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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60:10-22 회복시키시는 하나님
어떤 마을에 온천과 냉천이 나는 신기한 마을이 있었다고 합니다.
동네사람들이 온천에 가서는 계란도 쪄먹고, 냉천에 가서는 빨래도 하고 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그 마을을 지나다니는 사람들이 참 좋겠다고 부러워했습니다.
그랬더니 하는 말이 빨래비누는 안나오잖아요 하더랍니다.
냉천과 온천이 같이 나오니까 사람들은 부러워서 이 동네로 이사올까 했는데
그 동네 사는 사람들 하는 말이 빨래도 삶고, 헹구기는 해도 집에서 빨래비누는 가져와야 돼요. 빨래비누도 나왔으면 좋겠어요. 그러더랍니다.
그렇습니다. 우리에게도 우리 가슴이 그렇게 생겼어요.
한쪽에는 뜨거운 물도 나오고, 한쪽에는 찬물도 나오고 만족도 없고, 늘 불평스럽고,
그런곳이 없겠지만 한쪽에는 뜨거운 물 나오고 한쪽에는 찬물이 나오면 얼마나 좋겠어요.
어떤일이든지 감사로 받으면 감사가 더 많아지고, 불평으로 받으면 불평이 많아집니다.
똑같은 상황속에서 감사로 받으면 한쪽에서 시원한 물 나오고
한쪽에서는 뜨거운 물 나오니까 얼마나 좋습니까 감사합니다 하면 감사가 되고,
더 좋은 감사가 속에서 느껴집니다.
그런데 감사는 다 잊어버리고 빨래비누는 없잖아 불평하면 불평한 만큼 불평이 많아집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내 생각을 바꾸지 않으면 내 안에서 회복이 안돼요.
왜냐면 내 틀속에 있기 때문에 회복이 안 되는 겁니다.
믿는다고 하면서 내 틀속에 있는 사람이 엄청나게 많이 있습니다.
하나님도 그 틀일 못깨요. 그 틀 건드리만 하면 난리가 벌어져요.
그런 것은 해일이 한번 나야돼요. 어떻게 할 수 없는 지경에 가야 그 틀이 깨지는데
바로 회복시키는 하나님도 내 틀 속에 있으면 못알아 듣고,
내 생각이 변하지 않으면 그 하나님을 못 만나요.
하나님은 우리에게 원할 때 너무나 귀하고, 가치 있고, 참된 삶을 살길 원하시거든요.
그런데 우리가 거기까지 못간다고요. 우선 내 앞에 있는거,
우선 좋고, 내뜻이 이루어지는 것만 좋아서 못 가거든요.
하나님은 늘 회복시키시길 원하세요. 그런데 의외로 거기까지 못갑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에서는 그렇게 알아듣도록 얘기를 합니다.
하나님이 노해서 쳤지만 이제는 은혜로 긍휼히 여겨준다는 겁니다.
그래서 이방 사람들이 와서 봉사를 할 것이고 또 열방 많은 사람들이 재물을 가져올 것이다. 그래서 그 예루살렘이 전에는 많은 아픔이 있었지만,
이제는 너를 힘들게 한 자들이 도리어 예루살렘를 일컬어 여호와의 성읍이다.
이스라엘의 거룩한 자의 시온이다 라고 말할 것이다 라고 얘기하면서,
전에는 네가 버림당하고, 미움을 당했으나 이제는 영영한 아름다움과 기쁨이 될 것이다고 하면서 17절에 보면 금이 놋을 대신하고, 은이 철을 대신하고,
놋이 나무를 대신하고 철이 돌을 대신하고 그럽니다. 더 좋은 것을 주신다는 것입니다.
18절에는 다시는 강포한 일이 네 땅에 들리지 않을 것이다.
황폐와 파멸이 네 경내에 다시 없을 것이다.
그 성읍을 구원이라 성문을 찬송이라 칭할 것이다고 얘기하면서
19절에는 다시는 낮에 해가 네 빛이 되지 않는다.
하늘에 떠 있는 해가 우리의 빛이 안되고,
주님이 우리의 빛이 된다고 얘기하면서 달도 너에게 비치지 않을 것이다.
오직 여호와가 너에게 영영한 빛이 되며 영광이 될 것이고, 다시는 해가 지지 아니하며
달이 물러가지 아니할 것은 여호와가 곧 빛이 되기 때문에 그렇다.
그래서 22절에 때가 되면 이것을 속히 이루겠다 라고 영원한 메시야시대에 영광을 설명을 하면서 바로 곧 올 것이다 라고 영광의 축복을 약속하고 있는 내용입니다.
