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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 바르트, ‘가까워지기에는 너무 먼 당신’?

by 【고동엽】 2021. 10. 11.

신학을 하는 이유는 사람마다 다를 수 있습니다. 그러나 포기할 수 없는 절대적인 이유가 있습니다. 신학은 교회를 건강하게 세우는 것이고 성도를 유익하게 하는 것이며,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입니다.

신학을 공부하고 연구하면서, 성경에 근거하지 않고 인간의 철학을 기초로 하여 만들어지는 것은 정말 조심하고 경계해야 합니다. 신학의 체계와 원리와 방법은 반드시 성경을 근거로 이루어져 합니다.

그런데 우리 주위를 보면 정통 신학이라고는 하지만, 기독교가 서고 넘어지는 근본 조항들을 부정하면서 정통신학이라고 하는 무리들이 있습니다. 신학에는 근본 조항과 비근본 조항이 있어서 반드시 사수하고 선포해야 될 근본 조항이 있는 반면에, 이것 외에 각 교단 신학이 추구하는 바를 성경에 근거해서 합리적으로 주장할 수 있는 비근본 조항도 있습니다.

이 땅에 유일한 신학이란 없기에 각 신학을 보며 더 좋은 신학과 바른 신학을 추구해야 하는 것이 신학도와 목회자의 자세일 것입니다.

 

그러나 십자가를 통한 구속과 그리스도의 부활과 예수 그리스도의 유일성, 인간의 원죄와 천국과 지옥 같은 교리에 있어 다른 소리를 낸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과연 기독교라고 할 수 있을지 의심스럽습니다.

기독교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사랑하며 그분처럼 십자가 지는 삶을 사는 것인데, 예수 그리스도를 한낱 인간으로 여긴다면 기독교가 될 수 없는 것이고, 이 분이 중심이 되는 성경 또한 신화로 취급한다면 기독교라 할 수 없을 것입니다. 또한 예수님이 그토록 자주 말씀했던 지옥도 부정한다면 주님을 믿을 필요가 없습니다.

그 외에도 아담의 범죄로 인해 전가되는 죄의 전가와 그리스도를 통해 전가되는 칭의의 전가는 기독교의 근본 조항입니다. 그런데 죄의 전가를 말하지 않는 신학이 과연 인간의 상태를 설명할 수 있고 하나님께 영광이 될 수 있을지 심각한 문제라 보입니다.

원죄의 전가 없이 그리스도의 의의 전가가 어떻게 효력이 있고 이루어질 수 있는지 불가능한 논리입니다. 그리스도의 의의 전가만 외친다는 것은 하나님에 대한 오해이고 왜곡된 영광의 신학입니다.

이 책은 칼 바르트와 불트만으로 대표되는 신정통주의 신학에 대해 다룬 책입니다. 이미 1권에서 자유주의 신학이란 무엇인가에 대해 좋은 책을 써주신 저자께서, 2권으로 신정통주의에 대해서 1차 자료를 바탕으로 그들의 장점과 단점을 연구하여 비교 분석하고 있습니다.

특별히 현대신학의 대부로 불리는 칼 바르트의 글은 우리가 피할 수 없는 큰 산인데, 산을 오를 때 무엇을 조심해야 하는지 그리고 멋진 경치는 어디인지 잘 소개되고 있습니다.

필자는 이 서평에서 불트만의 주장을 포함하지만, 칼 바르트를 중심으로 글을 써 보고자 합니다. 이미 한국 많은 교단과 신학교에서 그를 스승으로 여기고 그의 신학을 교과서로 삼고 있기에, 칼빈신학이 중심인 정통신학 위에 있는 사람들도 그를 무시할 수 없습니다.

게다가 바울과 어거스틴과 종교개혁 신앙으로 연결되는 정통 신학에 서 있는 자들도 은연중에 칼 바르트의 신학을 하는 자들이 있기에, 우리의 정체성을 점검하는 차원에서도 의미가 있을 것 같습니다.

