개하고 있다.


특별히 바울자신에 대해서는 이방인의 사도로 부르심 받은 것을 밝히면서 온 세계를 여행하면서 우리 조상들에게 주어진 약속을 복음으로 전하고 있다고 얘기하고 있다. 특별히 자기 자신을 이방인의 사도로 얘기하면서 그들에게 전하는 것은 우리 조상들에게 주신 약속을 전하는 것이라고 한 것은 이 당시 바울의 입장과 관련해서 의미있는 말이다.


유대인들 가운데는 물론 믿는 자도 많이 있었으나 복음을 배척하는 분위기가 팽배하던 때고 특별히 별다른 무엇도 없이 복음이 이방인 가운데서 급속도로 퍼져나가고 있었고 거기에 중요한 역할을 바울일행이 담당하고 있었던 것을 볼 때, 지금 이방인들 가운데 퍼져 나가는 복음이 이스라엘 역사와 단절된 무엇이 아니라 조상들에게 주어졌던 그 약속을 지금 우리가 이방인들에게 전하고 있다고 함으로써 새로운 시대의 역사적 흐름이 결코 이스라엘과의 단절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고 그 역사의 계속이라고 하는 점을 계속 강조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 약속-성취


신구약의 관계와 관련해서 특별히 유의해야 할 말씀은 32절 부터 나타난다고 할 수 있다. 즉 사도들이 증거하고 있고 특히 바울사도 일행이 이방인들에게 전하고 있는 이 복음이 어떤 것인가를 밝히는 말씀을 이렇게 얘기한다. 즉 32절의 "우리가 너희에게 전하는 것은 조상들에게 주어졌던 바로 그 약속을 전하고 있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런데 여기서 조상들에게 주어졌던 약속이라는 뜻 외에 아브라함의 약속에서부터 시작해서 구약역사를 통해 약속되어 온 것 그리고 더 나아가서 조상들에게는 전 구약 역사를 통해서 오직 약속으로만 존재했던 것이라는 뜻들이 그 속에 포함되어 있다.


왜 이렇게 해석될 수밖에 없는가 하면 즉 이것이 무엇과 대조되고 있는가 하면 조상들에게 약속되었던 그것이 33절에 보면 "하나님께서 이것을 그들의 자손인 우리에게서 성취하셨다"고 되어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신구약의 동질성과 동시에 차이를 말하고 있다.


신구약의 동질성의 근거를 여기서는 무어라고 얘기하고 있나? 두 역사가 다 같이 무엇을 근거하고 있나? 동일한, 약속 곧 아브라함에게 주어진 그 약속을 근거로 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신구약의 역사는 동일한 역사(하나의 역사)라고 얘기 할 수 있다. 그러나 동시에 차이점에 대해서는 어떻게 얘기하고 있나? 하나는 약속으로만 존재 했었고 그것이 오늘 우리에게서, 즉 그들의 자손인 우리에게서는 이것이 실현되었다는 것이다.


* 약속의 실현과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


그런데 구약시대를 통해서는 하나의 약속으로만 존재했던(아브라함에게 주신 그 약속)것을 실현시키신 구체적인 계기에 대해서 얘기하기를 '예수를 부활케 하심으로'라고 되어있다. 그러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어떤 의미를 갖는다는 것인가? 구약에서 오직 약속으로만 존재했던 것을 하나의 실체로 실현시키는 계기가 된 것이다. 즉 그리스도의 부활은 약속으로만 존재해 왔던 것이 역사적 현실로 실현되는 것을 의미한다고 이해하면 되겠다.


*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의 의미


이것에 대해서도 말이 많을 수도 있을 것이다. 사실 이것은 베드로의 설교에서부터 모든 내용이 연결된 것이다.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그 약속의 본질이 우리로 하여금 새로운 존재되게 함(새로운 생명 누리게 하심)이라고 흔히 말하는 영생이라고 하는 것을 우리가 감안 한다고 하면 어째서 부활이 약속으로만 존재해 왔던 것을 실현시키는 사건이 될 수 있는가? 라는 질문에 이해를 도울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과 관련해서 시편2:7을 인용하여 "너는 내 아들이라 오늘 너를 낳았다"라고 얘기하고 있는데, 시편 이 부분의 말씀은 항상 다른 사도들에 의해서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과 관련해서 인용되는 말씀인데 시편 2편 내용 그 자체를 보면 하나님께서 그의 메시아를 왕으로 세우심과 그에게 땅끝까지를 그의 통치 영역으로 주신, 말하자면 메시아를 왕으로 세우시는 내용이 시편2편의 내용이다.


