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을 이긴 주님
요16장 29-33절
분당사랑의교회/이한규목사
오늘은 주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날입니다.
그리고 오늘부터 주님의 고난의 한 주간이 시작됩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은 주님께서 돌아가시기 전날 밤
마지막으로 다락방에서 설교하신 설교의 마지막 부분입니다.
주님이 설교를 마치니까
제자들이 밝히 말씀해 주셔서 믿는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제자들이 믿는다고 하지만
너희들은 나를 혼자 남겨두고 흩어질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주님과 함께 하실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주 안에서 담대함을 잃지 말라고 권면하십니다.
오늘 본문이 가르쳐주는 몇 가지 메시지를 살펴볼까요?
1. 사람은 고독할 때가 있습니다.
주님께서도 고독할 때가 있었습니다.
32절을 보십시오.
"...너희가 각각 제 곳으로 흩어지고 나를 혼자 둘 때가 있다..."
이 말씀을 하시면서 얼마나 고독을 느끼셨겠습니까?
처음에 제자들은 예수님 따르면 무엇인가 있을 것 같아서
즉 축복, 명예, 지위를 생각해서 따랐을 것입니다.
그러나 박해의 화살이 날라 오면서
예수님 따르는 것이 점차 불리해지는 것으로 여겨지는 시점에
제자들은 한사람씩 스승의 곁을 떠납니다.
최선을 다해 제자들에게 사랑을 베풀었는데
그 제자들이 다 나를 떠나간다는 것을 상상해 보십시오.
게다가 예수님은 십자가를 져야 함을 이미 아시고 계셨습니다.
얼마나 고독했을까요?
그처럼 주님이 고독했다면 우리도 당연히 고독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고독한 순간을 만난다고 너무 낙심하지 마십시오.
주님께서도 고독하셨습니다.
따돌림당하는 것이 그렇게 가슴이 아프십니까?
주님도 중요한 순간에 따돌림당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따돌림당하는 것에 너무 실망할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가 항상 주인공이 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렇기 때문에 따돌림당하는 때는 반드시 있습니다.
그때를 대비해서 슬기롭게 마음의 준비를 하면 됩니다.
우리보다 고독을 경험한 사람들은 훨씬 많습니다.
지금 정치하는 것을 보면
어제 동지였던 사람이 오늘 배반하는 경우를 얼마나 많이 봅니까?
높은 위치에 있던 사람이 순식간에 쇠고랑을 차는 모습도 많이 봅니다.
조금 잘못해도 아들과 같은 사람들에게 욕을 먹고 수모를 당합니다.
일전에는 한 때 대통령이었던 분도 엄청나게 수모를 당했습니다.
옛날에 어떤 전 대통령이 구속당하면서 눈물을 조금 흘리니까
언론에서는 "악어의 눈물이다!"라고 비아냥거렸습니다.
그런 얘기를 제 3자로서 듣기만 해도 그 치욕이 엄청나게 느껴집니다.
그런 치욕을 생각해 볼 때 우리가 현재 당하는 치욕들은
치욕이라고 말할 수도 없는 것들이 대부분이라고 여겨집니다.
그런데 그 치욕을 당한 분들이 위장병 걸리지 않았다면
우리는 당연히 위장병 걸리지 말아야 합니다.
그리고 그들이 여전히 씩씩하게 살고 있다면
우리도 씩씩하게 살아야 할 충분한 이유가 있습니다.
그들도 삶을 포기하지 않는데 우리가 삶을 포기할 이유는 없습니다.
여러분! 어느 곳에서 따돌림당한다고 너무 실망하지 마십시오.
저도 미국에서 공부할 때 외국인들로부터
따돌림당하는 것과 같은 느낌을 받을 때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런 때에도 웃음을 잃지 않는 넉넉한 여유를 가지고 살았습니다.
그래서 오히려 많은 친구들을 사귈 수 있었습니다.
따돌림당하는 것과 같은 환경에서도
따돌림당하는 느낌을 가지지 않는 넉넉한 삶에 묘한 매력이 있습니다.
그렇게 살면 사람이 그 사람 주변으로 몰리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따돌림당했다고 생각하고 표정이 어두워지고
무엇인가 위축되어서 자신감을 잃어버리면 점차 매력이 없어집니다.
그러면 점차 진짜로 따돌림당하는 위치에 서게 됩니다.
그러므로 누가 나를 따돌리는 것 같은 환경을 만들 때
나는 스스로 전혀 따돌림당한다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나는 스스로 내 할 일을 하고, 내 갈 길을 가면 됩니다.
교회생활에서도 따돌림당한다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공동체 생활에서 처음 오면 약간의 집중적 관심은 받을 수 있지만
계속적으로 본인이 그 공동체에서 최대한 협조하고 노력하지 않으면
그 공동체는 본인을 화려한 주인공으로 만들어주지 않습니다.
교회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본인이 끊임없이 참여하고 함께 힘을 써야
점차 따돌림당하는 느낌이 없어지는 환경이 만들어지게 됩니다.
공동체에 처음 왔을 때에 소외되는 느낌들은 어쩌면 당연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같이 있는 시간이 많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소외되는 느낌이 있어도
자꾸 남이 나에게 관심을 써 주기만 바라지 말고,
그래서 "교회가 사랑도 없어!"라고만 말하지 말고,
내가 꾸준히 공동체와 함께 있는 시간을 많이 만들어 가는 작업이 중요합니다.
사람은 고독할 때도 있는 법이고 군중으로 있는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어느 한 때만 사람에게 주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누구에게나 고독할 때는 다 공평하게 있음을 잊지 마십시오.
