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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속 대로 (고전 15:12-19 )

by 【고동엽】 2021. 10. 30.
 
부활 목차 돌아가기
 

약속 대로    (고전 15:12-19 )

오늘은 부활 주일입니다. 오늘은 전 세계교회가 한마음으로 예수님의 부활을 축하하며 예배를 드리는 날입니다. 오늘 우리 기독교는 지난 2000년 동안 줄곧 예수님의 부활을 기념하며 예배를 드려 왔습니다. 성경이 약속하신 대로 예수님은 부활하셨습니다. 성경을 보면 약속이 참 많이 나와 있습니다. 신약과 구약이라는 말도 약속이라는 뜻입니다. 옛날에 있었던 약속이 구약이고 새로 주어진 약속이 신약입니다. 성경을 보면 그 안에 모두 약속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예수님은 그 약속대로 이 땅에 오셔서 활동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은 인간의 약속과 그 격이 다릅니다. 사람의 약속은 우선 믿을 수가 없습니다. 환경에 따라, 입장에 따라서, 사람에 따라서 약속이 늘 변화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한 약속은 영속성이 없습니다. 결혼할 때 얼마나 철석같이 약속합니까. 하나님 앞에서 많은 증인들 앞에서 자신과 상대에게 얼마나 진지하게 약속을 합니까. 그런데도 살다보면 이것이 깨집니다. 없던 것으로 하고 간단히 헤어집니다. 돈을 빌려갈 때 얼마나 철석같이 약속을 합니까. 그런데 그 약속이 잘 지켜지지 않습니다.

우리들이 처음 직분을 받을 때 얼마나 뜨겁게 다짐하고 눈물을 흘리며 서약을 합니까. 그런데 그 서약마저도 세월이 흐른 후에는 잊어버립니다. 목사안수를 받을 때 모두 눈물을 흘리며 서약하고 다짐하고 그때 아골 골짝 빈들에도 복음 들고 가겠다고 찬송을 부르며 서원했습니다. 그런데 몇 년의 시간이 흐른 뒤 오늘은 그 다짐 송두리째 사라져 버렸습니다. 장로 안수받을 때 얼마나 눈물을 흘리며 충성을 다 하겠다고 맹세했습니까. 그런데 몇 년 시간이 흐르고 난 지금 오늘은 어떻습니까. 선교사 파송 받던 날 리빙스턴 같은 선교사가 되겠다고 얼마나 다짐했는데 몇 년 지난 오늘 나의 모습은 어떻습니까. 모두 약속은 온데간데없습니다. 그래서 인간의 약속입니다. 인간의 약속에는 그런 하자가 있습니다. 인간의 약속은 그렇게 한계가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약속은 다릅니다. 우선 하나님의 약속은 변함이 없습니다. 신실하십니다. 하나님의 약속은 반드시 지키십니다. 성경에 보면 하나님 이름으로 약속한 것은 히브리인들도 어기지를 못했습니다. 하나님은 약속의 하나님이십니다. 그래서 오늘은 이 하나님의 신실하신 약속에 대해서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먼저 예수님은 약속대로 “이 땅”에 오셨습니다.