지금까지 논의해 온 내용을 요약하면,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이 우리의 부활의 생명 곧 새 생명의 근거가 되며 그것을 가능케 하는 사건이었다는 것, 그리고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왕 되심과 깊은 관계가 있다는 것,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왕 되심은 또한 성령오심과 관련해서 얘기하기를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활 승천하셔서 만유의 주로 높이심 받음과 그 후에 아버지로부터 성령을 받아 보내심과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의 통치 곧 부활의 새 생명을 주시는 이 통치는 성령님을 통해 이루어진다고 하는 이 세 가지 요소가 우리 마음 가운데 하나로 연결 되어야 할 것이다.


왜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하심이 아브라함에게 주신 약속의 성취를 의미하는가? 그리고 이 부활은 왜 예수 그리스도의 왕 되심과 필연적으로 연결될 수밖에 없는가? 이것이 우리가 논의하고자 하는 내용의 흐름이다. 그래서 이 내용이 이해가 되기 위해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이 우리의 새 생명의 근거가 되심과 이것이 구체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은 성령님을 통해서, 성령님의 생명의 통치를 통해서 이루어지는 것인데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왕 되심과 긴밀한 관계가 있다는 것이다. 이 세 가지가 불가분의 관계가 있다는 것을 염두에 두고 있으면 내용의 흐름을 이해하기 쉬울 것이다.


오늘 우리는 약속이 완성되어 있는 시대에 살고 있다. 이 약속의 완전한 성취는 그리스도의 부활과 직결되어 있다. 그리스도의 부활이 약속의 성취의 새 시대를 가능케 하며 시작하는 사건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리스도께서 그의 죽으심으로 죄의 권세를 멸하시고 부활하사 새 생명을 가능케 하셨고 그를 믿는 자에게 죄와 사망의 권세로 부터 해방을 주시고 새 생명으로 살게 하신 이 역사가 약속의 성취를 의미하는 사건이요 약속된 것의 실체요 실현이요 새 시대의 본질인 것이다.


이 부활의 새 생명은 썩음 즉 일시적이고 잠정적인 것이 아니라 영원히 부패하지 아니하고 다시 죽지 아니할 생명이다. 이런 부활의 새 생명이 예수 그리스도의 왕권과 그의 생명의 통치와 직결되어 있다고 하면 이것은 결국 어떤 의미를 갖는가 하면 그리스도의 왕권과 그의 영광은 영원히 흔들리지 아니할 왕권이며 폐하여지지 아니할 영원한 왕권이고 권세와 영광이라고 하는 결론으로 자연스럽게 연결이 될 수 있겠다.


이러한 영원한 왕권이기에 이사야서 55:3에서는 "내가 너희에게 다윗의 신실한 언약을 준다"라고 되어있다. 여기서 '신실한 언약'이라고 하는 것은 히브리어로 '견고한, 흔들리지 않는' 이란 뜻의 어원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다윗의 신실한 언약이라고 하는 뜻은 다윗에게 주어진 영원한 왕권의 약속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다.


바울은 여기에서 다윗의 영원한 왕권약속이 미래에 있을 구원에 참여할 자들에게 약속된 즉 모든 신자들이 영원한 왕권에 동참할 것을 예언한 이사야서 55:3을 인용함으로써 이 그리스도의 영원한 왕권이 그리스도에게만 국한되지 않고 모든 성도들도 그리스도의 통치에 참여하게 될 것을 자연스럽게 확대하여 언급하고 있다.


그리고 시편 16:10을 언급하는데, 그의 거룩하신 자로 썩음을 보지 않게 하시겠다는 말씀도 결국 이 영원한 부활의 생명, 그리스도의 왕권을 염두에 두고 하신 예언의 말씀으로 이해하고 있다.


* 구약 역사는 그 자체로서는 어떤 의미가 있는가?


이때까지 우리는 대개 두 가지 원칙을 살펴보았다. 즉 신 구약은 동일한 하나의 역사라고 하는 것, 다시 말해서 동질성과 연속성에 대해서 살펴보았고 또 하나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차이가 있다고 하는 것이다. 이와 관련해서 예표적이라는 말도 썼다. 구약의 역사는 그 자체로 완결되지 않고 그 자체로서는 무의미하며 이것은 앞으로 올 완전한 것 곧 실체를 가리키는 예표적 성격이었다는 것을 이미 예기했다.


