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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룩하게 하옵소서(요한복음 17장 13절~19절)

by 【고동엽】 2023. 2. 5.
목차

거룩하게 하옵소서(요한복음 171319)

 

지금 내가 아버지께로 가오니, 내가 세상에서 이 말을 하옵는 것은 저희로 내 기쁨을 저희 안에 충만히 가지게 하려 함이니이다. 내가 아버지의 말씀을 저희에게 주었사오매 세상이 저희를 미워하였사오니, 이는 내가 세상 에 속하지 아니함 같이 저희도 세상에 속하지 아니함을 위함이니이다. 내가 비옵는 것은 저희를 세상에서 데려 가시기를 위함이 아니요, 오직 악에 빠지지 않게 보전하 시기를 위함이니이다. 내가 세상에 속하지 아니함 같이 저희도 세상에 속하지 아니하였삽나이다. 저희를 진리로 거룩하게 하옵소서. 아버지의 말씀은 진리니이다. 아버지께서 나를 세상에 보내신 것 같이 나도 저희를 세상에 보내었고, 또 저희를 위하여 내가 나를 거룩하게 하오니 이는 저희도 진리로 거룩함을 얻게 하려 함이니이다.

 

 

"인간이 무엇이냐?"라고 묻는다면 마치 철학자들이나 하는 소리로 들리게 됩니다만, 사실은 누구나 묻고 대답해야 하는 중요한 질문입니다. 인간이 무엇이냐 하는 문제는 곧 내가 무엇이냐 하는 문제로서, 이 문제에 대한 해답이 있고서야 오늘 내가 어떻게 살 것인가 하는 지혜가 유발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인간이 무엇이냐 하는 질문은 일생동안 묻고 대답해야 하는 문제임을 알아야 하겠습니다.

인간이 무엇인가에 대해서는 옛날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여러 가지 측면에서 생각되어 왔고, 복잡한 철학이나 이론적인 학설이 많습니다마는 이 모든 것을 종합해서 간단하게 말하면 세 가지로 요약할 수가 있습니다. 첫째, '인간은 동물이다'라고 말하는 유물사관론입니다. 공산주의 철학이 바로 여기에 기초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공산주의자들이 백성들에게 맨 처음 가르치는 것이 '사람은 동물로부터 왔다'는 진화론입니다. 사람은 근본적으로 동물이라고 동물성을 대단히 강조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곧 유물사관으로 모든 것은 물질이라 규정짓고, 이 사상으로 분명하게 세뇌되면 피도 눈물도 없는 공산당원이 되는 것입니다. 여기서는 인간의 양심이다 진리다 하는 이야기는 통하지 않습니다. 북한에서 지금 없어진 단어가 몇 개 있는데, 그 중의 하나가 진실이요 양심인 것입니다. 정말 슬픈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인간은 동물이다'라고 규정짓고나면, 그에 따른 본능적인 욕망에만 이끌리어 살아간다고 생각하기에 약육강식(弱肉强食)이요, 적자생존(適者生存)이라는 말이 나오게 됩니다. 둘째, '인간은 신이다'라고 보는 견해입니다. 인간은 절대 부인할 수 없는 절대적인 영성을 지녔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아무리 악한 사람일지라도 그의 마음 깊은 곳에는 양심이 있고 숨길 수 없는 신성이 감추어져 있다는 것입니다.

세째, 인간은 동물과 신의 중간적 존재라는 견해입니다. 여기서 더 이상 복잡하게 이론을 전개할 생각은 없습니다. 요컨대 성경에서는 무엇이라 이야기하고 있나에 우리의 관심을 돌리고자 합니다.

성경은 인간이 무엇인가에 대해 복잡하게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인간의 몸은 흙으로 지어졌고 그 속에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영혼이 있다고 간단하면서 복합적으로 말씀하고 있습니다. 창세기 2장에 보면 사람을 창조하는 두 과정의 설명이 있습니다. 하나는 사람을 흙으로 만드셨다는 것이고, 또 하나는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하셨다는 것입니다. 사람은 분명히 만들어진 부분이 있고 창조된 부분이 있습니다. 그리고 이에 대해서 결론지으시기를 "다스리라"(1:28, 1:26)는 것입니다. 다스림에 대해 상세하게 설명을 드리지는 못합니다만, 한마디로 농축하면 '영성 주도적 인간'이 되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몸도 다스리고 마음도 다스리고 인격, 소유, 지식, 가정, 그리고 만물까지도 다스리라는 것입니다. 창세기 4:7에 보면 하나님께서 가인에게 "소원은 네게 있으나 너는 죄를 다스릴찌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죄를 지을 수 있는 가능성은 얼마든지 있으나 네 마음은 네가 다스리라는 것입니다.라고 말함은 바로 영혼을 지칭하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형상으로 된 너이기에 모든 것을 다스릴 수 있다는 뜻입니다. 여기에 책임이 있고 존재의 의미가 있게 되는 것입니다.

