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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어머니의 소원(마태복음 20:20-28)

by 【고동엽】 2023. 3. 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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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어머니의 소원(마태복음 20:20-28)


그 때에 세베대의 아들의 어미가 그 아들들을 데리고 예수께 와서 절하며 무엇을 구하니 예수께서 가라사대 무엇을 원하느뇨 가로되 이 나의 두 아들을 주의 나라에서 하나는 주의 우편에 하나는 주의 좌편에 앉게 명하소서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 구하는 것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 도다 나의 마시려는 잔을 너희가 마실 수 있느냐 저희가 말하되 할 수 있나이다 가라사대 너희가 과연 내 잔을 마시려니와 내 좌우편에 앉는 것은 나의 줄 것이 아니라 내 아버지께서 누구를 위하여 예비하셨든지 그들이 얻을 것이니라 열 제자가 듣고 그 두 형제에 대하여 분히 여기거늘 예수께서 제자들을 불러다가 가라사대 이방인의 집권자들이 저희를 임의로 주관하고 그 대인들이 저희에게 권세를 부리는 줄을 너희가 알거니와 너희 중에는 그렇지 아니하니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너희 종이 되어야 하리라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인간 이해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그 기본 본능을 아는 데 있다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혹 어떤 인간 관계를 맺고 있다고 하더라도 상대방의 기본 욕망을 안다는 것은 그를 이해하는 데 지름길이 되는 것 같습니다. 이 기본 욕망이라고 하는 것은 보편적인 공통성이 있습니다. 비록 말의 표현은 다르다고 할지라도 그 속에 가진 욕망은 마찬가지입니다. 또는 그의 생각은 다르게 설명될 수 있어도 그 깊은 곳에서의 소원은 마찬가지입니다. 인간의 기본 욕망을 여러 가지로 말합니다만 대략 세 가지로 요약됩니다.
첫째가 생존 본능입니다. 살고 싶은 마음, 그리고 오래 살고 싶은 생존 본능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가끔 일이 뜻대로 안되면 죽고 싶다는 말을 합니다. 이 죽고 싶다는 말은 살고 싶다는 말보다 더 살고 싶은 마음입니다. 이렇게 역설적으로 말을 합니다만 결국은 살고 싶은 것입니다. 이 살고 싶은 마음이 때로는 먹고 싶은 마음으로 바뀌어지기도 하고 혹은 소유욕으로 나타나기도 하고 또 생식 본능으로 나타나기도 합니다. 어쨌든 살아 남고자 하는 것입니다. 만일 이런 본능이 없다면 사람은 살아갈 수 없을 것입니다. 태어나자마자 어머니의 젖을 빠는 본능은 정말 놀라운 이야기가 아닐 수 없습니다. 만일에 젖을 빠는 본능이 없다면 죽을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둘째의 본능은 평등코자 하는 본능입니다. 다른 말로는 사회적 본능이라고 합니다. 누가 집을 사면 나도 사고 싶고 누가 차를 타면 나도 타고 싶습니다. 다른 사람이 가진 것이면 나도 갖고 싶습니다. 그래서 사촌이 땅을 사면 배가 아프다고 합니다. 내가 못 살 바에는 다른 사람도 못 살아야 하고, 내가 할 수 없는 일을 다른 사람이 하고 있으면 불편하고 질투가 나는 것입니다. 이렇게 평등하고자 하는 마음, 같아지고자 하는 마음, 같기를 바라는 마음은 우리의 기본 본능인 것입니다. 이것을 또한 소속력이라고도 합니다. 어딘가 끼고 싶어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젊은 사람들끼리 무엇인가 한다고 나이 많은 어른들을 돌려 놓으면 서글퍼하는 것입니다. 아주 섭섭한 것입니다. 역시 어른들끼리만 모여서 뭘 한다고 아이들을 돌려 놓으면 저희들끼리 불평을 합니다. 사람은 어딘가에 이렇게 같아지고 싶고, 동참하고 싶고, 같이 끼고 싶은 본능을 가지고 있습니다.
