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약과 정리>
무형교회는 유형교회안과 밖에 있다. 유형교회는 지상교회 공동체(기관으로서/건물로서)를 말한다. 이 안에는 알곡과 가라지가 있다. 무형교회는 주님이 보시는 참되고 완전하며 이상적인 교회이다. 그 안에는 알곡만 있다. 유형교회(건물)안에 속한 사람도 그렇지 않은 사람도 있을수가 있다. 이교도안에도 있을수가 있다.
사람은 이 무형교회를 보지 못한다. 그 이유는 사람의 생명의 상태를 볼수도 없을뿐만 아니라 판단도 할수 없기 때문이다. 이 무형교회는 초시간적이고 초공간적으로 편재한다. 천국을 포함하기 때문이고 과거뿐 아니라 미래까지 포함하기 때문이다. 천국도 교회로서 말할수 있다. 천국은 알곡만 있는 완전한 교회이다. 이 교회는 저서에서는 <거대인간>으로서 말하고 있다. 오직 주님만이 보시는 교회/천국이다. 무형교회로서 말할 수가 있다.
이것은 미래이고, 저 세상에 속한 것이다. 현세에 속하는 것은 아니다. 이런 점에서 승리의 교회(솔로몬)가 이에 적용될 수가 있다. 승리란 싸움뒤에 오는 것이고, 주님의 예에서와 같이 십자가 고난 이후에 주어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승리의 교회는 오직 천국만이 가질수 있다고 말할수 있다. 또 이 말은 중생한 존재만이 향유할수 있는 것으로 말할수 있다. 그것은 중생한 존재는 천국의 천사와 같기 때문이다. 즉 지상에서도 무형교회 곧 천국이 있을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하늘에서 뜻이 이루어진것처럼 땅에서도 이루어지소서)
이 점에서 무형교회는 유형교회(중생한 인간)안에 있다고 말할 수가 있다. 영혼이 몸안에 있듯이, 이 경우 유형교회는 무형교회이다. 유형교회는 두가지로 구분할 수가 있다. 기관/건물로서와 사람으로서이다.
건물안에 있는 사람의 몸도 유형교회이다. 건물로서의 유형교회안에 유형교회인이 있다. 그 사람이 무형교회인인지 아닌지는 사람은 볼수 없고 하나님만 볼수 있다. 건물안에 유형교회인은 알곡과 가라지로서 구분이 되나, 건물로서의 유형교회 밖의 무형교회인은 지상에 존재하므로서 사람(육신을 가진)으로서는 유형교회라고 할 수가 있다.
이 점에 입각해서 무형교회는 유형교회안에 존재한다고 말할 수가 있는 것이다. 유형교회는 건물로서만이 아니라 사람 자체로서도 적용할수 있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고, 천국/무형교회는 사람위에 서 있기 때문에 유형교회안에 무형교회가 있다고 말하는 것이다.
건물로서의 유형교회안에는 알곡과 가라지가 있다. 이 양자를 유형교회인으로서 말하지만 천국/무형교회는 이 양자중 알곡 유형교회인에게만 있다. 그리고 이 알곡은 건물로서의 유형교회 밖에도 있을수 있다. 이를 무형교회인으로서 말하나, 육신을 입었다는 측면에서 이 또한 유형교회인으로 말할수 있는 것이다. 건물로서의 유형교회 밖의 무형교회에 속한 유형교회인이 있을수 있다는 것과 이 유형교회안에도 무형교회가 결합되어 있다고 말하는 것이다.
2008, 5, 8, 수요일
루이스 벌코프의 조직신학
교회론
Ⅱ. 교회의 성질
B. 교회의 다양한 성격
2. 유형교회와 무형교회 : 이 말의 의미는 하나님의 교회는 한편으로는 보이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보이지 않는다는 뜻이다. 이 구분을 처음 시도한 자는 루터였다고 말한다. 그러나 교회에 적용이 시작된 것은 다른 개혁자들에 이르러셔였다. 이 구분은 항상 바르게 이해되어 왔던 것은 아니다. 종교 개혁자들을 비판하는 자들은 종종 그들이 두개의 분리된 교회를 가르쳤다고 공격했다.
아마도 루터가 유형교회안에 무형교회가 있다고 말함으로써 비난의 기회를 제공했던것 같다. 그러나 루터와 칼빈은 유형교회와 무형교회를 말하면서 이 두교회는 두개의 다른 교회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가 가지는 다른 두양상을 지칭하는 것이라는 점을 강조하기를 잊지 않았다.
무형적이라는 용어는 다양한 의미로 해석되어 다음과 같이 적용되었다. 곧 (1) 승리의 교회에, (2) 마지막 때에 나타날 이상적이고 완전한 교회에, (3) 온세계에 편재해 있고 인간이 볼수 없는 교회에, (4) 핍박중에 숨어서 말씀과 성례를 박탈당한 교회에 적용되었다.
