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이 시켜서 사도가 된 것도 아니요, 사람이 맡겨서 사도가 된 것도 아니요,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리고 그분을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살리신 하나님 아버지께서 임명하심으로써 사도가 된 나 바울이, 나와 함께 있는 모든 믿음의 식구와 더불어(갈라디아서 1장1-2절)
바울은 복음의 순수한 교리와 믿음의 의를 갈라디아 사람들에게 심어주었다. 그러나 그가 떠나자마자 거짓 교사들이 달려들었다. 그들은 바울이 매우 잘 심고 가르친 모든 것을 뒤엎었다. 마귀는 강한 힘과 기교를 가지고 이 교리를 격렬하게 공격하지 않고는 견디지 못하기 때문이다. 작은 불씨 하나라도 남은 것이 눈에 보이는 한, 결코 쉼을 얻지 못하는 것이 마귀이다. 우리 역시 복음을 순수하게 설교하는 일 때문에 세상, 마귀, 그리고 그의 사자들에게서 오는 온갖 종류의 악을 좌우편에서 참아내야만 한다.
왜냐하면 복음은 지혜, 의(義), 그리고 세상의 종교보다 매우 장대한 무엇을 가르치는 교리이기 때문이다. 복음은 그런 것들을 그들에게 합당한 차원에 두고서, 하나님의 선한 피조물이라는 이유로 좋게 여긴다. 그러나 세상은 창조자보다 이 피조물들을 더 좋아한다. 마침내 이것들을 통하여 세상은 죄를 제거하려 하고 사망에서 구원받으려 하고 영생을 얻어내려 한다. 복음은 이런 행위를 정죄한다. 그러나 세상은 그가 좋아하는 것이 정죄 받게 될 때 감당하지 못한다. 그러므로 세상은 일반 복지, 왕국, 제국, 종교들을 파괴하는 선동적이며 잘못된 교리를 가지고 복음을 공격한다. 복음이 하나님과 가이사에게 죄를 범하고 있다고 비난하고, 율법을 폐한다고 비난하고, 도덕을 뒤엎고 사람들이 제 좋을 대로 부정한 것과 관계하도록 허락하고 면허를 준다고 비난한다. 그러므로 세상은 소위 의로운 열정과 하나님을 높이 받들어 섬기는 체 하면서(요한복음 16장2절) 이 교리를 박해하고, 땅에 있는 최악의 역병처럼 복음의 교사들과 추종자들을 박해한다.
이 교리를 선포함으로 마침내 마귀는 전복되고 그의 왕국은 붕괴된다. 그의 손으로부터 율법, 죄, 사망이 떨어져 나간다. 이 강하고 정복할 수 없는 폭군들을 통하여 마귀는 전 인류를 정복하여 왔다. 다시 말하면 마귀에 포로 되었던 사람들이 어두움의 왕국으로부터 빛과 자유의 왕국으로 옮겨진다는 것이다.(골로새서 1장13절). 마귀가 이것을 참아 낼 것인가? 거짓의 아버지는(요한복음 8장44절) 구원과 영생에 관한 이 교리를 애매하게 하고 부패하게 하고 뿌리채 뽑아버리려고 그의 모든 계략과 위력을 사용할 것이라 예상되지 않는가? 사실 이 서신과 그의 모든 다른 서신에서, 사탄은 그의 제자들을 통하여 이 사업에 관한 그의 기술을 보여 주고 있다고 바울은 비난하고 있다.
우리 시대에 와서 복음을 항상 박해하여 왔고 힘을 가지고 계속 지금도 박해하고 있는 폭군들, 왕들, 군주들, 그리고 감독들 외에 사탄은 그의 종인 광신적 심령들로써 더욱 우리의 복음을 손상시키고 있음을 우리는 한탄하고 슬퍼한다. 우리가 이 비텐베르크에서 정신을 차리지 않았더라면, 그리고 정성 들여 이 믿음의 교리를 심고 가르치지 않았더라면, 우리는 이만큼 오랫동안 의견을 같이 하여 오지 못했을 것이다. 오래 전에 이미 분파가 우리 중에 발생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 교리를 계속 유지하며 강조하기를 결코 그치지 않았기 때문에 가장 온전한 의견의 통일과 화평 속에 우리 자신을 보존하고 있는 것이다. 아무튼 이것을 무시하거나 보다 숭고하다고 스스로 상상하는 것을 가르치려는 또 다른 사람들은 여러 가지 사악한 잘못에 빠지거나 끝없이는 분파주의에 빠진다. 그리고 그 때문에 그들은 패망한다. 여기서 간단히, 마귀와 세상이 왜 생명의 말씀이요 영생의 말씀인데도 복음에 대해 그리도 심술궂은지를 보여주는 것이 좋을 것 같다.
