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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 바르트 기독론 및 예정론 비판

by 【고동엽】 2021. 10. 14.
제 5 강 칼 바르트 기독론 및 예정론 비판
칼 바르트 기독론 비판(서재주 교수)
1) 서론
일반적으로 바르트(K. Barth)의 신학을 기독론(Christology)적 신학이라 부른다. 그러나 이
기독론은 하나로서 전체를 함의하는 기독론적 일원론(Christomonism)이다. 왜냐하면 그의 모
든 신학의 중심에 하나님의 말씀으로 계시된 예수 그리스도가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바르트
신학을 기독론적 집중신학(Christological -centric theology)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그리스
도 중심의 기독론적 집중은 그의 신학의 장점임과 동시에 치명적인 문제점을 내포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다시 말해, 기독론적 집중이라는 말은 기독론이 삼위일체론, 계시론, 창조론, 선택론,
화해론과의 밀접한 상호관련성 가운데서 이해되어야 함을 의미한다. 그러나 이 글의 논지상 바
르트의 신학의 전체를 다룰 수 없다. 그런 점에서 우리는 바르트의 전 기독론을 다루기보다는
전통적인 기독론의 입장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과 사역의 조화라는 관점에서 바르트의 기
독론을 비판적으로 살펴볼 것이다.
바르트의 신학의 특징은 이미 말한 대로 기독론적이다. 그러므로 바르트는 “신학의 모든 사
유는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출발해야 하고 하나님의 성육신된 말씀인 그가 신앙과 신학의 근거
요, 그 기독교성을 검증하는 규범”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이 기독론적인 특징은 삼위일체론으
로 해석되며, 그리스도의 계시는 삼위일체론에 근거하고 또한 삼위일체론은 그리스도의 계시와
분가분리의 관계에 있다. 삼위일체에 근거한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만을 신학의 출발점으로 삼
기 때문에 계시와 종교, 철학과 신학에 있어 어떤 긍정적인 관계도 부인한다. 이러한 그의 독
특한 신학적 사유로 말미암아 바르트의 신학은 기독론적 집중과 더불어, 신학의 환원주의적 특
성, 계시의 실존성, 그리고 인식론의 신학의 한계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그러므로 칼 바르트의 기독론은 역사적 예수의 신성을 부인하고 변증법적 계시 이해를 그의
신학에 전개함으로 역사적 예수를 실존주의적으로 취급하는 오류를 범한다. 그는 예수를 역리
로, 승리자로, 원역사로 이해하며 역사세계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신화로 취급하는 오류를
범하고 있다. 즉, 역사를 예수 그리스도와 분리시키는 잘못을 범하고 있는 것이다. 또한 바르
트는 18세기 역사주의적 신학을 극복하기 위하여 지나치게 초월성을 강조함으로 말미암아 기
독교를 구름 위를 걷는 초월 종교로 만들어 버리고 말았다.
이러한 바르트의 기독론적 집중신학의 배경은 대체적으로 18세기 칸트(I. Kant, 1724-1804)
의 계몽주의 철학과 헤겔(G.W.F. Hegel, 1770-1831)의 정신현상학적 변증법과 키에르케고르
(Søren Kierkegaard, 1813-1855)의 실존철학이라 할 수 있다. 또한 기독론과 관련하여 바르
담당교수 : 서재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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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는 역사적 예수의 탐구로 알려진 19세기 자유주의 신학에 대한 반동으로 시작된 켈러의 『소
위 역사적 예수와 역사상의 성경적 그리스도』(So-Called Historical Jesus and the Historic
Biblical)에서 비롯된 이중적 역사 이해로부터 시작된 “위로부터 기독론”이라 불리는 신학적 토
대위에 세워져 있다. 이러한 서론적 이해를 바탕으로 바르트의 기독론을 “그리스도의 인격과 사
역”의 조화라는 관점에서 비판적으로 살펴 볼 것이다.
2) 계시로서 예수 그리스도
이미 서론에서 말한 것처럼, 바르트의 기독론은 “위로부터 기독론”이라는 신학방법을 통해
세워진 신학 방법이다. “위로부터 기독론”은 영원 전부터 계신 하나님의 삼위일체와 제 2의 위
격이신 선재하신 그리스도로 출발하여 성육신을 통하여 우리에게 계시된 그리스도를 진술하는
방법이다. 이 방법은 초대교회부터 전통적으로 내려온 기독론에 대한 신학 방법론이다. 그러나
바르트의 “위로부터” 방법론에 의한 ‘기독론’은 전통적인 “위로부터” 기독론의 내용과 다르다.
왜냐하면 바르트의 기독론은 예수 그리스도를 삼위일체의 제2의 위격으로 계신 하나님의 아들
이 아닌, 삼위일체의 하나님 안에 용해되어 버린, 하나님과 그리스도, 또한 성령의 실재들의
구분을 모호하게 해 버린 기독론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는 전통적인 삼위간의 인격(person)
의 개념을 포기하고 존재방식 혹은 세 “양태”라는 것으로 표현한다. 그리고 하나님의 자기 계
시는 “셋 되심으로 계시는 하나 되심”으로 표현되며, 하나님 되심과 계시를 구별하기 위하여
“하나 되심 속에 셋 되심”이라 표현한다. 이 두 가지 표현을 합하여 “하나 속에 있는
셋”(Three-in-One)이라 한다.
