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아버지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내려 주시는 은혜와 평강이 여러분에게 있기를 빕니다.  (갈라디아서 1장3절)

 

나는 여러분이 “은혜” 와 “평강” 이 무엇을 뜻하는지 알기를 바란다. 이 낱말들은 바울에게 자주 나타나며 이해하기도 쉽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는 지금 이 서신을 해설하기 위하여, 다른 때 다른 곳에서 우리가 가르치고, 설교하고, 노래하고, 기록한 것을 여기서 반복할지라도 진부하게 여기지 말아야 한다. 그 이유는 그것이 필요하거나 서신이 매우 어렵기 때문이 아니라 장차 있을 이단들에 대항하여 우리 양심의 확신을 얻기 위해서 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만일 우리가 의인의 교리를 잃어버리면 곧 모든 것을 잃어버리기 때문이다. 그러나 가장 필요하고 중요한 것은 모세가 그의 율법에 관해 말한 것처럼(신명기 6장7절), 우리가 이 교리를 날마다 가르치고 반복하는 일이다. 우리는 이것을 충분히 납득하거나 붙들 수도 없고, 지나치게 납득하거나 붙들 수도 없기 때문이다. 사실 강력하게 권하고 깨우친다 해도 이것을 완전히 납득할 사람도 없고 심령을 다하여 믿는 사람도 없다. 그만큼 우리의 육은 약하고 성령에 불복종 한다!

 

사도의 인사는 세상 사람들에게는 새로운 것이다. 그리고 복음의 선포 이전에는 결코 들어본 일이 없던 것이다. 은혜와 평강- 이 두 마디가 그리스도교 전체를 포함하고 있다. 은혜는 죄를 용서한다. 그리고 평강은 양심을 잔잔케 한다. 우리를 괴롭히는 두 마귀는 죄와 양심, 율법의 능력과 죄의 쏘는 것이다(고전 15:56). 그러나 그리스도는 이 두 괴물을 정복 하셨다. 그리고 그들을 발아래 밟으셨다. 이 세대에도 오는 세대에도 그렇게 하신다. 세상은 이것을 모른다. 그러므로 죄, 양심, 그리고 사망을 어떻게 이길 수 있는지 확실히 가르치지 못한다. 오직 그리스도인만이 이런 종류의 가르침을 가지고 있으며 그것으로 준비되어 있으며 무장되어 있다. 그리하여 죄, 절망, 그리고 영원한 죽음을 극복할 수 있다. 이것은 오직 하나님이 주신 가르침이다. 이것은 자유 의지에서 나오지도 않았으며, 인간의 이성이나 지혜가 발명한 것도 아니다.

 

이 두 마디, “은혜” 와 “평강” 은 그리스도교의 모든 것을 요약하여 가지고 있다. 은혜는 죄 사함, 기쁜 화평, 그리고 잔잔한 양심을 내용으로 하고 있다. 그러나 평강은 죄가 먼저 사하여지기 전에는 불가능하다. 율법이 죄를 고발하며 양심을 꾸짖고 위협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양심이 느끼는 죄는 순례나 철야기도나 노동이나 서약이나 또는 다른 어떤 공로로 없어질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사실 죄는 공로에 의하여 증진된다. 죄로부터 벗어나 보려고 일을 하고 땀을 흘리면 흘릴수록 더욱 심한 곤경에 빠진다. 왜냐하면 은혜 외에는 죄를 없이 할 방법이 없기 때문이다. 이 말은 주의 깊게 살펴 볼만하다. 말은 쉬우나 막상 시험을 받을 때에는, 하늘이나 땅에 있는 어떤 방편을 전적으로 떠나 은혜만으로 하나님과 함께 죄 사함과 평강을 우리가 가질 수 있다고 우리 마음을 확실히 설득하기는 가장 어려운 일이기 때문이다.

 

세상은 이 교리를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에 이를 묵인할 수도 없고 하지도 않을 것이다. 세상은 우리의 자유의지, 우리의 힘, 우리의 공로를 자랑한다. 세상은 이런 모든 것들을 은혜와 평화, 즉 죄 사함과 기쁨에 찬 양심을 사고 얻는 방편으로 자랑한다. 그러나 양심은 이 은혜, 즉 그리스도 안에 약속된 죄 사함을 통한 평강이 아니고서는 평온할 수도 없고 기뻐할 수도 없다. 평화와 양심의 평정을 찾기 위하여 많은 사람들이 여러 가지 종교적 규범들과 훈련법을 발명하여 열심히 일하여 보았다. 그러나 그들은 오히려 더 엄청난 참혹 속에 깊이 빠졌다. 그런 책략은 의심과 좌절을 증폭시키는 방법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여러분과 나의 몸과 영혼은 은혜의 말씀을 듣고 거기에 굳게 그리고 충실히 매달리기까지 쉼을 얻지 못할 것이다. 그런 책략은 의심과 좌절을 증폭시키는 방법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여러분과 나의 몸과 영혼은 은혜의 말씀을 듣고 거기에 굳게 그리고 충실히 매달리기까지 쉼을 얻지 못할 것이다.

