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터주의와 칼빈주의의 이해
1.루 터 주 의
루터가 시작한 종교개혁운동은 개신교라는 새로운 기독교 분파를 만들어 냈다. 하지만 이 루터의 개혁은 어떤 방향에서 해석하는 가에 따라 몇 가지 서로 다른 분파로 나누어졌다. 개혁적 입장에 섰던 사람들은 카톨릭을 반대하는 입장에 대해서는 서로 의견이 일치했지만 어떤 것이 신학과 신앙에 옳은 것인가에 하는데 서는 서로 다른 의견을 가졌던 것이다.
그래서 루터가 죽은 후 루터파라고 칭해지는 독일의 개혁파 무리들은 몇 개의 갈래로 나누어졌다. 이들을 분류하는 데에는 가장 중요한 원칙을 개신교 신학을 어떻게 정의하는가에 문제였다. 다시 말하면 루터는 자기 신학의 중요한 근거를 '성경을 통해서'와 '이신칭의'라는 면에다 두었다. 그런데 여기서 개신교의 신학을 '성경'에다 절대적 근거를 두는가, 아니면 '이신칭의'라는 루터가 주장한 '교리적 견해'에 두는가, 또는 성경에다 근거를 두되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이는가, 아니면 성경의 주제와 가르침에다 초점을 맞출 것인가에 따라 여러 가지 입장으로 나누어 졌던 것이다. 간단히 말해서 루터가 주장한 내용을 그대로 따를 것인가 아니면 루터의 정신을 이어받을 것인가의 문제였다.
이렇게 해서 나누어질 수 있는 무리들 중 첫 번째가 루터의 친구이자 동지였던 필립 멜랑히톤의 입장을 따르는 무리들이다. 멜랑히톤에 관해서는 루터 자신이 자신은 카톨릭의 거대한 방해물들, 참된 믿음의 방해물들을 치워 버리는 역할을 하는 것이고 멜랑히톤은 땅을 갈고 씨를 뿌리는 것이라고 했던 적이 있었다. 사실 멜링히톤은 매우 온건하고 평화를 사랑하는 인물인데다 능력 있는 학자였기 때문에 이러한 역할을 하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그래서 루터가 죽은 후 멜랑히톤은 자연스럽게 루터 다음 세대의 해석가이자 신학자의 자리를 계승했다. 그리고 멜랑히톤 역시 그 일에 충실해서 '신학강요'를 저술했고, 이 책은 루터파 신학의 조직신학 교과서가 되었다.
하지만 이 책에서 멜랑히톤은 루터의 입장에 충실하기 보다는 자신의 신학적 경향에 충실했다. 그리고 어쩌면 이것은 당연한 것이었다. 루터가 살았을 때에도 멜랑히톤과 루터는 자주 의견 차이를 보였다. 이 책에서 멜랑히톤과 루터가 서로 다른 것은 특히 '이성'과 '행위'를 중요하게 취급한 것이었다. 루터가 에라스무스와 논쟁하면서 내놓은 글 '노예 의지론'에서 루터는 인간의 의지와, 의지에 의한 선생을 아주 경멸적으로 무시했었다. 루터의 입장에서 '의지'와 '행위'를 중시하는 입장은 카톨릭의 면죄부에 저항했던 신학적 경향, 즉 그의 십자가의 신학 이론에 비쳐서도 용납할 수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인문주의자이자 에라스무스와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던 멜랑히톤의 입장에서는 '의지'와 '행위'는 경멸 대상이 될 수가 없었다. 그는 루터의 '이신칭의' 교리는 그대로 받아들이면서도 선행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선행이 구원의 방법은 아니지만 그 열매이자 증거로 중요하다는 입장이었던 것이다.
이런 멜랑히톤의 주장에 대해 루터의 주장이나 내용을 충실하게 따르기를 원했던소위 '엄수파'들이 의혹의 눈초리를 보내고 있을 때 중요한 역사적 사건이 터졌다.
