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하나님의 큰 일
헤르만 바빙크는 1900년대초 네덜란드의 개혁주의 신학자이며 아브라함 카이퍼와 B.B.워필드와 더불어 세계 3대 칼빈주의자입니다. "하나님의 큰 일"이라는 이 책은 "나를 돕는 것은 나의 학문도 아니요 교리학 책들도 아니다 오직 신앙만이 나를 구원한다"라는 말에 가장 잘 부응하는 책입니다. 이 책은 성경말씀을 체계화시켜 평신도들이 알기 쉽게 정리해 놓은 것입니다. 아무쪼록 이 책의 모든 부분은 아니더라도..중요내용을 같이 나누게 됨을 기쁘게 생각합니다. 하알클럽 여러분들에게 성경의 흐름을 이해하는데 큰 도움이 되기를 바랍니다.
중생은 지극히 신비하고 은밀한 방식으로 사람의 인격의, 그 사람의 자아의 핵심부에서 시작되고 거기에 중심을 두지만(갈2:20) 거기서부터 그 사람의 모든 능력들에게까지 퍼진다. 그의 지성에도(롬12:2;고전2:12;엡4:23) 그의 마음에도(히8:10;10:16:벧전3:4)그의 의지에도(롬7:15-21)그의 감정과 기질에도(롬7:22)또한 그의 영과 혼과 육체에까지 퍼지는 것이다(살전5:23;롬6:19)아직 성숙한 상태에 이르지 못했고 그리하여 온갖 육체의 죄들과 싸워야 하지만(갈5:17)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령의 새롭게 하시는 역사 속에서 살기를 사모하는 온전한 사람이 나는 것이다(롬6:4;7:8)
중생은 지성의 편에서는 믿음이요, 의지의 편에서는 회개다.
구원 얻는 참된 믿음은 세 가지 점에서 다른 종류의 믿음들과 구별된다. 첫째로, 그 믿음은 기원이 다르다. 역사적 믿음이나, 일시적 믿음, 혹은 이적적인 믿음도 그 자체는 그릇된 것이 아니다. 전적인 불신앙과 명렬한 적의(敵意)보다는 낫다. 그러나 그것들은 그저 하나님의 일반 은혜의 선물들일 뿐이며 따라서 자연인들에게도 주어지는 것이다.
그러나 구원 얻는 믿음은, 모든 구원이 그렇듯이 하나님의 선물이다(엡2:8) 그것은 하나님의 특별 은혜의 선물이요(빌1:29) 선택의 결과다(행13:48;롬8:30;엡1:5)그것은 성령의 역사하심이요(고전12:3)또한 회개의 열매인 것이다(요1:12-13)
회개는 그 본질에 있어서는 하나이지만, 그것이 일어나는 사람에 따라서, 또한 그것이 일어나는 정황에 따라서 여러 가지 다양한 형태를 취한다. 하나님의 자녀들이 걷는 길은 한 길이지만, 그들이 그 길로 인도되는 양상은 매우 다양하며, 매우 다양한 경험을 하는 것이다. 여러 족장들을 인도하신 하나님의 역사하심이 얼마나 서로 다른가! 므낫세의 회심과 바울의 회심과 디모데의 회심이 서로 얼마나 다른가! 다윗과 솔로몬의 경험이, 요한과 야고보의 경험이 또한 서로 얼마나 다른가! 또한 성경 바깥에서도 교부들의 삶이나, 종교개혁자들의 삶이나, 모든 성도들의 삶에서도 동일한 차이를 접하게 된다. 영적 삶의 이러한 풍성함을 보게 되면, 그 순간 우리의 하찮은 분량으로 다른 사람들을 판단하는 행위를 버리게 될 것이다. 오직 한 가지 방법밖에는 모르기 때문에, 자기와 똑같은 영적 체험을 고백하지 않으면 결코 회개한 것으로 인정하지 않는 사람들도 있다. 그러나 성경은 그런 사람들의 편협한 사고보다도 훨씬 더 풍성하고 넓은 것이다
제 7 장 성경에서
옛날 선지자들은 두가지 점에서 후기 선지자들과 구별된다. 첫째로 그들의 촛점은 이스라엘 백성의 내적인 문제에 제한되어 있고 다른 민족들에 대해서는 아직 그들의 관심밖이었다. 둘째로 그들은 미래보다 현재에 더 관심이 많았다. 그들의 경고와 위협의 말은 대체로 직접적이고 실천적인 목적을 갖는다. 그 때 다윗과 솔로몬의 통치기간 동안과 그 후 일정한 기간 동안에도,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언약을 지킬 것이고 그의 길을 행할 것이라는 소망이 항상 생성하였던 시대이다.
