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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계 대책을 위한 목사의 이중직 허락 연구” 건

by 【고동엽】 2021. 10. 20.
“생계 대책을 위한 목사의 이중직 허락 연구” 건


고려신학대학원 교수회

I. 목사 이중직의 현실과 문제


코로나19 전염병 사태로 교회 현장 예배의 횟수와 성도의 출석이 급격히 줄어든 가운데 미자립교회들을 중심으로 교회 임대료조차 내지 못하는 교회들이 속출하고 있다. 이와 더불어 미자립교회 목회자들의 경제적 어려움은 한층 가중되었고, 그에 대한 경제적 대책의 일환으로 목회직 외에 사회의 일반 직업이나 일을 선택하는 목회자들이 점점 늘어나고 있다. 목사 이중직을 특집으로 다루었던 『목회와 신학』(2014년 5월호)에 따르면 이미 많은 목회자들이 택시기사, 대리운전, 우유배달, 학원 강사, 웹 디자인, 정수기 판매 및 서비스 등에 종사하면서 생계를 유지하고 있다고 한다. 물론 여기에는 물류센터나 건설현장의 막노동도 포함된다.
당시 『목회와 신학』의 설문조사 결과에 따르면 경제적인 이유에서라면 목회자가 교회사역 이외에 경제활동을 해도 좋다고 찬성하는 이들이 52.4%, 적극 찬성하는 이들이 21.5%에 이른다. 이와는 별도로 2016년, 949명의 부교역자들을 대상으로 조사한 기윤실의 조사 및 분석 결과에 따르면, “37.5%는 목회 외에 다른 일을 한 적이 있거나 하고 있다고 답했고, 20.4%는 향후 [일]할 생각이 있다고 말했다”(연합뉴스 2016. 1. 19일자). 더군다나 2020년 현재 대법원 지정 최저생계비가 4인 가족 기준 월 2,849,504원임을 감안할 때, 월 사례비가 거기에 이르지 못하는 다수의 목회자들에 대하여 이중직 금지 조항이 옳은지 질문하는 목회자들과 신학자들이 점점 많아지고 있다.
한편 합신 교단의 신학연구위원회는 2019년 총회에서 ‘겸직’이라는 용어를 사용함으로써 이중직이 암시하는 동등성 대신 목회 직무의 중심성을 강조하려 하였다. 그리고 ‘겸직’을 여섯 가지 유형으로 나누어 “생계형·자비량형·선교형” 겸직은 허락하고, “신분 유지형, 소득 증대형, 후원형”을 금하려 하였으나, ‘겸직’ 용어에 대한 불확실성 때문에 1년을 두고 더 연구하기로 가결한 바 있다(뉴스앤조이 2019. 9. 26일자).
법적으로 한국 대부분의 교단에서는 목사 이중직이 허용되지 않는다. 그 이유는 목사로 하여금 복음전파와 목회에만 전념하도록 하기 위해서이다. 예외적으로 감리교의 경우에는 2016년에 처음으로, 1년 예산 3,500만원 이하의 미자립교회 목회자에 대하여 해당 연회 감독이 “직종, 근무지, 근무시간” 등을 살펴 허락함으로써 이중직을 제한적으로 허용하였다. 그렇다면 코로나19마저 겹쳐 임지 부족, 재정 부족, 교인 부족의 현상이 교회들마다 가중될 것으로 예상되는 한국 교회의 현실에서, 목사가 전적으로 목회에 헌신할 수 있을 만큼 교회의 재정 자립이 이루어지지 않는 경우가 많아, 앞으로는 목회자의 50% 정도가 이중직을 가져야만 기본적인 생계를 유지할 할 수 있게 될 것이라는 어두운 예측마저 등장하고 있다. 이에 고려신학대학원 교수회가 총회 신학위원회의 위임을 받아 목사 직분의 의미와 언약에 대한 성경과 개혁신학의 관점에서 목사의 이중직에 대하여 연구한 결과는 다음과 같다.