사람은 엄연히 구별되어야 합니다. 물질이지만 물질화 되어서는 안 되며, 동물이면서도 동물화 되어서는 안 되고, 세속에 살지만 세속화되어서는 안됩니다. 또한 자기가 목적이 되는 그 목적화에 빠져서도 안 되며 모든 사람과 함께 사는 것이므로 이기적인 존재가 되어서도 안 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비유하기를 사람의 몸은 "장막"(tent)이라고 했습니다(고후 5 :1). 사람이 비록 장막 속에 살지만 이 장막의 노예가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사람 몸이 있으나 몸에 속한 존재가 아니므로 매이지 말며, 물질과 더불어 살지만 물질의 노예가 되지 말고, 세상에서 사나 세속화되지 말고, 물위를 다니지만 물에 빠져서는 안 되며, 공중을 날 수는 있지만 궤도를 벗어나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어떠한 상황에서든지 구별되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히브리 사람들의 개념으로 보면 하나님은 거룩한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이 하나님께 대한 인간의 바른 응답은 경건하게 사는 길입니다. 다시 말하면 인간은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마음으로 거룩 지향적인 존재로 살아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시기 전날 밤에 제자들에게 주신 말씀입니다. 요한복음 13장에서부터 17장까지 5장은, 예수께서 마지막으로 제자들에게 남기신 유언과 같은 중요한 설교입니다. 그 중에서 특히 오늘 본문은 지금까지의 긴 설교의 요약이요 결론으로, 기도로써 마무리되고 있음을 봅니다. 제자를 향한 세상에서의 마지막 기도의 주제는 '저희를 진리로 거룩하게 하옵소서'라는 소원입니다. 오늘 우리를 향한 주님의 기도도 우리가 거룩하게 되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복잡하고 죄가 들끓는 세상에서 어떻게 거룩해질 수 있습니까? 그러나 예수님의 기도는 "내가 비옵는 것은 저희를 세상에서 데려가시기를 위함이 아니요 오직 악에 빠지지 않게 보전하시기를 위함이니이다"(17:15)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 생각으로는 악한 세상에서 어디론가 좀 옮겨주셔야 거룩하게 될 것 같은데, 주님은 저희를 세상에서 데려가기 위함이 아니라고 분명히 말씀하고 있습니다. 요즘 주위에서는 자녀들을 깨끗하게 훌륭하게 키워보겠다고 학군이 좋은 동네, 또는 환경이 좋은 곳으로 이사를 하여 집 값만 올려놓는 결과를 빚고 있습니다. 아무튼 자녀들을 깨끗하게 잘 키우겠다는 생각은 좋은데, 정말 그 방법이 바른 것이냐에 문제가 있습니다. 제가 잘 아는 어느 청년은 집에서 어떻게나 귀하게 컸는지 한번도 매맞지 않고 칭찬 가운데서만 고이고이 자랐습니다. 공부도 잘했으므로 학교에서나 가정에서나 대우만 받고 자라다가 군대에 갔습니다. 어느 날 모진 기합을 한번 받고 나더니, 세상이 이렇게 어려운 줄 몰랐다고 하며 자살을 하고 말았습니다. 얼마나 나약하게 키웠길래 어 모양입니까? 예수님은 세상의 앞날이 대단히 어려울 것임을 마태복음 5장에서 예고하셨습니다. 앞으로 전쟁이 있고 재난이 있고 지진과 기근이 있고 배신이 있고 부도덕함이 있고, 그리고 배교가 있을 것임을 예고하시면서, 그러나 세상에서 데려가시기를 위함이 아니라고 말씀하십니다. 이렇게 위험한 세상이라면 데려가야 거룩함을 지킬 수 있을 터인데, 여기서 어떻게 하라는 것입니까? 마태복음 10장에 보면 예수께서 제자들을 파송하실 때에 말씀하신 것이 있습니다. 비유 말씀으로 "내가 너희들을 세상에 보내는 것은 양을 이리 가운데에 보내는 것과 같다"라고 좀 넌센스 같은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리가 있는 무서운 곳에 왜 양을 보내시는지 여쭈어 보고 싶은 심정입니다. 어쨌든 예수님은 보내셨습니다. 오늘 본문도 예수님은 이 악한 세상에서 제자들을 데려가시지 않겠다는 말씀으로 같은 내용입니다. 세상이 얼마나 약하냐 하면 대표적인 예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은 세상인데 더 할말이 있습니까? 이런 세상에 사랑하는 제자들을 남겨 두겠다고 하십니다. 고린도전서 5:10에 보면 사도 바울이 그리스도인의 사귐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중에 "만약 우리가 깨끗하게만 살려고 한다면 세상 밖으로 나가야 할 것이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사실 그렇습니다. 그러나 세상 밖으로 나간다는 것은 소극적이요 부정적이며 도피적인 방법입니다.