 

사도는 이 은혜와 평강을 다른 종류의 은혜와 평강으로부터 분명히 구별한다. 그는 갈라디아 사람들에게 은혜와 평강이 아니다. 저들은 언제나 순진한 성도들을 핍박하고 주님과 그리스도에 항거하여 일어서기 때문이다.(시편 2편1절). 그리고 세상으로부터 오는 은혜와 평강도 아니다.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란을 당한다”(요한복음 16장33절) 고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사도는 우리 아버지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은혜와 평강을 소원하고 있다. 다시 말하면 그는 하늘의 평화를 소원하고 있다. 그래서 그리스도는 말씀하셨다.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 같지 아니하니라” (요한복음 14편27절).

 

세상의 평화는 우리의 소유와 몸에 관한 평화 외에 아무 것도 주지 못한다. 그리하여 우리가 육신으로 행복하고 평화롭게 살 수 있도록 한다. 그리고 세상의 평화는 소유를 즐기게 하고 그것을 빼앗지 않는다. 그러나 우리가 고난을 당하고, 세상을 떠날 때, 세상의 은혜와 평화는 우리를 도울 수도 없고 우리를 고난, 좌절, 그리고 중음에서 구하여 내지도 못한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와 평강이 있으면 사람이 매우 강해져서 십자가와 평화, 기쁨과 슬픔을 감당할 수 있게 한다. 사람은 그리스도의 죽음에서 오는 승리로 격려를 받는다. 죄 사함의 보증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양심 안에서 이 승리의 확신이 죄와 사망을 넘어 우세하기 시작한다. 한 번 이 죄 사함을 받으면 그의 양심은 기쁨을 얻고 위로를 받는다. 그러므로 사람이 하나님의 은혜로 위로를 받고 격려를 받으면, 즉 죄 사함과 양심의 평화로 위로를 받고 격려를 받으면, 죽음 자체를 포함한 모든 고난을 인내하고 극복한다. 하나님의 이 평화는 믿는 자에게만 주어지며 세상 사람들에게는 주어지지 않는다. 세상은 그것을 갈망하지도 않으며 이해하지도 못하기 떄문이다. 이것이 우리에게 오는 유일한 길은 하나님의 은혜뿐이다.

 

그러나 왜 사도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좇아”를 더하는가? “아버지 하나님으로 좇아”라고 말하는 것으로 충분치 않았던가? 왜 그는 예수 그리스도를 아버지와 연결시키는가? 여러분은 우리에게서 자주 그것은 성경에 나오는 규범이요 원리라고 들었다. 그리고 인간의 몸, 특히 인간정신이 감당하기는 너무 과한 것이어서 하나님의 존엄에 관하여 사색하기를 그만두게 하기 위하여 면밀히 관찰해야 하는 것으로 들어왔다. “나를 보고 살 자가 없음이니라” (출애굽기 33장20절) 고 성경은 말한다.

 

교황, 터키인들(이슬람인들), 유대인들, 그리고 모든 분파주의자들은 이 규범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는다. 그들은 중보자 그리스도를 안중에서 없이하여 버린다. 하나님에게만 말한다. 그분에게만 기도한다. 그리고 그분과 관계해서만 행동한다. 예를 들면, 수도사는 이렇게 상상한다. “내가 하고 있는 일은 하나님을 기쁘게 한다. 하나님은 나의 서약을 보실 것이다. 그리고 그것들 때문에 하나님은 나에게 구원을 주실 것이다.” 터키(이슬람) 사람들은 이렇게 말한다. ‘만일 내가 이렇게 살고 이렇게 목욕을 하면 하나님이 나를 받아 주시고 영생을 주실 것이다“ 유대인들은 스스로 이렇게 생각한다. ”만일 내가 모세의 율법을 순종하면 내가 은혜로우신 하나님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나는 구원을 받을 것이다.“  이리하여 우리 시대의 광신자들은 성령, 환상, 그리고 내가 알 수 없는 괴이한 것들은 자랑한다. 그들 자신도 이해하지 못하는 기적들 주변을 맴돈다. 이 들은 새 십자가와 새 공로들을 싫어한다. 그리고는 이런 일들을 수행함으로써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것이라고 상상한다.