하나님이 전에는 그렇게 했지만,
이제는 다 회복시켜 주겠다 라고 지금 말씀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도 하나님이 우리에게 회복시켜주시는 하나님이라고
우리 삶속에서 많이 느끼며 만나고 고백하는 그런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면 어떻게 회복시켜주시는 하나님인가를 오늘 본문을 통해서 알아보겠습니다.
사60:10-11절 봅니다.
내가 노하여, 너를 쳤으나 이제는 나의 은혜로 너를 긍휼히 여겼은즉 이방인들이 네 성벽을 쌓을 것이요, 그 왕들이 너를 봉사할 것이며, 네 성문이 항상 열려 주야로 닫히지 아니하리니
이는 사람들이 네게로 열방의 재물을 가져오며 그 왕들을 포로로 이끌어 옴이라.
(그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첫 번째는노하셨지만 도리어 긍휼을 베푸시며
회복시키시는 하나님인걸 알아야 됩니다.
지금 이스라엘은 이사야때 많은 힘들고 어려운 일이 있었지만,
하나님이 노하셔서 쳤지만, 이제는 은혜로 너를 긍휼히 여길 것이다.
이방인들이 너의 성벽을 쌓을 것이다. 또 왕들이 너에게 봉사할 것이다.
성문이 항상 열려서 주야로 닫히지 않을 것이다.
왜냐면 사람들이 너에게로 많은 재물을 가져오기 때문에 성문을 닫을 수가 없다.
이 말은 무슨 말이냐면 새롭게 재건될 예루살렘에 영광이 큰 것을 얘기하며
하나님이 지켜주시고 보호할 것을 얘기하고 있는 내용입니다.
우리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에게 하나님이 노하셨지만 긍휼히 여겨 주시고 다시 회복시켜 주시듯, 우리도 하나님 앞에 잘못하면 하나님이 얼마든지 우리에게 노하실 수 있습니다. 그런데 노하신 것이 끝이 아니라 그 다음에는 틀림없이 긍휼이 온다는 것입니다. 우리를 불쌍히 여겨주신다는 것입니다.
노하셨지만 도리어 긍휼을 베푸시며 회복시키시는 하나님인 것을
삶에서 많이 이해하고 인정하고 고백해야 될 줄 믿습니다.
우리의 모든 삶이 내가 조금 잘못하면 하나님은 분명히 무엇인가 손을 대시는데
그 손대실 때가 노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결론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아야 됩니다.
노하실 때는 하나님이 정말로 축복해 주시겠다고 하는 큰 제스처가 나온 것입니다.
우리는 그것으로 끝인가 내 인생이 이걸로 끝인가 하는 생각이 들지만
하나님은 절대로 그렇지 안는다는 겁니다.
10절 보세요. 내가 노하여 너를 쳤으나 전에는 그랬으나, 이제는 나의 은혜로 은혜란 말은 아무 공로가 없지만 하나님이 베풀어주신 호의가 은혜입니다.
내가 아무것도 내놓을 것이 없지만 하나님이 호의를 베풀어서 긍휼히 여겨주셨다는 것입니다. 긍휼이란 말은 불쌍히 여겨주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의 삶도 똑같습니다. 지금 우리를 하나님이 손을 대어 칠 수도 있고,
우리를 아픔으로 내쫓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다른 한 손에는 긍휼을 들고 서 계신 것을 알아야 됩니다.
요즘에 지원이가 크니까 조금만 뭐라해도 금방 울어버려요. 야단을 못 쳐요.
말길을 잘 알아들으니까 그래요. 그런데 할머니 할아버지는 지원이가 잘 못하면 꾸중을 쳐야지요. 자기 원하는대로만 하면 안되잖아요.
할머니 할아버지가 꾸중하지만 좋게 해줄라고 하는 것이잖아요.
우리에게도 똑같다 그 말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혹시라도 노하시면 노하신 것 뒤에는
꼭 긍휼이라는 것이 있다는 것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노함=긍휼이다 이 말입니다. 하나님편에서 보면 그렇습니다.
우리편에서 보면 노함만 보이지 긍휼이 안보입니다.
그러나 노함을 젖혀버리면 긍휼이 있는데 우리는 그것을 못 본다것입니다.
하나님은 회복시키실려고 애를 써서 오늘 여기도 내가 노하여 너를 쳤으나
이제는 내가 은혜로 너에게 긍휼을 베풀 것이다 라고 얘기하고 있거든요.
이것이 하나님의 심정이란 사실을 잘 이해를 하고
느헤미야 9장을 보세요.