자유주의를 넘다

우선 신정통주의는 자유주의 신학을 하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오히려 칼 바르트는 자유주의의 한계를 너무나 잘 알고 있었고, 그것을 뛰어넘은 사람입니다.

전쟁과 인간의 죄악으로 종교가 무너지고 불필요하게 여겨졌던 시대에, 자유주의는 종교의 필요성(슐라이어마허)을 회복한 장점이 있었고, 복음이 가지고 있는 스펙트럼을 넓혔다(리츨)는 차원에서 공로가 있습니다. 게다가 신학이 사변적이고 철학적이지 않고 실천적인 학문이 되도록 긍정적인 역할을 하였습니다.

그러나 자유주의는 인간의 이성과 과학을 맹신하고, 신학을 학문의 영역으로 끌어내린 오류가 있습니다. 하나님을 인간의 수준으로 전락시키고, 인간의 이성이 잣대가 되어 성경을 불경하게 만든 책임이 있습니다.

이런 자유주의의 한계와 문제점이 드러난 가운데, 칼 바르트는 이것을 극복하고 하나님의 존재를 높이며 성경의 권위를 세우는 역할을 감당합니다. 그의 스승들과 당시 신학자와 목회자들이 자유주의에 물들어 신앙에서 미끄져갈 때, 하나님의 자리와 신학의 위치를 지키는 보루의 역할을 합니다.

더구나 당시 교회와 신학이 히틀러에게 충성하고 국가 종교로 전락할 때, 하나님의 거룩성을 사수하고 말씀과 설교를 살려내는 위대한 일을 홀로 감당해 냅니다. 또한 전쟁의 폐허 속에서 하나님의 존재가 부정되고 말씀이 질식당할 때 그 폐허 더미에서 그것을 들어 올리는 구원자가 됩니다.

이 부분에서 우리는 바르트를 무시할 수 없고, 비판할 수 없습니다. 모든 교회가 하나님의 영광을 가릴 때 광야에서 홀로 싸운 바르트를 칭찬해 마땅하고, 아군임에도 적군처럼 버려지는 수치를 당해도 끝까지 세례 요한처럼 걸었던 그를 잊어서는 안될 것입니다.


▲칼 바르트.

하나님의 인간화

그러나 우리는 그의 초기 로마서와 후기 로마서, 그리고 ‘교회교의학’과 ‘하나님의 인간성’에 나타난 그의 신학과 변화를 보면서 조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인간과 이성이 추앙되던 시절에 하나님과 인간의 존재를 철저히 분리하여 그 차이를 드러내고, ‘말씀의 신학’이라 하여 말씀의 역할을 거의 신성시했던 그의 주장은 죽었던 것(하나님과 말씀과 교회)을 살리는 역할을 하였습니다.

그리고 인간이 얼마나 무능력하고 부패한 존재이며 하나님과 차별되는지 인간의 위치를 알려주었습니다. 그의 말대로 하나님은 전적인 타자였습니다.

그러나 중기와 후기로 갈수록 그의 신학은 성경을 근거로 한 신학이 아니라, 니체와 하이데거의 철학을 바탕으로 하여 논리를 전개해 갑니다. 그의 신학이 어렵고 난해한 것도, 성경을 따라 풀어가기보다 인간의 논리로 풀어내기에 그런 것 같습니다.

인간론에 대한 것도 그는 변증법을 따라 전개합니다. 초기와 달리, 후기에는 인간을 하나님과 동등한 위치까지 격상시킵니다. 하나님의 존재가 인간의 존재에 의해 좌우되는 것 같은 착각을 받습니다.

초기에는 하나님이 전적 타자였는데, 후기로 갈수록 하나님은 인간에게 말씀하시고 인간과 교제하시며 인간의 하나님이 되는 것 같습니다.