그런데 이렇게만 얘기하게 되면 이런 질문이 가능하게 된다. 구약의 역사는 신약의 역사를 가리키는 하나의 indicator의 역할만 하였고 그림자에 불과한 것이어서 그 자체로서는 전혀 알맹이가 없는 단지 가리키는 역할에 그친 역사인가 라는 질문이 가능할 것이다.


이에 대해서 다른 곳에서는 명확하게 나타나지 않는 한 가지 원칙을 바울사도는 여기서 언급하고 있다. 그것은 36절의 말씀인데("다윗은 당시에 하나님의 뜻을 쫒아 섬기다가 잠들어 그 조상들과 함께 묻혀 썩음을 당하였으되") 즉 다윗은 그 자신의 시대에 대해서는 하나님의 뜻, 계획을 충실히 수행한 자 즉 그 일꾼 노릇을 한 자요 그 후에 잠들었다고 되어있다.


다윗왕권의 역사적 의미에 대해서 또 다른 한 면을 여기서 보여주었다고 할 수 있다. 다윗은 죽어서 썩어졌으므로(역사에서 사라졌으므로) 그의 왕권은 영원한 왕권이 아니요 어디까지나 예표적 왕, 그림자에 불과하였고 또한 그 약속의 실체가 아니었고 진정한 실행자가 아니었다.


오직 하나님께서 부활케 하사 썩음을 보지 않게 하신 그리고 영원히 존재케 하신 그리스도만이 이 약속의 진정한 성취자요 실현자이다.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이 약속은 실체가 되었고 실현되었다고 할 수가 있다.


그러나 동시에 다윗은 그 자신의 시대에 대해서는 하나님의 뜻, 원하심을 섬겨 이룬 자요 행한 자임을 여기서 얘기하고 있다. 다윗은 그리스도의 예표로서 그림자로서 그 자체의 역사적 의미는 전혀 없이 오직 그리스도를 가리키는 역할만 한 것은 아니다. 그 시대에 대해서는 그 시대를 향한 하나님의 뜻을 충성되이 실행한자 라는 것이다.


신, 구약의 역사적 관계에 있어서 제 3 의 원리, 곧 계속적 완성과 불연속성에 이어 제 3 의 요소 즉 각 시대는 그 나름대로의 자체의 의미(고유한 역사적 의미) 즉 하나님 뜻의 실현 그리고 그 뜻을 섬긴 긍정적 의미가 있다는 사실을 밝히고 있다.


그래서 구약의 역사적 본문을 해석할 때 왜 그 역사적 흐름에 충실해야 하는가 하는 이유가 여기에서 드러나는 것이다. 구약 시대의 인물을 통해 그리고 그 시대의 역사를 통해 이루신 모든 일들은 그 시대를 향한 나름대로의 의미가 있는 것이다. 이 원칙을 가장 명확하게 지적하고 있는 것이 사도행전의 이 본문이 아닌가 생각이 된다.


* 스데반의 설교와 바울의 설교의 연결의 의미


이제 대개 세 가지 원칙은 나왔고 한 가지 덧붙여 말하고자 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이루신 역사 곧 특별한 구원역사에 있어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차지하시는 의미와 관련해서 본문 가운데서 취급해야 할 것은 스데반의 변명내용과 사도바울의 설교 내용을 비교해 보면 어떤 특색이 있다.


스데반은 이스라엘의 역사적 시초 곧 아브라함에서부터 시작해서 모세에 이르기까지 그리고 배역의 역사와 심판의 역사는 나중에 간략하게 언급을 했지만, 전체적인 이스라엘의 역사를 그 나름대로 다루고 있다.


그런데 바울의 설교 내용을 보면 가나안 입성부터 시작하고 있는데 이것이 무엇에 국한하고 있다는 느낌을 준다. 바로 다윗왕권 성립에 국한하고 있다는 느낌을 우리에게 주고 있다.


이것을 우리는 어떻게 이해 할 것인가? 거기에 대해 우리가 손쉽게 생각할 수 있는 것은 바울사도는 그의 관심의 폭을 좁혀서 이스라엘 전체역사의 의미를 생각하기 보다는 역사의 한 부분(한 지류)인 다윗왕권의 역사를 그 나름대로의 필요에 의해서 집어내어서 한 부분만을 취급하고 있는가? 그래서 그 부분과 대응되는 예수 그리스도의 역사의 부분적 의미를 서로 연결시키고 있는가? 라는 질문을 던질 수 있을 것이다. 그러한 견해에 대해 본인
의 견해는 다르다.


