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긍휼 19편

by 【고동엽】 2023. 4.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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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인 자질

고대 아테네의회 진행 중에 한 의원이 갑자기 소리를 질렀다. 독수리에게 쫓기던 작은 새 하나가 회의장 안으로 들어와 그에게 안긴 것이다. 그런데 그 의원은 새를 바닥에 팽개쳤다. 이런 모습을 본 다른 의원들이 일제히 그를 규탄했다.
"위기에 몰린 새를 보호하지 못하는 의원이 어찌 불쌍한 서민들을 돌볼 수 있겠는가. 긍휼한 마음이 없는 이런 정치가에게 아테네의 미래를 맡길 수 없다"
결국 그 의원은 만장일치로 의회에서 쫓겨났다.

 

 
 

따뜻한 사람들

우리가 비행기를 타고 미국 뉴욕을 가게 되면 일반적으로 케네디 공항에 도착하게 되어있다. 그런데 뉴욕에는 케네디 공항 외에 또 하나의 공항이 있다. 그 공항은 라구아디아 공항이다. 본래 이 “라구아디아”라는 이름은 뉴욕 시민이 아주 사랑했던 유명한 한 시장의 이름이다.
그런데 그가 시장이 되기 전 판사로 재직하던 시절의 이야기 한 토막이 다음과 같이 전해온다.

추운 겨울 어느 날 한번은 라구아디아 판사가 재판석상에서 한 노인을 만나게 되었다. 그 노인은 추운 겨울에 가족들 없이 외롭게 사는 분이었다. 그는 돈도 없고 너무나 배가 고픈 나머지 다른 사람의 지갑에서 20불을 훔치다가 체포되어 법정에 서게 되었다. 판결을 하기 전에 마지막으로 판사가 그 노인에게 물었다. “노인장, 하실 말씀이 있습니까?”
이 노인은 라구아디아 판사를 가만히 쳐다보다가 이런 말을 한다.

“판사님, 저에게 한번만 긍휼을 베풀어 주십시오.”
잠시 동안 그 노인장을 조용히 굽어보던 판사는 이렇게 대답한다. “맞습니다. 노인장에게는 정말 긍휼이 필요하군요. 그러나 노인이 잘못한 그 20불에 대해서는 책임을 져야 합니다. 마침 제게 10불이 있군요. 제가 이 10불을 노인장을 대신해서 변상하겠습니다.

노인장을 춥고 배고프도록 버려둔 데에는 저의 책임도 상당히 크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10불이 더 필요한데 여기 계신, 이 법정에 계신, 방청하시는 여러분! 우리 사회와 여러분도 이 노인이 춥고 배고파 방황하도록 그리고 도둑질하도록 내버려둔 데, 공동책임이 있습니다. 이 노인을 위해 자유롭고 자발적으로 기부를 좀 하시죠.”

그 자리에 모인 사람들은 이 재판관의 명판결을 보고 감동하여 자발적으로 헌금을 하여 노인을 구한다. 그리고 뉴욕시민들은 라구아디아 판사를 인정하여 그를 시장으로까지 세우게 된다.
우리의 가슴도 이렇게 따뜻했으면 좋겠다. 이렇게 넓었으면 좋겠다. 춥고 힘든 이 세상에, 굶주린 이웃에게 사랑의 불씨가 될 수 있는 우리 광천의 모든 식구들이 되기를 소망한다. 

 

 
 
친절을 베픈 크리스천은 처음

브리넌 메닝이 쓴 <아바의 자녀>라는 책속의 저자의 간증입니다.
브레넌은 아내 로즐린과 함께 뉴올리언스의 한 골목을 거닐고 있었다.
모퉁이를 도는데 스물살쯤 된 젊은 여자가 활짝 웃으며 다가와 자기네 종교단체에 돈을 희사하겠느냐고 물었다.

무슨 단체냐고 물으니 한 이단단체 이름을 말했다. 브레넌은 예수 그리스도를 자신의 구주와 주님으로 인정하지 않는 이 이단단체 여성을 보고 ‘교주에게 세뇌돼 이단의 최면에 걸린 지각없고 어리석고 고지식하고 나약한 아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가씨에게 해줄 말이 있어요. 자신의 양심에 이렇게 충직하고 성실하니 정말 대단합니다. 이렇게 길거리에 나와 진정 자신이 믿는 바를 행동으로 옮기고 있으니까요. 자칭 ‘크리스천’이라는 모든 사람에게 도전이 됩니다.”로즐린은 팔을 내밀어 여자를 끌어안았다. 브레넌은 두 사람을 함께 끌어안았다.

“크리스천이세요?” 여자가 물었다. “예.” 로즐린이 대답했다. 젊은 여자는 고개를 숙였고 길위로 떨어지는 눈물이 보였다. 잠시 후 그 여자는 “오늘 여기 나온지 8시간 됐어요. 저를 친절히 대해준 크리스천은 두 분이 처음이에요.
다른 사람들은 저를 경멸의 눈빛으로 쳐다보거나 내가 귀신에 씌었다고 소리쳤어요. 성경책으로 때리고 간 여자도 있어요.”
브레넌은 이 일을 회상하며 “하나님 나라를 임하게 하는 것은 진심에서 우러나는 긍휼”이라고 고백한다. 

