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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거스틴 - 개괄

by 【고동엽】 2009. 1. 7.
 

 

 

어거스틴

1. 어거스틴의 생애
어거스틴은 사도 바울 이후 가장 위대한 기독교 신자이다. 그는 서방교회의 아버지이다. 그의 사상은 중세 시대를 지배했다. 16세기의 종교개혁과 캐톨릭의 반동종교개혁 둘 다가 어거스틴에 대한 재발견이었다. TONY LANE, 기독교 사상사, 삼판 (서울: 나침반사, 1987), p. 87.

어거스틴의 삼위일체론
아우렐리우스 어거스틴(Aurelius Augustine)은 354년 오늘날 알제리인 타가스테에서 이교도인 부친과 정통 그리스도인인 어머니(모니카) 사이에서 태어났다. 371년 그는 교육을 받기 위해서 카르타고에 보내졌다. 그곳에서 그는 완전히 방탕한 생활을 계속하다가 키케로(Cicero)의 호르텐시우스(Hortensius)를 읽게 된것이 그로 하여금 철학(진리)을 사랑하는 사람으로 만들어 버렸다. 뒷날에 그는 당시의 이러한 마음의 변화를 자신이 기독교를 향하여 내디딘 첫 걸음으로 인정하였다. Bengt H?gglund, 신학사, 4판2쇄 (서울: 성광문화사, 1995), p. 155.

373년부터 382년까지 어거스틴은 진리와 구원과 만족을 찾아서 9년 동안이나 마니교(Manichaesm)에 귀의하였다. 당시 마니교의 대가인 파우스터스(Faustus)를 만나 마니교의 깊은 진리를 듣기도 했다. 그러나 결과는 오히려 정신적 혼란과 회의가 더할 뿐이었다. 마침내 마니교가 취하는 입장이 속임수라는 사실이 점차 확실해지자 그는 9년간에 걸친 그들과의 생활을 청산해 버렸다.


383년에 어거스틴은 바다를 건너 이탈리아로 갔다. 그는 384년 밀란(Milan)에 서 제국의 수사학자로 임명받았고 그곳의 신학자이자 감독이던 암브로즈(Ambrose)의 영향과 신플라톤주의 사상 아래 있게 되었다. 암브로즈로부터는 구약성경의 어려운 부분들이 풍유로서 취급될 수 있다는 사실을, 신플라톤주의자들로 부터는 하나님의 영적 완전성과 내적 명상을 통한 통찰력을 배웠다. 신플라톤주의자 빅토리누스(Victorinus)와 수도사 안토니(Antony)의 개종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세상으로부터의 회심에 대한 도전을 받았다. 라이온사 편, 교회사 핸드북, 재판 (서울: 생명의 말씀사, 1991), p. 198.

386년에 어거스틴은 밀란의 정원에서 극적인 회심을 경험하였다. 로마 카톨릭 교회가 딱 두 번의 회심 기념일-하나는 사도 바울의 회심 기념일(1월 25일)이고 다른 하나는 성 어거스틴의 회심기념일(5월 5일)이다-을 봉축하는 것이 의미가 있을지도 모른다. 그의 삶은 전적으로 새롭고 다른 시각을 갖게 되었다. 그 다음해 부활절에 어거스틴은 밀란의 노바 교회당에서 암브로즈로부터 세례를 받게 된다. Michael Marshall, 어거스틴의 생애, 2판 (서울 나침반사, 1989), pp. 134-151.

388년에 어거스틴은 아프리카로 돌아왔다. 이곳에서 그는 감독이 없는 마을은 조심스럽게 피했다. 왜냐하면 그는 직책을 맡게 될 위험을 깨달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391년에 어거스틴이 히포(Hippo)를 방문하고 있을 동안 그를 알아보고는 강제로 장로로 임명하였다.
396년에 감독이 사망하여 어거스틴은 그를 계승하였다. 그는 430년 사망할 때까지 히포의 감독으로 있었다. TONY LANE, op. cit., p. 90.


