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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실향민의 믿음(히브리서 11장 13절~17절)

by 【고동엽】 2023. 3. 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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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실향민의 믿음(히브리서 11장 13절~17절)


이 사람들은 다 믿음을 따라 죽었으며 약속을 받지 못하였으되 그것들을 멀리서 보고 환영하며 또 땅에서는 외국인과 나그네로라 증거하였으니 이같이 말하는 자들은 본향 찾는 것을 나타냄이라 저희가 나온 바 본향을 생각하였더면 돌아갈 기회가 있었으려니와 저희가 이제는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니 곧 하늘에 있는 것이라 그러므로 하나님이 저희 하나님이라 일컬음 받으심을 부끄러워 아니하시고 저희를 위하여 한 성을 예비하셨느니라 아브라함은 시험을 받을 때에 믿음으로 이삭을 드렸으니 저는 약속을 받은 자로되 그 독생자를 드렸느니라


제가 몇 년 전에 평양을 다녀온 적이 있습니다. 그 때, 중국 북경에서 평양으로 가는 비행기를 탔었는데 그 안에서 저는 백발이 성성한 노인 한 분을 만났습니다. 어디 가느냐고 물으니 고향에 간다고 합니다. 그 분은 캐나다 국적을 가진 한국 교포였습니다. 고향에는 4형제의 자기 자식들이 있다고 합니다. 그 외에는 아무 말도 없었습니다.
일주일 후, 평양에서 다시 북경으로 돌아올 때에 공교롭게도 같은 비행기 안에서 그 분을 또 만났습니다. 제가 말문을 열어 다음과 같은 대화가 오갔습니다.
"고향에 갔었습니까?"
"갔더랬습니다."
"자녀들은 만났습니까?"
"다 만났습니다."
"모두 평안히들 있습디까?"
"그저 그렇게 있습디다."
그리고는 잠시, 그 노인은 아무 말이 없다가 이런 말을 합니다.
"다시는 고향에 가지 않으렵니다."
"왜요?"
"산천은 같으나 사람들이 다 변했습니다. 인심이 변했습니다. 다시는 오지 않으렵니다."
그리고 주루룩 눈물을 흘립니다. 한 실향민의 눈물이었습니다. 여러분, 고향이라는 것이 어찌 땅이겠습니까? 어찌 산천의 모습이겠습니까? 문제는 사람입니다. 사람이 같으나 사람이 변하고, 사람의 뜻이 변할 때에 그곳은 고향일 수 없는 것입니다.
특별히 동물 중에 귀소본능(歸巢本能)을 가진 동물이 많이 있습니다. 말은 들었지만 실제로 그런 동물을 보니까, 한갓 미물이라도 우러러보게 돼요. 무슨 말인고 하니, 언젠가 제가 알래스카에 갔다가 우연찮게 연어의 생태를 구경한 적이 있습니다. 연어는 제가 태어난 곳에서 넓은 바다로 나가 3년 동안을 지낸답니다. 바다에서 25파운드나 되는 큰 물고기로 자란 연어는 다시 제가 태어난 곳으로 돌아옵니다. 그런데 그것이 단순히 바다에서만 왔다갔다하는 것이 아닙니다. 바다에서 강으로, 강에서 높은 산에 자리한 폭포를 거슬러 올라가 시내로 다시 제가 태어난 연못까지 올라가야 된다는 말입니다. 저는 30미터나 되는 폭포를 거슬러 올라가는 연어를 보았습니다. 수많은 연어가 세찬 물줄기를 거슬러 올라가서 폭포 위로 뛰어오르는 광경을 볼 때, 고향 찾아가는 연어의 그 모습이 참으로 대단하다 싶었습니다. 그러니까 떨어지는 물보다 더 빨리 올라간다는 얘기입니다. 수많은 연어들이 몇십 번이고 그렇게 뛰어오릅니다. 그런데 못된 사람들은 폭포 밑에서 올라가려고 모여드는 물고기들을 낚아챕니다. 폭포 위에서는 곰들이 잡아먹습니다. 그래도 연어는 일심으로 고향을 찾아갑니다. 거기에 가서 죽습니다. 절대본능이예요.