슈말칼덴 전쟁에서 개신교가 패배한 후 신성로마 황제 카알은 카톨릭과 개신교를 서로 타협시키기 위해 공동 신앙고백을 만들어 내도록 압력을 가했던 것이다. 카톨릭편에서 싸운 카알이 개신교를 위한 이러한 정책을 취한 것은 전쟁이 승리로 기울어지면서 황제의 권력이 지나치게 커질 것을 염려한 교황이 여러 면에서 소극적이 되어 갔고, 더구나 황제의 위치에 있는 사람으로서 카알은 정치적 화합과 종교적 평화가 중요한 관심사 였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카톨릭에서는 타협은 생각할 수 없었다.
그들은 종교회의를 통해서 카톨릭 신앙을 천명하고자 했다. 그러나 황제는 자신의 주변에 있던 성직들로 구성된 '교회 위원회'를 구성, 이들은 소위 '아우구스부르그 임시 협정'을 만들게 된다. 이는 본질적으로 카톨릭적이었고 개신교의 입장은 지나치게 무시한 협정안이었다. 그러나 이 안에 대해서 카톨릭은 서명을 거부했다. 개신교 역시 마찬가지였다. 반대가 심각하자 카톨릭과 개신교 양쪽에서 평화를 추구하고 온건한 인물이었던 멜랑히톤과 카톨릭 주교 플루그는 모리츠가 주도해서 만든 라이프치히 임시 협정에 주저하면서 동의했던 것이다. 이것 역시 카톨릭적 분위기가 강했으나 이신칭의를 전면에 내세운, 즉 개신교와 카톨릭의 중요점을 서로 결합시킨 중재안이었다.
이것은 카톨릭에서도 반대를 받았으나 개신교 쪽에서도 심각한 반대에 부딪혔다.
반대에 대해서 멜랑히톤은 다음과 같은 이론으로 설명하고자 했다. 복음에는 중요해서 타협의 여지가 없는 내용과 부수적 요소들로서 특별히 중요하지 않은 또는 구원에 필수적이지 않은 내용이 함께 들어 있는데(그는 이것에다 '아디아포라', 헬라어로 부수적인 것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카톨릭의 주장은 부수적인 것이고, 그래서 현실적으로 복음의 진수와 핵심적인 것을 계속 지켜 내기 위해서 이 부수적인 것들을 타협하는 것은 정당하다는 것이다.
이러한 약간은 타협적이고, 일정 부분 현실적인 멜랑히톤의 입장에서 소위 '엄수파 루터란'들은 강하게 반발하고 나섰다. 반대자의 핵심 인물은 마티아스 플라키우스인데 그는 복음에서 중추적인 것과 부수적인 것이 존재하는 것이 사실이라 할지라도 기본 전제는 명백한 신앙고백을 출발점으로 삼아야 하는데, 카톨릭과의 타협은 기본 신앙의 전제를 의심하게 만든다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부수적인 것이라 할지라도 신앙고백과 관련된 것은 타협하는 것은 신앙을 부정하는 것이 되고 그러므로 멜랑히톤의 타협은 인정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이런 이론으로 보면 결국 아무리 부수적인 것이라 할지라도 이것을 타협한 것은 신앙고백 자체, 즉 본질적으로 신앙에 문제가 있는 것이고 그러므로 멜랑히톤의 타협은 곧 개신교 신앙고백 자체를 부정한 것이 된다.
멜랑히톤에 대한 이러한 비판은 다른 문제까지도 불거지게 했다. 원래 멜랑히톤이가지고 있던 사상인 이성의 중시나 행위의 중시를 문제 삼았던 것이다. 그래서 이엄수파 루터주의자들은 멜랑히톤을 따르는 사람들이 인간의 역할을 지나치게 중시한다고 주장했던 것이다. 이는 위에서 말한 대로 처음부터 루터와는 좀 다른 입장에 있던 멜랑히톤이 원래부터 주장하던 내용, 즉 인간의 의지에 상대적으로 많은 자유를 허용하는 내용으로, 이것에서 멜랑히톤은 마침내 성령, 말씀, 인간의 의지에 협동을 주장하는 데에 이르러 있었다. 이것을 문제삼은 엄수파들은 죄의 결과로서 인간의 본성 자체의 부패를 강조했으며, 또 성찬에 대한 사상에서도 멜랑히톤이 칼빈의 이론과 가까웠으므로 칼빈주의자라고 비판하기도 했다.