 
 
 

왜 우리는 긍휼을 베풀어야 하는가?

예수님은 누가복음 10장에 나타나 있는 가장 유명한 이야기 가운데 하나에서 긍휼히 여김의 중요성을 설명하였다.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를 향하여 걸어가고 있던 어느 유대인에 관한 이야기이다. 길을 가고 있을 때 바위뒤에서 웬 흉악한 자들이 뛰어 나왔다. 강도들은 그를 약탈하고 옷을 벗겼으며, 두들겨 패고는 거의 실신한 그를 길 한편 도랑에 버려 두었다.
곧 제사장이 그 길을 따라 걸어오고 있었다. 그 부상당한 여행객은 그가 오는 것을 목격하고 드디어 행운이 오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제사장은 가던길을 늦추지도 않고 반대편에서 멀찌감치 떨어져 그냥 지나쳐 버렸다. 잠시후 또 다른 종교인이 걸어왔다. 레위인이었다. 그러나 그 역시 상처입은 사람이 황당할 만큼 재빨리 지나쳤다.
그때 한 사마리아 인이 걸어왔다. 사마리아인과 유대인들간에는 인종적인 갈등이 있었지만 사마리아인은 강도만난 희생자가 측은한 마음이 들어 가던길을 멈추고 도움을 줄 방법을 강구하였다.
상황을 판단한 후에 그 사람 옆에 무릎꿇고 앉아 상처에 기름과 포도주를 바른후 붕대로 감싸 주었다. 그리고는 그 유대인을 자신의 당나귀에 태우고 여관으로 데려가 깨끗이 닦아주고 따뜻한 침대에 뉘어 주었다. 심지어 그는 여관 주인에게 돈을 건네주며 말했다. “이 사람을 돌보아 주시오. 부비가 더들면 내가 돌아올 때 갚겠소”
이 강도당하고 두들겨 맞은 유대인이 다음날 안락한 침상에서 온 몸에 붕대를 감은채 깨어나 알지도 못하는 사람이 자신의 방값과 식사값을 지불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 머리속에 어떤 생각이 스쳤을까? 나는 가끔 궁금했다. 나는 그가 이렇게 물었을 것이라고 장담한다. “누구였을까? 다른 사람들처럼 왜 외면하지 않았을까?”
하나님께서 그를 따르는 사람들에게 특별한 관심을 보이라고 하시는 주된 이유 가운데 하나는 자선행위는 다른 어떤 것도 열지 못할 것 같은 사람들이 마음을 열기 때문이다. 단 하나의 친절행위 속에는 끌어당기는 엄청난 힘이 있다.
예수께서는 요한복음 13:34,35에서 이 사실을 분명히 밝히셨다.
(요 13:34)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요 13:35)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

너무 간단하다. 그러나 너무나 강력하다

 

 
 

걷지 못하는 강아지

어떤 사람이 '강아지를 팝니다'라는 광고를 냈더니, 어린 소년 하나가 찾아와서
값을 물었다.
"한마리에 만오천 원...."
주인의 말에 실망한 소년이
"주머니에 칠천 원 밖에 없는데... 그래도 강아지를 좀 보여주시겠어요?"
"아무렴, 보여주고 말고."
털뭉치 같은 조그만 강아지 다섯 마리가 소년의 눈앞에 펼쳐졌다.
다섯 마리를 하나씩 살펴 가던 소년이,
"이 강아지는 다리를 절름거리는군요. 이 강아지를 사고 싶어요, 모자라는 돈은
조금씩 갚아드릴께요. 네?"
"절름발이를? 그건 구색 맞추기로 보여준거야... 평생 다리를 절텐데 어떻게 키우
겠니?"
"이 강아지는 많은 사랑과 도움이 필요하겠지요. 그러니까 꼭 제가 샀으면 좋겠어
요."
강아지의 주인은 다리가 온전치 않은 강아지를 사려는 소년이 이해되지 않았다.
하지만 그 소년의 간청이 얼마나 간절한지 거절할 수가 없었다.
"고맙습니다. 아저씨. 제가 나머지 돈을 꼭 갚을께요. 고맙습니다."
얼굴에 환한 웃음을 띄고 뒤돌아 가는 소년의 팔에는 절름발이 강아지가 행복한
듯 쏘옥 안겨 있었다.
소년의 걸음을 무심코 바라보던 주인은 아! 하는 탄성을 질렀다. 걷지 못하는 강
아지를 안은 그 소년도 한쪽 다리를 절고 있었던 것이다. 