그러나 기원전 9세기 이스라엘이 외국과의 정치에 말려들어 자신의 사명과 목표도 무시하고 점점 죄악에 빠지게 될 때, 선지자들도 주위민족들에게 눈을 돌렸고, 현재의 몰락해 가는 상황에서는 더이상 하나님의 약속의 완전한 성취를 기대할 수 없게 되자, 하나님 자신에 의해서만 성취되는 메시야를 대망하는 미래속에서 그런 성취를 기대했다.
그들은 종교적, 윤리적, 정치적, 사회적 영역에서 이스라엘이 처한 모든 상황과 다른 민족들, 에돔, 모압, 앗수르, 갈대아, 이집트 등과 이스라엘과의 관계를 여호와께서 그의 백성과 세우신 중심언약과 비교했다. 그들은 이스라엘에게 그들의 죄악들과 하나님의 형벌을 알렸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그들은 주님의 백성에게 그의 언약의 불변성, 그의 신실한 약속, 그들의 모든 불의에 대한 용서등으로 그들을 위로했고, 하나님 자신이 다윗의 가문으로부터 난 왕으로(예수그리스도) 이스라엘과 모든 민족들에게 그의 지배를 확장시킬 기쁜 미래로 인식을 전환시켰다.
제 9장 "하나님의 존재" 중에서
--하나님의 초월성과 내재성의 균형--
우리가 모든 피조물위에 하나님의 절대적 초월성을 버린다면 우리는 다신론(여러 신의 이방종교) 혹은 범신론(모두가 신인 종교)에 떨어진다. 역사의 교훈에 따르면 이들은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고 서로 쉽게 통한다.
그리고 우리가 피조물과 하나님과의 관계를 없애버리면 이신론(理信論:계시없는 유일신 신앙)이나 무신론(하나님 존재의 부정)이란 암초에 빠진다. 이들은 똑같이 서로 여러가지 공통된 특징을 가지고 있다.
제 11장 창조와 섭리중에서
약간의 사람들이 생각하는 바는 하나님은 그렇게 너무 완전하시고 너무 풍부하셔서 자신을 지배할 수 없고, 자신의 존재에 넘치는 힘을 가늠하지 못하여서 샘으로부터 넘쳐 시내가 흐르고 항아리로부터 물이 넘치듯이 세계가 그로부터 흘러나왔다는 것이다. 다른 사람들은 그 반대 입장에서 생각하기를, 하나님은 본래 가난하고 공허하셨고 굶주리고 욕망에 찬 의지뿐이어서 자신을 충만시키고 자신의 필요를 공급하기 위해서 세계를 산출하셨다고 한다. 이 두 경우에 있어서 세계는 하나님을 위해서 필연적이어서 자신을 그의 넘침으로부터 해방하고자 하거나 자신의 필요를 보상하고자 하였다는 것이다. 두 생각은 성경과 모순된다.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은 명백하고 큰 소리로 강력하게 반대하여 선언하기를, 하나님이 세계를 위해서 있는 것이 아니라, 모든 피조물들을 포함한 온 세계는 하나님, 곧 그 자신을 위하고 그의 영광을 위해서 있다고 한다.
진실로 하나님은 그 자체로서 자족하고 만복하신 존재자이시다. 주는 어떤 방식으로든지 자신의 완전을 위해서 세계와 피조물을 전혀 필요로 하지 않는다.
