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죠지 휫필드- 신앙부흥운동이 끼친 영향

by 【고동엽】 2008. 8. 5.
 

 

 

휫필드의 신앙부흥운동이 끼친 영향

 

이상규/고신대 교수

 


이미 마틴 로이드 존스가 지적했지만 그동안 휫필드는 정당한 관심을 받지 못했다. 정당한 관심은 그만두고 차라리 소홀히 취급되었다고 그는 지적하였다. 지금부터 약 100여 년전에 스펄전은 “조지 휫필드 같은 사람에게 주어지는 관심에는 끝이 없다”라고 말했지만 사실 이 관심은 극히 제한된 사람들의 몫에 지나지 않았다. 그가 관심을 얻지 못했던 이유중의 하나는 그의 무명(無名)에의 의지때문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는 신문의 주목을 받는 것을 싫어하였고, 항상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이 알려지는 한 조지 휫필드의 이름은 잊혀지고 지워지기를 바란다”고 하였다. 그는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기 위해 자신을 숨기고자 했던 것이다.

이러한 그의 태도는 한 시대를 이끌어갔던 영적 지도자로서 갖기 어려운 신앙적 겸손이었다. 필자는 이러한 겸손을 신앙에 있어서의 도덕성이라고 불러보는데, 오늘 우리 시대에서 가장 결여된 것이 이런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이런 점에서 필자는 조지 휫필드에 대하여 특별한 애정을 갖고 있다.

그의 생애와 신앙부흥운동


휫필드(George Whitefield, 1714-1770)는 17년 영국 남서부의 도시인 글로스터(Gloucester)에서 태어났다. 여관업자의 아들로 태어난 그의 청소년 시절은 결코 신앙적이 아니었다. 그러나 그가 1733년 옥스포드의 펨브로크(Pembroke)칼리지에 입학한 후부터 그의 삶은 급변하고 있었다. 1735년 회심한 그는 홀리 클럽의 회원이 되었고 후일 함께 복음적인 신앙운동을 전개했던 요한웨슬리(1703-1791)와 그의 동생 찰스웨슬리(1707-1788)그리고 「테론과 아스파시오」(Theron and Aspasio)를 쓴 제임스 허비(James Hervey, 1714~1758), 월리암 모간(William Morgan)등을 포함한 친구들과 교제하였는데 이들은 1729년 봄에 시작된 '홀리 클럽' (HolyClub)을 시작한 창립회원들이었다.

이 모임은 후일 영국과 미국의 부흥운동과 영적 각성운동을 이끌어간 동력원(Power station)이 되었다. 이들의 엄격하고도 철저한 시간관리, 규모있는 생활방식(method)때문에 메소디스트(Methodists)라고 불린 것은 잘 알려진 일이다. 휫필드에게 큰 변화를 준 책 중의 하나는 헨리 스쿠걸(Hen Scougal)이 쓴 「인간의 영혼 속에 있는 하나님의 생명」(The life of God in the soul of man)이라는 책이었다.

이 책은 그에게 중생의 필요성과 이에 대한 복음적 견해를 확립시켜 주었을 뿐만 아니라 그의 신학을 형성하는 데 있어서도 상당한 영향을 준 것으로 알려져 있다. 1736년 6월 20일 성직(副祭)임명을 받으므로 영국 국교회 성직자가 된 그는 자기의 고향인 글로스터의 성 메리 드 크립트 교회에서 첫 설교를 했는데 이것은 설교자로서 그의 삶을 이끌어간 중요한 힘이 되었다. 왜냐하면 이 때의 설교에 대한 그 자신의 기록이 보여주듯이 그는 이 첫 설교에서 외적 확신을 얻었기 때문이다. 그의 설교는 상당한 반향을 일으키며 목마른 영혼들에게 끊임없는 영적 해갈을 주었고 이 땅에서의 지친 삶에 새로운 힘을 공급하고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그의 설교에는 수많은 청중이 모여들었다. 휫필드에게 있어서 특별한 일은 그가 1739년부터 옥외설교 혹은 야외설교를 시작한일이었다. 곧 그해 2월 그는 브리스틀 근처 킹스우드(Kingswood)지방 광부들에게 첫 야외설교를 시작하였는데 약 2만명이 운집할 정도로 상당한 효과를 주었다. 이곳은 광산 도시로서, 산업혁명 초기 당시 이들은 영국국교회의 관심 밖에 있었다. 휫필드는 영적으로 소외된 이들에게 눈길을 돌려 전도의 성공을 거두었던 것이다. 두 달 뒤인 4월에는 런던에서도 야외설교를 시작하였다.