셋째는 정치적인 본능입니다. 좀 거창한 것 같습니다만 누구나 이 정치적 본능을 지녔습니다. 이것은 무엇인가 되고자 하는 마음이며, 무엇인가 지배코자 하는 마음입니다. 소꼽장난을 하든, 조그마한 영토를 가지든, 무엇이든 간에 내 마음대로 지배하고 싶은 본능입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셨을 때 만물을 다스리라 하셨습니다. 그래서 인간은 다스리는 본능을 가졌습니다. 이것은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 모릅니다. 되고자 하는 마음, 다스리고자 하는 마음, 보이고자 하는 마음, 이런 마음을 또한 종교적 본능이라고도 합니다. 어쨌든 이것은 첫째가 되고 싶은 마음, 지배하고 싶은 정치적 본능입니다. 그래서 우리 가정에서도 가장(家長), 학교에서는 반장(班長), 심지어는 가정부인이라도 하나 더 붙여서 주부(主婦)라고 주(主)자를 붙여줘야 마음에 드는 것 같습니다. 다스리고 싶은 마음입니다.
성경은 이런 기본 본능 자체를 결코 정죄하지 않습니다. 본능을 통해서 하나님은 축복하셨고 본능을 통하여 우리에게 계속 역사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먹고 싶은 욕망이 없다면 많은 음식이 복이 되지 않습니다. 소유욕이 없다면 물질이 복이 될 수 없습니다. 떡 반죽 그릇에, 포도즙 틀에 복을 주마 하신 말씀은 인간의 기본 본능에 적중하는 말씀들입니다. 너를 높여 주리라. 네 이름도 장구하게 하리라, 네 날이 장구하리라. 이 모든 축복들 전부가 기본 본능에 적중하는 말씀입니다.
원칙적으로 기독교는 금욕주의도 아니며 염세주의도 아닙니다. 이것이 타종교에 비해 기독교의 특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첫째가 되고 싶은 욕망, 절대 버리지 말 것입니다. 소유욕도 버리지 말 것입니다.
평등코자 하는 인권적 욕망도 있어야 합니다. 어떻게 제한하며, 어떻게 다스려 나가며, 어떻게 승화시켜 나가느냐 이것이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한 어머니가 이 같은 기본 욕망을 가지고 예수님 앞에 나와서 소박한 한 여성으로 우러나오는 소원을 아뢰고 있습니다.
어쩌면 우리 한국 어머니들과 비슷합니다. 자기 자식 잘되기를 바라는 마음이 아주 극단적인 표현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두 아들이 예수님의 제자인 것만으로는 만족치 못하고 제자가 될 바엔 수제자를 원하는 것입니다. 제자 중에서도 맨 위에 첫째 둘째가 되어, 하나는 좌편에 하나는 우편에 앉히고 싶은 마음입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아는 바와 같이 열두 제자를 거느리셨습니다. 그런데 그 중에 특별히 세 제자를 가까이 두셨던 것 같습니다. 베드로, 요한, 야고보이며 이 제자들만 따로 데리고 변화산에 올라가셨습니다.
어쨌든 이 세 제자가 예수님의 사랑을 더 받은 것으로 보입니다. 이중 베드로는 수제자였습니다. 그러고 보니, 야고보와 요한 중 누구 하나가 예수님의 좌편에 앉게 될 모양입니다. 그러면 이 어머니의 아들 하나가 예수님의 좌편에 앉게 되는데 이것만 가지고는 만족치 못한 것입니다. 하나가 빠졌다는 데 불평이 있어서 지금 예수님께 나아와 특별 교섭을 하는 것입니다. 요즘 용어로 말하면 특별 청탁입니다. "하나는 우편에, 하나는 좌편에 앉게 해 주세요." 이 부탁 뒤에는 숨겨진 소원이 하나 더 있습니다. 베드로는 우편으로 빼라는 것이지요. 우리 아들이 가지런히 둘 다 출세해야 하니까 베드로는 자연히 물러서라는 뜻입니다. 이 어머니의 소원은 이해할 만합니다. 아마 이 소원에 대해서는 어느 어머니도 예외가 없으리라 생각합니다.
욕망은 끝이 없습니다. 예수님의 제자가 되었으니 족하고, 그의 나라에 참예한 것으로 족하지 못하고 꼭 첫째 둘째가 되어야 한다고 소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이 어머니의 소박하고 기본적인 욕망에 대해서 책망하지 않으셨습니다. 욕망을 버리라고 꾸짖지 않으셨습니다. 첫째가 되고자 하는 이 소원을 허락하되, 다만 그 전에 생각해야 할 것이 몇 가지가 있는 것입니다.
먼저 예수님이 말씀하시기를 "네가 구하는 것을 네가 모르고 있다"하시며 네가 지금 좌․우에 앉겠다는데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아느냐? 이것을 먼저 생각하라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지금 십자가를 지기 위해, 예루살렘을 향하여 마지막 길로 올라가는 도상에 있습니다. 이렇게 비장한 걸음을 걷고 있는 예수님께 이러한 허황된 꿈을 말하고 있으니, 진정 구하는 바를 알고 있느냐고 물으십니다.