스데반의 설교와 바울의 설교가 주로 강조해서 다루는 부분을 보면 서로 연결되게 되어 있다. 즉 모세시대(광야시대)까지 되어 있고 그 이후의 부분은, 스데반의 설교는 아주 간략하게 압축되어 버린다. 대신 바울의 설교에서는 그 부분까지는 한, 두 줄로 압축되어 버리고, 그 다음 역사적 단계인 가나안 입성, 정복부터는 아주 세밀하게 다루고 있다.


스데반의 설교와 바울의 설교를 자세히 연결시켜 보면 역사의 지류를 다루고 있기 보다는 하나의 동일한 시각에서 역사를 보고 있다고 느낄 수 있다.


그렇다고 하면 역사를 보는 시각이 처음에는 전체적인 것을 시작하다가 하나의 지류로 빠진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의 역사 전체가 구약에서 본다면 다윗왕권 성립에로 모아지는 것이다. 다윗왕권 자체는 물론 예수 그리스도의 왕권의 예표로서의 의미다.


이스라엘의 전체 역사가 결국 다윗 왕권성립이라고 하는 쪽으로 초점이 모아지는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다시 말하면 구약에 있어서의 다윗왕권 역사는 이스라엘 역사에 있어서 핵심적인 의미를 갖는다는 것이다.


이것이 단순히 이 본문 한 가지를 보고 추측하는 억측에 지나지 않는 것이라고 하는 염려가 분명히 가능 할 것이다. 그러나 억측이라고 보고 싶지 않은 것은 이것을 확인해 주는 성경이 있는데 바로 역대기다.


역대기를 보면 족보가 나오는데 그 첫 시작이 창세기부터 시작되는데 다윗에게서 완결되어 있다. 구조 자체로 보면 역대기 저자가 바라보는 역사적 시각은 창조로부터의 모든 세계의 역사가 다윗왕권에로 모아진다고 보고 있다.


이것은 구약의 계시 틀 내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 곧 그의 왕으로서의 사역의 인류역사를 향해 갖는 의미를 그 나름대로 증거한 것이라고 생각이 된다.


예수 그리스도는 모든 역사의 중심이고 초점이라고 하는 것이 어느 한 신학자가 만들어낸 구호가 아니고 성경자체가 분명히 그 쪽으로 지시하고 있는 것이라고 생각된다.


* 칭의의 관점에서 신구약의 차이 비교


행13:38절 이하에 보면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에 관해 언급하면서 그가 영원한 왕으로 세우심 받으셨음을 말씀한 다음 이를 통하여 죄사함이 선포되고 모세의 율법으로서는 의로워 질 수 없었던 그 모든 것으로 부터 의로워지는 것을 말씀하고 있다.


여기서는 신구약의 차이를(죄사함과 칭의라는 것은 매우 밀접한 관계가 있는 것인데) 칭의의 관점에서 비교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다시 말하면 모자잎 시스템 즉 모세의 율법으로는 결코 의로워 질 수 없었다. 이것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에게서만 가능해졌다 라는 뜻이 된다. 즉 모자잎 시스템의 불완전성을 암시하는 말이다.


상징적 의식과 예표 등으로 특징 지워지는(오직 율법의 요구만이 역사적 실체로 주어졌고 하나님의 은혜 그리스도의 은혜는 상징적 의식과 예표로서만 주어졌던) 모자잎 시스템 그 자체만으로는(외부적 상징과 예표자체 만으로는) 죄사함의 은혜, 효력과 능력을 발휘할 수 없다는 것을 여기에서 증언하고 있다.


이것의 구체적 의미에 대해서는 갈라디아서 히브리서에서 많이 취급하고 있다. 이런 것은 대개 어떤 말들과 연결된다고 할 수 있을까? 구약의 여러 은혜의 수단들에 대해서 얘기하기를 그것은 '육체의 법만이 되어서'라는 히브리서 말씀이 있다.


황소의 피가 진정한 죄사함의 효력을 갖는 것이 아니라는 말씀 등등 대개 이러한 것들과 연결시켜 이 말씀을 이해하면 될 것이다. 이것을 언급한 것은 신구약의 관계가 구체적인 Topic과 결합될 때 그 논의가 매우 복잡하고 깊어질 수 있다 라고 하는 것을 얘기하기 위해서다.


