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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성 속으로 〓/영성 목회자(가나다순)

여성 목사 제도 허용할 수 없다(서창원) - 김세윤 교수에 대한 반론

by 【고동엽】 2021. 10. 19.

여성 목사 제도 허용할 수 없다(1)

 

1. 여성과 남성의 관계는 우열 문제가 아니라 질서 문제로 보아야 한다.
2. 여성 안수를 허용하는 것만이 남성과 여성이 신분적으로 하나님 앞에서 평등하고 동등한 것인가?
3. 고린도 전서 14:34-35와 디모데 전서 2:11-12은 후대에 삽입된 글인가?

 

들어가는 말

 

유독 여성에 대한 차별이 심하다고 느끼는 곳이 아직도 존재한다고 하면 그곳은 교회라고 한다. 전통적인 보수층 교회들을 가리키는 말이다. 여성목사를 세우는 것이 시대적 사명인 것처럼 여겨지고 있는 이 때에 여성 성직허용에 대한 논쟁은 그 어느 때보다 과열되고 있다. 지난 7월 5일 여성 안수 문제에 대한 성경적 견해를 논하는 공청회 자리에서 강사로 초청된 K 교수는 여성안수 불허는 비성경적이고 거짓교사들이라고 톤을 높였다. 거기에다 성경의 영감설까지 이의를 제기하는 발언을 하여 보수계층의 목사들과 학자들을 당혹케 하는 말까지 하였다. 그 이후로 교단적인 대응을 기다려온 필자는 실망한 마음을 가지고 K 교수의 글에 대한 부당성을 제기하고자 펜을 들게 되었다.

 

1. 여성과 남성의 관계는 우열 문제가 아니라 질서 문제로 보아야 한다.

 

남자와 여자는 동등한가? 성경에서 남녀관계는 동등성(sameness)이 아니라 평등성(equality)을 가르친다. 동등하다는 말 자체는 본체가 같다는 의미로 사용되기 때문이다.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님 아버지께서 동등하시듯 남성과 여성의 본질(substance)이 같을 때 우리는 동등성을 말할 수 있다. 창세기를 보면 남성과 여성은 만들어진 재로가 다르다. 남자는 흙을 빚어 만 들었지만 여자는 남자의 갈비뼈로 만들어진 존재이다. 물론 이것이 우열관계를 말하는 것은 아니다. 또한 남자와 여자라는 호칭 자체가 다르다. 예수와 하나님은 호칭이 다를지라도 하나님으로서 같은 분이시다. 그러나 남자와 여자는 호칭이 다르며 결코 동등하지 않다. 왜냐하면 하는 역할과 기능이 다르기 때문이다.

 

이것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측면에서 남성이나 여성이 다 평등하지만 기능적인 면에서 차이가 있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타락이전에도 그 차이는 존재하였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은 아담에게 말씀하셨고 하와는 아담으로부터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야 할 존재였던 것이다.

 

사도 바울은 하나님의 형상과 영광인 남자를 언급하면서 남자가 여자에게서 나온 것이 아니라 여자가 남자에게서 났다고 했다. 그리고서 남자가 여자를 위하여 지음을 받은 것이 아니라 여자가 남자를 위하여 지음을 받았기 때문에 여자는 천사들을 인하여 권세 아래에 있는 표를 그 머리 위에 두라고 하였 다(고전 11:7-10). 그 전에는 여자의 머리가 남자요 남자의 머리는 그리스도 요 그리스도의 머리는 하나님이라고 하였다(고전 11:2). 그리스도와 하나님은 동등하시다. 그러나 남자와 여자의 관계는 우열의 문제가 아니라 분명 권위 문제를 염두에 둔 발언이다. 그렇기 때문에 여자는 "권세 아래 있는 표"를 머리에 두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것도 "천사들을 인하여" 그렇게 해야 한다고 한다. 이 말씀은 천사들이 하나님의 명령을 받들어서 구속함을 받은 주의 백성들을 수종들어 섬기는 위치에 있는 존재임을 감안할 때 적어도 여성들은 남성들에게 속하여 섬겨야 할 자임을 말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렇게 할 때만이 여성들의 섬김을 하나님께서 받으신다는 해석이 가능한 것이다. 그 표시로 여성은 머리에 뭔가를 써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하나님의 권위 하에 있는 공교회에서, 하나님이 보내신 천사들이 임재하여 하나님이 받으시는 합당한 예배가 집전되는 곳에서 여자가 머리에 베일을 쓰지 않고 기도하거나 예언한다는 것은 마치 창녀들이 남자같이 하고 다니는 그 당시 부정한 자, 머리를 민자들과 같은 것이 되어 하나님께 열납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고전 11:6). 그 연장선상에서 남자에게 종속되어 있는 여자가 남자들 앞에서 가르치고 남자를 주관하는 일들은 옳지 않은 것이기 때문에 고린도 전서 14:34-35절 말씀과 디모데 전서 2:11절이 언급되었다고 본다.