예수님께서 저들을 데려가시지 않고 세상에 남겨 두시겠다는 것은 보다 적극적이요 긍정적이며 도전적인 방법입니다. 최대의 방어는 공격이라고 하듯이, 뒤로 물러설 것이 아니라 오히려 세상 속으로 들어가는 적극적인 자세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저희 집에 아들이 둘 있습니다. 첫째 아들을 낳고 보니 너무 귀하게 생각되어 좀 과보호를 한 경향이 있었습니다. 그 한 예로 아이가 초등학교에 들어가면서부터 졸업할 때까지 어머니가 연필을 다 깎아 주었습니다.

자칫하면 손이 베일 것을 염려하여 도와주었더니 중학교에 가서도 연필을 깎지 못했습니다. 둘째 아이는 처음부터 칼을 주었습니다. 물론 몇 번 손을 베이기는 했습니다만 거듭 훈련하다 보니 괜찮았습니다. 어떤 부모님은 자녀들을 유학 보내면서까지 따라가고 방을 얻어 주는 등 지나치게 돌보는 것을 봅니다. 사실 그 정도로 자랐으면 기숙사에 들어가든 방을 얻든 좀 내버려두는 것도 중요한 교육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의 교육법에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돌아보는 것이요, 둘째는 내버려두는 것입니다. 우리나라 부모들은 돌아보는 것은 아주 잘하는데 내버려두는 교육은 영점입니다. 그저 싸고돌아서 30세가 넘은 자식들도 홀로 서지 못하고 어머니의 치맛자락에서 비실거리는 못난이들이 있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이 결혼해서 어떻게 가정을 꾸려 나가리라고 기대할 수 있겠습니까? 다소 안스럽고 나약해 보여도 과감하게 내버려두는 교육에도 신경을 써야 하겠습니다. 어떤 남편들은 아내를 사랑한답시고 자동차 운전을 전혀 배우지 못하게 합니다. 위험해도 배울 것은 배워야 하고 어려워도 감당할 것은 감당해서 부딪쳐야 발전이 있지 않습니까? 무사태평으로 만사를 안일하게만 보낸다면 무슨 일을 할 수 있겠습니까? 예수님께서 사랑하는 제자들을 이 세상에서 데려가지 않으시고 그냥 두겠다고 하시는 깊은 뜻을 깨달아야 하겠습니다.

다음은 제자들을 보내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아버지께서 나를 세상에 보내신 것 같이 나도 저희를 세상에 보내었고"(17:18). 저희를 세상에 남겨 두는 것만이 아니라 보내겠다고 하셨습니다. 오늘 우리들도 보냄 받았다는 의식을 가져야 합니다. 창세기 12장에 보면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택하시고 바로 고향을 떠나 이방 땅으로 보내십니다. 그 당시는 고향을 떠나 정처 없이 방황한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모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고향을 떠나라고 하십니다. 여러분, 혹시 시집살이를 하십니까? 직장 생활을 하십니까? 혹은 부자입니까 가난합니까? 공부를 많이 했습니까 못했습니까? 건강합니까 병들었습니까? 어떤 처지에 있건 내가 처한 바로 여기에 하나님께서 보내셨다는 사실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제가 아는 어느 목사님이 병이 들어 약 2년 동안 입원을 했었습니다. 긴 세월 동안 얼마나 힘들고 괴로웠겠습니까? 마지막에는 가사(假死) 상태까지 가게 되어 시체실까지 들어갔다가 나온 분입니다. 그가 건강을 회복하고 나자, 왜 하나님께서 나를 이리로 보내셨을까 하고 생각하다가 병원에 입원한 사람들을 도와야겠다고 결심하고 원목(院牧)이 되어서 환자들을 돌보는 일에 평생을 보내고 계십니다. 그분은 병원에서 아주 권위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입원 환자들이 열흘 정도만 되면 답답하고 괴로워서 어쩔 줄 모를 때 찾아가서 "저는 2년 동안 입원했었습니다"하고 위로하며, 또는 사경을 헤매는 어려운 환자에게는 "저는 시체실까지 갔다 왔습니다"하고 자기 경험을 들려주어 환자들에게 용기를 주는 것입니다. 여러분, 오늘 이 자리에 하나님이 왜 나를 보내셨다고 생각하십니까? 하나님은 실수하지 않으시며 하나님께는 우연이 없습니다. 오늘 나의 형편 이대로가 하나님이 주신 선교지임을 깨닫고, 여기에 사명이 있고 경륜이 있고 목적이 있음을 알아야 하겠습니다. 성공했든 실패했든, 부하든 가난하든 묻지 마십시다. 다만 긍정적으로 하나님의 뜻이 있음을 받아들이시기 바랍니다.

마지막으로 본문은 "거룩하게 하옵소서"하고 주님은 기도하십니다. 이 말은 깨끗해야 함을 의미하며, 하나님의 형상을 지켜야 한다는 말입니다.

