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른 복음은 없나니 다만 어떤 사람들이 너희를 요란케 하여 그리스도의 복음을 변하려 함이라. (갈라디아서 1장 7절)

 

바울은 한 번 더 갈라디아 사람들은 변호한다. 그리고 거짓 사도들을 혹독하게 공격한다. 이렇게 말하는 것 같다. “너희 갈라디아 사람들은 나에게서 받은 복음이 참되지도 않으며 순전하지도 않다고 설득을 당하였다. 그래서 너희는 거짓 사도들이 가르치는 저 새 복음, 나의 것 보다 더 좋아 보이는 그것을 받아들이면서 그것이 잘하는 일이라고 상상한다. 나는 너희 양심을 괴롭히고 너희를 내 손에서 잡아채가는 자들을 비난하는 만큼 너희를 비난하지는 않는다.”

 

여기어 여러분은 사도가 얼마나 뜨겁고 맹렬하게 유혹자들을 공격하는지 그리고 그들을 어떤 거친 말로써 서술하는지 다시금 본다. 그는 그들을 교회와 양심에 말썽을 일으키는 자들이라고 부른다. 수없는 양심들을 유혹하고 속이며 교회에서 무서운 상처와 문제를 자극하는 일밖에 아무 것도 하지 않는 자들이라고 말한다. 우리 자신의 시대에도 이런 큰 악을 증거 할 수밖에 없으니 매우 슬픈 일이다. 그러나 바울이 그 날에 어찌 할 수 없었던 것처럼 우리도 이런 일을 고치기 위하여 아무 일도 할 수 없다.

 

거짓 사도들이 틀림없이 바울을 불완전한 사도요 연약하고 잘못을 저지르고 있는 설교자라고 불렀다는 사실을 이 구절을 보여준다. 이 때문에 바울을 그것을 되받아서 저들을 교회의 문제아들이요 그리스도적 복음을 파괴하는 자들이라고 부른다. 이와 같이 그들을 정죄하였다. 교회 안에는 항상 그런 논쟁과 정죄가 있다. 특히 복음의 교리가 왕성할 때 그러하다. 악한 교사들은 충실한 교사들을 핍박하고 정죄하고 억압한다. 그리고 충성스러운 교사들은 다시 저들을 공격하고 정죄한다. 오늘날 교황과 불파주의자들은 우리를 극단적으로 증오하고 정죄한다. 그리고 우리는 다시 그들의 불순하고 모독적인 교리를 큰 증오를 가지고 미워하고 정죄한다.

 

한편 가난하고 평범한 사람들은 혼돈을 일으킨다. 그들은 흔들린다. 어느 편을 택할지 누구를 택해야 안전할지 방황하고 회의에 휩싸인다. 그와 같은 중요한 문제에 관하여 기독교적인 판단을 하는 일은 누구에게나 주어진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가르침에 있어서 그리고 상대를 정죄하는 일에 있어서 어느 편이 옳았는지는 결과가 보여줄 것이다. 우리는 아무도 박해하거나 억압하거나 누구도 죽이지 않으며, 우리의 교리도 양심을 괴롭히지 않고 끊임없는 잘못과 마귀의 올무에서 양심을 구하여 낸다. 이 주장을 뒷받침하는 많은 선한 사람들의 증거가 있다. 그들은 우리의 교리가 그들의 양심에 확실한 위로를 준 데 대해 하나님께 감사하고 있다. 그러므로 마치 교회가 고난을 당할 때 바울의 잘못이 아니었던 것 같이 우리 시대에 있어서도 우리의 잘못이 아니라 재세례파 사람들, 성례론자들, 그리고 다른 열광주의자들의 잘못으로 교회에 수없이 많은 어려움이 일어났다.