II. 목사 생계문제에 대한 신학적 고려


1. 구약의 제사장·레위인과 십일조
우리 믿는 자들의 대제사장이 되시며(히3;1) 우리를 위하여 단번에 영원한 속죄의 제사를 드리신(히9:28) 예수 그리스도의 완전한 제사로 말미암아(히10:11-14) 하나님은 교회를 위하여 다시 사제가 아닌 목사를 세우셨다. 그러나 구약의 제사장들과 레위인들이 앞서 백성들을 위해 하나님을 섬겼던 모습을 보면 오늘날 목회자들이 생계에 필요한 것들을 어떻게 공급받을지에 대하여 중요한 교훈을 받을 수 있다. 제사장의 직분을 위임받은 아론과 그의 아들들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께 드리는 제물 가운데서 분깃을 얻었고(출29:28), 제사장의 가족과 종들도 구별된 성물을 먹을 수 있었다(레22:11). 회막에서 일한 레위인들에게는 이스라엘의 십일조가 주어졌고(민18:21, 31), 레위인들이 드리는 십일조의 십일조는 거제로 여호와께 드려졌으며(민18:26), 여호와께 드려진 거제물은 제사장 아론의 몫이 되었다(민18:28).
약속의 땅에 들어간 이스라엘 자손들이 십일조, 거제, 서원물을 가지고 왔을 때는 따로 기업이 없었던 레위인을 반드시 참여시켜야 했으며 그들을 저버리지 않아야 하는 의무를 받았다(신12:12, 19). 레위인들의 생계를 돌보는 일은 이스라엘 자손들이 칠칠절(신16:11), 초막절(신16:14)을 지킬 때, 그리고 셋째 해 십일조(신26:13)를 낸 후에도 반드시 기억해야 할 내용이었다.
바벨론 포로 이후 이스라엘 자손들의 소홀함으로 레위인들이 자신들의 몫을 받지 못했을 때, 그들은 성전의 직무를 행하다 멈추고 생계를 위하여 각각 자기의 밭으로 도망하였다(느13:10). 이에 느헤미야는 그 상황을 방치한 백성의 지도자인 민장들을 꾸짖고, 하나님의 전이 버린 바 된 것을 책망하며 십일조를 모아 들여 레위인들을 다시 제자리에 세웠다(느13:11). 유다 온 지파가 곡식과 새포도주와 기름의 십일조를 가져다가 곳간에 들임으로 레위인들과 제사장들의 생계가 해결되고, 이로써 성전 직무도 바르게 수행될 수 있었다. 목회자의 생계와 이중직의 문제는 이러한 구약의 큰 맥락 속에서 이해되어야 하며, 어려운 환경에서라도 가능한 한 교회가 목회자의 생계를 책임지도록 해야 한다. 비록 교회가 어렵다고 해도 목회자가 직업 현장으로 떠나도록 허용하기 전에 교인들이 먼저 바른 십일조를 회복함으로써 목회자의 생계 문제가 해소될 수 있도록 돕는 것이 구약 성경이 가르치는 교훈이다.






