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 론
루터의 신학과 신앙을 이해한다는 것은 루터의 율법과 복음을 이해한다는 말과 같다. 따라서 루터는 “거의 모든 성서와 전 신학의 인식은 율법과 복음에 대한 올바른 인식에 달려 있다”1)고 말한다. 또한 루터는 “이 둘을 바르게 구분할 줄 아는 사람은 하나님께 감사해야 하며, 그도 한 신학자라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2)라고 쓰고 있다. 즉, 율법과 복음을 구분하는 것이 루터의 신학에 얼마나 중요한 것인가를 말하는 것이다. 더욱 자극적인 표현을 사용하자면, 율법과 복음에 대한 이해는 기독교 신학의 정체성과 중심을 이해하는 것과 같으며 이를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기독교 신학의 정체성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과 같다.
그러므로 루터에게 있어 율법과 복음의 차이에 대한 그의 구별은 신학적 사유의 본질적인 신경 줄과 같다.3) 먼저 루터에게 있어 율법은 죄를 깨닫는 것이며 복음은 신앙을 통한 칭의이다. 그리고 이 칭의는 “율법과 복음”의 형식과 그들과의 관계에 대한 이해를 의미한다. 따라서 루터에게 있어 복음의 내용으로 칭의를 이해하는 것은 율법과 복음을 구분하는 사건 속에 있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율법과 복음을 이해한다는 것은 루터에게 있어 신앙을 이해하는 것이며 그것은 언제나 하나님의 말씀을 이해하는 것이다. 따라서 알트하우스(Paul Althaus)의 지적대로 “루터에게 신앙은 인간의 이른바 창조적인 자기 결심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으며 또한 어떤 대상도 가지지 않는 ,즉 어떠한 대립도 가지지 않는 ”신앙심“의 정신적인 상태와도 아무런 관련이 없다. 하나님의 말씀과의 대립 가운데서만 신앙이 있는 것이다.”4) 그러므로 루터에게 있어 ‘하나님의 말씀’은 언제나 율법과 복음’이라는 두 가지 형태로 우리에게 제시된다.5) 따라서 우리가 루터의 율법과 복음을 이해한다는 것은 그가 하나님 말씀의 두 가지 형태라고 생각했던 율법과 복음의 관계 속에서만 그가 견지한 ‘칭의’와 ‘신앙’, ‘구원’ 대한 본질적 접근이 가능하다.
1. 갈라디아서 주석에 대한 역사적 배경
루터의 갈라디아 주석은 전체적으로 1516년, 1519년, 1531년 세 번에 걸쳐 이루어진다. 그러나 1516년의 갈라디아 주석은 분실되었고 1519년, 1531년 주석만이 남아있다. 연표에서 볼 수 있듯이 두 갈라디아 주석에는 11년의 차이가 난다. 이러한 긴 시간의 차이는 루터 신학의 발전적 측면을 배제할 수 없다. 그러나 갈라디아 주석에 나타난 사소한 차이를 두고 혹자는 루터의 전기 사상과 후기 사상의 차이를 말하기도 한다. 그러나 알트하우스와 로제는 이러한 차이를 루터 신학의 근본적 차이로 말하지 않는다.6)
1535년판 갈라디아 주석에 대한 역사적 배경은 먼저 당시의 급진 개혁주의자들의 논쟁으로 나타난 과격한 의인사상의 주장으로, 1521년 이후 칼쉬타트의 미사의 폐지 요구와 쯔빌링의 ‘성상파괴’의 요구와 같은 과격한 주장들이 계속되었다.7) 당시의 이러한 과격한 주장들과 함께 뮌쩌와 다른 열광주의자들(재세례파)이 나타나게 되었다. 따라서 당시의 분위기는 루터의 것이 아닌 다른 신학들이 루터의 것으로 오해를 받고 있었다.8) 두 번째 갈라디아 주석의 역사적 배경으로는 1527년 루터와 아그리콜라(John Agricola)의 율법페기론 논쟁과9) 에크(John Eck)의 공격이었다. 에크의 주장은 루터의 신학에 선행이 결여되어 있다는 것이며 아그리콜라는 멜랑히톤과의 논쟁을 통하여 율법의 무용성을 주장하였다.10) 일차 멜랑히톤과 아그리콜라의 율법논쟁은 1528년 멜랑히톤이 작성한 “시찰자들의 교육”(Unterricht der Vistatoren)에 수용된 ‘참회를 포함하는 공동신앙’으로 대충 일단락되었다.11) 이후 아그리콜라는 다시 “루터의 율법과 복음에 대한 가르침은 은총의 약속을 모호하게 한다”라고 비판한다. “복음이 어떤 의미에서 율법이다”고 주장하였다.12)
이러한 일련의 주장에 대하여 루터는 1530년 아우구스부르그 신앙고백과 1531년 갈라디아 주석을 통하여 반율법주의자들의 오류를 비판하고 있다.13) 그러므로 갈라디아 주석은 먼저, 율법과 복음을 통한 의의 문제를 다루고 있다. 계속적으로 이 율법과 복음을 통하여 신앙과 죄의 문제, 신앙과 의의 전가의 문제, 전가된 칭의와 행위(성화)의 관련성을 심도 있게 다루고 있다. 따라서 여기에서는 이러한 일련의 주제들을 통하여 갈라디아 주석을 이해하고자 한다.
2. 율법과 복음의 구분에서 나타난 루터의 신학적 인식론
루터의 신학은 그 인식론에서부터 바른 정립을 요구한다. 왜냐하면 루터의 신학적 인식론은 루터의 신학과 신학을 이해하는 가장 기초적인 단계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루터의 신학적 인식론을 이해하는데 실패한다면 루터의 신학뿐만 아니라 기독교 신학을 이해하는데 실패할 수밖에 없다. 그런 의미에서 율법과 복음과 상관성과 내용을 이해하는 것은 루터의 신학적 인식론을 이해하는 출발점이라 할 수 있다.
루터는 그의 갈라디아서 강해 후 1532년 6월에 행한 시편 51편 2절 강해에서 신학의 주제를 다음과 같이 정의하였다. “신학의 고유한 주제는 한편 죄책 아래 있고 타락한 인간이요, 죄인인 인간과 다른 한편으론 구원자 혹은 의롭게 하시는 하나님이다"14) 여기서 루터는 인간을 “죄책 가운데 타락한”이라는 수식어로 정의한다. 그에게 인간은 항상 그 자체로 죄인이다. 루터는 죄인이 아닌 인간에 대한 가정을 그 어디에서도 상정한 적이 없다. 그러므로 그에게 죄는 언제나 실재하는 인간의 현실성이다. 이 말은 루터에겐 죄인이 아니었던 인간의 원상태에 대한 추론이나, 신학적으로 죄 이전 상태 가운데 있었던 인간의 본질 규정을 부인하는 것은 아니다. 이는 하나님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그는 죄인을 구원하시는 하나님 외의 하나님을 말한 적이 없다. 그에게 하나님은 언제나 죄인을 의롭다하시고, 구원하시는 하나님이다. 그런데 이 신학의 주제로서의 죄인인 인간의 자기 정의는 루터에겐 오직 율법 아래서만 드러난다. 율법은 지금 여기 실재하는 참 인간의 현실을 보여 준다. 이것이 바로 그가 율법이 가진 주된 기능(usus praecipius)으로 생각했던 율법의 신학적이며 영적 용도(usus theologicus seu spritualis)의 대상이요 목적이다. 곧, 루터에게 율법의 핵심 용도는 인간에게 의를 주거나 창출해 내는 것이 아니라, 거꾸로 인간의 불의를 드러내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것이다. 루터는 “율법을 행한다는 것은 하나의 허구의 사실이요 허구의 단어”임을 지적한다.15) 이처럼 율법이 루터에게는 인간의 죄인 됨 가운데서 성취 불가능성이라는 본질로 규정되기 때문에 율법은 언제나 부정적으로 나타나고 부정적으로 정의된다.
