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낮은 데 임한 성탄의 은혜 (눅2:1-7)

by 【고동엽】 2021. 10. 17.

낮은 데 임한 성탄의 은혜   (눅2:1-7)
  

성탄절은 온 세상 사람들이 기뻐하는 날이지만 그 날에 태어나신 예수 님은 서러움을 겪으셔야만 했습니다. 본문에 "사관에 있을 곳이 없음이러라." 그래서 예수님은 외양간에서 태어나 말구유에 뉘어졌는데 만왕의 왕이신 메시야가 말구유에 태어나신 의미가 무엇이겠습니까? 말구유에 태어나신 것은 하나님께서 낮은 데에 은혜가 임하게 하고 겸손한 자들에게 은혜 주신다는 것을 보여 주신 것입니다. 또 화려하고 찬란한 외모를 꾸민 숙소가 아니라 진심으로 섬기는 가축의 외양간에 오신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외모를 꾸민 겉치장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중심에 섬기는 자들에게 은혜 주신다는 것을 말해 주고 있습니다.
이 세상 구석구석에는 '여기는 그리스도가 머물 곳이 없음'이라는 푯말이 나붙어 있습니다. 이런 푯말은 유흥업소만이 아니라 가정, 거실, 식당, 응접실, 부엌 등에도 나붙어 있습니다. 마음이 변화되지 않은 사람은 어디를 가든지 이 푯말을 붙여 놓습니다. 변화되지 않은 마음에는 예수님을 위한 곳이 없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거처가 있으되 오직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마 8 : 20).

1. 낮은 데 임한 성탄의 은혜
성경에 "서로 마음을 같이하며 높은 데 마음을 두지 말고 도리어 낮은데 처하며 스스로 지혜 있는 체 말라"(롬 12 : 16)."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되었고"(빌 2 : 6)라 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겸손입니다. 겸손은 자기를 숨기는 것입니다. 인간은 누구나 자기를 나타내려고 합니다. 요즘 세상을 자기 피알(P.R)시대라고 합니다. 그래서 목사의 명함에도 여러 가지의 감투가 적혀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러나 은혜가 임한 곳은 낮은 곳이었습니다.
세례 요한은 "예수님은 흥해야 하겠고, 나는 쇠해야 하겠다. "고 말했는 데 바로 이것이 겸손입니다. 곧 낮은 데 처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왕이요 만장의 왕이 마구간에 오셨습니다. 왕궁이나 호텔, 호화로운 저택에 서 태어나신 것이 아니라 사람이 거하시 않는 마구간에 오셨습니다. 마구 간은 낮은 곳입니다. 스스로 크다고 교만해 하는 자는 물리치시고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주시기 위하여 낮은 곳에 임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낮은 자, 겸손한 자에게 하나님의 은혜가 넘치게 됩니다.

2. 섬기는 자의 본을 보이기 위하여 외양간에 오셨습니다.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요한의 어머니가 예수님께 나와 간청하기를 "예수님이 나라를 얻으시면 우리 아들 야고보는 예수님의 오른편에, 요한은 왼편에 앉게 해주시오."라고 청탁했을 때 다른 제자들은 이 일에 대하여 신경을 곤두세우고 분하게 생각했습니다. 예수님은 형제를 불러다가 이르시되 "이방인의 소위 집권자들은 저희를 임의로 주관하고 그 대인들이 저희에게 권세를 부리는 줄 너희가 알거니와 너희 중에는 그렇지 아니하니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모든 사람의 종이 되어야 하리라. 인자의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요, 도리어 섬기려 함이니라. "고 말씀하셨습니다.
황제의 궁전에는 머물 곳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 곳은 권세를 부리는 자들이 거하는 곳이요, 섬기는 자가 태어나는 곳이 못되었습니다. 원로원의 회당도 비어 있었습니다. 국민의 대표자들이라고 하면서 국민을 위하는 사람들이라고 말은 하지만 실제로는 국민을 위한 대변자가 아니라 자 기들의 실리만을 추구하는 자들이었습니다. 이런 곳에도 예수님은 태어나 실 수가 없었습니다. 상류사회라는 호화스러운 저택에도 방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곳에는 모두 부질없는 것으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향락을 위한 사치스러운 방, 정욕을 불태우는 남녀를 위한 방은 있었으나 께 시야를 위한 방은 없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외식이 아니라 사람들을 섬기는 가축의 잠자리에서 태어나신 것입니다. 비록 오물로 인하여 냄새 가 나지만 탐욕과 외식과 허위로 가득한 인간들의 거처에서보다 순수한 섬김의 마구간이 더 적당한 곳이었습니다.

3. 업신여김을 받으신 이스라엘의 왕
베들레헴의 그날 밤, 만일 요셉이 어떤 집에라도 가서 그 마을에서 영 광의 주님이 태어나시기로 되어 있다는 것을 충분히 납득시키셨다면 저들 은 "여기가 우리 집에서 가장 좋은 방입니다. 이리로 오셔서 필요하신 것 은 어느 것이라도 다 쓰십시오."라고 말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요셉이 이집저집을 돌아다니며 방을 구했을 때 저들은 "방은 말할 곳도 없고 마루에도, 휴게실에도 예수님이 머물 곳은 없소."라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이것이 바로 모든 세대를 통하여 이 세상이 안고 있는 문제점입니다. 세 상에는 여태껏 그리스도를 위한 방이 없으며 인간의 마음에도 그리스도가 머물 곳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사람들의 마음은 세속적인 욕망과 쾌락을 즐기려는 생각으로 가득 차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스의 위대한 전사(戰士)이자 이타가 성의 왕이며 트로이 전쟁의 가 장 유명한 영웅 중의 한 사람인 율리시스의 이야기 중의 한 부분입니다. 그가 20여 년간을 고향을 떠나 전쟁과 유랑생활을 마친 뒤 섬나라로 돌아왔을 때, 그는 자기의 왕궁이 몇몇 무례한 영주들에게 점령당한 사실을 발견했습니다. 그들은 율리시스의 재산을 방탕하게 허비할 뿐만 아니라 그의 통치권을 빼앗고, 오랫동안 율리시스를 기다리고 있던 그의 애인 페렐로푸에게 서로 경쟁하듯 청혼하고 있었습니다. 이 사실을 안 율리시스는 분노를 삼키면서 현명하게도 그 자리에서 그의 신분을 드러내지 않았습니다. 만일 그 자리에서 율리시스가 신분을 노출했다면 이 무례한 청혼자들은 곧 그를 그의 집밖으로 쫓아내고 몰염치하게도 그에게 그의 재산과 영지를 포기하고 그의 왕국으로부터 떠나라고 명령했을 것입니다. 아니 어쩌면 그의 목숨을 빼앗을지도 모르는 일이었습니다. 율리시스는 이렇게 부당한 일을 당했었습니다. 그러나 율리시스가 당한 일은 그리스도가 당한 일에 미치지 못합니다.
예수님께서 이 세상을 구원코자 세상에 오셨을 때 거기에는 그가 누울 방 한 칸조차도 없었습니다. 사관으로부터 쫓겨났던 만왕의 왕은 초라한 말구유에서 나셔서 기이한 광경에 놀란 마구간의 가축들에게 쌓여 있었습니다.
금년 성탄절에는 마구간에 태어나시지 않도록 우리의 가장 소중한 곳에 모십시다. 우리의 마음이 겸손해져 낮아져야 하겠고, 우리의 중심에 외식이 없는 진실로 채워져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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