 

2. 성경은 위계 질서를 무시하고 평등하기 때문에 동등한 대우를 받아야 한다고 말하지 않는다.

 

남성에게 복종하는 것은 문화가 아니라 율법의 가르침대로 하는 것이다(고전 14:34). 아내들이 남편에게 복종하는 것은 성경의 가르침이다(엡 5:22). 이것은 남성과 관련하여 여성의 위치를 설명하는 말씀이다. 세상에서 여성들의 두각이 교회에서도 그러해야 한다는 법은 없다. 교회는 세상과 구분되는 독립된 영적 공동체이다. 하나님의 법이 최우선하고 있고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조직된 유무형교회인 것이다. 따라서 성경에서 다루고 있는 남녀 관계는 지위 문제가 아니라 질서 차원의 권위 문제로 이해해야 하는 것이다. 동등이 아닌 평등관계이다. 그렇기 때문에 아담의 머리뼈나 발가락뼈가 아닌 갈비뼈에서 여자를 만든 것이다.

 

교회는 그리스도 안에서 바울이 갈라디아서 3:28절에 이야기하고 있듯이 남자 나 여자나 헬라인이나 유대인이나 종이나 자유자나 다 하나인 것은 누구도 부 정할 수 없는 명백한 진리이다. 그것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다 같은 평등한 지위에 있다는 것이다. 부자와 가난한 자, 유대인과 이방인의 구원이 다른 것이 아니다. 모두가 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의 피로 말미암아 구속함을 받은 동일한 성도이다. 이것은 주님의 구원의 은총에 있어서 차별이 없다는 것 을 강조하는 것이다. 성도들은 누구나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다 같은 하나님의 자녀로서 지위를 가진 주님의 백성이다.

 

고린도 교회에서 말하고 있는 것은 구원의 차별이 없는 것이지 믿는 자들로 구성되어 있는 교회 공동체의 위계 질서에 차이가 없다는 말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누구나 구분이 없는 동등성만 있다고 하다면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없다: "무릇 멍에 아래 있는 종들은 자기 상전들을 범사에 마땅히 공경할 자로 알지니 이는 하나님의 이름과 교훈으로 훼방을 받지 않게 하려 함이라 믿는 상전이 있는 자들은 그 상전을 형제라고 경히 여기지 말고 더 잘 섬기게 하라 이는 유익을 받는 자들이 믿는 자요 사랑을 받는 자임이니라 너는 이것들을 가르치고 권하라"(딤전 6:1-2). 위계 질서를 무시하고 모든 사람이 법 앞에서 평등하기 때문에 동등한 대우를 받아야 한다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여성 목사 제도 허용할 수 없다 (2)

 

1. 여성 안수를 허용하는 것만이 남성과 여성이 신분적으로 하나님 앞에서 평등하고 동등한 것인가?

 

여성안수 허용론자들은 그 길만이 남녀평등을 추구하는 유일한 길인 것처럼 말한다. K 교수의 지적처럼 여성 안수를 허락하지 않음으로 인하여 교회가 더 성장할 수 있었는데 그렇지 못하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과거 여성들이 성직에 전혀 나서지 않았을 때에 한국에서만이 아니라 전 세계적으로 하나님의 교회가 얼마나 왕성하게 성장을 했는가?

 

작금의 교회성장 추세를 보자. 그토록 탁월한 여성 인력들을 전면에 내세우고 있는데, 예전에 비해 여성 목사들과 장로들이 그렇게 많아졌는데. 교회가 더 활력이 넘치고 주님의 교회로서 교회의 역할을 더 잘 감당하고 있다는 증거가 어디에 있는가? K 교수에 따르면 예수는 문화적인 양보 때문에 오직 12 제자만 택하였다고 했다(목회와 신학, 2004년 5월호, p. 64). K 교수의 주장대로 갈라디아서 3:28절이 그야말로 동등성을 가르치는 것이라고 한다면 어차피 죽기 위해서 이 땅에 오신 예수인데 유대인들의 문화를 거역하는 일을 그 전능하신 분이 왜 못하셨는가?