이처럼 바르트는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 성령과의 관계를 “세 존재방식”으로 표현하는데,
이 관계를 가장 먼저 계시와 그리스도의 관계로 설명한다. 바르트는 이 관계를 그의 『교회 교
의학』(Church Dogmatics)에서 “교의학의 시금석으로서 하나님의 말씀”으로 기술한다. 그리고
이 “하나님의 말씀”은 “선포된 하나님의 말씀”,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 그리고 “계시된 하나님
의 말씀”이다. 이러한 바르트의 하나님 말씀의 삼중적 형태는 전통적인 칼빈 개혁주의와 다른
계시 이해일 뿐만 아니라 성경과 하나님의 말씀은 다르다는 것을 의미한다. 다시 말해, 성경은
단지 인간의 기록으로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라 하나님이 그 안에서 말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이
된다.’ 그러나 한편으로 “성경은 하나님이 그것을 자기의 말씀이 되게 하시며 하나님이 그것을
통하여 말씀하시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이다.” 따라서 성경은 과거에 일어난 하나님의 계시
자체가 아니라 이 계시에 대한 증거이다. 그러므로 바르트에 있어 성경과 계시는 동일한 것이
아니다. 이것을 바르트는 “증거를 형태를 가진 하나님의 이미 일어난 계시”라고 말한다. 따라서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되는 사건 속에서 성경과 계시는 하나가 된다.”
계시된 말씀은 “하나님 자신의 자기표현, 즉 예수 안에서 성육신이 되신 말씀이다. 그런 의
미에서 하나님이 자신을 계시하신 것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삶과 죽음, 부활만이 인간에게
자신을 보이시는 유일한 계시인 것이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는 ‘말씀이 육신이 되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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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가운데 거하시는 것이다.’ 이것이 그리스도 인격이며 동시에 그 안에서 일어난 화해이다.
그러나 바르트에게 있어 더욱 중요한 것은 말씀하시는 하나님이 계시의 주체이며 동시에 객체
가 된다는 점이다. 이것은 계시된 그리스도를 통하여 자신을 보이기도 하시고(Deus
revelatus) 자신을 숨기시기도(Deus absconditus) 하는 하나님을 의미한다. 이것을 바르트는
하나님의 계시성과 은폐성이라고 한다.
하나님의 자기표현으로 이 계시된 말씀인 예수 그리스도는 단지 오늘날 역사에서 실존적으
로 만날 때만이 우리의 주가 되시고 우리의 그리스도가 된다. 다시 말해, 하나님은 “신적 현
재”(gottliche Prasens)를 통해 인간 역사에 개입한다. 그런데 이 신적 현재라는 시간은 우리와
같은 시간이 아니라 하나님에 의해 창조된 시간이며, 제3의 시간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삶
과 부활과 제3의 시간에서 일어나는 계시이다. 이러한 계시 사건으로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바르트의 생각이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는 실존성은 강조했다 할지라도, 역사 가운데 실
제적으로 고난을 받으시고 죽으시고 부활하신 그리스도 되심과 하늘의 보좌에서 우리의 기도
를 들으시며, 하늘에 승천하사 오늘도 우리의 중보가 되시는 2천 년 전의 역사적 사건이 아니
라 역사 발생적(geschichtlich) 사건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를 이해한다. 이것은 바르트의
기독론이 성경의 말씀과는 무관한 그리스도가 되어 버리는 결과를 낳는다. 따라서 바르트의 계
시로서 예수 그리스도는 추상적, 사변적 인식의 그리스도 이해이다.
바르트에게 있어 계시는 하나님 자신이 직접 하시는 말씀으로 그 말씀은 말씀하시는 행위와
구별되지 않는 하나님 자신이다. 다시 말해, 인간에게 ‘너’(Thou)라고 말씀하시는 행위를 통해
서 인간과 대면하시는 ‘나’(I)와 구별이 없는 말씀이다. 그래서 바르트는 계시를 “말씀하시는 하
나님의 인격”(Dei loquentis persona)라고 부른다. 그러므로 바르트에 있어 계시는 하나님의 말
씀이며 하나님 자신과 동일시된다. 그렇다면 왜 바르트는 계시를 삼위일체론적인 구조로 설명
하는가? 그것은 자기 계시를 하시는 하나님은 누구인가라는 필연적인 논리적 질문에 기인하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대답하기를 “하나님의 계시 개념은 성경과 선포가 말하는바 예수 그리스도
아버지, 예수 그리스도 자신, 그리고 성부와 성자의 성령이신 하나님의 계시이다.”
계시 가운데서 하나님은 자신을 주로 계시하신다. 하나님이 주되신다는 것은 그의 계시를 통
해 인간을 향하여 자신을 주로서 계시하신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바르트의 계시관은 즉시 기독
론으로 바뀌게 된다. 이것은 하나님 자신이 인간을 향하여 보이시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계시 속에서 하나님은 자유롭게 자신을 결정하시며 그 계시에서 인간 사고의 대상이 된다.
반면 예수 그리스도는 감추어진 하나님(hidden God)과는 달리 모양을 입은 제 2의 위격의 모
습을 나타난다. 그리고 계시된 예수 그리스도는 세 인격들(personalites) 중의 하나가 아닌, 동
일한 본질(same identical essence) 가운데 있는 하나님 자신과 같은 존재이다. 그런데 이 하
나님과 같은 존재로서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divinity)은 우선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찾
아지는 것이 아니라 타자(Other then Jesus)에게서 발견된다. 바르트는 이것을 계시와 관련하
여 “그 자체의 방식과 정도(degree)에 있어 바로 하나님이요 바로 인간 그 자체로 계시에 속
하는 것”으로 한다. 그러면서 바르트는 그리스도가 본질에 있어서 신적이라고 말한다. 이는 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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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스도와 하나님과의 관계성이 하나님의 사역과 행위 속에서 본체론적 일치라기보다는 구원
사역의 내용에서 신적이라는 의미이다.