2. 대표저서
어거스틴은 많은 저서를 남겼다. 그 가운데 어거스틴의 대표저작 3가지를 살펴보면 첫번째로, 자신의 생의 체험을 담은 고백록(Confessions)으로 400년경에 쓰여졌다. 이 책은 가장 감화력이 큰 자서전 중의 하나로 읽는 자에게 깊은 종교적인 감명을 주는 고전이라 할 수 있다. 김의환, 기독교회사, 1판5쇄 (서울: 성광문화사, 1988), pp. 152-156.
“당신이 창조한 것을 싫어할 때 내 마음이 온전하지 못한 것처럼 당신이 창조한 어떤 것이라도 싫어하는 자들이 있으면 그들의 마음도 온전치 못합니다” 어거스틴 저/선한용 역, 성 어거스틴의 고백록, 5판 (서울: 대한기독교서회, 1993), p. 219.


어거스틴은 고백록 속에서 주님께서 자기를 어떻게 의심과 죄 가운데서 이끌어 내셔서 진리와 은혜 가운데로 인도하셨는지를 기록하고 있다. SIDNEY M. HOUGHTON, 기독교교회사, 3판 (서울: 나침반사, 1990), p. 45.

두번째로, 어거스틴의 필생의 대작으로 413년에 시작하여 426년에 완성한 신의 도성(City of God)이다. 이 책은 당시의 지적 도전에 답하는 하나의 역사철학이다. 김의환, loc. cit.
“이 두 나라는 두 종류의 애정의 차이로 인해 만들어 졌다. 지상나라는 하나님을 경멸하면서 자아를 사랑함으로, 천상의 나라는 자아를 경멸하면서 하나님을 사랑함으로 생겨났다” 어거스틴 저/심이석 역, 신국론 요약, 초판 (서울: 크리스챤 다이제스트사, 1990), p. 79.

끝으로, 삼위일체론(On the Trinity)이다. 그의 이 교리는 서방사상에 결정적 영향을 주었다. 터툴리안, 오리겐, 아다나시우스 등은 성자와 성령이 성부에 종속된다고 가르쳤다. 그러나 어거스틴은 일체성을 매우 강조한 나머지 “인격” 사이에 완전한 동등성이 있음을 가르쳤다. 그는 여러 가지 비유로서 삼위일체를 설명하고자 하였는데 그 실례로서, 기억(memory), 이해(understanding), 의지(will) 등이라든지, 아니면 좀더 잘 알려진 사랑하는 자(lover), 사랑 받는 자(loved), 사랑(love) 등을 들 수 있다. 윌리스턴 워커, 세계기독교회사, 16판 (서울: 대한기독교서회, 1988) p. 129.


3. 어거스틴의 기독교관
어거스틴은 회심 이후에 교회의 권위에 순복하였고, 또한 성경의 가르침을 받아들였다. 회심 이후로 철학적 사색에 대한 어거스틴의 근본적 태도는 변화되었다. 전에는 철학이 이성적 수단인 사색의 활용을 통하여 진리를 찾아낼 수 있는 가능성으로 생각되었다. 하지만 자신이 회심한 후로는 신학과 철학 사이의 관계를 기독교의 신조와 일치되는 선에서 이해하였다.


어거스틴은, 믿음에 기초한 동시에 교회의 가르침에 대한 복종과도 일치되는 논리적 사고는 기독교와 신 플라톤주의를 종합시킨 형태를 취한다고 인식했다. 그의 이런 생각은 신 플라톤주의나 철학의 전반 분야에서 제기된 문제들에 대해서는 기독교만이 정확한 해답을 줄 수 있다는 의미에서 양자가 일정한 관계를 가진다는 것뿐이었다.


어거스틴은 두가닥의 사상을 하나의 종합 형태로 결합시켰다. 그 중의 하나로 그의 사상의 중심을 이루는 것은 구원이 하나님의 사역과, 그의 선행적 은혜와, 그리고 그가 친히 그리스도의 성육신을 통하여 우리에게 내려오심으로써 결과되었다는 것이다. 또 하나의 사상은 ?카리타스-큐피디타스 변증법?적인 특징을 가진 것으로서 모든 인간 속에 감춰져 있는 지고의 선에 대한 열망과 관계된 사상이다.

 

즉, 이 열망으로 인한 노력은 세상을 향한 잘못된 사랑과 인간 자신에 의해서 타락했기 때문에, 반드시 그 방향이 지고의 선을 지향하도록 재 수정시켜 줌으로써, 그리스도인이 소유하는 하나님의 사랑안에서 만족을 얻게 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렇게 해서 어거스틴은 인간의 가장 심오한 질문들에 대하여 답하는 동시에, 기독교 복음의 내용을 요약해 보려는 의도에서, 신 플라톤주의의 기본적 개념(에로스 교리)을 기독교의 구원교리와 결합시켰던 것이다. Bengt H?gglund, op. cit., pp. 159-169.