 

성령의 능력은 문화와 전통과 관습을 다 뛰어넘는 것이다. 복음의 효과적인 열매를 위해서 문화적 양보를 하셨다는 것은 신학자의 궤변이다. 유대인들에 의해서 핍박을 받게 될 제자들임을 뻔히 아시는 주님께서 처음부터 남녀 동등성을 주장하시며 사역의 동등성과 같은 중요한 가르침을 왜 문화적인 영향력 때문에 양보하였겠는가? 그가 12사도 속에 여성을 넣지 않은 것은 성직에 있어서, 교회 조직에 있어서 여성은 천사들로 말미암아 권세 아래 놓여 있는 존재임을 말씀하신 것이다. 이것은 예수의 주장이나 사도 바울의 주장과 전혀 모순되지 않는 바른 가르침이다.

 

교회에서 성직을 여성에게 허락하지 않는다고 해서 그것이 남성과 여성의 성적 차별을 가르친다고 주장하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다만 하나님이 하시지 않은 일,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도로 세우시지 않은 일, 그리고 더구나 갈라디아서 3:28을 그토록 확신 있게 주장하는 사도 바울도 그를 따르는 그 많은 여성들 중에 공식적으로 교회 지도자로 안수하여 세우거나 임명한 일이 없는 것을 우리가 무슨 권위로 할 수 있다는 말인가?

 

오늘날 일부 교회와 K 교수와 같은 신학자들이 예수님과 사도들보다 더 권위 있는 존재인가? 사도들이 하지 않은 일들을 우리가 해도 된다고 위임해 준 일이 어디 있는가? 교회의 모든 구조와 가르침 및 예배가 다 기록된 말씀, 즉 성경에 근거하는 것이라야 한다. 몇몇 사람들의 주장이나 세상의 흐름에 편승한 제도개선이 가능하다면 성경이 뭐가 더 필요하겠는가?

 

2. 부활소식을 전한 여성들, 선지자로서 예언하는 일들을 한 여성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복음의 메시지, 하늘나라 가르침을 듣고 배워서 구원의 반열에 들어서는 일은 남녀가 따로 없다: "남편된 자들아 이와 같이 지식을 따라 너희 아내와 동거하고 저는 더 연약한 그릇이요 또 생명의 은혜를 유업으로 함께 받을 자로 알아 귀히 여기라..."(벧전 3:7).

 

구원의 은총에 여성들이 관계가 없는 일이었다면 구약에서부터 명백하게 나타났을 것이다. 그러나 출애굽 사건에서 보듯 남녀노소가 다 홍해를 건너갔다. 율법의 가르침은 유대인들의 잘못된 전승으로 인하여 여자들을 제외시킨 것이지 그 유명한 쉐마 교육 헌장이 내포하고 있듯이(신명기 6장) 남자아이나 여자아이나 할 것 없이 모든 자녀들에게 부지런히 주의 말씀 혹은 토라를 가르치고 강론할 것을 말하고 있다. 예수께서는 혁명적인 일을 하신 것이라기보다는 율법의 가르침을 따라 마리아를 남자들과 함께 예수의 발 밑에 앉아서 가르침을 받게 하신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여성을 사도의 숫자에 끼이게 되도록 나아간 것이 아니다. 사도들도 가룟 유다 대신에 막달라 마리아와 같은 여인을 사도 수에 가입시킨 것이 아니었다. 복음의 은총은 차별이 없어도 주님의 교회를 세워 가심에 있어서 직분 수여 문제에 있어서는 분명 구분을 하신 것이 틀림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왜 예수께서 그 부활의 첫 소식을 여성에게 허락하셨는가? 복음의 증인, 혹은 부활의 증인은 K 교수의 지적한 대로 여성에게는 허락되지 않은 일이다. 그런데도 그 일을 막달라 마리아에게 허용한 것은 복음의 증인은 이미 요엘서에서 예견한 대로 예수를 주로 믿고 섬기는 남녀노소 모두에게 임하는 성령 하나님의 역사이기 때문이다.