사람이 어찌 하나님께 유익하다 하겠느냐? 네가 의로운들 전능자에게 무슨 기쁨이 있겠으며, 네 행위가 온전한들 그에게 무슨 유익이 있겠느냐?(욥 22:2-3) 무엇이 부족한 것처럼 사람의 손으로 섬김을 받으시는 것이 아니니, 만민에게 생명과 호흡과 만물을 친히 주시느니라(행17:25)
따라서 성경이 강력히 강조하는 사실은 하나님은 만물을 그의 뜻으로 산출하였다는 것이다. 세계를 산출하기 위해서 어떤 충동이나 필연성도 하나님의 존재 안에는 없었다. 창조는 완전히 하나님의 자유로운 행위이다. 비록 세계안에는 역시 하나님의 의가 계시될지라도 창조가 하나님의 의로부터 설명될 수 없으니, 이는 하나님은 누구에게도 빚진 것이란 잇을 수 없기 때문이 아닌가? 역시 세계안에는 하나님의 선하심과 사랑하심이란 두가지가 의로부터 들어왔을지라도, 창조는 하나님의 선하심과 사랑으로부터 추론될 수 없으니, 이는 삼위일체 하나님의 사랑의 생명은 자신 밖으로부터의 사랑의 대상이 필요로 하지 않기 때문이다. 창조는 오직 하나님의 자유능력, 그의 영원하심, 기뻐하심, 그의 절대주권에만 의존한다.(계 4:11)
삼위일체 하나님의 존재의 속성들이 피조물가운데 계시되도록 하고, 또한 스스로 영화와 영광을 모든 피조물로부터 조성케 하는 것이 하나님의 기뻐하신 뜻이다. 이런 자신의 영광을 위해서 역시 하나님은 세계를 필요로 하지 않으셨다. 왜냐하면 피조물이 자립자존하게 자신의 영광을 높이게 하는 것이 아니라 주는 피조물이 있으나 없으나 자신의 이름을 영화롭게 하실뿐 아니라, 그 자체안에서 즐거워하시는 항상 스스로 있는 자이시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마치 세계가 그에게 결여된 어떤 것을 보충할 수 있고, 그가 소유한 어떤 것을 빼앗아 갈 수 있는 것처럼 피조물을 결코 찾지 않으신다. 그러나 그 길이에 있어서나 그 넓이에 있어서 모든 세계는 하나님이 자신의 속성들을 반영케하는 자신을 위한 한 거울이다. 주는 항상 최고선으로서 자신을 의존한 채로 남아 있고 그 자신의 축복을 통하여 영원히 축복된 채로 남아 있다.
제 14장 은혜언약 중에서
하나님의 율법을 완전히 지킬 수 있는 사람만 있다면, 그는 아직도 영생을 그 보상으로 받을 수 있을런지도 모른다. 그러나 인간은 스스로 제 힘으로 생명에 이르는 이런 길을 불가능하게 만들었다. 그는 하나님과의 교통이 끊어졌고 하나님의 율법을 사랑하기보다는 미워하기 때문에(롬8:7) 율법을 더 이상 지킬 수 없다. 이제 은혜언약은 그에게 더 안전한 다른 길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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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락전에는 행위로 말미암아 영생에 이르렀지만, 이제 타락후에는 은혜언약 안에서만 영생을 얻고 이런 생명으로부터 신앙의 열매로써 선행을 얻는다. 그 전에는 인간이 하나님께 올라가고 그의 완전한 교통에 이르러야 했지만, 이제는 하나님이 인간에게 내려오셔서 그 거함을 인간의 마음에서 찾으셨다. 그전에는 노동의 날들이 안식일을 앞서지만, 이제는 주일이 안식일로 시작되며 그 모든 날이 안식일로 말미암아 거룩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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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보다 은혜언약이 선택으로부터 분리되었을때, 그 자체는 은혜언약이 되지 않고 다시 행위언약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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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택이 은혜언약의 기초요 보증이며, 심장이요 핵심이다.
