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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믿는 자의 축복(사도행전 16:29-32)

by 【고동엽】 2021. 9.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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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믿는 자의 축복
사도행전 16:29-32
오늘 저희교회에 처음 나오신 여러분들을 진심으로 환영하고 사랑합니다.
여러분들이 저희 교회에 나오신 것은 정말 잘하신 일입니다.
저는 참소망 교회를 담임하고 있는 권 호만 목사입니다.
여러분들이 이 교회에 오시게 된 것은 여러분 주위에 가장 귀한 사람들의 초청에 의해서일 것입니다.
그 분들이 가족들일 수도 있고, 좋은 친구일수도 있고, 좋은 직장 동료일 수도 있습니다.
어째든 그 분들이 믿을만한 분이시고 좋은 분들이라고 생각했기에 그 분들의 권고를 따라 이렇게 예배에 참석하게 된 줄 압니다.
여러분들을 인도하신 분들이 누구냐? 하는 것이 정말 중요합니다.
사기꾼들이 인도했으면 분명 사기 치기 위해서일 것입니다.
강도들이 인도했으면 분명 강도짓 하기 위해서일 것입니다.
그러나 그 분들이 좋은 분들이고 믿을만한 분들이고 여러분들을 사랑하는 분들이라고 한다면 여러분들에게 해를 끼치거나 잘못되게 하기 위해서 교회에 가자고 한 것은 분명 아닐 것입니다.
뭔가 내가 먼저 알고 있는 좋은 것을 나누기 위해서 사랑하는 마음으로 여러분들을 이곳으로 초청하고 인도했으리라고 생각합니다.
그런 점에서 여러분들은 긴장을 푸시기를 바랍니다.
이곳은 여러분들을 해롭게 하는 곳이 아닙니다.
여러분들을 잘못되게 하는 곳도 아니고요, 여러분들에게 손해를 끼치는 곳도 아닙니다.
해외여행을 가보면 꼭 쇼핑센터에 들리게 되는데 그러면 들어가기 전에 결심을 합니다.
‘누가 뭐래도 절대 유혹에 넘어가지 않겠다. 속지 않겠다.’
그래서 공짜 차는 마시고 관심 있는 척 이것저것 살펴보지만 속으로는 이미 어떤 물건도 사지 않겠다고 결심을 굳히는 경우가 있습니다.
혹시 이 시간 그렇게 결심하는 사람이 있다면 여러분, 그렇게 결심하지 마시고 긴장하지 마시고 마음 편하게 들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여러분들을 가장 사랑하는 사람들이 데리고 왔는데 나쁜 곳에 데리고 왔겠습니까?
여러분들에게 바가지를 씌우겠습니까?
바라기는 제 말에 꼭 넘어가서 예수님을 믿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오늘 저나 여러분들을 이곳까지 인도하신 분들의 한 가지 바람이 있다면 그것은 여러분들이 예수님을 믿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도록 하기 위해서 여러분들을 이곳까지 인도하신 것이고 이 시간, 제가 말하고 싶은 것은 바로 예수님을 믿자는 내용입니다.
여러분들도 ‘교회에 나가는 사람들은 다 예수 믿는 사람들이다. 예수쟁이다.’ 그렇게 이해를 하실 것입니다.
그럼에도 왜 예수를 믿어야 하는가를 잘 알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 저는 여러분들에게 왜 예수를 믿어야 하는가? 그 이유를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먼저는. 구원을 받기 위해서 예수님을 믿는 것입니다.
수년 전 미국에서 라이나 화이트라는 18세 된 소년이 에이즈로 죽어가는 모습을 매스컴이 앞 다투어 보도한 적이 있었습니다.
13세 때 혈루병 치료 중 수혈을 받다가 에이즈에 감염된 이 소년은 5년 만에 숨을 거뒀고 이때 아버지에게 남긴 말이 미국인들을 진하게 감동시켰습니다.
“네가 이렇게 빨리 가야 한다니 가슴이 아프구나. 아버지가 너한테 해 줄 수 있는 것이 하나도 없구나.” 라는 아버지의 말에 아들은 편안한 표정으로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 대신 아버지는 제게 가장 소중한 선물을 주셨어요.
아버지는 제게 예수님을 알게 해 주셨잖아요.
저는 예수님 때문에 영원한 생명을 얻었어요.
사람은 누구나 죽는 것인데 저는 조금 빨리 가는 것뿐이에요.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아버지.”
이 감동적인 이야기는 우리에게 몇 가지 중요한 인생의 원리를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먼저는, 사람은 다 죽는다는 것입니다.
언제 죽느냐 하는 시기가 문제일 뿐 모든 사람이 한 번은 죽는다는 것은 너무나 분명한 사실입니다.
성경은 “한 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해진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히9:27) 말씀하고 있습니다.
사람이 한 번 죽는 것은 정해진 이치입니다.
이것을 피해갈 수 있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습니다.