느9:31 주의 긍휼이 크시므로 저희를 아주 멸하지 아니하시며 버리지도 아니하셨사오니
주는 은혜로우시고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이심이니이다.
주는 은혜로우시고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전에는 노하셨지만
이제는 긍휼을 베풀어 주시며 회복시키신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공식입니다. 공식은 많이 해보고 종합해서 딱 알아지면 공식이 나오죠.
우리의 공식은 무엇입니까?
하나님이 노하셨다고 하면 긍휼이 뒤에 있다는 사실을 빨리 알아야 됩니다.
커텐만 거둬버리면 긍휼이 있는데 커텐을 못 거둬요.
나를 내려놓으면 긍휼이 있는데 나를 못 내려 놔요.
어떤 애기가 장난감을 사달라고 떼를 쓰니까 없는 형편에 엄마가 속이 상해서 때렸어요.
때리고 나니까 마음이 짠해서 장난감을 사주려고 마트를 갔어요.
마트에 가서 애가 사달라는 장난감을 사서 들고 나왔어요.
그런데 그 애가 장난감을 가질려면 어디를 통과해야 됩니까?
계산대를 통과해야 되거든요. 그래야 내것이 되거든요.
그런데 어린애기는 계산대위에 놓으면 뺏기는 줄 알고 안올려놓고 울고불고 올려놓지 않아요.
누가 그래요. 우리가 그래요. 하나님의 긍휼을 우리가 그래서 못 받아요. 나를 못 내려놔요.
나를 내려놓으면 긍휼이 있어요.
그 애기가 계산대 위에 놓으면 엄마가 계산해 줄꺼잖아요.
그 다음부터는 애기가 타든 ,발로 차든, 갖고 다니든 괜찮아요.
내꺼니까. 그런데 안줄까 싶으니까 계산대위에 올려놓지를 못해요.
우리가 그래요. 나를 못 내려놔요. 그러니까 하나님의 긍휼을 맛보지 못하는 겁니다.
바울은 전에는 하나님을 자기 맘대로 섬겼던 사람입니다.
나같은 사람있으면 나와보라고 할 정도로 열심히 했던 사람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보시기에는 엉터리라 그 말입니다.
나중에 바울이 그것을 깨닫고 뭐라고 얘기하냐면 나같이 포행자요. 핍박자요.
나 같이 엉터리를 하나님이 긍휼히 여겨주셔서,
나한테 이런 은혜를 주셨다고 눈물겨운 고백을 하고 있는 것을 보게됩니다.
하나님의 노함 뒤에는 분명히 긍휼이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을 바울은 깨달은 겁니다.
우리는 날마다 하나님이 나에게 전에는 노했지만 이제는 긍휼을 베푸시려고 하시는 회복시키시려고 하시는 하나님인걸 늘 기억해야 될 줄 믿습니다.
두 번째는 15절입니다.
전에는 네가 버림을 입으며 미움을 당하였으므로 네게로 지나는 자가 없었으나 이제는 내가 너로 영영한 아름다움과 대대의 기쁨이 되게 하리니(그랬습니다.)
두 번째는 전에는 비참했지만 이제는 기쁨을 주시며
회복시켜 주시는 하나님인 것을 알아야 됩니다.
첫번째는 노했지만 긍휼을 베푸시고 회복시키고,
두 번째는 전에는 비참하게 했지만 기쁨을 주시며
회복시키시는 하나님인 것을 알아야 된다는 것입니다.
전에는 네가 버림을 입었다. 하나님이 버린 것 같이 했다 이 말이죠. 미움을 당했다.
너에게로 지나가는 자가 없을 만큼 비참했다 그 말입니다.
그러나 이제는 내가 너로 영영한 아름다움과 기쁨이 되게 할 것이다.
전에 버림당하며 미움당하며 비참한 처지에 있었지만 이제는 영영한 아름다움이 되고
대대에 기쁨이 될 것이라고 하나님이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영광스러운 미래가 있다고 얘기를 하고 있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어쩔때는 비참해 질 때도 있고, 나에게 손가락질 할 때도 있고,
나만 혼자 미움당해서 혼자 있는 것 같고, 아무도 전화도 안하고,
저 엉터리같은 놈이라고 그럴 때 얼마나 힘들겠습니까.
그러나 하나님 손에는 기쁨이 들려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항상 앞에 것만 보면 안되고 뒤에 것을 볼 수 있는 눈이 떠진 사람이 행복한 사람입니다.
