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1682년 9월 8일, 목사 안수식에서 선포된 말씀입니다. "내가 또 내마음에 합하는 목자를 너희에게 주리니 그들이 지식과 명철로 너희를 양육하리라" (렘 3:15) 신약성경에서 교회 지도자들의 명칭은 두 가지의 의미를 지닙니다. 하나는 일반적이고 광범위한 의미로 다른 하나는 특별한 의미로 사용되기도 합니다. 예컨대, 집사(deacon)를 의미하는 'diakono'가 일반적인 의미로 사용될 때, 그것은 성직자나 하나님의 종을 가리킵니다. 하지만 그것이 특별한 의미로 사용되어질 때, 그것은 가난한 사람들을 돌보기 위해 교회안에서 임명된 특별한 지도자를 의미하기도 합니다. 목사라는 명칭은 이보다 더 일반적이고 특별한 의미를 갖게됩니다. 일반적으로 그것은 보통의 경우든 특별한 경우든 말씀을 가르치는 자 혹은 교회의 지도자를 의미하게 됩니다. 하지만, 특별한 경우에는 교사와는 구별되는 교회의 특별한 직분으로서의 지도자라는 의미를 갖습니다. “혹은 목사와 교사로 주셨으니”(엡 4:11)의 말씀처럼 목사와 교사의 직분은 구분되어 집니다. 그러나 그 차이는 질서체계(order)에 기인한 것이 아니며 직분의 문제인 것입니다. 저는 천주교의 주교나 장로들을 단순히 직분의 문제로만 구분하는 사람들과 같은 방식의 구별은 사용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그리스도께서 그의 교회에 세우신 아름다운 질서체계(order)와 관련되어 이해되어야만 합니다.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교회안에 세우신 아름다운 법칙들을 발견하고 계발해 나갈 수 있습니다. 나는 가끔 그것을 볼 수 있을 때까지 살기를 소망했었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되리라고는 생각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제 저는 교회를 향한 그리스도의 뜻을 발견하는 방법에 대해 형제들에게 권고하려 합니다.--은사와 지도자 그리고 훈련사이의 연합함(조화)이 없이는 그것을 발견할 수 있는 길은 없습니다. 온 교회의 체계와 질서의 기원은 은사들과 지도자들에 의한 이들 은사의 훈련과 그리고 모든 은사와 지도자들의 최종 목적인 신앙의 온전함(영적인 성숙함)에 있습니다. 지금 저는 그리스도께서 그의 교회에 주신 모든 영적인 은사들이 네 가지의 항목으로 나누어진다는 사실을 증명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이유는 이런 은사들을 훈련하기 위함입니다. 왜냐하면 영적인 은사를 받은 자들은 구별되어 훈련되어져야 하기 때문입니다. 이곳에서 당신은 그리스도께서 교회안에 세우신 아름다운 질서를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다른 것은 없습니다. 말씀드렸듯이, 모든 은사는 네 가지의 항목으로 나뉘어 집니다. 목사에 의해 훈련되어져야 할 것, 교사에 의해 훈련되어져야 할 것, 통치자(ruler)에 의해 훈련되어져야 할 것, 집사에 의해 훈련되어져야 할 것이 그것입니다. 이런 지도자들에 의해 훈련되어진 은사들은 영적 성숙함을 목표로 하는 모든 교회에 해답을 제시합니다. 그리스도의 교회의 행동과 규율들이 네 부류 중 하나에 있다거나 혹은 모든 곳에 있다는 사실 자체는 무익한 의견에 불과합니다. 그래서 내가 선포하는 말 가운데서가 아닌 (롬 12:6-8)에서 나타난 사도들의 계획속에서 이 모든 진리들을 발견해 보려 합니다. 먼저 연합(조화)에 대해서 좀더 알아봅시다. 그러면 당신은 연합함의 영광과 아름다움에 대해 더 많은 것들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목사의 의무[2] 나는 본문 말씀가운데 영광과 아름다움을 언급한 목사들을 이야기 할 것이며, 그들을 일반적으로 교회 안에서의 가르치는 모든 것으로 이야기 할 것입니다.--이것은 단어의 일반적인 의미입니다. 그리고 내가 그들에 관하여 말하려하는 모든 것들은 나 자신은 물론이고 나의 형제들과 당신에게 목사의 의무가 무엇인지에 관해 상기시켜 줄 것입니다.--그에게 부여된 의무가 무엇인지, 그에게 기대되어 지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서 말입니다. 지금 나는 목사나 교사에게 필수적인 모든 의무들을 살펴보지는 않을 것입니다. 단지 몇 가지의 전형을 제시할 것입니다. 