2. 목사 직분의 의미
승리하셔서 부활, 승천하신 왕이신 우리 주님은 자신이 성취하신 것을 교회에 선물로 주신다 (엡 4:6-10). 무엇보다도 이 일을 목사에게 맡기시고 또한 직분을 수행할 수 있는 은혜를 주신다(엡 4:11-12). 우리 주님께서는 하나님의 집인 교회를 세우시는 일을 친히 아들로서 하시되(히 3:6) 사도들을 사용하셔서 (마16:18; 요20:15-17), 그리고 사도들의 뒤를 이은 동역자들을 통해서(딤전 3:15-16) 이루신다. 칼빈은 교회안에서 성령과 의와 영생의 사역이 바로 복음의 사역자들을 통해서 이루어지고 있기 때문에 이 보다도 더 존귀하고 영광스러운 일은 없다고 단언한다(기독교강요 IV. 3. 3). 그는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파하고 성례를 행하는 목사야말로 고귀하고 영광스러운 직분이라 높이 평가하였다. 목회자의 복음 선포와 성례의 집행이 교회만의 은덕을 나누어 주는 것인 만큼(기독교강요 IV. 1. 22) 교회는 목사직에 의존되어 있다. 칼빈에 따르면 예수님께서 말씀으로부터 비롯된 목사의 복음 설교를 가장 가치 있는 것으로 인정하셨기에(기독교강요 II. 9. 5) 가톨릭의 사제직이 아닌 교회의 목사직이 회복된 것이다.
그렇다면 목사직분의 정체성은 오직 주님께서 맡겨주신 임무에 전적으로 의존하며 목사 자신의 어떤 권세에 기초하지 않는다. 목사는 주님이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면서 보여주셨고 십자가의 죽음을 통해서 이루신 종의 모습을 따라서 기꺼이 모든 교인들의 종이 되어야 한다(고전 9:19). 목사는 복음을 전하면서 그 행위를 자랑할 수 없다. 복음 전파는 의무이며 마땅히 해야 하는 (부득불 해야 할) 일이다(고전 9:16). 목사는 값없는 은혜의 복음을 값없이 전해야 한다(고전 9:18).
반면에 교회는 목사직분이 교회를 위해서 하나님께서 주신 가장 존귀하고 영광스러운 것으로 감사해야 한다. 무엇보다도 우리 주님께서는 지금도 목사를 통해서 하늘의 복음을 우리에게 주시기 때문이다. 이런 의미로 칼빈은 목사직이 그리스도를 우리에게 보여주는 것이라고 하였다(기독교강요 IV. 3. 1). 승천하셔서 지금도 살아계신 주님의 선물과 복음을 소중하게 생각한다면 교회는 그만큼 목사직분 또한 소중하게 여겨야 한다.
목사 생계 문제는 목사직분에 대한 이해와 직접적으로 연결되어 있다. 목사는 값없이 주신 은혜의 복음을 전하고 하나님의 돌보심을 따라서 진리의 기둥과 터인 교회를 최선을 다해 목양해야 한다. 교회는 목사를 통해서 주어지는 그리스도와 그 분의 선물을 가장 존귀하고 영광스러운 것으로 여겨야 하며 이에 대한 표현으로서의 목사의 생활을 책임지는 일로 응답해야 한다. 따라서 목사 생계에 대한 문제는 단지 한 목사 개인의 먹고 사는 문제에만 제한해서 이해해서는 안된다. 그리스도와 그의 복음, 목사직분과 교인의 의무에서 나타나는 언약적 삶을 구체적인 실현하는 것과 연관되어 있다. 이를 구체적으로 볼 수 있는 것이 바로 목사의 서약과 목사의 위임 때 교인들이 하는 서약이다.






3. 목사와 교인의 서약 그리고 목사의 생계
목사의 생계문제는 목사 위임식이 있는 예배에서 목사와 교인의 상호 서약을 통해서 구체화된다. 이 서약은 목사와 교인의 관계를 언약 안에서 이해하게 한다. 삼위 하나님이 주신 언약은 목사와 교인의 상호서약에서 우리의 언약으로 구체화된다. 따라서 목사의 생계문제는 삼위 하나님과 우리의 언약을 드러내는 목사와 교인의 언약관계의 실현속에서 이해해야 한다. 물론 교회가 목사를 위임할 수 없는 미자립 상태에 있을 수 있다. 그러나 목사 위임식을 하지 못한 미자립교회라 할지라도 그 정신은 목사 위임시의 상호 서약에 준해서 이해되어야 한다.
목사가 임직할 때 서약하며 서약의 내용 중 직무와 관계된 것들은 다음과 같다.




헌법적 규칙 제 2조 1. 서약
6) 어떤 핍박이나 반대를 당할지라도 인내하고 충심으로 복음의 진리를 보호하며 교회의 성결과 화평을 힘써 도모하여 근실히 사역하기로 서약합니까?
7) 신자이며 겸하여 목사가 될 것이므로 자기의 본분과 타인에 대한 의무와 직무에 대한 책임을 성실히 실행하여 복음을 영화롭게 하며 하나님께서 명하여 관리하게 하신 교회 앞에서 경건한 모범을 보이도록 서약합니까?






서약한 목사의 직무는 교회정치 41조에 서술되어 있다. 목사는 이 직무를 성실하고 최선을 다해야 수행하고 이에 집중하여 복음을 영화롭게 하고 하나님께서 돌보게 하신 교회를 관리해야 한다. 이렇게 서약한 목사는 위임 때 다시 이에 준하는 서약을 하며 그를 청빙하는 교회의 당회와 교인들은 위임 때 다음과 같이 서약한다.