 

 
 

미안합니다

<명예혁명>이라는 책에 보면 이런 말이있다. 할아버지가 의사이고 또 손자가 의사이다. 그 손자가 책을 썼는데, 할아버지 의사가 손자 의사에게 늘 입버릇처럼 수없이 한 말이 있다. "환자를 만나면 늘 '미안합니다'하고 속죄하는 마음으로 환자를 대해야 한다." "왜요?" "'내가 불민한 탓으로 당신을 미병(微病)에서 치료하지 못했습니다.

 

병은 미리미리 막아야 되는 것인데 병이 중할 때까지 당신을 돌아보지 못해서 이렇게 병이 중해졌습니다. 내 잘못입니다. 내가 잘 못한 것입니다. 내가 잘 못해서 당신이 병든 것입니다. 그러니 죄송합니다.' 이런 마음으로 환자를 돌보라는 뜻이란다."

"긍휼의 뜻을 배우라(마9,9-13)"에서 다시 인용. 

 

 
 

강도와 신경통

어떤 집에 강도가 들었다. 강도는 주인 몰래 물건만 훔치고 달아나려고 했는데 그만 주인에게 틀키고 말았다. 강도는 자신의 보호를 위하여 총을 겨누었다. "손 들어!" 주인은 총을 보고 놀라서 왼쪽 손을 들었다. 강도는 주인이 오른손으로 어딘가에 숨겨져 있는 권총을 뺄 것 같아서 고함을 질렀다. "오른 손도 들어!" 주인은 얼굴을 잔뜩 찌푸리고 강도를 쳐다보며 말했다. "오른쪽 팔은 지금 신경통을 앓고 있어서 들 수가 없소." 주인의 신경통이라는 말에 강도의 태도가 부드러워졌다. "신경통이요? 실은 나도 신경통인데……."


어떻게 된 일인지 신경통이라는 말 한 마디에 강도의 태도가 누그러져 자연스럽게 신경통으로 화제가 옮겨졌다. 강도는 물건을 훔치러왔다는 사실도 까마득히 잊을 정도로 신경통의 치료 방법 등에 관하여 주인과 의견을 나누었다. 주인 또한 강도라는 생각이 전혀 없었고 단지 이웃집 남자처럼 친근감이 느껴졌다. 두 사람은 소파에 앉아서 시간가는 줄 모르고 신경통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다.
이 이야기는 코미디나 개그 이야기가 아니라 오 헨리의 소설 "강도와 신경통"에 나오는 이야기이다.
(대화 / 공감대)
☞ 다른 사람과 공감할 수 있고 이해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대화를 통해서이다. 다른 사람의 생각을 알기 위해서는 대화를 해야 하는 것처럼 주님의 뜻을 알기 위하여 주님과의 대화인 기도에 힘을 쓰자. 

 

 
 

은혜에 대한 보답

성 구 저희가 서로 말하되 길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우리에게 성경을 풀어 주실 때에 우리 속에서 마음이 뜨겁지 아니하더냐 하고. (눅 24:32)


어느 선교사의 이야기입니다. 선교사가 임지로 가는 도중에 한 여자의 비명을 듣게 되었습니다. 가까이 가보니 아들이 노예로 끌려가는데 그 엄마가 주인을 보고 “주인님, 나도 아들과 함께 사주십시오. 함께 가서 열심히 일하겠습니다” 하며 애원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주인은 “안돼” 하며 아들만 데려가겠다고 했습니다. 엄마도 울고, 아들도 울고 있었습니다. 한 번 헤어지면 영원히 만나지 못한다는 것을 그들은 이미 알고 있었습니다. 이 광경을 보던 선교사는 주머니의 모든 돈을 털어 그 두 모자를 사서 자기 집으로 데리고 왔습니다. 그리고 한참의 세월이 지난 어느 날, 선교사가 풀밭에서 비명을 지르고 넘어졌습니다. 실신된 선교사의 뒷발에 독사의 이빨 자국이 나 있자, 엄마 노예가 입을 대어 독을 빨아내기 시작했습니다. 얼마나 그랬을까요?



얼마의 시간이 지나 거의 죽었던 선교사가 일어나 보니 독기를 입으로 빨던 엄마 노예는 얼굴이 퉁퉁 부은 채 죽어 있었습니다. 엄마 노예는 자기를 사 준 선교사에게 자신의 생명으로 감사를 표현했습니다. 이런 상황이 오면 당신은 어떻게 행동할까요? 예수님은 우리를 위해 목숨을 주셨습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기념하고 감사하여 성찬식에 참여합니다. 성찬식이 진행될 때 나의 모습은 어떠했습니까? 진실로 감사하며 눈물 흘리며 죽기를 각오하고 주를 섬기겠노라 다짐했는지요? 나를 돌아보십시오. 

 

 

 
 

군대에서 있었던 일

강원도 모사단 모대대 브라보포대에서 있었던 일이다.
브라보포대 김병장은 작업 중에 낮잠을 자다 중대장에게 걸렸다.
김병장은 5분 내로 완전군장하고 그만 돌라고 할 때까지 계속 연병장을 돌라는 지시를 받았다.
때는 6월 한여름.
군대의 여름은 참 덥다.