그런데 바로 이 자리 즉 불가능성을 그 본질로 갖고 있는 율법에 의해 드러나 는 인간의 하나님 앞에서의 불가능성이라는 이 진리가 예수 안에서 죄인을 부르시고 의롭다하시는 하나님의 복음 안에서는 은혜의 은혜 됨을 최대로 증폭시키는 힘으로 작용하게 됨을 루터는 보았다. 바로 이 복음 안에서 인간은 가상의 하나님, 허구의 하나님인 의인의 하나님 상(像)을 버리게 된다. 그리고 비로소 지금 여기 실 재하는 참 하나님 곧, 이 세상에 실재하는 현실적 인간인 죄인을 구원하시는 은혜 의 하나님을 인식하게 된다. 따라서 루터에게 이 현실이 현실로서 규정되고 바로 인식되기 위해서는 율법과 복음이 어떤 중간적인 입장도 허락하지 않는 질적이고 절대적인 대립으로 나타나야 한다고 보았다.16)
곧, 한편으로는 그리스도의 부정, 복음의 부정으로서의 율법 다른 한편으로는 율법의 부정으로서의 복음이다. 그는 율법과 복음의 대립은 변증법적으로 통합될 수 있는 논리적 개념으로 보지 않았다. 율법과 복음의 대립과 반목은 인간 위에 상존하는 실제적인 대립 세력으로 그는 이해했다. 루터에게 율법은 죄와 사망 그리고 마귀와 결부되어 나타나고, 복음은 그리스도와 함께 등장한다.17) 그리고 이 둘은 그 사이에 놓여 있는 인간을 쟁탈하기 위한 거대한 논쟁 가운데 있다. 이 차원에서 루터에게 어떤 이가 믿음을 가졌다는 것은 단순한 지적 동의(assensus)나 감정적 신뢰(fiducia) 정도가 아니다. 그것은 이 율법과 복음의 투쟁 가운데서 복음 안에 나타난 하나님의 구원의 능력(롬1:16)이 율법 아래 있는 사람에게는 승리의 능력으로서 역사하는 결정적 증거가 되는 것이다.
이러한 율법과 복음에 대한 상관성과 율법과 복음에 대한 인식은 루터의 모든 신학적 교리를 구성한다. 다시 말해 루터의 인간론, 칭의론, 신앙론, 구원론을 구성하는 인식의 기반으로 자리 잡고 있다.18)
3. 율법과 복음
루터는 일차적으로 율법과 복음을 대립적인 상관성에서 이해하고 있다. 대립적인 상관성이라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율법과 복음’을 하나의 말씀으로 또한 대립적 관점에서 이해한다는 의미이다. 그러므로 율법과 복음의 대립성이 상실된 “율법” 혹은 “복음”으로 구분된 이해나 바르트의 신학처럼 대립성을 약화시키는 은총의 승리로서 “복음 안에서 율법”을 이해하려는 시도나, ”율법과 복음”의 대립성을 무시하는 구속사의 하나의 하나님 말씀으로 이해하려는 시도는 루터의 신학을 정확히 이해하고자 노력이 되지 못한다. 그래서 로제는 율법과 복음의 관계를 다음과 같이 말한다.
루터의 율법과 복음의 구분은 구속사적이 아닌 변증법적으로 구성되었다는 점에서 전통과는 대조를 이루고 있다. 율법과 복음의 구분은 경직되게 사용해서는 안 되며 항상 새롭게 적용되어야 한다는 점이 오히려 새롭다. 루터에게 율법이 서로 구분되고 서로 연합되는 것뿐만이 루터에게 중요한 것이 아니라...구약은 항상 율법이고 신약은 항상 복음이라는 논리로 도식화할 수 없으며, 특정한 성서 구절을 가지고 이것은 항상 율법이고 저것은 항상 복음이라고 규정할 수 없다는 점이다. 율법에 해당하는 본문들도 복음적인 측면이 있고 복음에 해당하는 본문들도 마찬가지로 율법의 측면을 가지고 있다... (그런 점에서) 십자가는 기독교의 화해와 구속의 핵심인 동시에 인간의 죄에 대한 가장 혹독한 심판이다... (따라서) 이 둘의 지속적인 상호 관계성을 통해 그 참된 본질과 본래적인 기능 안에서 유지되어야만 한다. 이 둘이 날조되고 특히 복음으로 하나의 새로운 율법이 조성될 위험은 언제나 있다. 율법과 복음은 혼합되어서도 나뉘어서도 안 된다. 그것들은 루터가 반율법주의자들과의 논쟁에서 말하듯 ‘상호 결합’되어 있는 것이다(WA 39,Ⅰ,416,8-14.).19)
그러므로 율법과 복음은 하나의 개별적 지식이 아니다. 언제나 상호 관계성 가운데 하나의 하나님 말씀으로 이해되어야 할 지식이다.
3.1. 율법의 의미
루터에 의하면 율법은 인간의 타락 이후에 주어진 것이 아니라 타락 이전에도 있었다. 그러나 타락 이전의 율법은 자발적으로 자명한 것처럼 율법을 성취했다. 그런 의미에서 천사가 율법아래 있다고 말할 수 없다. 율법의 자발적 사용은 율법이 천사를 고소할 수도 없다. 율법은 언제나 하나님의 말씀이며 그 중요성은 어느 시기 또는 시대에 제한된 것이 아니고 다양한 상황에 직면하여 그 기능이 영원한 가치를 가지고 있다.20) 그러나 본래적인 의미에서 타락 이후에야 비로소 하나님의 율법을 그 속성을 드러낸다고 할 수 있다. 이는 율법을 타락 이전과 비교해볼 때 바뀐 것은 율법이 아니라 사람이다. 인간이 하나님께 불순종함으로 하나님께 대한 그의 관계뿐만 아니라 율법에 대한 그의 관계도 달라졌다. 이제 율법은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자리를 점하고 인간에게 요구하고 죄인을 고소하면 심판하는 하나의 크기(eine Grὄβe)가 되어 버린 것이다.21) 그런 점에서 루터에게 율법이란 무엇인가?
루터는 로마서 서문에서 “율법이란 작은 낱말을 생각할 때에 인간적인 방식으로 무슨 일은 행할 수 있고 또 무슨 일은 행할 수 없다는 하나의 가르침으로 생각해서는 안 된다고 말한다.22) 이것을 율법에 대한 올바른 이해가 될 수 없다고 말한다. 그런 점에서 루터는 시대와 지역을 초월하여 모든 인간의 마음속에 쓰여진 자연법을 말하지만, 그러나 자연법은 인간이 알고 있는 인식에서 아무런 결론도 이끌어 내지 못한다. 그래서 하나님은 모세를 통해 십계명을 주셨다. 하지만 모세를 통해 주어진 율법의 대한 인식의 갱신에도 불구하고 루터는 모세 율법에서 자연법의 경신과 ‘유대 민족법’을 구분하여 유대법과 예식법은 그리스도인과 상관이 없으며 구약의 이방인과도 무관하다. 십계명도 오히려 자연법의 갱신의 총체로서만이 구속력이 있는 것이다.23) 그러므로 ”그리스도는 어떤 의식법도 있기 전, 세계의 시초로부터의 온 세계의 죄를 위하여 죽으신 것”24)이 된다.
루터에게 있어 율법은 무엇을 행하고 행할 수 있는 차원의 문제가 아니다. 율법은 영적인 차원의 문제이다. 그런 의미에서 사도 바울은 7장 14절에서 “율법은 신령한 것이다”라고 말한다. 이것은 “비록 율법 자체는 선하고 바르고 거룩하다 할지라도 마음 가운데 그런 갱신이 없으면, 거기에는 죄가 남아 있고 또 율법에 대한 불만과 적의가 역시 남아 있게 된다.”25) 이러한 루터의 진술은 율법이 “형이상학적으로 설명하거나 도덕적인 의미로 설명하지 않고 영적, 신학적 의미”를 가짐이 분명하다.26) 그렇다면 자연법의 갱신으로 율법은 우리에게 어떻게 적용되는가? “우리들은 우리의 행위를 마치 율법의 행위처럼 생각해야 한다.27) 그리고 이 율법을 통하여 우리는 죄의 찔림을 받아야 한다. 이에 대해 루터는 로마서 3:20절의 다음과 같이 주석한다.
율법에 의한 죄의 깨달음은 두 가지가 있는데 하나는 “율법이 탐내지 말라 아니 하였다면 내가 탐심을 알지 못하였으리라”(7:7)고 한 성찰(省察)에 의한 것이다. 또 하나는 경험에 의한 것이다. 즉, 율법의 행위에 의한 것이며 또는 행위와 함께 채택된 율법에 의한 것이다. 율법은 죄를 짓게 하는 계기가 되게 한다. 왜냐하면 악로 기울어지려는 인간의 의지를 율법에 의해서 억지로 선으로 강제하여 선을 행한 것에 싫증을 느끼며 증오감을 일으키게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만일 인간의 의지가 율법의 강요에 의해서 마음에 없는 것을 행하게 된다면, 그때 인간은 죄와 악이 자신 속에 얼마나 깊이 뿌리를 내리고 있는지 깨닫게 펼 것이다. 만일 인간이 율법을 가지지 않고, 또 율법에 의해서 행동을 시도하지 않는다면 이 사실을 깨닫지 못했을 것이다.28)
이것은 율법에 의해서 우리가 죄인이며 우리 안에 죄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며 동시에 우리가 사악한 사람이며 우리 안에 사악함이 있다는 것을 알게 하는 것과 같은 말이다.29)
루터에 있어 율법이 행위가 율법을 성취시킨다는 것은 완전한 거짓이다. 왜냐하면 율법은 영적이며 마음의 의지에 호소하는 것이므로 우리 자신의 내적인 소망을 이루기에는 불가능한 것이다.30) 따라서 우리의 “‘의’가 율법에 의한 것이 아니고 신앙에 의한 것이며”, 그러므로 율법과 신앙의 상관관계는 “율법은 진노와 약속의 상실을 제시하고 신앙은 은총과 약속의 성취를 제시한다.” “다시 말하면 우리가 성서나 성서에 기록된 사실을 믿지 않고서도 자신의 경험만은 믿는다. 그럴 때에 우리는 율법에 의해서 진노와 파멸을 당하게 되지만 신앙으로는 전 세계를 소유하게 된다.31)
계속해서 루터는 우리의 행위와 관련하여 율법이 비록 진노로 나타난다 할지라도 율법은 우리에게 구원을 이루도록 한다.