4. 교회관
어거스틴의 교회개념은 다음과 같은 몇가지 특징을 지니고 있다. 첫째로, 그는 카톨릭 교회의 절대성을 주장하는 것으로 출발점을 삼았다. 이 교회는 가시적 존재이다. 사도들의 신앙과 성례와 성직을 소유하고 있는 이 교회만이 전 세계에 퍼져서 그 신도들을 구원하고 정화시킬 수 있는 조건을 갖추고 있다. 그리스도의 몸인 이 카톨릭 교회의 밖에는 진리도 없고 구원도 없다. 이 교회로부터 떨어져 나가는 것은 신성모독이다.


둘째로, 어거스틴은 외적 조직으로서의 현실적 교회와 성도들의 사귐으로서의 교회를 구별하였다.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고 교회를 위해서 기도하는 자들은 모두 이러한 불가시적 연합에 속하는 것이다. 어거스틴은 외면적으로만 교회에 속해 있는 자들과 진정한 의미로 교회에 속된 자들을 구별하였다.


셋째로, 어거스틴은 예정된 자와 그렇지 않은 자를 구별하였다. 불가시적인 사랑의 연합은 예정된 성도의 단체와 일치되지 않는다. 결국에 가서는 궁극적 구원을 받도록 예정되고 인내의 은사를 받은 전자(前者)만이 참된 교회의 일원으로 남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 중에는 카톨릭 교회에 소속되지 않은 자들도 다소간 있을 것이다. J. L. 니이브 저/서남동 역, 기독교교리사, 16판 (서울:대한기독교서회, 1987), pp. 168-169.



5. 죄와 은총관
1. 죄
어거스틴에게 있어서는 죄란 정신의 죄로서 시작한다. 아담은 스스로 존재하기를 원했다. 그는 모든 것을 자기 자신을 위해 원했고, 또 자기 자신의 힘으로 서기를 원했다. 그래서 그는 신을 외면하고 타락하게 된것이다. 어거스틴은 그래서 “모든 죄의 시작은 자만이다. 그리고 자만의 시작은 사람이 신에게서 돌아서는 것이다”라고 말했다. 모든 인간은 아담의 원죄에 의해 멸망당할 자의 무리에 속해 있다. 어린 유아로서 죽었던 사람이라도 멸망을 받는다. 신의 특별한 은총의 행위만이 인간을 구원할 수가 있다. I. C. 헤넬 편/송기득 역, 폴 틸리히의 그리스도교 사상사, 12판 (서울: 한국신학연구소, 1995), pp. 172-175

2. 은총관
어거스틴의 죄 개념에 대응한 것이 그의 은총개념이다. 어거스틴은 다음과 같이 표현하고 있다. “신이 우리를 선택한 것은 우리가 거룩하게 될지도 모르기 때문이 아니라, 우리를 거룩하게 되게 하기 위해서다. 신이 어떤 인간을 선택하고 어떤 인간을 멸하느냐 하는 그 까닭은 인간에게는 없다. 일하고 있는 분이 단지 신뿐이다. 신이 결단하고, 신이 그것을 수행하는 것이다” 어거스틴은 더나아가서 용서를 그리스도로서의 예수 안에 나타난 최고선에의 현실적인 참여로 본 것이다. 영은 우리들의 그릇된 욕구 대신에 착한 욕구를 불러일으킴으로써 곧 우리 마음 속에 아가페를 퍼지게 함으로써 우리를 돕는다고 그는 말한다. Ibid., pp. 175-178.


6. 어거스틴의 삼위일체 교리
어거스틴이 약 20년(400-419) 동안 심혈을 기울여 저술한 ?삼위일체론?(De Trinitate)은 초대교회가 약 4백년에 걸쳐 논쟁을 거듭한 그리스도론과 성령론을 종합하여 가장 성서적이고 복음적이며 정통적 삼위일체 신앙을 체계화한 불후의 역작이다. 그는 그 이전에 있었던 삼위일체론을 집약했을 뿐 아니라 독자적으로 정립시켰다는 점에서 그 의미가 크다. 삼위일체론을 쓰게 된 동기와 목적에 대하여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삼위일체는 유일하시고 하나이신 참된 하나님이시다. 그리고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이 하나인 동시에 동일한 본체에서 오셨다는 것을 어떻게 바로 말하며, 믿으며, 이해할 수 있을까” 하는 것을 연구하는 학문이다. 이러한 목적으로 그는 먼저 교회가 가르치는 전통적 내용을 종합하여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해서 체계적으로 설명하는 동시에, 삼위일체 하나님과 현 세계와의 관계를 정신과학적(심리학적) 관점에서 고찰한다. 이종성, 삼위일체론, 3판 (서울: 대한기독교출판사, 1993), pp. 263-264.