여하튼 승리의 교회는 땅위에 있는 자들의 눈에는 보이지 않으며 칼빈은 그의 기독교 강요에서 이 교회를 무형교회에 포함되는 것으로 생각했다. 그러나 칼빈은 이 특징을 전투하는 교회에도 적용하려 했음이 분명하다. 그것은 개혁파 신학의 일반적인 특징이기도 하다. 개혁파 신학은 지상의 교회가 유형적이며 무형적이라는 사실을 함께 강조한다.
이교회가 보이지 않는 이유는 본질적으로 영적이며 영적인 본질이 육안으로 식별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동시에 누가 이 교회에 속하였고 누가 이 교회에 속하지 않았는지를 틀림없이 결정하기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와 신자들의 연합은 신비적인 연합이다. 성령은 보이지 않는 끈으로 양자를 연합시킨다. 예컨대, 거듭남, 참된회개, 참된 믿음, 그리스도와의 영적인 교제 등과 같은 구원의 복들은 모두 눈에는 보이지 않는 것들이다. 그러나 이와 같은 것들이 교회의 실제적인 형식(forma<이상적인 성격>)을 구성한다.
무형적이라는 표현을 이와같은 관점에서 이해해야 한다는 사실은 종교개혁 당시 유형교회와 무형교회를 구분했던 역사적 근거를 추적해 보면 명백하게 드러난다. 성경은 어떤 영광스러운 속성들을 교회에 부여함으로써 교회를 구속의 영원한 복을 전달하는 중개자로 나타낸다. 로마 가톨릭 교회는 이와같은 복의 분배권을 외적인 기관으로서의 교회 특히 대표적 교회 즉 성직자 계급에 부여하면서 하나님과 하나님의 자녀들 사이에 중재자로서의 인간 사제직을 설정함으로써 양자 사이의 직접적인 교통을 무시하거나 거부하였다.
이 오류는 종교 개혁자들의 비판의 표적이 되었다. 그들의 주장에 따르면 앞서 말한바와 같은 영광스러운 것들을 분배하는 교회는 외적인 기관으로서의 교회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신령한 몸으로서의 교회라는 것이다. 이 교회는 본질적으로 현재에는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이 교회는 유형교회 안에 상대적으로 그리고 불완전한 모습으로 구현되어 있으며 마지막 때가 되면 완전히 눈에 보이도록 구현될 것이다.
무형교회는 자연히 유형적인 형체를 취하게 된다. 인간의 영혼이 몸을 입고 몸을 통하여 자신을 표현하는 것과 같이 단순히 영혼으로만 구성되어 있지 않고 영혼과 몸을 아울러 가진 인간으로 구성된 무형교회도 필연적으로 자신을 외적인 기관으로서 유형적 형체를 취하게 마련이다. 교회는 고백과 행위, 말씀의 선포와 성례의 시행 그리고 외적인 기관과 정체를 통하여 가시화 된다. 맥퍼슨은 무형교회와 유형교회를 구분하면서 “개신교는 마술적이고 초자연적인 로마 가톨릭 교회관의 형식주의와 열광적이며 종파적인 신령주의의 특징인 모든 외적 형식에 대한 터무니 없는 경시 사이에서 적절한 길을 모색했다”고 말한다.
유형교회와 무형교회가 모두 보편적이지만 두 교회가 모든 면에서 언제나 상응하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염두에 두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무형교회에 속한 어떤 회원들이 반드시 유형적 기관의 회원이 되는 것은 아니다. 예컨대, 임종의 자리에서 회개한 사람이라든가, 범죄를 하여 잠시 동안 유형적 교회의 공동체로부터 출교당한 신자들이 그 예에 속한다. 한편 그리스도를 고백하나 그에 대한 참된 믿음이 없는 거듭나지 않은 자녀나 성인들이 외형적인 기관으로서의 교회 안에 있을수 있다. 이들이 이러한 상태를 벗어나지 않는 한 무형교회에 소속되어 있다고 볼수는 없는 것이다. 유형교회와 무형교회에 대한 훌륭한 정의는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에서 발견할수 있다.
3. 유기체로서의 교회와 조직체(제도)로서의 교회 : 이 구분은 앞에서 말한 무형교회와 유형교회를 구분하는 것과 혼동되어서는 안된다. 이것은 유형교회안에서의 구분이요 유형적 단체로 간주된 교회의 두가지 다른 면들에 주목하는 구분이다. 교회가 오직 직분, 말씀과 성례의 시행 그리고 일정한 형식의 교회 정치안에서만 가시적이 된다고 생각하는 것은 잘못이다. 이런 모든 것들이 없을지라도 교회는 여전히 공동생활과 신자들의 고백안에서 그리고 그들이 연합하여 세상을 대항하는 가운데 모습을 드러낼수 있다. 여기서 고찰하고 있는 구분이 유형교회안에서의 구분임을 명심하면서도 우리는 유기체로서의 교회와 조직체로서의 교회(apparitio와 institutio)가 무형교회에 그 영적인 배경을 가지고 있음을 잊어서는 안된다.