율법은 진노를 이루게 한다. 즉 율법이 이행되지 못할 때에는 하나님의 진노가 사람에게 나타나는데 그 사람은 이전에는 하나님의 진노에 대해서 전혀 알지 못한 사람이다. 이와 같이 율법 자체가 악한 것이 아니고 율법을 받은 사람과 진노를 받은 사람에게 악한 것이 된다. 그렇지만 믿는 우리에게는 율법이 구원을 이루게 한다. 그것은 율법의 행위로써가 아니라 하나님의 은총이 그렇게 행해지는 것이다. 그러므로 율법에 의해서 약속이 왔기 때문에 가령 그것이 하나님의 진노를 일으키는 요소가 된다고 해도 그 때에는 약속이 유효하게 되며 한갓 협박이 되고 말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약속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성취된다.32)
그러므로 율법은 기본적으로 “영적인 범죄들을 드러내고 더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은혜와 의의 생명이 아니라 죄와 죽음과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을 보여주고 드러내는 빛이시다.”33) 이것이 “율법의 고유한 사용이며, 여기에 율법의 목적이 있는 것으로서, 율법은 이를 넘어서는 안된다.”34) 그러나 또한 루터는 율법의 의미가 칭의를 통하여 완전히 바뀌는 것을 말하고 있다. 그것은 칭의된 신자에게 율법은 폐지되는 것이 아니라 범죄 이전 아담의 스스로 율법의 요구에 부응하여 율법을 지켰듯이 그리스도인은 율법에 대한 원상태적인 흥겨운 복종에로 다시 이끄신다.35) "율법에 대한 두려움이 아니라 기꺼운 자발심과 선으로써 계명 때문에 행하는 것이 아니라 계명이 없다고 할지라도 기쁨으로 인하여 행하는” 것이다.36) 뿐만 아니라 율법은 신자들에게 남아 있는 죄의 실제성으로 말미암아(육으로 말미암아) 율법은 여전히 남아있는 죄에 대한 찔림을 계속한다. 이는 율법으로 말미암아 새사람이 옛사람에 대하여 일생동안 회개의 싸움을 살아야 할 것을 의미한다.37) 이러한 일생의 싸움, 회개의 신앙은 “의인이면서 죄인”(simul justus et peccator)의 칭의론에서도 동일하게 나타난다.
3.2. 율법의 이중적 사용
루터는 율법사용에 대하여 두 가지 기능을 말한다. 먼저 율법적 사용은 시민적인 사용으로 즉, 범죄들을 처벌하는 모든 법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모든 법은 죄를 억제하기 위하여 있는 것이다. 이러한 기능은 악한 자들을 재갈물리는 것이다. 시민적 제재는 공공의 안녕과 보존을 위해서 필요한 것이다. 그렇지만 이러한 것은 절대로 우리를 의롭게 하지 못한다.38) “또 다른 율법적 사용은 신학적 영적 사용이다. 이것은 ”범죄를 더하는 것“이다. 즉 사람에게 그의 죄, 그의 눈멂, 그의 비참함, 그의 불경건, 하나님에 대한 무지와 증오와 경멸, 죽음, 음부, 하나님의 심판과 마땅히 받아야 할 진노를 알려준다.”39) 그러므로 이러한 율법은 양심에 공포를 일으키게 되고 그것은 하나님을 화나게 하였고 영원한 죽음에 처해질 죄를 범했음을 느끼게 한다.40) 다시 말해 괴로워하는 우리의 양심을 고요하게 하지 못하고 공포를 증대시키며 양심을 절망으로 몰고 간다. 왜냐하면 계명으로 인해서는 죄는 극도로 죄로 되기 때문이다(롬7:13).41) 그런 의미에서 루터는 다음과 같이 율법의 의미를 정의한다.
율법의 적절한 사용은 첫째로 시민적인 범죄들을 재갈물리는 것이요, 다음으로는 영적인 범죄들을 드러내고 더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율법은 하나님의 은혜와 의와 생명이 아니라 죄와 죽음과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을 보여주고 드러내는 빛이기도 하다... 율법도 진정한 의미로 사용할 때 죄를 드러내고 진노를 불러오며 사람들을 고발하고 두렵게 함으로써 사람들을 절망에 빠뜨린다. 이것의 율법의 고유한 사용이며 여기에 율법의 목적이 있는 것으로서, 율법을 이를 넘어서서는 안 된다.42)
우리는 이러한 율법의 이중적 사용에 대하여 두 가지 다른 관점을 제시해 볼 수 있다. 먼저 칼빈의 율법에 대한 3중적 사용의 문제이다. 칼빈은 율법의 교훈적, 교육적 의미를 첨가하여 3중적 사용을 말한다. 이러한 3중적 사용에 대하여 루터는 어떤 견해를 피력하는가? 일단 루터는 율법의 사용에 대하여 루터는 멜란히톤이 나중에 도입한 율법의 ‘삼중 기능'에 대한 예시는 아니지만(WA 10,Ⅰ,1,449-463.), 처음부터 율법의 삼중 사용에 대하여 말했다.43) 그런 점에서 루터는 율법의 이중 사용이나 기능을 경직되어 적용하고 있지는 않는다. 루터의 이러한 율법의 이중 사용에 대한 구분에 대해서는 갈라디아서에서 절정을 이루고 있지만, 3중적 의미는 비교적 드물게 사용한다. 율법의 이중적 작용 방식에 대한 공식과 같은 구분과 적용은 율법의 이중적 기능 대신 삼중적 기능을 말한 멜란히톤에게서 처음 나타난다.44)
또한 루터의 율법의 이중적 사용에 대하여 제기되는 문제는 율법과 회개의 관계성에 대한 문제이다. 여기에는 두 가지 상호 다른 견해를 가진 부류가 있을 수 있다. 먼저 율법을 복음의 일부로 생각하고 복음 안에서 율법을 이해하고자 하는 부류이다. 이들의 주장은 다소 차이를 보이기는 하지만 루터 당시의 반율법주의자들이 일반적으로 주장하는 주장이었다. 또 한 부류는 복음에 앞서 율법적 회개를 주장하는 율법주의자들이다. 먼저 루터는 이러한 반율법주의자들의 주장과 또 다른 부류의 주장에 대하여 “율법이 폐지되었다면 죄도 그러하며, 죄가 폐지되었다면 그 경우에 아무짝에도 쓸모없을 그리스도도 마찬가지이다”45)라고 말한다. 루터는 말하기를 율법은 그 자체의 선포로서는 참되 회개를 일으키지 못한다. 루터는 이것을 다음과 같이 표현하고 있다.
많은 사람들은 율법을 들으나, 그의 위협이나 경악을 통하여 움직여지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들은 율법의 능력을 느끼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나는, 하나님이 도우셔서 그의 영을 통하여 함께 일하시지 않는다면, 나의 설교와 능력을 통하여 어느 누구도 회개시키지 못한다.46)
그런 점에서 율법은 참되 회개를 일으키지 못하며, 오히려 율법은 인간을 하나님의 진노 앞에 노출되어 더욱 더 절망으로 이끌며, 그 절망은 하나님을 더욱 증오하도록 만든다.47) 인간은 이러한 율법과 대면할 때 회개가 아닌 악마의 의도와 하나님의 의도에서 갈등한다. 그러므로 율법은 회개를 낳는 것이 아니라 “인간을 치는 것 이외에 다른 아무것도 계획하지 않고 또 그것을 할 수 없는 노상강도와 비슷한 악마가 된다.”48) 그런 점에서 인간이 노상강도와 같은 악마임을 깨닫기 위해 “그러므로 율법은 선포되어야 한다. 그러나 율법의 선포 자체만으로는 참된 회개와 복음에 대한 신앙으로 이끌지는 못한다.”49) 이러한 루터의 율법 이해는 율법은 그 자체만으로 지옥으로 이끌며, 복음과 함께 그리고 복음으로부터 이해하면, 율법은 그리스도에게로 이끈다.50)
이러한 Luther의 율법 이해는 율법과 복음이라는 상관성 아래서만 참된 회개와 중생을 이해할 수 있다는 것이다. 율법 자체만으로도, 복음 속에 함몰된 율법으로도, 율법이 결여된 복음만으로도 참다운 회개와 중생이란 있을 수 없다. 율법은 복음으로 해석되어야 하고 율법은 복음으로 이해되어야 우리의 구원이 시작된다. 이것이 Luther의 반율법주의자들에 대한 비판이자 율법주의자들에 대한 비판이다.