여러분은 자기가 구하는 것을 알고 있습니까? 무엇을 구하고 있습니까? 주님께서 지금 당신에게, 솔로몬에게 물으신 것처럼 말씀한다면 무엇을 구하겠습니까? 너는 내게 구하라 내가 네게 무엇을 줄까, 한 가지만 구하라 한다면 무엇을 구할 것입니까? 소원이 분명해야 합니다. 저는 가끔 어머니들이 자식을 위하여 애쓰는 것을 보고 물어 볼 때가 있습니다. "당신 자식이 어떤 사람이 되기를 원합니까?" 그러면 많은 분들이 "좌우간 일류 대학에 들어가야죠"라고 합니다. 대학이 우리의 목적입니까? 도대체 무엇이 되길 원하십니까? 진정으로 내 자식이 어떤 사람이 되기를 바라고 있는 것입니까? 공부가 결코 목적은 아닙니다. 분명히 나의 소원이 무엇인가를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다시 물어 보십시다. 나는 내 자식이 어떤 사람이 되기를 바라는가 말입니다. 무엇을 구하는지 목적 의식을 분명히 해야 하겠습니다.
두 번째 말씀하시기를 "내가 마시려는 잔을 마시겠느냐?" 요한복음 18장에서 예수님은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잔을 내가 마시지 않겠느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잔은 우리가 잘 아는 바와 같이 십자가입니다. 나는 십자가를 통해서 부활의 영광을 바라고 만왕의 왕이 되겠는데 너는 우편 좌편에 앉기를 원하면서 내가 마시고자 하는 잔을 너도 마시겠느냐, 즉 너도 십자가를 지겠느냐라는 뜻으로 묻고 계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바라는 소원이 있다면 그 소원에 합당한 과정이 있습니다.
그리고 향하는 길이 있고 노력이 있습니다. 지불해야 할 엄청난 대가가 있다는 말입니다. 그저 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뜻을 준행함에 있어서 지름길은 절대로 없습니다. 그만한 수고, 그만한 과정이 반드시 있고 이것을 거쳐야 합니다. 만약 중요한 졸업장을 거저 준다면 받겠습니까? 높은 지위를 거저 준다면 내가 그 자리에 앉을 수 있는 것입니까? 과정이 필요합니다. 요행은 없습니다.
우리말에 불한당이라는 말이 있는데 땀을 흘리지 않는 사람입니다.
땀 흘림이 없이 무엇을 취했다고 한다면 그 자체가 죄입니다. 그러므로 공짜는 죄입니다. 이것이 결코 복이 아닙니다. 우리는 너무 사행심을 가지고 있으며 요행을 바랍니다. 너무 결과만을 생각합니다. 결과보다 과정이 더 중요합니다. 모로 가도 서울만 가면 된다고 말하는데 아닙니다. 서울은 못 가도, 시간이 걸려도 바로 가야 합니다. 바른 길로 통해 가고 결과에 대해서는 하나님께서 하실 일입니다. 우리는 바른 목적으로 바른 과정을 따라서 가다가 어디서 쓰러지든지 그 다음 일은 하나님께서 하실 것입니다.
결과가 방법을 정당화하는 것은 공산주의 슬로건입니다. 결과가 중요한 것이 아니고 방법이 중요한 것이며, 과정이 중요한 것입니다. 히브리 사람들은 자녀들에게 일을 가르치지 않는 것을 도적질을 가르치는 것과 같다고 말합니다. 심각한 말입니다. 벌어서 먹는 법을 가르치지 않으면, 얻어 먹어야 할 것이니, 남의 것을 먹어야 하지 않습니까? 그러니 도적질하는 법을 가르치는 것이나 마찬가지가 된다는 것입니다.
빌립보서 1:29에 보면 "그를 위하여 고난도 받게 하심이라." 로마서 8:17에 보면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될 것이니라." 고난은 함께 하지 않고, 영광만 함께 받겠다는 것은 불한당의 마음입니다. 우리는 축복이 거저 떨어지는 것으로 생각하기 쉽습니다. 마치 도박장에서 돈을 버는 것과 같이 그런 요행을 기다리는 축복관이 있습니다. 구약에서 분명히 말씀하시기를 수고한 대로 먹을 것이라 하셨습니다. 이것이 축복입니다.