헌법적규칙 제3조 (목사의 위임식) 1. 서약 (2) 교인 4)에서 교인들은 이렇게 서약한다. 여러분은 ( )씨를 본 교회 목사로 재직중에 한결같이 약속한 그 생활비를 어김없이 지급하며, 주의 도에 영광이 되고 목사에게 안위가 되도록 모든 요긴한 일에 도와주기로 서약합니까?




교회는 목사를 청빙하여 위임할 때 약속한 생활비와 모든 요긴한 일을 돕는 것에 서약하며 이를 성실히 수행해야 한다. 목사와 그 가정이 생활하는데 부족함이 없는 경제적 비용을 제공하는 의무를 진다.


목사의 서약과 청빙한 교인의 서약은 모두 하나님의 언약을 드러내는 구체적인 증거이다. 목사의 생계문제에 대한 원칙은 목사와 교인 사이의 이런 언약관계와 그 실행에 기초해야 한다. 동시에 목사는 교회의 재정적인 어려움, 교인들의 경제적인 핍절함 등을 잘 헤아릴 수 있어야 한다. 개혁주의 목회자이자 신학자인 리차드 벡스터가 『참된 목자』에서 지적하듯 목회자는 가정 심방을 잘 하고 성도들에 대한 헌신의 마음을 가져야 한다. 그러므로 교회의 재정과 자신의 생계에 어려움이 있다고 해서 자신의 서약과 교인들의 약속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언약관계를 쉽게 떠나서는 안된다.






4. 바울은 생계로 인한 목회자의 이중직을 옹호하는가?
바울은 고린도에서 아굴라, 브리스길라와 같은 일을 했으며 이 두 사람을 천막제작자(행 18:3)로 소개한다. 그리고 자신이 수고하여 손수 일을 했다는 사실을 거듭 밝힌다(고전 4:12, 살전 2:9). 이로 미루어 바울은 자신이 직접 천막제작의 일을 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바울이 자신의 생계 위협이라는 동기 때문에 이 일을 했다는 것은 분명하지 않다.
바울은 자신이 일하지 않을 권리가 있다는 점을 거듭 강조한다(고전 9:6ff). 그는 사도로서 이런 권세를 가졌다는 사실을 ‘곡식 밟아 떠는 소에게 망을 씌우지 말라’(신명기 25:4)는 구약의 말씀을 사도들의 권리에 대한 말씀으로 설명한다(고전 9:10). 또 다른 구약의 예로서 ‘성전의 일을 하는 사람이 성전에서 나는 것을 그리고 제단에서 섬기는 이들이 제단과 함께 나누는 것’의 예를 통해서 이를 보강한다(고전 9:13). 바울은 사도뿐 아니라 가르치는 장로 곧 지금의 목사의 경우를 언급할 때도 사도와 같이 ‘곡식 밟아 떠는 소에게 망을 씌우지 말라’는 말씀을 똑같이 적용한다(딤전 5:18). 바울은 복음 전하는 자로서, 사도로서 자신이 가졌던 먹고 마시는 권리가 가르치는 장로인 지금의 목사에게도 동일하게 적용되어야 한다고 본 것이다. 바울은 이런 권리를 주님의 명령으로 이해한다(고전 9:14, 복음 전하는 자는 복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그러나 바울은 이런 권세를 다 쓰지 않았다(고전 9:18). 그러면서 바울은 이 권세를 쓰는 문제는 사도가 자유로 자의적으로 선택할 수 있는 문제임을 분명히 한다(고전 9:17–19). 그는 고린도교회에게 폐를 끼치지 않기 위해서 매우 조심하였다고 고백한다(고후 11:9). 실제로 바울은 고린도교회에 직접 누를 끼치지 않았다(고후 11:9). 바울은 고린도에서 사역하면서 심지어 마게도냐에서 온 형제들에게는 도움을 받으면서도 고린도 교회로부터는 받지 않았다.
한편 바울 사도는 잘못된 종말론으로 일하지 않고 게으르게 살던 데살로니가 교인들에게 본을 보이기 위하여 주야로 일을 했다(살후3:8-9). 아무에게도 누를 끼치지 않기 위해 밤낮으로 일한 것은 바울에게 권리가 없기 때문이 아니라 일하는 본을 보이고, 일하기 싫어하는 자는 먹지도 말게 하라(살후3:10)는 교훈을 바르게 전하기 위하서였다. 복음 사역자로서 권세나 권리를 말하면서도 고린도교회와 데살로니가교회에 대해서 이런 권세를 쓰지 않은 동기는 다음과 같다.
1) 당시의 순회 철학자들이나 다른 예수, 다른 영, 다른 복음을 전하면서 생활의 수단을 당연한 것으로 요구하은 자들과의 구별하면서 자신의 참 사도됨을 간접적으로 옹호하기 위해서 (고후 11:4, 12-15절)
2) 값없이 주어지는 복음의 은혜의 성격을 드러내기 위해서(고전 9: 18, 고후 11: 7)
3) 고린도 교회 성도들을 위한 종의 모습을 보임으로써 더 많은 사람을 얻기 위해서(고전 9:19)
4) 잘못된 종말론을 바로잡고, 스스로 일하여 자기 양식을 먹도록 본을 보이기 위해서(살후3:9-12) 등으로 볼 수 있다.
이를 다시 요약하자면 바울은 생계를 위한 도움을 받는 일에서 다음과 같은 일관된 원칙을 가지고 있었다.
1) 목사에게 복음 전파는 본질적인 사명이며 양보할 수 없다
2) 목사는 사례를 받을 권리가 있지만, 복음과 바른 교훈을 위하여 사용하지 않을 수 있다
따라서 바울에게서 나타나는 일관성은 그리스도의 복음에 아무 장애가 없도록 하는 것이다(고전 9:12). 그는 사도로서 값없이 복음을 전했다. 그리고 그 복음의 열매인 교회로부터 생계를 위해 도움 받는 권세를 가졌다는 점을 분명히 하였다. 그러나 이 또한 오로지 복음 때문이다. 반면에 그는 복음이 방해 받지 않기 위해서 때로는 자유인의 자의로 권세를 사용하지 않았다.
바울의 모델은 목사의 생계를 위한 이중직에 대한 일관된 원칙을 제시해 줄 수 없는 면이 있다. 사도와 고린도 교회 사이에 존재하는 특수한 관계와 상황이 있기 때문이다. 오직 유일한 일관된 원칙은 복음이 막히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다. 복음 전파의 극대화가 바울의 경우를 통해서 확인할 수 있는 유일하게 일관된 동기이다. 따라서 바울이 제시한 원리를 따르자면 일반적인 경우에 있어서 목사가 복음 전파의 사명 곧, 목사의 직무에 최선을 다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복음이 교회안에 가장 강력하게 전해지며 이를 통해 교회를 세워가는 일을 온전하게 이루는 것이 가장 중요한 기준이 되어야 한다. 사도 바울이 말하고 있는 교훈의 핵심은 천막 제작자였던 자신처럼 이중직을 갖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목사가 복음 사역에 온전히 전념하는 것이다.