성부는 우리 구원의 근원이시요, 성자는 그것의 성취자시요, 성령은 그것을 적용하시는 분이시다.
은혜언약은 모든 시대 어느 곳에서든지 본질적으로 하나이지만, 항상 새로운 형식을 드러내고 여러 경륜들을 거친다. 본질적으로나 사실적으로나 그것은 하나였고 율법 전이나 율법 아래서나 율법 후에도 하나다. 동시에 그것은 항상 은혜언약이다.
구약에도 죄의 용서함과 영원한 생명에 들어간 사람들이 있다면, 그것은 율법 때문이 아니라 약속때문이다.
은혜언약의 전포괄적인 하나의 큰 약속은 이것이니, 나는 너의 하나님이 될 것이요 또 네 후손의 하나님이 될 것이다.(창 17:7, 8) 이 안에 구원의 성취와 적용, 그리스도와 그의 모든 축복, 성령과 그의 모든 은사들 모두가 포괄되어 있다. 창세기 3:15의 모약속으로부터 고린도후서 13:13의 사도적 축복기도까지 일직선상에 놓여 있다. 즉 성부의 사랑과 성자의 은혜와 성령의 교통하심 안에 죄인을 위한 모든 구원이 포함되어 있다.
제 14장 은혜언약 중에서
타락전에 인간과 맺은 행위언약은 변하는 인간에게 의존하였기 때문에 깨어질 수 있었고 실제로 깨어졌다. 그러나 은혜언약은 하나님의 자비안에만 고정되어 있다. 인간들은 신실치 못할 수 있으나 하나님은 그의 약속을 잊지 않으신다.
그러나 은혜언약은 그 본질에 있어서 변할 수 없을지라도, 그 형식에 있어서는 변화하고 여러 경륜들에 따라서 다른 형태를 취한다.
대홍수 전 시대에 있어서도 이미 셋 족속과 가인족속의 구별이 일어났지만, 약속이 개인이나 종족에게 제한되지 않았고 모든 인류에게 넓혀져 있었다. 형식적인 구별은 이루어지지 않았고 일반계시와 특별계시는 아직 한 강으로 흘러가고 있었다.
그러나 그런 환경속에서는 약속이 소멸될 위협이 있자 홍수가 필요하게 되었고 노아는 방주속에서 그가 더불어 약속을 행하였다. 역시 이 약속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서 다시 보편적이 되었고 홍수 후에도 은혜언약의 진보에 대한 새로운 위험이 일어났지만, 하나님은 홍수때처럼 인간을 더 이상 멸하지 않으시고 그는 민족을 자신의 길로 가도록 내버려두셨고. 다만 아브라함을 약속의 간직자로써 구별하였다.
그 때 은혜언약은 믿음으로 의롭다 하는 표시(sign)인 할례로써, 그리고 마음의 할례의 징표로써 다른 민족으로부터 구별된 족장들의 가족들 안에서 현실화되었다.
은혜언약은 시내산에서 아브라함의 씨로써 이스라엘과 맺어졌다. 그러나 이스라엘이 한 민족이 되고 하나님앞에 거룩한 백성으로 살아야 했던 이래, 은혜언약은 국가적 성격을 띠었고, 몽학선생으로서 이스라엘 민족을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기 위한 법, 즉 도덕법은 물론 여러가지 시민법과 의식법들을 이용하였다. 약속이 이런 법들보다 더 오래되었고, 율법은 약속 대신에 온 것은 아니었고, 이것을 좀더 발전시켜 때가 차면 그 성취를 준비하기 위해 약속에 첨가된 것이다. .............................약속은 이제 모든 외적 국가적인 한계로부터 자유롭게 하고 초기에서와 같이 다시 전인류에게 미치게 된다.
은혜언약도 행위언약의 폐기가 아니라, 오히려 그것의 성취이다. 행위언약과 은혜언약은 한편으로 위에서 언급한 대로 아주 날카롭게 구별되어 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그들은 아주 내적으로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은혜언약은 역사 속에서 단 한 사람, 고립된 개인과 세워지는 것이 아니라, 항상 인간과 그의 족속, 즉 아담과 노아와 아브라함과 이스라엘과 교회와 그의 후손과 세워지는 것이다.