Luther는 율법과 복음에 대한 관계를 대립적 관계이자, 구분할 수는 있으나 결코 분리할 수 없는 관계로 파악한다.51)
『갈라디아 주석』에서 루터는 “율법에 의해 겸손해지고 스스로를 알게 되기에 이르렀을 때, 참된 회개(참된 회개는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과 심판에서 시작되기 때문이다)가 따르고52) 그는 크나큰 죄인이어서 자기 힘과 노력과 행위를 통해서는 자기 죄로부터 결코 건질 수 없음을 발견한다”53)고 한다. 이러한 루터의 진술은 전후 문맥을 파악하지 않고서는 Luther가 율법으로부터 참된 회개가 시작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은 루터의 진술의 의도를 곡해하는 것이다. 율법으로부터 참된 회개는 복음이라는 율법의 영적 기능이 복음으로 해석되고 이해될 때 비로소 참된 회개에 이르게 된다. 그러므로 회개와 중생은 율법과 복음은 상호 관계성 가운데서 이해되어야 한다. 이러한 주장은 다음에 논의 될 믿음과 칭의의 관계에서도 동일하게 주장되는 방법론이다.
결론적으로 율법과 회개와의 관계성의 문제는 “양자 택일, 즉 율법에서 오는 회개나 복음에서 오는 회개를 훨씬 넘어선다. 그는 여기서 결국 논점이 율법과 복음의 순수한 양자택일의 문제가 아니라는 점을 보여준다.54) 결국 루터는 반율법주의자들의 주장인 율법의 무익성도 율법으로부터 회개를 주장하는 율법주의자들도 아닌 ”율법의 인지로부터 그리고 그리스도의 십자가나 구원의 인식으로부터 회개에 이르는 것이다“55)고 말한다. 이는 결과적으로 ”통절한 회개 없이는 칭의도 없다. 따라서 그것이 필요한 것이다. 그러나 그것에서 “칭의가 필연적으로 따르는 것은 아니다.”56) 통렬한 회개와 함께 신앙이 필요한 것이다.
4. 복음과 신앙
Luther의『갈라디아 주석』의 두 번째 논점은 믿음과 칭의(Justification)의 대한 논점이다. 이 주제는 사실 작은 소논문으로 다루기에는 너무 광범위한 주제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러한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율법과 복음의 상관성의 문제는 반드시 믿음과 칭의의 문제를 논의하도록 만든다. 즉, 믿음과 칭의는 논리적으로 율법과 복음의 상관성의 문제를 이해함과 동시에 제기되는 논제이다.
그러므로 루터의 신앙을 이해할 때 가장 중요한 것은 신앙의 내용과 이 내용이 전달되는 형식을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 루터에게 있어 신앙을 이해하는 것은 성경에 나타난 복음을 이해하는 것과 같다. “율법으로 인해 두려움에 싸인 그는 자신의 힘에 대하여 철저하게 절망한다.” “이때 복음의 건강한 말씀은 와서 이렇게 말한다: ”소자야...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마9:2).”57) 루터에게 있어 이 복음의 내용은 칭의이며, 이 내용은 “율법과 복음”의 형식으로 전달된다.
그러므로 루터의 신앙론은 그가 하나님 말씀의 두 가지 형태라고 생각했던 율법과 복음의 상관성과 구분 속에서 신앙의 내용인 칭의 속에서 그가 견지한 ‘신앙의 본질’에 대한 이해가 가능하다.
루터에게 있어 이러한 신앙은 언제나 하나님의 말씀과 관련되어 있다. 따라서 신앙이란 원칙적으로 복음과의 관계 가운데(in), 복음과의 관계에 더불어서(with) 그 능력의 증거로만 나타나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가 루터의 이러한 신앙 이해가 가지는 본질적인 의미를 분명히 파악하려면, 지금까지 기독교 신앙에 대한 신학적 논의의 기준으로 사용된 두 가지 대립적인 틀, 율법과 복음과의 비교에서 가능하다
“복음은 율법과 그의 선포를 전제한다. 왜냐하면 이 복음은 죄 사함을 동반한다.”58) 그러므로 “또 다른 의와 이 세상의 삶을 뛰어 넘는 또 다른 생명을 가지는데, 이는 죄와 죽음을 알지 못하고 영원한 의와 생명이신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시다.”59) 율법과 복음의 대립적인 틀에서 신앙은 우리에게 믿음의 의, 그리스도의 의를 소유하게 한다. 이 믿음의 의는 하나님의 율법의 의도 아니면 우리의 행위로도 이루어진 것이 아니다.60) 이 믿음의 의는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어진 의이다.
따라서 루터는 우리에게 주어진 믿음과 그리스도, 의의 전가를 관계를 다음과 같이 진술하고 있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것은 이 세 가지 즉 믿음, 그리스도, 받으심(용납) 또는 전가는 함께 결합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믿음은 그리스도를 붙잡고 그분을 임재케 하며 반지 속에 보석이 박혀 있듯이 그분을 우리 속에 있게 한다. 그리고 그리스도에 대한 이러한 확신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발견된 사람들은 마음속에서 하나님이 자를 의롭다고 여긴다는 것을 알았다. 이것이 우리가 죄를 사함 받고 의에 이르는 수단이자 공로이다.61)
결국 그리스도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율법과 죄를 뛰어 넘어 그리스도를 품는다. 그 이유는 믿음으로 반지 속에 보석이 박혀 있듯이 그리스도를 마음속에 모시기 때문이다. “율법이 그를 고소하고 죄가 그를 두려워할 때 그리스도를 바라보며 그가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이해하였을 때 그에게는 그리스도가 율법과 죄와 죽음과 마귀의 정복자로 임재해 계신다.”62)
이것이 율법과 복음의 대립을 통하여 주어지는 신앙의 본질적 의미이다. 복음은 언제나 율법을 전제하며 그 가운데 신앙은 일으켜진다.
4.1. 신앙
이제 우리는 이 ‘신앙의 본질’을 계속적으로 숙고할 필요가 있다. 루터의 ‘이신칭의’의 신앙은 ‘믿음’을 보다 분명하고 확신 있게 이해하는 것이 필수적인 일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믿음이 무엇인가라고 물어야 한다.
먼저 루터의 진술에서 믿음은 절대로 인간의 이성으로 이해되며 어떤 인간학적 행위도 요구되지 않는다는 것을 분명히 한다. 이러한 루터의 신앙의 교리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우선 인간의 본질을 이해해야 한다. 루터에 있어 인간의 본질은 영적인 본질과 육적인 본질로 구성되어 있다. 영적 본질에 속해 있는 사람은 영적인간, 내적 인간, 새로운 사람이며, 반면 육적 본질에 속해있는 사람은 육적 인간, 외적 인간, 옛 사람으로 불린다.63) 믿음과 관련하여 옛 사람인 즉, 외적인간은 어떤 형태로든 내적인 인간에 영향을 미칠 수 없다. 다시 말해, 육신대로 사는 외적 인간은 내적인 영혼에게 어떤 영향도 미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구원을 위해 인간의 영혼에게 필요한 것은 어떤 외적인 예배와 명상, 기도의 형태가 아니다. 영혼이 자신의 비참을 깨닫고 구원에 이를 수 있는 길은 오직 그리스도의 말씀을 듣는 믿음으로 되어진다(롬10:10).64) 그러므로 신앙은 하나님의 말씀의 대립 가운데서만 신앙이 생긴다. 왜냐하면 하나님과 그리스도도 오직 말씀 안에서 우리에 자신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말씀 속에서 우리는 하나님과 관계한다. 그러므로 신앙의 특성은 말씀(율법과 복음)에서 변증법적 관계에서 그리스도를 소유하는 방식이다. 이 신앙은 어떤 인간학적인 요소도 존재하지 않는다. 신앙은 오히려 영적인 사건이며 영적인 인간에게 일어하는 은총의 개입이다. 그러므로 알트하우스는 “신앙이란, 말씀 안에서 인간에게 전달되는 하나님의 살아있는 이야기를 통하여 내적이며 영적으로 납득시키는 가운데 생기는 것이라는 사실은 신앙에 대한 루터의 가장 독자적이고 중심적인 사상”65)이라고 한다.
