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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넬리우스 반틸의 변증학

by 【고동엽】 2018. 1. 4.

코넬리우스 반틸의 변증학

송영재 박사

 

제 1 장

 

변증학의 역할이 무엇인지 서론적으로 말하고, 다음시간부터 구체적 변증학 내용을 시작하도록 한다. 변증학은 영어로 apologetics 이다. 이는 헬라어 apologia 에서 나온 것이다. 달리 말하자면 ‘변호론’, ‘변증론’ 정도로 변증학의 용어가 사용되고 있다. apologetic – 변호하다, 혹은 defense 라는 뜻이다. 실제로 사도행전 22:1에 이 apologia라는 단어가 나온다. ‘부형들아 내가 지금 너희 앞에서 변명하는 말을 들으라 하더라’ 여기에서 이 변명하다라는 용어가 apologia 이다. 영어로는 defense 라고 나와있다. 내가 너희 앞에서 변호하는 defense 하는 말을 들으라는 것이다. 행 25:16에도 같은 단어를 쓰고 있다. ‘내가 대답하되 무릇 피고가 원고들 앞에서 고소 사건에 대하여 변명할 기회가 있기 전에 내어주는 것이 로마 사람의 법이 아니라 하였노라’ 라고 바울이 아그립바 왕과 버니게 앞에서 자기 자신을 변호하는 내용이다. 여기에서 법정용어로서 사도바울이 apologia 를 쓰고 있다.

 

기독변증학은 자기변명을 하는 것이 아니라, 복음을 변호, 변명, defend 하는 것이다. 그런 의미로 대략 그 정의를 내려볼 수 있다. 변증학에는 크게 두 가지 변증법이 있다고 볼 수 있는데. 한가지는 ‘실증적 변증법’이라는 것이 있다. 실증적 변증, 이것은 영어로 evidential apologetics 라고 한다. 실제로 증거를 댐으로써 변호하는 변증법이다. 이번에 우리가 다룰 변증법은 실증적 변증법이 아니고 ‘전제적 변증법’이다. 반틸의 변증법은 실증적인 접근이 아니라 ‘전제적 변증법’이다.

 

영어로‘전제적 변증’을 ‘presuppositional apologetic’이다. suppose 는 가정하다라는 뜻이다. 이 suppose 앞에 ~ 앞에라는 뜻의 ‘pre’를 붙이면 presuppose, 즉 전제하다라는 동사가 나온다. presuppose는 동사형이고 이를 형용사형으로 하면 presuppositional 이다. 그래서presuppositional apologetic 하게 되면 전제적 변증이라고 한다. 자, 실증적 변증법과 전제적 변증법의 차이가 무엇인가? 실증적 변증법은 증거를 대서 이성에 직접 호소하는 것이다. 전제적 변증법은 좀 다르다. 전제적 변증법은 이성에 호소하는 것이 아니라, 계시에 호소한다. 말씀에 호소한다. 다른 말로 하면, 계시를 의존하지 않고 이성에 직접 의존하는 것은 올바른 변증법이 될 수 없다고 주장하는 것이 전제적 변증법의 특징이다.

 

계시에 호소하지 않고, 이성에 직접 호소하는 것, 자연인의 자연 이성에 직접 호소하는 것은 올바른 성경적, 복음 변호의 방법론이 될 수 없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자연인의 자연 이성은 복음을 스스로, 자율적으로 판단할 수 있는 능력이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은혜를 받아서 그 은혜를 통해서 거듭난 이성이 계시의존적으로 사고할 때 비로소 복음을 깨달을 수 있고 하나님의 은혜를 깨달을 수 있는 것이지, 자율 이성이 스스로 진리를 판단할 수 있거나, 진리의 진위를 결정할 수 있는 자율권을 가지지 못했다고 하는 것이 전제적 변증법의 특징이다.

 

다르게 말한다면, 이렇게 설명할 수 있겠다. 실증적 변증법은 ‘성경으로의 추론이다,’라고 정의를 내릴 수 있다. 영어로 하면 ‘reason to the bible’ 이성에서 시작해서 성경으로 추론해 간다. 이성적으로 사고하기 시작해서 이성으로 복음을 판단하고 이성으로 복음에 대해 설명하고 . 어느 정도 이성으로 설명이 되었을 때에 성경으로 들어간다는 것이다. 일단, 불신자와 신자 사이에 이성적인 공유지대를 설정해 놓고, 그 다음에 어느 정도 이성적으로 대화가 소통이 되었을 때 그 다음에 성경적으로 돌아간다. 성경으로 추론한다는 것이 그것이다.

 

그러나 전제적 변증법은 그렇지 않다. 전제적 변증법은 ‘성경으로부터’ 추론이다. 그래서, ‘reason from the bible’ 인 것이다. 확연한 차이를 가지고 있다. ‘reason to the bible’. ‘to’ 가 중요하다. 성경으로 추론한다. 먼저 이성적으로 공통분모를 찾은 다음에 성경으로 들어간다. 먼저 직접 성경으로 들어가면 이해 못하니까, 합리적으로 먼저 합의를 이룬 다음에 변증한다는 것이 실증적 변증이고. 전제적 변증은 ‘reason from the Bible’, 성경으로부터 추론한다.

 

죄 가운데에서 죽은 자연인의 이성이 어떻게 이성으로 진리를 자율적으로 판단할 수 있는 능력이 있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가 불신자와 추론하는 것은 불신자의 자율이성, 그리고 자연이성과 어떤 공통분모를 찾아서, 공유지대를 찾아서 서로 합의를 보기 위해서 추론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성경의 진리를 그에게 직접 제시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성령께서 그 말씀을 가지고 성령께서 그 말씀을 통해서 역사하시도록 한다. 죄와 허물 가운데 자연인은 영적으로 죽은 이성을 가지고 있는데, 어떻게 성경 없이, 계시에 의존하지 않고 스스로 진리의 말씀을 판단하도록 우리가 맡길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먼저 성경의 진리를 먼저 전하고, 그 다음에 성령께서 그 계시의 말씀을 통해 역사하시도록 하는 것, 그렇게 접근하는 것이 성경으로부터의 추론이다. 그래서 둘 다 아주 비슷한 용어이지만 이 두 가지 개념 사이에는 엄청난 차이가 있다. 여기에는 어떤 이슈가 하나, 중대한 이슈가 걸려있다. 바로 계시와 이성을 어떤 관계성 속에서 보는가 이다. 계시의 역할과 이성의 역할, 그리고 그 관계성은 무엇인가? 라는 아주 중대한 이슈가 걸려있다. 성경으로 추론할 것인가? 아니면 성경으로부터 추론할 것인가?

 

우리가 진리를 판별하는데 있어서 계시라는 것과 이성이라는 것이 있다. 둘 다 필요하다. 그런데, 어떤 관계성 속에서 우리가 이 두 가지의 필요성을 정리하는 것이 이 복음의 변증에 있어서, apologia 에 있어서 아주 중대한 사안인 것이다. 어떤 관계성으로 이성과 계시가 존재하며, 어떤 등식으로 우리가 그 관계성을 설정하고 변증할 것인가, 복음을 전할것인가의 문제가 여기 걸려있다.

 

변증학의 위치가 어디인가? 신약에서 조직신학과 변증학의 관계가 무엇인가로 우리가 문제를 제기할 수 있다. 이점에 있어서, 두 학자의 상반된 학설이 있는데, 아브라함 카이퍼라는 학자의 학설이 있고, .B.B. 워필드라는 사람의 학설이 있다. 워필드는 변증학에 있어서는 실증적 변증학 노선을 따라갔고, 아브라함 카이퍼는 전제적 노선을 따라간 사람이다.

 

변증학과 조직신학의 관계가 무엇인가? 워필드는 변증학은 조직신학을 하기 전에 먼저 조직신학의 당위성을 이성적으로, 준비작업으로 설정하는 그런 학문이다라고 얘기했다. 조직신학은 계시의 말씀에 의한 학문이다 우리가 성경말씀을 가지고 조직신학을 한다. 그러나 조직신학은 이미 하나님의 말씀을 계시의 말씀으로 인정한 사람들이 추구하는 학문이지 하나님의 말씀으로 계시의 말씀을 인정하지 않은 사람들에게는 어필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조직신학을 하기 전에 먼저 이성적으로 조직신학을 하기 위해서 이성적으로 준비작업으로 하고 그 다음에 조직신학을 할 수 있는 입문으로 들어가는 것, 그런 입문 역할을 하는 것이 변증학이라고 했다.

 

그는 두 단계로 생각한 것이다. 입문의 단계가 있은 후에 그 다음에 어느 정도 신의 존재, 인간의 죄, 구원의 문제, 영적 문제들에 대해서 불신자와 신자 사이에 공유할 수 있는, 합리적인 서로의 공통분모를 찾은 이후에, 그 다음에서야 조직신학으로 들어가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야 조직신학을 논할 수 있고, 그렇지 않고는 직접 신의 문제, 종말론의 문제, 등의 것들을 논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렇게 두 단계로 생각한 것이 워필드의 이론이다. 그림으로 이해하자면 (아래 그림 참조)아래층에 이성이 있고, 그 위에 계시를 쌓은 것이다. 바로 이성의 부분이 변증학이다라고 한 것이고 위에 얹은 계시가 조직신학이다라고 한 것이다. 이런 식으로 접근 한 것이 바로 워필드식의 변증학 노선이다.

 

 

그런데 아브라함 카이퍼는 - 반틸에게 가장 영향을 많이 미친 사람 – ‘변증학의 역할은 그런 것이 아니다. 조직신학의 입문이 아니다. 변증학은 조직신학 그 자체의 당위성을 변증하는 것이다. 조직신학 그 자체를 계시의 관점에서 제시하는 것이다. 조직신학 그 자체를 가지고 제시하는 것이지, 조직신학에 입문하기 위해 준비작업의 과정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이성을 가지고 준비하는 것이 아니다. ’ 라고 주장한다. 오히려 이보다는 계시 속에 이성이 포함되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이성이라는 것은 항상 계시에 의해서, 계시 의존적 역할을 하는 것 뿐이지, 계시에 앞서서 계시의 징검다리 역할을 하는, 계시로 들어가기 전에 하나의 입문코스로서 준비하는 역할을 하는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이성이라는 것은 성경적으로 볼 때 죽었던지, 살았던지, 죄 가운데 죽었던지, 아니면 은혜로 살던지 둘 중의 하나이다. 그러므로 은혜를 받은 이성은 계시를 인정하고 수납하고, 그 계시를 계시의 관점에서 합리적으로 설명하고 그것을 변호하는 도구로 쓰임 받는 것이지 계시 없이 이성이 자율적으로 어떤 활동을 하다가 안되면, 어떤 한계점에 도달했을 때 계시를 동원하는 형태로 사용되어지는 관계, 그런 관계 설정은 안된다는 것이다. 계시와 이성의 관계성을 어떻게 설정하고 시작하느냐가 중대한 사안이다. 워필드의 방법을 택할 것이냐, 아니면 카이퍼의 방법을 택할 것이냐의 문제이다. 워필드의 방법은 지금까지 로마카톨릭에서 사용해왔다. 그 대표적 학자가 토마스 아퀴나스이다. 토마스 아퀴나스의 ‘대이교도론(Contra Gentiles)’이라는 책이 있다. ‘이교도들을 향해 우리가 어떻게 복음을 전할 것인가?’를 논한다. 먼저 이교도들과 이성적으로 합일점을 찾아서, 그 다음에 계시를 동원해서 계시를 추가하면 그 다음에 복음제시가 될 것이다.

 

그 외에, 지금까지 복음적 변증법이라고 인정되어왔던 고전적 변증법들(classical apologetics)이, 역시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기본적으로 워필드의 접근방식을 취했다. 그런데 반틸이 주장한 것은 이런 변증 자체에 문제가 있다는 것이다. 성경은 이런 식으로 복음을 전하지도, 성경의 인물들이 이런 식으로 복음을 변증하지도 않았다는 것이다.

 

더구나 칼빈주의적 입장에서 볼 때, 그는 전혀 이런 방식으로 복음을 증거하지 않았다. 칼빈의 전적 은혜론에 근거해서 볼 때, 우리 인간은 자유의지나 자유이성을 가지고 있지 않다. 거듭나기 이전에 우리에게는 이런 것들이 없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고서는 우리의 이성이 자율적 능력을 사용해서 계시를 도마 위에 올려놓고 이성이 계시를 판단할 자율권을 불신자들은 가지고 있지 않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말씀을 제쳐놓고 일반적 공통분모에서 불신자들과 공통분모를 형성한 후 계시에로 그들을 이끌어온다는 것은 말이 안된다. 이것은 하나님의 주권, 은혜에 대한 모독이다. 그러므로 이성은 계시 안에 포함된 역할을 하지 계시와 협력적 관계가 아니다. 이성은 은혜와 협력해서 사용되어지는 기능을 가지는 것이 아니라 은혜 안에 있던지, 은혜 밖에 있던지 둘 중 하나이다. 은혜 안에 있으면 거듭난 이성이고, 밖에 있으면 죽은 이성인 것이다.

 

그러므로 죽은 이성에게는 죽은 이성으로 대하라는 것이다. 죽은 이성을 살은 이성으로 대하지 말라는 것이다. 이는 그럴듯하게 보이는 변증학적 방법론이지만 하나님의 전적 주권을 모독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전자의 경우에 있어서는 계시가 이성에 추가되는 것이다. 더해지는 것이다. 그러니까 은혜가 이성 위에 더해지는 것이다. 분명히 뭔가 잘못된 것이다. 직관적으로 우리는 알 수 있다. 은혜가 이성위에 더해진다는 것은 뭔가 잘못된 것이다.

