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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별 설교〓/곽선희 목사 설교

한 죄인의 회개(누가복음 15장 17절~24절)

by 【고동엽】 2023. 3. 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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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죄인의 회개(누가복음 15장 17절~24절)



이에 스스로 돌이켜 가로되, 내 아버지에게는 양식이 풍족한 품군이 얼마나 많은고. 나는 여기서 주려 죽는구나. 내가 일어나 아버지께 가서 이르기를, 아버지여,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얻었사오니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치 못하겠나이다. 나를 품군의 하나로 보소서 하리라 하고, 이에 일어나서 아버지께로 돌아가니라. 아직도 상거가 먼데 아버지가 저를 보고 측은히 여겨 달려가 목을 안고 입을 맞추니 아들이 가로되, 아버지여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얻었사오니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치 못하겠나이다 하나 아버지는 종들에게 이르되 제일 좋은 옷을 내어다가 입히고, 손에 가락지를 끼우고 팔에 신을 신기라. 그리고 살진 송아지를 끌어다가 잡으라. 우리가 먹고 즐기자. 이 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다시 얻었노라 하니 저희가 즐거워하더라.


누가복음 15장의 탕자 비유는 너무나 유명한 이야기입니다. 어린아이들로부터 어른에 이르기까지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입니다. 아니,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까지도 탕자 이야기는 잘 알려진 내용입니다. 그래서, 어느 설교학 책에서는, 누가복음 15장은 설교 본문으로 선택하지 말라는 이야기가 있을 정도입니다. 너무 많이 듣고, 너무 잘 알기 때문에 피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잘 알고 있다는 착각 때문에 실상은 모르기 쉽습니다.
또한 이 이야기는 나 자신과는 거리가 멀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왜냐하면, 재산을 가지고 가출한 일도 없고 방탕한 적도 없기에 탕자와는 아무 관계도 없다고 생각되어, 중요한 이 복음이 나에게는 의미가 없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오늘의 우리네 현실을 한번 생각해 보겠습니다. 모이기만 하면 정치 문제로 걱정이 태산입니다. 그 동안의 어려웠던 정치가 다소 풀리는 듯하여, 민주화만 되면 무엇인가 될 줄로 알았는데, 요즘은 그 민주화가 더 겁이 납니다. 민주화가 되기 전에 먼저 공산화가 될 것 같아 큰 걱정들입니다. 민주화란 이름 아래 무질서와 방종이 정치․경제․사회의 여러 방향들을 마구 뒤흔들어 오히려 자신과 신념을 잃어버릴 위험에까지 왔습니다. 앞뒤가 꽉 막혀버린 불안이 우리 주변을 불안하게 하는 것입니다.
히브리 격언에 "앞도 막히고 뒤도 막히고 옆도 막혔거든 하늘을 쳐다보라"는 것이 있습니다. 정말 이제는 하늘을 쳐다볼 수밖에 없는 위기가 우리 앞에 있습니다. 그러나, 하늘을 쳐다보는 우리의 느낌은 하늘을 쳐다볼 자격이 없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보아도 하나님의 축복을 받을 만한 의와 정결함과 진실함이 우리에겐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마지막 결론은 회개 운동입니다. 회개하는 길 외에는 아무 것도 없다는 것이 뜻 있는 사람들의 결론입니다. 회개의 참된 운동이 반드시 일어나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복음을 전하실 때도, 제일 먼저 하신 말씀이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하는 말씀입니다. 오늘 본문인 누가복음 15장 1절부터 보면, 많은 세리와 죄인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듣기 위해 모였고, 그들은 예수님을 환영했습니다. 또한 예수님은 그들에게 말씀하실 뿐만 아니라 그들과 친히 사귀셨고, 그들의 집에 들어가시어 대접을 받으셨습니다. 그 당시 깨끗하다고 자처하는 교만한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이런 예수를 못마땅해했습니다. 그들도 역시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싶었지만 예수님을 둘러싸고 있는 사람들이 싫어서 주님을 원망합니다. 저렇게 더럽고 구제불능인 죄인들과 어울리는 예수님의 의중을 알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이 때에 예수님은 그들을 향한 답변으로 두 가지 비유를 말씀하십니다. 첫째 비유가「잃어버린 한 마리의 양」에 대한 이야기입니다(눅 15:3-8). 어느 사람에게 양 일백 마리가 있었는데 그 중에 하나를 잃어버렸다가 다시 찾았습니다. 그 때에 얼마나 기뻤겠습니까? 그래서 그의 벗들과 이웃을 불러 잔치를 베풀었다고 하시면서, 죄인 하나가 회개하면 하나님의 사자들 앞에 기쁨이 된다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은 지금 둘러앉은 세리들과 죄인들을 보시면서 천국 잔치에 참여한 기쁨을 누리시지 않나 생각됩니다.