이제 신앙에 대하여 보다 면밀한 정의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신앙은 요한복음 1장 12-13절에 기록되어 있는 바와 같이, 우리를 변화시키고 하나님에게서 새로 나게 하며 우리 가운데서 일어나는 하나님의 역사이다. 신앙은 옛 아담을 죽이고, 마음과 영과 갱신과 능력에 있어서 전혀 새 사람이 되게 한다. 그리고 신앙은 이와 함께 성령을 입하시게 한다. 실로 이 신앙은 살아있고 분주하고 활동적이고 힘찬 것이다· 신앙은 끊임없이 선행을 행하지 않을 수 없다. ...신앙은 하나님의 은총에 대한 모험적이고 생생한 확신이다· 어찌나 확고부동한지 신자는 그의 생명을 몇 천 번이고 거기에 걸 것이다... 이리하여 신앙과 행위는 분리시킬 수 없다. 이것은 마치 열과 빛을 불에서 분리시킬 수 없는 것과 꼭 같다.66)
신앙은 그리스도가 인간과 더불어 그리고 그 속에서 현재하시는 방식이다.67)
신앙은 그리스도께서 그 신앙 안에서 인간에게서 현재하신다는 사실을 통하여서만 하나님 앞에서 그 무엇이다.68)
신앙은 죽음과 죄와 율법에 대하여 그리스도를 우리 안에서 역사하게끔 한다.69)
기독교 신앙이란... 그 어떤 마음의 신뢰요 내가 그리스도를 동화하는 바 그 동의의 확고함이다.70)
신앙의 본성은 보이지 아니하는 기쁨과 도움과 보호를 규정하는 바 그 말씀에 의존하는 의지이다.71)
신앙이 마음으로 받아들이는 그리스도는 그 자신의 의에 의하여 하나님 앞에서 인간의 “낯선”의 일 뿐만 아니라 그는 동시에 신앙인 속에서 역사하는 능력, 인간의 마음을 그 자신의 삶과 본질을 끌어 들이려는 하나님 자신의 능력이다.72)
믿음은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 안에서 그리스도의 고난과 죽음이 당신과 관계되며, 당신에게 속해야 한다는 것에 대한 가슴 깊은 확신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아들이 우리를 위해 죽임을 당하셨다는 것, 죄가 제거되고 죽음이 파괴된다는 것, 이러한 악들이 완전히 사라졌다는 것, 이것을 넘어서서 영 생과 구원과 영광, 즉 하나님 자신이 우리와의 관계를 회복하셨다는 것, 그리고 아들을 통해 하나님이 우리를 그분의 자녀로 삼으셨다는 것을 확신하도록 우리의 전 마음을 붙잡는다.73)
이상과 같은 정의들은 신앙이 나를 근본적으로 변화시키시는 중생과 관련되어 있으며, 현재의 우리 안에 그리스도를 소유하는 방식임을 알 수 있다. 신앙을 통하여 우리는 갈라디아서 2:20절 바울의 고백처럼 현재적으로 그리스도를 소유한다. 그러므로 신앙은 반드시 그리스도와 연합을 필요로 한다.74) 루터는 그리스도와 신비적 연합은 믿음의 관계를 갈리디아서 강해에서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그러나 믿음은 정확하게 가르쳐져야 한다. 즉 믿음에 의해, 당신은, 당신과 그리스도가 마치 한 사람인 것처럼, 그리스도에게 접합된다. 그리고 그것은 분리될 수없으며 영원히 그분께 붙어있는 채로 남아있다. 그리고 나는 선포한다. 나는 그리스도와 같다. 그리고 그리스도 역시 선포하신다. 나는 나에게 붙어있는 그 죄인과 같다. 나는 그에게 붙어있다. 왜냐하면 믿음에 의해 우리는 한 몸과 한 뼈로 함께 연결되기 때문이다.75)
이처럼 루터에게 신앙이란 우선적으로 인식이고, 다음으로 사랑과 신뢰로 표현되어야 하는 인간의 인격적 부산물이 아니라, 인간에게 하나님의 은혜를 인식케 하고 그분을 사랑하고 신뢰케 하는 복음 안에 나타난 ‘하나님의 의’의 산물로서, 신앙안에서 그리스도께서 우리안에 실존적으로 살아계시고 경험되고 역사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신앙은 ‘assensus’이자 'fiducia'이며, 아니 정확하게 복음이 생명으로 영혼 속에 심겨졌다는 신적 증거이다(고후5장4절).
이러한 신앙의 본성은 죽음과 생명, 죄와 구원, 율법과 복음의 대립적인 구도 속에서 그리스도의 실재성을 체험한다. 실재성과 체험의 관계는 “보는 것”이 아닌 “듣는 것”으로 그리스도의 실재성을 체험한다. 그러므로 말씀을 들음으로 숨어계신 하나님을 체험한다. 그러므로 신앙은 보이지 않는 실재성과 관계하는 것이다.76)
또한 이 대립성을 전제하는 신앙은 “이성에 대항하여 자신의 감촉과 느낌에 대항하여, 경험적인 것만 파악하고 승인하는 바 그 감각들에 반대하여 믿어야 한다.”77) 그러므로 신앙은 보이지 않는 세상을 위해 보이는 세상을 돌파해 나가는 힘이다. 더 나아가 알트하우스는 “신앙은 단지 모순되는 이 세상적인 실재성을 돌파해 나가는 것보다 더 많은 것을 이끌어내야 하며, 여기서 신앙은 하나님 자신의 율법의 말씀을, 율법에 나타난 그의 진노를 돌파해 나가야 한다”고78) 말한다. 그러므로 “신앙인은 불가능한 사실들과 관계하는 한 영웅이다.”79) 따라서 신앙의 체험적인을 표현하기 위하여 루터는 “마음을 만족시키며”, “마음을 결의하고”, 포착하고“,사로잡고”라는 표현을 쓰며, 마음은 말씀이 얼마나 올바른지를 “알고”, “감촉하고”, 맛보는” 것이라 표현한다.80) 이러한 말씀과 신앙의 체험의 관계를 알트하우스는 다음과 같이 표현한다.
신앙이란 말씀을 확신하는 것, 그러나 그 때문에 또한 그것 자체를 신앙으로서 확신하지 않는 것을 말한다. 그렇지만 다시금 신앙은 또한 체험한다: 나는 하나님의 말씀이 나에 대해 능력이 있고, 우리가 들었던 것처럼, 그것이 나를 “결의하고 포착”하며 나를 사로잡고 나를 놓지 않는다는 것을 체험한다.81)
이제 루터는 말씀에 “결의되고 포착된” 신앙의 사람을 특성을 밝힌다. 그는 로마서 주석에 믿음의 사람, 새사람을 다음과 같이 말한다.
새사람, 믿음의 사람, 영적인 사랑은 전 생애를 통해서 마음에 근심하며 행동으로 절규하며 온 몸과 마음을 다하여 괴롭게 부르짖고 죽을 때까지 간구하며 애걸하며 잠시도 중단하지 않고 의에 이르기까지는 어떤 행위도 만족할 수 없다는 생각으로 자신을 초월한 대망과 지금은 죄 가운데 산다는 생각으로 지내는 사람들이다... 율법은 영적이며 마음의 의지에 호소하는 것인데 이 의지는 위에서 여러 번 설명한 대로 우리 자신의 내적인 소망을 이루기에는 불가능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들은 율법의 행위는 행하고 있지만 율법의 정신은 무시하고 있다. 그러므로 신앙의 사람은 전 생애를 통해서 의를 간구하며 사는 사람이다.82)
이 신앙의 능력의 유익은 먼저 “자기가 필요한 것을 모두 가지며 자기를 의롭게 하기 위하여 어떠한 행위도 필요로 하지 않으며”83) 두 번째 “신앙은 하나님께 속한 것을 하나님에게 드림으로써 진리와 의를 이룬다. 그러므로 오히려 우리의 의를 칭찬하신다.” “신앙의 세 번째 유익은 신부가 그의 신랑과 하나 되게 하는 것과 같이 영혼과 그리스도를 하나 되게 한다는 것이다”84)으로 표현된다.
신앙을 통하여 그리스도와 하나 되는 것은 우리의 죄와 죽음과 저주가 그리스도의 것이 될 것이고 은혜와 생명과 구원은 영혼의 것이 된다.”85) 여기에서 간과할 수 없는 또 하나의 신앙의 특성이 제기된다. 신앙은 영적인 문제와 밀접하게 결부되어 있다는 것이다. 이는 신앙이 영적인 존재와 관계된 문제이며, 이는 반드시 사람이 영적인 존재가 될 때 신앙과 신앙의 유익을 이해할 수 있다는 의미이다.
마지막으로 우리는 루터의 진술을 통하여 다음과 같이 신앙을 정리할 수 있을 것이다.
믿는 영혼은 그의 신앙을 담보로 하여 그의 신랑인 그리스도 안에서 자유하게 되고 모든 죄에서 해방을 받고 죽음과 지옥에 대해서 안전하게 되며 또한 그의 신랑인 그리스도의 영원한 의와 생명과 구원을 수여받는다.86)
더 나아가 루터는 신앙은 그들의 죄가 그리스도에게 지워지고 그리스도에 의하여 삼키운 바 되었다고 말한다. 이것은 보다 깊은 의미를 함축한다. 다시 말해, 우리의 죄를 짊어지고 죽으신 그리스도는 이중적인 죽음을 당하시고 이중적인 부활을 이루신 분이시다.87) 이것은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연합함으로 그리스도가 당하신 죽음을 우리의 소유로 하며 우리도 마찬가지로 죽음을 당한 것이다. 신앙은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소유한다. 신앙을 소유하는 일은 그리스도를 소유하는 것이며 그리스도를 소유하는 일은 “죽음과 지옥에 대항하여 자신 있게 자신의 죄를 곁에 놓으면 그의 모든 것은 나의 것이고 나의 모든 것은 그의 것”88)이라고 고백하는 신앙이다.