3) 그리스도와 삼위일체론
칼 바르트는 삼위일체론을 그의 『교회교의학』 제1권 후반부에서 다루고 있다. 바르트에 있
어 기독론은 필연적으로 계시론과 더불어 삼위일체론과 함께 다루어져야 한다. 왜냐하면 바르
트의 삼위일체론은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로부터 출발하기 때문이다. 바르트의 삼위일체론이 예
수 그리스도의 계시로부터 출발한다는 것은 특별한 의미를 가진다. 그것은 다름 아닌 여타의
추상적인 보편적인 신 개념이나 여타의 존재론적인 유비에서 유추된 삼위일체론을 거부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 말은 바르트의 삼일일체의 논의가 어떤 전제성을 가지고 출발하는 논의가
아니라 “하나님이 자기를 계시하는바 그의 통일성과 다양성을 이해할 때 삼위일체의 문제에
도달하는” 결과가 되는 때문이다. 이는 바르트의 삼위일체가 성부 하나님이 잠정적으로 성자와
성령의 형태로 나타나는 본질적으로 혹은 본성적으로 하나이신 하나님이 “세 번의 반
복”(Wiederholung)가운데 나타나신 “하나 됨 속에 있는 셋 되심”의 양식이다. 이것을 바르트는
하나님의 “자기 자신의 삼중적인 반복”이라 한다.
바르트에 있어 “삼위일체론은 ‘계시의 해석’이요, 계시는 ‘삼위일체론의 근거’이다.” 그리고 이
삼위일체는 단지 계시의 해석만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 안에서 자기를 계시하시는 하
나님의 해석’이다. 그래서 바르트는 철저하게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로부터 삼위일체론을 다루
고 있다. 즉, 삼위일체론적 관점에서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제 2의 존재 양태(mode of
being)가 된다. 이것은 진정으로 계시되는 하나님의 모습이다. 이러한 삼위일체의 뿌리가 되는
것은 계시이다.
바르트는 삼위일체론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아버지의 계시에 대한 중보자로서, 하나님과 관계
하는 자로 인식한다. 이는 예수 그리스도를 본질적으로 하나님과 동일한 신성을 가진 자로 고
백하는 것과 같다.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선재로서 그리스도의 신성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행위는 신적 존재의 행위요 이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의 모습이다. 이 하나님의
행위는 바르트의 화해의 교리에서 잘 보여주고 있는 바, 하나님의 행위(act of God)란 화해
(reconciliation)의 역사에서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나타나심을 보이시는 사건이 된다. 바
르트는 이것을 “하나님 아들이 인간인 나사렛 예수와 하나가 되는 행위 속에서...자신을 낮추시
고... 인간의 본질과 신적 본질을 화합시킨 것”으로 표현한다. 그래서 바르트에게 “계시를 말하
는 것은 ‘말씀이 육신이 되었다’라는 말과 같다.” 곧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화해 행위요,
계시 행위가 되는 것이다.
이것은 그리스도의 인격과 사역에 사역에서 그리스도의 인격과 사역을 구분하지 않고 계시
란 측면에서 인격과 사역을 하나로 이해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그리스도의 사역이 인격 속에
감추어져 버리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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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과적으로 계시로서 예수 그리스도가 인격을 가졌다는 것은 하나님의 행위로서 사역을 의
미한다. 바르트는 이를 “한 인격이라는 존재가 행위 속에서의 존재이며, 더 엄밀한 의미에서
행위에 있어서 ‘존재가 오직 하나님에게만 돌려진다면, 인격이라는 존재가 주는 개념은 하나님
의 존재만을 이해할 따름이다...하나님은 그의 행위 속에서 존재하신다”고 말한다.
이러한 기독론으로서, 계시론으로서, 신론으로서, 삼위일체론은 바르트가 기독교적 계시이해
와 하나님에 대한 이해, 더 나아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이해의 토대로 삼았다는 것을 분명히
한다. 바르트는 말하기를 “하나님의 말씀은 하나님의 자기 계시로서 하나님 자신이시다...이것
이 계시에 관하여 의미하는 바는 하나님 자신이 손상 받을 수 없는 통일성과 손상될 수 없는
상이성을 지닌 계시자, 계시, 계시됨(Revealer, Revelation, Revealedness)이다.”
2. 칼 바르트 예정론 비판
바르트는 예정론은 “복음의 총화”로 이해하며 전통적인 예정론을 새롭게 구성하고 이해하는
시도를 하였다. 바르트의 신학이 19세기 자유주의 신학에 대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교회의 신
앙의 중심에 놓고 관심을 가지도록 했다는 점에 있어서 그 의미를 가진다 할지라도, 그러나 여
전히 바르트의 신학은 자유주의 신학적 전제인 “철학적”이고 “인식론적”이며, 추상적인 한계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바르트는 계시를 통하여 신앙이 들어오고 신앙 안에서 얻어지는 지식을
말할 뿐이다. 그러므로 인식론적이고 철학의 체계를 벗어나지 못한다. 이것은 인간의 모든 죄
를 인식론적으로 그리스도 안에서 처리하여 버렸음을 의미한다. 그런 점에서 바르트의 예정론
은 구원의 실재성이 배제된 체계를 위한 체계의 진술에 지나지 않는다.