그리고 이어서 또 하나의 비유로 탕자 이야기를 들려주십니다. 여기서 탕자는 세리와 죄인들로 이방 사람들로 비유되고, 탕자의 형은 바리새인과 서기관들로 유대 사람을 비유한 것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오늘 우리들의 회개에 대한 실상은 어떠합니까? "회개하라"는 외침은 무성한데 참된 회개가 없습니다. 그 이유는, 첫째로, 말로만 회개를 하고 있습니다. 회개가 필요하고 중요하다고 말할 뿐 진정한 회개는 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회개의 열매가 없습니다. 둘째는, 나는 회개하지 않고 다른 사람에게만 회개를 강요합니다. 셋째는, 회개가 원망으로 바뀌고 있습니다. 내가 잘못했다는 생각에서 자복하러 갔다가 "잘못했습니다" 하는 것으로 끝나면 좋으련만, 잘못했다는 사과 뒤에 두 가지 형태의「토」를 답니다. 하나는, 나도 잘못했지만 그러면 당신은 잘했느냐고 상대방의 잘못을 끌어내어 나의 잘못을 다소 감해 보려는 것입니다. 또하나는 잘못하기는 했지만 "사실은…"하면서 자기 잘못에 대한 변명 내지는 정당화의 기회로 삼는 것입니다. 변명하고 정당화하다보면 나보다 다른 사람들을 더 큰 죄인으로 매도하게 되어, 결국은 회개하려다가 남을 원망하고 불평하여 오히려 또다른 문제를 일으키게 되는 것입니다. 네째는, 소원을 전제로 한 회개입니다. 지금 회개할 것이니 용서해 줄 것인지 아닌지를 조건으로 내놓는단 말입니다. 이것은 회개가 아닙니다. 잘못했으면 잘못했다는 것으로 끝나야지, 회개하면 무엇을 주겠느냐고 정치적인 방법을 동원하고 있습니다. 회개한 뒤에는 어떤 형벌이 와도 상관없이 회개 자체로만 끝나야 합니다. 소원과 조건이 있는 회개는 회개가 아닙니다.
하나님을 잘 섬기는 어느 성도가 기도 중에 환상을 보며 하늘나라에 갔는데, 그 곳에서 하나님과 사단이 대화하는 것을 들을 수 있었다고 합니다. 먼저 사단이, "하나님, 여기 천당에 온 사람들은 그렇게도 많은 죄를 지었음에도 불구하고 용서하시어 천당으로 오게 하시면서, 나는 한 번밖에 잘못한 것이 없는데 왜 용서하지 않으십니까?" 하고 묻더랍니다. 하나님은 "사단아, 네가 언제 나에게 용서를 빈 일이 있느냐?" 하고 회개하지 않았음을 지적하셨답니다. 죄가 많으냐 적으냐의 문제가 아니라 진정으로 회개했느냐 아니냐의 문제입니다.
"회개하라" 하는 말씀은 그 자체가 복음입니다. 죄를 지었으면 당연히 그 죄값으로 벌받음이 마땅하나, 회개하라고 촉구하고 계시니 얼마나 큰 복음입니까? 가정에서 자녀들이 잘못하면 부모님들은 매를 듭니다. 이 때에 부모님들이 원하는 바는, 아이들이 잘못했다고 용서를 비는 일입니다.
그러나 고집이 센 아이들은 매를 많이 맞을지언정 끝까지 용서를 구하지 않습니다. 마지막에는 때리던 부모님이 지쳐서 울게 됩니다. 마찬가지로 이사야서 1장 5절 이하에 보면 회개하지 않는 죄인들을 향한 하나님의 심정이 잘 나타나 있습니다. "너희가 어찌하여 매를 더 맞으려고 더욱더욱 패역하느냐. 온 머리는 병들었고 온 마음은 피곤하였으며 발바닥에서 머리까지 성한 곳이 없이 상한 것과 터진 것과 새로 맞은 흔적뿐이어늘 그것을 짜며 싸매며 기름으로 유하게 함을 받지 못하였도다." 어찌하여 성한 곳이 없는데 더 맞으려고 하느냐고, 회개하지 않는 사람들에게 징계하시다 지쳐서 울부짖는 하나님의 아픈 마음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이 계시하고 있는 탕자의 회개는 우리들에게 몇 가지 교훈을 주고 있습니다.