*주;-언약의 범위: 전 인류(창 11장까지)=>아브라함/이스라엘백성(물론 예외적인 이방인도 있었음)=>전 인류(신약)
제 15 장 언약의 중보자 중에서
그러나 소년때 그는 성전에서 이미 자신이 그의 아버지 집에 있어야 할 줄을 알았다(눅 2:49) 그 스스로 요한에 의해서 세례받기 전에 그는 그의 죄의 용서를 위해서 이를 필요로 했던 것이 아니고 범사에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기 위해서 받았음을 알고 있었다. 그때 이 세례는 예수님에 있어서 죄악된 과거와의 결별이 아니었다. 왜냐하면 그에게는 그런 과거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의 편에서는 아버지께서 그에게 하라고 맡기신 역사에 대한 완전한 복종과 헌신이었고, 하나님 편에서는 그 사역을 위한 전체 모든 준비요 채비였다.
요한은 이미 그를 메시야로 깨달았고 그날 이후로 그가 택하였던 제자들도 그렇게 깨달았다(요 1:29-52).
그러나 소위 이런 고백은 예비적인 것이었다. 그것은 메시야직의 본질에 관한 여러 가지 오류들을 수반하고 있었다. 제자들도 부지불식간에 그 당시 유대인들이 일반적으로 생각하였듯이, 메시야이신 예수님은 이방민족들과 싸워 이스라엘을 여러 나라들의 머리로 영화롭게 할 한 왕일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예수님이 나타나신후 이런 기대에 부합하지 않았을 때 세례요한조차도 의심으로 실족하였다.
(마11:2이하). 제자들도 매순간마다 예수님에 의해서 고쳐졌고 교정되었다. 유대적인 기대는 그들 영혼 속에 그렇게 깊이 새겨져있어서 부활후에도 예수님에게 그가 이제 이스라엘 나라를 회복할 것인지를 물었다.(행 1:6)
일반적으로 그의 제자들의 영역에서도 메시야직에 대해서 품고 있는 이런 잘못된 이해는 예수님으로 하여금 그의 설교에서 그에 대한 특별 교육적인 행동지향을 필연적이게 만들었다. 예수님은 공생애 초기에 그가 그리스도이시라는 말씀을 그렇게 많이 하지 않으셨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그의 선포내용은 하나님의 나라이고 그는 하나님 나라의 본성과 근원과 진행, 마지막에 대해서 광범위하게, 특히 뛰어난 비유로 해석하였다. 그리고 그의 사역은 백성중에 있는 여러 가지 질병을 고치는 긍휼의 사역들이었다. 이 역사들이 그에 대해서 증거하였고 그로부터 그의 제자들과 세례요한도 그가 누구시고 어떤 분이시며 그의 메시야적 성격이 무엇에 있는가를 깨달아야 했다.
아직은 강하게 그의 메세야직은 대중화될 수 없는 신비인 것 같았다. 종종 그의 역사가 그가 그리스도임을 생각하도록 하였으나, 그때 그는 이를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날카롭게 명하셨다(마 8:4; 9:30; 12:16; 막 1:34-43;3:12; 5:43; 7:36; 8:26; 눅 5:13). 참으로 그의 생애 마지막을 향하여 가는 시기에 제자들은 그에 대해서 더 잘 알게 되어 가이사랴 빌립보로 가는 도상에서 베드로의 입으로 그를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고백할 때까지도, 그는 그들에게 날카롭게 이를 아무에게도 알리지 말라고 명하셨다(마 16:20;막8:30)
예수님은 그리스도셨지만 그는 그때 유대인들이 생각하였던 것과는 다른 의미에서 메시야이셨다. 그는 그들의 기대와 일치되는 것을 원하지 않았고 그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그때 그는 적어도 강제로 끌려가 왕으로서 추대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그들을 피하셨다
(요 6:14,15). 그는 메시야이시지만 백성의 뜻과 기호에 조화되지 않았다. 그는 아버지의 뜻과 성정에 일치되고 구약의 예언에 일치되기를 원하셨다.