1) 바르트의 예정론의 위치와 기초
전통적으로 선택론은 하나님의 “사역”으로 이해되고, 특히 칼빈은 이것을 그의 “구원론”에서
취급한 반면, 바르트는 선택론을 “하나님의 존재론적”으로 이해하고 “신론”에 위치에 두고 있
다. 이것은 전통적으로 예정론의 기초가 하나님의 절대 작정(Decretum Absolutum)과 전능하
신 하나님의 의지에 두는 반면, 바르트는 이것을 비판하고 예정하신 하나님이 아닌 구체적인
사건, 곧 예수 그리스도 안에 나타난 하나님의 예정에 대하여 물어야 한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바르트는 왜 이런 시도를 하고 있는가? 그것은 바르트의 신학적 사고와 방법론에 기인한다. 다
시 말해, 바르트는 이미 칸트의 철학적 전제를 가지고 “신론”을 구성하는데, 하나님을 “절대타
자”로 인식한다. 이 “순수 실재”로서 하나님의 존재는 자신을 계시하지 않는 한 절대로 인간에
게 인식될 수 없다. 그런 점에서 하나님의 자기 계시와 성경의 계시는 동일하지가 않다. 절대
타자로서 하나님이 자신을 계시하시는 방법은 그리스도를 통해서이다. 그러므로 오직 그리스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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를 통해서만 하나님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이러한 바르트의 기독론적 신학은 “하나님이 자기의 존재를 인간의 존재와 동일시
하시고 인간의 존재를 거룩한 존재에 참여하는 존재로 변형시키는” 은혜의 신학이 되게 한다.
바르트에 있어 은혜는 주거나 거둘 수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게 속할 수도 있고, 속하지
않을 수도 있는 하나님의 한 속성이다. 따라서 이 은혜의 특성이 가장 잘 나타나는 것이 바로
바르트의 선택론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그는 “전통적인 선택론이 그리스도가 택하시는 하나님
이며 동시에, 선택된 인간이라는 사실을 정확히 인식하지 못했다”고 비판한다.
이러한 은혜의 특성을 다룬 바르트의『교회 교의학』(Church Dogmatic)은 총 IV/11(혹은
12권)로 구성되어 있다. 그리고 그의『교회 교의학』II권은 “신론”으로 “절대 타자”로서 하나님
의 자유의 실현으로, 하나님 자신의 은혜로우신 선택을 담고 있다. 그래서 바르트의 선택론은
신론이라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기본적으로 하나님의 인간선택은 단지 인간이 아닌 하나님
자신의 예정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바르트가 선택론을 하나님 자신의 존재로 이해하고 있다는
의미이다. 이러한 출발점은 하나님의 “자유 가운데 사랑하는 자”라는 개념으로 더욱 분명해진
다. 이는 바르가 하나님의 본질을 “사랑”으로 또한 사랑의 표현으로 “선택”을 의미한다. 즉, 하
나님의 존재가 선택의 행위로 이해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 점에서 바르트의 선택론은 창
세 이전에 있던 하나님의 원결정이며 바르트 신학의 토대라 할 수 있다. 하나님으로 인간을 선
택하셨고, 하나님은 자유 가운데서 사랑하는 모든 자에게 인간이 되신 이것을 바르트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선택론의 복음의 종합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인간을 선택하시고 하나님이 인간을 자유롭
게 사랑하시는 분으로서 인간을 위해 계신다는 것은 예전에 없던 좋은 소식이기 때문이다. 이
선택론의 근거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동시에 선택하시는 하나님이요 또한 선택되신 분이라는
지식이다. 선택론은 신론에 속한다. 왜냐하면 본래 하나님의 인간 선택은 인간뿐만 아니라 하
나님 자신을 예정하셨기 때문이다.”
이것은 또한 바르트가 선택의 교리를 계시의 말씀 안에서만 이해하려는 토대를 제공한다. 바
르트는 하나님의 존재(Being)를 하나님의 행위(act)로 본다. “하나님은 자신의 계시 안에 있는
하나님이다. 하나님은 자신과 우리들 사이의 관계를 만드시고 찾는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우리
를 사랑하신다. 그러나 하나님은 하나님의 자유 안에서 성령과 성자와 성부로서 우리 없이 사
랑하는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은 자신으로부터 그의 삶을 가지신다.” 따라서 결국 바르트의 신
학에서 선택론은 하나님의 존재가 사역을 의미하는 것이 되어 버린다. 이것은 전통적인 하나님
의 존재와 사역의 구분을 없애 버리는 결과를 가져왔다.
바르트에 있어 하나님은 사역(works)의 하나님이다. 이것은 하나님의 행동이 사건으로 존재
로서 자신을 계시하는 것이며,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의 사건을 의미한다. 이 사건은 삼위일체
의 자유와 사랑 가운데서, 이중적으로 자신을 선택하시는 은혜의 선택으로, 영원한 구원의 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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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을 통한 결단을 말한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인간의 죄와 죽음을 자신의 몫으로, 자기의 영원한 생명과 구원을 인
간의 몫으로 결단한 것이 하나님의 선택이요, 이 행위는 하나님의 존재와 같은 것이다. 따라서
바르트는 선택과 하나님의 행위와 존재의 관계를 다음과 같이 말한다.
“하나님은 그의 아들과 말씀 안에서 자신을 선택하는 것 이상이 아니다. 하나님 자신 안에서
자신과 함께 그의 백성을 선택하신다. 하나님이 사랑이시고, 사랑하시는 한에 있어서, 사랑의
행위 안에서 선택하는 하나님으로 그의 모든 존재를 결정하신다.”