사실 이 칭의의 문제에 있어서 신구약의 관계의 미묘함을 깊이 다룬 책들이 굉장히 많다. 신약의 거의 모든 성경이 다 다루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 중에 가장 집중적으로 다루고 있는 것이 갈라디아서라고 할 수 있겠다.




5. 설교를 어떻게 할 것인가?


구약을 어떻게 설교할 것인가? 라는 물음에 대해 깊이 생각해 본 사람은 별로 없을 것이다. 설교를 어떻게 할 것인가에 대해 강하게 의식하는 본문은 고린도 전서 1장과 2장이다.


복음을 전하는 자로서 바울사도는 자신의 사역에 대해서 1장 17절 하반절에서 "말의 지혜로 복음을 전할 경우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공허해 진다."고 하는 말씀과 "하나님의 지혜와 능력인 그리스도의 복음은 유대인에게는 무력한 것이요 실패로 보이는 것이고 헬라인에게는 무지하고 어리석은 것으로 비취게 된다.


그러나 이 하나님의 지혜(십자가)는 진정한 의미에서 무지하고 무능력한 것이 아니라"고 말한다. 그리고 십자가는 참된 의미에서 하나님의 지혜와 능력이라고 말하고 있다.


왜 이 참된 능력됨과 지혜 됨이 드러나지 않고 모든 사람에게 무능력하고 무지한 것으로 비취게 되는가? 그것은 세상 지혜로는 깨달을 수 없기 때문이라고 말씀한다. 그래서 세상 사람들이 깨달을 수 없는 이 복음을(하나님의 지혜와 능력을) 하나님께서는 어떤 식으로 깨닫게 하시고 그 능력을 발휘케 하시는가? 그것은 바로 전도의 미련한 방법으로다.


우리말 번역으로는 '전도의 미련한 방법으로'라고 되어 있는데 이 전도라는 말은 본래 '케리그마'이다. 대개 이것을 '설교'라는 말로 많이 사용한다. 즉 설교라는 말을 정의 할 때 '케리그마'라는 말을 많이 사용하고 있다.


이 '외침'이라는 어리석은 방법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주권적으로 부르심을 따라 성령님의 증거하심에 의해서만 복음이 깨달아지고 믿어진다고 말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바울사도는 2장 초두에서 말씀하시기를 "너희 믿음이 말의 지혜에 있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능력에 있게 하기 위함"이라고 말씀하고 있다.


복음을 들어 참 구원을 얻는 믿음을 일으키는 것은 이처럼 철저하게 하나님의 능력으로 되어진다고 하는 것을 분명히 하는 말씀이라고 생각된다.


인간적인 지혜의 말에 설득 당해서 믿는 것 같이 보이는 그것은 참으로 구원 얻는 믿음이 될 수 없다는 뜻이 그 속에 포함되어 있고 하나님의 능력으로 말미암은 믿음이야말로 참된 믿음이라는 뜻이 그 속에 있는 줄 안다.


이러한 사실은 모든 형태의 지적 작업(학문적 작업) 만으로는 근본적으로 뛰어 넘을 수 없는 벽이 있다고 하는 것을 우리에게 분명히 해주는 말이라고 생각이 된다. 복음 앞에서 이런 것들은 그 자체만으로는 무력하고 무의미하고 오히려 하나님의 지혜와 능력을 공허하게 만들 수밖에 없다고 하는 것을 암시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이 반이성적 반지성주의적 태도를 옹호하는 것이 아니다. 바로 지성작업(학문적 작업) 그 자체가 성령님의 조명하심과 그의 인도하심을 따라 이루어져야 하는 것이기 때문에 복음 앞에서 인간이 가진 모든 능력은 근본적인 한계가 있다고 하는 것을 분명히 하는 말씀인 것은 사실이라고 생각이 된다.


이것이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에서도 특히 중세시대와 대비해서 성경 깨달음에 대해서 통상적인 수단에 의한 성경 접근을 얘기하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동시에 성령님의 조명하심을 빼놓지 않는다는 것은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이다.




6. 세 가지 원칙의 적용에서 고려할 점


신구약의 불연속 그리고 연속성과 구약 그 나름대로의 의미 대개 3가지로 얘기할 수 있겠다. 그러나 어디까지나 이것은 원칙의 나열에 불과하고 이것만을 알고 있어서는 실제로 본문을 이해하고 다루는데 있어서 크게 도움을 주지 못할 것이다.