 

은혜를 대수적 시각으로 보는 것이다. 이것은 더하는 것, 이성에 추가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전제적 변증의 시각으로 보면, 은혜는 대수적 성격을 가지는 것이 아니라 함수적 성격을 가지는 것이다. 은혜가 있음으로 인해서 이성이 제 기능을 하느냐 못하느냐의 결정이 된다. 은혜가 있으면 이성이 제 기능을 하는 것이고, 없으면 제 기능을 못하는 것이다. 함수적인 이성의 성공과 실패를 결정하는 함수적 성격을 가지는 것이 은혜이다. 그러나 위의 것은 대수적 것이다. 어느정도까지 이성이 그 역할을 하고 , 그 위에 은혜가 더해지는 것이다. 이 말들이 계속해서 되풀이 되어질 것이다. 기억 해야 할 key point는 이 은혜가 이성 위에 더해지는 대수적 성격을 갖는다, 워필드 체계 속에서는. 그러나 우리가 주장하는 반틸의 전제주의적 변증학 체계 속에서는 이성의 성공과 실패를, 이성의 기능을 결정하는 키를 가지고 있는 것이 바로 은혜이다. 은혜가 함수적 성격을 갖는다. 이것이 모든 것을 결정한다.

 

점차 세부적으로 다룰 테지만, 이런 그림을 일단 머릿속에 그려보고, 넣고 있어야 한다.

 

 

변증학의 목적이 무엇인가? 기독교 변증학의 목적이 무엇이냐 하는 문제로 다시 돌아가면, 과연 신자와 불신자, 기독교와 비기독교, 진리와 비 진리 사이에 이성적 공통분모를 설정하는 것이 변증학의 목적이냐, 아니면 불신앙의 자기 모순을 폭로하는 것이 변증학의 목적이냐?

 

아담이 하나님을 떠났을 때, 아담이 하나님에게 불순종했을 때, 인간이 하나님처럼 되려 했을 때, 인간은 하나님이 되지 못할 뿐 아니라, 인간 이하로 전락했다는 것이 성경의 진리이다. 이것이 죄의 모순이다. 사람이 하나님처럼 되려 했을 때, 그 결과는 무엇인가? 결국 사단이 아담과 하와를 유혹했을 때, 하나님처럼 될 수 있다고 유혹했다. 그 유혹의 key point는, 동기는 바로 ‘하나님처럼 될 수 있다’는 것이다. 하나님처럼 되려고 했을 때, 인간이 그렇게 되지 못한 것은 당연한 것이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이 창조하신 그 인간 이하로 전락했다. 이것이 죄의 결과이다. 다시 말해, 하나님처럼 되려고 했는데 되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이 창조하신, 창조시의 인간보다 못한 인간으로 전락했다는 것, 그런 고로 인간이 회의에 빠지고, 죄의 길로 가게 되고, 회의에 빠지게 된다는 것, 파괴적 길로 가게 된다는 것이 바로 성경의 가르침이다.

 

 

여기에는 엄청난 자기모순이 있다. 죄라는 것은 엄청난 자기모순이 있다. 하나님처럼 되려 했을 때, 하나님처럼 되지 못했을 뿐 아니라 참다운 인간이 되지 못하는 것, 하나님이 처음 창조하셨던 인간보다 훨씬 못한, 아주 낮은, 아주 허무하고 절망적인 파괴적인 길로 갈 수 밖에 없는 모순이다. 변증학이 무엇인가로 다시 돌아왔을 때, 변증학이 불신앙의 자기 이성을 존중해서, 존대해서 마치 신앙과 불신앙 사이에 어떤 회색지대가 있는 것처럼 인정해서 , 그 회색지대 안에 들어가면 마치 신자와 불신자가 하나님의 계시 없이, 은혜 없이 어떤 합일을 이루어낼 수 있는 회색지대가 있는 것처럼, 그 회색지대를 찾아낸 다음에, 그 지대에서 합일이 되면 하나님의 계시를 더하는 것, 이것이 변증학의 목적인가? 아니면 변증학의 목적은 인간의 죄악의 자체적인 모순을 폭로함으로 인해서 인간이 하나님의 계시에 전적으로 의존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것을 설득하는 것이 변증학의 목적인가?

 

이랬을 때, 아브라함 카이퍼나 반틸은 후자의 선택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변증학의 진정한 목적은 인간의 자체적 모순을 폭로함으로 인간이 하나님의 계시에 절대적으로 의존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결론을 도출하는 것이다.이것이 불신자와 신자 사이에 상당한 갈등, 충돌을 일으키지만, 이것이 성경에 충실하며 하나님께 충실하고, 변증학에 충실한 것이다. 우리가 사람을 기쁘게 하려면 먼저 이성적으로 접근 해야 한다. 그러나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방법은 모순적인 부분들을 드러내서, 인간이 전제하고 있는 전제 자체가 얼마나 자체적으로 모순이 있는지를 폭로하고, 그 전제가 일관성이 없음을 폭로함으로써 , 그를 통해 성령이 역사하시도록 하는 것이다. 이것이 하나님께 충실하며 성경에 충실하고, 칼빈주의 신학을 지향하는 입장에서 바른 변증법이며 바른 변증학이다.

 

 

 

고전 2:14 을 보면, ‘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을 받지 아니하나니 저희에게는 미련하게 보임이요 또 깨닫지도 못하나니 이런 일은 영적으로라야 분변 함이니라’ 라고 말한다. 즉, 이에 따르면, 불신자와 신자 사이에, 어둠과 빛 사이에 죄와 의로움 사이에 어떤 회색지대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만약 우리가 이성만 가지고 계시 없이도 어느 정도의 합리적인 방법으로 하나님의 존재에 대해서, 구원, 영생, 인간에 대해 어느 정도 파악할 수 있다고 한다면, 계시를 가지고, 은혜가 어느 정도 배제된 상태에서 이성만 가지고 영적인 것을 분별할 수 있다고 한다면, 그 다음에 문제가 되는 것은 어느 정도까지인가? 하는 것이다.

 

 

어느 정도까지 이성이 영적인 것을 분별할 수 있고, 어느 선에서 하나님의 은혜의 영역인가? 하는 문제가 대두된다. 문제는 그것을 ‘누가’ 결정하느냐 하는 것이다. 그 ‘어디까지’를 말할 수 있는 사람이 누구인가? 하는 것이다. 목사가 말할 수 있는가? 교황이 가능한가? 사람마다 이 부분은 다르다. 어떤 사람은 이성이 90, 은혜가 10이고 다른 사람은 80대 10이고, 어떤 사람은 이성 10, 하나님 90 이다. 다들 틀린 공식을 가지고 있다. 하나님의 은혜는 이런 방식으로 절대로 설정될 수 없다. 궁극적으로 은혜를 이성에 맡겼다가는 하나님의 은혜의 역할을 어디까지 은혜의 역할인지를 이성에게 맡기면 결국 이성에 잠식되어버린다. 역사가 이를 증명해준다. 이성의 판단에 맡긴다면 은혜는 이성의 밥이 된다. 절대로 은혜는 이성에 맡기면 안된다. 이성이 은혜 안에 들어오고 , 이성이 계시 안에 포함되어야만 한다.

 

 

여기 함수적인 관계에서는 그런 문제는 생기지 않는다. 은혜가 없으면 아무것도 못한다. 육에 속한 자는 은혜가 없으면 아무것도 깨달을 수 없다. 물론 직관적으로 어렴풋이 그 안에, 하나님의 창조에 의해서 하나님을 알 만한 것들이 인간들 안에 있다. 분명히 그런 부분이 있다. 직관적으로 하나님을 찾는 부분이 있다. 그러므로 핑계치 못한다고 사도바울은 말한다. 그 핑계치 못하는 부분을 하나님이 남겨두셨다. 이 부분은 나중에 다시 논하기로 하고, 일단은 여기에서는 윤리적이고 합리적인 부분을 말하는 것이다. 인간은 불의로 진리를 막아버린다. suppress 한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이성적 층에서, 윤리적 층에서는 육신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막아버린다. 그리고 모른다고 부정하고, 거절하고, 불순종한다. 그러므로 여기에서는 거듭나던지, 거듭나지 못하던지, 둘 중의 하나이다. 성령의 사람이 되던지 육에 속한 사람이 되던지 둘 중의 하나이다.

 

그러나 워필드의 방법은 30정도를 자율, 70정도를 은혜에 의존해도 되는 것이다. 이런 방법으로 하게 된다면, 30이 거듭나고 70이 거듭나지 않게 되면 모순이 되는 것이다. 성경은 분명히 영의 사람으로 거듭나던지, 육의 사람으로 있던 지를 말한다. 우리가 이런 식으로 계시와 이성의 영역을 분리시키면 , 그렇게 되면 극단적 양상으로 치닫게 된다. 한편으로는 오로지 이성에 호소하는 자연신학이 발생하게 된다. (natural theology) 자연 신학. 극단적인 양상을 띠게 되는데, 이성을 호소하는 자연신학으로 가던지, 이성을 초월, 비약해서 이성으로는 아무것도 알 수 없다. 이성을 통해서는 사변적으로 간다는 것, 그래서 이런 부분들을 거부하고, 위쪽으로 도약해서 직관에 호소하는 초자연적인 신학으로 가버리는 것이다. 그래서 기독교 신학 역사를 우리가 검토해 보면, 결국에는 시계추가 자연신학과 초자연 신학으로 가던지, 오락가락한다. 자연신학으로 가면 아주 사변적으로 가고, 반대편으로 가면 말씀을 중시하는 것이 아니라 말씀도 이성이 있어야 보는 것인데, 이성을 완전히 포기하면 말씀도 보지 않고 직관의 영역으로 뛰어버린다.

 

초자연적 신학으로 가게 되면 직관에 호소하는 신학으로 가게 된다. 결국 기독교 역사는 이 두 가지 양상으로 설명될 수 있다. 이성에 호소하는 자연주의 신학으로 가던지, 직관에 호소하는 초월주의 신학이 되던지. 철학적 양상을 띌 수 도 있고, 종교적 양상을 띌 수 있다. 초월주의 적으로 가면 철학적 양상을 띄게 되면 기독교 실존주의가 나오게 된다. 하나님의 계시를 직관과 통찰에 의해서, 이 양자에 중점을 두고 종교적 양상으로 가게 되면 신비주의가 된다. 근대주의, 모더니즘, 근대사상은 이성에 호소하는 종교가 지배했던 것이다. 데카르트의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 라는 모토가 수백 년을 지배했다. 종교도 신앙도 이성에 호소하고 이성을 중심으로 나가는 세대였다.

 

지금은 후기 근대라고 한다. 포스트 모더니즘 시대이다. 이 후기 근대는 이제 그 시계추가 반대로 움직인다. 이 시대의 특징은 ‘탈 이성’이다. 모든 종교나 사상이 직관과 통찰에 의지하는 식으로 나가고 있다. 이것이 지금 중요하게 생각해야 할 것은 무엇이냐 하면, 모던 사상은, 모던 사상의 대표적 개념은 구성, construction 이다. 구성이라는 말 속에는 어떤 ‘합리성’ ‘기계적인’ ‘조직적인’ 등의 개념이 포함된다. construction 이란 말은 기계적이다. 이는 근대사상의 특징이다. 이런 사상적 영향 속에서 신학도 역시 굉장히 조직적이고 구속적이고 체계적인 신학이 발달하게 되었다. 그래서 구성, 구조가 중요하다.

 

그런데 요즘에 와서는 (후기 근대), 이런 방향이 반대로 흘러간다. 그래서 deconstruction 즉, 탈 구성, 구성을 탈피함, 탈 구조. 뭐든지 구성을 탈피하는 쪽으로 흘러간다. 그래서 직관과 통찰에 의존하고 구성적인 것을 거부한다. 그래서 후기 근대에 와서 사람들이 굉장히 성향이 탈구성적 성향으로 우리도 모르게 변한다. 사람들의 신학적 성향도, 신학도, 종교도 이렇게 변한다. 구조적이거나 구성적인 것 싫어한다. 느끼는 것 좋아하고, 직관적으로 보고 깨닫는 것을 좋아한다. 이것이 탈 근대의 특징이다. 근래에 조직신학이 인기를 잃어가는 이유중의 하나가 바로 이런 후기 근대적 학문적 풍토에 분명히 영향이 있다. 딱딱하고 너무 기계적이고 조직적인 것을 싫어하기 때문이다. 신학교육도 점점 이런 방향으로 흘러간다. 요는 이런 방향으로 흘러갔을 때, 자연신학으로 가던 아니면 그 반대로 가던, 여기에는 해답이 없다는 것이다. 이러한 구도에서는 서로 반작용만 계속해서 일어나게 된다.

 

며칠 전에 책방에서 노자의 ‘도덕경’이 눈에 들어왔다. 선반에서 보고, 눈길을 끌기에 가까이 가서 보니까, 겉 페이지에 문구가 하나 씌어있었다. 그 책을 대표하는 문구라고 할 수 있는데, ‘도라고 말할 수 있는 도는 도가 아니다’ 라고 씌어있었다. 굉장히 매력적이다. 굉장히 끌린다. 그것에 끌리는 사람은 이 후기 근대 성향을 많이 가진 사람이다. 그 책을 펴봤다. 한 마디로 알 수 있다. 그 도덕경의 내용이 무엇인지. 지금 신학도 그런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다. 노자는 수 천년 전의 사람인데, 그때나 지금이나 사람은 변하지 않은 것이다. 지금의 신학도 ‘진리라 말할 수 있는 것은 진리가 아니다’라고 한다. 그런 신학이 있다. 이미 우리가 진리라고 정의 내렸을 때 그것은 이미 진리가 아닌 것이다. 도라고 하는 것은 직관과 통찰을 통해서 나에게 깨달음으로 와야지, 도라고 하는 것이 말로 설명되어진다면 그것은 도가 아니라는 것이다.

 

만일에 기독교 진리가 진리라 말할 수 있는 것은 진리가 아니라고 한다면, 우리에게 성경은 필요가 없다. 성경을 믿는 다는 것은 하나님의 계시를 우리의 언어로 체계화 시킬 수 있고, 또 명제로 만들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주는 것이다. 하나님의 사랑이 무엇인지 아주 명제적이고 체계적인 말씀을 우리에게 주신 것이다. 그래서 우리가 배우고, 가르치고, 전하는 것이다. 만일 그렇지 않다면, 우리는 이 자리에서 신학을 공부할 필요가 없다. 단지 수도원, 기도원에 들어가서 수도만 하면 된다. 깨닫는다는 것은 종교에 다 통한다. 불교의 열반도 다 깨닫는 것이다. 기독교도 그렇게 생각한다면 종교다원주의가 나온다. 후기 근대의 성향을 가졌기 때문에 종교다원주의가 되는 것이다. 기독교의 유일성이 의미가 없어진다. 그저 깨닫고 느끼면 되는 것이다.