지금부터 어거스틴의 “De Trinitate”에 대한 고찰을 1부, 2부로 나누어서 살펴보고 그 다음에 특징을 드러내고자 한다.

어거스틴의 위대한 저작 “De Trinitate”은 Book 1-Book 15로 구성되어 있고 다시 2부로 나뉜다. 1부는 1권에서 7권(더 구체적으로 하자면 8권 2장 2절이다)까지이며, 2부는 8권부터 15권(마지막 15권에는 어거스틴 자신의 전체 요약이 담겨져 있다)까지이다. 먼저 1부의 내용을 요약해 보면 아래와 같다.


삼위일체의 통일과 동등은 성경에 나타났다. 보냄을 입은 성자나 성령은 보낸 성부와 동등하고, 삼위일체 자체는 본성에서 불가견하고 불가분리하게 일한다(1권-4권). 성부와 성자의 본질이 다르다는 것, 곧 낳으신 분과 나오신 분은 서로 그 본질이 다르지 않겠느냐는 사람들이 있으나 성경에 본질적으로 언급된 곳이 있기도 하고, 상대적으로 언급된 곳이 잇기도 하기 때문에 서로 구분해야 하고, 하나님과 신과 관련된 본질은 항상 불변하다(5권).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지혜요 능력이다”(고전 1:24)고 해서 아들이 성부를 지혜롭게 하거나 능력 있게 한다는 뜻이 아니고, 아버지 자신도 자신의 지혜와 능력이 있다. 그러나 그것들은 세 지혜와 능력이 아니고 하나의 하나님과 본질인 것 같이 하나의 능력, 지혜이다. 참된 본질에 있어서 아들보다 성부가 크지 않고 둘이 합해도 성령보다 크지 않고 셋이 합해도 하나보다 크지 않다(6권-7권). 박홍무, 아우구스티누스의 삼위일체론, (석사 학위 논문, 한신대학 신학대학원, 1984), pp. 32-33.

이것으로 그의 전반부 교리 진술이 끝난다. 여기에서 성서에 나타난 삼위일체 사상을 검토하고 이 교리를 논증하려는 것보다 성서에서 기정 사실로 되어 있으며 정통교회가 이 교리를 전승하여 온 것임을 확인한다.
이제 전반부에 한해서 구체적으로 고찰해 보고자 한다.

1. 삼위의 동일본질
삼위는 나누어질 수 없는 동등한 한 본질을 소유하고 있다. 성 아우구스티누스 저/김종흡 역, 성 아우구스티누스 삼위일체론, 2판 (서울: 크리스챤 다이제스트사, 1994), p. 35.
이 본질 자체는 한 하나님으로서 불멸, 불가견적이라, Ibid., p. 103.
항상 계시는 자는 불멸의 분질을 소유하므로 이것을 “우시아”라고 부를 수 있다. Ibid., p. 171.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지혜요 능력이며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성부와 성자는 모든 일에 있어서 그 본질이 동일하므로 동등할 수밖에 없다. Ibid., p. 193.


그는 성자의 완전한 “나심”과 곧 신성의 중간이 없는 발생(generatio)을 말하면서 낳으신 성부와 나신 성자의 완전한 동등을 강조하므로 유출설과 다르다. Ibid., p. 136.
성령도 성부와 성자에게서 보냄을 입었으므로 이에 못지 않다. Ibid., p. 168.
더욱이 어거스틴은 삼위가 다 가견적 피조물을 통해서 특별한 계시 곧 신현(theophanie)의 가능성 및 그 사실을 지적함으로써 서로 동등임을 주장한다. 이것이 획기적인 사상이다. 이로써 그는 plotinus의 유출설, 노스틱주의의 이원론, 아리우스주의의 종속설 등을 극복했다고 볼 수 있다.