구약성경에 보면 장차 예수님이 세상에 태어나리라고 약속한 말씀이 1500년 동안 무려 450여회나 나옵니다. 특히 이사야서 같은 성경을 보면 온통 예수님의 탄생에 대한 말씀으로 가득 채워져 있습니다. 이사야는 장차 예수께서 이 세상에 태어나시리라는 것을 누차에 걸쳐서 예언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태어날 때의 환경까지도 그대로 표현해 놓고 있습니다. 7:14절을 보면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니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라”고 했습니다. 신약성경을 보면 이사야서에서 예언한 그 내용 그대로 예수님은 처녀 마리아에게서 태어나십니다. 그래서 신구약 성경이 주제가 예수입니다. 예수님은 성경이 약속하신 그대로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또 예수님은 성경이 약속한 그대로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장차 예수께서 세상에 오셔서 십자가에서 죽으리라는 것을 성경은 여러 차례 말씀했습니다. 특히 시편 69:21절을 보면 장차 예수님이 세상에 오셔서 죽는 모습을 그대로 예언해 놓았습니다. 거기 보면 “그들이 쓸개를 나의 음식물로 주며 목마를 때에도 초를 마시게 하였사오며”라고 말씀해 놓았습니다. 시편은 다윗과 솔로몬의 시대에 쓰였습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이 태어나기 이미 천년 전에 그의 죽음의 모습을 예언해 놓은 것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실 때 사람들이 예수님 입에 쓸개 탄 신포도주를 마시게 했습니다. 왜 쓸개를 타서 입에 대었는가 하면 너무 탈진하니까 목을 축이라고 입에 대었을 것이고 고통이 너무 심하니까 그 고통을 진정시키게 하기 위해서 당시 진통제로 사용하던 쓸개 탄 신포도주를 예수님의 입에 대었을 것입니다. 당시 포악한 죄수들은 망나니 뛰듯이 날뛰어서 십자가에 달기 전에 이 신포도주를 먹였다고 합니다. 그래서 진정되면 그때 십자가에 매달았다고 합니다. 예수님도 십자가에 매달려서 너무 심하게 고난을 당하니까 사람들이 신 포도주를 먹였던 모양입니다. 그 모습을 그때로부터 천년 전에 그 모습을 그대로 예언해 놓았습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은 그렇게 예언된 그대로 이 땅에 오셨다가 그 예언된 그 모습 그대로 죽으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성경이 약속한 그대로 오셨습니다.  


세 번째는 약속된 그대로 “부활”하셨습니다.


성경에 보면 예수님이 죽으신 후에 부활하리라고 얼마나 많은 곳에서 약속했습니까. 예수님은 그렇게 약속한 그대로 부활하셨습니다. 이 예수님의 부활은 초유의 사건이기 때문에 이성적으로나 설명으로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그리고 이론적으로는 더욱 이해가 되질 않습니다. 그래서 그 당시 사람들도 보고도 믿지 못하고 들어도 믿지를 못했습니다. 그러니 그 이후에 이 부활에 대한 해석이 얼마나 구구했겠습니까. 그래서 그 이후 신학자들의 해석이 아주 분분했습니다. 프랭크 모리스(Frank Morrison)라는 신학자는 “예수님의 부활사건은 제자들이 조작한 사기극”이라고 혹평했습니다. 또 데오도르 카일은 “부활은 제자들에게 나타난 예수의 환상”이라고 해석했습니다. 그리고 불트만이라는 신학자는 “바울이 예수의 부활을 외치고 다니는 동안에도 무덤에서 예수의 시체는 썩고 있었다.”고 신랄하게 비판했습니다. 부활도 믿지 못하는 사람들이 왜 신학자는 되었는지 모르겠습니다.

왜 이런 해석들이 나오는가 하면 부활사건은 역사상 처음 있는 사건이라 믿어지지가 않기 때문입니다. 이 문제는 신앙적인 사건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사건은 영적인 감화가 없이는 믿어지지 않는 사건입니다. 이 예수님의 부활사건이 그냥 믿어지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런데 이 문제가 그렇게 쉽고 간단한 문제가 아닙니다. 그래서 역사적으로 이 부활 때문에 시험당하고 이론이 갈리는 일이 업마다 많은지 모릅니다. 그런 해석들을 전해들은 역사가 크라우스너(J. Krausner)라는 분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초대교회 성도들이 미쳤다고 사자굴 속에서 찬송을 불렀겠는가, 아프리카 정글 속에서 죽어가면서 예수를 전한 사람들은 모두 사기당한 사람들이란 말인가, 서슬이 시퍼런 로마 통치 속에서 부활을 전한 것은 과연 무슨 힘으로 했단 말인가, 거짓된 사실 때문에 초대교회 사람들이 그렇게 생명을 내놓고 외칠 수 있었다고 생각하는가?”하고 반박했습니다.  