둘째는, 오는 순서는 정해져 있지만 가는 순서는 정해져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확률적으로는 늙은 사람이 젊은 사람보다 더 빨리 죽는 것은 분명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확률적인 이야기일 뿐 현실적으로는 18살짜리가 80살 먹은 노인보다 먼저 갈 수 있습니다.
아니 그 이하의 어린이들이 먼저 갈 수도 있습니다.
아버지보다 아들이 먼저갈 수 있고, 형보다 동생이 먼저갈 수 있고, 선배보다 후배가 먼저갈 수 있는 것이 이 세상의 현실입니다.


셋째는, 그 죽음의 순간에 우리가 해 줄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이 아이의 아버지인들 왜 그 아들을 살리고 싶지 않겠습니까?
어떤 희생을 해서라도 아들을 살리고 싶은 것이 부모의 한결같은 마음일 것입니다.
그러나 의사도 아버지도 그 누구도 그 아이의 죽음을 멈추게 할 수는 없었습니다.


넷째는, 그 죽음의 순간에 한 가지 꼭 필요한 것은 믿음밖에는 없습니다.
이 아이는 예수님을 믿으면 구원을 받는다고 하는 믿음이 있었고 그 믿음 때문에 그는 그렇게 편안하게 이 세상을 떠날 수 있었습니다.
이 순간에 믿음 외에 돈이 필요하겠습니까? 다른 무엇이 필요하겠습니까?
죽음의 순간에 필요한 한 가지는 믿음뿐입니다.


지금 말씀드린 몇 가지 사실에 대해서 아니라고 부정할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여기에 대해서는 어느 누구도 부인할 수 없으리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이 이야기에 등장하는 공통적인 내용을 한 단어로 요약하면 죽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모든 사람이 죽는다.’ ‘죽음에는 순서가 없다.’ ‘죽음의 순간에는 아무도 도움을 줄 수 없다.’ ‘그 죽음의 순간에 꼭 필요한 것은 믿음이다.’ 모두가 죽음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우리 인간의 삶에서 뗄레야 뗄 수 없는 불가분리의 관계를 갖고 있는 것이 바로 죽음입니다.
우리가 먹는 것도 사실은 죽지 않기 위해서 먹는 것이고 건강에 힘쓰는 것도 죽지 않기 위해서입니다.
유기농이니 자연산을 더 선호하는 것도 건강에 더 좋은 것을 먹어서 더 오래 살기 위해서입니다.
아프면 병원가고 약을 먹고 정기적인 진단을 받는 것도 빨리 죽지 않기 위해서입니다.
우리의 삶은 죽음과 아주 밀접한 관계를 맺으면서 살고 있습니다.
가능하면 죽지 않으려고 하고 가능하면 오래 살려고 하고 가능하면 죽음을 피하려고 합니다.