김병장이 더위와 싸워가며 군장을 돌고 있는 동안 중대장은 포대본부에서 이를 지켜보고 있었다.
그렇게 한 시간이나 흘렀을까.
중대장은 김병장이 보기가 안 됐던지 포대본부에서 근무하던 계원을 불렀다.
중대장:야,쟤 그만 돌고 반성문이나 써오라고 해. 계원:예,알겠습니다.
그러나 계원은 귀차니즘이 발동했는지 연병장까지 안 나가고 사열대 앞에서 소리를 쳤다.
계원:김병장님! 중대장님이 반성문 쓰시랍니다!

그러자. 김병장은 속으로 갖은 욕을 다해 가면서 ‘방독면’을 쓰기 시작했다 

 

 
 

긍휼을 얻은 하나의 백성

너희가 전에는 백성이 아니더니 이제는 하나님의 백성이요 전에는 긍휼을 얻지 못하였더니 이제는 긍휼을 얻은 자니라(벧전2:10)
베드로는 그의 서신을 읽을 사람들을 염두에 두고 썼을 것이며, 그 서신을 쓸 때 그는 열심이 대단했을 것이다.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본받으면 당신의 삶에 새롭게 변화될 것이며, 또 그 렇게 될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항상 우리 속에 살아계셔서 당신에게 삶을 위한 진정한 열심이 필요할 때 그 열심을 아낌없이 주실 것이다.
당신께 축복을 주신 주님께 감사드려라.
 

 

 
 

자비로운 하나님

유대인의 전설에 의하면 하나님께서 사람을 창조하시기 바로 전에 그의 보좌 주위에 있는 천사들과 의논을 하셨다고 한다. 정의의 천사는 사람을 만들면 안된다고 말했다. 그 이유는 “사람을 만들면 그가 동료 사람들에게 모든 종류의 사악을 자행할 것이고, 또 사람은 강퍅하고 잔인하고 부정직하여 세상은 불의로 가득 차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라는 것이었다.


그 다음에 진리의 천사가 반발하며 “사람을 만들지 마십시오. 그는 거짓되고, 그의 형제들을 속일 것이며 심지어 하나님 당신도 속일 것입니다”라고 했다. 거룩의 천사도 “사람을 절대로 만들지 마십시오. 그는 당신의 면전에서 당신의 이름을 더럽힐 것입니다”라고 말했다.
이번에는 하나님께서 가장 사랑하시는 자비의 천사가 한 걸음 앞으로 나아가서 말하기를 “저희의 하늘의 아버지, 사람을 만드시옵소서. 그가 죄를 짓고 정의와 진리와 거룩의 길에서 멀어질 때, 제가 부드러운 손길로 그를 감싸고 사랑스런 음성으로 그에게 말하여 다시 당신께 데리고 오겠나이다”라고 말했다.
과연 그렇다. 자비의 천사의 말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우리 인간은 전적으로 타락하고 부패한 존재이다. 인간 스스로의 힘으로 하나님께 나아갈 수도 없는 구제불능의 존재이다. 그러나 자비로우신 하나님은 우리의 죄를 사해주시고, 허물을 덮어주시고, 실수를 용서해주신다. 

 
 
 

아침마다 새로운 주의 긍휼

애가3:1-66

두 생각
생각하지 않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사람은 생각을 하면서 자기의 모습을 돌아본다. 그나마 상황이 좋을 때에야 별 생각 없이도 지낼 수 있지만 조금만 복잡해지면 수많은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문다. 더 악화되어지고 직접 피부에 느껴지면 그 때에는 생각이 넓어지는 것이 아니라 더 안으로 움츠러들어 벽안에 갇히어 끙끙대기가 일쑤이다. 예레미야도 마찬가지의 체험을 고백하고 있다. 그는 자기의 '고초와 재난'을 쑥과 담즙으로 비유하고 있다. 살가죽이 쇠하고 뼈가 꺾이는 절망은 겪어보지 않은 사람은 모르리라. 얼마나 그것이 심했으면 그가 '나의 힘과 여호와께 대한 내 소망이 끊어졌다'(18절) 하였겠는가.


그러나 하나님은 선지자의 마음에 또 다른 생각의 길을 터 주신다. 어두운 것을 기억할 때에는 낙심이 되지만 왠지 중심에 이것을 생각하니 소망이 피어오름을 그는 보게된다. 그것은 다름 아닌 '여호와의 자비와 긍휼의 무궁함'이었다. 하나님은 예레미야에게 '하나님에 대해서 항상 진리인 것'을 기억하게 하셨다. 다른 것은 다 변해도 변치 않는 하나님의 성품에 대해 생각하게 하신 것이다. 그 성품은 하나님 자신도 부인할 수 없고 저버릴 수 없는 것이었다. 호세아 선지자를 통해 북이스라엘의 죄를 지적하시고 심판을 명하셨던 여호와 하나님은 당신의 긍휼의 성품으로 인하여 끝내 이렇게 말씀하셨다: "에브라임이여 내가 어찌 너를 놓겠느냐 이스라엘이여 내가 어찌 너를 버리겠느 냐 내가 어찌 아드마같이 놓겠느냐 어찌 너를 스보임같이 두겠느냐 내 마음이 내 속에서 돌아서 나의 긍휼이 온전히 불붙듯 하도다"(호 11:8)