Q: 이 글을 보면서 하나님의 기대에 나를 맞추어가고 있습니까? 아니면 내 이기적인 기대에 하나님을 해결사로 끌어들이려 하십니까?
제 20장 소명 중에서
율법과 복음은 하나님의 말씀의 두 구성 부분이다. 두 가지는 서로 구별되지만 결코 분리되지는 않는다.
율법과 복음의 차이란 신약과 구약사이의 차이와는 전혀 다른 것이다.
구약과 신약이란 하나의 은혜언약 안에 두가지 연속된 경륜에 대한 명칭이요, 이에 따른 성경책의 두 그룹에 대한 명칭이다.
반면 율법과 복음의 차이는 같은 언약의 두 경륜을 표시하는 것이 아니라, 두가지 전혀 다른 언약을 표시한다.
율법은 본래 첫째 사람(아담)과 체결되었고 그에게 완전한 순종하에 영생을 약속하였던 소위 행위언약 안에 속한다.
그러나 복음은 타락후에 비로소 인간에게 알려졌고 그에게 은혜로부터 그리스도를 믿는 신앙으로 말미암아 영생을 주신다는
은혜언약에 대한 선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은혜언약은 행위언약의 폐기나 무효가 아니라, 그것의 완성이다. 둘 사이의 차이란 주로 그리스도께서 행위언약에 따라 하나님이 우리에게 요구하실 수 있는 그것을 우리 대신 이루셨다는 점에 있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영으로 말미암아 신자들안에 성취 될 수 있는 것이다.
율법이 은혜언약안에 그 자리를 보유하고 있는 것은, 그것을 지킴으로 영생을 얻도록 하기 위함이 아니니, 이는 육체에 따라서는 연약하여 그것을 행할 수 없기 때문이다.(롬 8:3). 그 목적은 첫째로 그것을 통하여 우리의 죄와 우리의 죄책, 우리의 곤비함, 우리의 무력함을 알리기 위함이고 죄책의식을 통하여 좌락(挫落)하고 절망상태에서 그리스도안에 있는 하나님의 은혜로 안식하기 위함이다.(롬 7:7; 갈 3:24). 둘째로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우리로 새 생명 가운데 행하게 하고 율법의 요구를 이루게 하기 위함이다(롬 6:4;8:4).
그렇기 때문에 기독교안에서는 반율법주의나 율법경시론이나 율법파기론은 그릇된 것이다. 율법과 복음은 성경에서와 마찬가지로 설교와 교훈, 교리와 생활에서도 서로 결합되어야 한다.
그러나 여기에서 그들을 완전히 일치시키는 것도 분래해 버리는 것만큼 나쁘다.
복음을 새로운 율법으로 변경시킨 율법주의 또한 율법파기론 못지 않은 잘못이다. 율법과 복음은 정도에 있어서 서로 구별되는 것이 아니고, 본질에 있어서 구별되는 것이다. 복음과 똑같이 율법은 하나님의 뜻을 내포하고 있고 그것은 거룩하며 지혜로우며 선하며 신령하다(롬2:18; 7:12, 14; 12:10)그러나 죄로 말미암아 연약하게 되었고 죄를 정당화하는 것이 아니라, 죄를 죄되게 하며 진노와 심판과 죽음을 야기시킨다(롬3:20; 4:15; 5:20; 7:5; 8:9, 13; 고후 3:6 이하; 갈 3:10, 13, 19). 복음은 그와 대조적이다. 그것은 그 내용이 그리스도시요, 오직 은혜와 화목과 용서와 칭의와 화평과 영생을 가져온다. 율법이 우리에게 요구하는 것을 복음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셨다.