첫 번째로 목사, 교사, 장로들과 같은 교회 지도자들의 의무는 본문에 언급된 대로“지식과 명철로 교회를 양육하는 것”입니다. [이 설교 가운데 일부 사항들이 Owen의 '복음 교회의 진정한 본질'이란 글의 5장에서 발견되어 진다는 사실을 독자들에게 알려주는 것이 적절하다] 이러한 양육은 복음의 설교에 의해서 이루어집니다. 자신의 양 무리들을 먹이지 못하는 자는 목자라고 할 수 없습니다. 그것은 본질적으로 그의 직분(임무)에 해당합니다. 세계적으로 형성되어진 목사의 죽은 형상의 이미지나 모습처럼, 가끔씩 상황이 허락할 때마다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사도행전의 말씀처럼, “기도하는 것과 말씀 전하는 것을 전무하는 것”(행 6:4)입니다. “말씀과 가르침에 수고하는 이들을 더하는 것”(딤전 5:17) 입니다. “그를 전파하여 각 사람을 권하고 모든 지혜로 각 사람을 가르치는 것”(골 1:28) 입니다. 여기서는 설교와 설교의 목적이 무엇인지 말해주고 있습니다. “그를 전파하여 각 사람을 권하고 모든 지혜로 각 사람을 가르침은 각 사람을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한 자로 세우려 함이니” 이를 위해 어떻게 합니까? 29절에, “나도 내 속에서 능력으로 역사하시는 이의 역사를 따라 힘을 다하여 수고하노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본래의 단어가 강조하는 한 단어가 우리의 번역에는 빠져있습니다. --Ei" o kai kopiw. Kopiw은 성실함과 집중력과 피곤함과 근면함으로 수고하는 것입니다. 수고하는 것(usque ad fatigationem)은 내 자신을 드리는 것입니다. 애쓰는 것(agwnizomeno)은 경주를 달리는 사람으로서, 승리를 위해 싸우는 사람으로서 그들의 영혼들을 위한 변증에 힘쓰는 것입니다. 어떻게 합니까? " 내 속에서 역사하시는 이의 역사를 따라". 여기에 사도 바울의 영적 체계가 있습니다. 그것을 생각할 때 우리는 경외심마저 느끼게 됩니다. "나는 내 안에서 역사하시는 그리스도의 능력과 위대하고 넘치는 능력으로 함께 하시는 역사를 따라서 근면함으로 수고하며, 경주에서 애쓰고, 승리를 위해 싸운다." 말씀을 전파하는 이런 의무을 위해, 성도들을 지혜와 명철로 교육하고 양육하기 위해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 생각해 봅시다. 1. 먼저, 복음의 비밀-하나님의 뜻 (행 20:27), 원만한 이해의 모든 부요에 이르러 하나님의 비밀인 그리스도(골 2:1-4)), 사람들의 영혼에 이르기까지(엡 3:7-9)-을 아는 영적인 지혜가 필요합니다.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많은 교회들이 부흥하고 성장하였습니다. 그들은 영적인 것들과 복음의 비밀에 대해 대단한 통찰력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영광의 아버지께서 지혜와 계시의 정신을 너희에게 주사 하나님을 알게 하시고 너희 마음 눈을 밝히사 그의 부르심의 소망이 무엇이며 성도안에서 그 기업의 영광의 풍성이 무엇이며" (엡 1:17-18) 사도 바울은 그들이 모든 것을 지니도록 기도하였습니다. 그러나 실제로 목회자들이 이 모든 의무들을 가르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만약 목회자 자신이 먼저 어느 정도의 탁월함을 지니지 못한다면, 성도들을 성숙함과 온전함으로 이끌어 갈 수 있겠습니까? 우리는 이같은 복음의 비밀들에 대한 철저한 지식을 얻기 위해 힘써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가 가진 교회의 위대한 직분은 아무 쓸모가 없게될 것입니다. 지금까지는 목사에게 요구되는 복음의 진리에 대한 영적인 지혜와 명철을 생각해 보았습니다. 2. 권위가 필요합니다. 설교하는 목사에게 무슨 권위냐구요? 그것은 직분이나 위치에서 오는 것이 아니요, 성령의 기름 부으심의 결과입니다. 율법주의자들은 교회에서 가르치라는 외적인 소명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에겐 기름부음이 없었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외적인 부름심이 없으셨습니다. 그러나 그에겐 성령의 기름부으심이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복음을 전파하기 위한 은사와 은혜가운데서 성령의 충만한 감동을 지닌 것입니다. 