오늘의 본문은 우리 인생을 외국인과 나그네에 비유하여 말씀하고 있습니다. 외국인이라는 말을 헬라어로 '크세노이'라고 하는데 이는 낯선 사람이라는 말입니다. 또 본국 사람들에게 좀 이상하게 보이는 사람, 경멸의 대상이 되고 있는 사람, 언어, 풍속, 생활 양식이 달라서 이방시되고 끝까지 이질적으로 취급되고 멸시받는 사람을 통틀어 본문에서는 외국인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또한 나그네라는 말을 헬라어로 '파레피데모스'라고 하는데 이는 임시로 거주하는 자를 말합니다. 자기는 자기대로 고향이 따로 있습니다. 그런데 어떤 이유로든지 간에 얼마동안 한 곳에 머물러 있습니다. 그런고로 이 현재라는 것은, 이 현실이라는 것은 항상 임시적이라는 것이지요. 그렇게 사는 것이 인간입니다. 그런고로 우리는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엄격한 뜻에서 우리 모두가 나그네입니다. 미국으로, 캐나다로, 브라질로 이민을 가야만 나그네인 것이 아닙니다. 고향에 살아도 나그네입니다. 사람이 바뀌니까요. 인심이 변하니까요. 세상이 변하니까요.
지금 길에 한번 나가 서보십시오. 많은 차들이 지나갑니다. 나는 가만히 서 있어도 그실 서 있는 것이 아닙니다. 모든 사람이 가는 방향에 내가 지금 반대로 가고 있는 현상인 것입니다. 그런고로 진정한 의미에서의 속도의 정지라고 하는 것은, 같은 차를 타고 똑같이 달려가야 성립합니다. 똑같은 속도로 달려가면 서로 정지상태가 됩니다.
내가 가만히 서 있다고 정지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여러분도 다 아시지 않습니까? 젊은 세대가 공부를 하고, 새로운 유행어가 생기고, 새로운 유행이 있고, 새 풍속이 생겨납니다. 이것을 따라가면서 우리가 같이 공부를 해야 합니다. 요새로 말하면 컴퓨터다, 자동차 운전 면허다, 비행기 면허다 해 가지고 따라갑니다. 젊은 사람들은 계속 그렇게 나가는데 이런, 우리는 지쳐서 도중 하차합니다. 이제는 더 따라갈 재주가 없습니다. 그러면 벌써 이방인입니다. 이제는 말이 통하지 않고, 생각이 통하지 않고, 사상이 통하지 않는, 그야말로 불통의 인간이 됩니다. 남는 것은 고집밖에 없어요. 이것이 인간입니다. 그런고로 정지란 없습니다. 안정이란 없는 것입니다. 안정이라는 개념을 정적으로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동적으로 이해해야 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런데 여기에 역부족합니다. 그래서 인생은, 가만히 있어도 나그네입니다. 결국은 낯선 자로 바뀝니다. 외국인으로 바뀝니다. 태어난 고향에서 일생을 살아도 나그네입니다. 어느 사이에 이방인이 되고 맙니다. 이 점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종교개혁자 칼뱅은 사도신경의 "영원히 사는 것을 믿사옵나이다"라고 하는 신앙고백을 제네바 교리에서 이렇게 해석합니다. '이 진술은 우리의 행복이 이 세상에 있지 않고, 우리가 나그네처럼 이 낯선 땅을 여행하고 있다는 것을 지시하고 있다. 우리는 여행하고 있다--이 진술이 사도신경에 있는 것은 우리가 이 지상의 것을 무시하고 거기에 집착하지 않도록 우리를 가르치기 위해서다'--우리는 나그네다, 행복은 여기에 있는 것이 아니다, 이 지상의 것에 집착하지 말라, 하는 뜻이 하나로 모여서 "영원히 사는 것을 믿사옵나이다"라는 고백으로 나타나고 있다는 말입니다. 여러분은 사도신경을 고백할 때에 어떤 뜻으로 고백합니까? "영원히 사는 것을 믿사옵나이다"--그 때마다 우리는 이 땅에 집착하는 생각을 다시 버려야 할 것입니다.