 

계시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은 이미 계시가 아니다. 기독교 실존주의 , 칼 바르트의 신정통주의는 다 비슷한 점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이 construction 방향으로만 나아가도 안된다. 그렇게 되면 신학이 너무 사변적으로 흐른다. 그래서 조직신학은 사변적으로 하면 안된다. 합리성은 가지고 있어야만 한다. 합리성 없는 신학을 해서는 안된다. 설교를 할 때, 설교가 너무 사변적으로 가면 은혜를 못 받는다. 그러나 합리성이 빠지면 은혜를 못 받는다. 무슨 말인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우리가 이성에 호소하는 쪽으로 나아가게 되면 너무 사변적으로 나가게 된다. 그러나 너무 지나치게 직관에 호소하는 쪽으로 나가면 그런 신학도 문제가 있는 것이다. 우리가 영성 운동을 하고 영성 신학, 영성 목회를 하고, 그런 종류의 말들이 난무하는 것을 볼 수 있는데, 그런 것들이 만일 이런 후기근대 의미에서의 영성 신학이나 목회를 말한다면 그런 것들은 문제가 있는 것이다.

 

영성이라고 하는 것이 이런 의미에서 사변을 탈피하기 위해 직관과 통찰을 추구하는 영성을 추구하는, 그런 것이라면, 그 근본 구도가 바뀌지 않는 한은 초월주의로 가버리게 된다. 그러므로 사변적 입장으로 지나치는 것도 문제가 있고, 또, 지나치게 후기 근대적 성향의 신학을 하는 도 반틸의 입장에서는 문제가 있는 것이다. 본래부터 계시와 이성의 관계를 어떻게 설정하느냐에 따라서 이런 문제들이 발생하는 것이다. 그 뿌리를 캐내지 않으면 우리는 문제의식을 가질 수 없다. 그냥 현상적으로 우리가 반응하는 것이다. 이전세대가 지나치게 사변적이었으면 경건주의로 빠지고, 이전세대가 지나치게 초월주의였으면 이 세대는 지성주의적으로 빠지게 되는 것이다. 이런 것은 근본적인 문제를 발견하는 것이 아니다. 단지 시대 상황에 반응하는 것일 따름이다. 그저 반응만 해서는 안된다. 왜 이런 문제들이 생겼는지에 대한 문제 제기가 있어야만 한다.

 

반틸의 입장에서는 이 과거의 기독교 변증가들이 이런 방식으로 계시와 이성의 관계성을 설정해 놨기 때문에, 이걸 따라가다 보니까 이런 식으로 될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계시를 이성의 협력관계 속에서 봐서는 안되고, 계시에 의해서 이성의 역할이 결정되는 함수관계로 봐야 한다고 했다. 그래서 계시와 이성의 관계가 대수적인 관계, 추가적 관계가 아니라 함수관계로 설정 되어질 때, 거기서 올바른 변증법과 신학이 발전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이것이 바로 전제적 변증법의 특징이다.

 

 

 

 

제 2 장

 

이번 시간에는 존재론, 인식론, 윤리론 세가지를 다루도록 한다.

 

어떻게 인간이 존재론과 인식론과 윤리론에서 하나님을 떠났을 때, 인간이 출발한 출발점과 또 자기가 도달한 결과가 서로 모순된, 상반된 전제와 결과를 낳게 되는지 그 문제를 돌아보도록 한다. 이미 언급한 것처럼, 인간은 하나님처럼 되고 싶은 욕심에서 출발했다. 그러니까, 자신이 절대존재라는 출발점에서 시작했다. 창세기에서 보면, 피조물인 인간이 절대존재에 대한 욕심을 가지고 출발했다가 하나님을 떠나서, 자기 존재가 인간 이하의 존재로 전락했다. 절대 존재로 출발했는데, 절대존재는커녕, 인간 이하의 짐승 같은 모습으로 살아가는 존재가 되었다.

 

이 존재의 문제가 중요하다. 반틸의 입장에서는 먼저 존재론부터 다뤄야 한다고 보았다. 일반적으로 보통 일반 학문에서 존재론을 다룰 때, ‘나는 어떻게 존재하는가?’에 대한 질문으로 출발한다. ‘나는 어떤 양식으로 존재하는가?’라는 질문에서 출발한다. 몸은 있지만, 과연 나라는 존재는 어떻게 존재하는가? 몸, 머리, 가슴 다 뜯어보더라도 나라는 존재는 없다. 물론 몸은 있지만 ‘나’라는 진정한 본질적 의미에서의 존재가 과연 어디에 있으며 어떤 양식으로 존재하는가? 그런 질문을 던지게 된다. 그런데 기독교 존재론의 관점에서 볼 때, 이 질문보다 더 중요한 문제는 ‘과연 인간이 존재하느냐’ 의 문제이다. 인간이 과연 누구를 통해서 생겨났느냐 하는 문제, 이것이 보다 근본적인 문제인 것이다. 더 중요한 것은 ‘누굴 위해 존재하느냐’ 하는 것이다.

 

그래서 어떻게 존재하느냐, 즉 ‘how’ 의 문제는 ‘무엇을 위해’ 존재하느냐의 목적을 이미 가졌을 때, 그런 전제 위에서 ‘how’ 라는 질문이 그 다음에 따라오는 것이다. 반틸의 입장에서 볼 때 하나님 떠난 우리 죄인들이 가지는 ‘나는 어떻게 존재하는가’라는 질문은 잘못된 것이다. 그것은 이미 자기가 절대존재라는 것을 무의식적으로 전제하고 던지는 질문인 것이다. 그랬을 때 결과는 뻔하다. 인간은 인간 이하의 모습으로 전락했다. 인간은 죄인인 것이다. 고로 기독교 전제에서는 ‘과연 나는 누구를 위해 존재하는가’ 에서 출발해야 한다. 하나님의 입장에서 자기의 위치를 찾았을 때에만 인간은 비로소 인간다워질 수 있다는 것이다. 이 부분이 존재론에서 매우 중요하다.

 

 

‘존재일반’ – 일반사람들이 말하는 존재론 – 관점에서 볼 때, 질문은 ‘나는 어떻게 존재하는가’이다. ‘영혼이란 무엇인가? 정신은 무엇인가? 정신분석학, 영혼분석학, 혼합분석 등, 분석을 통해서 인간의 존재 양식을 분석, 연구한다. 그런데 반틸의 입장에서 보면, 이는 근본적으로 잘못되었다는 것이다. 이 질문들은 누굴 위해 존재한다는 절대론적 질문, 가장 근본적인 질문을 묻지 않고 이런 질문들을 물었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인간은 절대존재라는 자기의 전제 속에서 결국 인간 이하의 존재로 전락할 수 밖에 없다. 전제와 결과 사이의 모순을 피할 수 없다. 그래서 기독교 전제에서는, 이 질문 전에 ‘나는 누굴 위해 존재하는가?’ 라고 하는 질문이 선행된다. 그런 후에서야 인간이 자기 절대 존재라는 착각 속에서 빠져나올 수 있고, 그럼으로 인해서 본래 자기의 실체, 창조된 본래의 모습을, 인간다운 모습을 찾을 수 있다.

 

마찬가지로 인식론도 같은 선상에서의 문제 이다. 인식론은 지식의 문제를 다룬다. 지식일반에서는 먼저 ‘나는 어떻게 알 수 있는가?’ 라는 질문을 던진다. 반틸 입장에서 이것도 질문이 잘못되었다. 이것은 이미 인간이 무엇을 알 수 있다는 것을 전제로 하고 묻는 질문이기 때문이다. 이는 인간이 절대지식을 가질 수 있다는 것을 전제로 하고 묻는 것이다. 그런 전제 위에서 방법론적 질문이 대두된 것이다. 그래서 반틸의 입장에서 보는 기독교 인식론에서는, 이 전제가 잘못되었기 때문에, 이 질문에 담긴 전제가 잘못된 전제, ‘인간은 절대지식을 가질 수 있다’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반틸의 입장에서 ‘나는 무엇을 알 수 있는가?’의 문제에서 출발한다. ‘무엇’의 문제에 먼저 출발점을 두어야만 비로소 ‘절대지식’이라는 자기 착각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것이다. 어떻게 알 수 있느냐의 질문전에, 인간은 여러가지 방법론들을 제시할 수 있다. 직관적, 창의적, 경험론적, 지식론적로 등, 여러 가지 방법론들이 역사를 통해서 학문적으로 엮어졌었다. 그러나 ‘어떻게’ 라는 문제 이전에 선행되어야 할 것은 ‘나는 과연 무엇을 알 수 있는가’이다. 여기에서 중요한 것이 바로 ‘계시론’이다.

 

‘하나님이 계시한 것을 나는 알 수 있다’라는 전제에서 출발해야만 우리는 올바른 지식을 알 수 있다. 그럼으로 인해서 인간이 자기가 절대적인 윤리의 주체가 될 수 없다는 것을 비로소 깨닫고, 누굴 위해 무엇을 위해 산다는 것을 자기가 깨달을 때, 절대윤리라는 자기 착각 속에서 벗어나서 자기 스스로 하나님의 기준과 하나님의 윤리적 지시에 의존하면서 살 수 밖에 없다는 것을, 선의 기준을 자기가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결정해 주시는 대로 거기에 의존해서 살아가는 존재라는 것을 여기서 깨달을 수 있게 된다. 여기에 무엇이 전제되었는가? 절대 전제라는 것, 절대 지식이라는 것, 절대 윤리라는 것이 전제되었다

 

 

출발은 절대전제로 출발했는데, 자기의 모습을 보니까 인간 이하로 전락했다. 출발은 절대 지식으로 출발했는데 결국은 불합리주의에 빠지게 되었다. 실재로 모든 것을 알 수 있다고, 하나님을 떠나서 모든 것을 알 수 있다고 전제하고 인식론적 자신감에서 출발했는데, 결과적으로 알게 된 것은 모두 파편적인 것이고 진정한 의미에서 보편적인 것이 아니었다는 것이다. 하나님을 떠나서 추구하는 모든 지식은 그런 것이다. 과학이라는 것도, 학문이라는 것도 다 그런 것이다. 모두 현상론적인 것을 말할 뿐이지, 그 의미에 대해서는 아무런 말을 할 수 없다. 그래서 처음에는 절대 지식으로 출발했는데, 결과적으로는 회의론에 빠지게 된 것이다. 그래서 근대사상에서는 인간이 절대지식이라는 착각에 빠져있었다. 그런데 후기 근대에 와서는 모든 학문의 방향이 회의적이고 불가지론적인 입장, 결론 내릴 수 없고, 알 수 없다는 쪽으로 흘러간다.

 

마찬가지로, 인간은 절대윤리를 주장 했어서, 하나님 없이도 절대적 의를 도달하고 이룰 수 있다고 생각했는데, 결과적으로 보니까, 윤리적 상대주의에 빠져서 윤리 포기상태, 반율법주의에 빠지게 되었다. 결국 율법주의에서 시작해서 율법포기상태로 가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모순이다. 아까 2층 그림에서 이성으로 출발해서 거기에 계시를 더하는 그림, 혹은 행위로 출발해서 위에 믿음을 더한다. 이런 논리들이 모두 같은 맥락의 것들이다. 이러한 방법론을 우리가 따라갔을 때, 결국은 극단적인 양상을 띄게 된다. 한쪽으로 지나치게 이성에 의존하는 자연신학, 또 다른 쪽으로 직관에 지나치게 의존하는 초월신학으로 간다. 그래서 한쪽으로는 합리주의에 빠지게 되고, 또 다른 쪽으로 가서는 불합리주의에 빠지게 된다.

 

반틸의 입장에서 봤을 때 이것이 바로 죄가 가지는 모순이다. 죄의 모순은 그 전제과 결과에 있어서 전혀 다른, 대치된, 상치된 모습을 보게 된다. 존재, 인식, 윤리의 문제에 있어서 일관성이 없다. 결과가 전제를 지원해 주지 못한다. 결과가 전제를 지원해 준다면 그것은 죄가 아니다. 그러나 인간은 끊임없이, 이 양 극단의 모습 사이에서 왔다갔다하는 악순환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그 속에서 번민하고 갈등한다. 존재론적으로는 자기가 절대적 존재인 것처럼 생각하면서 절대적이지 못하고, 인식론적으로는 자기가 절대지식을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하지만 그러지 못하고 윤리적으로 자기가 절대 의로울 수 있다고 생각하지만 의롭지 못하게 된다. 결국에는 자기 자신이 인간답지 못하다는 결론에 이르러서 회의론에 빠지고, 반율법주의에 빠지게 된다.

 

그런데, 구원론적 관점에서 본다면, 이 모순을 스스로 알고 이것을 빠져나올 수 없다는 것이 인간의 한계이다. 영적으로 죄와 허물가운데서 죽었기 때문에, 이 모순의 악순환 속에서 하나님의 은혜가 없이는 탈출할 수 없다는 것이 칼빈주의와 반틸 사상에 있어서 서론적인 중대한 기초를 놓아주는 것이다. 이런 상황, 구도 속에서는 절대 모순밖에 있을 수 없다. 쉐이퍼는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그가 실존주의 철학자들을 관찰을 했는데, 그들 중에 두 종류의 철학자들이 있었다. 한 종류는 아주 실존적인 허무주의에 이론적으로 깊이 빠져 그 이론에 충실하게 살려고 노력하는 사람들, 성실한 실존주의자 이고. 다른 한 부류는, 이론적으로는 실존주의자인데, 실제적으로 살아가는 모습은 실존주의자가 아닌 것처럼 살아가는 종류이다. 이론과 삶 사이에 일관성이 없는, 이런 상반된 종류의 사람들을 보았다.

 

실존주의 대표자 중에 사르트르와 카뮈를 들 수 있다. 사르트르는 항상 카뮈를 거짓 실존주의자로 비방했다. 왜냐하면 카뮈같은 사람은 실존주의자로서 허무주의를 믿고 살았는데, 실제로 지식의 관점에서는 허무주의잔데, 정작 자기 인생의 문제에 있어서는 행복을 추구하고, 의미를 추구하고, 미를 추구하면서 사는 것. 그의 실제적 인생, 삶의 문제에 있어서는 전혀 자기의 이론과 다르기 때문이다. 그런 그의 모습을 두고 사르트르는 ‘카뮈는 실존주의를 배반한 사람이다’라고 했다. 실존주의자는 실존주의자 답게 허무주의적으로 살아야지, 이론적으로는 실존주의를 믿으면서, 실재적으로는 인생의 행복을 추구하고 산다는 것은 모순이다라고 했다.

