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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기 설교[1,404편]〓/고난.종려 설교

한 수난자의 감사/단6:3-10/곽선희 목사

by 【고동엽】 2021. 10. 11.
한 수난자의 감사/단6:3-10/곽선희 목사


이번 달 가이드 포스트에 실린 이야기입니다. 미국 캘리포니아에서 '기프트 숍(Gift Shop)' 그러니까 선물 가게를 운영하는 다나 베트슨 이라고 하는 주부가 기고한 자기 경험담입니다. 그 제목은 '어 브라덜스 기프트(A Brother's Gift)', '형제의 선물'이라고 하는 그런 글을 자기 경험 속에서 실었습니다. 그녀는 전 남편에게서 낳은 스물 한 살 된 제이슨이라고 하는 아들이 있습니다. 지금 결혼한, 재혼해서 얻은 열두살 된 럭키라고 하는 딸이 있습니다. 그리고 또 네살 된 꼬마가 있었는데 이 꼬마가 심각한 병에 걸려서 죽어가고 있습니다. 이 네살짜리가 아주 악성 바이러스가 간에 침투되어서 간장이 제 기능을 발휘하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열두시간 안에 간이식을 받지 못하면 죽을 수밖에 없는 절박한 시간이 왔습니다. 의사는 말했습니다. "시간이 없습니다. 유일한 소망은 살아있는 간 기증자를 구하는 겁니다." 자, 이 급한 시간에 신장이 아니라 간입니다. 사람은 신장은 둘을 가졌어요. 혹 마음을 쓰면은 하나를 나누어 줄 수가 있지만은 간장이란 누구나 하나밖에 없는 거예요. 그것을 절반을 잘라서 주는 겁니다. 이 같은 위험한 수술을 해 주겠다고 나서는 사람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그것도 열두시간 안에……. 모두가 염려하고 걱정했고 이 어머니는 발을 동동 구르면서 지금 초조해하고 있는데 전 남편의 아들인 제이슨이 자원했습니다. 자기의 간을 나누어주겠다고. 그러나 알고 보면 이것은 이부형제(異父兄弟)입니다. 어머니는 같지만은 아버지는 다릅니다. 이것이 체질적으로 맞을까 하는 것을 걱정했습니다 만은 다행히 맞을 것 같다는 겁니다. 이런 불안한 가운데서 이제 수술을 받게 됩니다. 제이슨이라고 하는 아들과 네 살 난 딸을 이렇게 수술실에 넣어 놓고 수술 받는 동안 그는 열두살 된 딸의 손목을 잡고 수술실 문 앞에서 무릎을 꿇고 하나님 앞에 기도합니다. 잘못하면 두 자식을 한꺼번에 잃어버리게 됐습니다.

초조와 불안, 걱정, 염려, 되기도 하고 있습니다 만은 그러나 한편 생각하면 감사한 일 있습니다. 엄격히 말하면 자기 친동생도 아닌 이부형제에게 생명처럼 소중한 간을 나누어주겠다고 수술실에 들어갔어요. 그 자원하는 마음이 너무 고마워요. 이 아들이 너무 고마운 것이요. 이같이 강퍅한 세상에 '그래 이렇게 사랑스러운 내 아들이 여기에 있다.' 사랑과 그 고마운 마음이 너무 고마워서 한편으로는 감사의 기도를 드리고 수술 자체를 생각하면 걱정이고 생각하면 감사할 뿐이요. 우리 가정에 이렇게 거룩한 사랑이 있고 내 아들이 이렇게 귀한 사랑을 나타낸다는 말이요. 너무 감사해요. 한편으로 걱정, 한편으로 감사. 이렇게 초조한 가운데서 수술을 잘 마쳐서 둘 다 성공했답니다. 이것이 바로 Brother's Gift 입니다. 형제가 준 가장 귀한 선물이었다. 이 일을 놓고 어머니는 깊이깊이 하나님께 감사했습니다.여러분 언제나 감사와 염려는 엇갈리는 겁니다. 한쪽으로 걱정이 됩니다. 다시 생각하면 감사합니다. 이쪽에서 보면 걱정투성이요 이쪽에서 보면 감사할 수 있는 거예요. 그것이 세상사입니다. 그래서 아주 좋은 여건에서도 원망 불평으로 사는 사람이 있고 남 보기에는 처참할 정도의 생을 살지만은 그는 생각이 달라요. 그래서 감사하며 살아가게 된답니다.