나는 이 서신 첫 머리에서 사도 바울이 기독교적 의를 토론하게 된 연유를 지적하였다. 즉 그가 떠난 직후에 갈라디아 사람들 가운데 거짓 교사들이 와서 바울이 그렇게 애써 세워놓은 것을 파괴한 사실이다. 유대교와 바리새인을 따라가는 이 거짓 사도들은 대단한 명성과 권위를 지닌 자들이다. 사람들 중에서도 이들은 거룩하고 선택받은 유대인들에게 속한 자들로 자랑했으며, 아브라함의 자손이라고 자랑했으며, 마지막에는 자신들이 그리스도의 종들이며 사도들의 문하생으로서 사도들을 개인적으로 아는 자들이며 사도들이 행한 기적들을 목격한 자들이라고 자랑하였다. 그들은 아마도 스스로 표적이나 기적을 행한 자들일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께서 선포하시기를(마태복음7장22절) 악한 자도 기적을 행한다고 하셨기 때문이다.
그들은 다음과 같이 말함으로 갈라디아 사람들을 파괴한다 “대체 바울이 누구냐? 결국 그리스도에게 회개한 마지막 사람이 아니었느냐? 그러나 우리는 사도의 생도들이며 그들을 직접 아는 사람들이다.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이적을 베푸시는 것을 보았으며, 우리는 그가 설교하시는 것을 본 사람들이다. 그는 사도들을 알지도 못하는 자요 그리스도를 보지도 못한 자이다. 그 밖에 우리는 수가 많고 하나이다.”
거짓 교사들의 자만에 대항하여 바울은 담대하게 그리고 강한 확신으로 그의 사도적 권위를 대결시킨다. 자신의 소명을 찬양하면서 그의 사역을 방어한다. 사도들에게도 양보하지 않는다. 그들의 바리새인 사랑과 교만을 대항하기 위해 그는 안디옥에서 있었던 일을 인용한다. 거기서 그는 사도들의 제 일인자였던 베드로에게 저항하였다. 베드로는 그리스도를 본 자요 직접 아는 자였다“나는 사도이다. 다른 자들이 어떠하든 상관치 않는다. 참으로 나는 다른 중진의 자리에 있는 사도 꾸짖기를 조금도 덜하지 아니 하였다.”
갈라디아서 1-2장에서 그는 자신의 소명, 그의 성직, 그의 복음을 제시하는 일외에는 아무 것도 하지 않는다. 그의 사도직이 사람들에게서 난 것이 아니라고, 즉 사람들에게서 받지 아니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에서 받은 것이라고 확증한다. 혹은 하늘로부터 온 천사라도 그가 저들에게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으리라고 말한다.
이 교리가 목적하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의 모든 종들은 자신의 소명에 확신을 가져야 한다는 것이다.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그는 부름을 받고 보냄을 받은 자로서 복음을 설교하는 자신에게 담대히 영예를 돌려야 했다. 그러므로 복음을 설교하는 자는 그의 소명이 하나님에게서 왔음을 확신케 하라. 그로 하여금 바울의 예를 따르게 하고 그의 소명을 높이게 하여 사람들 중에서 신임과 권위를 얻게 하는 것은 온전히 합당한 일이다. 같은 모양으로, 왕의 사자(使者)들은 자신의 직무와 소명을 높인다. 이같이 자랑하는 일은 헛된 일이 아니라 필요한 일인 것이다. 자신을 자랑하는 것이 아니라 그를 보낸 왕과 그의 권위에서 명예를 찾고 높임을 받기 때문이다. 왕의 사자는 자기 아래 있는 자들에게 왕의 이름으로 무엇이든 행하기를 원할 때“우리가 요청 한다”고 말하지 아니하고 “우리가 명한다. 이것을 행하기를 우리가 원 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개인으로서는 “우리가 요청 한다”고 말 한다.
바울은 자신의 소명을 높이려고 할 때 이와 같이 말한다.“내가 이방인의 사도인만큼 나는 내 직분을 영광스럽게 여기노라” 말하자면 “사람들이 나를 다소의 바울로서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 혹은 대사로 받아 주기를 원한다.” 그는 그의 권위를 유지하기 위해 그렇게 말해야만 하는데 왜냐하면 그들이 바울의 말을 듣기보다 바울 안에 있는 그리스도 자신과 그를 보내신 아버지 하나님을 듣고 있기 때문이다.