이것은 바르트가 예정 선택론을 하나님 자체로 이해한다는 뜻이다. 바르트에 있어 하나님은
선택하는 존재 자체이자 행위 이상의 것이 아니다. 이러한 시도는 전통적인 예정론의 교리와는
도무지 같이 할 수 없는 시도이다. 한편, 신론으로서 바르트의 예정론은 예수 그리스도를 떠나
서는 생각할 수 없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존재는 예수 그리스도의 존재로, 인간의 존재는 예수
그리스도의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주님이 되신다. 이것이 은혜로운 선택 교리이며 복
음의 총체이다. 복음의 내용은 예수 그리스도이다. 하나님은 자유와 은혜 안에서 주님으로 나
타내고 하나님의 말씀이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 한다.
이런 점에서 예수 그리스도는 선택하시는 하나님이시고 동시에 선택하는 인간이다. 예수 그
리스도는 “선택된 자”로 혹은 “유기된 자”로 말할 수 있다. 예수 그리스도의 선택은 하나님의
자기 계시이고 말씀의 증거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선택은 자기 계시의 중심에 위치한다.
하나님은 그를 그의 아들로서 말씀으로 그 어떤 것보다 그 자신을 선택하셨다. 그 자신이 그
의 백성을 그 안에서 그리고 그를 통하여 선택하셨다. 이것이 하나님의 사랑이시며, 사랑의 행
위로서 전 인류를 선택하신 것이 된다. “선택하시는 하나님의 지식 안에서 인간의 믿음의 확증
이 성립 된 것이다.” 선택하시는 하나님은 구원하기 위한 선택을 행하신다. 따라서 이러한 바
르트의 선택론에 대한 위치는 신론으로서 예정론을 이해하는 것이며 은총의 선택 안에 있는
“하나님의 자유, 둘째는 그의 자유 결정 안에서 하나님의 신비, 셋째는 그의 자유의 신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의를 복음적인 이해의 빛 안에 놓여야만 한다고 주장한다.”
전통적으로 예정론은 하나님의 존재 자체는 구별되는 별개의 하나님의 행위이다. 그러나 바
르트는 예정을 하나님의 존재자체에 속하는 것으로 이해한다. 다시 말해, 하나님은 오직 예정
하는 자로서 존재할 뿐이다. 그러므로 예정론의 위치는 신론에 속하는 것이며, 예정론의 기초
는 하나님 자신에 속하는 문제이다.
결과적으로 바르트의 교의학의 위치로서 선택론이 곧 신론이라는 사실은『기독교 강요』보
여주는 있는 선택을 하나님의 자비와 작정에 근거한 인간에 대한 구원행위가 아니다. 그래서
바르트에게는 하나님의 선택하심과 부르심에 대한 확신과 그에 대한 성화의 표가 중요하지 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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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따라서 신앙이라는 것은 단지 그리스도의 선택에 대한 정초(Orientation)에 불과한 것이다.
그러므로 그에게 신앙이란 단지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진 하나님의 선택에 대하여 아는 지식
일 뿐이다.
2) 예정론의 인식론적 근거와 하나님의 의지
바르트 예정론의 인식론적 근거는 예수 그리스도이다. 바르트에 있어 예수 그리스도는 “선택
하시는 하나님”임과 동시에 “선택된 인간”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행동의 근거이며 사
랑과 자비의 표현이다. 그래서 바르트는 예정론을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일어난 구체적인 사건
으로부터 출발한다. 따라서 이는 곧 “성경에 따른 하나님의 자기 계시”에 따르는 것을 의미하
며 하나님의 자기 계시에 따른다는 것은 하나님의 계시로서 예수 그리스도가 인식의 근거가
된다. 이는 결과적으로 “하나님과 하나님의 사역과 계시에 대한 성서적 증거 안에서 그의 고유
한 기능을 수행됨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의 모든 구원의 행위는 인간을 선택하신 하나님의 은혜로운 선택 안
에서 이루어진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에 의한 “선택된 인간”인 동시에 “선택하시는
하나님”이다. 즉,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가 선택의 주체인 선택하는 하나님이라면, 인간
의 아들로서 그는 또한 선택의 대상인 선택된 인간이다. 그는 선택된 한 사람으로서 뿐만 아니
라 모든 다른 사람들이 또한 그 안에서 선택됨으로 그러하다.
그래서 바르트는 철저하게 오직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만 하나님의 찾으며 예수 그리스도 안
에 나타난 하나님의 의지와 결단, 영원한 선택에 대하여 묻는다. 이는 하나님의 영원한 예정의
의지는 그리스도 존재 밖에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그의 존재 안에 있으며, 하나님의 영원한
작정은 하나님의 영원한 의지시며 하나님의 영원한 의지는 예수 그리스도이다. 따라서 예수 그
리스도의 계시 안에서 하나님은 자신을 우리에게 알게 하신다. 예수 그리스도의 선택 속에 나
타난 하나님의 영원한 의지는 성자의 성육신 안에서 자신을 주시는 하나님의 의지이다. 바르트
는 하나님의 영원한 의지로서 자기 수여(self-giving)는 “우리가 버림을 받지 않도록 버림을
받으셨다”는 것과 그리스도 안에서 인간을 계약 당사자게 되게 하셨고 자신의 영영광속으로
이끄신 것이다.
이는 예수 그리스도가 오직 예정의 인식론적 근거로서 이해되어야 하며, 예수 그리스도를 떠
나서는 어떤 예정의 인식도 있을 수 없음을 의미한다.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원
행위”의 근거이며, 예수 그리스도는 이 행위에 대한 하나님의 결정이며 그 자신이 신적 행위이
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의지와 행위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드러난다. 그리스도 밖
에서는 하나님을 절대로 알 수 없다. 이것이 기독론 중심이라 부르는 이유이다.