5. 교회의 구제사역과 목사 생계 보장
이런 일반적인 상황이 적용될 수 없는 목사가 존재하는 경우에는 노회와 총회는 구제라는 교회 고유의 임무로서 이 문제를 고려해야 할 것이다. 헌금은 여유있고 부한 교회가 작고 연약한 교회를 베푸는 것이 아니다. 마게도냐 교인들은 무리해서(고후 8:3) 예루살렘 교회를 돕는 프로젝트를 가동하였다. 헌금을 받는 자들 뿐 아니라 헌금을 보내는 것 자체가 은혜이다(고후 8:1). 헌금은 사실상 자신을 하나님께 바치는 것과 동일하다. 동시에 이들은 헌금을 통해서 사도들이 하는 하나님의 일 곧, 복음 전파에 동참한다는 의미로 교인들은 자신을 사도들에게 주었다(고후 8:5). 교회의 헌금은 복음 사역을 최대화하기 위해서 우선적으로 사용되어야 한다. 그리고 이런 헌금은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의 중요한 원리를 보여준다.
코로나19 사태 때 월세를 내지 못하는 교회들을 위해서 대신 월세를 내어주는 프로젝트를 시행했던 교회들이 있었다. 이 또한 복음 사역이 멈추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중요하다. 고신교회는 이런 프로젝트를 평상시에 가동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헌금의 가장 큰 목적은 교회를 세우고 복음 전파를 최대화하며 은혜의 복음의 원리를 드러내는 것이다. 따라서 목사의 생계 문제를 위해서 교회가 구제의 프로젝트를 가동하는 것은 헌금이 가진 본질적인 의미를 실현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이를 위해서 상회인 노회와 총회는 바른 인격과 신앙을 갖춘 좋은 목사 후보생을 선발, 교육하고 안수하는 일에 신중해야 할 뿐만 아니라, 소속 목사의 생계가 유지되기 어려운 경우들을 매우 구체적으로 조사할 필요가 있다. 더구나 목사 가족의 생계를 해결하는 일을 매우 긴급한 사업으로 간주해야 한다. 이를 위해 목사의 생계 문제에 대한 조사, 진단, 보고, 대책을 상시적으로 수행할 수 있는 기구를 노회와 총회에 두어야 한다.