그는 공터나 들판에서 설교하였는데 때로는 수만 명이 운집하기도 했다. 1739년 4월 29일자 일기에는 "약 3만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운집했다"고 했다. 이와 같은 옥외설교는 당시 저조한 예배참석에 대한 현실적 대안이기도 했지만 자신을 반대하는 영국 국교회의 벽을 넘는 방안이기도 했다. “길과 산, 물가”로 나가서 전도하며 옥외에서 설교하였던 예수님의 설교는 그의 모범이 되었다. 휫필드의 옥외집회, 야외 설교 그리고 극장전도, 가정선교, 도시선교등은 당시 교회로는 상상도 못했던 일이다. 그래서 토마스 찰머(Thomas Chalmers,1780-1847)는 휫필드의 방법을 '공격적 방법' (aggressive system)이라고 불렀다.

휫필드는 1736년 6월 26일 주일 그의 고향인 글로스터에서 첫 설교를 한 후부터 1770년 9월 29일 미국 뉴베리 포트(Newbury Port)에서 56세를 일기로 하나님의 부름을 받기까지 34년간 그는 오직 한가지 일,곧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일에 몰두하였다. 잉글랜드나 스코틀랜드, 웨일즈에는 복음전도자로서 그의 발길이 닿지 않는 곳이 없었다. 그가 인도했던 공중집회는 1만 8천회에 달했고 스코틀랜드를 14회나 방문하였다. 지금부터 250년이 넘는 그 당시의 도로, 교통, 통신 시설을 고려해 볼 때, 그것은 경이로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또 당시 3-4개월이 소요되는 대서양을 건너 북미대륙을 무려 7번이나 방문한 일 또한 예사로운 일이 아니었다. 그 당시까지 기독교 역사상 그 누구도 그처럼 많은 대중에게 그만큼, 많은 설교를 한 일이 없었다. 저명한 전기작가인 루크 타이어만(Luke Tyerman)은 휫필드의 마지막 설교는 익세터 마을에서 죽기 불과 수시간 전에 행한 고린도전서 13장 5절을 본문으로 한 설교였다고 한다. 이런 점에서 로이드 존스의 평가는 거짓됨이 없다. "처음부터 끝까지 그의 생애는 하나의 기이한 현상이었다. 영국이나 미국내에서의 그의 헤라클레스적인 엄청난 노고는 성령의 능력을 언급하지 않고는 도저히 불가능하다."

그의 신학


휫필드는 한마디로 칼빈주의자였다. 그가 비록 자신의 편지나 일기, 그리고 사적인 대화에서 자신을 메소디스트(Methodist)라고 말했으나 이것은 오늘 우리가 말하는 교파로서의 감리교를 의미하는 것이 아님을 기억해야 한다. 그는 그리스도와 하나님이 값없이 주시는 은혜로만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행위에 의해서도 구원받는다고 생각하는 알미니우스주의를 배격하였다. 비록 휫필드는 신학적인 문제로 1741년 웨슬리와 결별했으나 그의 신학적 견해는 이미 1736년의 설교 속에 뚜렷이 반영되어 있다.

1736년 그가 미국으로 떠나기 앞서 글로스터주 스톤하우스(Stonehouse)에서 로마서 8장 30절을 본문으로 한 설교에서 그는 하나님의 예정을 강조했는데 이것은 그의 신학적 입장을 분명하게 보여준 예라고 할 수 있다. 사실 이 본문,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는 알미니안과 칼빈주의자들 사이의 논쟁의 핵심적인 본문이었다. 휫필드는 이 본문에 대한 주석적 설교를 통해 칼빈주의적인 자신의 입장을 보여주었는데, 휫필드는 이것을 단순히 '은혜의 교리' (The doctrine of grace)라고 부르기를 더 좋아하였다.

 

휫필드는 그의 설교를 통해 특히 윈죄, 중생, 칭의, 성도의 견인, 그리고 무조건적인 선택 등을 강조했는데 그것은 칼빈주의적 신학체계였다. 원죄에 대한 그의 강조는 인간이 원의(原義)에서 얼마나 멀리 떠나있는가를 강조하고 인간의 전적 부패를 강조하기 위함이었다. 마틴 로이드 존스는 휫필드만큼 중생치 않은 자연인의 마음을 적나라하게 파헤친 사람은 없다고 했다. 웨슬리 또한 원죄를 믿었고 은혜를 떠나서는 자기의 구원에 대하여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을 말했으나 그는 이 은혜가 모든 사람에게 똑같이 주어져 있다고 믿었다.