왜 그럴까요?
죽음은 분명 즐겁고 행복한 것이 아니고 불행하고 슬프고 안타까운 것이기 때문입니다.
며칠 전 칠레 광부들이 69일 동안 갱도에 갇혀 있다가 기적적으로 구원받은 일에 전 세계에 감동으로 전해졌습니다만 그렇게 갑자기 사고가 나자 사람들이 자기 살기 위해서 순간적으로 별 생각을 다 했다고 합니다.
죽음을 피하려고 하는 인간의 본능은 크게 3가지 이유가 있다고 제 나름대로 생각해봅니다.


첫 번째는 사랑하는 사람과 헤어지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사람과 헤어지는 것은 분명 슬픈 일이고 피하고 싶은 일입니다.
그런데 죽음이 바로 그 일을 만들기 때문에 피하고 싶은 것입니다.


두 번째는 죽기 전에는 대부분이 아픔을 동반하기 때문입니다.
죽을 때 물론 아프지도 않고 잠자는 것 같이 편하게 죽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러나 대부분은 노쇠와 병 때문에 많은 고생을 하다가 죽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그래서 죽음은 고통스럽고 피하고 싶은 것으로 생각을 합니다.


세 번째는 가장 중요한 이유가 되겠습니다만 죽음이후의 삶을 모른다는 불안감이 있기 때문입니다.
죽으면 어떻게 될까? 여기에 대해 많은 이야기들이 있습니다만 아직도 우리는 죽음이후의 삶이 어떻게 되는지를 잘 알지 못하기 때문에 두려운 것입니다.


세 가지가 다 타당한 이유가 되겠습니다만 제 생각에는 죽음 이후의 삶을 모른다는 불안감이 있기 때문에 죽음은 항상 슬프고 두렵고 모든 사람이 회피하지 않는가 생각합니다.
그러기 때문에 인간이 참 평안을 누리며 행복하게 살기 위해서는 이 죽음의 문제가 해결되어야 합니다.
이 죽음의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 한 우리는 불안한 가운데 살 수 밖에 없습니다.
성경에는 죽음의 문제를 해결하신 분이 한 분 등장하는데 그 분이 바로 우리가 믿는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 분도 모든 사람과 마찬가지로 심한 고통을 받으며 십자가에서 죽음을 경험하였습니다.
그런데 이 예수님은 죽은 지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났으며 이것을 성경은 부활의 첫 열매가 되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사흘 만에 부활하심으로 죽음의 권세를 이기셨습니다.
지금까지 이 죽음의 권세를 이기고 부활하신 분은 없었습니다.
누구도 하지 못했던 그 일을 주님이 하셨고 그러기에 그 분은 지금도 살아계시고 영원히 살아계신 주님이 되십니다.
그 주님을 믿을 때 우리도 일단 한 번은 죽지만 다시 살아날 수 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믿을 때 우리도 죽음의 권세를 이길 수 있고 죽음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구원이라고 합니다.
구원을 받으면 우리는 천국에 들어가게 됩니다.
성경에 나오는 유명한 이야기가운데 부자와 나사로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한 부자는 부자답게 이 세상에서는 정말 화려하게 잘 살았는데 그런데 죽은 후에 이 부자는 지옥의 고통으로 들어갔습니다.
반면에 나사로라고 이름 하는 한 거지는 이 세상에서는 거지와 같은 불행한 삶을 살았지만 죽은 후에는 천국에 들어갔다는 것이 이 이야기의 내용입니다.


성경은 분명히 이 세상이 끝이 아니라 그 이후의 다음 세상에 있다는 것을 말하고 있고 그 이후의 세상에서 좋은 곳 즉 천국에 가는 것을 구원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 구원을 위해서 예수를 믿는 것입니다.
‘주 예수를 믿어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받으리라.’
여기에서 말하고 있는 구원은 우선적으로 천국에 가는 것을 말합니다.
천국에 가지 못하면 구원을 받지 못한 것입니다.
이 세상은 짧고 기간이 한정되어 있지만 저 세상에는 기간이 없습니다. 영원히 계속됩니다.
이 세상에서는 구원의 길이 열려 있지만 저 세상에서는 구원받을 길이 없습니다.
한 번 결정되면 그 결정을 벗어날 수 있는 기회가 전혀 주어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하면 이 세상에서 우리가 예수님을 믿고 구원을 받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모릅니다.