이제 바르트에 있어 하나님은 그리스도 안에 숨겨진 하나님(deus absconditus)이 아니라 계
시된 하나님(deus revelatus)으로 나타난다. 그리고 이 하나님의 의지는 결정되어 있는 예정이
아니라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역사의 형태 안에서 나타나는 신적 행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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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시 가운데 나타난 하나님의 자유는 세상의 어떤 피조물도 그에게 대적할 수 없으며 장애
가 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인간은 단지 하나님에 대한 현실적인 자유만을 갖는다. 현실
적인 자유란 하나님께만 복종할 수 있는 자유를 말한다. 하나님의 자유는 어떤 피조물에도 제
한을 받지 않으시며 영원 전부터 인간을 구원하시기로 정해 놓으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무조건적인 은총을 감사로 받아들이도록 하는데 있다.
두 번째 하나님의 신비는 하나님의 선택의 신비로 피조물에게는 은총과 자비의 은혜이다. 하
나님의 신비는 모든 자아 결정에 선행하며 무조건적인 긍정이요 피조물이 언제나 그 아래 살
아야 하는 예정이다. 이러한 선택의 신비 그 자체는 피조물의 평온 상태를 의미하는 것이다.
선택의 신비를 고백하는 것은 하나님의 선택을 수용한다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선택의 역사 가운데 나타난 하나님의 의는 하나님의 심판을 의미한다. 심판의 의
는 용서와 은총과 선택과 축복을 제시한다. 하나님은 인간의 죄를 용서하심으로 심판하시며,
하나님의 지혜로 계시되는 평화를 통해서, 그 자신의 의를 적용시키고 판단하신다. 이 의는 인
간을 버리는 의가 아니라 인간의 구원을 일으키시는 자비로운 의이다.
3) 보편적 선택
바르트에 있어 선택과 관련하여 영원한 작정이 역사 속에서 실현되어지는 순서는 예수 그리
스도, 선택된 공동체인 이스라엘과 교회, 개인의 선택이다. 이는 바르트가 개인의 선택에 앞서
언제나 그리스도의 선택과 공동체의 선택을 우선시함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개인의 선택은 하
나님의 영원한 작정 가운데서 이루어서 예수 그리스도의 선택과 버림이라는 이중적 예정
(Praedestinatio gemina) 가운데서 이루어진 사실을 확인하는 것이다. 개인에 대한 하나님의
자기희생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일어났으며, 그것은 영원 전부터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결정
된 일이다.
이러한 선택은 바르트에 있어 보편적 선택이라는 개념으로 이해될 수 있다. 다시 말해, 인간
의 구원을 위한 하나님의 영원한 의지는 영원 전부터 예수 그리스도를 예비 하시고 예수 그리
도 안에서 인간을 선택하시기로 작정하신 것이다.
이 그리스도 안에 나타난 하나님의 작정 속에 하나님의 본질이 있다. 그리스도 안에 나타난
하나님의 본질은 사랑이다. 이 사랑은 선택된 인간 예수에게는 고난과 죽음으로 저주받은 자를
위하여 고난을 당함으로 인간을 선택받게 하시는 것으로 나타난다. 그러므로 실제로 버림을 받
은 자는 예수 그리스도시며 인간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모두 선택을 받은 자이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는 ‘유기된 단 한 분’이시다. 이것을 바르트는 다음과 같이 표현한다.
“하나님께서는 자기와 개별화 된 인간에게 합당한 버림을 하나님의 태초의 뜻 가운데서 자기
가 담당하셨다. 이와 같이 하나님의 뜻에 따라 유일하게 버림받은 인간이 자기 자신의 아들이
시며, 하나님의 유기는 아들에게 돌려졌고 다른 사람에게는 해당되지 않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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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하나님의 선택은 인간에게 하나의 ‘가능성’으로 주어졌다. 그리고 가능성이 현실화되는 것
은 선택의 가능성을 받아들일 때만이 현실이 되는 것이다. 이 영원 전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일어난 하나님의 선택은 시간 속에서 구체화된다. 그러므로 선택은 믿음의 사건이다. 결국 바
르트의 선택론의 구조는 영원하신 삼위일체 하나님 안에서 일어난 사건이며, 시간 속에서 일어
나 그리스도의 사건은 이 선택의 사건을 보여주는 것이 된다. 결과적으로 바르트의 선택의 구
조는 인간의 응답과 상관없이 그리스도 안에서 이미 모든 인간을 보편적으로 선택한 것에 있
다.
4) 선택하시면서 선택받으시는 예수 그리스도
예수 그리스도는 선택된 자일 뿐 아니라 “선택하시는 하나님”이다. 먼저 예수 그리스도는 삼
위일체 하나님 안에서 선택된 자이다. 이 선택을 바르트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은혜의 선택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모든 방법과 사역의 영원한 시작이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자유로운 은혜 안에서 죄인을 위해서 하나님이 되시기로, 인간을 위
해 죄인이 되기로 결단하셨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인간의 버림받음과 그 모든 결과를 스스로
걸머지시고 그의 영광 속으로 참여시키기 위하여 인간을 선택하셨다.”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가 선택의 주체이신 하나님이시며 또한 참인간으로 선택의 대상이 되
셨다는 것을 의미한다. 인간의 선택은 이 참인간이신 그리스도 안에서, 선택의 주체이신 그리
스에서 안에서 선택되어 진다. 그래서 바르트는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서 있
는 분(person)으로 묘사한다. 따라서 그리스도는 중보자로서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이시고
동시에 인간이다.” 이것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그래서 바르트는 예수 그리스도는 “신적 자
유 그 자체”이며,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자기 신비의 계시“라고 표현한다.