또한 그는 말하길 “하나님 없는 인간은 있을 수 있으나, 인간 없는 하나님은 있을 수 없다”고 합니다. 인간을 지극히 아끼는 말 같지만, 주체와 기준이 바뀐 것 같습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파트너”라고 하여, 하나님이 자기 백성에게 희망으로 존재하고 활동하며 인간을 소중히 여기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이런 그의 주장들은 인간을 하나님보다 높은 자리에 앉히는 것 같습니다. 하나님이 인간에게 말을 건네시고 나의 마음을 두드리시는 것은 구원하고 교제하기 위한 것이지, 결코 인간을 동등하게 생각해서가 아닙니다.

바르트는 신학도 신-인간학이라고 하여, 인간이 신학의 주체가 되게 합니다. 이것은 불트만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므로 바르트의 인간론은 하나님을 인간화시키는 오류가 있고 위험이 있습니다. 그의 문장과 표현은 정말 은혜롭고 감동적입니다. 그러나 본질상 죄인임을 잊게 만드는 그의 인간학은 비성경적인 인간론으로 보여집니다.

그리스도가 오신 목적

칼 바르트는 철저히 예수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한 신학을 강조합니다. 예수님은 하늘에 계시다가 하나님의 선택에 의해 인성을 입고 죄악된 세계와 하나님과의 화해를 위해 이 땅에 오셨다고 합니다.

또한 예수님은 우리와 육체는 똑같지만 인간과 하나님과의 화해를 위해 고난당했기에, 인성이 고양되었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그분의 십자가는 인간과 인류의 모든 죄를 다 짊어지신 사건이기에 인간의 죄과는 불필요하다고 봅니다.

칼 바르트의 글을 보면, 속죄가 강조되지 않고 십자가의 신학의 대속의 의미가 희미합니다. 루터와 같은 정통주의 신학은 인간의 죄와 회개와 거듭남을 강조하고 철저한 자기부정에 근거하여 말씀을 가르칩니다. 인간에 대해 부정하면서 신학이 시작됩니다.

그러나 바르트는 인간의 죄과는 이미 그리스도에게서 끝났으니 화해만 남았다 하고, 십자가에 달리기까지 순종한 그 분의 삶을 배워야 한다고 합니다. 죄라는 것은 본성 깊이 물들어 있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 앞에 머물러 있는 것이라고 합니다.

이런 주장들을 보면 그는 만인구원론자 같습니다. 세상과의 화해를 위해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셨다는 말은 정말 멋있고 매력적입니다. 속죄보다 더 큰 대의처럼 보이고 구원이 더 확장되는 것 같고 이 땅에 교회가 구원보다 더 위대한 일을 하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그의 주장에는 근본 조항을 흔드는 위험과 함정이 있습니다. 교회와 신학이 해야 할 일차적인 목적과 역할이 있는데, 그것이 삭제된 것 같습니다.

하나님의 현실성

필자는 개인적으로 바르트의 가장 위대한 업적은, 하나님의 부재 가운데 하나님의 실재를 증명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신은 죽었고 하나님은 더 이상 말씀하지 않는다며 교회와 신학에 대하여 부정하던 시대에, 하나님은 여전히 우리에게 말씀하신다는 것을 증명한 사람입니다.

하나님은 전쟁을 지켜보며 구경하는 자가 아니라, 전쟁의 공포 속으로 들어오셔서 인간과 관계를 맺으시고 말씀하시는 분이라는 것을 가르쳐준 사람입니다.

그러나 그의 신론은 한계가 있고 불균형합니다. 그의 시대가 신은 철저히 부재하고 전쟁의 참상이 극도로 드러난 시대여서 그런지 그는 사랑의 하나님과 일반적인 은총의 하나님만 강조합니다. 참 이상합니다.

오히려 신이 죽었다고 하는 시대를 보시며 하나님이 이 시대를 향해 얼마나 진노하시는지, 그리고 전쟁의 폐허를 보며 이렇게 잔인한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심판이 얼마나 무서운지 가르칠 수도 있을텐데 그는 그 반대를 주장합니다.