그러나 이 두 교회가 하나의 유형교회의 두 다른 면이기는 하지만 두 교회는 몇가지 점에서 중요한 차이가 있다. 유기체로서의 교회는 성령의 끈으로 연합된 신자들의 공동체(coetus fidelium)인 반면, 조직체로서의 교회는 신자들의 어머니(mater fidelium)로서 구원의 방편(Heilsanstalt)이요 죄인들을 개종시키고 성도들을 완전케 하는 역할을 담당한다. 유기체로서의 교회는 영적인 능력이 있는 교회이다. 그 안에서 모든 유형의 은사들과 재능들이 나타나고 주님의 사업을 위하여 사용된다. 반면에 조직체로서의 교회는 하나님께서 제정하신 직분들과 방편들을 통하여 제도적 형식과 기능들로 나타난다. 양자는 어떤 의미에서 보면 서로 연합한다. 그러나 한편이 다른 한편에 종속하는 때도 있다. 조직체 혹은 기관(신자들의 어머니)으로서의 교회는 목적에 대한 수단이요 유기체로서의 교회 곧 신자들의 공동체로서의 교회에서 발견된다.
개신교의 교회관.
종교개혁은 일반적인 의미에서는 로마의 형식주의에 대한 반발이며, 특별하게 형식적 교회관에 대한 반발이다. 종교개혁은 외형적인 기관으로서의 교회로부터가 아니라 성도의 무리로서의 교회로부터 교회의 본질을 발견해야 한다는 진리를 전면에 부각시켰다. 루터와 칼빈에게 있어서 교회는 단순한 성도들의 공동체 곧 그리스도를 믿고 그리스도 안에서 성화된 자들, 그리고 머리이신 그리스도와 연합한 자들로 구성된 공동체이다. 이 같은 입장은 개혁 교회의 신조들을 통해서 거듭 천명된 바 있다. 예컨대 벨기에 신앙 고백은 이렇게 말한다.
“우리는 모두가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을 기대하며, 그의 피로 씻음을 받고, 성령으로 성화되고, 인침을 받은 참된 신자들의 회중인 한 보편 교회 혹은 우주적 교회를 믿고 고백한다.” 스위스 일치 신조도 같은 진리를 이렇게 고백한다. 교회는 “세상으로부터 부르심을 받고 모인 실실한 자들의 모임이다. 이 모임에 속한 모든 성도들은 성령의 말씀을 통하여, 구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참된 하나님을 참되게 알고 바르게 경배하며 섬기는 자들이요, 그리스도를 통하여 조건 없이 주어지는 모든 선한 은혜들에 믿음으로써 참여하는 자들이다”(17장).
선택의 관점에서 교회를 정의하고 있는 웨스트민스터 신앙 고백은 이렇게 말한다. “무형의 보편적이고 우주적인 교회는 교회의 머리이신 그리스도 아래서 하나로 모였고 모이고 있으며 또 모이게 될 택함을 받은 모든 자들로 구성된다. 또한 이 교회는 만물을 충만케 하시는 자의 배우자이며 몸이며 충만이다”(25장). 보편 교회, 곧 하나님의 계획안에 존재하며 시대의 과정에서만 실현되는 교회는 시간 속에서 영생으로 부르심을 받은 모든 택함을 받은 자들로 구성되는 것으로 생각되었다. 그러나 실제로 지상에 존재하는 교회도 성도들의 공동체로 간주되었다.
무형 교회만이 아니라 유형 교회도 또한 성도들의 공동체(무리)로 간주되었다. 이 두 교회는 두 개의 교회가 아니라 하나이며, 따라서 본질도 하나이다. 두 교회가 모두 본질적으로 성도의 무리이다. 그러나 무형 교회는 하나님이 보시는 교회로서 신자들만을 포함하는 교회인 반면, 유형 교회는 인간이 보는 교회로서 자녀들과 함께 예수 그리스도를 고백하고 그리함으로써 성도들의 공동체로 간주되는 교회이다. 여기에는 아직 거듭나지 않은 자들이 포함될 수 있고 또한 항상 그러했다. 그것은 알곡에 가라지가 섞일 수 있는 것과 같다. 그러나 분명히 드러난 불신자들과 악한 자들은 용납하지 않는다.
바울은 유형 교회들에게 편지를 쓰면서 그들을 ‘성도’라고 부르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는 악한 자들과 범죄자들에게서 떠날 것을 역설한다(고전5장; 살후3:6,14; 딛3: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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