 

성령님은 모든 그리스도인의 마음속에 내주하신다. 그것이 말씀 선포자인 설교자로서 자격이 있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모두가 증인이지만 모두가 다 사도요 선지자요 전도자인 것은 아니다. 즉 공교회 앞에서 여성을 설교자로 세우시는 것이 아닐지라도 일상 생활 속에서 복음을 전하는 증인의 역할은 차별이 없는 것이다.

3. 바울 사도는 장로도 집사도(딤전 3:12) 다 '한 아내의 남편'이어야 함을 강조하고 있다.

 

지금 우리가 논하는 것은 공교회 앞에서 하는 일이다. 예수께서 복음의 효과적 설득을 위하여 단지 문화적 양보를 하셨다고 말하면서 복음의 분명한 역효과가 남에도 불구하고 막달라 마리아를 부활의 증인으로 삼았다고 주장하는 것은(목회와 신학, 2004년 5월호 p. 61) 앞뒤가 맞지 않는 것이다.

 

베드로는 마리아의 지시대로 부활의 메신저가 된 것이 아니라 마리아의 이야기를 듣고 무덤으로 달려가 빈 무덤을 직접 확인하였다. 그리고 후에 제자들에게 나타나신 예수를 만나 뵙고 부활의 증인으로 나서게 된 것이다. 더욱이 부활하신 예수께서 그 사실을 예루살렘으로 가서 제자들에게 고하라고 하였지(요 20:18) 이 사실을 만민에게 선포하라는 명령을 주신 것이 아니다. 여자들은 공식석상에서 부활의 증인으로 나선 적이 없다는 점을 잊어서는 안 된다(눅 24:9-10). 제자들에게 그 사실을 알렸다고 해서 여성들의 설교 사역을 인정했다는 주장은 억지에 불과한 것이다.

 

특히 고린도 교회의 이 문제와 관련하여 우리가 기억할 것은 아직 성경의 정경이 형성되지 않은 상황에서 성령이 초대교회 성도들에게 임하여 기도하고 예언을 하는 특별한 은사들을 사용하신 점이다. 그 때 무질서하게 여성들이 나서게 되는 상황을 사도 바울이 질서 정리를 하고 있는 것이 고린도 전서 11장의 내용이다.

 

여성들이 교회 앞에서 잠잠하라는 것은 교회의 질서를 세우는 것이요 남성과 천사들의 권세 하에 있는 자들임을 천명하고 있는 것이라고 본다. 신약 성경에 분명 여성들 중 선지자들이 있다. 빌립의 네 딸들이 그러하며(행 21:9) 아기 예수를 기다리던 안나 할머니가 그러하다. 후자는 구약의 연속선상에서 이해할 때 미리암을 비롯하여 훌다와 드보라와 같은 여 선지자들의 활동으로 이해한다면 신약에서 선지자들이라는 공식적 칭호가 전자에게 주어진 것은 틀림없다.

 

빌립의 네 딸들이 무슨 예언을 하였는지는 전혀 언급이 없다. 그 이유가 무엇인가? 학자들의 의견이 다르지만 전통적으로 해석되어 온 것은 남자 사역자들이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는 상황에서 굳이 그들이 사역자로 나설 이유가 특별히 없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남성들이 없는 상황에서는 여성들도 할 수 있다는 말인가? 그것이 일반적인 규범은 아닌 것 같다. 왜냐하면 성령께서 말하게 하시면 여자만이 아니라 누구도 할 수 있다. 발람 선지자를 태우고 간 나귀도 말하지 않았는가?

 