이것을 우리는 죽음이 죽음을 이기고, 죄가 죄를 이긴 그리스도를 소유하는 칭의의 신앙이라 부른다. 루터는 놀라운 지혜를 갈라디아 주석에서 보다 감동적으로 서술한다.
“바울에서 율법이 율법이 대항하여 내세워지고 죄가 죄에 대항하여, 죽음이 죽음에 대항하여, 사로잡음이 사로잡음에 대항하여, 음부가 음부가 대항하여, 제단이 제단에 대항하여, 어린양이 어린양에 대항하여, 유월절이 유월절에 대항하여 내세워질 때 그것은 감미로운 말이며 위로로 가득 차 있다... 그래서 사망이 사망을 죽인다. 그러나 이 죽이는 사람은 다름 아닌 바로 생명이다. 그러나 그것은 사망에 대한 영의 결렬한 의분으로써 사망의 사람으로 불린다. 따라서 의는 죄라는 이름을 지닌다. 왜냐하면 그것은 죄를 정죄하고 이 정죄하는 죄는 참된 의이기 때문이다.89)
이 신앙은 그리스도를 품는 것이며, 칭의의 신앙으로 죄인을 의롭게 만드신다. 그리고 이 의롭다 하심을 통하여 우리는 사망이 사망을 죽이는 것, 죄가 죄를 죽이는 역설의 진리 속에서 경험하고 영원이 구원을 받는다.
4.2. 칭의와 전가 그리고 simul justus et peccator
루터에 있어 칭의의 교리는 “기독교 교리의 총체요 하나님의 거룩한 교회를 밝혀주는 태양이며”, “이 조항이 서면 교회도 서게 될 것이요. 만약 이 조항이 넘어지면 교회도 넘어지는”90) 가장 중심적인 교리이다. 이러한 루터의 “칭의론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루터 앞에 놓인 임박한 심판이라는 사실을 주목해야 한다.”91)
루터는 칭의(justificatio)와 의롭게 하다(justificare)를 구분하는데 “칭의”가 의롭게 하는 선언적 행위라면 “의롭게 되다”는 실제적인 의로운 행위이다.92) 칭의(justificatio)는 종말론적 실재성으로 의이며, 의롭게 하다(justificare)는 우리의 성화와 관련하여 계속적으로 의롭게 되는 것이다. 알트하우는 이 개념을 로마서2:13절의 주석에 근거하여 심판적 의미로 “인간이 그의 율법 성취를 토대로 하나님에 의하여 의롭다 선언하거나”, “하나님이 율법을 성취하지 못한 죄인을 그럼에도 불구하고 의롭다고 선언하시는 두 가능성이 생긴다”고 말한다.93)
이 믿음의 의를 루터는 “수동적인 의”(justitia passiva) 혹은 “낯선 의”(justitia aliena)라고 부른다. 이 수동적 의라는 의미를 루터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이 의와 관련해서 우리가 하는 것이라고 아무 것도 없으며; 우리는 하나님께 아무 것도 드리지 않고, 단지 우리는 우리 안에서 역사하는 하나님을 받아들이며 경험한다. 그러므로 내게는 이 믿음의 의 또는 그리스도의 의를 수동적 의라고 부르는 것이 좋을 듯 싶다.94)
우리는 이러한 수동적 의를 이해할 때 간과하지 말아야 할 것은 신앙을 통하여 “죄사함과 의의 전가를 받는다는 것, 그리고 그가 한 새로운 존재를, 곤 존재적 의를 근거 짓는다는 것”95)을 잊지 말아야 한다. 다시 말해, 칭의는 죄사함의 놀라운 은혜이며, 또한 우리에게 새로운 존재를 구성하는 존재적 의라는 것이다. 이 양자의 전체가 완전한 의미의 “칭의”이다. 또한 이 칭의는 새로운 존재적 의를 구성한다는 점에서 현재적이며 의롭다 하시는 심판적 의미에서 종말론적인 관계를 가진다. 그런 점에서 루터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우리는 즉 인간이 의롭게 되나 의로운 것이 아니라, 의에 이르는 운동이나 과정에 있다고 생각한다(WA 39Ⅰ,83,16). 우리의 칭의는 아직 완성된 것이 아니며, 움직임 속에 잇고 또 되는 것이다. 그것은 아직 건설 중에 있다. 오히려 그것은 결국 죽은 자의 부활 가운데서 완성될 것이다(WA 252,8).96)
그리고 이제 칭의 곧, “그리스도의 의는 마음의 믿음과 하나님의 전가로 이루어지며”97) 견고하게 함께 결합되어 우리의 구원을 이루어 간다. 그러나 여전히 믿음은 “불안전하고 구성적이기 때문에 하나님께 충분한 것을 드리지 못한다.”98) 그러므로 믿음은 하나님의 전가 없이는 완전해지지 않는다.
믿음은 연약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전가가 꼭 결합되어야 한다. 즉 하나님은 나머지 죄를 우리의 책임으로 돌리지 않으실 것이고 그 죄를 벌하거나 그 죄로 인하여 우리를 정죄하지 않으실 것이다. 오히려 그 죄가 아무것도 아닌 양 그 죄를 덮어주시고 거저 그 죄를 사하실 것이다.99)
이러한 전가의 이유를 루터는 다음과 같이 논술한다.
즉 그리스도를 확실하게 믿는바 하나님의 선물인 마음속에서의 믿음, 내가 믿기 시작한 그리스도 덕분으로 하나님이 이 불완전한 믿음을 완전한 의로 여기시는 것. 그리스도에 대한 이러한 믿음으로 인하여 하나님은 나를 향하신 하나님의 선의에 대한 나의 의심, 나의 불신, 영의 침체, 여전히 내 속에 있는 다른 죄들을 보지 않으신다. 내가 육 가운데 살아가는 동안 죄는 진정 내 속에 있다. 그러나 나는 병아리가 암탉의 날개 아래 있듯이 그리스도의 날개의 그늘 아래 덮여서 아무 두려움 없이 내 위에 펼쳐져 있는 죄사함이라는 저 풍요롭고 커다란 하늘 아래에 거하기 때문에 하나님은 내 속에 있는 나머지 죄를 덮어주시고 용서해주신다. 즉 내가 그리스도에게 둔 그 믿음으로 인하여 하나님은 나의 불완전한 의를 완전한 의로 받으시고 실제로 죄임에도 불구하고 나의 죄를 죄로 여기지 아니하신다.100)
루터는 우리가 비록 믿음을 소유하였다 할지라도 여전히 죄인이라는 사실을 지적한다. 그러나 괘변가들은 의롭게 된 사람이 어떻게 죄인일 수 있느냐고 반문한다. 루터는 이러한 반문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대답한다.
죄의 본질은 남아 있어도 하나님의 전가는 모든 천사나 온 세계보다도 더 크다...참으로 우리가 하나님께 감사하는 것은 그의 전가가 우리의 더러운 죄악보다 더 크시기 때문이다. 죄의 본질은 제거되지 않지만 제거된 것으로 전가되고, 비록 그 본성에 있어서나 본질에 있어서나 여전히 남아 있지만 죄를 가리우는 그리스도 때문에 덮어두시는 하나님의 선하심으로 죄는 사하여질 것이다... 전가는 아무 긍정적인 결과가 없는 것이 아니라 온 세계와 모든 천사들보다도 더 큰 것이다.101)
첫째로 그는 전가함으로 깨끗하게 하고 다음에는 성령을 통하여 본질까지 정결케 하신다. 믿음은 죄를 사람으로 정결케 하며, 성령은 결과적으로 정결케 한다. 이것이 하늘로서 내려 보낸 믿음과 성령으로 된 하나님의 정결이요 정화다. 이것이 철학자들이 이해하지 못하는 영적인 신학이다.102)
하나님의 전가는 순수한 칭의보다 더 크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칭의는 사람의 본성에 남아 있는 죄를 마치 그것이 없어졌기 때문에 전가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로 인하여 의가 존재함을 보여주기 때문에 가장 큰 것이다.103)
이러한 루터의 칭의의 전가의 개념은 분명한 모든 죄를 실제적으로 용서해 주시고 덮어 주시는 법정적 개념을 가지고 있다. 뿐만 아니라 실질적인 죄인으로서 거룩한 삶을 살도록 하시는 성화와 전혀 모순 되지 않는다. 따라서 루터의 법정적 칭의는 형식적 의미의 칭의가 아닌 모든 죄보다 크시고 이 죄를 덮으시고도 남을 만큼의 하나님의 은혜이다. 그래서 루터는 “죄는 믿음으로 사함 받으나 우리에게 달라붙어 있을 뿐인 것은 새 생활이 기적적으로 시작됐기 때문이라고 말하는 것은 농담이나 환상이 아니라고 말한다.”104)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은 의로운 동시에 죄인이며(simul justus et peccator), 거룩한 동시에 속되며 하나님의 원수인 동시에 하나님의 자녀이다.”105) 그리고 전가로 말미암아 “그대 안에 남아 있는 죄는 그대의 책임으로 돌려지지 않고 그대가 믿는 완벽하게 의로우신 그리스도로 인하여 용서를 받는다. 그분의 의는 그대의 의이며 그대의 죄는 그분의 죄가 된다.”106) 이 전가의 결과 우리는 하나님의 심판과 영원한 죽음에 처해져야 마땅함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에서 벗어나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살고 있다는 것을 믿는다. 이것이 믿음은 행위 없이 우리를 의롭게 여기신다는 이유이다.107)
마지막으로 루터는 칭의와 전가를 통하여 새로운 사람이 된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을 “의인인 동시에 죄인”(simul justus etpeccator)으로 규정한다.108) 이 말은 칭의와 전가를 전제하며, 그리스도 안에서는 의인이지만 그리스도를 벗어나 나 자신 안에서 나는 죄인으로 나타나는 것을 의미한다.