영어에서 '띵크(Think)', '땡크(Thank)'라는 말은 어원이 같답니다. 생각한다, 감사한다, 그 뿌리가 같다는 것이올시다. 그렇습니다. 무엇을 생각하느냐가 문제입니다. 무엇부터 생각하느냐, 무엇을 먼저 생각하느냐 하는 것이고요. 또 하나는 어느 각도에서 생각하느냐가 문제입니다. 환경이 달라져야 되는 게 아니에요. 세상이 달라져야 감사할 수 있는 게 아니에요. 감사하는 생각을 가지는 사람, 다른 각도에서 보면 감사하게 되는 것이요. 겸손한 사람은 감사할 수 있어요. 믿음이 있는 사람은 감사할 수 있어요. 사랑의 시각으로 세상을 보면 어떤 여건에서도 감사, 감사할 수 있는 것이올시다.유명한 토마스 에디슨, 발명왕, 여러분이 잘 아십니다. 그는 어느 날 긴 여행을 하게 됩니다. 그는 발명을 위해서 온 시간을 바치는 사람이라 여행 중에서도 기차 안에다가 자그마한 실험실을 만들어 놓고 또 거기서 연구를 하고 있었어요. 차가 덜컹거리는 바람에 그만 약병 하나가 떨어지면서 이게 화학작용을 일으켜서 그만 연구실이 불이 났어요. 그간에 연구해 왔던 자료, 몽땅 타버리는 시간입니다. 자기 몸도 위험하게 됐을 때 차장이 달려와서 그를 차창 밖으로 내던졌어요. 결국은 생명을 보전했습니다 만은 그 때 다쳐서 귀가 멀었습니다. 듣지 못하는 사람인 귀머거리가 됐습니다. 그는 한 평생 많은 연구를 했고 많은 발명을 했습니다. 발명왕이라는 이름도 가졌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묻기를 어떻게 해서 이렇게 많은 연구를 할 수 있었느냐고. 그는 말합니다 "나는 귀머거리가 된 것을 감사합니다. 아무리 시끄러워도 나는 못 들으니까 내가 하는 연구에 몰두할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감사한다고요.

여러분, 어느 각도에서 보느냐가 문제예요. 무엇을 생각하느냐에 따라서 감사가 되고 원망이 될 수 있는 거예요. 환경이 바뀌고 여건이 바뀌고 세상이 달라지기를 한평생 기다려도 그 사람의 입에서는 '감사' 없습니다. 여러분 복이 무엇입니까? 종은 울리면서 소리가 나야 종이듯이 감사한 마음이 우러나야 복입니다. 잘 산다고 복이 아닙니다, 가졌다고 복이 아닙니다, 출세했다고 복은 아닙니다. 감사하는 마음이 충만하면 바로 그것이 복입니다.오늘 본문에 나타난 이야기를 자세히 보면은 다니엘이라는 사람의 감사 기도가 있습니다. 그는 이스라엘 백성이 바벨론 왕 느브갓네살이 예루살렘을 침공할 때 포로되어 간 사람이었다. 역사가들의 연구대로 보면 한 오만명이, 이 젊은 사람 오만명이 포로 되어 갔답니다. 어디까지나 포로입니다. 포로되어 간 것은 분명합니다. 그런데도 총명이 있어서 너무 지혜가 있는 분이라서 느브갓네살 왕이 그를 등용해서 정치가를 삼습니다. 세상이 바꿔서 바벨론이 망하고 메대바사가 일어났습니다 만은 오늘 본문대로 다리오왕, 메대의 왕 다리오는 이 다니엘을 또 정치가로 기용을 하게 됩니다. 워낙 충성하고 총명하니깐. 자 이렇게 해서 정치가로 남의 나라에 가서 일하는 사람입니다. 모처럼 그는 참 영광을 누리게 됐습니다. 그런데 다리오 왕은 120명의 방백을 가지고 나라를 다스렸고 그 위에 세명의 총리가 있었어요. 그런데 이제 와서 세명 중에 또 다시 세명 위에 한 사람을 세우려고 하는데 거기다 다니엘을 세워놓았어요.