공교회가 조직된 이후, 특히 성경의 정경이 완성 된 이후에 계시가 주어지는 특별한 예언이나 방언이 더 이상 언급되지 않았다는 점이다. 고린도 전후서가 기록된 연대는 대체로 주후 56년경으로 본다. 그리고 바울의 목회서신에 해당되는 디모데 전후서를 기록한 연대는 사도행전 28장 이후의 사건으로서 바울의 죽음을 앞에 둔 때로 본다면 주후 65년 이후라고 말할 수 있다. 이 때는 이미 신약교회가 그 틀을 다 잡아가고 있던 때이기 때문에 안정된 상황에 서 교회를 어떻게 목회하여야 하는지를 다룬 그의 서신에 교회 직분자들을 다루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우리가 주지하는 것처럼 장로직이나 혹은 감독직에 여성을 언급한 적이 있는가? 도리어 한 아내의 남편이어야 한다는 조항은(딤전 3:2) 분명 여성에게 허락하지 않은 직분임을 나타내는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해석의 논란이 있는 "여자들도"(딤전 3:11)라는 문구가 일부 학자들의 주장처럼 여성 감독을 의미한다면 굳이 그렇게 불분명하게 표현할 이유가 무엇이겠는가? 바울이 에베소 교회를 떠날 때에 오라고 한 장로들 가운데는 여성이 하나도 없었다. 더욱이 바울이 그토록 애지중지 여기고 동역자로(행 18:2)까지 간주 한 브리스길라도 장로로 세움을 받은 적이 없었다. 바울이 여성 편력자가 아니라는 것이 분명하다면 그의 목회서신에 장로도 집사도(딤전 3:12) 다 '한 아내의 남편'이어야 함을 강조하고 있는 것은 적어도 교회의 직책에 있어서는 남녀의 기능적 차이에 대한 구분이 분명하다는 점을 말하고 있다. 그렇지 않다면 디모데 전서 2:11-12절은 분명 엄청난 모순이 된다.

 

 

여성 목사 제도 허용할 수 없다 (3)

 

1. 고린도 전서 14:34-35과 디모데 전서 2:11-12절은 후대에 삽입된 글인가?

 

고린도전서 14장은 일부 학자들과 더불어 K 교수의 주장처럼 후대 사람이 삽입한 것이 아니다. 디모데 전서도 몇몇 학자들의 의견처럼 1세기말에 영지주의자들의 여성들의 물의에 대한 경계를 바로잡기 위한 것이었다고 한다면 근본적으로 바울의 저작설을 의심한다는 것과 하나님의 감동에 의해 주어진 말씀임을 부인하는 것은 아닌가? 그리고 후세에 삽입했다고 할 때 왜 고린도 전서 11장에 다 할 것이지 14장에 해서 논란이 되게 했을까?

 

고린도 전서 14장의 사건은 K 교수가 지적하고 있는 것처럼 논리적 모순덩어리가 아니다. 방언이나 예언은 그 당시에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들에게 말씀을 계시하여 주는 하나의 방편으로 사용하였다(O. P. Robertson, The Final Word, The Banner of Truth, Edinburgh, 1993). 따라서 자연스럽게 너도나도 성령이 임하신다고 해서 중구난방으로 예언하거나 방언하는 무질서를 바로잡고 질서 있게 할 것을 주장하는 것이다.

 

특히 여성들은 앞의 11장에서 남성에게 복종하는 권위 문제와 관련하여 공교회 앞에서 잠잠할 것을 가르친 것이라고 보아야 하는 것이다. 특히 35절은 34절과 구분되게 심지어 교회 앞에서 질문하는 것조차도 허락하지 않고 집에서 남편에게 배우라고 권면하고 있는 것이다. 여성도 설교를 할 수 있다 없다가 문제의 초점이 아니다. 여성들이 장로 혹은 감독 및 집사직분을 받을 수 있느냐, 없느냐가 더 중요하다.

 

K 교수는 '여성들을 굴종시켜 얻는 것이 무엇인가?' 라고 물었다. 한국 교회만큼 여성들의 활동이 많은 교회도 없다. 비록 안수하여 목사나 장로 및 안수 집사직은 허락하지 않는다 할지라도(개혁교회에 해당되는 말이지만) 교회 내에서 여성들의 활동을 초대교회 여성들의 활동 못지 않게 허용하고 있다. 단지 안수하지 않는다고 해서 그것이 여성들을 굴종시키는 것인가? 여성 목사와 장로를 허용한 교단들은 근본주의적 칼빈주의(?) 교단들에 비해 더욱 든든해 졌고 세계선교도 더욱 활발하게 이루어졌다는 통계가 있는가? 역사적으로 세계선교가 활발하게 일어난 시대에도 여성이 사역자로 나서지 못하여 교회 성장이 제한되었다는 기록은 찾아볼 수 없다.