어떤 사람들은 루터의 말의 의미를 오해하여 죠지 티모시는 초기 루터는 부분적으로 의인이며, 부분적으로 죄인이라는 뜻으로 사용했으나 후기에는 전적으로 의인인 동시에 전적으로 죄인이라는 뜻으로 사용하였다고 주장한다.109) 그러나 이러한 주장은 루터의 올바른 이해가 아니다. 루터는 처음부터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한 의인이며 그리스도 밖에서는 죄인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의인이면서 죄인”이라는 인간의 실존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이것은 바울의 로마서 7장의 고백처럼 인간의 삶에서 “인간자신의 내부에서의 의인과 죄인의 긴장에 찬 투쟁적인 공존을 의미한다.”110) 이 투쟁적인 실상을 루터는 다음과 같이 생생하게 전한다.
“그러므로 나는 절망하지 않는다. 나는 율법에 대항하는 율법, 죄에 대항하는 죄, 사망에 대항하는 사망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내가 죄로 인한 양심의 뉘우침과 가책을 느낄 때, 나는 십자가에 매달린 놋 뱀이신 그리스도를 바라본다. 거기서 나는 나를 고소하고 삼키는 나의 죄에 대항하는 또 다른 죄를 발견한다.”111)
“이제 이 죄를 정죄함은 정죄받는 죄보다도 더 강하다. 왜냐하면 그것은 의롭게 하는 은혜, 의, 생명, 구원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내가 죽음의 공포를 느낄 때 나는 이렇게 말한다: 오 죽음이여 그대는 나와 아무 상관이 없다. 왜냐하면 나는 나의 죽음인 그대를 죽이는 또 다른 죽음을 가지고 있고 죽이는 죽음은 죽는 죽음보다 더 강하기 때문이다.”112)
지금까지의 칭의에 대해 이해를 정리하면, 칭의는 죄로부터 무죄선언이며, 동시에 새사람으로의 갱신이다. 이 둘은 불리분리의 관계로 연결되어 있으며,113) 전적으로 수동적인 의이며, 이 그리스도의 의는 오직 신앙과 하나님의 전가를 통하여 우리에게 의로 옷 입히신다. 끝으로 루터의 칭의 개념은 단지 법정적 개념에 머무르는 것도 아니고, 현재적 칭의로 끝나는 것도 아니다. 칭의는 법정적이며 성령의 내주로 우리를 실제로 의롭게 하시는 행위이며, 현재적 칭의이며 심판적 의미에서 종말론적인 행위이다. 이를 루터는 1536년 “칭의론”(De Iustificatione)에서 루터는 “우리는 인간이 아직은 의로운 것이 아니요, 칭의로 가는 도상에 있다고 생각한다”(WA 39 1,83,16f). “최후의 심판이 되기까지 인간은 이 생에서는 끝없는 죄 가운 데 있으며, 그 날이 되면 결국 우리는 완전히 의롭게 될 것이다”(WA 39 1,98,9-11)114)라고 말한다.
4.3. 칭의와 행위(성화)
일부 어떤 사람들은 루터는 “이신칭의”의 신앙을 강조함으로 “성화”는 약하다고 말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은 루터에 대한 피상적인 이해이다. 루터는 처음부터 “이신칭의”와 함께 “성화의 신앙”을 강조하고 있다는 것이 최근의 루터 연구에서 밝혀지고 있다. 우리는 이러한 루터의 “칭의와 성화”에 대한 이해를 몇 가지 신학적 관점으로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첫째, “두 종류의 의”의 관점으로 칭의와 성화의 긴밀한 관계성을 설명할 수 있다. 성화와 행위의 관계는 다른 말로 “외래적인 의”(iustitia aliena)와 우리 자신의 고유한 의의 관계이다. 다시 말해, 우리의 행위는 “외래적인 의”의 산물로 그 열매이자 결과이다.115) 이 결과를 루터는 다음과 같이 진술한다.
그러므로 이 의는 자신을 미워하고 이웃을 사랑하며 자신의 유익을 구하지 않고 다른 사람의 유익을 구합니다. 그리고 이러한 것이 그 의의 전체 생활 방식입니다. 그 의는 자신을 미워하고 자신의 것을 구하지 않기 때문에 육을 십자가에 못박습니다. 그 의는 다른 사람의 유익을 구하기 때문에 사랑을 행합니다. 그래서 그 의는 모든 영역에서 하나님의 뜻을 행하여 자기에 대해서는 근신하며 이웃에 대해서는 의로우며 하나님에 대해서는 경건하게 삽니다.116)
우리가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가르칠 때 우리는 선행도 가르친다. 그대가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붙잡고 그분으로 인하여 의롭게 되었기 때문에 그대는 이제 선행을 하기 시작한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며... 그대의 직무를 다하라 이러한 것들은 참다운 선행으로 우리 마음속에 알고 있는 이 믿음과 기쁨으로부터 흘러나오는 것이다. 우리는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값없이 죄사함을 받았기 때문이다.117)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율법에 대하여 죽고 죄로부터 벗어나 의롭게 되며 죽음과 마귀와 음부로 건져질 때 나는 선행을 하게 되고 하나님을 사랑하게 되면 하나님께 감사를 올리게 되며 이웃을 향하여 사랑의 행위를 행하게 된다. 그러나 이러한 사랑의 행위 또는 행위들은 나의 믿음으로부터 나오는 것이지 나의 믿음을 형성하거나 장식하는 것이 아니다.118)
그리스도는 두 종류의 의를 말씀하시는데, 첫째는 무엇보다도 우리가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죄가 사하여졌음을 알아야 한다. 이를 내적 의라고 한다. 다음으로 죄를 사람 받은 후에는 사랑이 따라야 한다. 이 사랑이 모든 사람에게 우리가 죄를 사함 받았고 하나님으로부터 의롭다고 선포되었음을 보여준다. 이것을 외적 의라고 한다.119)
“영적인 칭의는 본성상 이중적이다. 칭의가 하나님과 사람일 때는 칭의는 동인에서부터 비롯된다. 다른 하나는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되어지는 형체적이요 외적인 칭의이다.”120) 이러한 두 종류의 칭의는 루터가 칭의와 성화가 구분은 되지만 결코 분리되어 이해될 수 없다는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두 번째 칭의와 성화의 관계를 보다 잘 이해하기 위해서 우리는 루터의 죄론에 대한 보다 깊은 분명한 이해를 요구한다.121) 즉 하나님의 칭의의 전가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죄는 여전히 남는다. 루터는 이를 다름과 같이 표현한다.
“우리가 하나님께 감사하는 것은 그의 전가가 우리의 더러운 죄악보다 더 크시기 때문이다. 죄의 본질은 제거되지 않지만 제거된 것으로 전가되고 비록 그 본성에 있어서나 본질에 있어서는 여전히 남아 있지만 죄를 가리우는 그리스도 때문에 덮어두시는 하나님의 선하심으로 죄를 사하여질 것이다.122)
이것은 우리의 본성이 전인적 존재로서 이중적 본성을 지닌다는 것을 의미한다. 다시 말해, 칭의의 전가로서는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의로운 존재이다, 그러나 우리는 육적 존재로서 우리의 본성은 여전히 죄인이다.