이것이 하나의 기본적인 가이드라인 즉 본문을 생각할 때 적어도 이 세 가지를 염두에 두어야겠다는 그런 정도의 도움은 줄런지는 몰라도 실제로 성경 본문을 취급하는데 있어서 그렇게 실제적인 효용 가치는 크지 않으리라고 생각이 된다.


이 세 가지 원칙은 성경 전체에 대한 포괄적인 이해와 깊은 이해를 통해서 더욱 구체화 되고 심화 되어야 된다. 그래야 그것에 비례해서 본문을 다루는 능력이 크게 좌우되리라고 생각이 된다.


연속성과 불연속성 그리고 구약 그 자체로서의 의미 이것은 말 그대로를 보면 서로 상반되고 상충되는 말 같이 보이는데 실제에 있어서는 이 세 가지 요소가 결합되어 나타난다.


어느 한 본문에 대해서 이 세 가지 중 어느 한 가지에 치우쳐 볼 수 없고 세 가지를 다 고려해서 봐야한다는 생각이다. 이 세 가지가 복합된 하나의 자세로 본문에 접근해야 한다고 생각된다.


피상적으로 보기에는 서로 상충되고 반대되는 이 세 가지 원칙이 적어도 서로 충돌하지 않는 결합된 원리로까지 격상되기 위해서는 성경 본문에 대한 넓고 깊은 이해가 필수적이라고 말할 수 있다.


몇 가지 예를 들어 보면 신구약을 접근할 때 그 안에 너무나 많은 내용 그리고 다양한 level이 있기 때문에 그것을 일일이 하나하나 다 취급한다는 것은 불가능하고 또 불필요한 일이라고 생각된다. 실제로 본문을 취급하면서 해결하고 쌓아가야 될 일이고 일목요연하게 원칙으로 제시한다는 것은 불가능하고 또한 불필요한 일이라고 생각된다.


이런 세 원칙들이 적용될 때 어떻게 구체적인 모습으로 드러나는가를 예를 들어보면, 신구약에 접근할 때 두 가지 정도의 예를 들었는데 그 하나는 신구약이 다 같이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증거하고 있는 만큼 그 차이성을 이렇게 이해하면 될 것이다.


신구약 각각은 어떻게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증거하고 있는가? 어떻게 다르게 증거하고 있는가? 라고 하는 질문이 가능할 것이다. 여기에 대해서도 위의 세 가지 원리(동질성(연속성) 불연속성 그리고 그 자체로서의 의미)를 얘기할 수 있겠다.


* 동질성


상징과 실체의 예를 들어서 얘기 했지만 근본적으로 신구약이 예수 그리스도라는 동일한 대상과 실체에 대해서 가리키고 얘기한다 라고 하는 점에서 동질적이라고 할 수 있다. (근본적인 동질성을 가지고 있다.)


* 차이성


그러나 그 차이성이라고 하는 것은 여러 가지가 있는데 가장 대표적인 것 중 하나가 예표성이라고 할 수 있다. 구약은 신약의 실체(은혜의 실체로서의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
등등) 들을 땅의 것(육적 차원에 속한 상징적인 것)으로 보여 주었다.


예수 그리스도의 제사를 짐승이라는 가시적인 상징(동물제사)을 통해서 예표했다. 이것은 근본적으로 예수 그리스도 안에 이루시는 구속이라는 동일한 사실을 가리킨다는 의미에서 동질적 이지만 차이를 얘기하면 분명한 차이가 있다.


하나는 그 자체로서는 전혀 실질적인 효력이 없는 동물제사에 지나지 않는 것이고 또 하나는 은혜의 실체를 가능케 한 그리스도의 실제적인 죽음이라는 그 차이가 있다.


* 구약 자체의 의미


그렇다고 하면 구약의 제사제도 곧 동물제사는 전혀 무의미한 것이었는가? 단지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키는 역할 밖에 하지 못하고 그것을 통한 실제적인 역사는 없었는가? 그 시대의 하나님의 백성에게는 실제적인 유익을 주지 못했는가? 그것은 아니다.


구약백성은 제사에 참여함으로(비록 앞으로 올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은혜의 실체)을 예표하는 것이었지만) 곧 성례전적인 의식을 통하여 앞으로 이루어질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에 근거한 이 은혜의 수단에 믿음으로 참여함으로 실제적인 죄사함의 은혜를 받아 누릴 수 있었던 것이다.