 

그런데, 실제로 누가 더 많은 사람들의 사랑과 지지를 받았는가? 그것은 바로 카뮈였다. 왜냐하면 바로 카뮈안에 있는 모순이 인간의 모순을 그대로 반영해 주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람들이 볼 때, 카뮈를 볼 때는 자기 자신을 보는 것 같은 것이다. 카뮈는 솔직한 자기 실존의 모습을 그대로 보여준다. 인식론적으로는 허무주의자이지만, 가슴으로, 직관적 차원에 있어서는 하나님이 우리 안에 넣어주신, 하나님에 대한 갈망하는 모습들이 우리들에게 있기 때문에, 이 양자의 요소들로 인해서 우리 인간은 모순에 빠지게 된다. 죄로 인해 사고는 허무주의, 실존주의로 나아가게 되지만, 자기 안에 있는, 또 다른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 우리로 하여금 무의미 속에서 의미를 찾게 만들고, 허무함 속에서 아름다움을 찾게 만드는 것이다. 그런 모습이 사람들로부터 사랑을 받았던 것이다.

 

단순하게 인간의 모습을 설명하자면 위에서 말한 세가지 범주에 있다. 어느 한 쪽에도 머무를 수 없고, 행복할 수 없는 것이 인간의 딜레마이다. 끊임없이 이 범주를 오락가락, 갈등하는 것이 인간 실존의 모습이다. 율법주의자가 언제나 율법주의적으로 살 수 있다면 좋겠지만, 실제로 율법주의자는 그 율법주의대로 살지 못하고, 반율법적 상태를 그리워하면서 산다. 반대로, 반율법주의적으로 사는 사람은 항상 율법주의를 원한다. 그러면서도 누군가 자신을 끌어주고 잡아주려 하면 끊임없이 벗어나고, 달아나려 한다. 여기에서 우리는 하나님을 떠난 인간 존재의 극단적인 모습을 볼 수 있다. 모든 것을 내가 알기 원하지만, 아무것도 알 수 없고, 아무것도 알 수 없지만, 그 사실을 인정하지 못하고 만족하지 못한다.

 

만일 누군가가, 회의주의에 빠져서 그 상태로 머물 수 있다면, 어느 한 군데에 머무를 수 있다면, 그것은 죄가 아니다. 그러나 언제나 자신과 정 반대의 상황을 그리워하게 되는 것, 그것이 모순이다. 언제나 죄는 모순된다. 어느 한 군데 머무를 수 있다면 그것은 죄가 아니다. 머무르지 못하니까, 죄이다. 머무르지 못하니까 끊임없이 정반대에 있는 상태를 그리워하고, 이쪽으로 오면 또 그 쪽을 그리워하는 것이다. 바로 이것이 존재론적, 의미론적, 윤리론적 모순이다.

 

 

절대 존재와 어떤 허무한 존재, 절대 존재와 허무한 존재라는 것은 극단이다. 인간은 절대 존재도 허무한 존재도 될 수 없다. 이 중간에 어떤 지점을 찾아야 한다. 하나님을 의존하는 존재로서, 허무한 존재도 절대적 존재도 아닌 진정한 의미에서 피조물로서의 자리를 찾아야 한다. 그것이 구원론적으로 말하면, 구원 받은 사람, 거듭난 사람의 모습이다. 이것이 은혜 받은 사람이다. 그것이 하나님의 계시에 의존해서 자기 자신을 바라보는 사람의 모습이다. 이는 언뜻 보면 진실과 허상, 양자의 유사성, 이 양자 사이의 유사성을 여기에서 발견할 수 있다. 인간이 하나님과 함께 있을 때와 떠났을 때의 자기 모습을 바라볼 때, 인간이 추구하는 것과, 하나님과 함께 있을 때 추구하는 것의 유사성이 있다.

 

절대적 존재는 아니지만, 절대적 존재에 의지해서 살 때, 하나님으로부터 계시를 받고, 은혜를 받고, 그와의 동거하심을 통해, 인간이 절대적 존재는 아니지만, 하나님과 공유하는 부분을 가지게 된다. 조직신학에서 이를 가리켜, 하나님의 공유성이라고 한다. 하나님이 피조물과 어떤 부분을 공유하시기로 작정하시고 주셨다. 그것이 하나님의 공유성이다. 우리는 절대적 존재는 아니지만, 절대적 사랑을 모르지만 절대적 사랑을 받았기에 우리는 절대적 사랑을 안다. 우리는 절대적 지식을 가지지 못하지만, 절대적 지식을 가지신 이가 우리에게 계시하시기 때문에,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셨기 때문에 우리에게 절대적 지식을 가진 부분이 있다. 우리가 가진 성경, 이것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이므로 절대적 지식이다. 마찬가지로, 우린 절대적 윤리를 우리 스스로 행할 수 없지만, 우리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우리 안에 계시는 성령님으로 말미암아 절대적 선과 윤리를 분별할 수 있고, 추구할 수 있게 되었다.

 

절대 윤리, 지식, 존재는 거짓이지만, 이 안에는 진실에 대한 모방이 있다. 그리고 또 밭대로 허무한 절대 존재로 시작해서 인간 이하로 전락, 절대지식에서 출발, 회의로 빠지고 절대 윤리로 시작해서 반율법주의로 빠지는데, 결국 이 반대편에서도 인간은 허무한 존재는 아니지만, 하나님 없이는 허무해진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과의 고리가 끊어졌을 때 우리는 끊어진다는 진실의 모방이 들어있고, 우리는 회의주의에 빠져서는 안되지만, 하나님과 떨어졌을 때 회의주의로 갈 수 밖에 없다는 진실에 대한 모방을 가지고 있다. 인간은 반율법주의로 살 수 없도록 창조되었지만, 하나님 없이는 반율법주의로 갈 수 밖에 없다는 것, 그것을 보여준다.

 

 

거짓은 진실의 모방이다. 절대존재로 시작했다가 인간 이하로 전락하고, 절대지식으로 시작했다가 회의주의로 빠지고, 절대윤리로 시작했다가 반율법주의로 빠지게 되는데, 인간은 허무한 존재는 아니지만, 하나님이 없이는 허무한 존재이다. 하나님과의 고리를 우리가 잃어버린다면 허무주의에 빠진다는 진실에 대한 모방이 여기에 나타난다. 인간은 반율법주의적으로 살도록 창조되지는 않았지만, 인간에게 하나님이 없을 때는 반율법주의적으로 살 수 밖에 없다. 그래서 거짓은 진실의 모방이고, 죄는 바로 진리를 모방한다. 약간 삐뚤어지게, 약간 뒤틀리게 모방을 한다. 그것은 인간 안에 ‘하나님을 추구하고’ 하나님을 향한, 하나님을 그리워하고 갈망하는, 직관적인 부분이 인간 안에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를 일반계시라고 한다.

 

칼빈은 이를 인간 속에 있는 직관적 신지식이라고 말한다. 그래서 인간이 비록 죄 속에 빠지고 하나님을 거부하고, 거절하고, 죄를 짓는 불순종에 빠졌지만, 인간에게는 하나님을 찾는 부분, 갈망하는 부분이 있기 때문에 죄악 속에서 모순 속에서, 갈등하고, 딜레마 속에서 악순환을 빠져 나오지 못하는 가운데서도 진리를 표방하는 부분이 인간 안에 있다는 것이다. 처음에 이야기했던 두 가지 변증적 접근방법을 따라갔을 때, 반틸이 이야기한 근본적 모순을 극복할 수 없다. 결국에는 이성에 의존하는 합리주의로 가든지, 아니면 초월적인 초월적 신학으로 가게 된다. 이런 방법이 아니라 이성이 계시에 지배를 받는 것. 이성이 계시에 반응하는 함수적 관계성이 있어야만 한다. 위의 그림은 분리를 의미하는 것이다. 이성에다가 계시를 더하고, 행위, 율법에다 은혜를 더하는 식이다. 이런 접근 방법으로는 인간을 초월주의와 합리주의라고 하는 두 가지 양 극단으로 부추기게 만들 수 밖에 없다.

 

이성으로 안되면 초월적으로 뛰어서 직관으로 해결하려 한다. 그렇기 때문에 불합리주의로 나아가게 된다. 그래서 이성과 계시를 서로 더해서 신학을 하고, 복음을 변증한다고 하는 것은 본래 인간이 가진 존재론적, 인식론적, 윤리론적 모순을 극복하지 못하고 도리어 더 회의론적으로 나아가게 만든다. 그러나 반틸이 말하는 것은 계시가 주어진다면 은혜 속에서 이성이 계시에 반응하게 되어진다는 것이다. 이성이 만일 죄와 허물로 어두워졌다면 그는 계시에 반응할 수 없다. 인간 자체로는 존재론적, 인식론적, 존재론적 모순을 극복할 수 없다. 창조주께 대한 피조물의 절대적 의지와 순종에 의해서 그 존재가 유지되어진다. 인간은 창조주에 대해 유비적(analogy) 존재이다. 인간은 하나님을 흉내 낸다. 하나님으로부터 지식을 부여 받고,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자기 존재를 깨닫는다. 그렇기 때문에 이 유비성이 반틸 변증학에서 가장 fundamental 한 위치를 차지한다. 이는 하나님에 대한 ‘절대적 의존’을 말하는 것이다. 은혜가 없이는 계시를 깨달을 수 없는 것이다. 이런 흐름은 안셀무스나 어거스틴의 흐름과 일치하는 것이다. ‘이해하기 위해서 믿는다.’ 는 것이다.

 

그러나 토마스 아퀴나스의 논리는 대수적인 것으로서 신인협동론적인 측면에서 신앙을 바라본다. 이성으로 노력하다가 안되면 초월의 영역으로 들어가버린다. 이를 기초로 해서 이성을 강조하게 되면 계시의 영역이 매우 줄어들게 되고, 계시의 영역을 강조하다 보면 키에르 케고르의 실존주의나 칼 바르트의 신정통주의에서와 같이 직관을 강조하는 신학적 흐름으로 넘어가게 된다. 계시와 이성을, 상층부와 하층부를 절대적으로 구분, 절단하는 이 선의 개념이 매우 중요하다. 그러나 함수적 관계에서는 이런 선이 없다. 임마누엘 칸트는 하층부의 영역을 ‘순수이성영역’으로, 상층부는 형이상학의 영역으로 완전히 분리해서 넘겨버리게 된다. 1)

 

우리와는 매우 큰 차이가 있다. 우리는 믿음을 통해서 이성이 거듭나고, 거듭난 이성을 통해서 계시를 받을 수 있게 되는 것, 믿음이 없으면 계시를 받거나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이다. 종교나 신앙을 믿음의 영역으로 쫓아내버린다는 관계성을 우리 입장에서는 처음부터 부정한다. 이런 방법론을 가져야만 앞서 말한 존재론적, 인식론적, 윤리론적 모순을 극복할 수 있다. 반틸은 하나님의 지식을 겹층으로 본다. 이성의 층, 윤리의 층, 그 아래에 직관의 층이 있다고 본다. 죽어있는 이성은 하나님께 반응하지 않는데, 거듭나게 되면 반응한다. 그런데, 다른 층에서 ‘하나님께 반응하는 부분’, ‘핑계할 수 없게 만드는 부분’이 있다고 한다. 만일 완전히 모든 것이 죽어버리게 된다면, 핑계가 가능할 것이다. 그러나 이 부분이 성경을 연구해 볼 때 바로 인간으로 하여금 전적으로 타락했고, 부패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 앞에 책임져야 할 존재로서 남게 한다. 숨을 수 없게 만듦 으로서. 인간은 숨을 수 없다. 만약, 인간이 숨을 수 있게 된다면, 하나님의 전적 주권이 침해되는 것이다.

 

로마서의 바울 신학 속에 그런 부분이 있다. 인간은 완전히 영적으로 죽었다. 그러나 다른 층에서는 핑계대지 못하게 하나님을 알 만한 것이 양심이 있어서 그 역할을 한다. 우리가 변증을 함에 있어서도 그런 부분 때문에, ,불신자의 이성이 살아있는 것처럼 여겨서 계시를 전달하면 안되고, 이 이성 밑에 있는 다른 층(직관적 층)에 호소해서 변증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냥 불신자의 이성에 직접 호소하는 것은 고양이에게 생선을 맡기는 격이라고 보았다. 그는 그 이성을 가지고 계시를 난도질 할 것이기 때문이다. 이와 유사한 것이 고등비평이다. 고등비평 때문에 기독교가 둘로 나뉘어 졌다. 그래서 자유주의에서는 역사적 예수와 신앙적 그리스도로 나누어 버린다. 그래서 역사적 예수, 역사적 사실로서의 예수는 아랫부분에 넣어버리고, 당시 사람들이 신앙적으로 조작해 낸 것으로 보이는 것들을 상층부의 영역으로 집어넣어 버린다. 굉장히 학문적이며 중립적 위치에서 한 것이지만, 사실은 그 상,하층부 모델을 그대로 수용해서 양분을 시킨 것일 따름이다. 결국, 이 두 모델 중 어느 것을 선택하느냐에 따라서 존재론, 인식론, 윤리론적 측면에 있어서의 fundamental 한 문제들, 모순점들을 해결할 수 있느냐 없느냐에 걸리게 한다.

 

요는,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에 의해서 이성의 회복됨을 입어야만 하나님의 관점을 통해서 해결점을 찾을 수 있게 된다는 것이다. 반틸의 입장에서 볼 때, 존재 일반, 인식 일반, 윤리 일반 이라고 하는 것들은 기독교 존재이론과 인식이론과 윤리이론에 상치되는 것이다. 이를 도식화한다면 이는 결국 주권의 문제임을 알 수 있다. 인간에게 주권이 있느냐, 아니면 하나님에게 주권이 있느냐 하는 문제임을 알 수 있다. 신을 지나치게 내재화 시키면 범신론이 되고, 반면에 지나치게 초월적 존재로만 보게 되면, 신은 자연신론적으로 보여지게 된다.