이와 관련하여 그의 권위에 관한 논쟁이 있었습니다. 율법주의자들은 예수님께 말합니다. "무슨 권세로 이런 일을 하느뇨 누가 이런 일 할 이 권세를 주었느뇨" (막 11:28) 성령님께서 그 문제를 결정하십니다. "그 가르치는 것이 권세 있는 자와 같고 저희 서기관들과 같지 아니 함일러라"(마 7:29) 그들은 직분으로 인한 권위는 가졌으나 성령의 기름 부으심을 통한 권위는 갖지 못한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오직 이것만을 지니셨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논쟁을 벌이고는 있지만, 성령을 보여 주려고 하는 설교는 기름부음을 받고, 주어진 은사와 은혜의 성령님과의 교통 가운데 증거되는 것만 못합니다. 왜냐하면 사람들이 권위를 가장하고 권위있는 체하는 것은 헛된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하나님께 은사와 은혜가운데 기름부음을 받은 것이 커다란 증거가 되듯, 설교를 할 때 그들은 대단한 권위를 갖게 됩니다. 물론 그 이상은 아닙니다. 따라서 모든 이들을 그의 권위의 영역을 지켜야 할 것입니다. 3. 이곳에서 요구되는 또 다른 것은 우리가 다른 이들에게 설교할 내용들의 능력을 경험하는 것입니다. 나는 정말로 설교할 내용들이 먼저 설교자 자신에게 선포되지 않는다면 그 사람은 좋은 설교자가 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사람들을 위해 준비한 내용들을 통해 먼저 양육되어 지고, 그것들을 충분히 소화하고, 그리하여 신앙의 온전함을 이루지 못하는 자는, 그가 알고있는 것으로 인해 독(毒)을 줄 수도 있습니다. 왜냐하면 자신의 심령가운데 설교의 능력을 발견하지 못한다면, 다른 이들의 가슴속에서 그것을 발견할 수 있는 아무런 근거를 가지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심령이 아닌 머리로 설교를 하는 것은 쉬운 일입니다. 설교를 위해 우리의 머리를 동원하는 것은 우리의 것이든 다른 사람의 것이든 진리의 몇몇 개념으로 우리의 사고와 기억들을 채우는 것에 불과하며, 우리 자신과 다른 사람에게 단순한 만족을 주기 위한 이야기와 다름 아닙니다. 이것은 쉬운 일입니다. 그러나 설교를 위해 우리의 심령을 일으키는 것은, 우리들의 생각과 마음을 형성하기 전에 또한 그것들을 전하기 전에 우리를 이롭게 하는 진리의 능력 가운데 변화되는 것이며 그 능력을 발견하는 것입니다. 또한 사람들의 영혼을 향한 열정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열망으로 동기부여 되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단 한번도 이와 같은 마음을 품지 않고 일주일 내내 설교를 하기도 합니다. 이것은 전 세계적으로 능력있는 설교를 잃게 만들고 있습니다. 대신에 재미있는 화술만 늘어가고 있습니다. 이 같은 자들은 자기 자신의 마음가운데 영적 체험을 결코 추구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어떤 사람들의 설교와 또 어떤 사람들의 설교가 아닌 것들이 모두 '설교'로 선포되어지기 때문에 우리는 목사로 부르심을 받는 것의 능력을 잃어 가고 있습니다. 비록 2-3만 명에 이르는 목사가 있을지라도, 백성들은 하나님을 아는 지식의 부족으로 멸망해가며 죄악의 관습으로 물들어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에겐 오늘날까지도 아무것도 선포되어지지 못하고 있습니다. 4. 말씀을 올바르게 구분하는 기술이 필요합니다. 이 기술은 하나님의 말씀을 고찰하는데 아주 실제(실용)적인 방법으로 우리가 설교하는 사람들에게 적합한 양식이 무엇인지, 사람들의 영혼을 위한 실속있고 영양이 풍부한 양식이 무엇인지를 가려내는 것입니다. 이를 위해서는 다음과 같은 것들이 필요합니다. 먼저 회중들의 영적 상태에 대한 정확한 지식과 헤아림이 있어야 합니다. 설교자의 눈 속에, 생각 속에, 설교 가운데 끊임없이 회중들의 상태를 확인하지 못한다면 허공을 향해 손을 내두르는 사람처럼 불확실한 싸움을 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들이 겪고 있는 시험과 그들의 빛과 그늘, 성장하고 있는 것과 썩어가고 있는 것, 번성하는 것과 시들어 가는 것, 하나님을 아는 지식과 그들이 도달한 영적 수준 등에 관하여 헤아리지 못한다면 그들에게 결코 올바른 설교를 할 수 없습니다 이런 이유때문에 우리는 영혼을 향한 열정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열망들로 가득차 행동해야만 합니다. 