그래서 은혜를 받아들일 것인지 거부할 것인지를 결정하는 것은 그 사람 자신의 일이라고 보았다. 이런 점에서도 웨슬리는 알미니안적이었다. 휫필드는 그의 설교에서 죄인의 회심 곧, 거듭남을 특별히 강조하였다. 휫필드는 죄인의 회심에 있어서도 하나님의 은혜가 불가항력적임을 강조하였다. 그는 믿음으로 말미암은 의를 변함없이 가르쳤다. 그 의는 우리의 행위로 인한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주시는 전가된 의라고 하였다.

 그래서 휫필드는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으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엡 2:8)는 말씀을 즐겨 인용하였다. 휫필드의 전도를 받고 회심한 엘리옷(R. Eliot)은 휫필드의 장례식에서 한 설교 가운데서 ‘휫필드는 그의 생애에서 특별히 하나님의 영원하고도 무조건적인 선택을 강조하고 이를 옹호하였다’고하였다. 이와 같은 점들을 고려해 볼 때 휫필드는 일관성있는 칼빈주의자였음이 분명하다.

웨슬리와 휫필드


휫필드는 웨슬리와 함께 신앙부흥운동을 전개했으나 두 사람의 신학적 차이는 처음부터 분명했다. 이들이 결별하게 되었던 중요한 문제는 성화(聖化)와 예정론의 문제 때문이었다. 웨슬리가 모라비안과 결별하게 되었던 문제도 바로 성화의 문제였다.

1735년 10월 런던을 떠나 미국으로 향하는 배 안에서 웨슬리는 모라비안파의 감독 데이비드 니쉬만(David Nischmann, l696~1772)이 이끄는 26명의 모라비안 교도와 동행했는데, 대서양의 그 거센 풍랑에도 두려워하지 않고 하나님을 의지하는 믿음을 보고 크게 감동받은 웨슬리 형제는 역시 모라비안 선교사인 페투르스 뵐러(Petrus Boehler)를 통해 회심하였다.

회심한 후 존 웨슬리는 1738년 여름 진센돌프의 헤른후트 공동체를 방문하고 여기서 2주일간 체류하면서 진센돌프를 만나 교제를 나누기도 했었다. 그러나 웨슬리는 점차 진센돌프와 모라비안들에 대해 비판적 태도를 가지게 되었고 결국에는 이들과 교제를 단절하였다. 가장 큰 이유는 성화(聖化)에 대한 견해차였다. 모라비안들은 회심하기 전에는 성직을 가져서는 안된다고 보았는데 회심의 경험 이전에 국교회 성직자가 된 웨슬리로서는 용납하기 어려운 것이었다. 이점에 대하여 웨슬리는 회심의 체험도 중요하지만 회심 이후에도 계속적인 성화를 추구해야 하는데 모라비안들에게는 이점이 부족하다고 비판하였다.

1741년에는 진센돌프와 대면하고 성화의 문제에 대해 토론한 일이 있는데, 진센돌프는 성화 혹은 그리스도인의 완전이란 스스로의 노력에 의해 이루어지는 것이라기 보다는 은혜로 주어지는 것이라는 루터교적 '전가설' 을 말했으나 웨슬리는 믿음은 성화에 있어서도 그리스도인의 완전이 인간의 영혼 속에 내재할 정도까지 이르게 한다는 소위 알미니안적인 ‘내재설’을 주장하였다. 이 토론에서 이견을 확인한 웨슬리는 진센돌프를 반(反)율법주의자라고 비난하고 모라비안과의 결별을 선언하였다. 이후 웨슬리는 성화론의 문제와 예정과 선택의 문제로 휫펼드와도 결별하게 되었던 것이다.

웨슬리 형제의 아버지 사무엘 웨슬리(1662-1735)는 영국교회의 고교회파 목사였다. 그런 관계로 웨슬리 형제는 성장하면서부터 알미니우스주의를 배우게 되었다. 그래서 이들은 칼빈의 예정론에 반대하고 만인구원설을 신봉하였던 것이다. 이들이 예정설을 반대한 이유 또한 성화에 대한 견해 때문이었다.