 

범신론은 하층부의 세계에서 신을 이해한다. 인간이 이해하는 만큼만 신이 존재한다. 반대로 자연신론은 인간의 인식 범주 속에서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신이 되어버린다. 결국, ‘내가 허용하는 한도 내에서의 신’이 되고, ‘내가 결정하는 한도 내에서의 신’이 된다. 신론의 입장에서 죄인들이 만들어낼 수 있는 system 은 이 양자 중 하나이다. 하나님을 떠난 인간은 지나친 내재화와 지나친 초월화의 굴레, 모순 속에서, 그 악순환으로부터 벗어나질 못하게 된다. 그렇다면, 초월성과 내재성은 어떤 식으로 조화를 시켜야 할 것인가? 반틸은 항상 두 개의 그림을 그리는데, 하나님은 말씀하신다. 그리고 거기에 대해 인간은 반응한다. 결국 이 feed back 의 고리가 초월성과 내재성의 범위이다. 이 범주에서 인간은 자신이 절대 초월적이거나 절대적 존재가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고, 그 사실에 대해 마땅히 반응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거듭나지 않은 경우에는 이 범주의 현상이 일어날 수 없다. 계시를 수납할 수 없고, 계시에 대해서 반응할 수가 없게 되어진다.

 

그러나 이성이 아닌 다른 층에서 하나님은 인간에게 말씀하고 계신다. 이 다른 층 때문에 하나님은 인간 안에 있는 직관적 측면들을 통해서 인간에게 말씀하고 계시고, 인간은 그런 속에서도 하나님을 찾으려 하고, 하나님의 법대로 살려고 하는 반응을 보인다. 나중에 이야기 할 부분이지만, 우리가 기독교를 전파하거나 변증할 때 공략해야 할 부분은 바로 이 부분이다. 이 부분을 공략해서 죄인으로 하여금 갈등을 매우 심화시켜서, 매우 강한 갈등을 느끼도록 해 주는 것이 가장 좋은 변증법이다. 불신자들로 하여금 편안한 속에 있지 못하게 만드는 것이 가장 좋은 것이라는 것이다. 그런 측면에서 <그림 1>의 모델은 매우 편안한 모델이다. 이성에게 자율권을 모두 주고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결국 하나님의 주권을 모독하는 것이다. 이는 하나님의 계시 없이도, 주권적 은혜의 작용이 없이도 인간은 자유롭게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게 되는 모델이기 때문이다.

 

이 다른 층에 대한 부분은 고전적 변증학에서, 토마스 아퀴나스의 변증학에서 다루지 않는다. 대신 직접 이성을 가지고 다루기 때문에 결국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주권적으로 많은 영혼들을 구원하셨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성경적 변증법을 발전시킨다면, 분명하게 인간에게 무엇이 죽어있고 무엇이 살아있는지를 알고 공략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런 것이 반틸의 변증학이다. 반틸 변증학은 칼빈 신학의 두 가지 양대 원칙을 응용한 것이다. 인간은 전적으로 타락했다. 그리고 이 전적으로 타락한 인간을 구원할 수 있는 것은 절대적으로 하나님의 절대 주권이다. 이러한 두 가지 원칙을 최대한 타협하지 않은 범위 내에서 복음 변증을 위한 설명이 반틸의 변증학인 것이다. 이는 사람의 눈에는 기쁜 방식이 아닐지 모르지만, 이는 하나님의 은혜와 주권을 전제하고, 양보하지 않은 범주 안에서 발전된 이론이다. 그러나 이 부분은 후에 더 자세히 언급할 것이다.

 

토마스 아퀴나스는 지식을 상층부와 하층부로 나누었다. 이는 결국 ‘결핍론2)’에 의 한 것이다. 반틸은 이 부분을 이층으로 보지 않고 이 부분을, 이성적이고 윤리적인 부분을 한 층으로 보고, 그 겹쳐진 층, 직관적 층으로 보았다. 이성적이고 윤리적인 부분이 죽었지만, 직관적인 부분이 살아있게 되었다. 고로 은혜가 임하면 이 부분이 회복되어지는 것이다. 아퀴나스의 모델에서는 은혜가 더해지는 모델이 되지만, 반틸의 모델에서는 함수적 성격을 가지는 은혜 안에서의 회복이 된다.

 

 

제 3 장

 

우리는 잘한다고 해서 촐랑대거나, 좀 부족하다고 해서 절망하거나 할 필요는 없다. 하나님의 은혜 아래 주관되어지는 사람들은 내 인생의 잘남과 부족함을 통해서 그 가치가 결정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은혜는 함수적인 성격을 가진다. 반틸 변증학, 칼빈주의 신학에서 은혜는 모든 것의 성격을 결정하는 함수적 성격을 강조한다. 우리가 고등학교 때 배운 함수를 이용해서 설명한다면, y = f(x) 이다. x 는 하나님의 은혜이다. y 는 여러 가지를 포함하는데, 이는 이성이 될 수도 있고, 우리의 의지가 될 수도 있다. 이 모든 것이 x 에 달려 있다. x 에 의존하고 있다. y 는 x 에 절대적으로 의존하고 있다. 그래서 은혜 받은 사람은 거듭난 이성을 가지고 하나님의 말씀을 수납하고, 깨닫고 하나님의 뜻대로 살 수 있는 능력이 주어진다. 반대로 은혜를 받지 않은 사람은 그럴 수 없다. 오히려 똑똑하면 똑똑할수록 그는 죄를 더 많이 짓게 된다.

 

함수관계라는 것은 ‘절대 의존’을 의미한다. 오늘은 아침에 일어나면서 매우 피곤했다. 그럴 때마다 여러 잡생각들과 허무한 생각들, 부정적인 생각들이 들어오게 되었는데, 이런 모든 생각들을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 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이럴 때, 바로 우리는 ‘함수적 성격을 가진 은혜’로 돌아가야 한다. 내 인생이 어디로 가는 것인가? 내 가치는 무엇인가? 하는 생각이 들 때마다 우리 삶의 모든 것을 결정짓는 것은 하나님의 절대 주권적 은혜에 있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은혜에 자기 길을 정한 사람은 교만에도 절망에도 빠지지 않고, 율법주의에도 반율법주의에도 빠지지 않는다.

 

이런 함수의 반대는 대수이다. 대수적 관점에서 은혜를 보게 되면 문제가 생긴다. 대수의 공식은 y=이성+x 이다. 내 인생의 문제가 내 의지적 능력에다가 추가적 요인으로 더해진 은혜가 작용하는 것이다. 결국 은혜가 내 인생에 도움을 주기는 하지만, 이것이 이성이나 내 의지에 결정권이 부분적으로만 있고 전체적으로는 없는 것이다. 이럴 경우에는 문제가 된다. 이 등식에서 내가 좀 잘하면, 나는 교만해 질 수 있고, 내가 좀 못하면, 상대적으로 은혜는 portion 이 올라가지만, 반대로 내가 비관하게 된다.

 

이런 대수적 등식 속에서는 이성과 x(은혜) 의 percentage 를 누가 결정하는가가 항상 중요해 진다. 내가 잘한 경우, 하나님의 은혜도 있었지만, 내가 잘나서 일이 잘 되었다는 식이 된다. 이는 종교적으로 율법주의, 지식적으로는 합리주의자가 되는 길이다. 그런데, 내가 좀 잘 안되면, 은혜가 올라간다. 그런 경우에 자기가 무능력하다는 허무주의에 빠지게 되기 쉽다. 은혜가 이런 대수적 등식으로 성립이 된다고 하면 은혜가 이성 위에 놓여져 있는 그런 모델이 나오는 것이다. 이런 등식의 세계관에서 보면, 때로는 은혜가 적게 필요한 것 같고, 때로는 은혜가 많이 필요하게 된다. 만약, 우리에게 그런 느낌들이 든다면, 우리는 내 능력에 따라서 은혜의 역할을 조정하는 것이다. 그러나, 사실은 모든 것이 은혜이다. 우리가 성화되었다고 할 때, 그것은 대수적 등식에서 함수적 등식 관계로의 변이를 의미한다. 성화되었다는 것은 그런 애매모호한 개념이 아니라, 모든 것을 하나님의 은혜에 맡겨서 생각하고, 노력하는 것을 말한다.

 

구원론적으로 설명한다면, ‘칭의’는 원리적으로 은혜의 함수 속으로 들어온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에 의해서 은혜의 함수 속으로 들어온 것이다. 은혜 안에서, 믿음 안에서만 의지와 이성이 제 기능을 발휘하는 것이다. 칭의, 의로워졌다는 것은 변증학적으로 볼 때, y = f(x) 로 들어온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실제적 삶에서 우리는 아직 대수적 등식 관계 속에서 살고 있다는 것이다. 로마서에서 나오는 바울의 갈등은 칭의적으로는 은혜의 함수 안에 들어왔지만, 자신의 삶을 보면 은혜의 대수 안에 살고 있는 것을 발견함에서 나오는 것이다. 종말론적 시각에 있어서 바울은 우리에게 현재적 종말과 미래적 종말을 말해준다. 이미 우리는 온전해졌지만, 그리스도의 재림이 있을 때까지 우리는 아직 죄와의 관계 속에서 싸워야 하는 가운데 있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원칙적으로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음에도, 실질적으로는 우리가 원칙적인 우리 본질과 gap 을 가진다. 이 gap 은 우리가 성화가 되면서 점점 줄어들게 된다. gap 은 함수와 대수적 관계성 사이에서의 긴장관계이다. 칼빈 신학에서 Sola Gratia (오직 은혜), Sola Fide (오직 믿음), Sola Scriptura (오직 성경), solus Christus, Soli Deo Gloria 에서 왜 모두 다 Sola 를 붙이는 것인가? 이 Sola 라는 것은 무엇을 염두에 두고 갖다 붙인 것인가? 루터와 칼빈이 종교개혁을 일으키기 전까지의 신학에는 뭔가 Sola 가 아닌 +a 가 있었기 때문에 Sola 를 붙인 것이다. 결국은 토마스 아퀴나스가 주장한 ‘이성에다 계시를 더한다’는 신학에 염두를 둔 것이다. 이 것에다가 뭔가 다른 것을 더하지 말라는 것이다. 계시가 있고 나서 이성이라는 것이 계시 의존적으로 사고할 때 그것이 계시를 받아들이는 것이지 자연이성만으로 계시를 받아들인다면 그것은 계시를 잠식해 들어갈 따름이다. 물론 대수 등식에서 이성이 1% 이고 은혜가 99% 라고 한다면 그것이 가장 좋은 경우일 것이다. 그러나, 본성상 죄인인 인간이 그렇게 할 가능성이 있는가? 그렇지 않다. 인간은 결국 은혜를 잠식하고, 자신에게 Percentage 를 많이 가져가려고 한다.

 

자기 주권을 가지고 계시를 판단하고, 자기 주권을 가지고 신 존재를 증명하려 하고, 자기 주권을 가지고 구원을 논하려 한다. 이런 논리를 정당화 시켜주는 것이 대수 등식이다. 그런데, 종교개혁자들이 봤을 때, 이 등식에 입각한 신학은 너무나 잘못된 것이다. 은혜에다 전통을 더하면, 전통이 성경을 잡아먹는다. 성경에다 전통을 더하면 전통이 성경을 잡아먹는다. 예수 그리스도에다 성례를 더한다면, 그것이 예수 그리스도 본성을 침해하는 것이다. 천주교에서는 성례를 통해서 아무리 죄를 지은 사람도 사함을 입는다. 이런 식으로 계속 나아가다 보면, 결국 예수 그리스도는 없어진다. 본질적으로 이런 행위는 하나님의 영광에다 인간의 영광을 더하는 것이고, 인간의 죄성을 정당화 시키는 것이다. ‘+α’ 아래에 모든 것을 종속시키는 것이다.

 

그런데, 진정한 가치는 하나님의 주권적 은혜 아래 종속될 때에만 가치가 있는 것이다. 행위는 믿음에 종속될 때, 진정한 행위가 되고 성례는 예수 그리스도께 종속될 때에만 진정한 가치를 가지는 것이다. 이런 종속의 개념이 바로 ‘은혜의 함수 속으로 들어왔다’는 개념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Sola 를 말할 때, 아무 의미가 없는 것이 아니라, 엄청난 paradigm shift 가 있었던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를 제대로 설명한 사람이 없었는데, 처음으로 이러한 paradigm shift 에 대해 설명한 사람이 바로 반틸이다. 종교개혁 이래 복음주의 신학자라고 하는 사람들은 이 문제를 깊이 폭로하지 못해서 결국은 아주 복음주의적 신학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대수적 등식을 따라가게 되었었다. 반틸이 보기에 근본적으로 인간의 죄성과 타락되어짐을 극복하지 못한 체 기독교의 본질을 논해 왔었다는 것이다. 은혜가 100%가 아닌 경우에는 그것이 50%이건, 90%이건, 99.99999% 이건 아무것도 아닌 것이다. 이런 부분을 정리, 폭로한 사람이 반틸이다.

 

지금 우리는 인간의 이성과 의지를 무가치한 것으로 간주해야 한다는 주장을 펼치는 것이 아니다. 반틸이 말하는 것이 인간의 이성과 의지를 무시하고 복음 변증을 하자는 것이 아니다. 요지는 이성과 의지가 원래 어떤 것이었는가 하는 것과, 계시와 은혜의 본질적으로 어떤 것이었는가에 대한 것이다. 그런 논쟁은 기독교 역사상 계속되어져 왔었다. 펠라기우스와 어거스틴, 루터와 에라스무스, 칼빈와 알미니우스 등의 논쟁이 그러했다. 펠라기우스나 에라스무스, 알미니우스는 대수적 등식을 따랐던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어거스틴이나 루터, 칼빈 등이 이성 자체를 무시하려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들은 단지 등식을 바꾸려 했던 것이었다. 그들이 보기에 이성은 계시 수납,처리 능력이었다. 인간을 계시 수납적 존재라고 보았기 때문이다.