소극적으로는 악에 빠지지 않게 보존하기 위함이지만 적극적으로는 하나님 지향적인 생을 살아가는 거룩함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들의 후회가 어디서부터 비롯되는 것입니까? 가난해서 후회합니까? 권좌에 앉지 못해 후회합니까? 가장 근본적인 후회는 죄와 타협했기 때문이며 깨끗하게 살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정결하게 살지 못했기에 후회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소속을 분명히 해야 합니다. 그리스도께서 세상에 속하지 아니한 것처럼 우리도 세상에 속하지 아니했다고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세상에 속하지 않았습니다. 본래가 그렇고 현재도 그러하며 앞으로도 그럴 것입니다. 언젠가 주님이 부르시면 우리는 툭툭 털고 일어나 주님께로 갈 것입니다. 여기서 오래 살 것이 아니라 이제 머지 않아 다 떠날 것입니다. 이 곳은 우리가 거할 곳이 아니라 잠시 머무는 곳일 뿐입니다. 자기의 소속감을 분명히 해야 합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 속하지 않고 하늘나라 소속이며, 그리스도께 속했고, 하나님의 거룩한 사역에 쓰임 받고 있습니다. 우리의 종말론적인 운명과 종말론적인 약속에 대해서 분명하게 알아야 합니다.

선교사 리빙스턴은 아프리카에서 복음을 위해 수고하다가 1896년에 영국으로 돌아왔습니다. 이 때 글래스고 대학에서는 그에게 박사 학위를 수여했는데, 그는 아프리카에서 사자에게 찢기어 병신이 된 팔을 그대로 안고 단상에 섰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를 높이 칭찬할 때, 그는 답사하기를 "저는 다시 아프리카로 가렵니다. 지금까지 저는 "볼찌어다, 내가 세상 끝날 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신 주님의 그 말씀만 믿고 살았습니다. 앞으로도 그렇게 살 것입니다."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여기에 그의 거룩함과 위대함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진리입니다. 그러므로 그 말씀을 듣고 깨닫고 순종하면 영혼은 깨끗해집니다. 반면에 말씀을 거역하면 점점 어두워지고 속물이 되어 감을 우리는 경험하고 있습니다.

어떤 어린아이가 엄마의 심부름하는 것을 무척 즐거워했습니다. 특히 식사 준비를 할 때 엄마 곁에서 반찬 나르는 것을 즐거워했습니다. 그런데 이 어머니는 아이가 접시를 들고 다닐 때마다 "손은 깨끗이 씻었니?"하고 같은 질문을 되풀이하셨습니다. 이 어린아이가 후에 목사가 되었습니다. 그가 하나님의 말씀의 떡을 교인들에게 나누어 줄 때마다 생각나는 말이 있었습니다. "손은 깨끗이 씻었니?"-----내 손 깨끗이 하고서야 하나님의 역사를 이룰 수 있기 때문입니다. 더러운 손으로 무슨 일을 하겠습니까? 더러운 마음으로는 어떤 역사도 일어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최우선적으로 "거룩하게 하옵소서"라는 간구가 있어야 합니다. 베드로전서 1:15에 보면 "오직 너희를 부르신 거룩한 자처럼 너희도 모든 행실에 거룩한 자가 되라"고 말씀하셨고, 또한 베드로전서 1:22에서는 "너희가 진리를 순종함으로 너희 영혼을 깨끗하게 하여 거짓이 없이 형제를 사랑하기에 이르렀으니 마음으로 뜨겁게 피차 사랑하라"하신 말씀이 있습니다.

경건은 율법을 지키는 로보트적인 행위가 아닙니다. 경건은 감상이나 명상이나 지식이 아니라 곧 행동이요 순종입니다. 진리를 순종함으로 영혼이 깨끗해지고 영혼이 깨끗하면 인격도 소유도 생활도 깨끗해집니다. 깨끗한 그릇만이 주님의 손에 들리어져 소중하게 쓰임 받는 것입니다.

여러분, 세상이 험하다고 원망하거나 말세가 되었다고 개탄하지 맙시다. 바로 여기에 우리의 사명이 있고 할일이 있는 것입니다. 본문에서는 '거룩하게 하옵소사'와 기쁨을 충만하게 하기 위한 주님의 기도가 함께 있음을 주시해야 합니다. 거룩하게 함과 기쁨 충만은 동시적인 역사입니다. 기쁘지 못하고 행복하지 못하다면 거룩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신령하고 깨끗하고 거룩함이 있을 때 거기에 행복도 기쁨도 은혜도 있는 것입니다. 여기에 창조적인 능력이 있고 악을 이기는 승리가 있고 찬양이 있게 되는 것입니다. 이제 나의 경건을 한번 점검해 보십시다. 세속화된 부분, 바로 그것 때문에 피곤이 있고 낙심이 있습니다. 거룩함을 되찾아야 기쁨이 있고 그 기쁨이 충만할 때에 이 세상을 이기는 승리의 생활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  