세 번째로 예수님께서 "예비한 자가 받을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지명한 자가 받게 될 것입니다. "사람이 마음으로 자기의 깊을 계획할지라도 그 걸음을 인도하는 자는 여호와시니라" (잠 16:9).
하나님이 인도하시고 축복하셔야 합니다. 내 노력, 내 인내, 내 희생, 내 수고가 있어도 그 위에 또 하나, 하나님의 축복이 있고서야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할 일을 다하고 그 다음에 되어지는 일에 대해서는 그대로 받아들일 줄 아는 겸손히 있어야 합니다.
여기서 한 가지 생각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이 어머니가 자기 아들을 좌․우편에 앉게 해 달라고 교섭을 하고 있는데 이 말을 들은 열 제자가 두 형제에 대하여 분히 여겼습니다(24절). 왜 분히 여겼습니까? 어이없게 공짜를 바라기 때문입니다. 출세라고 하는 것 그렇게 좋은 것만은 아닙니다. 질투하는 자가 많습니다. 높이 붙은 가지가 바람을 많이 맞습니다. 정상은 고달프며 고독합니다. 높은 명예를 가지면 친구를 잃게 되고 외로운 길을 가야 하는 것입니다. 이런 사실을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출세를 너무 좋아하지 말고 우리가 진정으로 구해야 하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 깊이 생각했으면 합니다.
네 번째로 예수님은 말씀하기시를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섬기는 자가 되라. 먼저 되고자 하는 자는 종이 되라"고 하셨습니다. 먼저 종이 되고, 먼저 수고하고, 먼저 희생하고 그리고 우편, 좌편에 앉았다면 누가 감히 질투를 하며 분히 여기겠습니까? 당연히 그래야지요, 그러나 수고없이 어머니가 청탁해서 좌우에 앉는다면 문제가 많은 것입니다. 먼저 종이 되고, 먼저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펜실바니아 대학에서는 재미있는 일화가 전해지고 있습니다. 방학이 끝나고 개학이 되면 많은 학생들이 기숙사에 와서 방을 정하게 됩니다. 그러면 먼저 온 사람들은 언제나 좋은 방을 선택하게 되는데, 계단에서 멀고, 햇빛이 잘 들고, 조용한 방을 원합니다. 그런데 어느 학기에 맨 먼저 온 학생이 좋은 방은 다 제쳐놓고 계단 밑에 있는 여건이 나쁜 방을 원했습니다. 총무처장은 수십년 이 자리에 앉아 있었지만 저마다 좋은 방을 갖겠다고 야단이었는데 이 학생만은 예외였습니다. 이 소식을 총장이 듣고 그 학생의 이름을 수첩에 기록해 놓았습니다. 얼마 후에 이 학생은 그 대학의 총장이 되었더랍니다.
다른 사람 다 가지고 남은 것, 다른 사람이 다 싫어하여 남은 것을 내가 갖겠습니다. 다른 사람이 원하지 않은 일, 내가 하겠습니다. 이 마음 얼마나 아름답고 중요합니까? 다른 사람 다 제쳐놓고 내가 제일 먼저 좋은 것, 높은 자리 하겠다고 하는 사람들 다시 생각해야 합니다. 먼저 섬기고 먼저 종이 되라, 섬김에 있어서, 낮아짐에 있어서, 겸손에 있어서, 봉사에 있어서 첫째가 될 수 없습니까? 인자는 섬기러 왔노라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이제 우리는 무엇을 구하고 있습니까? 첫째 되고자 하는 욕망을 버리지는 맙시다.
그러나 다스릴 줄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첫째로 봉사하고, 첫째로 겸손하고, 첫째로 희생하고, 순종할 때 주께서 당신을 높이실 것입니다. 주께서 당신을 영화롭게 하실 것입니다.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기도 : 은혜로우신 아버지, 오늘도 우리가 가진 욕망을 그대로 가지고 주님 앞에 섰습니다. 간구하옵는 것은 우리의 마음과 뜻을 주장하사 주님께서 받으실 만한 제물이 되고 주님께서 기뻐하실 수 있는 바른 소원을 두게 하시옵소서. 내가 구하는 바가 무엇인지 알게 하시고 또 그것을 위하여 내가 지불해야 될 희생이 무엇인지 알게 하시고 그리스도와 함께 고난을 받으며 그리스도의 거룩한 뜻을 위해서 희생함에 있어서 섬김에 있어서 첫째가 되고 먼저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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