2. 삼위의 구별
“사벨리안”의 양태론은 삼위의 구별을 무시했으나 어거스틴은 이에 대항하여 아버지는 아들이 아니며, 아들은 아버지가 아니고, 성령은 성부와 성자가 아니다. 이들은 확실히 셋이다. Ibid., p. 180.
본질은 같으나 관계는 다르다. “성부는 성자를 갖지 않고는 아버지가 아니고, 아들은 성부를 갖지 않고는 아들이 아니다” Ibid., p. 173.
삼위는 신성 안에서 신성이 일으키고 있는 낳음, 태어남 및 발현함(혹은 부여됨) 이라는 요인들과 똑같이 실질적이고 영원한 관계이다. 그러니까 성부와 성자와 성령은 각개 품격이 무엇이든지 간에 각기 한 분이나 혹은 나머지 두분에 대해 관계되어 있다는 뜻에서 관계들이다. Ibid., Book 5-7.


3. 삼위에 대한 성서적 논거
성부에 대해서 어거스틴은 신명기 6장 4절을 인용하면서 아들이나 성령이 제외되지 않는 한, 역시 성부가 유일한 하나님이라고 한다. 성 아우구스티누스 저/김종흡 역, op. cit., p. 85.
어거스틴은 부란 말은 삼위일체 안에 있어서 신이 본질적으로 존재하는 양식에 적용된 관계개념이라고 한다. 즉 신은 본래부터 부와 자와 영이라는 3者가 상호간에 가지는 불가분리의 관계 안에서 존립하는 것임을 지적한 것이다. 이종성, 신학과 신학자들, (서울: 양서각, 1983), p. 28.
성부만 불가견이 아니고 삼위가 다 불멸이며 불가견이라 한 것은 종래의 사상 곧 성부만이 불멸, 불가견이라는 것을 부인한 것이다. 성 아우구스티누스 저/김종흡 역, op. cit., p. 85.

성자에 대해서 어거스틴은 골로새서 2장 9절을 인용하면서 하나님의 본성을 완전히 반영하고 있는 거울이며 동시에 하나님의 지혜 자체인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무한한 본성을 자기 안에 소유하시고 그것을 드러내는 것으로 보았다. 그러므로 어거스틴은 아들은 아버지의 지혜요 능력인 것처럼, 성부의 신성이다. Ibid., p. 207.
특히 어거스틴의 그리스도론의 한가지 특징은 그의 Forma Dei 사상이다. 그는 성자의 二성을 비추어 두 가지 형상을 인정하고 성자의 형이상학적 면을 Forma Dei라 부르고 그의 인간적 존재 양식을 Forma Serv(종의 현상)라 부른다. 그리스도는 본래 하나님의 모습으로 존재했던 것이다. 즉 그분은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언제나 존재하는 분이시다. 그리스도의 가장 깊은 본질은 신적인 것이다. 성자는 하나님의 말씀이요, 아버지의 독생자이시며, 모든 일에 있어서 성부와 동등이며, 신에게 있어서 나온 신이요, 본질 중의 본질이며, 성부와 동등이면서도 성부가 아니다. 그는 성부로부터 전적으로 나셨고, 모든 것을 그대로 가진다. 이종성, 신학과 신학자들, op. cit., p. 29

성령에 대해서 어거스틴은 성자가 성부와 모든 면에 있어서 동일하다고 주장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성령도 그의 본체(substantia)에 있어서나 기능에 있어서나 성부와 완전히 동일하다. Ibid., p. 30.
성령이 성부와 성자에게서 나오셨고 성부께서 성자와 성령을 보내신 고로, 성령은 성부와 성자에 못지 않게 동등하다. 성 아우구스티누스 저/김종흡 역, op. cit., p. 185.
어거스틴은 성서가 한번도 성령을 사랑이라고 부른 곳이 없다는 사실을 인정하면서도 요한 1서 4장 13절과 4장 16절에 근거하여 신자 안에서 신의 사랑을 북돋우어 주는 자는 성령의 역사이기 때문에 성령을 사랑이라고 부르는 것이 가장 적당하다고 한다. Ibid., p. 441.