다만 내가 그것을 어떻게 받아들이느냐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2. 고독한 것이 꼭 나쁜 것만은 아닙니다.
고독할 때가 좋습니까? 군중으로 있을 때가 좋습니까?
군중으로 있을 때가 더 좋습니까? 그렇게 말할 수 없습니다.
어느 것이 더 좋은지 우열을 가릴 수 없습니다.
얼마나 그 순간을 잘 활용하느냐가 중요합니다.
정말 의식이 있는 사람은 군중의 때를 그리 좋아하지 않습니다.
사람이 집단이 되면 최면적이 되고 악해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사람은 고독을 통해서 진리를 추구하고,
의미 있는 만남을 추구하는 경우도 많이 있습니다.
사람은 조금 고독해야 겸허하게 됩니다.
지난 수요일 한 집사님을 만나 이런 간증을 들었습니다.
그분의 여동생 부부가 정말 신앙에 냉소적이었는데
OO회사에 다니던 동생 남편이 실직을 당한 후에
놀라울 정도로 겸손해지면서 열심히 하나님을 찾게 되었다는 얘기입니다.
그에게 고독한 순간은 하나님을 만나게 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그때 그 이야기를 듣고 속으로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우리 성도들은 어려움 당하지 않고도
하나님을 잘 찾을 수 있는 의식 있는 성도가 되게 하소서!"
어려움이 없으면 좋지만 어려움이 있어도 하나님을 더욱 찾아야 합니다.
여러분! 고독이 꼭 나쁜 것, 고통스런 것만은 아닙니다.
우리의 관점에 따라서 고독은 하나님의 선물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바로 고독을 선물로 만드셨습니다.
32절 말씀을 다시 한 번 보십시오.
"나는 혼자가 될 것이다.
그러나 그때 혼자가 아니라 아버지께서 나와 함께 하신다."
얼마나 멋있는 선언입니까?
우리가 이런 고백을 할 수 있다면
어떤 문제가 우리를 넘어뜨릴 수 있겠습니까?
인간이 가장 고독할 때는 죽을 때입니다.
그러나 죽음이 두렵고 고통스런 이유는 죽을 때의 고통 때문만은 아닙니다.
오히려 죽는 순간 인간의 모든 고통은 떠나갑니다.
죽음이 두렵고 고통스런 이유는 인간관계의 단절 때문입니다.
내 사랑하는 모든 사람들로부터 내가 단절된다는 것이 두려운 것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은 어떤 고백을 합니까?
다윗처럼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고 고백합니다(시 23)
가장 고독해질 수 있는 죽음의 순간에서도 주님이 함께 하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고독이 꼭 나쁜 것만은 아닙니다.
주님께 함께 하심을 느끼게 하는 고독은 좋은 것입니다.
3. 주님이 함께 하시면 우리는 결국 승리합니다.
33절을 보십시오.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환경과 상관없는 절대적 승리입니다.
우리의 승리의 원천은 주님임을 한시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는 사람을 사랑해야 합니다.
그러나 사람을 너무 사랑해서는 안됩니다.
우리는 사람을 신뢰해야 합니다.
그러나 사람을 너무 신뢰해서도 안됩니다.
만약 그 사람이 훌쩍 떠나버리면 어떻게 살려고 하십니까?
그래서 성경은 하나님보다 사람을 사랑하면 그것도 우상숭배라고 합니다.
사람도 신뢰하기 힘든데, 돈이나 권력을 어떻게 신뢰할 수 있습니까?
그것들은 더 무섭게 훌쩍 내 곁을 떠날 수 있습니다.
그러한 일은 항상 충분히 있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너희가 세상에서 환난을 당하기도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아무리 어려운 순간에도 주님이 함께 하시면 길이 열리게 됩니다.
여러분! 어려움이 있거든 정말 이제 고개를 드십시오.
창조주 하나님을 바라보고, 주님을 바라보십시오.
다 떠나도 그분은 떠나지 않습니다.
부모, 남편, 아내, 재산, 청춘, 자녀, 미모가다 떠나도
주님은 여전히 우리 곁에 머물러 계실 것입니다.
옛날부터 제가 잘 부르는 찬송이 있습니다. 찬송가 440입니다.
"멀리멀리 갔더니/ 처량하고 곤하며/ 슬프고 또 외로와/ 정처없이 다니니
예수예수 내 주여/ 지금 내게 오셔서/ 떠나가지 마시고/ 길이 함께 하소서."
인천에 있을 때 제가 좋아해서 이 찬송을 부르면
저의 아내는 제가 이 찬송 부르는 것을 싫어했습니다.
마치 제가 멀리 멀리 갈 것만 같은 느낌이 들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것은 오해입니다. 위 찬송은 멀리 멀리 가기 위해서 부르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 없이 살았을 때의 비참했던 삶을 생각하고
다시는 예수님 멀리 하지 않겠다는 각오로 부르는 것입니다.
우리가 주님으로부터 멀리 멀리 가지만 않으면
주님은 절대로 우리를 떠나가지 않습니다.
주님은 승천하시면서도 우리에게 약속하셨습니다.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항상 너희와 함께 있으리라."(마 28:20)
이 약속 때문에 우리에게는 용기가 생기게 됩니다.
오늘 이 아침에 여러분들의 마음속에 용기가 솟구치기를 바랍니다.
우리에게 근심이 있는 이유는 문제가 크기 때문이 아니라
우리 곁에 계신 주님을 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주님이 함께 하심을 믿고 승리하는 여러분들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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