따라서 이 제사제도는 그 시대의 이스라엘을 향해서도 분명한 어떤 의미를 가졌었고 실제적인 기능을 했다고 얘기할 수 있겠다.


* 정리


이스라엘과 교회라고 하는 관계에서 신구약의 차이 내지 관계에 접근할 때 문제가 되는 것은 이스라엘의 idendity 문제인데, 이스라엘과 교회는 어떠한 관계가 있는가? 신구약 역사의 구체적인 틀을 형성하는 이스라엘과 교회는 다 무엇에 근거하고 있나? 그것은 아브라함에게 주어진 동일한 약속을 근거로 하고 있다.


신구약이 다 동일한 하나의 약속의 성취 실현이라는 말이다. 이런 의미에서 둘은 동질성을 가진다. 즉 하나라고 할 수 있고 또한 계속 된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또 분명한 차이가 있다. 구약시대에는 약속으로만 남아 있었던 것이고 그것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심으로서 실체가 되었다고 하는 차이가 있다.


바울의 설교에서도 보았듯이 구약시대의 역사는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키는 역할만 하고 그 시대를 향해서는 아무런 실질적인 기능을 하지 못했는가? 그것은 아니었다고 위에서도 언급했다. 그 당시 이스라엘 백성에게도 실질적인 구원의 은혜가 그 예표성과 함께 임했다.


이렇게 이러한 원칙들이 다양한 부분에 다양한 차원으로 적용될 때 여러 가지 모습으로 어떤 경우는 매우 복잡하고 미묘하게 나타날 수 있다. 그러나 이런 것들을 다룰 때 하나의 기본적인 틀은 위에 언급한 세 가지 원칙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런 원칙들을 외우는 것으로 머문다면 설교를 작성하는데 실질적인 도움을 기대하기는 힘들다. 그러나 이것이 각 성경 본문의 구체적인 사건에 적용이 되어서 깊이 있게 취급되고 이해될 때 비로소 진가가 나타난다고 얘기할 수 있겠다.




8. 구약설교에 있어서 Moralizing의 문제


나 개인의 생각으로는 구약이 훨씬 더 청중들에게 이해가 쉬우리라고 생각된다. 왜냐하면 구약은 인간창조부터 시작이 되고 어떤 의미에서 일반인 즉 그리스도의 복음의 전문적인 이해가 없는 사람들에게 접근이 더 용이한 장점이 구약 본문에 있다고 본다.


그래서 구약을 가지고 청중들에게 설교를 할 때는 너무 일반은총론적으로 길을 벗어나지 않을까 염려가 있을 정도로 오히려 청중들에게 접근이 용이하다고 생각된다.


왜 오늘날에도 구약을 설교해야 되는가 하면, 신약은 물론 구약이 말하는 것 이상의 더 깊고 말하지 못한 부분들을 많이 얘기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계시의 전부를 신약에 다 얘기한 것은 아니다. 신약은 항상 구약계시를 전제로 하고 얘기를 한다.


그래서 신약을 얘기할 때 구약을 얘기하지 않으면 마치 뿌리가 잘린 나무처럼 몸뚱이를 한 군데 잘라 놓고 한 부분만 내어 놓은 것 같이 전혀 이해할 수 없는 경우가 많이 있다.


그래서 신약을 이해하기 위해서라도 구약을 설교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한다. 이처럼 신약은 구약의 많은 것을 전제로 하고 있기 때문에 오히려 설교할 때마다 신경이 많이 쓰인다. 왜냐 하면 어떤 한 본문을 설교할 때 이것의 구약적 배경을 자꾸 얘기해야 하니까 설교가 필요 이상으로 길어지는 경우가 많이 있다.


그런데 구약에서부터 시작하게 되면 가장 친숙한 환경에서 시작해서 자연히 그리스도에게로 연결이 되기 때문에 오히려 설교를 조절하기 쉽다고 생각된다.


한국교회에서 얼마만큼 다양하게 구약에 대한 설교가 이루어지는지 잘 알지 못하기 때문에 억측이나 성급한 편견에 치우친 견해가 될지 모르겠는데, 대개 알려진 대로 구약 본문을 설교할 때 두 가지 양상이 있다고 본다.


하나는 단어풀이인데 예를 들어 '종려나무' 대해서 이 종려나무가 성경 어디에 나타나는가? 그러면서 이것을 알기 위해서 신학사전을 찾는다. 그리고는 이것은 이런 의미를 가졌다고 하나하나 그 의미를 다 추려내서 설교를 꾸민다.