첫째, 탕자의 회개는 아버지께로 돌아오는 행동입니다. 잘못하면 회개한다면서 뉘우치고 절망하다가 자살까지 하게 되는 어리석음이 있지만, 탕자의 회개는 후회도 뉘우침도 절망도 아니었습니다. 한탄하고 후회의 눈물을 흘리는 것이 회개라고 생각하면 안 됩니다. 회개란 돌아오는 행위입니다. 본문에서는 "스스로 돌이켜"라는 말이 있는데, 헬라어 원문대로는------자기 자신에게로 돌아왔다(come back to himself)는 의미가 있습니다. 본래의 제 모습으로 돌아왔다는 것입니다. 그 동안은 얼마나 즐거울까, 잘사느냐 못사느냐 하며 세상적인 것에만 골몰하다가 체면, 명예, 자존심 다 버리고 생명으로 돌아오는 것입니다. 과연 나는 누구냐, 이대로 가도 좋은가, 내가 오늘 세상을 떠난다면 어떻게 될 것인가, 내 생명은 어디로 가는가 하는 생명 자체의 문제로 궁극적 관심을 돌린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벌을 받느냐 아니냐, 잘사느냐 못사느냐에서 생각의 방향을 돌리어 하나님 앞에 선 내 모습에 관심을 가진 것입니다. 그리고 그 모습 그대로 돌아왔습니다. 잘 보이기 위해 목욕하고 새옷을 입고 돌아올 것이 아니라 부끄러운 모습 그대로 돌아옵니다. 이것이 바로 회개입니다. 회개하려는 사람이 계획을 세우고 언제 어디서 어떻게 회개할까 하다가는 기회를 놓칩니다. 이 모습 이대로 부끄럽고 추하지만 나아가서 잘못했다고 하면 되는 것입니다. 회개하기 위한 계획이 복잡하고 생각이 많으면 회개하기 어렵습니다. 그저 단순하고 솔직하게 돌아와서 고백하는 것입니다.
마음으로 혼자 회개하면 안 됩니다. 반드시 돌아와서 잘못했다고 말해야 회개인 것입니다. 원점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빌레몬서 1장 10절 이하에 보면, 바울이 오네시모에게 부탁을 합니다. 너의 주인인 빌레몬에게 돌아가서 잘못했다고 회개하라는 것입니다. 원래 오네시모는 빌레몬의 노예로서 도망나온 사람입니다. 죄는 여기서 짓고 먼 나라로 도망가서 뉘우치고 선한 일 한다고 용서되는 것입니까? 원점으로 돌아가서 고백해야 회개하는 것입니다.
둘째, 탕자는 자기 평가를 바로 했습니다. 먼저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나이다"라고 말합니다. 탕자 편에 서서 한번 변증해 보겠습니다. 그는 죄인이 아닙니다. 정당하게 자기 분깃을 받아, 내 것을 내 마음대로 쓴 것뿐입니다. 도둑질이나 강도질을 해서 쓴 것은 아닙니다. 이런 측면에서는 죄인이 아니란 말입니다. 나의 것으로 내 마음대로 탕진하고 고생하는 것이니 상관없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아버지의 마음을 아프게 한 것입니다. 법칙으로 따지자면 죄가 아니지만, 아버지의 마음을 너무 아프게 했고 하늘에 죄를 지었다고 본인이 말하고 있습니다. 무슨 뜻입니까? 집을 나갈 때의 그의 의도가 나빴다는 것입니다. 아버지의 간섭이 싫었고 아버지의 충고가 마음에 들지 않아 집을 나간 그 모든 행위가 하나님과 아버지 앞에 잘못되었다는 것입니다. 자신의 저 깊은 심중에 죄가 있고 악이 있었음을 고백하고 있습니다. 여기에는 아들의 자격을 다시 회복하려는 저의(底意)나 유산에 대한 또다른 미련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아버지의 곁에 와서 남은 생애를 살고 싶은 것뿐입니다. 이것이야말로 진정한 회개입니다.