아무리 심판을 선포하셨어도 하나님 자신이 소유한 거부할 수 없는 긍휼의 성품이 하나님 안에서 불붙듯 하여 하나님을 견딜 수 없게 만든 것이었다. 이처럼 하나님은 '하나님 자신도 부인할 수 없는 항상 진리된 것'을 예레미야에게 생각나게 하시고 그의 생각의 물꼬를 빛으로 터 주신 것이다. 그것을 안 예레미야의 얼굴에는 복받치는 울음 가운데 울먹이며 터쳐 나오는 환희의 선명함이 있었다.
하나님의 긍휼이 항상 진리이기에 그것은 아침마다 항상 새롭다. 지나간 세월들은 언제나 과거의 기억 속으로 나를 끌어당기지만 하나님의 성품은 나를 언제나 현재 속에서 새롭게 하신다. 새벽을 한 번 생각해 보자. 새벽이 열리며 시작되는 하루는 이 땅에 어느 누구라도 한 번도 경험해 보지 못한 새로운 한 날이다. 마치 눈이 내린 길에 발자국이 하나도 나있지 않은 길이 앞에 펼쳐져 있는 것과도 같다. 심지어 하나님께서도 그 길을 아직 걷지 않으신 그러한 새로움을 안겨 주는 것이 새벽이다. 하나님은 물론 모든 역사를 아시고 이끌어 가시지만 우리의 손을 잡고 가는 면에서는 아직 그분도 걸어보시지 않은 길이 바로 새벽으로 시작되는 하루의 삶이다.


그 하루는 누구라도 아직 절망의 발자국이나 낙심의 발자국을 내지 않았고 또 낼 수도 없다. 그저 우리를 기다리고 있을 뿐이다. 어떻게 그 하루를 맞이하느냐가 그 하루의 지나온 발자국이 되는 것이다. 하나님은 이처럼 우리 안에 날마다 창조를 선물로 주신다. 오늘은 어제의 반복이 아니라 새로운 하루의 창조인 것을 알려 주시면서 같이 걸어가자고 손을 내미신다. 그리고 우리를 바라보시는 하나님 마음 속의 긍휼을 아침마다 새롭게 열어 보이시며 나를 부르신다.
그렇다. 그러한 하나님을 알고 나면 이 땅의 어떤 것도 자기의 기업을 삼을 만한 가치 있는 것으로 보일 수 없다. 오직 여호와만이 나의 기업이며, 그래서 나는 저를 바라리라고 고백할 따름이다(24절). 그러할진대 잠잠한 기다림이 우리 안에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주님의 본심
갇힌 자를 발로 밟는 것과 재판을 굽게 하는 것과 송사를 억울케 하는 것을 주님이 기쁘게 보시지 않으시는데 하물며 그 분이 의도적으로 우리를 고생케 하시고 근심케 하시겠는가. 주께서 인생으로 고생하며 근심하게 하심은 본심이 아니시다(33절). 그 분은 벌을 위한 벌을 내리지 않고 반드시 당신의 목적하신 바를 두시고 그것을 성취하는 분이시다.


그러하기에 우리는 주님이 메우신 멍에를 메고 잠잠할 것이다. 예레미야는 고백한다: '사람이 젊었을 때에 멍에를 메는 것이 좋으니'(27절). 그렇다. 주님은 우리의 연약함을 더 나약하게 하시는 분이 아니라 우리로 젊은 때와 같은 힘을 주시고 멍에를 메우는 분이시다. 견딜만한 힘을 주시고 우리의 고난을 헤쳐가게 하시는 것이다. 주님의 이루실 목적이 있으시기에 그리하시는 것이라면 어찌 우리가 그것을 마다하겠는가.
결국 당신의 부인할 수 없는 긍휼의 성품대로 풍부히 사랑을 베풀어주시고 우리를 긍휼히 여겨주실 주님께 인생을 맡기며, 때리는 자의 수욕을 참으며 티끌에 입을 대고 주의 뜻이 이뤄지길 기도하는 것이 우리의 본분이 아니겠는가. '주님께는 반드시 무슨 뜻이 있을거야... 그래, 주님이 언제 나를 실망시키신 적이 있었는가... 화, 복이 지극히 높으신 자의 입으로 나오는 것이 아닌가... 결국 긍휼로 내게 답하실 주님을 바라자...'
하지만 유다 백성들은 자기들의 회개에 대한 급한 응답을 요구하고 있다(40-41절). 그러하기에 하나님에 대한 실망도 그만큼 커져 금새 불평을 쏟아내고 있다(42-47절). 용서받는 것이 무슨 마땅한 자기들의 권리인 양 하나님의 때에 하나님의 목적이 이뤄지는 것은 아랑곳없고 현실을 벗어나려는 목적만이 그들의 마음을 사로잡고 있다.