미국의 제6대 대통령을 지냈던 존 애덤스는, 늘그막에 종종 지팡이에 몸을 의지하고 공원을 산책하곤 했습니다. 어느 날, 그를 잘 아는 어떤 사람이 "안녕하십니까?"하고 인사를 했습니다. 존 애덤스는 대답을 합니다. "예, 안녕합니다. 건강합니다. 그런데 집이 다 낡아서 지붕은 파손되고, 벽은 떨어지고 바람에 흔들려서 받침대까지 세웠습니다. 너무나 집이 낡아버려서 곧 이사를 할까 합니다." 이 사람이 가만히 생각해보니, 존 애덤스는 대통령을 지낸 분이요 가정형편도 넉넉한 분인데 집이 낡아서 이사를 가야 한다니 도대체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물어봅니다. "아니, 각하.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집이 낡아서 이사를 가야 하시다니요?" 존 애덤스는 "허, 이 사람 모르시는구만. 날 좀 보구려" 하면서 대머리가 다 된 자기 머리를 가리킵니다. "이것 보라구. 지붕이 다 낡았지 않았소?" 또 자기 늑골을 보이면서 말을 합니다. "이것도 보라구. 이렇게 바람벽도 다 낡아서 이제 바람이란 바람은 다 새게 되었어요. 아예 바람에 흔들려 쓰러질 지경이라 이렇게 지팡이에 겨우 의지하고 있지 않소? 받침대로 지탱하는 낡은 집이니 곧 이사가야지 뭐."
여러분, 너무 집착하지 마세요. 어차피 낡습니다. 별의별 방법을 다 써서 노력해봐도 소용이 없습니다. 집은 낡게 되어 있고, 이제는 이사갈 때가 가까워진 것입니다. 그런고로 우리는 여행하는 자입니다.
우리는 이 땅에 집착하지 말아야 합니다. 나름의 모든 고민, 모든 이야기가 이 집착성을 버리지 못하는 데서 비롯되는 것입니다.
독일의 염세주의 철학자 쇼펜하우어가 공원 의자에 혼자 앉아서 깊은 생각에 잠겼습니다. 어느덧 해는 뉘엿뉘엿 기울고 공원은 텅 비었습니다. 공원을 청소하는 공원지기가 지나가다가 그를 보고 말했습니다. "여보시오, 신사양반. 도대체 당신은 어디에서 왔길래 해가 지는데도 집으로 돌아갈 생각을 하지 않는 거요?" 이 퉁명스러운 질문에 쇼펜하우어는 이렇게 대답합니다. "바로 그것이오! 내가 어디서 왔는지, 어디로 가는지, 그것을 고민하고 있는 중이오."
여러분은 인생의 문제를 얼마나 깊이 생각해보았습니까? 가정 문제, 경제 문제, 명예니 뭐니…… 이런저런 문제가 다 복잡한 것 같아도 정말로 고민해야 될 문제에 깊이 집착하게 되면, 사실 오늘 우리가 당면한 문제들은 그실 고민할만한 것들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고향--우리는 돌아갈 고향이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떠나온 고향이 아닙니다. 내가 태어난 고향도 아닙니다. 더 나은 본향입니다. 떠나온 고향을 생각했더라면 돌아갈 기회가 있었으려니와, 돌아갈 곳은 그 고향이 아닙니다. 이것이 본문말씀의 내용입니다. 여러분도 잘 아시는 대로, 믿음의 사람들, 믿음의 조상들은 다 고향을 떠나 살았습니다. 아브라함이 그렇고, 이삭이 그렇고, 야곱이 그렇고, 요셉과 모세와 룻과 에스더, 다니엘…… 다 고향을 떠나 살았습니다. 고향을 떠나 방황하는 생으로, 그렇게 일생을 살았습니다. 아니, 하나님께서 그렇게 방황하게 하셨습니다. 심지어는 아브라함에게 고향을 떠나라고 명령하십니다. 다 무엇을 의미하는 것입니까? 돌아갈 참 고향이 있음을 말씀하는 것이요, 약속의 땅이 있음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오늘이라고 하는 이 현실에 집착하지 말라는 의미입니다. 외국인과 나그네의 삶을 하나님께서 원하시고 계십니다. 이 타향 생활이 당연하다는 것입니다. 그런고로 땅에서 더 기대할 것 없습니다. 참 고향이 있습니다. 참 고향을 생각해야 할 것입니다.