웨슬리는 완전주의자로서 하나님의 무조건적 선택에 의한 예정에 의존하기 보다는 완전을 향한 끝없는 노력을 중시하였는데, 칼빈의 예정론은 신자로 하여금 성화에의 부단한 노력을 등한히 하게 할 우려가 있다고 보았다. 그러나 칼빈주의자이자 개혁주의자였던 휫필드는 선택의 교리가 도리어 성화적 삶의 원천이라고 주장하고 “나는 성자를 통해 성부께 영원히 선택되었고, 성자의 보혈을 믿는 믿음으로 값없이 의롭다함을 얻으며, 그 결과 성화되며 끝까지 보존되고 또 모든 것의 결과로서 영화롭게 된다는 사실을 성령을 통해 깨닫게 하시는 하나님을 찬송한다”고 했다(아놀드 델리모어,「조지 휫필드」P.94). 앞서 언급한 바처럼 두 사람의 신학적 차이는 처음부터 분명했다. 휫필드는 영국 국교회의 39개조를 존중했는데 이 신앙고백은 칼빈주의적 강조점을 지닌 것이었다.

 휫필드는 1739년 브리스톨을 떠나면서 웨슬리가 '예정교리' 에 대해서 아무런 논쟁도 하지 말기를 기원하였다. 휫필드는 비록 신학적 견해차가 있을지라도 복음주의자들 사이의 연합을 갈망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웨슬리는 "값없는 은혜"(Free Grace)라는 설교를 통해 예정론을 자의적으로 정의하고 예정론을 공개적으로 비판하기 시작하였다. 그의 “그리스도의 완전”이란 문서 또한 논쟁적인 문서였다. 이런 교리적인 차이로 1740년부터 두 사람은 논쟁하였고 이듬해인 1741년 두 사람은 결별케 되었다. 이렇게 되어18세기 메소디스트들은 두 그룹, 곧 웨슬리적 메소디스트(Wesleyan Methodist)와 칼빈주의적 메소디스트(Calvinistic Methodist)로 나누어지게 된 것이다.

 

휫필드의 칼빈주의적 신학은 단순한 이론이 아니라 그의 사고의 틀이자 그의 삶을 지배한 근본 원리였다. 그는 미국으로 가는 배 안에서 쓴 편지에서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영원 전부터 나를 아셨습니다. 그분이 나를 존재하게 하셨고 때를 맞추어 나를 부르셨습니다. 그분은 그분의 보혈을 믿는 믿음을 통해서 아무 값없이 나를 의롭다 하셨습니다"라고 하였다. 또 “우리가 선택되었다는 교리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값없이 의롭다 칭함을 받는다는 교리는 내 영혼을 거룩한 불길로 채우며 내 구주 하나님께 대해 큰 확신을 갖게 해준다”고 하였다.
다른 편지에서 그는 “내가 칼빈주의적 대요를 포용하는 것은 칼빈 때문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것을 나에게 가르치셨기 때문이다”라고 했고 이 진리들이 그의 열심의 원천이라고 했다. 즉 그는 칼빈주의자로서 칼빈주의와 전도는 양립할 수 없다는 일부의 주장, 다시 말하면 예정론은 전도의 열정을 무력화시킨다는 주장이 근거없는 것임을 그의 신학과 삶을 통해 보여준 것이다.

그가 끼친 영향


마틴 로이드 존스는 휫필드를 가리켜 잉글랜드 역사상 가장 위대한 설교자였다고 평했는데 역사에 미친 그의 영향 또한 심대하다고 했다. “잉글랜드와 웨일즈와 스코틀랜드와 미국에 미친 그의 영향력은 헤아릴 수 없을 정도다. 역사가 렉키(Lecky)는 1789년 이후 일어난 프랑스혁명과 같은 혁명으로부터 이 나라를 구한 것은 분명 복음의 대각성이라고 했다. 만일 이 말이 옳다면 조지 휫필드야말로 어느 누구 보다도 이 일을 한 장본인이다”라고 말했다(M. Lloyd-Jones, TbePuritans, P.105). 이제 그가 끼친 영향을 몇 가지로 정리해 보고자 한다.

영국교회와 사회에의 영향


우선 그의 복음주의 신앙부흥운동은 영국교회와 사회에 큰 영향을 주었다. 18세기 당시 영국교회는 나태와 게으름, 영적무기력에 빠져있었다. 특히 합리주의 철학과 이신론(Deism)의 영향으로 성직자와 교회는 영적 능력을 상실하고 깊은 회의 속에 빠져 있었다. 이와 같은 조류에 반대하고 합리주의적인 비신앙에 대항한 지적운동을 전개한 이들이 없지 않았으나 영국교회에 드리워진 불신과 영적 무기력을 제거하기에는 여전히 역부족이었다.