거룩하게 하옵소서(요한복음 171319)

 

지금 내가 아버지께로 가오니, 내가 세상에서 이 말을 하옵는 것은 저희로 내 기쁨을 저희 안에 충만히 가지게 하려 함이니이다. 내가 아버지의 말씀을 저희에게 주었사오매 세상이 저희를 미워하였사오니, 이는 내가 세상 에 속하지 아니함 같이 저희도 세상에 속하지 아니함을 위함이니이다. 내가 비옵는 것은 저희를 세상에서 데려 가시기를 위함이 아니요, 오직 악에 빠지지 않게 보전하 시기를 위함이니이다. 내가 세상에 속하지 아니함 같이 저희도 세상에 속하지 아니하였삽나이다. 저희를 진리로 거룩하게 하옵소서. 아버지의 말씀은 진리니이다. 아버지께서 나를 세상에 보내신 것 같이 나도 저희를 세상에 보내었고, 또 저희를 위하여 내가 나를 거룩하게 하오니 이는 저희도 진리로 거룩함을 얻게 하려 함이니이다.

 

 

"인간이 무엇이냐?"라고 묻는다면 마치 철학자들이나 하는 소리로 들리게 됩니다만, 사실은 누구나 묻고 대답해야 하는 중요한 질문입니다. 인간이 무엇이냐 하는 문제는 곧 내가 무엇이냐 하는 문제로서, 이 문제에 대한 해답이 있고서야 오늘 내가 어떻게 살 것인가 하는 지혜가 유발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인간이 무엇이냐 하는 질문은 일생동안 묻고 대답해야 하는 문제임을 알아야 하겠습니다.

인간이 무엇인가에 대해서는 옛날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여러 가지 측면에서 생각되어 왔고, 복잡한 철학이나 이론적인 학설이 많습니다마는 이 모든 것을 종합해서 간단하게 말하면 세 가지로 요약할 수가 있습니다. 첫째, '인간은 동물이다'라고 말하는 유물사관론입니다. 공산주의 철학이 바로 여기에 기초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공산주의자들이 백성들에게 맨 처음 가르치는 것이 '사람은 동물로부터 왔다'는 진화론입니다. 사람은 근본적으로 동물이라고 동물성을 대단히 강조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곧 유물사관으로 모든 것은 물질이라 규정짓고, 이 사상으로 분명하게 세뇌되면 피도 눈물도 없는 공산당원이 되는 것입니다. 여기서는 인간의 양심이다 진리다 하는 이야기는 통하지 않습니다. 북한에서 지금 없어진 단어가 몇 개 있는데, 그 중의 하나가 진실이요 양심인 것입니다. 정말 슬픈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인간은 동물이다'라고 규정짓고나면, 그에 따른 본능적인 욕망에만 이끌리어 살아간다고 생각하기에 약육강식(弱肉强食)이요, 적자생존(適者生存)이라는 말이 나오게 됩니다. 둘째, '인간은 신이다'라고 보는 견해입니다. 인간은 절대 부인할 수 없는 절대적인 영성을 지녔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아무리 악한 사람일지라도 그의 마음 깊은 곳에는 양심이 있고 숨길 수 없는 신성이 감추어져 있다는 것입니다.

세째, 인간은 동물과 신의 중간적 존재라는 견해입니다. 여기서 더 이상 복잡하게 이론을 전개할 생각은 없습니다. 요컨대 성경에서는 무엇이라 이야기하고 있나에 우리의 관심을 돌리고자 합니다.

성경은 인간이 무엇인가에 대해 복잡하게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인간의 몸은 흙으로 지어졌고 그 속에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영혼이 있다고 간단하면서 복합적으로 말씀하고 있습니다. 창세기 2장에 보면 사람을 창조하는 두 과정의 설명이 있습니다. 하나는 사람을 흙으로 만드셨다는 것이고, 또 하나는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하셨다는 것입니다. 사람은 분명히 만들어진 부분이 있고 창조된 부분이 있습니다. 그리고 이에 대해서 결론지으시기를 "다스리라"(1:28, 1:26)는 것입니다. 다스림에 대해 상세하게 설명을 드리지는 못합니다만, 한마디로 농축하면 '영성 주도적 인간'이 되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몸도 다스리고 마음도 다스리고 인격, 소유, 지식, 가정, 그리고 만물까지도 다스리라는 것입니다. 창세기 4:7에 보면 하나님께서 가인에게 "소원은 네게 있으나 너는 죄를 다스릴찌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죄를 지을 수 있는 가능성은 얼마든지 있으나 네 마음은 네가 다스리라는 것입니다.라고 말함은 바로 영혼을 지칭하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형상으로 된 너이기에 모든 것을 다스릴 수 있다는 뜻입니다. 여기에 책임이 있고 존재의 의미가 있게 되는 것입니다.

