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 그루노브 엮음, 이신건/오성현/이길용/정용섭 옮김, 대한기독교서회, 2009년 이신건 죽은 신학자의 교회 몇 해 동안 네 명의 번역자들이 함께 끙끙대며 번역해 온『칼 바르트의 신학묵상』이 드디어 세상 빛을 보게 되었다. 벅찬 감격을 뒤로 미룬 채, 서둘러 이 책에 관한 서평을 쓰려고 마음을 먹으니, 생뚱맞게 "죽은 시인의 사회"라는 영화가 문득 떠오른다. 이 영화에서는 젊은 학생이 자살을 통해 애석하게도 일찍 죽는다. "바르트"는 천수(天壽)를 누린 후에 늙은 나이에 죽었다. 이 둘이 대관절 무슨 상관이 있단 말인가? "죽은 시인의 사회"에서는 고등학교에 새로 부임한 선생이 새로운 수업 방식으로 학생들에게 신선한 충격을 주지만, 결국 부모의 반대에 부딪친 학생의 자살로 인해 그의 수업 방식은 실패하고, 그리하여 선생은 학교를 떠나게 된다. 여기서 실제로 죽은 사람은 한 명의 학생뿐이지만, 영화는 전통적 수업방식 앞에서 새로운 수업방식, 아니 그의 교육철학이 죽었다는 것을 극명하게 보여준다. 아니 영화는 학생의 꿈을 고려하지 않는 출세지향의 교육은 그 자체로서 완전히 죽은 교육이라는 것을 고발한다. 오늘의 교회에도 신학은 거의 죽은 것만 같다. 신학대학에서 배운 신학은 교회 현장에서 대부분 사장되고 만다. 아니 때로 신학은 교회의 천적(天敵)으로 여겨지기도 한다. 비록 과거의 목회자들의 교육 수준은 낮았지만, 그래도 그들은 신학의 중요성을 간과하지 않았던 것 같다. 비록 그들의 설교는 내용적으로는 빈약했지만, 그래도 뼈대가 있는 설교를 하려고 애쓴 모습을 보았다. 하지만 지금은 어떠한가? 교회와 교인과 더불어 신학자의 수도 엄청나게 불어났지만, 교회에서 신학은 도리어 점점 더 실종되고 있다. 온갖 프로그램과 이벤트 때문에, "꿩 잡는 게 매"라는 결과주의 때문에, 무엇보다 천박한 자본주의에 편승한 경쟁적 성장주의 때문에 신학은 거의 실종되고 있다. 신학은 까마득한 시절의 추억거리처럼 되었고, 신학 공부는 단지 목회자가 되기 위한 통과의례로 여겨질 따름이다. 더욱이 교회 현장에서 신학은 종종 목회의 방해꾼과 성장의 거침돌로 여겨지기 일쑤다. 목회자들도 나이가 들수록 사색이 더 필요해질 텐데, 도리어 신학을 점점 더 멀리하는 모습을 본다. 불교의 고승은 위대한 깨달음의 스승으로 존경을 받지만, 교회의 늙은 목회자는 천박한 욕심쟁이로 자주 손가락질을 받는다. 물론 숫자는 미미하고 세력은 미약하지만, 성서에 깊이 천착하려고 애쓰는 목회자들이 전혀 없지 않다. 그리고 성경을 깊이 읽고 묵상하려는 평신도들도 주위에 적지 않다. 그들은 참으로 교회의 희망이다. 하지만 그들의 손에 신학서적, 특히 조직신학 관련 서적이 들려 있는 경우를 찾아보기는 매우 어렵다. 그러므로 그들의 성서 이해가 얼마나 주관과 상황에 치우치기 쉽겠으며, 그래서 그들의 행동이 얼마나 시류와 욕망에 휘둘리겠는가! 물론 성서를 항상 신학의 안경으로만 읽어서는 안 될 것이다. 성서가 때로는 신학을 비판하고 파괴하기도 할 것이다. 그러나 성서는 궁극적으로 신학을 세워야 하고, 오직 신학 위에서만 번성할 것이다. 신학을 무시한 성서 읽기는 "장님 코끼리 만지기"보다 더 어리석고, 신학 전통을 무시한 목회는 "정처 없는 나그네"처럼 이리저리 방황할 것이다. 죽은 신학자 되살기 이런 척박한 형국 속에 바르트의 책 한 권이 또 다시 세상 밖으로 뛰쳐나왔다. 왜 하필 다시 바르트의 책인가? 얼마나 많은 바르트의 책이 세상에 나왔는가? 더욱이 바르트의 신학은 얼마나 늙었는가? 아니 그의 신학은 이미 죽은 것과 다름이 없지 않은가? 당대의 그의 고민이 오늘 우리의 고민과 무슨 상관이 있겠는가? 더욱이 그의 신학이 오늘 우리에게 무슨 신통한 대답을 줄 수 있겠는가? 아마도 독자들은 이런저런 비판을 살천스레 던질지도 모를 것이다. 그러나 한 번 다시 생각해 보자. 