또한 선택의 주체이신 그리스도는 동시에 참 인간으로서 선택의 대상이 되시는데, 그것은 인
간을 구원하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영원한 결단으로 나사렛 예수를 그 대상으로 삼아 그 안에
서 인간과의 계약을 집행하고자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는 자신의 인격 속에서
선택된 자로서 모든 사람의 죄를 대신하고 그들의 수치와 저주를 대신하여 죽임을 당하여 버
림을 받은 자가 된다.
이제 모든 인간은 그리스도의 선택과 함께 모두 선택되었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떠나서 그리
스도와 함께 관계없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와 함께 선택되었다. 이것은 우리의 소명과 부르심
의 근거가 된다. 이것을 바르트는 다음과 같이 정리한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우리의 선택을 그에 의해서, 하나님의 의지인 그의 의지에 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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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서, 이루어진 선택으로 계시하였다. 이분은 자기 자신이 우리를 선택하시는 분으로 우리에게
말씀하신다... 그리고 확신을 가지고 예수 그리스도를 붙들어야 한다. 왜냐하면 역사의 배후에
있어서 하나님의 태초에 작정된 것, 곧 말씀되었고 살아 계시는 유일한 말씀이 바로 하나님의
결정이기 때문이다.”
선택하심의 주체로서 예수 그리스도는 삼위일체의 한 존재이기 때문에 삼위일체 안에서 “그
자신의 선택”이다. 이것은 칼빈주의 전통에서 말해지는 예수 그리스도를 선택의지의 계시로 이
해하는 것이 아니라 창조 이전의 ‘원 역사’에서 성부와 성자와 성령이 함께 주체적으로 선택의
주체가 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바르트의 선택의 주체가 되시고 객체가 되는 예수 그
리스도의 선택은 전통적인 하나님의 작정(absolutum decertim)의 교리를 불가지량(unknown
quantity)으로 치부해 버리고 기지량(known quantity)인 예수 그리스도만 주장하는 결과를 가
져온다. 또한 선택의 주체와 객체로서 예수 그리스도로써 이중예정은 전통적인 칼빈의 이중예
정과는 전혀 다른 양상을 보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는 바르트의 이중예정이 오직 예수 그
리스도만이 유일한 유기자란 의미에서 하나님을 반대하는 자들도 선택받은 자라는 결론에 이
르게 된다.
5) 공동체의 선택과 개인의 선택
바르트에 있어 “공동체는 그것의 선택을 반대한 이스라엘이면서 동시에 그 선택의 기초 위에
서 부름받은 교회이다.” 교회는 하나님의 자비를 드러내는 것으로,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진노
를 보여주는 것으로 사용된다. 이 두 공동체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중의 선택처럼 두 가지 증거
로 기능을 가진다. 교회로서 공동체는 하나님의 “자비”로, 약속을 “믿는” 공동체로, “다가오는
형태”(coming form)로, 이스라엘로서 공동체는 하나님의 “심판”으로, 약속을 “듣는”공동체로,
“지나가는 형태"(passing form)의 특성을 지닌다. 그리고 그리스도 안에서 일어난 공동체는 개
인의 선택을 포함한다.
또한 이 공동체는 분해할 수 없는 통일성을 가지며 또 함께할 수 없는 차별성을 가진다. 이
통일성과 차별성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선택이 믿어지고 알려질 때에만 알 수 있다. 그
런 점에서 이스라엘과 교회는 선택의 중간적이고 중재적인 대상이다.
바르트는 “하나님의 심판과 자비”라는 관점에서 이 공동체의 통일성과 차별성을 말하고 이스
라엘은 선택으로부터 하나님이 사람을 구출해내는 당연한 심판을 반영하는 특정한 봉사를 나
타낸다. 반면 교회는 하나님이 자비를 반영함으로써 선택의 특별한 봉사를 나타낸다. 또한 바
르트는 “듣고 믿는 하나님의 약속”의 관점에서 이스라엘은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특별한 증거를 수행한다. 반면 교회는 하나님의 말씀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고 그와 함께 그
것을 세상에 중재하는 증거의 기능을 가진다.
마지막으로 바르트는 교회와 이스라엘의 관계를 “지나가고 다가오는 사람”의 관점에서 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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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다. 다시 말해, 지나가는 형태로서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자비를 찬미하고 하나님께서 인간의
선택하는 교제 안에서 자신을 위하여 선택하는 것,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보여주는
특별한 기능을 가진다. 한편, 교회는 다가오는 사람에게 증거하며 하나님께서 그 자신과의 교
제로 인간을 선택할 때, 인간을 위하여 선택하는 것을 나타내야 하는 특수한 사명을 가진다.
이제 바르트는 공동체의 선택에 이어 개인들의 선택을 논한다. 바르트는 개인의 선택과 관련
하여 칼빈처럼 개인의 선택이 선택론의 주된 위치를 차지해서는 안 된다고 말한다. 그 이유는
개인의 선택은 이미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이미 선택되었으며, 불신자의 개인의 하나님에 대한
반항은 의미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바르트는 개인의 선택을 인류라는 관점에서 인식한다. 따라서 개인에 대한 하나님의 선택은
인류를 선택이며, 그 안에서 한 분 하나님은 한 분 성자를 통하여 한 인간을 선택하는 구조를
취한다. 다시 말해, 공동체를 통한 개인의 선택이다.