예레미야는 또 다시 시내처럼 흐르는 눈물을 훔쳐낸다(48절). 자기 한 사람의 고난으로 이 민족이 구원을 받을 수 있다면 그는 기꺼이 그것을 감내하려 하고 있다. 예레미야는 우리 예수님의 외로운 고난을 생각나게 해 준다. 여호와께서 하늘에서 살피시고 돌아보시기를 기다리며 묵묵히 주의 일을 행했던 주님... 모든 것을 맡기고 살아가는 자에게 가까이 하셔서 '두려워 말라'고 위로하시는 주님의 음성이 들린다(57절). 너를 축복하는 자를 내가 축복하고 너를 저주하는 자를 내가 저주하리라는 강한 약속으로 자기를 따르는 자를 신원해 주시는 주님... 그 주님이 오늘을 사는 내게도 가까이 오셔서 '두려워 말라'고 말씀하시니 이것이 은혜요 이것이 인생들 가운데서는 결코 맛볼 수 없는 하늘의 기쁨이 아니겠는가. 

 

 

 
 

긍휼을 베푸는 삶

긍휼 없는 죄는 긍휼 없는 형벌을 받습니다. 지금도 많은 사람들이 긍휼 때문에 살면서 긍휼을 베풀지 못하고 삽니다. 차머스라는 분이 쓴 「정오의 강풍」이라는 소설이 있습니다. 그 내용은 대강 이런 얘기입니다. 건축 기사인 피어홈은 도처에 많은 다리와 터널을 건설했습니다. 이 때문에 큰 명성을 얻습니다. 그러나 얼마 후에 그는 질병과 실패로 부인과 어린 딸을 데리고 낙향하여 삽니다. 피어홈의 이웃에 한 몰인정한 노인이 있었습니다. 이 노인은 매우 사나운 개를 기르고 있어 피어홈은 늘 위협을 느꼈습니다. 피어홈은 개가 너무 사납다고 여러 번 경고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때마다 오히려 번번이 피어홈은 모욕만 당했습니다.


그러던 중 불행은 갑자기 닥쳐왔습니다. 그 개가 피어홈의 어린 딸을 물어 죽인 것입니다. 동네 사람들은 일제히 개 주인인 이 노인을 비난했습니다. 파종기가 되었지만 그 노인에게 한 톨의 곡식 종자를 주거나 팔지 않았습니다. 그 노인은 맨 밭을 간 후에 씨를 달라고 애걸하였지만 그 노인이 거리에 나오면 사람들은 냉소하였습니다.

 

그런 노인의 모습을 본 피어홈은 다음날 아침 일찍 광에서 자신이 쓸 씨앗 반 되를 가지고 나와서 열심히 노인의 밭에 씨를 뿌려 주었습니다. 얼마쯤 지나자 노인의 밭은 파릇파릇한 반면 피어홈의 밭은 그 일부가 아직도 빈 땅으로 남아 있었습니다.
긍휼은 원수의 밭에 좋은 씨를 뿌리도록 요구합니다. 그로 말미암아 비록 우리 자신의 밭 일부가 맨 땅으로 남겨집니다. 긍휼을 베푼다는 것은 베푼 후에 내가 손해보는 일입니다. 

 

 
 

긍휼을 베풀며 살자

아버지의 집을 떠나 마음껏 인생의 향락을 즐기던 탕자는 결국 굶어 죽을 지경에 이르러서야 집으로 돌아옵니다. 그러나 집으로 돌아오는 그의 발걸음은 한없이 무겁기만 합니다. 아버지께서 자기를 받아 주실 지, 내쫓지는 않으실 지 몹시 걱정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놀랍게도 아버지는 아들의 모든 잘못을 용서하시고 그를 위해 잔치까지 베풀어 주셨습니다.
구원받은 그리스도인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긍휼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그런데도 다른 사람을 긍휼히 여기는 데는 너무나 인색합니다. 그런 행동은 마치 100억을 빚진 사람이 그 빚을 탕감 받은 후, 자신에게 3만원 빚진 친구를 감옥에 가두는 것과 같습니다. 주님께서는 그런 사람에게 긍휼 없는 심판이 임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긍휼은 부모가 자녀를 불쌍히 여기듯 다른 사람의 아픔을 깊이 느끼고 이해하며 용서하는 마음입니다. 우리는 항상 하나님께 받은 사랑을 기억하면서 다른 사람들에게 긍휼을 베풀며 살아야 하겠습니다.
성경: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마5:7) 

 

 
 

긍휼의 댓가

불란서 혁명 때의 일이다. 어느 무더운 날 여학생 셋이 길을 가고 있는데 한 모퉁이를 돌아서자 다리에 상처를 입은 젊은이들이 도움을 청했다. 그때 두 여학생은 못 들은 체하며 지나쳤으나 한 학생은 구급약을 구해와서는 정성껏 돌보아 주었다. 그러자 그 젊은이들은 고맙다는 인사를 하며 '아가씨는 어디 사는 누구입니까?'라고 물었다.