 이러한 시대에서의 휫필드의 복음주의 부흥운동은 개인과 교회는 물른 국가에도상당한 영향을 주게 된 것이다. 영국 국교회가 영적 침체에서 벗어나게 되었고 비국교도 새로운 힘을 얻었다. 무지와 방탕, 술취함과 게으름에서 벗어나 새로운 삶의 변화가 일어났다. 개인의 변화는 사회 변화를 동반하였고 산업혁명 이후의 혼란한 영국사회에 변화와 질서가 확립되어 갔다. 월리엄 월버포스(William -Wilber-force)의 주도하에 일어난 노예제도 폐지운동과 같은 사회개혁운동도 신앙부흥운동의 결과였다. 반드시 휫필드만의 영향 이라고 볼 수는 없지만 기독교교육이 강조되어 탄광지대인 킹스우드에 학교가 설립되기도 했고 주일학교 교육이 강조되기도 했다. 무엇보다도 교회로 하여금 그 본연의 사명인 선교에 대한 관심을 불러일으키기도 했다.

휫필드의 신앙부흥운동을 통해 불신과 회의주의, 영적 무기력을 대항하는 최선의 대안은 이론적인 논리나 냉정한 비판이 아니라 순수한 복음과 그 복음 안에서 사는 삶이라는 점을 보여주었다. 이런 점에서 볼 때 리렌드(John Leland, 1691-1766)나 레즐리(Charles Leslie, 1650-1722)같은 신학자들의 저서나 버틀러 감독(Bishop Butler, 1692-1752)의 「유추」(Ana1ogy)같은 작품이 끼친 영향력은 비견할 바가 못 된다.

 라일은 “이들의 노력은 휫필드와 그의 동역자들의 절반만큼도 불신의 홍수를 물리치지 못했다”고 하였다. 한때 결별하기도 했었으나 웨슬리는 휫필드의 장례식 설교에서 "어느 누가 그처럼 수많은 사람을 그리스도께로 인도하였으며, 그처럼 엄청나게 많은 죄인들을 회개시켰다는 말을 들어본 적이 있는가? 그처럼 많은 사람을 어두움에서 빛으로 인도하고 사단의 세력으로부터 하나님께로 인도하는 복된 도구가 되었는가?"라고 반문했는데, 이것은 휫필드가 끼친 영향의 일단을 정리하는 말이 아닐 수 없다.(J.C.Ryle, Christian leadersof the 18tb. century, Banner of Truth. p. 47)

미국교회에의 영향


그가 미국교회에 끼친 영향 또한 지대하다. 휫펼드는 웨슬리 형제의 영향을 받아서 1739년 미국 조지아(Georgia)를 방문한 이래 무려 7차례나 북미 대륙을 방문하고 보스톤, 뉴욕, 필라델피아등 여러 지역을 순회하며 설교하였고, 뉴 잉글랜드에서 조지아로 가는 모든 곳들이 그의 사역지였다.

 미국에서의 그의 활동이 어느 교회에 국한된 것은 아니지만 남부의 침례교도들에게도 선한 영향을 주었다. 당시 남부에는 침례교회가 미약했을 뿐만 아니라 불신풍조 때문에 복음운동에 많은 장애가 있었으나 휫필드의 영향으로 이곳에서도 신자들이 급속히 불어났다. 보스톤에서도 마찬가지였다. 휫필드가 보스톤을 떠나기 앞서 행한 한 집회에서는 2만3천여 명의 인파가 모여들었는데 그날의 인파는 보스톤의 전체인구보다 많았다고 한다(아놀드 델리모어, 앞의 책, P. 120). 그는 가는 곳마다 영적 각성과 부흥을 가져왔다.

특히 1740년 이후 미국에 끼친 영향은 압도적이었다. 미국에서의 제2차 각성운동은 휫필드의 신앙부흥운동의 영향이라고 볼 수 있다. 휫필드는 보스톤을 떠나 노샘프톤(Northampton)을 방문하고 조나단 에드워즈와 함께 지낸 바도 있다. 휫필드는 조나단 에드워즈와 동역하면서 뉴 잉글랜드의 부흥운동과 독일출신 화란개혁파 교회 목사 프렐링호이젠(Theodore Jacob Frelinghuysen, l691~1748)이 일으킨 중부 식민지의 부흥운동을 연결하여 전국적인 부흥운동으로 발전시켰던 것이다. 이렇게 볼 때 휫필드가 미국교회 전반에 끼친 영향 또한 과소평가되어서는 안 된다.