바울은 맨 처음부터 거짓 교사들을 거론한다. 그들은 사도의 제자들이며 그들에 의해 보냄을 받았다고 주장하였다. 그리고 그들은 바울을, 사도의 제자도 아니며 복음을 설교하기 위하여 그들에 의해 보냄을 받지도 않았고 다른 길로 들어와 스스로 자의에 따라 성직에 들어온 자라고 멸시하였다. 이에 대항하여 바울은 자기의 소망을 방어하며 말한다. “너희 설교자들은 나의 소명을 얕본다. 그러나 너희에게 온 자는 누구이든 그는 사람들이나 사람으로부터 보냄을 받은 자이다. 즉, 그는 소명도 받지 않고 자기 마음대로 온 자이거나 다른 누구의 소명을 받은 자들이다. 그러나 나의 소명은 사람에게서 난 것도 아니며 사람으로 말미암은 것도 아니다. 그것은 사도 이후에 올 수 있는 어떤 소명보다 우월한 것이니,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님 아버지로 말미암은 것이기’ 때문이다.”
바울이 “사람들에게서”라고 말할 때 이것은 나는, 하나님도 사람도 부르거나 보내지 아니하였는데 자기 마음대로 달리고 말하는 자들로 이해한다. 오늘날 분파주의자들이 이런 행동을 한다. 그들은 길모퉁이에 숨어서 그들의 독설을 퍼부을 장소를 물색하며 공적인 교회에는 나오지 않거나 복음이 이미 뿌려진 곳에 간다. 이것이 나는 “사람들에게서” 가 의미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바울이 “사람을 통하여” 라고 말할 때 그것은 하나님의 소명을 받았으나 사람을 통하여 온 자를 말하는 것이라고 나는 이해한다.
하나님은 두 가지 방법으로 소명하신다. 방편을 통하기도 하고 통하지 않기도 하신다. 오늘날 하나님은 간접적인 소명에 의하여 우리 모두를 말씀의 성직에도 부르신다. 방편, 즉 인간을 통하여 온 소명이다. 그러나 사도들은 그리스도 자신에 의하여 직접 소명을 받았다. 마치 구약에서 하나님 자신이 예언자들을 소명하셨던 것과 같다. 그 다음에는 사도들이 그들의 제자들을 불렀다. 바울이 디모데와 디도를 부른 것처럼 말이다. 이 사람들은 디도서 1:5이하에서와 같이 감독들이라고 불리웠다. 그리고 감독들은 우리시대에 이르기까지 그들의 계승자들을 불렀다. 세상 끝날까지 이렇게 계속될 것이다. 이것은 인간에 의하여 되는 것이기 때문에 간접적인 소명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것은 신적인 부름이다.
그러므로 누가 군주나 행정관이나 나에 의하여 부름을 받으면 그것은 인간을 통하여 소명을 받는 것이다. 사도 시대로부터 이것이 세상에 있어온 일반적인 소명의 방법이다. 이 방법을 바꿀 것이 아니라 그 품위를 높일 일이다. 이것을 무시하고 다른 소명을 주장하는 분파주의자들 때문에 그러하다. 그들은 성령이, 가르칠 것을 그들에게 강권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그들은 거짓말하는 자들이요 사기꾼들이나 선한 영이 아니라 악한 영에 이끌려 다니기 때문이다. 내가 설교자로서 지정받은 처소를 버리고 부름을 받지 아니한 다른 도시에 가서 설교하는 것은 정당하지 않다. (물론 나는 신학 박사로서 시키기만 하면 교황청 전체 영역에서 설교할 수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거짓교리들이 사람들을 가르치고 영혼들이 속임을 당하고 정죄를 당해도 나는 설교할 권리가 없다. 나의 건전한 교리로 오류와 정죄로부터 구할 수 있는데도 말이다. 하나님에게 맡길 수밖에 없다. 하나님은 그 자신의 때에 합법적인 성직자들을 소명할 기회를 발견하실 것이며 말씀을 주실 기회를 찾아내실 것이다. 하나님은 그의 추수 때에 일꾼들을 보내실 추수의 주님이시기 때문이다. 우리의 임무는 기도하는 일이다(마태복음 9장38절)
바울이 “사람들에게서 난 것도 아니요 사람으로 말미암은 것도 아니요” 라고 말할 때 그는 거짓 사도들을 거꾸러뜨리고 있었다. 마치 이렇게 말하는 것과 같았다. “이 독사들이 아무리 자랑해도 상관없다 그들은 사람으로부터 즉 어떤 소명도 없이 스스로 왔거나 ‘사람을 통하여’ 즉 어떤 다른 사람에 의하여 보냄을 받았다는 자랑 이상 무엇을 하겠는가? 나는 이에 대해 마음을 쓰지 않는다. 여러분들도 마음을 쓰지 말아야 한다. 그러나 나로 말하자면 사람으로부터 소명을 받은 것도 아니며, 사람을 통하여 부름을 받은 것도 아니며, 직접 예수 그리스도 자신에 의하여 부름을 받았다. 모든 면에서 나의 소명은 사도들의 것과 같다. 나는 참으로 한 사도이다.” 그러므로 바울은 사도들의 소명교리를 철저하게 다룬다.