이렇게 해서 두 계열, 즉 멜랑히톤과 엄수파 루터란 사이에는 서로 감정의 골이 깊어져 가게 되었다. 결국 엄수파 루터주의자들을 중심으로 1577년 콘코드 신조가 작성되었다. 그 내용은 복음의 필수적인 요소가 못되는 것들이 있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이것으로 인해 박해의 원인이 될 때 이것을 포기하는 것은 신앙고백을 포기하는 것이므로 타협해서는 안된다고 하고 있다. 이는 원래의 엄수파 루터란들의 입장에서 약간 후퇴한 것으로 필립파라고 불렸던 멜랑히톤의 입장을 약간 받아들였던 것이기도 하다. 하지만 성찬의 입장에서는 엄수파 루터란의 입장을 그대로 지지하여 상징설을 취함으로서 칼빈주의와 결별의 전기를 마련했다. 콘코드 신조는 1580년'일치서'라는 책에 그대로 담아져서 루터파들의 기본 입장이 되었다. 이 책에는 '고대 에큐메니칼 신조', '아우구스부르그 신앙고백서', '아우구스부르그 신앙고백 변증서', 또 슈말칼덴 조한, 대소요리문답이 함께 들어 있어 전체를 통합시켜 보고자하는 노력이 나타나고 있다.
이것은 순수 루터파의 주장이나 필립파로 불렸던 멜랑히톤의 입장에서는 수정된 입장이긴 하지만, 그래서 서명을 거부한 사람들도 많았지만 이것은 독일 루터교 다수파를 대표하는 것임이 분명했다. 이 콘코드 신조는 그런데 루터의 사상에 기본적으로 일치하기는 했으나 그 방식과 논쟁 양식에서 루터보다 훨씬 더 '스콜라적' 경향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방식과 방법을 '루터교 고등 정통주의' 또는 '루터교 정통주의'라고 부른다. 그래서 루터교 정통주의는 변증법적 방법을 광범위하게 사용하므로 써 소위 '개신교 스콜라주의'를 만들어 내는 계기가 된다.
개신교 스콜라주의가 취급했던 내용 중 중요한 유산으로 남아 있는 것이 성경 영감의 교리와 엄격한 고백주의 정신이다. 루터는 구체적으로 성경의 영감 문제를 취급한 적은 없었으나 성경이 하나님의 영감으로 된 것이라는 사실은 굳게 믿고 있었다. 그는 기본적으로 성경의 내용이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고 있고 사람들은 그리스도를 이끌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이 분명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개신교 스콜라주의(루터파 정통주의)에서는 성경이 어떠한 의미와 방법으로 영감을 받았는지를 문제삼아서 성경은 그 자체로 하나님의 말씀이고, 또한 성경 기록시에 성경기자 각 개인을 단순히 필사자로 사용하시되 그들의 개인적 특징을 사용하셨으므로 서로 다르긴 하지만 근본적으로 문자적 영감이 되었다고 주장했다.
루터파 신학이 개신교 스콜라주의로 형성되어 가면서 사람들은 신학의 분열을 경험했다. 자신의 교리나 신학적 경향에 따라 서로 무리 지워지는 결과로 이어졌던 것이다. 그러자 일부 신학자, 칼릭스투스로 대표되는 일단의 신학자들은 혼합 절충주의를 통해서 신학을 종합하고 극단적 입장들을 배제하고자 했다. 그러나 이러한 노력 또한 새로운 하나의 분파를 만드는 결과가 되기 십상이었다. 각교단의 정통 신학자들은 자기들의 신학적 입장을 점점 더 견고하게 강화시키고, 자신들의 신학적 입장에 동의하는 사람들만을 진정한 기독교 신자로 인정하는 태도를 보이게 되었다.