 

이것이 바로 조직신학에서 ‘가해성(Comprehensibility)’이라고 말하는 부분이다. 이 가해성은 인간의 이성과 의지가 계시 수납적 기능을 가지고 있다고 전제했을 때, 가해성이 성립된다. 가해성이 없다면, 우리는 신학을 할 수 있는 가능성이 없어져 버린다. 우리는 대신 수도원에 가서 직관과 경험에 의해, 통찰에 의해서 낭만적으로 신앙을 하면 된다. 가해성이 없이 신학을 학문적으로 할 필요 자체가 없는 것이다. 그 정도 차원에서 하는 신앙의 문제는, 다른 종교도 그렇게 한다는 것이다. 이런 신앙은 수도원에서의 수도생활과 절간에서의 수도생활 사이에 분간할 수 있는 기준을 분명하게 제시하거나 기독교 진리의 특수성과 보편성을 입증할 수 없다.

 

가해성이 없이 직관과 통찰에만 의존한 종교는 결국 다 같이 만나게 되어있다. 그래서 종교다원주의로 흘러갈 수 밖에 없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성과 계시를 2층으로 나눠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이는 이성과 계시를 통합하는 것이 아니라 분리하는 개념도식이 되기 때문이다. 이런 도식에서는 원천적인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 가해성이란 계시가 이성이라는 아래층으로 내려오는 것을 말한다. 이 내려옴을 제시한 것은 토마스 아퀴나스이고, 이 내려오는 길을 철학적으로 원천봉쇄한 사람이 임마누엘 칸트이다. 그래서 계시와 이성 사이에 반정립(antithesis)이 생긴다. 이 둘 사이에 물리적인 대립이 존재하는 것이다. 그래서 아래쪽은 순수이성의 영역, 위쪽은 실천이성의 영역으로 구분한다. 이런 경우, 계시를 검증할 방법이 없다.

 

칸트의 순수이성비판의 문제점은 상층부의 계시를 합리적으로 검증, 교육할 수 있는 방법이 없다는 데 있다. 조직신학에서는 가해성보다는 먼저 불가해성을 논한다. 불가해성이 선행한다.3) 하나님의 속성에서 가해성이 먼저 나오지 않고 불가해성이 먼저 나온다는 것은 매우 의미가 있는 것이다. 우리가 다 알려고 하는 것은 교만이다. 그러나 하나님이 우리에게 계시해 주시려고 하시는 것에 한해서는 가해 하다는 것이다. 그런데 계시와 이성이 상층부와 하층부로 나뉘어져 있었을 때에는 이 지식영역들이 통일되어지지 않는다. 형이상학적인 것과 형이하학적인 것, 초월적인 것과 내재적인 것, 위에 있는 것과 아래 있는 것, 물질 세계와 비물질 세계, 현상 세계와 초월 세계의 통일이 가능해야만 신학이라는 것을 할 수 있고, 우리 신앙이 단순히 우리의 어떤 직관에 의존하는 것이 아니라 분명한 객관적인 계시에 의거한 신학이 될 수 있다.

 

그런데 이 도식에서 계시가 아래 영역으로 내려올 수가 없기 때문에 그 대안으로 제시된 것이 실존주의 이다. 이성적으로는 우리가 계시를 깨닫지 못하기 때문에 실존적으로 깨닫자는 것이다. 이는 결국 직관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칼 바르트의 계시론이 문제가 있는 이유는 이러한 계시론을 받아들여서 그의 체계를 성립했기 때문이다. 계시는 언어로 주어졌다. 언어는 합리성을 가진다. construction 의 성격을 가진다. 계시가 언어로 왔다는 것은 굉장히 중요한 개념이다. 이는 인간이 단순히 그 계시를 직관적으로 수납하는 것이 아니라 이성이 합리적으로 계시를 수납할 수 있음을 말하고, 우리 이성에는 그러한 계시 수납적 기능이 있다는 것을 말한다.

 

우리가 신학을 한다는 것은 이 상,하부의 세계에 있어서 통합이 이루어졌다는 것을 믿는 것을 말한다. 초 현상 세계와 현상 세계가 만나는 것, 그 양자 사이의 자연스러운 교통을 우리가 보는 것이다. 그런데 2층으로 나뉘어진 구도에서는 그런 것이 불가능하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받는 계시를 계시로 볼 수 없는 것이다. 결국 직관에 의존한 낭만주의로 빠질 수 밖에 없게 된다. 낭만주의로 빠지게 되면 construction, 구조와 구성은 필요 없게 되어진다. 그러니까 조직신학 같은 것은 할 필요가 없게 되는 것이다. 이론 적인 것들은 다 빼버려야 한다. 무조건 느낌이 좋은 것, 직관으로 볼 때 좋은 것들만 참이고, 진정한 경험으로 취급되어질 수 있는 것이다.

 

반틸 변증학은 자연신론 자들, 합리주의자 등을 대항하는 측면이 강하다. 초월주의 신학도 비판을 하지만 많은 부분들이 이성주의 신학에 겨냥해서 발전시켜나갔기 때문에 한국 교회처럼 ‘모든 것이 은혜다’라는 식으로 생각하는 환경 속에서는 별로 신통하게 생각되어지지 않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이러한 반틸의 분석은 전혀 필요 없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결국 이성과 의지의 역할이 무엇이냐 하는 문제를 다룬 것이지 이성 자체가 무가치하다는 식의 주장을 한 것은 아니라는 것을 우리는 일단 짚고 넘어가야 한다. 이성과 의지의 가장 적절한 기능, 하나님이 의도하신 이성과 의지의 가장 선한 기능이 무엇인지를 이해하고 나서, 가해성과 불가해 성을 이해하며 이 양자 사이의 균형을 맞추는 것이 우리에게 필요하다. 결국, 계시가 이런 부분에서 도출되어질 수 있는 합일 점이다.

 

프란시스 쉐이퍼(Francis Schaffer)는 ‘현대 사상에서 믿음은 이성으로부터의 도피다’라는 말을 했다. 지성으로부터, 학문으로부터의 도피를 말하는 것이다. 영어로는 Escape From Reason 이라는 제목으로 책을 썼다. 토마스 아퀴나스와 임마누엘 칸트의 영향을 받은 현대 신학과 현대인들의 사고에서 신앙이라는 것은 바로 불합리적인 것을 수용하는 것이라고 정의를 내렸다. 합리적인 것은 이성으로 파악하고, 이성으로 파악되지 않는 불합리한 것을 수용하는 것이 믿음의 역할이라는 것이다. 쉐이퍼는 그러한 현대 사조를 비판하는 의미로 ‘이성으로부터의 도피’라는 말을 썼다.

 

‘우리가 아는 것은 이해하고, 모르는 것은 믿는다’라고 생각하면, 많이 알면 믿음이 적게 필요하고, 적게 알면 믿음이 많이 필요하다는 명제가 성립이 된다. 바울 같은 경우, 그는 엄청난 지식의 소유자였다. 반면에 예수님 곁에서 십자가에 달린 강도는 죽기 전에 주님 영접한 것 밖에 없다. 그렇다면 ‘바울은 많이 알기 때문에 믿음이 적게 필요하고, 강도는 적게 알았기 때문에 바울보다 더 많은 믿음이 필요한가’ 하는 문제가 생긴다. 2층의 구도에서는 이러한 류의 문제점이 발생한다. 바울은 자기 아는 지식이 은혜 안에서 가치 있는 것으로 보았다. 자기 쌓은 지식이 엄청나기 때문에 은혜가 조금 필요했다는 것이 아니라, 나의 나 된 것은 모두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이라는 말을 했다.

 

지금까지 자기가 추구해 왔던 모든 가치가 은혜가 없다면 배설물이고, 은혜 안에 있으면 좋은 것이기 대문에 자기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이다. 그런 면에서 구원 받은 강도도 지식적 측면에서는 바울과 비교가 안 되는 것이지만, 그가 받은 은혜의 정도는 바울과 조금도 다르지 않은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 역시 하나님 앞에서 가치 있는 존재로 인정 받는 것이다. 믿음에 대해서도 같은 이야기가 성립되어진다. 은혜는 이성에 대해 주인 노릇을 한다. 자유주의 신학의 가장 큰 문제점은 성경을 도마 위에 칼질을 해서 예수를 역사적 예수와 신앙적 그리스도로 분리를 시켜버린다. 후자를 초월적인 상층부로 밀어내서 ‘믿으려면 믿고, 말고 싶으면 말아라’는 식으로 하게 되었다. 그것이 바로 도피가 되는 것이다. 이런 경우, 아무리 경건한 신앙을 가지고, 보수주의 신학을 하게 되더라도 우리 신학이 지성으로부터 도피하고 이성으로부터 도피하는 것이 된다면, 결국 ‘초월’이라는 것 속에 갇힌 것이 된다. 물론, 여러 말 말고 믿으라고 할 상황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원칙적인 것이 되어서는 안된다. 이런 태도는 변증학적으로 문제가 있는 것이다.

 

우리의 이성은 계시를 수납할 수 있다. 그러나 죄 때문에 계시를 수납할 수 없다. 그러나 아퀴나스의 2층적 구도에서는 죄에 그 원인이 있다기 보다는 천상과 천하 사이에, 현상과 초현상 사이에 본질적 대립이 있기 때문에 계시를 수납함에 어려움이 있다고 보았다. 그러나 인간은 에덴동산에서 하나님과 함께 거닐고 대화했다. 이성의 위치, 자유 이성과 자유 의지의 위치에 대해 반틸은 그것들이 계시 수납적 기능을 가지고 있지만, 타락, 죄의 문제 때문에 그 기능을 하지 못하는 것이지 어떤 대수적 관계에서의 대립에 의해 이성이 계시를 깨닫지 못하고 계시는 계시대로 이성은 이성대로 있게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정,반,합의 논리로 봤을 때, 은혜의 함수 구도에서의 반(anti-thesis)은 바로 죄이다. 죄로 인해 눈이 어두워지고 인간의 이성과 의지가 타락했기 때문에 하나님과 멀어졌다고 보았다. 여기에서는 그 원인이 타락에 있다. 그러나 대수적 구도에서는 물리적 대립, 초현상과 현상 사이의 통할 수 없는 대립에 있다. 고로, 계시를 받고 싶으면 이성을 떠나라는 것이다. 과학과 이성을 떠나서 실천적 영역에서 믿고 싶으면 믿으라는 것이다. 임마누엘 칸트가 이 부분에 있어서 커다란 역할을 했다. 이러한 논리가 발전되어지면 대수 구도의 관점에서는 ‘죄론’이 없다. 그 관점에서 ‘죄’란 ‘결핍’일 뿐이다. 인간이 죄를 지었을 때, 상층부만 하나님이 거둬가셨다. 그래서 아래층에 있는 부분들이 다 그대로 살아있다. 인간이 얼마든지 자유의지로 모든 것을 처리할 수 있다는 것이다.

 

함수 관계에서는 반정립의 원인이 타락에 있다. 타락에 의해, 죄에 의해 이성이 가리워졌기 때문에 하나님의 계시가 오더라도 반응을 할 수 없다. 수납도 안되고, 반응도 할 수 없다. 이성과 계시 사이에서 서로 교통이 되지 않는 이유는 물리적인 대립이 있어서가 아니라 죄 때문에 그렇다는 것이다. 은혜 때문에 죄가 거둬지면 소통이 이루어 지는 것이다. 그런데 대수 관계에서는 이에 대한 인식, 창조론, 신학적 paradigm 자체가 완전히 틀리다. 은혜를 거둬가시는 것이 ‘죄’이고, 구원도 ‘은혜를 더해주는 것’이 구원이다. 그래서 그들은 구원을 얻기 위해서는 반드시 행위가 있어야만 한다. 그래서 종교개혁자들은 soli fide 를 주장하게 된 것이다. 창조에 대해 함수적 관계성의 선상에서 이해한다면 구원은 회복이다. 그러나 창조에 대해 대수적으로 이해하게 되면 모든 시스템 자체가 ‘플러스 알파’가 되어버린다. 그러나 그 밑에서는 ‘죄론’이 다른 것이다. 함수론에서는 ‘죄=타락’이지만, 대수론 에서는 ‘죄=결핍’이다.

 

하나님이 창조 시에 주신 은혜가 무엇인가? 라틴어로 donum superadditum 이라고 한다. ‘위에서 추가적으로 더해진’ 것이다. 천주교에서 은혜의 정의가 바로 이것이다. 여기에서 ‘더해진’이라는 말이 중요하다. 이 추가적인 선물이 죄를 지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거두어 가셨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죄로 말미암아 인간은 반쪽밖에 안 남았다고 생각하고, 하나님이 다시 나머지 반쪽을 주셔야 한다고 믿게 되었다. 또 여기에 인간론의 문제가 대두된다. 본래 인간은 불안정한 존재로 지음을 받았다는 것이다. 이는 하나님 창조에 결함이 있다는 논리로 이어질 수 있다. 그래서 이 ‘반(anti-thesis)’가 어디에서 온 것인지에 대한 문제가 중요한 것이다. 우리 인간 존재가 인간 안에서 대립을 느끼는 발생 원인이 어디에 있느냐고 느끼는 데에 key point 가 있다. 결국,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에게 주어지게 되면, 그 ‘반(anti-thesis)’ 가 해결되는 것이다. 교만과 탐욕, 자신감과 비하감 등… 모든 것들이 갈등이 없이 조화를 이루면서 회복되어진다. 그러나 대수적 구도에서는 아무리 은혜가 오더라도 이것이 해결되어지지 않는다. 은혜가 있더라도 내가 얼마나 많이 알아야 하고, 얼마나 많이 능력이 있어야 되고, 얼마나 많이 노력해야 되는지를 알 수가 없는 것이다.