다른 데에서는 사도와 기타 성직을, 고린도전서 12:28 이하와 에베소서 4:11에서와 같이 구별한다. 즉, “하나님이 교회 중에 몇을 세우셨으니 첫째는 사도요 둘째는 선지자요, 등등.” 그는 사도를 첫 자리에 놓는다. 그리하여 어떤 다른 사람을 방편으로서 동원하지 않고 하나님 자신에 의해 직접 보냄을 받은 자들을 바로 ‘사도’로 부르게 한 것이다. 그러므로 맛디아는 오직 하나님에 의하여 부름을 받았다. 사도들이 두 사람을 선택하였을 때, 그들은 감히 둘 중 하나를 결정하려 하지 않고, 투표를 하였다. 그리고 누구를 선호하시는지 하나님이 지적하시도록 하였다.(사도행전 1장23-26절). 사도가 되는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에 의하여 부름을 받을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이리하여 바울은 이방인의 사도로 부름을 받았다(로마서 11장13절). 이 때문에 사도들을 성자들이라 불렀다. 그들은 자신들의 소명과 교리에 확신을 가지고 있었으며, 그들의 성직에 충실히 머물러 있었다. 그러므로 그중 아무도 유다를 제외하고 배반자가 되지 않았다. 그들의 소명은 거룩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이것은 보낸 자가 없는데 달리기를 한 거짓 사도들을 향하여 바울이 행한 처음 공격이었다. 그러므로 소명은 경시할 것이 아니다. 사람이 말씀과 순수한 교리를 가지고 있다하여 충분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는 자신의 소명에 대한 확신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그리고 누구든지 이 확신 없이 들어가는 자는, 죽이고 파괴하기 위하여 들어가는 것이다(요한복음 10장10절). 하나님은 부름을 받지 않은 자의 사업을 결코 번창하게 하시지 않기 때문이다. 그들이 선하고 유용한 것을 가르친다 할지라도 덕을 세우는 것이 되지 않는다. 그러므로 우리 시대 분파주의자들이 그 입에는 믿음의 말들을 가지고 있으나 아무 열매도 생산하지 못한다. 그들의 주요 목표는 사람들을 그들의 거짓된 의견에 매혹시키는 일이다. 구원의 임무에 머물러 있으려면, 확실하고 거룩한 소명을 받은 자들에게 흔히 임하는 수많은 심한 갈등을 견뎌내야 한다. 가르침이 순수하고 건전한 사람들은 그만큼 마귀들의 집요하고 끝없는 계략과 세상의 공격을 견뎌내야 한다. 이런 싸움에서 불확실한 소명을 받고 부패한 교리를 받은 자가 무엇을 할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말씀의 종 된 우리들은 다음과 같은 위로를 받아 가지고 있으니, 곧 우리는 하늘에서 온 거룩한 소명을 가지고 있다. 이 직무에 합법적으로 부름을 받고 있다. 우리는 모든 지옥문을 이겨내고 있다. 그러나 한편 양심이 다음과 같이 말할 때에는 두려워할 일이다: “너는 소명 없이 이 일을 행하였다!” 소명이 없는 사람은 자신이 들어본 일도 없는 말씀을 설교하고자 하는 데서 오는 공포에 마음이 흔들린다. 결국 그의 불순종은 자신의 모든 사역을 훼손한다. 그 사역들이 아무리 선하다 할지라도 말이다.
-마르틴 루터-"갈라디아서 강해"(루터신학대학교 출판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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