사람은 엄연히 구별되어야 합니다. 물질이지만 물질화 되어서는 안 되며, 동물이면서도 동물화 되어서는 안 되고, 세속에 살지만 세속화되어서는 안됩니다. 또한 자기가 목적이 되는 그 목적화에 빠져서도 안 되며 모든 사람과 함께 사는 것이므로 이기적인 존재가 되어서도 안 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비유하기를 사람의 몸은 "장막"(tent)이라고 했습니다(고후 5 :1). 사람이 비록 장막 속에 살지만 이 장막의 노예가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사람 몸이 있으나 몸에 속한 존재가 아니므로 매이지 말며, 물질과 더불어 살지만 물질의 노예가 되지 말고, 세상에서 사나 세속화되지 말고, 물위를 다니지만 물에 빠져서는 안 되며, 공중을 날 수는 있지만 궤도를 벗어나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어떠한 상황에서든지 구별되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히브리 사람들의 개념으로 보면 하나님은 거룩한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이 하나님께 대한 인간의 바른 응답은 경건하게 사는 길입니다. 다시 말하면 인간은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마음으로 거룩 지향적인 존재로 살아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시기 전날 밤에 제자들에게 주신 말씀입니다. 요한복음 13장에서부터 17장까지 5장은, 예수께서 마지막으로 제자들에게 남기신 유언과 같은 중요한 설교입니다. 그 중에서 특히 오늘 본문은 지금까지의 긴 설교의 요약이요 결론으로, 기도로써 마무리되고 있음을 봅니다. 제자를 향한 세상에서의 마지막 기도의 주제는 '저희를 진리로 거룩하게 하옵소서'라는 소원입니다. 오늘 우리를 향한 주님의 기도도 우리가 거룩하게 되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복잡하고 죄가 들끓는 세상에서 어떻게 거룩해질 수 있습니까? 그러나 예수님의 기도는 "내가 비옵는 것은 저희를 세상에서 데려가시기를 위함이 아니요 오직 악에 빠지지 않게 보전하시기를 위함이니이다"(17:15)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 생각으로는 악한 세상에서 어디론가 좀 옮겨주셔야 거룩하게 될 것 같은데, 주님은 저희를 세상에서 데려가기 위함이 아니라고 분명히 말씀하고 있습니다. 요즘 주위에서는 자녀들을 깨끗하게 훌륭하게 키워보겠다고 학군이 좋은 동네, 또는 환경이 좋은 곳으로 이사를 하여 집 값만 올려놓는 결과를 빚고 있습니다. 아무튼 자녀들을 깨끗하게 잘 키우겠다는 생각은 좋은데, 정말 그 방법이 바른 것이냐에 문제가 있습니다. 제가 잘 아는 어느 청년은 집에서 어떻게나 귀하게 컸는지 한번도 매맞지 않고 칭찬 가운데서만 고이고이 자랐습니다. 공부도 잘했으므로 학교에서나 가정에서나 대우만 받고 자라다가 군대에 갔습니다. 어느 날 모진 기합을 한번 받고 나더니, 세상이 이렇게 어려운 줄 몰랐다고 하며 자살을 하고 말았습니다. 얼마나 나약하게 키웠길래 어 모양입니까? 예수님은 세상의 앞날이 대단히 어려울 것임을 마태복음 5장에서 예고하셨습니다. 앞으로 전쟁이 있고 재난이 있고 지진과 기근이 있고 배신이 있고 부도덕함이 있고, 그리고 배교가 있을 것임을 예고하시면서, 그러나 세상에서 데려가시기를 위함이 아니라고 말씀하십니다. 이렇게 위험한 세상이라면 데려가야 거룩함을 지킬 수 있을 터인데, 여기서 어떻게 하라는 것입니까? 마태복음 10장에 보면 예수께서 제자들을 파송하실 때에 말씀하신 것이 있습니다. 비유 말씀으로 "내가 너희들을 세상에 보내는 것은 양을 이리 가운데에 보내는 것과 같다"라고 좀 넌센스 같은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리가 있는 무서운 곳에 왜 양을 보내시는지 여쭈어 보고 싶은 심정입니다. 어쨌든 예수님은 보내셨습니다. 오늘 본문도 예수님은 이 악한 세상에서 제자들을 데려가시지 않겠다는 말씀으로 같은 내용입니다. 세상이 얼마나 약하냐 하면 대표적인 예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은 세상인데 더 할말이 있습니까? 이런 세상에 사랑하는 제자들을 남겨 두겠다고 하십니다. 고린도전서 5:10에 보면 사도 바울이 그리스도인의 사귐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중에 "만약 우리가 깨끗하게만 살려고 한다면 세상 밖으로 나가야 할 것이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사실 그렇습니다. 그러나 세상 밖으로 나간다는 것은 소극적이요 부정적이며 도피적인 방법입니다.