하나님이 역사 속에 들어오셔서 인간의 죄와 비참함에도 함께하시고 구원하신다는 말씀은 참 은혜롭습니다. 하나님의 마음과 목적도 ‘보이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세계의 실상과 인간의 본질을 미워하시고 진노하시는 하나님은 그에게 잘 보이지 않습니다.

보편적인 복음과 사랑의 하나님은 있는데, 죄를 벌하시고 경고하는 율법의 하나님은 사라졌습니다. 하나님의 현실성은 좋은데 악의 세력을 투명하게 한 그의 신론이 약해 보입니다.


▲저자 김용주 목사. ⓒ크리스천투데이 DB

결론: 신정통주의는 주류가 될 수 있을까?

필자는 몇 해 전부터 칼 바르트에 대해 관심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의 책과 글을 보며 그가 우리와는 전혀 다른 신학을 하는 사람은 아닌 것 같았고, 그가 하나님을 부정하고 신학을 무너뜨리고 교회를 훼손하는 사람이 아니라고 생각했습니다.

어릴 때부터 보수주의에서 자랐고 신학교에서도 칼 바르트를 워낙 공격했기에, 선생님들의 말을 그냥 여과 없이 들으며 그를 ‘뿔 달린 사람’으로만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졸업 이후 홀로 그의 전기와 책들을 보며, 그가 위대한 신학자이고 하나님을 구원한 사람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히틀러 우상과 시민종교를 숭배하는 교회를 떠나 참된 교회를 이어가는 교회의 신학자라고 생각했습니다.

권력과 자본과 목숨에 구걸하는 교회가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에게만 충성하는 교회를 세우는 목회자라고 여겼습니다. 목회자는 말씀에 봉사하고 말씀을 섬기는 자라는 것을 알려준 목사 중에 목사로 보였습니다.

세상과 화해하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의 마음을 알려주며. 교회의 역할과 목적을 확장시켜 준 사람이라 생각했습니다. 더구나 교회는 ‘편안한 침묵보다 불편한 외침을 해야 되는 곳’이라고 가르쳐 주는 그는, 우리 시대가 귀 기울이고 배워야 할 신학자라고 주장했습니다.

그래서 솔직히 필자는 칼 바르트에 대한 마음이 나쁘지 않습니다. 그가 하나님을 훼손하고 교회를 위협하는 자라고 말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그리스도의 유일성을 무시하는 사람처럼 보이지 않았습니다.

필자는 어쩌면 그의 시대와 그가 처한 상황이 신정통주의 신학이 나오게 된 배경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 땅에서 완벽한 신학은 없고 유일한 신학은 없다는 것을 인정한다면, 신정통주의 신학을 적으로 여기기보다 하나의 신학으로 생각할 수 있지 않을까요?

신격화된 독재 아래 하나님은 죽었고 교회는 국가의 시녀가 된 상황에서, 하나님을 이용하는 신학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 서는 신학을 한 것처럼 볼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칼 바르트는 정통주의를 계승할 수 없습니다. 복음주의자라고 하기에는 그의 신학이 무겁고, 개혁주의자라 하기에는 중요한 걸림돌이 있기에 부적합해 보입니다.

그러나 개혁주의를 16-18세기 신학만을 앵무새처럼 반복하는 것이라고 믿는 사람들보다는 더 개혁주의자인 것 같습니다.

저자는 신정통주의를 비판하고 적으로 여기지만, 늘 그렇듯이 그것에 대한 판단은 독자에게 맡깁니다. 그래서 필자는 칼 바르트가 ‘가까워지기에는 먼 당신’ 같습니다. 그의 시대가 이해도 되지만, 그럼에도 넘어서는 안될 선이 보였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어떠신가요?

방영민
크리스찬북뉴스 편집위원, 서현교회

 

출처 : https://www.christiantoday.co.kr/news/3253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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