4. 신앙과 지성
삼위일체론에 대한 어거스틴의 독창적인 공헌은 인간 영혼의 구조로부터 끌어낸 유비를 사용한 것을 다루는데 있다. 이 유비(Analogies)의 기능은 하나님께서 삼위일체라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라기 보다는 그의 절대적인 유일성과 삼위의 진정한 구별에 대한 신비를 우리가 보다 낫게 이해할 수 있도록 심화시키는 것이다. 엄격히 말해서 그는 어디에나 삼위일체의 흔적(Vestiges)이 있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피조물이 존재하는 한에 있어서는 그 피조물들이 하나님의 관념 속에 참여함으로써 존재한다는 것이다. 박홍무, op. cit., p. 57.
형언할 수 없고 비물질적이고 변함이 없는 최고의 존재를 이해력으로 식별하기 위해서는 사람의 마음을 신앙 규범의 지도하에서 단련해야 하며, 그 단련을 위해서는 사람의 본성에 있는 그 마음보다 나은 것이 없다. 마음은 동물에는 없는 것이며, 사람 자신의 영혼에서도 가장 우수한 부분이다. 그것은 보이지 않는 것들을 볼 능력을 받았으며, 더 높고 더 내면적인 곳에서 주관하듯이 신체 감각들의 모든 보고를 얻어 판단을 내리며, 하나님 이외에는 마음보다 높거나 지배하는 것이 없다. 성 아우구스티누스 저/김종흡 역, op. cit., p. 463.


5. 외적 사람에 있어서의 삼위일체론의 흔적 박홍무, op. cit., p. 60. 어거스틴은 Analogia와 Vestigium과 Lmago라는 말을 각각 달리 적용한다. 즉, Analogia는 자연계에, Vestigium은 외적 사람에게 그리고 Lmago는 내적 사람에게 적용해서 쓴다.

어거스틴은 논하기를 삼위일체의 지식이 참으로 도달하는 길은 사랑이며 그 사랑은 세가지 것을 암시하는데 실은 사랑 그 자체 안에 삼위일체의 흔적이 있다. 사랑은 어떤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고 또 사랑으로 어떤 것이 사랑을 받는다. 그리하여 여기에 사랑하는 사람과 사랑 받는 사람과 그리고 사랑 이 세가지가 있게 된다. 사랑이라는 것은 두가지의 것, 즉 사랑하는 주체와 사랑을 받는 객체와 그 양자를 연합시키거나 혹은 연합시키고자 노력하는 사랑으로 분석함으로써 드러난 것이다. 성 아우구스티누스 저/김종흡 역, op. cit., p. 248.


사랑하는 성부, 사랑을 받는 성자, 그리고 그 사이를 연결하는 사랑의 성령의 흔적이 사람의 구조 안에도 남아 있다. 이렇게 삼위일체의 흔적을 외부적인 것에서 찾을 수 있는데 그 원리는 첫째 것이 둘째 것을 낳고 세째것이 그들을 연결하는 것이다. 박홍무, op. cit., p. 61.


그러나 인간의 마음이나 영혼은 피조물이기 때문에 신의 형상 자체는 아니다. 따라서 이러한 피조적 형상 속에서 삼위일체의 흔적을 헛되이 찾지 말고 하나님의 얼굴을 항상 구해야 한다. 하나님은 사람의 마음을 초월하여 계신다. 성 아우구스티누스 저/김종흡 역, op. cit., p. 406.
우리가 아무리 나무, 둥치, 가지들을 예를 들어 삼위일체의 흔적을 찾아도 이것들 속에 있는 본질은 지식도 없고 감각도 없고 생명도 없다. 짐승들의 경우는 그 본질 속에 생명은 있으나 지식이 없다. Ibid., p. 411.
삼위일체의 교리는 오직 믿음으로만 이해할 수 있다. Ibid., p. 420.
우리가 지금 거울을 보는 것 같이 희미하나 장차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삼위일체를 보다 환하게 알고 볼 날이 올 것이다. Ibid., p. 406.


6. 내적 사람에서 발견되는 삼위일체론의 형상(Lmago)
그가 특히 인간의 내적 활동을 중요시하는 것은 사람의 중심 자리가 내적 사람의 최저 심부라고 할 수 있는 영혼(soul, Anima)이며 만약 사람이 신과 상봉한다면 이 영혼에서만 가능하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이종성, 신학과 신학자들, op. cit., p. 32.
그래서 그는 내적 사람의 활동을 다음과 같이 분석 검토한다.