지금까지의 논의를 간단하게 말해보겠습니다. "이런 일들을 하기에 족한 이가 누구인가" 복음의 비밀을 이해하기 위해 필요한 영적인 지혜가 있어야 합니다. 그것은 우리의 회중들을 가르칠 수 있도록 하게 하며 온전함과 성숙함으로 이끌어줍니다. 성령 충만으로부터 온 권위가 있어야 합니다. 그것은 성령님의 은혜와 은사로 기름부음 받은 증거가 됩니다. 그것만이 말씀을 선포할 때 권위를 가져다 줍니다. 우리가 설교하는 모든 말씀 가운데 우리의 모든 심령이 그것과 같아지는 체험이 있어야 합니다. 그리하여 성도들도 말씀의 능력가운데 진리를 깨닫게 됩니다. 말씀을 잘 구분하는 기술에 관하여 말씀드렸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 자신을 위해 기도해야만 하는 커다란 필요성을 느끼게 됩니다. 당신의 목회자들을 위해 기도하십시요. 이것이 복음사역자에게 요구되는 첫번째 의무입니다. 목사의 의무[3] 두번째 또다른 의무는 그리스도께서 감독자로 세우신 성도들을 위한 끊임없는 기도입니다. 나에겐 이것을 특별한 말씀들을 통하여 확신시킬 만한 충분한 시간이 없습니다. 그러나 당신은 사도들이 얼마나 빈번하게 자신들의 기도에 대해 말하였고, 다른 사람을 위해 기도에 동참했는지, 회중들을 위해 끊임없이 기도했는지를 잘 알고 있을 것입니다. 우리가 왜 그처럼 해야만 합니까? 이제 그 네 가지의 이유와 우리가 기도해야만 하는 네 가지의 내용들이 무엇인지 말씀 드리려 합니다. 1. 내가 생각하는 첫 번째 이유는, 나는 어떠한 사람도 그의 양심에 자신이 회중들의 목사로서의 어떠한 임무든지 떳떳하게 수행하고 있다고 하는 증거를 갖고 있지 못한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그는 회중을 위해 끊임없이 기도하지 않습니다. 그가 자신의 능력껏 설교를 하도록 해봅시다. 만약 하나님께서 그에게 설교를 준비하는 탁상가운데, 설교를 듣게될 성도들에게 기도의 영을 부어주시지 않는다면 그는 자신이 정말 훌륭한 방법으로 목사의 임무들을 잘 감당하고 있는지, 그가 하는 일이 하나님께 열납되는지에 대해 아무런 증거도 얻지 못할 것입니다. 나는 그들에게 이러한 사실을 깨달은 지혜로운 자를 기억하라고 말합니다. 2. 기도는 회중들을 축복하는 방법이기 때문입니다. 내가 알고 있는 한 우리는 귄위있는 축복을 할 수 있습니다. 우리를 떠난 축복은 선포적이고 Eutical(진심으로 바라고 기도하는 바램의 표현)합니다. 축복을 선언하는 것은 단지 Eutical하고 선포적일뿐 권위를 가지지는 못합니다. 형식만으로는 우리의 회중들을 축복할 수 없습니다. 오로지 그들을 축복하기 위한 끊임없는 기도만이 그들을 축복케 함을 기억하십시요. 3. 만약 사람들이 그저 옛날모습 그대로 남아 있다면, '지구상의 어떤 목사나 목회자가 그의 교회에 사랑을 부어주고 있다'고 하는 말을 저는 믿을 수가 없습니다. 그는 자신의 회중들을 위해 기도하지 않습니다. 그는 수많은 분냄과 무례함과 잘못들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 어느것도 그의 가슴을 영혼들을 향한 불타는 사랑으로 채워주지 못합니다. 오로지 그들을 향한 끊임없는 기도만이 그것을 가능케 합니다. 그가 계속해서 기도하기만 한다면, 모든 편견들을 정복하고 물리칠 수 있을 것입니다. 4. 마지막 이유는 이것입니다. 성도들을 향해 기도할 때,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친히 그들에게 어떤 설교를 해야 하는지 가르쳐 주신다는 사실입니다. 우리는 그들을 위해 기도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무엇을 위해 기도해야 하는지 생각해야만 합니다. 그것은 성도들의 상황에 대한 헤아림이며 그 가운데 하나님께서는 복음 전할 목사들을 가르치십니다. 만약에 그 가르침이 임한다면 그것이 그들이 설교하고 가르쳐야 할 내용입니다. 사람들을 위해 우리가 더 많이 기도하면 할수록 우리는 그들에게 무엇을 전해야 할지 더욱더 잘 알게 될 것입니다. 사도들은 다른 모든 일을 제쳐두고 "그들에게 기도와 말씀을 주었습니다" (행4:4) 기도가 최우선입니다. 