예수님께서 저들을 데려가시지 않고 세상에 남겨 두시겠다는 것은 보다 적극적이요 긍정적이며 도전적인 방법입니다. 최대의 방어는 공격이라고 하듯이, 뒤로 물러설 것이 아니라 오히려 세상 속으로 들어가는 적극적인 자세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저희 집에 아들이 둘 있습니다. 첫째 아들을 낳고 보니 너무 귀하게 생각되어 좀 과보호를 한 경향이 있었습니다. 그 한 예로 아이가 초등학교에 들어가면서부터 졸업할 때까지 어머니가 연필을 다 깎아 주었습니다.

자칫하면 손이 베일 것을 염려하여 도와주었더니 중학교에 가서도 연필을 깎지 못했습니다. 둘째 아이는 처음부터 칼을 주었습니다. 물론 몇 번 손을 베이기는 했습니다만 거듭 훈련하다 보니 괜찮았습니다. 어떤 부모님은 자녀들을 유학 보내면서까지 따라가고 방을 얻어 주는 등 지나치게 돌보는 것을 봅니다. 사실 그 정도로 자랐으면 기숙사에 들어가든 방을 얻든 좀 내버려두는 것도 중요한 교육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의 교육법에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돌아보는 것이요, 둘째는 내버려두는 것입니다. 우리나라 부모들은 돌아보는 것은 아주 잘하는데 내버려두는 교육은 영점입니다. 그저 싸고돌아서 30세가 넘은 자식들도 홀로 서지 못하고 어머니의 치맛자락에서 비실거리는 못난이들이 있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이 결혼해서 어떻게 가정을 꾸려 나가리라고 기대할 수 있겠습니까? 다소 안스럽고 나약해 보여도 과감하게 내버려두는 교육에도 신경을 써야 하겠습니다. 어떤 남편들은 아내를 사랑한답시고 자동차 운전을 전혀 배우지 못하게 합니다. 위험해도 배울 것은 배워야 하고 어려워도 감당할 것은 감당해서 부딪쳐야 발전이 있지 않습니까? 무사태평으로 만사를 안일하게만 보낸다면 무슨 일을 할 수 있겠습니까? 예수님께서 사랑하는 제자들을 이 세상에서 데려가지 않으시고 그냥 두겠다고 하시는 깊은 뜻을 깨달아야 하겠습니다.

다음은 제자들을 보내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아버지께서 나를 세상에 보내신 것 같이 나도 저희를 세상에 보내었고"(17:18). 저희를 세상에 남겨 두는 것만이 아니라 보내겠다고 하셨습니다. 오늘 우리들도 보냄 받았다는 의식을 가져야 합니다. 창세기 12장에 보면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택하시고 바로 고향을 떠나 이방 땅으로 보내십니다. 그 당시는 고향을 떠나 정처 없이 방황한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모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고향을 떠나라고 하십니다. 여러분, 혹시 시집살이를 하십니까? 직장 생활을 하십니까? 혹은 부자입니까 가난합니까? 공부를 많이 했습니까 못했습니까? 건강합니까 병들었습니까? 어떤 처지에 있건 내가 처한 바로 여기에 하나님께서 보내셨다는 사실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제가 아는 어느 목사님이 병이 들어 약 2년 동안 입원을 했었습니다. 긴 세월 동안 얼마나 힘들고 괴로웠겠습니까? 마지막에는 가사(假死) 상태까지 가게 되어 시체실까지 들어갔다가 나온 분입니다. 그가 건강을 회복하고 나자, 왜 하나님께서 나를 이리로 보내셨을까 하고 생각하다가 병원에 입원한 사람들을 도와야겠다고 결심하고 원목(院牧)이 되어서 환자들을 돌보는 일에 평생을 보내고 계십니다. 그분은 병원에서 아주 권위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입원 환자들이 열흘 정도만 되면 답답하고 괴로워서 어쩔 줄 모를 때 찾아가서 "저는 2년 동안 입원했었습니다"하고 위로하며, 또는 사경을 헤매는 어려운 환자에게는 "저는 시체실까지 갔다 왔습니다"하고 자기 경험을 들려주어 환자들에게 용기를 주는 것입니다. 여러분, 오늘 이 자리에 하나님이 왜 나를 보내셨다고 생각하십니까? 하나님은 실수하지 않으시며 하나님께는 우연이 없습니다. 오늘 나의 형편 이대로가 하나님이 주신 선교지임을 깨닫고, 여기에 사명이 있고 경륜이 있고 목적이 있음을 알아야 하겠습니다. 성공했든 실패했든, 부하든 가난하든 묻지 마십시다. 다만 긍정적으로 하나님의 뜻이 있음을 받아들이시기 바랍니다.

마지막으로 본문은 "거룩하게 하옵소서"하고 주님은 기도하십니다. 이 말은 깨끗해야 함을 의미하며, 하나님의 형상을 지켜야 한다는 말입니다.