1) 존재(esse), 지득(nosse), 의욕(velle)
나는 알고 또 의지하는 자로서 존재하고, 자기가 존재하고 또 의지하는 것을 알고, 또 존재하고 아는 것을 의지한다. 즉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과 존재가 반드시 무엇을 알며 또한 알려고 의욕하고 있다는 것이다. 우리가 무엇을 안다고 하는 것은 사실은 우리가 속아서 그렇게 생각할 뿐이라고 그 당시 회의주의를 주장하는 아카데미학파를 논박하면서 속임을 당하고 있다는 나의 존재는 틀림없이 존재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내가 존재하고 있다는 것은 의심할 수가 없는 사실이므로 존재하는 내가 무엇을 알고 있다는 것을 부인할 수가 없다. 이상에서 말한 esse, nosse, velle는 그것이 그대로 곧 삼위일체론적 존재 양식에 직결되는 형상이라고는 할 수 없으나 그것이 삼위일체론의 흔적임에 틀림없다. Ibid., p. 34.

2) 마음(mens), 지식(notitia), 사랑(amor)
사람의 마음에서 삼위일체의 흔적을 가장 잘 찾을 수 있다. 즉 마음과 그 마음자체를 아는 지식 그리고 그 마음 자체를 사랑하며 또 그 자체의 지식을 사랑하는 사랑, 이 세가지는 하나이며 다 같으며 나눠질 수 없고 고유한 특성을 가진다. 이 세가지는 어느 하나가 다른 것보다 더 중요하다든가 경한 것이 아니라 다같이 중요성을 갖는다. 성 아우구스티누스 저/김종흡 역, op. cit., p. 257.
그가 삼위일체의 흔적을 먼저 인간의 마음속에서 찾는 이유는 사람이 신의 형상으로 지음을 받은 사실에 두었고 또 인간은 하나님을 기억하고 인식하며 사랑하는 것이 곧 하나님에게 알려 진다는 사실에 두었다. 곧 마음, 지식, 사랑은 삼위일체의 흔적이다. Ibid., p. 253.

3) 기억(memaria), 이해(intelligentia), 의지(voluntas)
신앙으로 시작하며 이성의 힘으로 전진하여 ‘하나님을 봄’(visio dei)에 이른다는 어거스틴의 확신은 그의 일생 동안 변함이 없다. 삼위일체 신에 대한 지식에 이르기 위하여 인간 영혼에 있어서 삼위일체를 연구할 것이다. 우리가 무엇을 알고자 열심히 공부할 때 우리의 마음은 무엇을 기억할 수 있는 능력과 이로써 바라던 지식을 소유하게 되고 안 후에는 이것을 이용코자 한다. 여기서 능력, 지식, 이용은 셋이나 한 마음의 작용으로 일체를 이루므로 삼위일체의 흔적이 엿보인다. Ibid., p. 291.
끝으로 어거스틴은 그의 삼위일체론의 유비와 흔적과 형상을 자연과 인간에서 발견할 수 있다고 주장한 후에 고백하기를 이와 같은 유사성이 피조물의 세계에서 발견된다 해도 그것은 어디까지나 유사성에 지나지 않는다고 한다. 이종성, 신학과 신학자들, op. cit., p. 35.


7. 특징
1. 절대 단일자로서의 삼위일체 하나님
어거스틴의 신관의 출발점은 하나님을 절대자, 단일자, 분할될 수 없는 자, 모든 범주를 초월한 자라는 점을 강조하는 데 있다. 삼위일체 하나님은 단일적이고 분할할 수 없는 한 행동과 의지를 가진다. 그의 사역은 분할될 수가 없다. 우연적 질서(현상계)와의 관계에 있어서 세 위격은 한 원칙으로서 사역한다. 분리되거나 구분이 되지 않는 행동으로서 사역한다. 이종성, 삼위일체론, op. cit., pp. 268-270.


2. 관계개념 도입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해 본래부터 아버지와 아들과 영의 삼자 관계 하에 있다고 하는 관계개념을 도입했다. 셋이라는 것은 관계를 의미한다. 생산하는 자, 생산된 자, 출원하는 자로서 하나님의 신성은 영원 전부터 그러한 관계를 가지고 존재했다. 이와 같이 아버지와 아들과 영은 언제든지 다른 두 위와의 관계하에 존재한다. Ibid., p.271.


3. 성령에 대한 결합적 기능 이해
성령에 관하여 어거스틴은 아버지와 아들을 결합시키는 사랑으로 이해하면서, 하나의 기능체로 변경시켰다. 이것은 성령의 ‘페르소나’의 고유성을 부인하거나 흐리게 하거나 약화 시켜서는 안되는데 범함을 의미한다. Ibid., p. 272.