그것은 개인적인 기도를 말하는 것이 아니고 교회와 복음의 사역을 위한 중보기도를 의미합니다 우리는 무엇을 위해 기도해야 할까요 1. 우리가 선포할 말씀의 승리를 위해서 기도해야 합니다. 말씀의 승리란 말씀이 모든 세계 가운데 빛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것의 목적 즉, 하나님의 지으신 모든 피조물의 목적과 우리 의무에 대한 진로와 진리의 가르침과 은혜가운데의 부흥과 하나님과 누릴게 될 모든 것들과 복음의 승리를 위해 기도해야만 합니다. 우리는 이러한 모든 목적들이 회중가운데 하나님의 뜻가운데 이루어지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우리는 씨앗을 뿌리는 것만으로는 아무것도 얻을 수가 없습니다. 농부는 땅을 갈고 써레질을 한 후에 씨를 뿌립니다. 그러나 비가 오지 않는다면 그는 아무것도 수확하지 못합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사람들의 마음이 어느정도 준비되어, 우리가 그들 가운데 복음의 씨앗을 뿌린다해도, 그들에게 성령의 단비가 내리지 않는다면 아무런 수확을 얻을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말씀가운데 측복이 임하도록 기도하십시오. 말씀을 전하는 목사들은 복음의 비밀을 아는 사람으로서, 복음의 진리와 복음의 선포를 위해 기도하는 사람으로 여겨집니다. 그러나 그것이 사람들의 마음속에 받아들여지기 위한 유일한 방법은 기도로 그것을 따르는 것임을 명심하십시오. 2. 우리의 모든 모임들 가운데 그리스도의 임재를 위해 기도해야만 합니다. 왜냐하면 말씀의 검의 모든 능력이 여기에 달려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이것에 관해 많은 약속을 하셨습니다. 우리는 그 말씀에 의지하여 믿음으로 행동해야 하며, 우리의 모임가운데 그리스도의 임재를 믿음으로 기도해야 합니다. 그것은 목사의 커다란 의무입니다. 우리가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우리의 의무를 무시하는 것입니다. 모든 사람들이 멸망해 가는 곳이 불속이라해도 우리는 기꺼이 뛰어들어갈 수 있고 어떤 어려움들과도 싸울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설교와 기도라는 무기의 능력은 우리의 재능과 생각, 역할이나 열정에 있는 것이 아니고 오직 그리스도의 임재하심에 있기 때문입니다. 이를 위해 회중들가운데 능력있게 기도하는 것과 이러한 모든 것들이 역사하도록 간구하는 것을 당신의 일로 삼으십시오 3. 우리의 기도는 교회의 상황과 영적인 상태와 관련되어 이루어져야 합니다. 복음의 비 밀에 대해 어느정도의 지혜와 명철을 지니고 그에 만족하는 한 목사가 있다고 생각해 봅시다. 그는 구원에 이르기까지 회중들에게 최고의 안내자가 될 것입니다. 그는 그들의 믿음의 분량과 연약함과 겪고 있는 시험을 알고 있습니다. 그는 그들이 훈련되어져야 할 때와 힘겨워할 때와 성장할 때 그리고 세상에 나가야할 때를 알고 있습니다. 목사는 회중들에게 어떤 일들이 일어나고 있는지 가능한 한 모든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기도의 초점을 우리가 알고 있는 것에 따라 맞춰야 합니다. 그리고 쓰러진 자를 일으켜주시고 시험당한 자를 회복시켜주시고 그들이 온전하여 질 때까지 경주할 수 있도록 위로와 격려를 해주시며, 어둠의 고통 가운데 있는 자를 위로하시는 그리스도안에서 만족하는 것입니다. 어떠한 교회든지 이러한 모든 종류의 문제들을 가지고 있습니다. 세 번째로 복음의 교리와 진리를 지키는 것은 목사와 교사의 의무입니다. 말씀을 온전하게 지키고 모든 대항에 맞서 그것을 지켜가는 것은 교회에 위임됩니다. 사도 바울이 디모데에게 준 책무를 살펴봅시다. "디모데야 네게 부탁한 것을 지키고" (딤전 6:20) "우리안에 거하시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네게 부탁한 아름다운 것을 지키라" (딤후 1:14) 이모든 임무는 목사인 우리 모두에게 주어졌습니다. 진리와 아름답고 축복받은 것을 지키라! 사도바울은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 이 교훈은 내게 맡기신 바 복되신 하나님의 영광의 복음을 좇음이니라" (딤전 1:11) 이것은 모두 우리의 믿음에 맡겨집니다. 우리는 모든 방해들로부터 그것을 지켜내야 합니다. 