지금 우리 주위에 널려 있는 바르트의 책들은 대부분 "그 자신의 책"이 아니라 "그에 관한 책"이 아닌가! 온갖 찬양과 비난으로 얼룩진, 그리고 갖가지 이해와 오해로 일관된 책들이 과연 우리에게 얼마나 도움이 되었겠는가! 물론 오만하거나 태만하거나 기만적인 책을 통해서라도 우리는 그의 신학을 조금이라도 엿볼 수 있었음을 고맙게 생각해야 할 것이다. 만약 이런 책들마저 없었다면, 우리는 어디에서 그의 웅장한 신학을 엿볼 수 있었겠는가! 그런 점에서 험산 준령에서 거친 돌을 캐내어 힘겹게 갈고 닦아 아름다운 보석을 빚어온 학자들의 수고를 결코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하지만 남의 입을 통해 듣는 바르트의 말보다는 바르트 자신의 말을 직접 듣는 것이 훨씬 정확하고 생생하게 들릴 것이다. 다행히도 최근에 바르트 자신의 책들이 적잖게 소개되었다. 몇 가지를 소개하자면,『로마서 강해』,『교회 교의학』,『교의학 개요』,『사도신경 해설』등이 있다. 이 자리를 빌려, 번역자들의 노고에 심심한 감사와 존경을 표하고 싶다. 하지만 솔직히 말하건대, 유감스럽게도 어떤 책은 너무 어렵게 번역되었고, 어떤 책은 너무 틀리게 번역되었다. 바르트의 글이 워낙 길고 어렵기 때문에 대개의 번역은 난산(難産) 끝에 태어난 미숙아 혹은 기형아와 같다. 두 언어와 두 세계를 완벽하게 이해하기는 참으로 어렵다. 인간으로서 실수하는 것도 어쩌면 자연스럽다. 그러므로 번역된 책은 의혹 속에서 읽혀져야 하고, 그래서 계속 다시 번역되어야 한다. 그리고 새로운 어법에 맞는 번역도 계속 나와야 한다. 남의 불행이 나의 행복이 아니듯이, 남의 결점도 나의 장점은 아니다. 이 책의 번역도 결코 완벽할 리가 없다. 바르트의 문장은 때로는 숨을 쉴 수 없을 만큼 길고, 때로는 헤어 나오기 어려울 정도로 깊다. 그의 수사학은 얼마나 현묘하며, 그의 논리는 얼마나 심원한가! 더욱이 그의 논리 전환은 때로는 번개처럼 빨라서 따라잡기 매우 어렵고, 때로는 굼벵이처럼 느려서 눈치 채기도 어렵다. 그래서 네 명의 번역자들은 썩은 이를 앓듯이 오래 앓아야 했고, 머리를 맞대고 지혜를 짜내야 했다. 다행히 서로 백짓장을 맞든 결과로 이만한 작품이라도 세상에 내어놓을 수 있게 된 것이 참으로 신기하고, 우리 스스로 기특하다. 비록 오역의 가능성이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독자들은 이만한 바르트 번역을 찾아보기 거의 쉽지 않을 것이다. 이 책을 통해 독자들은 예전에 맛볼 수 없었던 바르트 신학의 진면목을 여실히 맛볼 수 있을 것이다. 이 책을 통해 독자들은 마치 거의 죽은, 아니 완전히 죽었다고 생각되는 바르트의 신학, 아니 바르트 자신이 꿈틀대며 일어나는 느낌을 받을 수 있을 것이다. 아니 다시 살아난 바르트가 우리 앞으로 성큼성큼 걸어와서, 때로는 우렁차게 부르짖고 때로는 유혹하듯 속삭이는 목소리를 들을 수 있을 것이다. 마치 세례 요한이 가냘픈 손가락으로 하나님의 아들을 가리켰듯이, 무상한 목소리로 하나님의 진리를 토해내는 바르트의 웅변을 들을 수 있을 것이다. 이처럼 생생한 그의 목소리를 어디서 들을 수 있겠는가! 교회여, 다시 깨어나라! 나는 감히 장담한다. 만약 독자들이 이 책을 매일 읽는다면, 그들의 지성은 놀랍도록 깨어날 것이다. 만약 독자들이 매일 성서와 함께 이 책을 묵상한다면, 그들의 영성은 눈부시게 비상할 것이다. 물론 독자들에게 성서 묵상은 매우 낯익은 말이지만, 신학 묵상은 매우 낯설게 들릴 것이다. 신학은 연구의 대상이지, 묵상의 대상이 아니지 않은가? 신학은 토론의 재료이지, 묵상의 재료가 아니지 않은가? 독자들은 그렇게 묻고 싶기도 할 것이다. 결코 그렇지 않다. 신학도 묵상의 훌륭한 대상이고 재료다. 성서도 일종의 신학 서적이 아닌가? 그리고 신학도 일종의 신앙의 표현이 아닌가? 어떤 경우에는 신학이 성서보다 이해하기 더 쉬우며, 신학을 통해야만 성서의 세계로 더 깊이 들어갈 수 있다. 