4. 성령의 이중출원(Filioque) 강조
아버지와 아들이 영을 출원케 할 때 같이했다. 마치 삼위가 하나님 아버지의 창조사역에 동참한 것과 같다. 그러나 아버지가 최초의 근원이요, 그 근원에서 아들이 능력을 받아 영에게 주었다고 한다. Ibid., pp. 272-273.

5. 삼위일체의 흔적론
삼위일체적 하나님의 존재를 증명하기 위하여 그는 자연에서 삼위일체의 비유를 발견하고, 외적 사람에게서 흔적을 발견하며, 내적 사람(영혼)에게서 형상을 발견했다. Ibid., p. 273.


6. 플로티누스의 동일성 논리 원용
어거스틴은 삼위일체 교리를 하나님을 단지 신앙적으로 받아들였을 뿐만 아니라 논리적으로도 증명하려고 했다. 그는 플로티누스의 동일성 논리를 원용한 것 같다. 즉 플로티누스는 영적 존재만을 참존재로 인정하고, 그 영적 존재는 세 가지 범주에 따라 존재한다고 했다. Ibid., p. 274.
즉 ‘일자’(一者)와 ‘누스’(이성) 어거스틴 저/선한용 역, op. cit., pp. 221-222.
와 ‘프쉬케’(영혼)다. 그 세 가지 종류의 존재는 그것의 존재를 규정하는 존재론적 논리에 따라서 존재한다. ‘일자’는 ‘토 엔’(το ?ν)에 의하여, ‘누스’는 ‘엔 폴라’(?ν π?λλα)에 의하여, 그리고 ‘프쉬케’는 ‘엔 캐 폴라’(?ν κα? π?λλα)의 범주에 따라서 존재한다. 이중 그리스도교가 받아들일 수 있는 논리는 ‘엔 폴라’ 논리다. ‘토 엔’의 논리를 받아들이면 유일신론이나 군주신론에 빠지게 되며, ‘엔 캐 폴라’의 논리를 받아들이면 다신론에 빠지게 된다. 그러나 ‘엔 폴라’는 일(1)이 다(多)라는 논리이기 때문에, 어거스틴이 문제없이 받아들일 수 있었으리라고 추측된다. 기독교대백과사전편찬위원회 편, 기독교대백과사전 10권, 7판 (서울: 기독교문사, 1993), pp. 469-479.


8. 결론
지금까지 어거스틴의 생애와 신학, 삼위일체론에 대한 이해와 흔적론, 특징을 논의해 왔다. 여기서는 전체적인 요약으로 막음 하고자 한다.

제 1 장 생애에서는 연대기 순으로 어거스틴의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주요 발자취를 살펴보았다. 특히, 밀란 정원에서의 회심 사건은 어거스틴에게 찾아오시는 하나님으로서의 은혜 측면에서 해석되어져야 할 것으로 본다. 그리고 그의 저술 중에 고백록, 하나님의 도성, 삼위일체론등 3대저작을 소개했었다.

제 2 장 신학에서는 어거스틴이 기독교를 보는 입장과 도나투스파와의 논쟁으로 정립된 교회관과 펠라기우스를 반박하면서 체계화된 죄관 그리고 그의 특별한 은총 개념에 대해서 논했었다.

제 3 장은 본 보고서의 본론으로 다루었으며 그의 관계 삼위일체론에 역점을 두었었다. 특히 그의 인간 정신 생활에 유비하여 해석한 것들 즉 삼위일체의 흔적을 그의 큰 공헌으로 지적한 바 있다. 하인리히 오트 저/김광식 역, 신학해제, 9판 (서울: 한국신학연구소, 1987), p. 111.


이제 어거스틴의 삼위일체 교리에 대한 대략적 윤곽을 재 언급하며 결론을 맺겠다.
어거스틴의 삼위일체에 있어서 개체의 다양성보다도 통일성을 강조한 점, 성령의 발출이론, 삼위일체의 흔적사상, 특히 인간 심리학적 면에서 분석 추구한 노력들은 서방 삼위일체 신학이 따르게 된 근본적인 방향을 제시하였던 것이다. 이종한, 삼위일체론에 대한 역사적 고찰, (석사학위논문, 장로회 신학대학 신학대학원, 1991), p. 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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