교회를 터라고 한다면, 진리는 교회의 목사들로 인하여 떠받쳐지고 선포되어지는 기둥입니다. 그러나 이것이 전부입니까? 아닙니다. 교회는 "군기를 두려고 건축한 다윗의 망대 곧 일천 방패, 용사의 모든 방패가 달린 망대"(마 4:4)입니다. 복음의 목자는 모든 역경과 반대자들로부터 진리를 지켜내는 방패요 망대입니다. 교회는 수 천 개의 힘있는 자의 방패와 망대를 지녀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진리를 잃고 말 것입니다. 목사는 복음의 설교 가운데 진리를 전파할 뿐만아니라, 모든 압제로부터 그것을 지키고 방어합니다. 믿음의 방패와 망대를 들고서 말입니다. 그렇다면 이 일을 위해 필요한 것이 무엇일까요? 1. 우리가 그렇게도 지키고자 하는 교리와 진리에 관한 명확한 이해가 필요합니다. 진리는 죄악 뿐만아니라 우유부단함과 약점에 의해서도 잃어버리게 됩니다. 우리에게 만일 진리에 관한 적절한 근거와 원리들에 대한 충분한 이해가 없다면, 절대로 그것을 방어/변증할 수 없습니다. 반박하는 자의 입을 막는 것은 모든 수단과 방법을 통해 얻어질 수 있지만 무엇보다 끊임없는 기도와 성경연구를 통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2. 진리에 대한 사랑이 필요합니다. 우리 영혼 가운데 역사하는 진리에 대한 체험과 깨달음으로부터 진리에 대한 사랑과 소중함이 우러나오지 않는다면, 우리가 어떠한 진리를 알고 있다해도 우리는 진리를 위해 성실하게 싸울 수 없을 것이며, 절대로 그것을 "살 수도 팔 수도" 없을 것입니다. 이 문제와 관해서는 좀더 자세한 설명을 드릴 수 있습니다. 저는 이런 논의를 시작하기 전에 이미 복음의 진리를 지키기 위해 시작된 논쟁을 알고 있었고, 또한 그런 논의를 시작한 초기의 사람이였으며, 자신의 삶과 영혼을 위하여하듯 진리를 지켜가는 신실한 목사들을 알고 있습니다. 그들을 향한 어떠한 압제와 저항도 절대로 그들을 낙담케 할 수 없었습니다. 이 같은 교리란 무엇입니까? 영원히 변치 않는 예정의 교리, 실제적인 하나님께로의 회심(개종)의 교리,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행악자들의 완고함에 대한 심판의 교리. 이러한 진리는 기술의 부족이 아닌 사랑의 부족 때문에 잃어버리게 됩니다. 우리는 그들 중 어느 하나도 제대로 듣지 못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교회속에서 그런 진리들을 언급하는 것을 부끄러워하는지도 모릅니다. 사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자신에게 던져지는 회중들의 비방과 비웃음을 참아내야만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절대로 진리를 부끄러워해서는 안됩니다. 예전에 우리는 신실한 목사가 아닌, 신실한 목사에 의해 인간 영혼의 타락과 파멸이라고 간주되었던 알미니안주의자들의 잘못을 보았었습니다. 당시에는 그것에 관한 어떠한 논쟁이나 글 역시 두려움의 대상이였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그렇지 않습니다. 복음의 교리는 진리에 대한 우리의 사랑이 너무나 부패함에도, 그것을 주목하는 사람이 적다해도 여전히 능력과 깨달음을 지니고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이런 교리들의 설교를 듣고도, 성실하게 교회에 나감에도 더욱 경건해지지 못하고 더욱 신실해지지 못한다는 사실에 아무도 핑계치 못할 것입니다. 3. 생명과 평안과 능력을 찾는데 의무를 태만이 한 우리의 선배들의 관점으로, 관점에 반하여, 특별한 경우 그것에 관한 새로운 견해의 경향들을 살펴보겠습니다. 우리가 칭의의 교리와,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의 중요성과 일반적(general)적 구속에 대한 다툼과 논쟁과 그리고 성도들의 궁극적인 구원에 대하여 무관심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자들이 누구입니까?. 그들의 삶과 영혼이 이런 문제에 관해 무관심했을 때 누가 그들 가운데 평안과 능력을 발견할 수 있겠습니까? 만약 우리가 그들과 같이 하고도 동일한 평안함을 발견하지 못한다면 우리는 이런 진리를 지탱해 나갈 수 없을 것입니다. 