스펄전과 에드워즈


휫필드가 끼친 영향은 그 당대만이 아니라 그 이후에도 영향을 주었고, 교회만이 아니라 개인에게 끼친 영향 또한 과소평가 될 수 없을 것이다. 휫필드에게 영향받은 대표적인 인물은 찰스 스펄전(Charles H. Spurgeon)이었다. 상식적인 이야기지만 스펄전은 최고의 설교가이자 부흥운동가였다. 그 역시 칼빈주의자였던 스펄전은 휫필드에게서 가장 큰 영향을 받았다고 고백한 바 있다.

조나단 에드워즈(Jonathan Edwards,1703-1758)는 미국이 낳은 최고의 청교도적 칼빈주의자였고 설교자이자 부흥운동가였는데 그 또한 휫필드의 영향을 받았던 인물이다. 그가 뉴 잉글랜드 지방에 알미니우스주의가 유입되어 인간의 행위를 강조하고 있을 때, 이를 반대하기 위해1734년 "믿음으로만 말미암는 칭의"(Justification by faith alone)라는 제목으로 다섯 번에 걸친 일련의 설교를 했는데 이 설교를 통해 놀라운 각성운동이 일어나기 시작하였다. 이 각성운동은 1740년에 일어난 제1차 각성운동의 도화선이 되었다.

이때 그는 휫필드의 많은 영향을 받았다. 사실 조나단 에드워즈에 의해 시작된 부흥운동을 미국 전역의 부흥운동으로 이끌어간 사람은 휫필드였다. 물론 조나단 에드워즈는 휫필드보다 나이가 많았으나 친구였고 그가 1734년과 35년에 있었던 부흥운동을 기술한 「하나님의 놀라운 사역에 대한 진실된 기술」 (Faithful narrative of the surprising work of God in the conversion of many hundred souls in Nortbampton)Ub1737년 런던에서 출판되었을 때, 이 책이 휫필드에게 감동과 용기와 함께 영향을 준 것도 사실이다.

휫필드가 조나단 에드워즈의 교회에서 설교할 때 에드워즈는 깊은 감명을 받고 예배가 끝날 때까지 감격과 기쁨의 눈물을 흘렸다는 기록(Church History, Vol. iv. No. 4)은 시사해주는 바가 크다. 어떤 점에서 양자는 상호 영향을 받으며 함께 부흥운동을 전개하였다고 할 수 있다. 휫필드는 특히1739년에서 1741년 어간의 두 번째 미국 방문에서 뉴 잉글랜드에서 조지아까지 당시의 13개의 식민지 전체에 부흥의 불길을 일으켰던 것이다.

 미국 인디언들을 위해 짧은 생애를 바친 데이비드 브레이너드(David Brainerd, 1718-1747)또한 휫필드로부터 영향을 받은 인물이다. 휫필드는 하버드와 뉴 헤븐(지금의 예일대학교)대학에서도 설교했었는데 이때 이 대학의 분위기가 일신하였다. 조나단 에드워즈는 “휫필드의 설교는 그 대학의 많은 학생들에게 행복하고도 지속적인 인상을 남긴 것이 분명하다”는 기록을 남겨두고 있다. 당시 예일대학의 학생이었던 브레이너드는 휫필드로부터 크게 감명을 받고 그의 삶이 변화되었다.
그가 교수 한사람에 대하여 '여기 있는 의자보다도 은혜가 없는 사람이다'라고 하여 그 학교에서 징계를 받기도 했지만 그의 가슴은 뜨거웠다. 그는 후일 인디안을 위한 선교사로서 거룩한 생애를 바쳤다. 그가 남긴 일기를 보면 그가 얼마나 주님과 깊이 교제하며 주의 나라를 위해 일했던가를 보게 된다. 이상에서 열거한 인물 외에도 많은사람들이 휫필드를 통해서 복음운동에 전력하게 된 것이 분명하다. 휫필드에게 영향받은 이들이 어디 이뿐이겠는가? “휫필드는 18세기 가장 위대한 말씀의 사역자였다”는 말은 진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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