 

여기서 율법의 공로와 의를 가르치는 모든 교사들이 교회와 양심들을 괴롭히고 있음을 주의깊게 주목하라. 교황, 추기경들, 감독들, 수도승들, 그리고 “사탄의 회당”(요한계시록 2장9절) 전체, 특히 거룩한 수도원 창시자들이 그들의 일부는 하나님이 기적적으로 구원하실 수 있는 양심을 괴롭히는 자들임을 어느 누가 믿을 수 있겠는가? 사실 그들은 거짓 사도들보다 더 나빴다. 거짓 사도들은 그리스도 신앙에 더하여 하나님의 율법의 공로도 구원에 필요하다고 가르쳤다. 그러나 우리의 대적자들은 믿음을 통째로 빠뜨리고, 하나님의 명령에 의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 없이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에 반대하여 그들이 발명한 인간의 전통과 공로를 가르쳤다. 그들은 이것들을 하나님의 말씀과 동등한 표준 위에 두었을 뿐 아니라 더 높이 올려놓았다. 이단자들의 외면적 나타남이 거룩하면 할수록 그들은 더 많은 상처를 낳게 한다. 만일 거짓 사도들이 뛰어난 은사들, 위대한 권위, 그리고 거룩하게 나타남을 소유하지 않았던들, 만일 그들이 그리스도의 종들, 사도의 생도들 그리고 복음의 설교자들임을 주장하지 않았던들, 그들은 바울의 권위를 그리도 쉽게 훼손하지는 못하였을 것이며 갈라디아 사람들에게 감명을 주지 못하였을 것이다.

 

바울이 그들에 반대하여 그처럼 강한 입장을 세우고 그들을 교회의 문제아들이라 부르는 것은 그들이 그리스도적 신앙에 더하여 할례와 율법을 지키는 일이 구원에 필요하다고 가르쳤기 때문이다. 바울은 이것을 뒤에 나오는 5장에서 증거 한다. 그리고 누가도 사도행전 15장1절에서 같은 말을 한다. “어떤 사람들이 유대로부터 내려와서 형제들을 가르치되 너희가 모세의 법대로 할례를 받지 아니하면 능히 구원을 얻지 못하리라.” 거짓 사도들은 율법을 순종하여야만 한다고 심각하게 그리고 고집스럽게 주장하였다. 율법 지키기를 주장하는 완고한 유대인들은 지체 없이 그들과 연합하였다. 그리고는 믿음의 기반이 잘 다져지지 않은 사람들에게, 바울은 율법을 무시하기 때문에 정통 교사가 아니라고 쉽게 확신시켰다. 하나님의 율법을 전적으로 철폐한다는 것, 그리고 그때까지 항상 하나님의 백성으로 여겨졌고 약속이 주어졌던(로마서 9장4절) 유대인들을 거부하는 일은 그들에게 어울리지 않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저 악한 우상숭배자들인 이방인들이 할례 없이, 율법의 행위 없이 오직 은혜와 그리스도를 믿는 신앙만으로 하나님의 백성 됨의 영광을 성취한다는 것은 그들에게 더욱 어울리지 않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거짓 사도들은 바울을 갈라디아 사람들 가운데서 불명예스럽게 하기 위하여 이 모든 것을 매우 중요한 사실로 만들었다. 그리고 이것을 약화시키기 위하여 그들은 바울이 이방인들에게 율법으로부터의 자유, 하나님의 율법을 모욕하는 일, 율법과 전체 유대 왕국의 전적인 철폐-하나님의 율법과 전체 유대 왕국의 풍습에 반대되는 이 모든 것들, 사도들의 본보기, 그리고 바울 자신의 본보기까지도 가르쳤다고 말하였다. 그러므로 그는 하나님을 거스르는 공개적인 모독자로서, 또 전체 유대인의 안녕에 반하는 자이므로, 피하여야 할 사람이었다. 그런 한편 그들 자신은 귀담아 들어야 할 사람들로 견지하였다. 그들은 복음을 정확히 가르칠 뿐 아니라 사도들의 생도들이었고, 바울은 그 사도들과는 결코 잘 아는 사이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이로써 그들은 바울을 갈라디아 사람들 중에서 중상하였으며 그에게서 갈라디아 사람들을 변절하게 만들었다. 그리하여 바울의 복음의 진리가 확실히 갈라디아 사람들 중에 있도록 하기 위하여 거짓 사도들을 반대하는 데 그의 모든 힘을 써야만 했던 것이다. 바울은 그들을 교회의 문제아들로서, 다음과 같이 끊임없이 공격하고 정죄한다.

그리스도의 복음을 변하려 함이라.