나는 신실한 목사들 가운데 종교개혁의 삶으로서, 성경의 목적과 범위안에서 간구하는 기도가운데 예정된 자유의지의 교리와 같은 중요한 진리들을 소중히 여기고 그것에 관하여 열망을 갖는 커다란 변화가 있기는 바래왔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그것에 점점 더 무관심해져가고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고통받는 끔찍한 타락들은 칭의의 교리가운데서 받아들여져 종교의 모든 핵심 요소들을 약화시키고 있습니다. 우리 시대의 남겨진 자들을 위하여 "진리를 사고 그것을 팔지 맙시다." 우리 회중들 가운데 일어나는 어떤 일이든 관심을 갖고 열심을 냅시다. 두 마음을 품은 자 한 사람이 회중가운데 들어오면, 나머지 회중들이 가장 신실한 믿음가운데 서로서로 지어져 가는 것보다 더 커다란 분란을 일으킬 것입니다. 불법을 말하는 악한 자들이 우리가운데 생기기 않도록 주의하십시오. 그것은 사악한 늑대가 양무리들을 가르고 찢고 분열시키는 방법입니다. 4. 사탄의 영악한 궤변을 발견하여 깨뜨리기 위해서는 기술과 능력이 있어야 합니다. 능력있는 기도, 경계함, 그리고 성실이 필요합니다. 이것은 우리를 능력가운데로 이끌어 줄 것입니다. 덜 훈련되어진 자는 좀더 능숙한 자에게 도움과 협조를 위해 조언을 구하십시오 마지막으로, 교회의 목사와 교사에게 요구되어지는 또 하나의 의무를 언급하겠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영혼들의 개종(구원, 회심)을 위해 성실하게 수고하는 것입니다. 이 일은 목사에게 위임된 것입니다. 나는 이것을 언급하지는 않겠습니다. 그러나 잘못된 몇 가지의 편견들을 수정할 것입니다. 교회의 궁극적 목적은 모든 그리스도의 교회를 부르고 훈도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단지 구경만하라고 목사를 세우시지 않으셨습니다. 그들은 모든 시대에 걸쳐 택함받은 자들을 모으고 부르는 도구입니다. 이것은 본질적으로 목사가 해야하는 임무입니다. 나는 사람들이 개종하거나 회심을 하는 또 다른 외적인 수단과 방법이 있음을 고백합니다. 오랜 관찰 끝에, 나는 얽매인 고통가운데 처해있는 일반적으로 정신적 사고능력이 높은 사람들이 회심을 시작하게 되며, 종교적인 의식에 의해서도 하나님을 믿을 수도 있다는 사실을 발견합니다. 때론 말씀가운데 하나님의 섭리를 위해 실제적인 영적 은사를 받은 자들을 통해 회심하는 자들도 많이 있고, 가끔은 그것에 관해 부르심을 받기도 합니다. 그러나 원칙적으로 영혼의 개종(회심,구원)은 교회의 목사에게 부여된 임무입니다. 다음과 같은 사실을 주목하십시요. 말씀의 첫 번째 대상은 온 세계입니다. 우리의 임무는 사도들의 그것과 같습니다. 그러나 방법은 정반대입니다. 사도들은 그들에게 부여된 임무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사도들에게 부여된 첫 번째 임무는 유대인과 이방인들 가운데 있는 죄인들에게 그리스도를 확신시키고 그리스도의 품으로 그들을 인도하는 것이였습니다. 또한 이를 위해 믿지 않는 자들에게 말씀을 전하고 그들을 그리스도께 인도하는 것이 그들의 방법이였습니다. 그러나 이것과는 대조적으로 사도 바울은 세례를 주는 것이 그들의 주된 임무가 아님을 밝히고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나를 보내심은 세례를 주게하려 하심이 아니요 오직 복음을 전케하려 하심이니"(고전1:17) 내가 말한 것과는 반대로 복음을 전하는 것이 그들의 주요 임무였습니다. 그리고 나서 그들의 두 번째 임무는 그리스도께서 그들에게 명령하신 모든 것을 다 지켜 행하며 행동하는 제자들을 가르치는 것과 그들을 교회의 질서체계로 데려오는 것이였습니다. 이것이 그들의 방법이였습니다. 오늘날 똑같은 임무가 교회의 목사에게 주어졌습니다. 그러나 반대의 방법으로, 즉 목사의 첫 번째 대상을 교회입니다. 교회를 세우고 성도를 훈련시키는 것입니다. 그 다음엔 무엇입니까? 그들의 또 다른 의무 즉 영혼 구원을 위해 복음 전파하는 것은 하지 않아도 됩니까? 하나님은 절대 용납하지 아니하십니다. 교회의 목사된 자들이 영혼 구원을 위해 어떻게 설교해야 하는지에 대한 몇 가지의 방법을 말씀드리겠습니다. 1. 회심하지 않은 다른 사람들이 목사가 설교하는 회중 가운데로 온다면 그들은 목사로서의 의무 이행을 통해 하나님께로 회심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들은 "아니다"라고 말합니다. "그것은 단지 영적 은사들을 통해 목사의 직분으로서 교회에 설교하는 것이다" 라고 말합니다. 