어느 보험회사 직원이 넉넉하게 사는 어떤 집을 찾아가서 집주인에게 생명보험에 들어달라고 부탁을 했습니다. 꼭 생명보험에 들어야 될 이유를 이것저것 설명하니까 주인이 대답합니다. "알았습니다. 내가 당신 말대로 생명보험에 들지요. 그 대신에 당신은 내가 말하는 참 보험에 들어주시오." 참 보험이라는 말에 보험회사 직원은 그게 무슨 뜻이냐고 물었습니다. 보험회사에서 일하시는 분들에게는 참으로 미안한 말입니다 마는, 생명보험은 그 보험에 든 사람하고는 아무 관계가 없는 것입니다. 주인은 이렇게 설명을 합니다. "세상에 생명보험이라는 게 어디 있습니까? 그것 들면 안 죽는다는 것입니까? 죽어서 다른 사람에게 돌아가는 돈인데 그것이 어떻게 생명보험입니까? 참 보험은 하늘에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여 보험회사 직원에게 전도했다는 이야깁니다. 여러분, 참된 보장이 어디에 있습니까? 참 고향이 어디에 있습니까? 이 미래의 문제 해결 없이는 현재도 없는 것입니다. 현재에 집착하기 때문에 현재도 없고 미래도 없는 것입니다. 오히려 현재를 잊어버리고 저 먼 미래를 생각하는 자가 비로소 미래도 얻고 현재도 얻을 수 있는 것입니다.
목회 하면서 별의별 일들을 다 경험합니다. 일전에 칠십이 훨씬 넘은 두 노인 부부가 이혼하겠다며 제게 와서 상담한 적이 있습니다. 도저히 더 못살겠다고 합니다. 그래서 제가 "앞으로 얼마 안 남았는데 그냥 살지 뭘 그러십니까?" 하니까 그 대답이 또 명답입니다. "얼마 안 남았기 때문에 남은 시간이라도 제대로 살아야겠습니다. 이 사람과의 생활이 지긋지긋해서, 이제라도 이혼하고 바로 살아야겠습니다." "정 그렇다면 할 수 없지요. 이혼하십시오!" 그러고는 그 부부에게 한마디씩 물어보았습니다. 먼저 아내에게 이렇게 물었습니다. "당신이 그렇게도 싫어하는 남편이 이제 한 달 후에 죽는다고 합시다. 그러면 당신은 어떻게 하겠습니까?" "보기 싫어도 한 달 동안 이 영감태기와 그저 살아줘야겠지요." "그래요? 딱 한 달만 더 같이 사세요." 그리고 남편에게 물어보았습니다. "당신이 그렇게도 보기 싫다는 아내가 앞으로 한 달밖에 살지 못한다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아, 기왕 살아왔는데 한 달이야 더 살아주지요, 뭐." "그렇다면 한 달만 더 같이 사세요." 두 부부, 결국은 그 위기를 넘기고 그럭저럭 살아갑니다. 여러분, 왜 문제가 복잡합니까? 마치 영원히 살 것처럼, 이 땅에 오래오래 살 것처럼 착각하기 때문입니다. 한 달을 살는지, 하루를 살는지 누가 압니까? 너무 그렇게 이 땅의 생활에 자신을 가지지 마세요. 언제 어느 시간에 끝날는지 알 수 없는 그런 시간을 우리가 살고 있는 것입니다.
더 나은 본향이 있다고 성경은 말씀합니다.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곳입니다. 그곳은 지금의 우리 나라처럼 휴전선이 있는 것도 아니고 국경이 있는 것도 아닙니다. 아브라함은 자기가 떠나온 그 고향에 돌아가려고 했으면 얼마든지 갈 수 있었지만 안 돌아갔습니다. 더 나은 본향, 하늘나라를 바라보며 평생을 살았습니다. 그곳은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곳이요, 주님이 계신 곳입니다. 주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러 가노니……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요 14:2,3)"-----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약속이 이것이요, 주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하신 일이 바로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그런고로 우리는 주님을 만납니다. 그곳에서 주님과 함께 할 것입니다. 오직 은혜에 속한 사람, 오직 그리스도만 자랑하는 사람, 오직 그리스도로 옷 입은 사람은 그 속에서 주님과 함께 할 것입니다. 잊지 말 것입니다.