인간 안에는 육과 영이 전체 한 인격을 만든다. 그래서 그도 그 자신 안에 모순 된 부분을 알게 되며 영과 육의 모순 된 이중성격을 지난 인간임을 알게 된다. 이러한 속성 때문에 한 인간이 영적이면서 동시에 육적이고, 의인이면서 동시에 죄인이고, 선하면서 동시에 악한 대립된 성격이 서로 상통 한다고 할 수 있다. 동일한 그리스도의 한 인격에서 죽음과 동시에 삶을, 고통과 동시에 은혜를, 활동적인 것과 동시에 정적인 것이 서로 상통하는 것을 알 수 있다.123)
이러한 “의인이면서 동시에 죄인”으로서 인간의 이중적 본성은 우리에게 날마다 성화와 선행의 삶을 촉구하게 하신다. 그래서 “죄가 사람 받은 후에는 사랑이 따라야 한다. 이 사랑이 모든 사람에게 우리가 죄를 사함 받았고 하나님으로부터 의롭다고 선포되었음을 보여준다.”124) 이 칭의와 성화의 불가분리의 관계를 가지고 있다는 것은 루터의 “의” 개념이 완전성과 불완전성의 가지고 있다는 것을 올바르게 인식할 때 보다 분명하게 알 수 있다.125)
세 번째, 루터는 칭의 안에 있는 성화를 “교제”의 차원으로 묘사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리스도와 신자와의 교제는 단순히 서로 관계를 맺고, 사랑을 나누는 차원만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우리 안에서 지속적으로 죄와 싸우신다는 것이며, 이것은 그리스도의 형상으로 완전히 변화될 때까지 계속해서 진행된다. 이러한 이해는 최근의 핀란드 학파의 루터 연구에서 비롯되었다. 그들은 로마서5장 15절의 “호의”(favor)는 칭의와 관계되며, “은사”(donum)는 성화와 관계한다고 본다.126)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호의(favor)와 은사(donum)라는 개념은, 루터의 모든 신학에 침투해 있다. “호의”는 하나님의 용서와 그의 진노의 제거를 의미한다. 또한 그리스도는 은사(gift)로서,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를 통해서 그 안에서 인간에게 실제적인 자기 주심을 행하신다. 그는 의, 명철, 축복, 생명, 권능, 평화 등의 그의 속성들과 함께 그 안에 임재 하신다. 이와 같이, “은사”로서의 그리스도의 개념은 신자는 신성에 참여자가 됨을 의미한다.127)
그러므로 그리스도와 모든 성도와 우리 사이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교제는 실로 깊고 완벽한 것이다. 우리의 죄가 그리스도를 공격하며 괴롭히지만, 그리스도의 의는 오히려 우리를 보호한다. 왜냐하면, 마지막 날에 이를 때에 그리스도는 우리 안에 잔존하고 있는 모든 죄를 하나도 남김없이 깨뜨리실 것이며, 우리에게 그리스도의 형상을 입혀 주실 때까지 이와 같은 연합은 모든 일을 서로 공유하여 감당해 나가게 되기 때문이다.128)
루터는 칭의에는 은총과 은사가 함께 포함되는 것으로 이해한다. 이것은 그의 시편 주석(1536년)에도 분명히 나타난다.
이것들은 칭의의 두 부분이다. 첫째는 그리스도를 통해 계시되는 은총이다. 즉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가 은혜로운 하나님을 가져는 것이다. 그래서 죄가 더 이상 우리를 고발할 수 없다. 우리의 양심은 하나님의 자비에 대한 신뢰를 통해 평화를 발견하였다. 두 번째 부분은 성령과 함께 성령의 은사들을 수여하는 것이다. 성령의 영과 육의 부정을 거슬려 우리를 조명한다(고후7:1).129)
이러한 그리스도의 이중적 사역에 있어서 은혜(favor)와 은사 (donum)의 사역은 이것은 로마서와 갈라디아서 주석에서 루터에 의해 다루어진 내용이다.130)
이것은 먼저 “내적 의”의 근거이신 은혜(favor)의 그리스도를 통해서 죄인들을 향한 하나님의 진노에 대항하는 하나님의 자비와 호의를 보게 되고, “외적 의”의 근거이신 은사(donum)를 통해서 죄인 속에서 죄의 부패함과 싸우시고, 실제적인 갱신과 성화를 일으키시는 그리스도를 보게 된다. 결국 그리스도의 두 본성 즉 인성과 신성, 그리고 은혜와 은사로서의 그리스도는 칭의와 성화의 주체로서의 그리스도를 보게 된다.131)
마지막으로 루터는 이러한 칭의와 성화의 근거로서 믿음의 중요성을 제기한다.132) 믿음은 죄사함의 칭의의 근거이며, 또한 동시에 중생과 회개함의 성화의 근거이기도 하다. 성화와 믿음과 관련하여 루터는 “믿음만이 사죄의 시초이고 행위는 구원을 얻어 한다”는 에그라누스(Egranus)와 에라스무스(Erasmus, 1466-1536)와 같은 주장에 대하여 “믿음으로 우리가 의롭게 되고 믿음으로 우리는 죄를 사함 받고 복종하게 된다”133)는 것을 분명하게 한다. 또한 믿음과 행위와 관련하여 또 다른 거짓 주장은 우리의 칭의로 말미암는 “사죄는 세례와 함께 시작하여 우리가 죽음에서 일어나서 영원한 생명으로 들어가기까지 우리와 함께 남아 있다”134)는 것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다. 이것은 믿음으로 말미암는 칭의와 성화간의 관계를 밝히는 중요한 문제이다. 외적인 행위와 선행은 내적인 구원하는 믿음을 보여주는 필연성이다.
행위가 구원에 필연적이기는 하나 그것들로 인해서 구원을 얻을 수는 없다. 왜냐하면 믿음만이 생명을 가져다주기 때문이다. 위선자들 때문에 우리는 선한 행위가 구원에 필연적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렇다고 해서 행위가 구원한다는 것은 우리가 필연성을 내적인 구원이나 의, 외적인 구원이나 의가 있어야 하는 것으로 이해하지 않는 한 성립되지 않는 말이다... 내적으로 사람을 구원하는 믿음이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증거이다.135)
이상으로 우리는 루터에게 있어 칭의와 성화의 관계는 “두 종류의 의”, “의인이면서 동시에 죄인”인 인간의 두 가지 본성, 은혜와 은사를 통한 그리스도와의 “교제”의 관점에서 칭의와 성화를 구분하지만 분리하지 않는 루터의 독특한 신학적 입장을 볼 수 있었다. 성화는 구원에 근거에 있어 분명히 칭의와 구분을 필요로 하지만, 신앙의 관점에서 칭의의 결과이자 열매로서 성화는 결코 칭의와 분리될 수 없다. 오히려 성화는 칭의에 대한 열매로서 칭의의 나무를 보여주는 것이다.
결론
루터의 율법과 복음에 대한 이해는 그의 신학의 전 체계를 구성하는 인식의 틀이다. 뿐만 아니라 율법과 복음에 대한 대립적인 성격으로부터 우리의 신앙은 이해된다. 그리스도를 우리의 것으로 소유하는 신앙이야말로 철저한 율법적 인식을 전제한다. 율법적 인식이란 우리의 ‘철저한 부패와 타락 죄의 본성을 깨닫는다’라는 말과 같다. 율법으로부터 절망과 율법으로부터 공포가 선행되지 않는 신앙과 복음의 이해란 없다. 또한 루터는 복음 안에서 그리스도를 품는 신앙과 그로 말미암는 칭의와 전가의 축복을 누릴 수 있다. 율법과 복음 대립적이며, 결코 나누어 이해될 수 없고 분리되어 개별적 하나님의 말씀으로 이해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율법과 복음은 대립적이며 관계적 성격을 지닌다.
마지막으로 루터의 율법과 복음을 통해서 그리고 신앙과 칭의, 전가를 통해서 말하고자 하는 의도는 무엇일까? “인간을 철두철미하게 영적인 시각에서 인간을 보아야 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보아야한다”는 생각이다. 타락 이전 하나님 안에서 인류에게 율법은 창조주와 피조물의 아름다운 법이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의 법이 인간의 범죄로 은혜의 법은 도리어 커다란 인간에게 저주가 되어 버린 것이다. 인간의 범죄는 영이 아닌 철저히 육이 되어버린 것이다. 그러므로 오늘날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육을 영으로 회복하는 영의 신앙, 영적인 의로움, 영적인 전가를 통한 새로운 형상의 회복이다.
구원이란 이 영의 회복이자 죄의 저주로부터 죄를 멸하고 하나님의 올바른 영적 교제와 관계의 차원으로, 처음에 누렸던 은혜의 상태로 돌이킴을 받는 것이다.
그러므로 루터는 “거기에는 율법도 죄도 양심을 쏘는 것도 죽음도 없고 완벽한 기쁨, 의, 은혜, 평안, 생명, 구원, 영광만이 있는 새로운 세상에서의 새 사람인 하늘에 속한 아담의 형상을 지니도록 하자”라고 말한다.1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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