 

말하자면 그들은 너희에게 괴로움을 주려 할 뿐 아니라 그리스도의 복음을 완전히 파괴하려 하고 소멸시키려 하고 있다. 사탄은 이 두 가지 활동에 모두 종사하고 있다. 그는 그의 거짓 사도들을 통하여 많은 사람들을 괴롭히고 속이는 것으로 만족하지 않는다. 그들을 통하여 복음을 무너뜨리고 철회하는 일을 하고 있다. 그리고 그는 이 일을 성취하기 전에는 쉬지 않을 것이다. 그러면서도 이 같은 복음의 변절자들은 마귀의 사도들이라는 말을 용납하지 않는다. 사실 그들은 어느 누구보다도 그리스도의 이름을 자랑하는 자들이다. 그리고 그들은 복음의 가장 신실한 설교자들임을 주장한다. 그러나 그들은 율법과 복음을 혼돈하기 때문에 복음을 불가피하게 파괴한다. 그리스도는 남아있고 율법은 소멸해야만 하든가, 율법은 남아있고 그리스도는 소멸해야만 하든가 해야 한다. 그리스도와 율법은 양심을 다스리는 일을 합의 할 수도 없고 함께 나눌 수도 없다. 율법의 의가 다스리는 곳에는 은혜의 의가 다스릴 수 없다. 그리고 다른 한편, 은혜의 의가 다스리는 곳에 율법의 의는 다스릴 수 없다. 둘 중의 하나는 상대방에 양보해야 한다. 만일 하나님이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여러분의 죄를 용서하시기를 원하신다는 것을 믿는 데로 여러분 스스로 가지 못한다면, 율법의 행위 때문에 또는 여러분 자신의 행위 때문에 하나님이 여러분을 용서하신다는 것을 어떻게 믿을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은혜의 교리는 율법의 교리와 단순히 같이 있을 수 없는 것이다. 그 중의 하나는 거부되어야 하며 철폐되어야 한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승인되고 구체화 되어야 한다.

 

유대인들이 이 믿음과 은혜의 교리로부터 떠나는 경향이 있었던 것과 같이, 우리도 거기서 떠나는 경향이 있다. 개인적으로 나는 의롭게 하는 것으로서의 은총의 의와 나를 향한 하나님의 모습으로서의 율법의 의를 다 가지고 싶다. 그러나 바울이 여기서 말하는 것처럼 이    방편들을 혼돈하는 일은 그리스도의 복음을 변절케 하는 일이다. 그런데도 논쟁이 벌어지면 강한 편이 올바른 편을 이긴다. 그리하여 은총과 믿음의 의는 상실되는 일이 발생한다. 율법과 행위의 의가 앞서가고 방어를 받는다. 그리스도와 그의 편은 약하다. 그리고 복음은 어리석은 선포가 된다. 다른 한편 세상과 마귀, 그리고 그 왕은 강하다. 거기다 육의 지혜는 대단히 감동적이다. 그러나 우리에게 위로를 주는 것은, 마귀는 그의 식구들과 함께 그 바라는 것을 성취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는 많은 사람들을 괴롭힐 것이다. 그러나 그는 그리스도의 복음을 파괴할 수 없다. 진리는 위협을 받을지 모른다. 그러나 소멸될 수 없다. 공격은 받아도 정복되지는 않는다.  “주의 말씀은 세세토록 있기” 때문이다(베드로전서 1장25절)

 

율법을 가르치거나 행위를 확증하는 일이 대단치 않은 것 같이 보인다. 그러나 그것은 인간의 이성이 상상할 수 있는 것 이상으로 손상을 준다. 은총의 지식을 손상시키고 애매하게 할 뿐 아니라 그리스도와 그의 모든 축복을 옮겨 버리고, 바울이 이 구절에서 말하는 것처럼 복음을 완전히 전복시킨다. 이 엄청난 악의 원인은 우리의 육이다. 죄에 깊이 빠진 육은 행위에 의하지 않고는 자신을 구출할 길을 찾지 못한다. 이 때문에 육은 율법의 의에 살기를 원하고 자기 행위를 신뢰하는 일에 머물기를 원한다. 그러므로 육은, 그것이 있어야만 양심이 평화를 발견할 수 있는 신앙과 은총의 교리에 관해서는 아무 것도 모르거나 거의 모른다.

 

 

-마르틴 루터-"갈라디아서강해"중에서(루터대학교출판부)


clic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