소극적으로는 악에 빠지지 않게 보존하기 위함이지만 적극적으로는 하나님 지향적인 생을 살아가는 거룩함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들의 후회가 어디서부터 비롯되는 것입니까? 가난해서 후회합니까? 권좌에 앉지 못해 후회합니까? 가장 근본적인 후회는 죄와 타협했기 때문이며 깨끗하게 살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정결하게 살지 못했기에 후회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소속을 분명히 해야 합니다. 그리스도께서 세상에 속하지 아니한 것처럼 우리도 세상에 속하지 아니했다고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세상에 속하지 않았습니다. 본래가 그렇고 현재도 그러하며 앞으로도 그럴 것입니다. 언젠가 주님이 부르시면 우리는 툭툭 털고 일어나 주님께로 갈 것입니다. 여기서 오래 살 것이 아니라 이제 머지 않아 다 떠날 것입니다. 이 곳은 우리가 거할 곳이 아니라 잠시 머무는 곳일 뿐입니다. 자기의 소속감을 분명히 해야 합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 속하지 않고 하늘나라 소속이며, 그리스도께 속했고, 하나님의 거룩한 사역에 쓰임 받고 있습니다. 우리의 종말론적인 운명과 종말론적인 약속에 대해서 분명하게 알아야 합니다.

선교사 리빙스턴은 아프리카에서 복음을 위해 수고하다가 1896년에 영국으로 돌아왔습니다. 이 때 글래스고 대학에서는 그에게 박사 학위를 수여했는데, 그는 아프리카에서 사자에게 찢기어 병신이 된 팔을 그대로 안고 단상에 섰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를 높이 칭찬할 때, 그는 답사하기를 "저는 다시 아프리카로 가렵니다. 지금까지 저는 "볼찌어다, 내가 세상 끝날 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신 주님의 그 말씀만 믿고 살았습니다. 앞으로도 그렇게 살 것입니다."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여기에 그의 거룩함과 위대함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진리입니다. 그러므로 그 말씀을 듣고 깨닫고 순종하면 영혼은 깨끗해집니다. 반면에 말씀을 거역하면 점점 어두워지고 속물이 되어 감을 우리는 경험하고 있습니다.

어떤 어린아이가 엄마의 심부름하는 것을 무척 즐거워했습니다. 특히 식사 준비를 할 때 엄마 곁에서 반찬 나르는 것을 즐거워했습니다. 그런데 이 어머니는 아이가 접시를 들고 다닐 때마다 "손은 깨끗이 씻었니?"하고 같은 질문을 되풀이하셨습니다. 이 어린아이가 후에 목사가 되었습니다. 그가 하나님의 말씀의 떡을 교인들에게 나누어 줄 때마다 생각나는 말이 있었습니다. "손은 깨끗이 씻었니?"-----내 손 깨끗이 하고서야 하나님의 역사를 이룰 수 있기 때문입니다. 더러운 손으로 무슨 일을 하겠습니까? 더러운 마음으로는 어떤 역사도 일어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최우선적으로 "거룩하게 하옵소서"라는 간구가 있어야 합니다. 베드로전서 1:15에 보면 "오직 너희를 부르신 거룩한 자처럼 너희도 모든 행실에 거룩한 자가 되라"고 말씀하셨고, 또한 베드로전서 1:22에서는 "너희가 진리를 순종함으로 너희 영혼을 깨끗하게 하여 거짓이 없이 형제를 사랑하기에 이르렀으니 마음으로 뜨겁게 피차 사랑하라"하신 말씀이 있습니다.

경건은 율법을 지키는 로보트적인 행위가 아닙니다. 경건은 감상이나 명상이나 지식이 아니라 곧 행동이요 순종입니다. 진리를 순종함으로 영혼이 깨끗해지고 영혼이 깨끗하면 인격도 소유도 생활도 깨끗해집니다. 깨끗한 그릇만이 주님의 손에 들리어져 소중하게 쓰임 받는 것입니다.

여러분, 세상이 험하다고 원망하거나 말세가 되었다고 개탄하지 맙시다. 바로 여기에 우리의 사명이 있고 할일이 있는 것입니다. 본문에서는 '거룩하게 하옵소사'와 기쁨을 충만하게 하기 위한 주님의 기도가 함께 있음을 주시해야 합니다. 거룩하게 함과 기쁨 충만은 동시적인 역사입니다. 기쁘지 못하고 행복하지 못하다면 거룩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신령하고 깨끗하고 거룩함이 있을 때 거기에 행복도 기쁨도 은혜도 있는 것입니다. 여기에 창조적인 능력이 있고 악을 이기는 승리가 있고 찬양이 있게 되는 것입니다. 이제 나의 경건을 한번 점검해 보십시다. 세속화된 부분, 바로 그것 때문에 피곤이 있고 낙심이 있습니다. 거룩함을 되찾아야 기쁨이 있고 그 기쁨이 충만할 때에 이 세상을 이기는 승리의 생활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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