이러한 도그마 주의는 마침내 제3의 세력, 그들의 도그마에 대한 동의나 반대 외에 기독교의 진리나 신학과 교리의 가치에 대한 근본적 회의를 갖게 하는 계기도 동시에 마련해 주었다. 이는 어쩌면 카톨릭이라는 거대한 교리적 큰 틀이 무너지고 새로운 판짜기에 직면해서 새로운 신학 이론이나 신앙적 모습을 고민했던 당시의 신학자들에게 겪어야만 했던 과정인지도 모른다.
2. 칼 빈 주 의
일반적으로 칼빈주의로 알려져 있는 신학 체계는 칼빈이 직접 세운 것이 아니다.
즉 칼빈주의를 요약해 주는 칼빈주의 오대강령은 칼빈과는 상관없이 네덜란드의 도르트 총회에서 가결된 내용인 것이다. 물론 이 강령은 칼빈의 사상을 근거로 만들어진 것이다. 하지만 이 도르트 총회에서 이단으로 정죄받은 알미니안주의도 역시 자신들의 교리 체계를 칼빈에 근거해서 만들었고, 그들 스스로도 칼빈주자라고 불렀던 것이다. 하지만 알미니안주의가 이단으로 결정된 뒤 네덜란드 정부는 이들에게 혹독한 탄압정책을 폈고, 많은 목회자들이 강단을 떠나야 했다. 이 과정을 살펴 보기로한다.
알미니안주의를 창시했다고 해야 하는 야곱 알미니우스는 원래 네덜란드의 뛰어난 목회자이자 대학 교수였으며, 특히 칼빈의 후계자인 테오도르 베자에게서 공부한 말 그대로 철저한 칼빈주의자였다. 베자에게서 공부하고 네덜란드에 돌아와서 목회자로, 교수로 활동하고 있는 그에게 어느 날 하나의 과제가 주어졌다. 암스텔담 교회지도자들이 쿠른헤르트라는 사람이 주장한 내용이 신학적으로 옳은지를 판단해 달라는 것이었다. 쿠른헤르트는 칼빈의 주장 가운데서 예정론을 부인했다. 완전히 부정한 것이 인간의 구원이 예정되어 있되, 예정이 타락 후에 주어졌다는 것이다. 알미니우스는 그의 주장을 면밀히 검토했다. 특히 초대 교회교부들의 신학과 비교하고, 중요한 개혁가들의 사상과도 비교했다. 그런데 알미니우스의 결론은 쿠른헤르트의 주장이 옳다는 것이었다.
그러자 알미니우스와 같은 대학교수로 있던 프란시스 고마르스는 타락 이전, 곧 우리가 잘 아는 '만세전에' 예정했다는 예정론을 믿었으므로 두 사람은 대립할 수밖에 없었다. 이들 두사람은 둘다 예정에는 동의했다. 하지만 예정이 어떻게 해서 있게 되었느냐는 데에서 서로 의견을 달리했다. 알미니우스는 하나님의 예정은 하나님께서 인간들 중 누가 하나님을 올바로 믿을 것인지를 '미리' 아는 예지에 근거한다고 주장한 반면, 고마루스는 사람들 중 누가 신앙을 가질 지에 관해서도 하나님께서 예정해 놓으셨다는 즉 세상이 생기기 이전에 이미 하나님께서 주권적으로 누가 신앙을 가질 지를 결정해 놓으셨다고 주장했다.
이런 논쟁은 시간이 지나면서 점점 격렬해져 갔는데, 아르미니우스가 죽은 후에도 역시 계속되었다.