제 21장 칭의에서
예레미야는 이것이 여호와의 전이라, 여호와의 전이라, 여호와의 전이라 하는 거짓말을 믿는 자들에게 대하여 여호와께서 내 이름으로 일컬음을 받고 그들이 그것에 의뢰하는 이 집에, 실로가 파괴됨 같이 행하겠다고 선포했다(7:14). 제사에 대해서 이스라엘중 경건한 자들은 이것들이 본질적으로 여호와를 기쁘시게 할 수 없음을 아주 잘 알고 있었다(시 40:9; 51:6). 선지자들의 입을 통해서 주께서 친히, 나는 수양의 번제와 살진 짐승의 기름에 배불렀고 나는 수송아지나 어린양이나 수염소의 피를 기뻐하지 아니하노라 하였다
(사 1:11; 66:2, 3; 렘 6:20; 호6:6; 암 5:21; 미6:6-8; 잠 15:8; 21:27 등).
그러면 혹시 구약 성도들에게 있어서 구원의 소망의 근거가 그들 자신의 의에 있었는가? 그들에게 미래에 대한 그런 훌륭한 소망이 있었던 것이, 그들의 선행을 가지고 하나님의 심판 앞에 설 수 있다고 생각하였기 때문인가?
우리가 보듯이 우리에게 순간적으로 다음과 같은 생각이 떠오를 수 있다. 즉 예를 들어 욥과 같은 그런 인물들은 자기들의 무죄성을 강하게 인정하고 있다는 것(욥29:12 이하;31:1 이하),계속 반복해서 그들은 자신들의 정직과 신실성에 의에 호소하고 있다는 것(시 7:9; 18:21, 22; 26:1, 11; 101:2; 35:24; 43:1; 사 40:27 등), 여호와께서 친히 그들을 의롭다고 생각하셨다는 것(창 7:1; 욥 1:7; 2:3)등이다. 그러나 우리가 오히려 더 깊이 통찰한다면 바로 이런 근거가 사라진다.
무엇보다 구약성도들에게 있어서 자신들의 의에 이렇게 호소하는 것은 그들의 죄에 대한 가장 겸손한 고백과 이어져 있다. 욥은 자기가 어렸을 때의 죄들에 대해서 말할 뿐만 아니라, 마지막에는 자신을 증오하고 티끌과 재 가운데서 회개하고 있다(욥 13:26; 42:6). 다윗이 시편 7:9에서 자신의 의에 대해서 말하였지만 다른 곳에서는 자신의 모든 의를 던져버리고 여호와앞에서 자신의 모든 죄악들을 고백하며 다만 죄 용서하심에 영광을 돌리고 있다(시 32:11). 다니엘은 그의 간구를 자신의 의에 의지하여 기도하는 것이 아니고 주의 큰 긍휼을 의지하여 기도하고 있다(단 9:18). 이사야 53:4-6; 59:12; 64:6에서 경건한 이스라엘 사람들은 그들의 의가 다 더러운 옷 같으며, 그들은 다 양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 그들의 모든 죄악을 그의 종에게 담당시키셨도다라고 하였다. 시편 130:3, 4에서 시인은 주께서 죄악을 감찰하실진대 아무도 주 앞에 설 수 없다고 한다.
이스라엘의 경건한 자들이 그들의 의에 대하여 말할 때는 오랜 후의 바리새인 율법주의자들이 말하는 그런 도덕적 완전성의 의미에서 의도된 것이 아니다. (바리새인, 사두개인등은 신구약의 중간기때 생긴 부류들임)
구약성도들도 하나님의 구원에 소망을 두고 그의 말씀에 착념하며 그의 율법안에서 즐거워하며 그에게서 모든 것을 기대한다.
(시18:3; 73:25, 26; 33:12; 95:7; 100:3 등)
그들은 바리새인들처럼 하나님을 대적하여 서서 자신들의 요구와 권리들을 주장하는 백성이 아니고 하나님편에 서서 그와 동조하여 그와 그들의 대적을 향하여 서 있는 백성들이었다.