소유 양식에 의하여 사는 사람은 모든 것이 실패로 끝날 것입니다. 그러나 존재 양식에 의하여 사는 사람은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고, 그리스도와 함께 합니다. 존재 양식에 의하여 사는 사람에게 이 약속은 언제나 살아 있는 것입니다. 미래는 그리스도께서 보장하십니다.
도마가 주님께 여쭈었습니다. "주여 어디로 가시는지 우리가 알지 못하거늘 그 길을 어찌 알겠삽나이까(요 14:5)." 주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 14:6)." 그런고로 우리는 주님께서 '내가 곧 그 길이요, 그 생명이다'하신 이 약속과 이 보장을 오늘도 믿고 살아가야 할 것입니다. 또한 현재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의 약속이 있는 현실입니다. 오늘의 본문에 나타난 대로, 믿음의 조상들은 약속을 땅에서 받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그 약속은 하늘에서 받을 것입니다. 그리고 현재를 사는 이 세상이 하나님의 약속이 있는 현실이요 process입니다. 약속이 그 과정에 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여러분, 나는 이제 무엇을 생각해야 합니까? 나는 이제 무엇을 목적으로 삼고 살아가야 합니까? 목적을 재조정해야 하겠습니다. 다가오는 소망의 세계를 바라보며 나는 이제 무엇을 서둘러야 하는 것입니까? 어차피 다 가질 것도 못되고, 다 할 수 있는 일도 아닙니다. 사람은 가지고 싶은 것을 다 가질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해야 할 일은 해야 합니다. 어떤 자세로 살아가야 합니까? 과거로 다시 돌아갈 길은 없습니다. 막연한 미래를 절망하는 것이 아닙니다. 문제는 참 고향입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시고 약속해주신 참 고향--여기에 초점을 맞추어야 하겠습니다. 그렇게 오늘을 살아가야 할 것입니다.
우리의 믿음의 선배에 김정준 목사님이 계십니다. 신학자로 신학대학 교수, 학장도 역임했던 분인데 1981년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개인적으로 제가 그 분에게 사랑을 많이 받았습니다. 생전에 "내가 죽는날 '저 좋은 낙원 이르니'라는 찬송을 끝까지 불러주시오. 요한계시록 20장 이하를 끝까지 읽어주시오. 그리고 나의 묘비에는 '임마누엘'이라는 단 한마디만을 새겨주시오"라고 하셨습니다. 그 분이 임종 직전에 지어놓은「내가 죽는 날」이라는 시 한편을 소개하고자 합니다.
내가 죽는 날은 비가와도 좋다. 그것은 나의 죽음을 상징하는 슬픔의 눈물이 아니라 예수의 보혈로 내 죄 씻음을 받는 감격의 눈물이기 까닭에. 내가 죽는 날은 바람이 불어도 좋다. 그것은 내 모든 이 세상 시름을 없이하고 하늘나라로 올라가는 내 길을 준비함이기 때문에.
내가 죽는 날은 눈이 부시도록 햇빛이 비치어도 좋다. 그것은 영광의 주님 품안에 안긴 그 얼굴의 광채를 보여줌이라.
내가 죽는 시간은 밤이 되어도 좋다. 캄캄한 하늘이 내 죽음이라면, 저기 빛나는 별의 광채는 새 하늘에 옮겨진 내 눈동자이어라.
오! 내가 죽는 날, 나를 완전히 주님의 것으로 부르시는 날, 나는 이 날이 오기를 기다리노라.
다만 주님의 뜻이라면 이 순간에라도 닥쳐오기를, 번개와 같이 닥쳐와 번개와 함께 사라지기를.
그 다음은 내게 묻지 말아다오. 내가 옮겨진 그 나라에서만 내 소식 알 수 있을 터이니. 내 얼굴 볼 수 있을 터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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