 

요컨대, 의인의 교리를 알지 못하는 사람은 누구나 화해자이신 그리스도를 치워버린다. 그러나 내가 자주 여러분에게 경고하는 대로 참된 그리스도교 신학은, 모세의 가르침이나 다른 가르침에서와 같이 위엄 가운데 계신 하나님을 우리에게 제시하지 않고 우리의 중보자요 대 제사장으로 동정녀에게서 나신 그리스도를 제시한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율법, 죄, 사망에 대항해 싸울 때 , 헤아릴 수 없는 능력, 지혜, 그리고 위엄 속에 계신 하나님을 탐색하기 위하여 그가 어떻게 세상을 창조하시고 섭리하시는지 물어보려고 우리의 가벼운 사색을 가지고 하늘 안으로 잘못 들어가는 일보다 더 위험한 일은 없다. 만일 여러분이 하나님을 이런 식으로 이해하기를 시도하거나 중보자 그리스도를 떠나 여러분의 공로, 금식, 수도사의 두건, 그리고 삭발을 하나님과 여러분 사이의 중보로 삼아서 하나님에게 구속되기를 원한다면 여러분은 루시퍼가 행한 것처럼(사도행전 14장12절) 불가피하게 타락할 것이며 무서운 절망 가운데서 하나님과 모든 것을 잃어버릴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본질에 있어서 헤아릴 수도 이해할 수도 없는 무한하신 분이므로 인간 본성에 용납될 수 없는 분이시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만일 여러분이 양심과 구원받는 일에 안전을 원하고 위험에서 벗어나기를 원하면 이 사색하는 심령에 감시자를 두라. 성경이 여러분에게 지시하는 대로 하나님을 붙들라: “하나님의 지혜에 있어서는 이 세상이 자기 지혜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고로 하나님께서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믿는 자들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셨도다. 오직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은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니라“ (고린도전서 1장21, 24절). 그러므로 그리스도가 시작한 데서 시작하라. 동정녀의 몸, 마구간, 그리고 그 모친의 품에서 시작하라. 이를 위하여 땅에 내려오시고 탄생하시고 우리 가운데 사시고 고난 받으시고 십자가에 달리시고 죽으셨다. 그리하여 가능한 모든 방법으로 우리 눈앞에 자신을 나타내려 하셨다. 그는 우리 마음이 눈을 자신에게 고정시키기를 원하셨다. 그리고 우리가 신의 존엄에 관해 하늘에 기어오르거나 사색하지 못하도록 하셨다.

 

그러므로 의인의 교리를 생각할 때마다, 죄인을 의롭게 하시고 받아주시는 하나님을 어떻게 어디서 그리고 어떤 조건에서 발견할 것인지 생각할 때마다 이 인간 예수 그리스도 외에 다른 신은 없다는 것을 알아야만 한다. 그를 굳게 붙들라. 그대의 마음을 다하여 그에게 매달리라. 그리고 하나님의 위엄에 대한 모든 사색을 버려라. 왜냐하면 하나님의 위엄을 탐색하는 자마다 그의 영광에 불타버릴 것이기 때문이다. 나는 경험을 통하여 내가 말하는 것이 무엇인지 안다. 그러나 이 사람 되신 분을 떠나서 하나님과 관계하려는 열광주의자들은 나를 믿지 않은 것이다. 그리스도 자신이 말씀하셨다: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 14:6). 그러므로 길 되신 그리스도 밖에서는 아버지에게로 가는 다른 길을 찾지 못할 것이다. 진리가 아니라 위선과 거짓에서, 생명이 아니라 영원한 사망에서 방황하고 있음을 알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알아 두라. 의인 또는 은혜의 교리 문제를 두고서 우리가 율법, 죄, 사망, 그리고 마귀와 싸워야 할 때에는 이 화육하시고 인간이 되신 하나님 외에 다른 하나님을 바라보지 말아야 한다.

 

그러나 의의 교리를 떠나서, 하나님의 능력과 지혜 등에 관하여 유대인, 터키인 분파주의자, 그리고 이와 같은 사람들과 논쟁을 해야 할 때에는 모든 민첩성과 노력을 다 사용해야 하며 가능한 한 깊이 있고 명민한 논쟁자 같이 되어야 한다. 그때는 다른 영역에 들어와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율법, 죄, 사망, 마귀에 대항하는 양심, 의, 생명(이것이 여기서 내가 주목하기 바라는 것이다), 또는 속죄, 죄 사함, 화해, 그리고 영원한 구원 문제에 이르러서는, 하나님의 존엄에 대해 사색(思索)하고 탐색하는 어리석음을 철저히 깨우쳐야 한다. 그리고 자신을 중보자로 우리에게 주시고 다음과 같이 말씀하시는 분에게만 주의를 돌려야 한다:

 

"수고하며 무거운 짐을 진 사람은 모두 내게로 오너라.  (마태복음 11장 28절) 그러면 하나님의 사랑, 선하심, 그리고 온화하심을 보게 될 것이다. 그의 지혜, 그의 능력, 그리고 우리가 감당할 수 있도록 온화하게 하시고 누그러뜨리신 그의 존엄을 보게 될 것이다. 우리는 바울이 골로새인들에게 말한 모든 것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그리스도 안에는 모든 지혜와 지식의 보화가 감추어져 있습니다” “그리스도 안에 온갖 충만한 신성이 몸이 되어 머물고 계십니다.”(골로새서2장 3, 9절) 세상은 이것을 보지 못한다.

 

세상은 오직 연약함 속에 있는 인간으로서의 그리스도만을 바라보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바울은 참된 그리스도적 종교가 무엇인지를 가르치기 위하여 자주 예수 그리스도를  아버지 하나님과 연결시킨다. 다른 모든 종교들처럼  위에서 시작하지 아니하고 아래에서 시작한다. 야곱의 사다리를 오르라고 우리에게 이른다. 하나님 자신이 거기 기대어 계시고 그 끝자락이 야곱의 머리 곁 땅에 닿아 있다.(창세기 28:12) 그러므로 구원에 관하여 생각하거나 행동할 때는 언제나 존엄에 관한 모든 사색, 공로, 전통, 그리고 철학에 관한 모든 생각, 참으로 하나님의 율법 자체를 멀리하여야 한다. 그리고 말구유와 마리아의 몸으로 직접 가서 이 아기, 동정녀의 아이를 품에 안아야만 하며 그를 바라보아야 한다. 나시고 양육을 받으시고 자라시고 인간 사회에 다니시고 가르치시고 죽으시고 다시 부활하시고 모든 하늘 위에 승천하시고 모든 것 위에 권위를 가지신 분을 바라보아야 한다. 이렇게 해야 해가 구름을 밀쳐 버리듯 모든 공포와 오류를 떨어버릴 수 있다. 이렇게 보아야 여러분으로 하여금 바른 길을 가게 할 것이다. 그리하여 그리스도가 가신 길을 뒤따르게 할 것이다. 그러므로 바울이 하나님 아버지 뿐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오는 은혜와 평강을 기도할 때 이 사실을 먼저 알아두어야 한다.

 

바울이 우리에게 가르치는 것은 그리스도를 참된 하나님으로 믿는 우리 신앙의 입증(立證)이다. 그리스도의 신성에 대해 우리가 죽을 때까지 사탄은 우리 속에 있는 신조의 모든 교리를 쉬지 않고 공격할 것이다. 사탄은 화해할 수 없는 신앙의 원수이다. 세상을 이기는 것이 이것, 곧 믿음임을 그가 알고 있기 때문이다.(요한일서 5장4절) 그러므로 우리가 사탄을 이길 수 있기 위하여 믿음을 끊임없이 유지하고 세우는 일이 우리의 의무이다.

그리스도의 참된 신성은 다음과 같은 결론으로 증명된다. 즉 바울은 성부께서 하시는 바로 그 동일한 일 곧, 은혜, 양심의 변화, 죄 사함, 생명, 그리고 사망과 마귀와 지옥을 이기는 승리를 주시는 능력을 그리스도에게 돌린다. 만일 그리스도가 참 하나님이 아니면 이것은 불합리적 것이 되고 사실상 모독적인 일이 될 것이다. 왜냐하면 평강을 스스로 지니지 못한 이가 그것을 만에게 줄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평강을 주시니, 그러므로 그것을 가지고 계신 것이 분명하다.

 

그리스도는 은혜와 평강을 주신다. 사도들이 복음을 설교함으로써 주듯이 하지 아니하시고 저자와 창조자로 주신다. 아버지는 생명과 은혜, 평강 등을 창조하시고 또 주신다. 아들도 똑같은 것을 창조하시고 또 주신다. 은혜, 평강,영생, 죄사함, 의인(義認), 생명, 그리고 사망과 마귀로부터의 구원을 주시는 일은 어떤 피조물이 아니라 오직 신적인 존재의 사역이다.천사들은 이것들을 창조하지도 못하며 주지도 못한다. 그러므로 이 사역은 만물을 창조하신 주권자의 영광에만 속하는 사역이다. 바울은 이 모든 것을 창조하시고 주시는 능력을 아버지는 물론 아들에게도 돌리고 있으므로 그리스도는 본질에 있어서 참으로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이 필연적으로 뒤따른다.

 

-마르틴 루터-"갈라디아서 강해"(루터신학대학교 출판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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