이때에 시기, 질투가 나옵니다. 많은 사람들이. 특별히 이 바벨론 사람들이, 이 이방사람, 이 노예 출신을 가만둘 리가 없지요. 그래서 헐뜯고 음모하고 갖은 방법을 했지만 오늘 본문대로 허물이 없는 사람이요. 전혀 허물이 없는 사람이고 충성된 사람이라서 다른 일로써는 고소할 수 없음을 알고 신앙문제를 들고나옵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에 올무를 걸었습니다. 이제부터 30일 동안 누구든 왕 외에 신이든 사람이든 누구에게 무엇을 구하는 자가 있으면 그는 다리오 왕에 대한 역적이다 이말이요. 이 사람을 잡아서 사자 굴에 집어넣읍시다 그랬어요. 이런 금령을 만들었는데 오늘 본문대로 다리오 왕이 그 조소에 어인을 찍었습니다. 결재를 했다 그 말이요. 그런데 오늘 본문에 보면은 어인이 찍힌 것을 알고도 집에 돌아가서 그는 하나님 앞에 감사했어요. 아주 중요한 깊은 의미가 있는 내용입니다. 보세요. 하나님의 뜻대로 살았습니다. 진실되게 살았습니다, 정직하게 살았습니다, 충성되게 살았는데 왜 사자굴 입니까? 원망하자면 원망거리가 있는 사람입니다. 하나님, 하나님 어디에 계십니까? 내가 이렇게 하나님을 위하여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진실되게 살았는데 내가 왜 이렇게 죽어가야 하는 것입니까? 원망할만 하죠. 그러나 그는 율법적 비판을 극복합니다. "상관없습니다. 지금까지 산 것으로 만족합니다." 이렇게 받아들이게 됩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대로 '어인을 찍은 것을 알고도' 이 말은 이제 내가 하나님 앞에 기도하면 그대로 사자 굴에 끌려가서 죽을 수밖에 없다는 그 운명을 다 알고, 알고도 하나님 앞에 감사기도를 했다는 거죠. 폴 틸리히라고 하는 신학자의 '커리지 투 비(Courage to Be)'라고 하는 유명한 책이 있습니다.

'존재의 용기' 이 책에서 말합니다. 신앙이란 용기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라고 하는 용기. 인간의 이성적 비판 이거 다 십자가에 못 박아 버리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떨치고 일어나는 용기, 여기에 다니엘이 있었던 거예요.그런데 그의 감사 내용을 가만히 보면은 몇 가지 특징이 있습니다. 먼저는 전에 행하던 대로 그랬어요. 오늘 처음 있는 일이 아니에요. 감사라는 것은 엑시던트(Accident)가 아닙니다. 우연사가 아니란 말입니다. 감사는 체질이 되야 되고 성품이 되야 됩니다. 오랜 동안 같은 행위가 반복되면 습관이 되고 습관이 오래 가면 성품이 되는 거예요. 이런 면에서 우리는 체질적으로 감사를 할 줄을 몰라. 고마웠다는 말 한 마디를 할 줄 모르는 것이 큰 약점입니다. 큰 흠집입니다. 조그마한 일에도 그저 고맙다고 "감사합니다, 고맙습니다" 하는 것이 어렸을 때부터 이게 체질이 되고 습관이 되고 문화가 되야 되는 거예요. 그리고야 앞으로 큰 일을 당해도 또 감사할 수가 있는 것이죠. 어느 순간에 돌발적으로 이런 위대한 감사가 있을 수 없는 것이에요. 여러분 잘 생각하십시오. 조그마한 일에도 원망 없이 "감사합니다, 고맙습니다" 이렇게 해야 되요. 저는 어느 미국가정에서 그런 걸 보았습니다. 같이 아침식사를 하는데 어린애가 좀 작아서 높은 의자에다 갔다가 묶어 놓았어요 허리를. 이렇게 놓고 같이 식사를 하는데 애가 식사하다가 숟가락을 떨어뜨렸어요.

어머니가 주어서 이것을 닦아 가지고 손에 들려줍니다. 그대로 들자마자 먹으려고 드니까 "쿵! 쿵!" 그래 얘가 눈이 똥그래 가지고 무슨 일인가 보니까 가만히 보더니 "새이 썸띵(Say something)", "무언가 말해라"그래요. 애가 미처 생각을 못해요 울먹울먹하니까 더 큰 소리로 "새이 썸띵(Say something)", "무언가 말해" 그러니까 정말 울려고 그래요. 그러니까 마지막엔 "새이 땡큐(Say thank you)", "고맙다고 해라" 그러니까 그때야 깨닫고 "땡큐 맘(Thank you, Mom)"그랬더니 "먹어" 그러더라고요. 여러분 고맙다는 거 하루아침에 되는 게 아니에요. 가르쳐야 되요. 조그만 일에도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감사해요" 엄청난 일에도 "감사합니다" 할 수 있는 거지 이게 하루아침에 되나요? 안 그렇습니까?또한 오늘 여기에 보니까 하루에 세 번씩 일상화하는 거지요. 하루에 식사를 세 번하기 때문에 영적으로도 하나님 앞에 세 번! 시간을 정하고 꼭 그 시간에는 하나님 앞에 기도하는 것, 감사.또 하나 있어요. 공개적으로, 이게 죽음이 눈앞에 있는 걸 알면서 당당하게 비굴하지 않게 공개적으로 하루에 세 번씩. 다시 말하면 일상화했다는 거지요.그리고 감사의 기도를 드립니다. 기도하고 감사하게 되는 거죠. 기도하는 마음이 아니고는 감사할 수가 없어요. 세상으로 생각하면 얘기가 달라집니다. 그는 기도합니다. 무엇을 감사했느냐? 바벨론 포로에서 포로된 자기가 지금 이와 같이 영화를 누리며 살았어요. 감사하고. 느브갓네살의 사랑을 받고 오늘은 다시 벨사살을 거쳐서 지금 세 번째 왕이요, 다리오왕의 사랑을 받고 살았습니다. 이대로 감사합니다. 그는 신앙적으로 살았습니다. 비록 외국에 살고 이국 땅에, 이국 문화 속에 살지 만은 음식도 가려먹고 우상숭배 안하고 죄와 타협 없이 정의롭게 거룩하게 선민의식을 가지고 살았어요.