 

스타비치라는 사람이 있었다. 그는 루터의 스승으로 그의 개혁사상을 지원해 준 사람이었다. 루터가 하루는 그에게 물었다. ‘하나님이 나에게 화가 나셨습니까?’ 그랬더니 스타비치가 대답했다. ‘하나님이 너에게 화를 내는 것이 아니라, 네가 하나님께 대해 화를 내고 있다.’ 이는 율법주의에 대해 훌륭한 insight 를 제공해 준다. 우리가 아무리 고행을 하고, 잠도 안 자 보고, 채찍으로 자기를 때려보기도 했는데, 하나님이 나에 대하 화난 것 같은 그런 느낌에서 벗어날 수 없는 것이다. 로마서 1:17에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라는 구절을 보면서 루터는 ‘하나님의 의’를 ‘하나님의 화’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어떻게 해도 하나님의 화가 풀리지 않는 것 같이 생각되었다. 그러나 스타비치의 가르침을 통해 루터는 ‘하나님의 의’라는 것이 죄인을 불러 구원하시려는 것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그래서 루터는 그 말을 듣고 나서 바로 나가서 결혼했다. 이 대수의 도식은 토마스 아퀴나스에 의해 시작된 것이 아니다. 사실 그 본질적 구도는 아담에게서부터 시작되어진 것이다.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우리가 사는 이 시대는 어떤 시대인가? 우리 시대에는 지금 어느 쪽으로 시계추가 가 있는가?

 

질문 : 포스트 모던 시대에 와서 초월이라는 것이 많이 강조되고 내세 신드롬 같은 것들이 유행하는데, 이를 반틸 변증학적으로 보면 어떻게 해석을 해야겠는가?

 

응답 : 포스트 모던에서는 초월적으로 많이 갔다.

 

질문 : 이성을 다시 강조해야 하는가?

 

응답 : 포스트 모던이라고 해서 다시 모더니즘으로 되돌아갈 수는 없고, 대안을 제시해야 한다. 대안은 모던이냐 포스트 모던이냐가 아니라 은혜 안에서 모든 삶의 영역을 파편화 시키지 않고 통합하는 것일 것이다. 포스트 모더니즘의 기조는 모든 것을 다 조각내자는 것이다. 그 속에서 의미를 느끼자고 하는 것이다.

 

모더니즘의 문제성은 지나치게 이 파편들을 이성으로 구성하고 기계적으로 조직하고, 마치 계시를 의지하지 않고서도 인간이 모든 파편된 만물을 통합해서 하나의 보편적 믿음, 원리를 찾을 수 있다고 믿었다. 포스트 모더니즘은 반대로, 그 모든 파편들을 그대로 놔두자는 것과 같다. 퍼즐의 예를 들자면, 퍼즐이 10pc 정도면 쉽지만 1000pc 정도 넘어가면 매우 힘들어진다. 3000pc 정도 되는 퍼즐은 4 식구 가족이 약 1 주일 정도 매달리면 그 퍼즐 하나를 맞출 수 있다. 그림을 보지 않은 상태에서 말이다. 합리주의, 모더니즘의 key point 는 마치 3000pc 짜리 퍼즐을 하나님이 보여주시는 전체적 그림을 보지 않고, 자기 능력을 가지고 그 퍼즐을 맞추려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포스트 모더니즘은 3000pc 를 방바닥에 던져놓고 그 자체를 의미 있는 것이라고 보는 것이다.

 

요즘의 대중문화가 포스트모더니즘을 반영하고 있다. 제도권에의 도전, 제도권도 모더니즘의 산물이라고 본다. 제도가 있기 위해서는 구성이 있어야 하고, 합리성이 있어야 한다. 젊은이들은 구조, 제도에 대한 반항을 많이 표출한다. 요즘의 대중 문화를 보면 moral 이 없다. 영화를 한번 보면 moral 이 없다. moral 을 갖지 않는 것이 포스트 모더니즘의 기본이다. moral 을 추구하는 사람들은 나쁜 사람이다. 다른 사람에게 자기의 agenda를 강요하는 다른 사람들에게 자기의 목적을 강요하는 것이 moral 이라는 사고가 젊은이들의 사고방식 속에 들어가 있다. 젊은이들의 문화, 영화 같은 것을 보면, 그냥, 여러 가지 사건들이 복잡하게 죽 늘어져 있고 도덕적이거나 보편적인 것이 없다. 보편성 없이 다양성 쪽으로만 가는 것이 포스트 모던의 특성이다. 보편성 없는 다양성을 중시하는 것. 그것이 포스트 모더니즘의 기조이다.

 

그러나 보편성을 하나님의 은혜, 계시에 의존하지 않고 찾으려 했던 것이 모더니즘이다.

 

공산주의는 왜 실패했는가? 그것이 모더니즘의 산물이기 때문이다. 공산주의에서는 개인, 개체를 중요시 하지 않는다. 개체를 어떤 이념 속에다 다 희석시켜버린다. 모더니즘의 문제점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공산주의이다. 이념, 인간이 설정해 놓은 하나의 보편적 이념 속에다 개인적 존재들을 모두 희생시켜 버린다. 인간은 이런 논리에 절대로 따라갈 수 없다.

 

민주주의는 반대 현상이다. 개인을 위해 이념을 희생시킨다. 그렇다면, 이것이 대안인가? 아니다. 민주주의는 포스트 모더니즘에 어울리는 것이고, 공산주의는 모더니즘에 어울리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우리 인간은 절대 이념에 의해 희생되어질 수 없는 개체적 존재이다. 어떤 보편적인 것을 포기할 수 있는 존재도 아니다. 그럴 경우 무의미함, 허무함 속으로 빠져들어갈 수 밖에 없다. 그래서 부유한 민주주의 국가 사람들이 재정적으로는 넉넉하지만 우울증에 빠지고 회의에 빠지는 이유는 이러한 보편적 토대의 상실에 있다.

 

인간문제, 죄 문제에 대한 해답이 될 수 없는 것이다.

 

 

 

 

제 4 장

 

모더니즘(Modernism). 포스트 모더니즘 (Post-modernism).

 

모더니즘은 합리주의가 지배하던 시대. 포스트 모더니즘은 반이성주의, 불합리주의가 지배하는 시대이다. 그래서 모더니즘은 구성, 구조, 포스트 모더니즘은 탈 구성, 탈 구조로 특징적으로 요약할 수 있겠다. 우리가 3000pc 퍼즐을 맞추려면 그림을 보지 않고서는 절대 맞출 수 없다. 숫자가 많을수록 맞출 수 있는 가능성은 적어진다. 이 우주는 퍼즐이다. 또 인생의 모든 문제들은 퍼즐이다. 이 퍼즐들을 다 짜맞춰서 하나의 보편적인 의미를 찾아내려고 인간이 철학을 하고 종교를 하고, 고독을 찾고 하는 것이다. 그런데, 합리주의, 모더니즘의 관점에서 봐서는 그림을 보지 않고 맞추려고 한다. 그럴 경우에, 그림을 보지 않았기 때문에 개별적 지식들은 다 가지고 있는데, 보편적인 진리를 가지지 못하게 된다. 사물에 대한 개체적 의미는 가지고 있지만, 모든 것들을 통합시켜줄 수 있는 보편적 의미를 가지지 못한다. 그래서 하루 하루는 재미있게 살아갈 수 있지만, 전체를 볼 경우 허무할 수 밖에 없다. 전도서 를 보게 되면 하나님을 떠난 인생의 허무함이 나타난다. 이는 이론적인 의미에서가 아니라 하나님 없이 사는 인간 실존의 모습을 그려주고 있는 것이다.

 

결국은 현상의 세계와 초현상의 세계가 분리되어지는 구도 속에서는 결국 모더니즘은 아래층에서 보편적 의미를 찾으려고 노력했지만 결국은 헛되고 헛되고 또 헛된 일을 했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끊임없이 하나님의 계시에 대해 의존하는 의존함이 없이 자체적으로 그림을 파악해 내야 하는 불가능한 project 를 인간이 맡아가지고 그림을 보지 않고 한번 풀어보겠다고 하는 것이다. 퍼즐 조각이 작으면 풀 수 있지만, 많아지면 풀 수가 없다. 이 우주 만물이, 인간의 인생이 얼마나 복잡한가? 이 모든 것들을 자기 머리로 풀어보겠다는 것이 모더니즘이다. 이런 모더니즘이 실패했다. 그 다음에 포스트 모더니즘의 경향으로 흘러간다.

 

포스트 모더니즘에 가서 보니까 모더니즘에서 실패한 ‘보편적 의미 찾기’를 포기해 버린다. 그리고 개별적, 파편적 개별 존재의 의미, 그대로, 카오스 상태로서, 그 자체로서 의미를 찾자고 하는 주장을 한다. 보편적 원리를 찾아서 그림을 그릴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허무함 속에서 어떤 의미를 찾으려 하는, 그 조각들을 연결해서 그림을 그려 보려 하지 않고, 그냥 그 흩어짐 자체를 인정하고 수용해서 살아가려는 것이 포스트 모던 세대의 성향이다. 결국 이것은 단일성과 복수성의 문제가 여기에서 발생한다. 가장 어려운 숙제가 이 숙제이다. 철학이 무엇인가? 내가 신학을 공부하면서 느낀 바로는 철학은 바로 단일성과 복수성을 풀려고 하는 인간의 염원이 key point 이다. 이 우주 만물을 어떻게 통합시킬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그러면서도 개별적 존재들의 의미를 무시하지 않고. 성경에는 이런 문제가 나와있다. 직접적으로 이런 용어를 나타내지는 않지만, 성경은 이런 개념들을 다루고 있다. 이 문제를 모더니즘은 합리주의로 해결하려 했고, 포스트 모더니즘은 모든 것을 그냥 있는 그대로 두어서 해결하려 했다.

 

모더니즘은 수학적 개념, 좌표 속에다 인간을 끼워 넣어 맞추려 했다. 과연 인간이 도식으로 설명할 수 있는 것인가? 인간은 도식으로 설명될 수 없다. 그런데 인간을 기계처럼 하나의 토막난 그림에다 맞추려니까 안 맞았다. 하나님이 보여주신 전체적 그림을 보지 않은 상태에서 그림을 그리려니까 인간성이 망가지고, 개별존재의 의미도 망가지게 된다. 공산주의는 그 이념에다 사람을 맞췄다. 개별적 존재는 없었다. 개별 존재는 이념에 의해 희생되어졌다. 그래서 성공하지 못한 것이다. 이는 그 이념 속에서 이미 그 실패를 예견하고 있었던 것이다. 반대로 민주주의는 모두 개별주의, 개인주의인데, 통합적인 요소가 부족하다. 하나님의 말씀에 의존하지 않는 사상은 이 단일성과 복수성의 문제를 영원히 해결할 수 없다. 그러므로 철학이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는 것이다. 반틸의 주장이 그러하다. 그리고 신학도 이 2층 구도를 따라가는 신학은 결국 모더니즘으로 가던지, 포스트 모더니즘으로 가던지 둘 중의 하나의 길을 가게 된다는 것이다. 그 결과, 신학도 철학이 걸어간 길을 그대로 따라가게 되는 오류에 빠지게 된다고 주장했다.

 

예를 들어서 이 단일성과 복수성의 문제를 생각해 본다면, 아담과 그리스도를 통해서 알 수 있다. 교제 p.24 와 로마서 5장 12~19까지를 살펴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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롬 5:12 이러므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 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 13 죄가 율법 있기 전에도 세상에 있었으나 율법이 없을 때에는 죄를 죄로 여기지 아니하느니라 14 그러나 아담으로부터 모세까지 아담의 범죄와 같은 죄를 짓지 아니한 자들 위에도 사망이 왕노릇 하였나니 아담은 오실 자의 표상이라 15 그러나 이 은사는 그 범죄와 같지 아니하니 곧 한 사람의 범죄를 인하여 많은 사람이 죽었은즉 더욱 하나님의 은혜와 또는 한 사람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말미암은 선물이 많은 사람에게 넘쳤으리라 16 또 이 선물은 범죄한 한 사람으로 말미암은 것과 같지 아니하니 심판은 한 사람을 인하여 정죄에 이르렀으나 은사는 많은 범죄를 인하여 의롭다 하심에 이름이니라 17 한 사람의 범죄를 인하여 사망이 그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왕 노릇 하였은즉 더욱 은혜와 의의 선물을 넘치게 받는 자들이 한 분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생명 안에서 왕 노릇하리로다 18 그런즉 한 범죄로 많은 사람이 정죄에 이른 것 같이 의의 한 행동으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아 생명에 이르렀느니라 19 한 사람의 순종치 아니함으로 많은 사람이 죄인 된 것같이 한 사람의 순종하심으로 많은 사람이 의인이 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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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을 가지고 우리가 많이 설교를 한다. 그러나 이 성경을 가지고 단일성과 복수성 이라는 용어를 가지고 설명한 사람은 없을 것이다 .여기에 나오는 것은 headship 이다. 이것은 언약적이라고 표현하기도 한다. 이 언약이라는 말 속에는 headship 이라는 개념이 들어 있다. 한 사람이 죄를 지음으로 인해서 여러 사람이 영향을 받는다. 한 사람이 죄를 지음으로 그 죄가 여러 사람에게 전가된다. 마찬가지로 예수를 믿음으로 의가 동일하게 전가된다. 이것이 headship 이다. 언약적 관계성 속에 들어있다는 것을 말한다. 이것이 바로 단일성과 복수성의 문제이다.

 

아담이 죄를 지었을 때, 온 인류가 다 같이 죄를 지었다. 온 인류가 아담과 연대성, 연합된 관계를 가진다. 그래서 아담이 죄를 지었을 때, 인류가 함께 죄를 지은 것이다. 아담이 죄를 지었는데,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다는 것은 어떻게 보면 납득이 가지 않는다. 아담이 죄를 지었으니까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다. 내 죄는 내 죄, 아담의 죄는 아담의 죄인데, 왜 그의 죄가 나의 죄가 되는 것인가? 이런 주장을 전개한다면, 우리는 복수성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우린 다 개별적 존재인데, 하나님 앞에서 개별 인격인데, 왜 아담이 지은 죄를 내가 책임지는가? 나는 수용 못하겠다고 주장한다면, 그 주장은 이 복수성의 관점에 서있는 것이다. 복수성 이라는 것은 개별성, 혹은 특수성, 혹은 다양성을 말하는 것이다. 단일성, 보편성 등도 역시 다 같은 말이다.