그냥 눈이 떠지느냐 나를 내려놔야 합니다. 엄마가 계산대에 가서 돈 계산한다고 하면 얼른 내려놓으면 금방 나에게 줄텐데 뺏기는 줄 알고 안내려노니까 엄마가 억지로 빼앗아서 계산대에서 계산하고 나니까 그때서 웃는다 그 말입니다.
우리가 그래요. 고거 장난감 하나 빼앗기는 줄 알고 난리를 부려요. 왜 뺏어요?
장난감을 왜 뺏어요? 줄려고 뺏거든요. 그런데 우리는 그것을 기어이 붙들고 안놔. 그러면 가져요. 못가져요? 못가져요? 계산대위에만 올려만 놓으면 바로 주거든요.
그런데 해도 해도 안되니까 자기엄마가 보듬고 계산대직원이 손으로 바코드를 찍어요. 안
놨어요. 끝까지 안놨어. 누가 그럴 것 같아요? 우리가 그럽니다. 끝까지 나를 안놉니다.
그러면 기쁨이 없습니다.
하나님 마음에는 15절같이 주시겠다는 겁니다. 그런데 우리가 하나님이 그렇게 하실 것은 생각지 못하고 우선 뺏긴 것 만 생각하고 비참한 것 만 생각하니까 나를 못 내려 놓는다는 것입니다.
고린도후서를 보시기 바랍니다.
고후12:9-10 내게 이르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데서 온전하여짐이라 하신지라. 이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으로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 그러므로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약한 것들과 능욕과 궁핍과 핍박과 곤란을 기뻐하노니
이는 내가 약할 그 때에 곧 강함이니라.
약하다 그것은 주님으로 채워질 수 있는 좋은 조건이 될 수 있다 그 말입니다.
그래서 약한 것 능욕, 궁핍, 핍박, 곤란은 곧 강함으로 바로 연결되는 공식입니다.
우리가 비참해 졌다. 공식입니다. 그 뒤에는 무엇이 있습니까? 기쁨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우리는 비참한 것만 보지 말고, 그 뒤에 하나님이 주시려고 예비해 두신 기쁨을 봐서 그것을
만나서 회복시키시는 하나님이라고 우리 입술에서 간증할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한나는 브닌나가 애기를 데리고 한나 앞에 와서 정쩌궁 정쩌궁 하고 있으면
얼마나 비참했겠어요. 그러나 그 비참함 때문에 사무엘이 기다리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공식을 우리가 알아야 된다 그말입니다.
비참뒤에는 기쁨이 기다리고 있다는 것이 공식입니다.
그래서 한나는 사무엘을 낳고 뭐라고 합니다. 사무엘상2장을 봅시다.
우리가 한나가 되어서 읽어 봅시다. 자 말합니다.
1-2절 한나가 되어서 감정을 넣어서 얘기하는 겁니다. 다같이 내 마음이 여호와를 인하여
즐거워 하며, 내 마음이 여호와를 인하여 높아졌으며 내 입이 내 원수들을 향하여 크게 열렸으니 이는 내가 주의 구원을 인하여 기뻐함이니이다. 여호와 같이 거룩하신 이가 없으시니.
이는 주 밖에 다른 이가 없고 우리 하나님 같은 반석도 없으심이니이다.
내가 한나가 되어 읽으니까 어쩝니까.
그때 그 비참함이 없었다면 이런 간절한 표현이 나왔겠습니까?
비참함 뒤에는 기쁨이 있다는 공식을 꼭 이해하고 한나와 같이 기쁨으로
하나님으로 고백할 수 있는 회복시키시는 하나님을 만나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세 번째 사60:20-21
다시는 네 해가 지지 아니하며 네 달이 물러가지 아니할 것은 여호와가 네 영영한 빛이 되고 네 슬픔의 날이 마칠 것임이니라. 네 백성이 다 의롭게 되어 영영히 땅을 차지하리니 그들은 나의 심은 가지요 나의 손으로 만든 것으로서 나의 영광을 나타낼 것인즉 그 작은 자가 1,000을 이루겠고 그 약한자가 강국을 이룰 것이라. 때가 되면 나 여호와가 속히 이루리라.
세 번째는전에는 어두웠지만 이제는 밝게 하시며
회복시키시는 하나님인걸 알아야 합니다.
19절에 보면 다시는 그럽니다. 이제는 메시야 시대가 왔기 때문에 전시대가 끝났습니다.
전에는 캄캄하고 힘들었지만 19절보면 다시는 낮의 해가 너의 빛이 되지 않아요.
해가 하늘에 떠있어도 우리 주님이 해가 되니까 낮의 해가 필요가 없습니다.