중국의 기독교 지도자인 리가 미국사람들에게 말씀을 전하고 나서 질문을 받았습니다.
‘중국에는 이미 유교가 있는데 기독교를 전해야 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이렇게 묻는 학생에게 그는 기억할 만한 답변을 했습니다.
“거기에는 세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첫째 공자는 선생이었으나 그리스도는 구세주였다는 것입니다. 중국은 선생을 필요로 하기 보다는 구세주를 필요로 합니다.
둘째는 공자는 죽었으나 그리스도는 사셨다는 것입니다. 중국은 부활하신 구세주를 필요로 합니다.
셋째는 공자는 어느 날 그리스도 앞에 서게 될 것이며 그리스도의 심판을 받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중국은 그리스도를 심판자로 만나기 전에 구세주로 만나야 합니다.”


오늘 이 자리에 나오신 여러분들도 그리스도를 심판자로 만나기 전에 구원자로 만나야 합니다.
구원자로 만나지 못하면 심판자로 만날 수밖에 없고 그 때에는 이미 때가 늦은 것입니다.
오늘 나오신 여러분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구원을 받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천국에 들어갈 준비를 잘 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두 번째로 예수님을 믿는 이유는 행복해지기 위해서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첫 번째 이유는 구원을 받는 것입니다만 그러나 예수님을 믿는 이유는 여기에 머물지 않습니다.
이 세상을 떠난 이후에 천국에 가는 것이 중요하지만 이 세상을 살아갈 때 행복하게 사는 것도 예수님을 믿는 중요한 이유가 됩니다.
방금 전에 말씀드린 부자와 나사로의 이야기를 생각하면서 둘 중에 하나를 선택하라고 한다면 어째든 나사로를 선택해야 합니다.
이 세상에서는 어떻게 살든 저 세상에서 천국에 가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둘 중에 하나를 선택하라고 말씀하고 있지는 않습니다.
즉 나사로같이 가난하고 거지같이 살아야 천국에 간다는 말은 없습니다.
부자와 같이 잘 살고도 천국에 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하면 우리의 선택은 이 세상에서도 행복하게 살고 저 세상에서도 천국에 가는 삶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예수를 믿으면 받게 되는 축복이 자유함을 얻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으면 진정한 자유를 얻게 됩니다.
많은 사람들은 교회를 다니고 예수를 믿으면 자신을 구속하는 일이 많아진다고 생각합니다.
하고 싶은 술과 담배도 마음대로 못하고 일요일에 놀러가려고 해도 교회를 가야 하기 때문에 놀러가지도 못한다고 말을 합니다.
그래서 교회를 다니면 구속당하는 기분이라고 말을 합니다.
그것은 잘못 생각하는 것입니다. 사실은 예수님을 믿으면 진정한 자유를 얻게 됩니다.
야생코끼리를 길들이는 방법이 있다고 합니다.
태국사람들이 야생코끼리를 잡으면 우선 우리속에 가둡니다.
그리고 발목을 아주 강한 쇠사슬로 채운 후 튼튼하고 큰 나무에 그 끝을 묶어둔다고 합니다.
그리고 우리를 치우면 코끼리는 그 곳을 벗어나려고 안간힘을 쏟지만 결국은 벗어나지 못합니다.
코끼리가 탈출하려고 몇 번을 시도하다가 안 되면 결국은 어느 순간에 포기하게 됩니다.
이때부터는 가벼운 말뚝이나 그렇게 강한 쇠사슬이 아니어도 줄만 팽팽해지면 더 이상 힘을 쓰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런 힘센 코끼리가 작은 줄에 매여 노예처럼 살아가는 것입니다.
우리에게도 우리를 묶고 있는 작은 줄이 있습니다.
이 줄에 매여 우리도 자유롭지 못하게 살아갈 때가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이사도 마음대로 가지 못하고 손 없는 날로 잡고 결혼식도 택일을 하고 아이들의 이름도 작명소에 가서 짓게 됩니다.
제사에 얽매여서 살아가고 미신에 얽매여서 살아가고 돈에 노예가 되어 살아가고 나도 모르게 현실에 노예가 되어 살아갈 때가 참으로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예수님을 믿게 되면 이런 모든 것에서 자유함을 얻을 수 있습니다.
손 없는 날로 잡을 필요도 없고, 제사에 얽매일 필요도 없고, 돈이 조금 없어도 행복하고 사업이 조금 흔들려도 감사하며 살아갑니다.
왜냐하면 가장 소중한 것을 잡았기 때문입니다.
두 자매가 갯벌에서 조개를 잡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에 큰 조개를 발견했는데 언니와 동생이 동시에 잡았습니다.
그러자 언니는 내꺼야 하고 가져가 버렸습니다.
동생은 억울해 울었지만 어쩔 수 없었습니다.
그리고 동생은 계속해서 조개를 잡고 있었는데 한 조개를 잡고 보니 이상해서 자세히 보니 진주를 담고 있는 조개였습니다.
너무나 아름다운 진주를 담고 있는 조개였습니다.
너무 행복한 동생은 그 다음부터 언니와 함께 잡을 때도 기꺼이 양보하고 전혀 아까워하지 않았습니다.