그러니까 본문에서 이 종려나무가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는 별 상관이 없고 여하튼 종려나무가 성경전체가 가질 수 있는 의미 전부를 동원해서 설교를 꾸미는 단어풀이에 그치는 폐단이 있다.


두 번째는 구약의 역사적 사건 가운데 대개 족장사 부분을 다룬다. 특히 이스라엘역사 부분은 잘 다루지 않는다.


한국의 목사들은 대개 족장사 부분을 다루기를 아주 좋아한다. 왜냐 하면 거기에 등장하는 인물들이 개인이기 때문이다.( 아브라함, 이삭, 야곱, 특히 요셉을 좋아 한다.) 그리고 이스라엘의 역사 부분을 다룰 때도 전체로서의 이스라엘을 다루는 것이 아니고 그 중에서도 특별한 한 개인을 많이 다룬다.


그것은 어떤 의미에서 정당하다고 할 수 있다. 우리가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특히 개인적 의식이 강해서 '내가' 하나님을 믿는 자로서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 그에 대한 어떤 지침을 얻기 위해서 구약의 내용 중에 특정 개인 인물에 시각을 좁혀서 여러 가지 교훈을 얻고자 하는 경우가 많다.


이와 같은 것을 전혀 잘못되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흔히 이것을 Moralizing이라 해서 매도하는 경향이 있는데 이것을 매도하게 된(특히 화란 쪽에서) 이유가 그 나름대로의 역사적 배경이 있다. 그것은 변증법 신학의 대두와 주관주의의 경향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변증법 신학에서의 객관적 역사라는 것이 그 토대를 완전히 상실하게 되어버리니까 객관성을 강조하게 된 그런 나름대로의 배경이 있다.


그러나 그들도 성경이 신자 개개인에게 어떤 교훈을 준다는 것에 대해 완전히 부인하지는 않는다. 그렇게 되면 성경 자체를 부인하게 되기 때문이다.


고린도전서 10장에서 말씀하기를 "구약의 역사( 이스라엘의 역사)들이 기록된 것은 바로 너희들의 경계를 위해서 기록된 것"이라고 분명히 얘기하고 있다. 분명히 그 역사가 우리에게 주는 교훈들이 있다. 그렇기 때문에 신자로서 살아야 할 경건의 본이나 교훈들을 일률적으로 매도하는 것은 잘못됐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문제는 그런 사람들에게 있어서 잘못은 구약의 main stream(주된 흐름)을 자꾸 잃어버린다는 것이다. 개인의 경건의 역사라는 것이 이 main stream 내에서 각각 차지하는 위치가 있는 것이다.


성경이 개인의 역사를 기록할 때는 항상 main stream과 관련해서 얘기를 하고 있는데 이 main stream을 잃어버리면 적게는 어떤 폐단이 있는가 하면 중요한 것을 놓치고 지엽적인 것을 붙든다는 잘못이 있고 또 심각한 잘못은 항상 main stream과의 관계 속에서 개인의 역사를 얘기하고 있는데 정작 main stream을 끊어버리게 되면 개인의 역사에 대한 의미가 변질되어 버린다. 그래서 성경본문의 의미를 변질시키는 잘못도 가져올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원칙적인 얘기를 한다고 하면 성경은 역사를 얘기할 때 결코 인간 주도적인 역사를 얘기하고 있지 않다. 역사자체를 정의할 때 그것은 하나님의 뜻의 실현이라고 얘기할 수 있다. 그것은 구약이나 신약이 꼭 같이 강조하는 것이다.


그렇다고 하면 성경이 근본적으로 하나의 역사를 얘기하고 있다면 누구의 역사를 기술해야 할 것인가 그것은 자명한 일이다.


그것이 전제된 그 위에 개인이 하나님께서 자유로운 결정과 의지에 따라서 존재케 하신 존재형식을 따라, 즉 독특한 존재형식으로 존재케 하신 인간의 특성에 맞도록( 존재의 특성이라는 것이 기계처럼 움직이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고 그에 대해 반응할 수 있는 독특한 존재형식이다.) 하신 그 속에 Moralizing이 수용될 수 있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런 여지들을 두면서 구약본문을 설교해야 할 것이다. 그런데 한국교회의 설교는 너무 개인적인 부분에 시야를 좁혀 버리기 때문에 여러 가지 폐단들이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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