이제 복음을 통하여 각 개인은 언약을 받아들이는 사건과 결정에 의하여 선택받은 자로서
살기 시작한다. 물론 이러한 결정에도 불구하고 개인이 하나님에 대하여 반항한다 할지라도 그
것은 무익한 일이다. 왜냐하면 이미 하나님의 은총은 모든 사람을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선택으로 불렀기 때문이다. 물론 바르트도 “그는 그의 선택 대신에 버림받은 자로서 살아간
다”라고 말한다. 그러나 이것은 전통적인 택자와 유기자의 실재성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그리스도 안에 있는 논리적 역할의 의미일 뿐이다.
바르트에 있어 선택받은 자들과 버림받은 자들은 둘 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발견된다. 그
리고 개인의 선택과 유기는 각 개인의 자기 결정(self-determination)에 앞서 하나님의 자기
결정으로부터 나온다. 이 결정은 그리스도 안에서 보여지는 것이다. 그리고 각 개인은 결국 예
수 그리스도 안에서 자신들의 선택이 버려질 수 없고 하나님의 구별로부터 제외되지 않는다.
바르트는 “피택자도 유기된 자도 한 분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동떨어져서 보아서는 안 되는
것”을 강조한다. 왜냐하면 그리스도는 버림받은 자들의 유기가 되었기 때문이다. 이것을 바르
트는 유기된 자들은 하나님의 한 의지 가운데서 선택된 자들과 다른 상이한 방법으로 결정되
었다고 말한다. 이는 선택된 자가 권위 있고 적절하게 존재하는 것에 반하여, 유기자는 부적절
하게 우연하게 존재한다고 표현한다.
바르트의 이러한 진술들은 바르트의 선택론이 만인구원론이라는 비판을 면하기 어렵다는 것
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는 확실히 모든 사람을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선택된 자들로 보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결국 그의 선택은 “우리를 위하여”(pro nobis)라는 선택이다. “나”가 없는
추상적 “우리”만이 있는 개인적 선택이다.
3. 칼 바르트 신학 비판
반틸은 칼 바르트의 신학을 “철학적”이고 “인식론적”이며, “추상적”이라고 말한다. 또한 바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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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는 계시를 통하여 신앙이 들어오고 “신앙 안에서 얻어지는 지식”을 말할 뿐이다. 바르트는
죄 이해는 인식론적이고 철학의 체계를 벗어나지 못하는 불신앙적 출발점을 가지고 있다. “인
간의 모든 죄는 인식론적으로 그리스도 안에서 해결되어 버렸다.” 이것은 바르트의 신학이 불
신앙적 전제위에 세워진 신학적 진술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태생적 한계를 가진 바르트 신학이 한국교회에 미치는 바르트의 영향은 무엇인가?
우리는 그것을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을 것이다.
첫째, 신앙의 인식론화(epistemolozation)를 의미한다. 이것은 결과적으로 신앙과 삶의 괴리를
의미한다. 다시 말해, 지식을 신앙으로 생각하는 오류를 만들어낸다. 그러므로 신학은 있어도
신앙이 없는, 혹은 지식은 있어도 신앙적 삶은 없는, 신앙과 삶은 다룰 수 있다는 신앙의 세속
화(secularization)를 만들어 내는 것이다. 이것은 신앙보다는 세속적인 “합리성”, “이성적”이라
는 세속적 교회론의 토대를 제공한다.
둘째, 바르트의 예정론에서 강조되는 “은총”의 문제이다. 이미 반틸(Van Til)이 지적 하였듯
이, 바르트에 있어 은총은 전통적인 칼빈 개혁주의에서 이해되는 “은총”의 개념과는 거리가 있
다. 바르트의 “은총의 승리”는 하나님의 자유로서, 구체적으로 인성에도 속할 수도 있고 속하지
않을 수도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 개념이다. 이 “은총의 승리”로서 바르트 신학은 사람들의 구
체적인 신앙의 반성을 촉구하지 못하는 한계를 지닌다. 즉, 바르트에 있어 하나님의 은혜는 하
나님의 자유성이다. 이 자유성은 하나님의 은혜를 통하여 성도에게 회개와 성화라는 신앙의 반
성을 촉구할 수 없는 신앙적 낙관주의에 빠지게 한다. 그러므로 바르트의 “은혜의 승리”는 하
나님과 개인의 구체적인 신앙의 반성(회개, 성화)을 촉구할 수 없으므로 인본주의적이며, 세속
적 가치를 통하여 신앙의 반성을 촉구하게 하는 동기적 요인이 된다. 성도에게 “주거나 받는”
은혜가 아니라, “하나님의 자유”로서 은총의 승리는 교회와 신자에게 어떤 구원의 긴장도, 감격
도, 심판도 없는 무의미한 신학의 진술일 뿐이다. 그러나 앞서 보았듯이 칼빈의 예정 교리는
하나님의 은혜와 신앙 경험이라는 관계성 속에서 세워진다. 이것은 신자로 하여금 구원의 심각
성을 촉구하는 것이며, 회개와 감격을 촉구하는 신앙이 되도록 한다.
셋째, 바르트의 신학의 한계는 선택론을 그리스도 일원론으로서 하나님을 계시의 말씀에서
찾으려는 시도이다. 즉, 예수 그리스도의 선택은 하나님의 자기 계시이고 말씀의 증거이다. 그
런데 바르트에 있어 “계시”는 성경과 말씀과 동일하지 않다. 이러한 진술은 말씀의 실존성을
강조하는 것에도 불구하고, 그 자체 속에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신뢰하지 못하는 불신앙의
요소를 포함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이러한 바르트적 진술이야말로 한국 교회의 불신앙적 요소를 가르치는 지식적 신앙의 주범이라 할 수 있다.


출처 : http://www.dtucyber.or.kr/upload/dtucyber/lec_file/pdf/20151211_170459_0.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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