제 22장 성화에서
거듭나지(중생) 못한 자들에게도 종종 어떤 싸움이 현존하고 있다는 사실도 관심을 가질 부분이다. 그러나 이것은 영적인 싸움은 아니고, 합리적인 싸움, 즉 한편에서는 인간 이성과 양심사이의 갈등이요, 다른 한편에서는 그의 의지와 욕망사이의 갈등이다. 그는 그의 이성을 가지고 정욕을 저지하고 억누르며 침묵을 지키게 할 수 있다. 그때 그는 용감하고 덕스러운 인간이 되고 존경할 만한 생을 이끌어간다. 그러나 그것은 참된 도덕성이 아니고 기독교에서 말하는 성화가 아니다.
왜냐하면 자연인 안에서의 싸움은 이성과 정욕, 의무와 욕망, 양심과 욕구사이의 계속된 갈등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모든 죄에 대해서 수행한 것이 아니고 그중 약간에 대해서이고, 대부분 소수의 밖으로 드러나고 격분되는 죄에 대해서만 수행한다. 세상에서 높이 비난되고 손실이나 부끄러움이 동반되는 소수의 죄에 대해서 수행할 뿐, 인간의 마음속에 내적인 변화를 야기하지는 못한다.
그러나, 신자들이 그들의 영혼속에 치루어야 할 영적 싸움은 전혀 다른 성격을 띠고 있다. 그것은 이성과 정욕의 싸움이 아니라, 육체와 영, 옛 사람과 새사람, 계속 신자들 속에 거하고 있는 죄와 그의 마음속에 심어진 신령한 생명의 원리사이의 싸움이다(롬 6:6, 7:14-26, 8:4-9; 갈 5:17-26; 엡 4:22-24; 골 3:9, 10).
하나님의 사랑이 온 마음을 충만히 채우면, 미움, 시기, 분냄등을 위한 공간이 더이상 용인될 수 없을 듯하다. 그러나 각자의 경험에서 알 수 있듯이 그렇지 않다. 성경은 우리가 이 세상에서 그런 것들로부터 완전케 되지 않음을 말한다. 끝까지 싸움이 계속된다.
죄악된 생각과 행위들은 옛사람에게만 고려되는 것이고 새사람에게는 그런 것들이 완전히 떨쳐진다는 생각은 유해하고 위험한 생각이다.
왜 끝까지 완전한 상태가 안되는가?=>
참으로 죄를 생각할 때 외부적인 죄악행위들을 생각할 뿐만 아니라, 내면적, 본성적 모든 악한 생각들과 경향들을 포함해 생각한다면, 이 생에서 신자들은 그것으로부터 완전히 해방될 수 있다고 누가 감히 심각하게 주장할 수 있는가?
제 22장 성화에서
복음안에 계시된 하나님의 의가 내용에 있어서는 율법에서 요구되는 의와 같지만, 전달방식에 있어서는 율법에서 요구되는 의와 구별되는 것처럼 복음적인 성화는 율법적인 성화와 엄격히 구별되고 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그리스도 안에서 의와 함께 완전한 거룩도 이미 부여해 주셨고, 성령의 중생시키고 새롭게 하는 역사를 통하여 내적으로 이를 우리에게 전달하심에 복음적 성화의 의미가 있다. 그러므로 성화도 하나님의 사역이요 의와 은혜의 사역이다. 성화는 하나님의 사역이지만 오히려 그 때문에 하나님의 능력안에서 신자 자신들도 더불어 일하는 사역이 되도록 의도되었다.
구약에서 한 곳에서는 여호와 자신이 그의 백성을 거룩히 한다 하고(출31:13, 레 20:8, 21:8 등), 한편으로는 백성자신이 자신을 거룩히 해야 함을 본다(레 11:44, 20:7, 민 11:18 등). 종종 읽는 것은 여호와께서 마음에 할례를 베푸셨다 하고(신 30:6), 다른 데서 또한 이스라엘 자신이 부름을 받아 그들 스스로 마음의 표피에 할례를 행하라 하고 있다(신 10:16, 렘 4:4),
그와 똑같이 신약에서도 성화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선물에 의해서 신자들이 거룩히 되는 성령의 사역으로써 나타나고 있다(요17:17, 고전 1:2, 살전 5:23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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