어느 누구도 자신의 양심가운데 이 같은 구분을 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이 장소에 500명의 사람들이 있고 그 가운데 100명의 성도가 있다고 생각해 봅시다. 당신은 구별할 수 있겠습니까. 내가 두 배의 능력을 가지고 어떤 사람에게는 목사로서 말씀을 전하고, 다른 사람에게는 목사가 아닌 자로서 말씀을 전한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그런 목적을 다른 어떤 것으로 표현하는 것은 체계도 질서도 없고 논리적이지도 자연스럽지도 않은 사고방식입니다. 우리는 목사로서 설교를 듣는 자들의 영혼의 회심을 위해 설교를 하는 것입니다. 2. 목사는 때때로 믿지 않는 영혼의 회심을 위해 다른 곳에서 복음을 전하기도 합니다. 그들은 어떤 내용을 전파한다하여도 목사의 직분으로서 전하는 것입니다. 나는 로마 교회의 "영구 직분"의 교리를 알고 있습니다. 그것은 한 구역내에서 성직자로 임명된 사람은 그의 성직자로서의 직분을 잃지 않는다는 것을 말합니다. 만약 그가 이전에 교회에서 감독이나 목사 혹 집사의 직분을 맡았다면 비록 그가 더 이상 그리스도인이 아니라고 하더라도 그 직분을 잃지는 않습니다. 이 교리의 기원은 중세의 스콜라 신학시대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Nice의회는 Miletus가 임명했던 감독이나 장로 혹 해임된 주교들은 그들의 직분을 수행하기 전에 재임명되어야만 한다는 법령을 공포하게 되었습니다. Dr. Campbell은 그의 "교회사 강의"에서 "영구 직분"에 대하여 논평한 적이 있습니다. 그는 (11장)에서 로마교회의 영구 직분에 관해 다음과 같이 논평하였습니다. "그들이 동의한 전부는 이것이다"- 그들은 무엇이, 어떻게, 어느 곳에서 성도들에게 감동을 주었는지 모르는 어떤 것, 그 어떤 것은 절대로 삭제될 수 없다- 이것은 허구입니다. 그러나 목사의 직분은 사람들이 해외로 나갈 때 집을 떠나듯 그렇게 떠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만약 법에 의해 면직되거나 파면되기 전에는 목사로서 설교하는 것을 가로막는 것은 목사 자신의 능력밖에 없습니다. 그리스도께 회심한 영혼들을 위해 다른 장소에서 설교하는 것을 명령하실 때, 잠시 동안 그들의 직분을 내려놓는 것은 모든 교회의 임무입니다. 지난 시대를 돌이켜 보면 수많은 영혼들을 하나님께로 인도하기 위해 사용되어진 훌륭한 목사들이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이 목사로서가 아니라 은사를 받은 자로서 사람들을 개종시키는 것을 금하셨습니다. 나는 말합니다. 그 모든 것은 직분의 부름심을 받은 자 만이 아니고 은사를 받은 자들에 의해서도 가능하다고 말입니다. 그러나 어느 누구도 목사로서의 재능과 은사의 끊임없는 훈련을 위해 자신을 포기하고, "주님 내가 여기 있사오니 나를 보내소서"라고 주님께 기도하지 않았습니다. 내게 시간과 힘이 더 있었다면, 나는 택함 받은 자들을 인도함에 있어, 그것을 위해 필요한 것과 목사의 의무 중 가장 큰 부분인 모든 종류의 신자들의 심령을 위로해주고 방향을 제시해주는 의무-이를 위해서는 신중함과 세심함, 순결함(거룩함), 겸손함, 인내가 요구된다.-에 대해서 말했을 것입니다. 나는 또한 교회의 질서와 체계 가운데 목회자의 의무를 보여 주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그들에게만 주신 교회의 법칙(체계/질서)은 복음 전하는 위대하고 중대한 의무를 벗어나는 것이 아니고 때와 시간이 허락할 때마다 복음을 전하는 것이였습니다. 마지막으로는, 교회 공동체를 경영하기 위해서, 모범적인 담론과 체계가 다른 교회들과의 연합속에서 목회자의 의무를 생각해 보았습니다. "이 모든 것을 하기에 능한 이가 누가 있겠습니까?" 기도하십시요, 우리를 위해 기도하십시요. 그리하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힘과 능력을 주실 것이며, 우리 형제님들은 바로 오늘 이 모든 일을 위해 부르심을 입은 자가 될 것입니다. 이러한 모든 것을 마음에 새기고 형제들에게 도움을 청하는 것은 우리 모두에게 결코 헛된 것이 아님을 명심하십시오 번역 : 홍상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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