 

 '나는 영국에서 온 학생으로 대학 기숙사 3호실에 있어요. 이름은 매리예요' 그 후 두 달이 지난 한밤중에 어떤 젊은이가 기숙사에 달려와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그리고는 데리고 어딘가로 달려갔는데 얼마 후 기숙사에 난동이 일어나 모든 학생들은 죽임을 당했던 것이다. 긍휼히 여기는 자는 긍휼히 여김을 받는다! 

 

 
 

자비의 그리스도인

겔18:23
나 주 여호와가 말하노라 내가 어찌 악인의 죽는 것을 조금인들 기뻐하랴 그가 돌이켜 그 길에서 떠나서 사는 것을 어찌 기뻐하지 아니하겠느냐

고상한 그리스도인은 참을성을 잃지 않습니다. 고상한 그리스도인은 화가 났을 때라도 건설적인 길을 모색합니다. 고상한 그리스도인은 다른 사람의 행운을 시기하지 않습니다. 고상한 그리스도인은 다른 사람에게 자기의 중요성을 강조하지 않습니다. 고상한 그리스도인은 좋은 예법의 선지자입니다.
고상한 그리스도인은 화를 낼 권리가 있다고 느낄 때 조차도 쉽게 화를 내지 않습니다. 고상한 그리스도인은 다른 사람의 가장 나쁜 점보다는 가장 좋은 점을 봅니다. 그는 다른 사람들을 대하는데 있어 현명하고 비둘기처럼 악의 없는 사람이 되고자 노력합니다. 고상한 그리스도인은 다른 사람의 사악함을 고소한듯이 바라보지 않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고상한 그리스도인은 그의 마음과 생활에서 예수님의 사랑을 보여줍니다. 오늘도 복 있는 자로 살아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너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라

창45:3-11, 고전15:35-38,42-50, 눅6:27-38

신앙생활을 처음 하는 분들을 위하여 요셉에 대한 이야기를 간략하게 소개해 드릴까 합니다. 요셉은 야곱의 열두 아들 중, 열한번째로 태어났습니다. 위의 열번째까지 형들은 다른 어머니가 낳은 자식들이고, 자기와 동생 베냐민은 '라헬'이라고 하는 야곱의 두번째 부인이 낳은 자식들입니다. 야곱은 이 두번째 부인을 사랑했고, 자연히 그 아들인 요셉을 다른 열 아들보다 더 사랑했습니다.
그러자 위의 열 형들은 요셉을 미워하고 시기했습니다. 거기에다가 요셉은, 이상한 꿈을 꾼 다음에 형들에게 들려주는데, 그 꿈 이야기가 형들을 기분 나쁘게 하는 내용들이었습니다.


어느 날, 요셉은 아버지의 심부름으로 양을 치는 형들에게 도시락을 갖다 주게 됩니다. 그동안 벼르고 있던 형들이, 요셉이 나타나자 그를 죽이기로 모의를 합니다. 그러나 르우벤이 말리고 유다가 말리는 바람에 죽음은 면하고 애굽 상인에게 팔려가는 신세가 됩니다.
몇 사람을 거쳐 요셉은 애굽 왕실의 경호실장인 보디발의 집 종이 됩니다. 그러나 거기서도 요셉은 죽을 고비를 겪게 됩니다. 성실한 요셉이 보디발의 눈에 들어 그 집 총무가 되는 행운을 얻었으나, 보디발의 아내에게 모함을 받아 철창 신세를 지고 죽을 날을 기다려야만 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그는 바로의 꿈을 해몽해 주는 기회를 얻게 되고, 그로 말미암아 일약 애굽의 국무총리가 되는 영광을 누리게 됩니다.
이 때 중동 지방에 가뭄이 들었습니다. 대단한 가뭄이었습니다. 애굽은 요셉의 지혜로 양식이 비축되어 있어서 염려가 안 되었습니다. 그러나 요셉의 부모와 형제가 있는 유대 나라는 먹을 양식이 없어서 다른 나라로 이민을 가야만 했습니다. 요셉의 형들은 아버지의 명령을 받고 애굽으로 양식을 사러 갑니다. 거기에서 그들은 요셉을 만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 네 보통 사람 같으면, 원수를 갚을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요셉에게 주어졌던 것입니다. 하지만 요셉은 하나님께로부터 쓰임을 받는 사람이었기 때문에, 원수를 갚을 수 있는 아주 좋은 기회를, 용서와 사랑을 실천하는 기회로 바꾸었던 것입니다. 그가 원수를 갚았더라면, 일순간은 승리의 쾌감을 누렸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곧 자기는 물론이요, 그의 가족 모두가 멸망하는 슬픔을 맛보아야만 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요셉은 하나님의 사람이었고 지혜로운 사람이었습니다. 진정한 승리가 무엇인지 아는 사람이었습니다. 그의 형들을 용서함으로써, 그는 믿음의 승리를 하게 되었고, 그의 가족 모두를 살리는 대승리를 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한편 그렇게 함으로써 그동안 여러번 죽음의 구렁텅이에서 요셉을 건져내 주시고, 지혜를 주셔서 나라를 잘 다스리게 해 주신, 하나님의 은혜에 보답을 했던 것입니다.
우리를 향한 하나님 사랑에 보답하는 길은, 물질을 드리는 것도 아니요, 교회 안에서 큰 소리를 치는 것도 아닙니다. 바로 하나님이 원하시는 용서와 사랑의 삶, 곧 화목을 도모하는 일인 것입니다. 