괴테의 파우스트를 보면 서문에 이런 글이 있습니다. 청년 파우스트는 문학가, 의학자, 법학자, 신학자입니다. 그가 인생에 번민을 느끼며 회의에 빠집니다.  그러다 마침내 그는 자살을 기도합니다. 독배를 마시려고 폼을 잡았습니다. 그때 멀리서 부활절의 새벽종소리가 들려옵니다. 그리고 예수 다시 사셨다는 합창소리가 장엄하게 울려옵니다. 그때 이 파우스트는 “그가 살아나셨다면 나도 부활할 수 있다”고 외치면서 독배를 집어던지고 일어서 새 인생을 시작합니다. 이것이 이 세상에 준 예수의 부활의 힘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사기사건도 아니고 조작도 아니고 꾸며낸 선전도 아닌 역사적인 사건입니다. 예수님은 성경이 약속한 그대로 부활하셨습니다. 그리고 이 세상에 온갖 소망과 희망과 능력과 부흥과 기쁨의 환희를 일으켰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한 가지 더 생각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이 네 번째로 성경이 약속한 그대로 “우리 그리스도인들도 부활한다. 는 사실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이 중요한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이 부활이 없으면 기독교는 아무 의미도 없는 종교로 전락됩니다. 그리고 우리 믿음도 아무 것도 아닙니다. 그러면 어떻게, 무엇에 근거해서 장차 나도 부활한다고 믿을 수 있습니까. 그것은 예수님이 부활하셨기 때문에 나도 부활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근거이고 권위입니다. 예수님만 부활하고 나는 아무 것도 아니라면 예수님의 부활은 그렇게 큰 의미가 없습니다. 그래서 오늘 읽은 성경을 보면 이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14절을 보면 “그리스도께서 만일 다시 살아나지 못하셨으면 우리가 전파하는 것도 헛것이요 또 우리의 믿음도 헛것이며” 또 19절을 보면 “만일 그리스도안에서 우리가 바라는 것이 다만 이 세상뿐이면 모든 사람 가운데 우리가 더욱 불쌍한 자.”고 했습니다.

여러분, 예수님의 부활이 값이 있는 것은 그 부활이 바로 내 부활이 되기 때문입니다. 예수의 승리가 곧 나의 승리입니다. 그리고 예수의 부활이 곧 나의 부활입니다. 이것이 믿어져야 합니다. 이 믿음이 없으면 예수님의 부활은 예수님의 부활일 수는 있어도 나의 부활과는 아무 상관도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내게 있어서 가장 소중한 분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이 땅의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가장 큰 힘과 믿음을 주셨습니다. 그리고 자신감과 미래에 대한 확신을 주셨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마치 미래가 완전히 보장된 사람과 같은 믿음을 주었습니다. 사람에게 가장 큰 자본은 미래에 대한 자신감을 갖는 일입니다. 오늘 현대인들이 이 문제에 확신이 없어서 모두 불안해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보십시오. 요즘 입시 가운데 수시입학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수시 입학은 고 3졸업 전에 이미 대학에 합격해 놓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 학생이 얼마나 마음이 시원하겠습니까. 아마 고 3년의 생활이 아주 재미있을 것입니다. 이미 가장 큰 문제를 해결해 놓았고 미래가 보장되었기 때문입니다. 운명을 눈앞에 둔 사람도 가장 불안한 사람입니다. 왜냐하면 죽음 이후의 문제가 아직 해결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에게 이 부활사상이 있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얼마나 그 시간이 힘이 되겠습니까.

  그래서 경건한 신앙인이 운명하는 모습을 보면 그렇게 평안합니다. 마치 노후 준비가 다 된 사람이 노년에 대해서 걱정이 없는 모습과 같습니다. 갈 곳이 있는 사람은 실직을 해도 겁이 나질 않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우리에게 그런 믿음을 주셨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들이 아무 것도 가진 것이 없으면서도 세상을 누구보다도 자신 있게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 믿음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 믿음이 있으면 사람이 이렇게 여유가 생깁니다. 살면서 이 여유가 얼마나 중요한가를 늘 생각하게 됩니다. 이 믿음과 여유를 가지고 살아가는 것이 부활신앙입니다.