밤의 달도 너에게 비취지 않을 것이다. 밤에 달도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주님에 빛이 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래서 여호와가 영영히 빛이 되며
네 하나님이 너의 영광이 될 것이다.
그러니 다시는 해가 지지 아니하며 달이 물러가지 아니할 것은 여호와가 너에게
영영한 빛이 되고 네 슬픔의 날이 마칠 것이기 때문에 그렇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때가 되면 여호와가 속히 이룰 것이다 라고 메시야의 영원한 축복의 역사를 여기다 얘기하고 있는 겁니다.
아무리 어두웠어도 하나님은 이제는 밝게 해줘서 그것을 회복시켜 주신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나는 무엇인가 올바로 가는 것 같은데 나 자신을 몰라요.
옆에서 보면 다 알아요. 옆으로 기어가는지 거꾸로 기어가는지
실상 옆에서는 아는데 자기는 못봅니다. 이것이 우리의 맹점이에요.
그래서 제가 여기서도 월.화.목요일 강의하면서 나를 볼수 있는 눈이 떠야 된다고 많이 얘기하잖아요. 나를 볼 수 있는 눈은 말씀 외에는 없습니다. 은사로도 나를 못봅니다.
우리는 나를 볼 때 내가 얼마나 엉터리인지 알고 울게됩니다.
그래서 다른사람에게 얘기를 못합니다. 왜 내가 엉터리라.
그래서 여기도 회복이 어떻게 되냐면 전에는 캄캄했지만 이제는 우리 주님이 빛이 돼서 지켜준다는 것입니다. 왜 빛이 됩니까. 우리 주님을 바라보고 의지하니까 빛이 되고,
우리주님을 통해서 우리주님을 깨닫고, 만나고
주님에 의해서 살아가려고 하니까 환히 보이는 것입니다.
저도 조금 보기에는 글자 작은 것도 잘 보입니다.
아마 성경 가르치라고 그랬다고 하나님 고마워요 합니다.
그런데 오래보려면 눈이 시큰시큰해서 안경을 쓰지만 그래도 하루내내도 봐요.
저는 그걸 보면서 안경을 쓸때마다 주님이 안경이 되어서 나를 보여줘요. 우리주님이 안경이에요. 안경을 안쓸때는 어둑어둑 해요. 그런데 우리주님을 쓰면 잘보여요.
그래서 어둑어둑한 것이 안경을 쓰면 환히 보이듯이 우리주님도 우리를 그렇게 회복시킨다
그 말입니다. 그러니까 안경쓸때마다 주님 고마워요 해요.
우리도 캄캄해도 우리를 회복시키세요. 환하게 회복시키세요.
미가7:7-8 보세요.
오직 나는 나의 여호와를 우러러보며(미가가 지금 고백하는 말입니다.)
나를 구원하시는 하나님을 바라보나니 나의 하나님이 나를 들으시리로다.
나의 대적이여 나로 인하여 기뻐하지 말지어다.(미가 나로 인하여 기뻐하지 말아라 그말이에요.) 나는 엎드러질지라도 일어날 것이요.
어두운 데 앉을지라도 여호와께서 나의 빛이 되실 것임이로다.
이렇게 미가가 고백하고 있습니다.
우리도 아무리 힘들고 앞이 안보이는 일이 와도
우리는 이런 하나님이 되실 것이라고 고백해야 될 줄 믿습니다.
요나도 물고기 뱃속에 들어가지요. 물고기 뱃속이 어땠을까요. 캄캄했겠지요.
어느 때 환하게 만들어 주시든가요. 회개하니까 주여 잘못했어요.
내가 엉터리에요 하고 나를 보니까 물고기가 토해서 환한 빛으로 내보내줘요.
하나님은 그렇게 회복시키신다 그 말이에요.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아무리 어두워도 우리는 우리주님을 붙들고
나를 바라보고 나를 이해하고 내가 엉터리인줄 알면 환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을 정리하겠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나를 회복시키시려는 계획을 가지고 계신 것을 항상 생각을 하고
첫 번째는 전에는 노하셨지만 이제는 긍휼을 베푸시며
두 번째는 전에는 비참했지만 이제는 기쁨을 주시며
세 번째는 전에는 어두웠지만 이제는 밝게 하시며
이렇게 하나님이 회복시키신다는 것을 꼭 기억하고,
어느때든지 하나님을 붙들고 그 하나님이 회복시키시는 것을 삶에서 만나고 깨닫고 체험해서 가슴에서 입술에서 회복시키시는 하나님을 고백하는 저와 여러분들이 다 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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