이제 그는 죽게 됩니다. 그러나 만족합니다. 여러분 감사는 만족함에서 오는 거예요. 만족 없는 감사가 있다면 그건 조건부요. 마치 저 백화점에 있는 인형처럼 물건을 사 가지고 나가는 사람에게 "감사합니다" 고거까지만 하면 좋겠지만 "또 오십시오" 그건 나빠요. "또 오십시오" 하기 위해서 "감사합니다" 이건 조건부예요. 우리는 하나님 앞에 감사를 하던 헌금을 하던 봉사를 하던 이것은 절대로 대가성이 되선 안돼요. 무조건적이요. 오늘 본문에 이제는 복 받을 것도 없고 상 받을 것도 없어요. 왜요? 이대로 죽으니까. 죽을 걸 각오하고 죽는 시점에서 감사하고 있는 거예요. 만족합니다, 이대로 만족해요. 거룩한 백성으로 의롭게 선하게 이렇게 살고 깨끗하게 죽어갑니다. "하나님 감사합니다" 바로 그러한 위대한 감사요, 절대적 감사였습니다. 그리고 생명을 하나님께 위탁하면서 "지금 저는 주님 앞으로 갑니다. 감사합니다" 종말적 감사였습니다. 이런 우스운 얘기가 있어요. 어느 곳에 착한 이발사가 하나 있었는데 한 신부가 이발소에 왔어요. 정성껏 이발을 잘 해드린 다음에 "그저 하나님께 봉사했다고 생각하겠습니다. 이발료는 내지 마시고 그냥 가시지요. 저도 하나님의 일 좀 하고 싶습니다" "아이고 고맙습니다" 이 신부가 감사하다고 하고 가서 생각하니 너무 고마워요. 그래서 우편으로 기도문 책을, 교회에서 쓰는 기도문 책을 몇 권 우편으로 보냈어요. 이것을 배달 받았습니다. 그 다음에는 또 순경이 와서 이발을 하게 되는데 순경이 이발을 다 하고 나서 돈 내려고 하니까 "내지 마십시오. 저도 지역 사회에 봉사한 셈치고 좋은 일 한 번하고 싶습니다" "그러세요?" 그리고 돌아가서 가만히 생각해 보니까 고마운 분이야, 참으로 고마워서 또 거기다가 편지 한 장과 도너츠 몇 개 봉투에 넣어서 그 문 앞에 갔다 놓았어요. 다음 날에는 국회의원이 왔어요.

또 이발을 다 해 드린 다음에 "저도 국가에 대한 봉사라고 생각하겠습니다. 그런고로 이발료는 안 내셔도 되겠습니다" 하고 보냈어요. 그 다음 날 보니까 국회의원들이 그 문 앞에 줄 섰어요.여러분 어떤 고마운 일이 있어요? 당연한 것처럼 받아들이지 마세요. 세상에 은혜를 당연히 입을 사람이 어디에 있어요. 나는 이 고마운 이러한 은혜를 입을 만한 자격이 없어요. 그저 부족하고 허물 많고 감사하고 소중한 일이에요. 작은 일이지만 소중한 것이에요. 그런데 '나는 당연하지. 나는 나라를 위해서 일하는 사람이니까 이런 혜택을 입는 것은 당연하다' 그것은 잘못된 인격이에요. 언제나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깊이 생각하십시다. 나 자신을 돌아봅시다. 의의 세계, 믿음의 세계를 생각하고 받은 은혜를 생각하고 또 받게 될 은혜를 생각하고, 기도하는 자세로 생각하십시다. 세상을 보면 원망해요. 이웃을 보면 불평이 나와요. 짜증이 나요. 하나님을 보고 나를 보면 오로지 감사할 뿐이에요. 그리고 이 감사가 성품화 되고 생활화되고 일상화 될 때, 우리는 많은 시험을 넉넉히 이길 뿐만 아니라 앞으로 엄청난 시험이 닥쳐와도 하나님 앞에서 다니엘처럼 감사하며, 감사하며 승리하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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