성령의 은사들이 제한되지 않고 한량없이 부어져 복음의 물결이 출렁거릴 때도 여성 목사가 있어야 한다는 주님의 내적 음성은 들리지 않았다. 우리보다 더 성령의 역사에 민감하게 살았던 대각성과 부흥의 시대의 그들에게서 여성 안수불허가 성경적이지 못하다는 주님의 직접적인 음성이나 성경 해석의 여지를 불러일으킨 기록도 하나도 없다.

 

지금의 논란들은 자유주의 신학의 등장과 함께 세속적인 여권신장 운동의 영향을 교회가 받아 요동치고 있는 일이다. K 교수는 성경 진리를 위해서 몸부림치고 바른 교회를 세워가기 위해 땀흘리고 있는 순결한 사람들을 거짓 보수주의자로 몰아 부치고 있는 것에 대하여 회개해야 한다.

 

개혁교회는 교회에서 여성을 추후도 굴종시켜 본적도 없고 그럴 이유도 없다. 다만 그리스도와 사도들께서 하지도 않았고 초대교회 성도들도 요구하지도 않은 것을 우리가 무슨 권위로 여성들에게 안수해야 한다고 하는가를 묻고 싶은 것이다.

 

옷차림에 대한 문제나 머리에 두건을 써야 하는 일이나 신자들의 자유에 대한 남용적인 문제들은 결코 본질적인 것이 아니라고 해서(목회와 신학, 2004년 5월호 p. 69) 틀렸다고 말할 수 없다. 성경에 기록된 것 그 자체로만 해도 영감된 하나님의 말씀으로서 권위를 가진다. 한쪽 구석에 있다고 해서 중요하지 않다고 말하면 안 된다. 사도 바울이나 다른 사도들이 한 설교가 어찌 신약성경에 수록된 것이 전부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신약 27권만을 주신 것은 그 모든 내용들을 함축하여 정수(精隨)만 주셨다고 해도 틀리지 않는다. 그런데 우리가 무엇 때문에 본질적인 것과 비본질적인 것을 나누어서 말한단 말인가? 비본질적인 것은 소홀하게 다룬다든지 혹은 우리 임의대로 혹은 우리들의 편리대로 각색하여 사용하면 된다는 의미인가?

K 교수는 성경의 영감설을 믿는가?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이 영감된 정확무오한 말씀임을 믿는다. 물론 이는 원본을 의미한다는 것은 다 안다. 그러나 원본이 없는 상황이지만 하나님께서는 사본만으로도 그 의미가 충분히 전달될 수 있기 때문에 그 전능하신 하나님이 원본을 들이밀지 않으시고 계신 것이다.

 

성경 번역 작업에 감동을 주시는 하나님께서 말씀의 참 의미를 구원받은 백성들에게 전달되는 일에 부족함이 없도록 역사하시는 것도 믿는다. 이를 '하나님의 섭리적 은총'이라고 말한다. 만약 여성 성직 허용과 같은 중대한 사항을 지난 2천년 가까운 세월 동안 주님께서 방치해 두시고 오늘날 누구보다도 똑똑한 일부 신학자들에게 발견케 하여 교회에 소개하라고 하셨다고 한다면 계시의 점진성의 원리로 이해하고자 한다고 할지라도 하나님이 모순된 존재라고 말하는 불경죄에 빠진다. 더 이상 계시가 주어지지 않고 있는 이유는 이미 주어진 신구약 성경 66권으로도 충분한 것이기 때문이다.

 

2. 만인제사장 교리가 여성의 성직을 허용하는 가르침인가?

 

만인제사장 교리가 무엇인가? 아무나 성직자가 된다는 말이 아니라는 것은 누구나 다 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만인제사장 교리이기 때문에 여성에게도 성직을 주어야 한다는 논리는 그야말로 무식한 사람들의 헛소리에 불과하다. 그 논리가 맞다고 한다면 아이들에게는 성직을 왜 허용 못하는가? 그들도 만인제사장들인데 말이다. 왜 여성에게만 말하는 것인가? 중 고등 학생들은 안되는가? 누구나 성직자가 된다는 말은 앞에서 지적한 바 있는 고린도 전서 12:29-30절과 모순되는 것이라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

 

만인제사장 교리는 천주교의 사제제일주의에 반하여 사제를 통하지 않고도 성도라면 누구나 직접 하나님과 교통할 수 있다는 가르침이지 성직 자체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이젠 누구든지 사람과 하나님 사이의 유일한 중보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만을 통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하게 나아갈 수 있다는 것이다. 이것을 성직 수여교리로 주장하는 것이었다고 말하는 것은 종교개혁자의 가르침을 왜곡해도 이만저만한 것이 아니다.