또 하나의 자기평가는 "감당치 못하겠다"는 것입니다. 이제부터는 아들로 부름 받을 수가 없으니 외양간에서 머슴살이로 살아가겠다는 자세입니다. 전혀 자격이 없음을 고백합니다. 자기 자격을 완전히 포기하는 그 자체가 얼마나 소중한 것입니까? 이 순간에 아버지는 아들을 영접하게 됩니다.
셋째, 탕자는 은혜를 겸손하게 받아들입니다. 본문을 자세히 보면, 아들이 아버지를 알아본 것이 아니라 아버지가 아들을 먼저 알아봅니다. 이 말은, 아버지가 오랫동안 아들을 기다렸다는 뜻입니다. 아들을 알아보자마자 달려가서 입을 맞추고 제일 좋은 옷을 입히고 가락지를 끼우며 크게 환영합니다. 그 당시 풍습으로는, 좋은 옷을 입힘은 마음을 열고 크게 환영하는 것을 의미하며, 가락지를 끼우는 것은 아들에게 상속권을 물려주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신을 신기는 것은 노예가 아니라 아들임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그 당시 노예는 신을 신지 못했습니다. 이렇게 완전한 아들로 영접하고 잔치를 베풉니다. 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으며 잃었다가 다시 얻었노라고 아버지는 즐거워하십니다. 어찌 생각하면 탕자는 염치가 없어 보입니다. 아버지의 마음을 아프게 했고 자신이 생각해도 무자격한 그가 지금 잔치상에 앉았으니 말입니다. 사실 예수 믿는 사람들이 염치가 좀 없는 편입니다. 원래 은혜 안에 산다는 것이 바로 그렇습니다. 내가 나를 볼 때에도 구제 불능이고 무자격하나 아버지의 마음을 보고 자기 존재를 다시 깨우칩니다. 나는 그 동안 아버지를 잊고 살았는데 아버지는 계속 나를 기억하셨습니다. 아버지가 이토록 기뻐하실 줄 알았으면 좀더 빨리 돌아오지 못한 것이 죄스럽습니다. 이제부터는 나의 마음으로 아버지를 보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의 마음에서 나를 보는 것입니다. 내가 아버지에게 이렇게 소중한 존재임을 미처 몰랐습니다. 아버지가 기뻐하시는 그 모습을 보고 차마 잔치자리에서 사양하겠다는 말을 할 수가 없습니다. 그 자리가 한없이 죄송하고 불편하지만 아버지의 마음을 생각했던 것입니다. 아들의 입장으로서는 오히려 아버지께서 욕을 하고 매질을 해 주는 것이 훨씬 편했을지도 모릅니다. 만약 그가 아버지의 마음을 외면하고 사양했다면 그는 또 한번 자기 의의 노예로서 회개한 자가 못 됩니다.
회개란 믿음을 필요로 합니다. 이 믿음은 바로 아버지의 마음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아버지의 넓은 가슴에 그대로 안기는 것입니다. 나는 비록 자격이 없지만 아버지께서 아들로 여기시니 아들입니다. 자격이 있다 없다고 말해서는 안 됩니다. 아버지가 사랑하면 그대로 족합니다. 아버지 안에서 자기를 발견하는 것이 믿음이요 회개입니다. 진정한 회개는 나 자신의 의를 완전히 포기하고 노력과 수고도 다 접어두고, 아버지의 마음을 그대로 수용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아버지가 인정하는 자기 가치만 보면 됩니다. 이제 나는 소중한 존재입니다. 이것은 새로운 가치 발견입니다. 죄된 나를 알고 무자격한 나도 알아야 하겠지만 구원받은 나, 의롭다 함을 얻은 나, 영화롭게 된 나도 함께 알아야 합니다.
나는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하나님은 나를 기다리셨고 하나님은 나를 용서하셨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용서한 나를, 내가 용서할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용서를 빌면서도 평생 내가 나를 용서하지 못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것은 회개가 아닙니다. 참 회개란 내가 나를 용서하고, 그리고 하나님이 용서한 이웃을 또 내가 용서할 수 있을 때에 하나님의 자녀된 자기 정체와 하나님의 자녀된 이웃과의 형제애가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복음의 역사 외에는 그 무엇으로도 참된 소망의 길을 찾을 수가 없습니다. 오늘 주신 말씀에서, 우리는 아버지의 기쁨 안에서 우리 자신을 되찾는 은혜가 있으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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