 
 
 

인류를 구원하신 위대한 긍휼

학가다는 유대인의 민족 문학서 또는 민족 역사라고 할 수 있는 문서이다. 이 문서에는 유대인들의 최대 축제인 유월절에 대한 언급이 있다. 유월절은 유대인들이 이집트에 노예로 잡혀 있다가 탈출하여 유대로 귀환한 것을 기념하는 축제일로, 학가다는 유월절의 환희와 소중함을 다음과 같은 말로 시작하고 있다.
“우리는 이집트에서 바로의 노예였다.”
세계 어느 민족사에서 이와 같이 굴욕적인 패배의 이야기로 시작되는 예가 있을까? 더욱이 제 스스로의 힘으로 해방한 것이 아니라 “해방되었다”라고 수동형으로 기록하고 있다. 이것은 해방이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임을 나타내는 것이다. 이러한 겸손한 태도, 곧 사람들의 힘의 한계를 받아들이는 태도가 유대인들로 하여금 패배 속에서도 살아남게 한 비결이었다. 세상의 모든 문명은 다른 민족에게 정복되는 즉시 사라졌지만, 유대 문명은 이러한 태도 때문에 수천 년 전에 잃어버린 땅을 오늘날에 다시 되찾을 수 있었던 것이다.


사람들은 누구나 자신이 고귀한 태생이기를 바란다. 그러나 구원은 바로 우리 자신이 처참한 죄인의 후예임을 자각하는 것에서 시작된다. 예수님의 복음은 자신이 이미 의인이라고 생각하는 자에게는 해당되지 않기 때문이다. 인간에게 베풀 수 있는 인간의 가장 큰 긍휼은 그가 죄인임을 깨닫게 해 주는 것이다. 그리고 그 죄에서 돌이킬 때 참된 해방과 구원을 받을 수 있는 것이다. 

 

 
 

하나님의 긍휼

하나님의 긍휼

유대인들에게는 중요한 진리를 가르치기 위해 우화적인 이야기를 담아 놓은 책이 있습니다. 이 책 속에는 하나님께서 우주를 창조하시기 직전에 먼저 천사들을 창조하시고 그 천사들과 대화를 나누는 내용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첫 번째 천사인 ‘의의 천사’라는 이름을 가진 천사를 불러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세상을 창조하고 그 세상에서 가장 으뜸 되는 피조물로 인간을 창조하려고 하는데 어떻게 생각하느냐?” 의의 천사가 대답했습니다. “하나님, 인간을 창조하지 마십시오. 그 인간들은 온갖 불의로 이 세상을 더럽힐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두 번째 천사인 '거룩의 천사'라는 이름의 천사에게 똑같은 질문을 했습니다. 거룩의 천사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하나님, 인간을 창조하셔서는 안됩니다. 그 인간들은 이 세상을 더러움으로 가득 채워 놓고 말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세 번째 천사인 ‘빛의 천사’를 불러 또 다시 같은 질문을 했습니다. 빛의 천사는 “하나님, 절대로 인간을 창조하셔서는 안됩니다. 인간들은 이 세상을 어두움으로 만들고야 말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네 번째 천사인 ‘긍휼의 천사’를 불러서 또 다시 질문을 했습니다. “내가 인간을 창조하려고 하는데 그대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긍휼의 천사는 다른 천사와는 전혀 다르게 대답했습니다. “하나님, 인간을 창조하셔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시면 이 세상은 불의하고 더러워지고 어두움에 잠길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하나님, 이 불의와 더러움과 어두움 속에 있는 인간들에게 저는 기어이 그들을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이야기할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이 새로워지고 하나님께서 기대하시는 사람들이 되도록 그들을 하나님 앞으로 인도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사랑과 긍휼로 돌보시며 아직 우리를 포기하지 않으셨습니다. 우리가 도저히 상대하고 싶지 않은 그 사람까지도 포기하지 않으시고 그를 향해서 다가오시고 기다리시고 기회를 주십니다.

우리를 구원하시되 우리의 행한바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지 아니하고 오직 그의 긍휼하심을 좇아 중생의 씻음과 성령의 새롭게 하심으로 하셨나니  -디도서 3: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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