왜 이런 자유함이 생겨났습니까?
그가 진주조개를 소유하고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왜 우리가 얽매여 살고 있습니까?
그것은 바로 집착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물질에 집착하고 자식에 집착하고 목숨에 집착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 믿는 진정한 이유는 바로 나를 묶고 있는 것으로부터의 자유를 누리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으면 행복해지는데 그 비결은 자유함을 얻는 것 뿐 아니라 내가 변화되는 것에서도 얻을 수 있습니다.
사람은 변화될 때 행복할 수 있습니다.
그 변화는 예수님을 믿을 때 이루어집니다.
노름으로 재산을 날리고 부인과 자식들에게 폭행을 일삼는 한 주정뱅이가 있었습니다.
그런 그가 전도를 받고 교회에 나가게 되었습니다.
그를 아는 사람들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저런 사람은 교회에 다녀봤자 달라질게 있겠어?”하며 회의적이었습니다.


어느 날 한 친구가 그에게 물었습니다.
“교회에서 목사님이 무어라고 가르치던가?”
“착하게 살라고 하기도 하고 또 열심히 살라고 하기도 하고 뭐 그런데 잘 모르겠어.”
친구가 또 물었습니다. “그럼 성경은 누가 썼다던가?”
그는 당황하며 대답했습니다. “글세, 그런 것은 잘 모르겠는걸”
친구가 다시 여러 질문을 했지만 그의 대답은 영 신통하지 못했습니다.
그러자 친구는 답답하다는 듯이 물었습니다.
“도대체 교회에 다니면서 자네가 배운 것이 무엇인가?”
그러자 그 친구는 자신 있게 대답했습니다.
“그런 것은 잘 모르겠는데 조금 달라진 것이 있지. 전에는 술이 없으면 못 살았는데 요즘은 술 생각이 별로 나지 않네. 그리고 전에는 퇴근만 하면 노름방으로 달려갔는데 지금은 집에 빨리 가고 싶네. 전에는 애들이 나만 보면 슬슬 피했는데 지금은 나랑 함께 저녁식사를 하려고 기다린다네. 그리고 아내도 전에는 내가 퇴근해서 집에 가면 나를 쳐다보지도 않았는데 지금은 내가 퇴근할 무렵이면 대문 앞까지 나오 나를 기다린다네.”


예수 믿는 이유는 바로 이런 1%의 변화 때문입니다.
그 일 퍼센트의 변화가 우리를 행복하게 하는 것입니다.
(이 부분에서 사영리 책자를 이용하여 새 신자들에게 복음을 받아들이기로 강조하며 영접하는 기도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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