문제는 이 부활의 믿음이 없는 사람들이 문제입니다. 그래서 늘 불안합니다. 죽음이 불안하고 죽음 후가 불안합니다. 그래서 이 부활의 믿음 없는 사람들은 무덤에 대해서 관심이 많습니다. 그것이 부질없는 일인데도 관심이 참 많습니다. 왜냐하면 부활신앙이 없기 때문에 무덤을 영원히 거할 처소로 인식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오늘 사람들이 죽은 후의 일에 관심이 많습니다. 두꺼운 관을 골라 그 곳에 들어갑니다. 이것이 얼마나 무지한 행동인지 아십니까. 돈은 많은데 미래가 없어서 그런 일에 돈을 사용합니다. 여러분, 시체는 땅에 묻히면 빨리 썩어야 좋은 것입니다. 시체가 빨리 썩어야 그곳이 명당입니다. 명당이라는 말은 시체가 묻히면 일년 안에 빨리 부패할 수 있는 곳이 명당입니다. 그런데 그 두꺼운 관속에 시체를 넣어 밀봉시켜 묻어버리면 어쩌자는 것입니까. 사람들이 이렇게 무지합니다.  

또 오늘 사람들이 무엇에 관심을 가지고 살아가는가 하면 수의에 관심이 많습니다. 오늘 수의 한 벌이 보톤 5,60만원 수준이 아닙니다. 지금 중국에서 수입된 수의가 그 정도입니다. 충청, 전라지역에서 만들어지는 수의를 남녁포라고 하는데 이것이 한 벌에 1,500만원씩 합니다. 그리고 안동에서 만들어지는 안동포는 2,500만원씩 합니다. 이것이 주로 오늘 고급 공무원이나 돈 많은 기업인들이 주로 주문하여 사용한다고 합니다. 여기에 오늘 가장 비싼 것은 안동에서 만들어지는 초특급 삼베로 만들어진 안동포인데 이것이 자그마치 1억원이나 한다고 합니다. 그 수의가 왜 그렇게 비사냐 하면 그 수이에 황금 가루를 뿌려놓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 수의 이름이 황금수의 입니다. 왜 수의에다 황금가루를 뿌렸느냐 하면 그래야 세월이 흐르면 유골이 황금색으로 변하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지금 사람들이 이렇게 생각 없이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리고 머리가 텅 빈 채 살아가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여러분, 여러분은 지금 얼마나 세련되고 고상하고 높은 영적수준을 가진 인생을 살아가고 있는 줄 아십니까. 지금 세상 사람들이 이런데 관심을 가지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왜 이렇게 관심가지고 살아가느냐 하면 그 사람들에게는 이 부활사상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생각하는 것이 이 수준입니다. 참 유치한 것이 인간입니다. 지금 세상의 사람들이 이 정도의 수준으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아주 고상한척 하고 그럴듯한 옷을 걸치고 살아가는데 그 속을 들여다보면 모두 이렇게 유치합니다. 부모가 돌아가셨을 때 조화가 몇 개 들어왔느냐, 얼마나 큰 무덤을 쓰느냐. 비석은 얼마짜리를 세우느냐, 장례식장은 어디서 했느냐 이것을 신경 쓰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사람이 아무리 좋은 무덤일지라도 거기서 천년을 있은들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사람에게 이 부활신앙관이 없다는 것은 사람으로 하여금 이렇게 불행하게 만듭니다. 부활신앙이 없는 사람은 이런 것에 신경을 쓰며 살아갑니다. 장차 부활이 있는 우리에게 죽음이 뭐가 그리 중요하며 장례식이 뭐가 그리 중요하며 두꺼운 관이 수천만 원 하는 수의가 뭐가 그리 필요합니까. 다 부질없는 일입니다. 모두 부활이 없는 사람들이나 하는 짓입니다.

여러분, 예수님이 왜 부활하셨습니까. 그것은 우리에게 장차 이렇게 부활한다는 것을 보여주시기 위해서 부활하셨습니다. 장차 우리도 예수님이 아주 신비롭게 부활하셨듯이 우리도 부활한다는 것을 보여주시기 위해서 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부활의 믿음을 가지고 살아가야 합니다. 오늘 예수님의 부활은 단순히 예수님 한사람의 부활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신 것은 곧 나의 부활과 연관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죽었듯이 나도 죽는 것이고 예수님이 부활하듯이 나도 부활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부활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더 이상 남의 부활이 아니고 나의 부활인 것입니다. 오늘 아침 이 부활의 은혜가 여러분에게 함께 하시기를 기원합니다.    


출처/이정익 목사 설교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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