그런데 이것이 정치적 색채를 띠기 시작했다. 원래 신성로마제국 황제의 식민지였던 네덜란드는 장기간 동안 독립운동을 해 왔고 여러 우여곡절 끝에 간신히 독립을 했었다. 독립에는 칼빈주의 신앙이 그들을 묶는 중요한 연대로 작용했는데 그 이유는 정치적으로 탄압했던 신성로마제국의 배경이 스페인과 카톨릭이었기 때문이다.
카톨릭을 반대하는 것은 자연스럽게 개신교 신앙으로 이어졌는데 화란에서는 루터파보다는 칼빈파의 개혁 신학이 우세했다. 그 이유는 칼빈이 네덜란드에 개인적 관심을 가지고 스위스에서 네덜란드인들을 교육시켜 본국으로 보낸 것과(칼빈의 어머니가 화란 사람이었다), 또 화란의 산업 구조가 상공업 중심이었기 때문에 칼빈주의에 호감을 가진 사람이 많았다. 그런데 알미니우스와 고마루스 논쟁에서 사람들은 두갈래로 갈라지게 되었다. 우선 성직자들이나 독립 전쟁에 적극적으로 가담했던 사람들은 급진적 칼빈주의, 즉 고마루스의 입장을 지지했다. 그들은 하나님의 절대적 주권을 받아들이는 데에 익숙했고, 성직자들의 대다수가 이런 의견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독립 후에 네덜란드의 정치 경제적 상황은 방향 설정을 해야 할 시기였다.(1609년에 독립) 한편은 당시 세계 최고의 강대국인 스페인과 교역 관계를 재개하므로서 부를 축적하자는 쪽이었고 다른 하나는 스페인과 단절된 채로 살아야 한다는 주장 쪽이었다. 물론 상공업자들은 무역 재개 쪽이었고, 성직자나 독립 전쟁에 적극적으로 참가했던 사람들은 단절 쪽이었다. 그런데 일반 성직자들과 정치 담당자들이 극단적 칼빈주의, 곧 고마루스의 의견을 주장하고 나서자, 상공인들은 자연스럽게 알미니우스를 지지하게 되었다. 이제 고마루스와 알미니우스의 다툼은 사회 계층간의 불화로 나타나게 되었던 것이다.
알미니우스를 지지했던 상공인들은 알미니우스를 정죄하는 분위기를 반박하기 위해 1610년 '반대 성명'을 내놓고 여기에서 다섯 조항의 기본 입장을 정리했다. 여기서 그들은 우리가 소위 알미니안 주의라고 부르는 내용을 알려주고 있다. 중요한 것은 4번째 조항인데 여기서 '은혜의 작용이 불가항력적인 것은 아니다'라고 정하고 있다. 즉 인간의 노력과 의지가 영향을 미칠 여지를 남겨 놓고 있는 것이다.
이것을 놓고 정부는 결국 1618년 11월 - 1619년 5월까지 도르트 총회를 개최했다.
그리고 이때 유럽의 모든 개혁파들도 초빙하므로서 유럽 전체의 총회가 되도록 했다. 그리고 여기에서 그 유명한 칼빈주의 5대 교리가 정해졌다. 이 다섯 조항은 물론 알미니안을 추종하는 사람들이 내놓은 '반대 성명'을 반박하는 것이었다. 그 내용은 1.무조건적 선택, 2.제한적 구속, 3.전적타락, 4.불가항력적 은혜, 5.성도의 견인이다.
이렇게 해서 칼빈주의 교리가 정해지고 이것이 정통으로 정해졌으나 위에서 본 것처럼 이것은 순전히 신앙과 신학적 의미로만 결정되었다고 보기도 어려울 것이다.
알미니안 논쟁은 신학에서의 해묵은 논쟁인 신앙과 이성의 관계에서 절대적 신앙과 하나님의 주권을 강조하고, 인간의 의지와 노력에는 의미를 두지 않는 것으로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 5대 교리는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과 함께 칼빈주의의 기본 강령으로 오늘날까지 그 위력을 발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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