 

어떤 교회에서는 만인제사장이기 때문에 설교도 성도라면 누구나 할 수 있다고 하여 실지로 그렇게 한다는 글을 읽은 적이 있다. 그런 것이 현대적 조류요 현대 감각이 있는 신선한 목사라고 한다면 필자는 결코 목사가 되지 않을 것이다. K 교수는 '복음이 올바로 선포될 때는 항상 하나님 나라의 구원의 현실화로 노예해방과 여성해방을 가져왔고 약자를 보호하였으며 만민의 인권을 증진하였다'(목회와 신학, 2004년 5월호 p.71)고 했다.

여성에게 성직을 수여하는 것만이 여성해방인가? 지금 보수주의 교회에서는 여성들이 종살이하고 있는가? 이미 그들도 만인제사장으로서 남성들과 평등하게 하나님의 보좌 앞에 나아간다. 종으로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을 입은 자녀로서 나아가는 것이다. 여성들이 교회 내에서 남자를 주관하여 가르치는 것을 금하고 있는 것과 잠잠하라고 하는 성경적 가르침은 주님이 다시 올 때 까지 지켜져야 할 가르침이다.

 

3. 나가는 글

 

첫째로 남성과 여성은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을 받은 평등한 자이지만 수행할 역할 차원에서 결코 동등한 것이 아니다. 그것은 우열의 문제가 아니라 질서의 구분을 나타내는 권위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둘째로 여성 안수가 성경적으로 그리고 교회 역사적으로 지지를 받을 수 있는 가르침이 아니다. 교회 밖의 여권신장 운동을 주장하는 이들이 교회를 공격하는 빌미로 사용하는 것에 휩쓸려서 시대적 조류에 편승하려는 일부 신학자들과 목사들의 현란한 지적 논리로 교회를 혼란케 하지 말아야 한다.

 

셋째로, 부활소식을 처음 접한 여성들이었다고 해서 그것이 부활의 메시지를 전파할 설교권까지 여성에게 허락한 것이 아니었다. 교회 내에서 여성들이 할 일들은 여전히 열려 있다. 주님께서 주신 은사에 따라 얼마든지 주님의 교회를 섬길 수 있다. 다만 필자의 논지는 성경에 명확하지도 않을 뿐 아니라 그 증거가 전혀 없는 성직 허용을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사람을 기쁘게 하는 이들은 그리스도의 일군이 아니다.

 

넷째로 고린도 전서 14:34-35절 말씀과 디모데 전서 2:11-12절 말씀은 후대의 어떤 사람이 삽입한 것이 아니다. 사도 바울을 통해서 성령께서 영감으로 주신 주님의 명령이다. 교회 제도와 교리는 이미 주어진 계시에 의해서 신앙과 행위의 유일한 규범으로 믿는 성경에 기초할 뿐이다.

 

다섯째로 만인제사장 교리가 여성 안수를 허락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성직 문제가 아니라 다른 중보자 없이 누구나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이 은혜의 보좌 앞에 나올 수 있다는 것이다. 앞에서 지적한 것처럼 발람 선지자가 탄 나귀도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였다고 해서 나귀에게도 성직을 주자고 하는 것은 너무나 빗나간 비약이지 않겠는가?

 

"우리는 수다한 사람과 같이 하나님의 말씀을 혼잡하게 하지 아니하고 곧 순전함으로 하나님께 받은 것 같이 하나님 앞에서와 그리스도 안에서 말하노라"(고후 2:17), "우리는 진리를 거스려 아무 것도 할 수 없고 오직 진리를 위할 뿐이니"(고후 13:8). 바울 당시에도 하나님의 말씀을 혼잡하게 하는 수다한 사람들이 있었다. 그것을 방지하기 위해 기록된 말씀을 우리에게 주신 것이다.

 

이 시대적 문화나 가치관이 성경 해석의 열쇠가 아니다. 성경은 성경으로만 해석할 뿐이다. 진리를 거스리는 거짓 선지자 노릇은 하지 말자. 오직 이 땅에 주님의 이름이 높임 받으시는 그 영광의 날이 속히 임하기를 사모하며 이 글을 마친다. Soli Deo Glor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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