6. 생계형 목사 이중직 허용과 5계명
목사와 그 가족의 생계 문제는 매우 실질적인 어려움을 동반한다. 목사는 교회의 직분자이지만 동시에 한 가정의 머리로서 생활의 중요한 책임을 감당해야 한다. 부모로서 자녀들을 보호하고 자녀들을 위해서 영육간에 필요한 모든 것을 공급해야 할 의무를 가진다(대교리문답 129문답, 5계명 해설).






7. 결론
어떤 여건에서든 목회자는 가능한 한 목회에 전념하여 복음 전도와 성례의 영광스런 목회 사역을 감당해야 한다. 비록 전도와 교회 성장이 어려운 시대를 만났지만 목회자로서 복음 전도에 최선을 다함으로써 가능한 한 교회가 조속히 자립하여 목회자의 기본적인 생활비를 안정적으로 공급할 수 있도록 함으로써, 목회자 자신의 가족생활이 가능할 수 있게 해야 한다. 목회자 가족들도 다른 그리스도인들과 마찬가지로 가능한 한 빚 없이 살아야 하며, 가난하게 살도록 방치되어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고후2:17; 히13:5).
이를 위하여 교회 회중은 있는 힘을 다해 목회자의 생활을 도움으로써 목회자가 전적으로 교회에 충성할 수 있는 여건을 마련하는 일에 우선순위를 두어야 한다. 하지만 목회자는 하나님의 백성들의 수고와 헌신을 결코 당연한 것으로 여기지 말고, 성실하고 책임감 있게, 더욱 헌신적으로 목회 사역에 열중해야 할 것이다. 이것은 목회직만 거룩하다는 성속 이원론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목회자의 부르심이 전적으로 교회에 대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혹시 예외적인 상황에서 이중직을 수행 중인 목회자들일 하더라도, 경제적 안정보다 교회의 안정에 더 역점을 둠으로써, 가능한 한 빠른 시간 안에 교회의 자립과 필요한 경제적 지원이 이루어질 수 있도록 더 많은 열정을 쏟아부어야 한다. 그렇게 해야만이 자칫 목사 이중직이 불러일으킬 수 있는 정체성의 흔들림을 극복하고, 영광스러운 목회 사역에 전념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조건들을 전제로 지금까지 논의한 목사 이중직에 대한 결론을 다음 세 가지로 요약할 수 있을 것이다.




1. 목사의 이중직은 목사직의 의미와 목사와 교인의 언약관계, 그리고 복음 전파의 최대화를 위해 원칙적으로 허용되어서는 안된다.
2. 상회인 노회와 총회는 헌금의 근원적 원리에 따라 복음 전파자인 목사의 생계를 위한 구제 프로젝트를 우선적으로 구상, 실천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3. 이 모든 조치에도 불구하고 생계에 어려움이 있는 목사에 한하여,
1) 노회의 지도하에, 단기적, 일시적 생계형 이중직은 허용함으로써, 가장인 목사가 제5계명을 어기지 않을 기회를 제공할 수 있을 것이다.
2) 앞서 제시한 모든 노력에도 불구하고 이중직 상태가 장기적으로 지속될 경우, “성전의 일을 하는 사람이 성전에서 나는 것을 그리고 제단에서 섬기는 이들이 제단과 함께 나누는 것”(고전 9:13)이라는 사도 바울의 교훈에 기초하여, 한 지역 교회로부터 장기간 생활비를 지원받을 수 없는 목사가 섬기는 그 지역교회가 과연 주님이 주신 독립적인 교회인지를 재고해 보고, 목사가 비난받지 않고 전직할 수 있도록 허용하는 것도 신중하게 고려해 볼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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