그리고 바르트보다 더 깊이 성서를 깊이 주석한 신학자를 찾아보기 어렵다. 이 책의 주된 내용을 차지하는『교회 교의학』은 온통 성서 주석으로 도배되어 있다시피 하다. 그런 점에서 이 책을 통해 한국 교회는 지성적, 영적으로, 그리고 실천적으로도 한 단계 더 높이 비약할 기회를 포착할 수 있을 것이라고 확신한다. 온갖 방법과 전략을 잠시 내려놓고, 다시 근본과 근원으로 돌아가 보자! 마지막으로 이 책에 대한 자세한 이해를 돕기 위해 편집자의 머리글의 일부를 여기에 옮겨 놓는다. 이 책은 독자들로 하여금 한 해 동안 매일 한 가지 주제를 읽고 묵상할 수 있도록 인도합니다. 이 책이 다른 묵상서적과 다른 점은 성경 말씀을 설교하거나 해석하는 것으로만 그치지 않고, 이를 넘어서 각 본문마다 묵상하고 생각할 수 있도록 돕는다는 데 있습니다. 이 책은 독자로 하여금 관찰하고 생각하고 함께 고민하도록 인도합니다. 이 책은 개별적인 내용을 넘어서 더 큰 맥락 안으로 인도합니다. 비록 각각의 내용이 그 자체로서 완결된 것이고, 그래서 그 자체만으로도 독서할 가치를 지니지만, 이 책의 작은 제목은 더 큰 맥락을 제공합니다. 성경 구절이나 편집인이 붙인 제목은 매일 읽어야 할 내용의 주제를 제공합니다. 경건 훈련을 통해 영적인 생활을 영위하기를 원하는 사람들은 이 책을 통해 도움을 받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바로 이런 목적을 위해 이 책이 나름대로 기여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비록 이 책의 방향이 교회의 절기보다는 정치적인 혹은 다른 세상적인 자료들과 주제들에 맞추어져 있더라도, 이 책의 근간이 되는 달력은 주님의 생애에 맞추어졌습니다. 이 책은 교회의 절기에 맞는 상당한 분량의 설교 자료들을 제공해 줄 수도 있을 것입니다. 매일 빠짐없이 이 책을 읽는 독자들은 절기마다 다른 때보다는 더 많은 시간을 할애하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독자들은 여러 부분을 잇달아 읽을 각오도 되어 있어야 합니다. 독자들이 이 책을 통해 더 큰 맥락을 이해할 수 있다면, 더 이상 바랄 것이 없겠습니다. 편집인은 독자들을 염두에 두고 신학적으로 내용이 풍부하고 표현이 매우 다채로운 바르트의 저서들을 엮으려고 노력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자료의 목록을 보면 알 수 있듯이, 교의학 외에도 수많은 저서, 여러 글, 강의, 설교와 강연이 활용되었습니다. 우리는 이 책 안에서 칼 바르트가 다양한 음조와 많은 방언으로 말하는 것을 듣게 됩니다. 그의 말은 질문하고, 찌르며, 돌격하거나, 밀어붙입니다. 그의 말은 엄격하고 논리적으로 엄밀하거나, 느슨하고 자유롭습니다. 그의 말은 무작정 돌진하거나, 조용히 가라앉습니다. 그의 말은 어려운 사상을 구사하거나, 어린이의 말처럼 단순합니다. 그의 말은 경배 찬송의 형태를 띠거나, 시처럼 감동적입니다. 그의 문장은 매우 길거나, 매우 짧기도 합니다. 그의 언어는 종종 하나님과의 직접적인 대화로 이어집니다. 우리는 다시금 히틀러의 시대 혹은 교회투쟁의 시대로 되돌아갑니다. 그리고 우리는 학생들과 함께 강의실에 앉기도 하고, 설교를 듣는 회중들과 함께 교회의 의자에 앉기도 하고, 죄수들과 함께 형무소 안에 갇히기도 하며, 교수들과 함께 한 회의에 참석하거나, 대의원들과 함께 고백교회의 총회에 참여하기도 합니다. 그를 통해 우리는 만물을 위한 하나님의 놀라운 은총을 믿고, 이해하고, 생각하고, 말하는 법을 배웠습니다. (기독교사상 2009년 6월호 게재) 출처 : http://www.sgti.kr/bookreview/45.htm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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