 

그러나 우리는 그렇게 주장할 수 없다. 아담이 죄를 지었고, 그로 말미암아 죄인이 되었다. 그 외에도 우리는 자범죄를 짓는다. 아담의 죄를 전가 받아서 우리는 자범죄를 저지른다. 원죄가 있기 때문에 자범죄를 짓게 된다. 원죄와 자범죄를 말한다는 것이 신학적으로 복수성과 단일성을 말하는 것이다. 우리는 개별적으로 다 하나님 앞에서 죄를 짓는다. 그러나 우리는 인류의 머리인 아담이라는 headship 에 의해서 다 함께 죄를 짓는다. 원죄는 통일성을 이야기 한다. 모두가 죄를 짓는 것이다. 그러면서 개별성을 말할 수 있다. 각자가 하나님 앞에서 죄를 짓기 때문이다. 이런 문제를 논리적으로 해결하려고 한다면 제대로 수긍이 가지 않는다. 오직 하나님의 말씀으로만이 설명할 수 있는 것이다.

 

모더니즘과 포스트모더니즘을 극복하는 길은 하나님의 말씀, 계시의 말씀을 인정하는 것이다. 비록 논리적으로는 풀리지 않더라도. 내 죄는 내 죄이고, 아담의 죄는 아담의 죄이지만, 그러나 하나님은 아담 때문에, 아담 속에서 온 인류의 운명을 결정하셨기 때문에 내가 원죄를 전가 받는 것이고 그 안에서 내가 죄인이다. 원죄와 자범죄를 인정하는 것은 바로 우리가 보편성과 특수성을 아울러 인정하는 것이다. 이렇게 해서 철학이 영원히 풀지 못하는 것을 풀었다. 성경에서 원죄와 자범죄를 함께 포괄적 해결을 한다. 아담도 죄를 짓지만, 당신도 죄를 짓는다. 자기가 짓는 죄는 하나님 앞에서 해결해야 하는 것이다. 아담 때문에 내가 죄를 지었다고만 핑계할 수 없는 것이다. 나도 죄를 짓기 때문이다. 만일 단일성만 주장한다면, 핑계를 댈 수 있다. 그러나 하나님은 자범죄를 통해서 우리 개별적 존재를 다루신다. 성경은 이런 문제들을 언약이라는 주제 속에서 철학적 용어들을 쓰지 않고서도 너무나 잘 설명하고 있다.

 

이 계시의 말씀을 진리로 수납하지 않는 이성은 이런 부분을 인정할 수 없다. 그러나 우리가 거듭난 이성으로서는 아담 때문에 죄인이 되었고, 내 죄는 또 내 죄이다. 아담에게도 책임이 있지만, 나에게도 책임이 있다는 것을 받아들일 수 있다.

 

 

 

질문 : 계시와 이성 사이의 조화 문제는 역사적으로 대립하며 조화시키려 했던 문제인데, 이를 어떻게 수긍할 수 있게 설명하려 했던 노력들이 있었다. 그런데, 가해성이라는 측면에서 믿음의 역할, 이성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고 할 때, 믿음의 역할이 강조되어지지 않는다면, 가해성이라는 부분이 설명될 수 있는가?

 

응답 : 믿음의 역할에 대해 강조를 안 했나요?

 

질문 : 그게 아니라, 믿음의 역할이 없다면 가해성이 성립되지 않는 다는 말이죠. 이성적으로 학문적으로 설명해 나갈 때, 믿음이라는 것이 설명되어질 수 있는 것인가 하는 것이 제 질문입니다.

 

응답 : 믿음은 하나님의 말씀을 계시로 수납하는 것이 믿음이다.

 

질문 : 그것은 논리상 모순성이 있는 것이 아닙니까? 역사적 예수와 신앙적 예수를 구분할 때, 신학적 예수는 인정하지 않는 것이 아닌가? 가해성 자체가 믿음이 없다면, 논리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것 아닌가? 그런데, 믿음이 있어야만 계시를 수납할 수 있다는 말이 모순 되지 않는가?

 

응답 : 믿음이 선행되어야 이성이 제 기능을 발휘해서 계시를 수납할 수 있다.

 

질문 : 믿음 자체를 이성적으로 설명할 수 있겠는가? 초자연적으로 은혜로 우리에게 주어지는 것인데 어떻게 이성적으로 설명할 수 있는가?

 

응답 : 믿는 사람이 믿음에 대해 설명하지 못한다면, 신학을 하는 의미가 없지 않는가? 불신자의 이성은 설명할 수 없다. 그의 이성이 은혜를 받아 계시를 수납할 수 있도록 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계속해서 단일성과 복수성의 문제를 이야기하고 있다.

 

아담과 우리 사이의 관계. 아담으로 인해서 죄가 인류에게 전가되면서 아담에게도 책임이 있지만, 우리에게도 책임이 있다. 이 문제는 계시를 수납하지 않은 상태에서, 의지하지 않은 상태에서 들으면 납득이 가지 않는 부분이다. 우리가 계시를 수납하고, 거듭난 이성을 가지고 봤을 때는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진다. 그러나 2층 구도 속에서는 먼저 그 문제를 이성으로 풀어야 된다. 그 후에 계시로 들어가야 하는데, 문제는 아무리 이성으로 그 문제를 풀어 보려 해도 그 문제가 풀어지지 않는다. 일단은 하나님의 말씀을 내가 수납하는 그 속에서 이 것들이 설명되어질 수 있는 것이다. 그리스도를 믿는 것도 마찬가지이다. 죄를 위에서 그렇게 설명한 것과 같이 의의 문제도 그렇게 적용되어진다. 예수님의 의와 우리의 의가 무슨 상관인가 하는 경우, 그것은 자존심 강한 사람의 이야기이지만, 이는 율법주의적인 것이다.

 

질문 : 불신자에게 당신이 죄인이라는 것을 인식시키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인가?

 

응답 : 아니다. 결국에는 성령께서 불신자를 거듭나게 한다. 이 point 가 간단하면서도 매우 헷갈리는 포인트이다.

 

먼저 이성적으로 point 를 찾아서 자체적으로 기독교 진리를 판단할 수 있는 능력이 있는 것처럼 종교적, 상식적, 도덕적 차원에서 이야기를 해서 어느 정도 수긍이 되면, 계시를 동원하는 그런 방법을 사용하지 말라는 것이다. 직접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고 상대하라는 것이다. 2층 구도에서는 그런 행위를 장려한다. 어느 정도 종교적, 영적 차원에서 수긍이 갈 만한 회색지대가 형성이 되고 나면 그 다음에 말씀을 가지고 제시하면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반틸의 입장에서는 직접 말씀을 제시함으로 인해서 불신자가 가지고 있는 잘못된 전제들과 결과 사이에 존재하는 모순들을 드러내 제시함으로써, 자기가 가졌던 전제가 결코 자기가 의도했던 결과를 가져올 수 없다는 것을 자극하고 성령께서 그 사이에 역사하시도록 함으로 변증을 시작하는 것이다.

 

하나님처럼 되려 했지만, 결과적으로는 인간 이하의 존재로 전락했다는 것을 말하자는 것이다. 그 사실을 직면하게 해 줘야 한다. 물론 처음에 수긍하지 않겠지만, 그러나 그것이 더 성경적인 방법이고, 그것이 결국은 하나님의 주권을 양보하지 않고, 복음의 진리를 약화시키지 않는 방법이다. 진리와 비진리의 정면 대결을 하라는 것이지, 진리와 비진리 사이의 공통분모를 찾아내어서 그 안에서 서로 합의를 이루어 낸 다음에 말씀을 보곤 하는 방식을 취하지 말고, 진리와 비진리가 절대 같이 공존할 수 없다는 것을 알게 해 줘야 한다. 이성적으로 먼저 얘기한 다음에 계시를 제시하지 말고 이 계시가 없으면 이성도 아무것도 판단할 수 없다는 것을 직접 제시해야 한다. 그래야 그 마음속에 갈등이 일어나고, 자체적인 모순이 드러나게 된다. 이것이 가장 효과적인 전도 방법이고 설교 방법이다. 명 설교가는 이런 변증학을 꼭 배우지 않았어도, 사람의 죄 문제를 깊이 파악하고, 하나님의 은혜의 어떤 깊이를 아는 사람들은 상상력을 동원해서, 반틸 변증학을 몰라도 반틸변증학의 관점에서 복음을 전도하고 설교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런 사람들은 본능적으로, 선천적으로 그런 능력을 가지고 있다.

 

질문 : 죄인에게 처음부터 하나님의 계시를 받아들이게 하는가?

 

응답 : 죄인들에게 하나님의 계시를 수납할 수 있는 능력이 있는가?

 

질문 : 없죠.

 

응답 : 그런 상태에서 우리가 전도해야 하고, 기독교 변증을 해야 한다. 그 접촉점을 우리가 찾아야 한다. 그래서 지금 변증학을 공부하고 있는 것이다. 분명히 이성으로는 계시를 깨달을 수 없다. 죄인은 그 상태로는 절대 하나님의 말씀을 수납할 수 없다. 죄와 허물 속에서 죽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접촉점을 찾을 것인가? 이 부분은 아직 여기서 다루지 않았다.

 

미리 힌트를 드린다면, 이성의 영역을 죽었지만, 이성의 층 밑에 깔린 층이 살아있다. 그 층을 자극하는 것이다.

 

질문 : 하나님의 부르심 자체에 죽은 자를 소생시키시는 부분이 있지 않은가? 그것이 하나님의 절대 주권이 아닌가? 그렇게 설명한다면 하나님이 택한 자를 부르실 때에 그 죽었던 부분이 살아지거나 해서 response 하는 것이 아닌가?

 

응답 : 좀 있다가 접촉점의 문제를 다룰 때 하도록 하겠다.

 

아까의 로마서 5장으로 다시 돌아가자.

 

그리스도께서 순종한 것이 마치 우리가 순종한 것처럼 여겨지는 headship 의 효과를 여기에서 설명하고 있다. 이는 단일성과 복수성의 문제이다. 이것은 거듭난 이성이 아니면 도저히 수긍할 수 없고, 납득이 가지 않는 진리이다. 그리고 이방인과 유대인이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가 된다는 것은 어떤 의미인가? 단순히 현상적 시각에서 바라본다면 이방인과 유대인이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가 된다는 것은 설명되어지기 어렵다. 현상적인 관점에서 바라본다면 설명할 수 업는 이야기를 한다.

 

그러나 보편적 관점에서, 하나님이 이루신 구원의 우주성 이라는 관점에서 본다면 모든 것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통합된다. 문화적 차이, 인종적 차이 등이 우리를 갈라놓을 수 없다. 믿음도 마찬가지이다. 어떻게 종과 노예가 같이 살지 않고도 하나가 되는가? 유대인과 헬라 인이 서로 개별적 환경에서 개별적으로 살아가는데 어떻게 하나가 될 수 있는가? 각자의 문화적 환경 속에서 예배 드리는 스타일도 다르다. 그러나 우리는 개별적 존재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천상의 시각으로 볼 때는 하나로 통합되어져 있다는 것을 알 수 있고, 믿을 수 있다. 그리스도는 하나로 바라보신다는 것, 이러한 초월적 시각을 이해할 수 있게 되어 초월적인 것과 현상적인 것이 이해되어지고, 믿음으로 받아들일 수 있게 된다. 이렇듯 성경 안에서는 복수성과 단일성이 자연스럽게 이해되어버린다.

 

역사도 마찬가지이다. 그 자체가 너무나 복잡, 다양하기 때문이다. 역사를 어떻게 통합시킬 것인가? 그 방법은 오직 하나님의 작정과 섭리를 믿는 것 외에는 없다. 그러지 않으면 엄청난 회의론과 허무 속으로 빠져들어갈 수 밖에 없다. 하나님의 작정과 섭리가 없다면 역사란 개별적 주체들이 개별적으로 살다가 죽어버리는 그런 회의적인 것들의 총체 밖엔 되지 않는다. 여기서 신앙생활 하는 사람들과 미국에서 신앙 생활하는 사람들 사이에는 어떤 공통적 요소도 없다. 서로의 존재에 대해 관심도 없고 알지도 못한다. 그러나 하나님의 관점에서는 이 모든 것들이 하나의 교회로 보이는 것이다. 논리적으로는 아무런 연관관계가 없다. 그러나 이 양자 사이에 상관이 있다고 믿는 것, 우리가 한 번도 보지 못했지만, 저 멀리 아프리카에 사는 사람들도 우리 형제요 자매라고 믿어지는 것, 이런 것이 있기 때문에 우리는 선교도 하고, 전도도 하는 것이다.

 

종말의 문제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이다. 인류는 종말을 향해서 가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의미가 있고, 기다릴 수 있는 것이다. 종말론적으로도 그렇고, 성경에서는 단일성과 복수성의 주제를 다루는 문제들이 많다. 그리스도의 몸이 몸은 하나이지만 지체는 여럿이다. 이것도 단일성과 복수성의 문제이다. 그리고 그 지체들은 다 각자 몸에 종속되는 지체가 아니다. 종속의 개념이 아니다. 유기체적이면서 평등한 개념이다. 이는 이해하기 어려운 개념이다. 만약 지체를 몸에 종속시킨다면 우리는 단일성을 위해 개체성을 희생하게 되는 것이다. 공산주의 사회에서 이렇게 한다. 개인의 인격과 권리는 공산주의 시스템을 위해 무조건 희생된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몸에서는 개개인이 모두 자유를 가지고 권리를 가지지만, 몸에서는 자기주장을 하지 못하고, 몸을 위해 자기가 희생하게 되는 복수성과 단일성의 관계를 가진다. 논리적으로 이는 풀리지 않는 것이다. 공산주의적으로 생각하거나 민주주의적으로 생각하게 되면 논리적으로 아무런 고민이 없다. 이해하기 쉽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몸에서 이루어지는 복수성과 단일성의 합일은 그런 것이 아니다. 개인의 단일성과 몸 안에서 복수로 존재하면서 합일되는 것은 믿음이 없다면 알 수 없는 것이다. 교회론 적으로 말한다면, 교회 안에서는 한 성도, 한 성도를 왕과 같이 대우해야 한다. 그러면서도 동시에 그 사람은 자기 주장을 펴면 안된다. 몸을 위해서. 이는 역설이다. 성경적 역설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이 성경적 역설을 진리로 받아들인다. 이런 측면에서 목회자들은 힘들다. 사람들은 목회자들에게 자기를 좀 대접해 달라고 온다. 한 사람 한 사람들이 왕 같은 자이기 때문에 목회자는 그들을 섬기지만, 그러면서도 강단에서는 주장하지 말아라, 몸을 위해서 희생해라, 하는 설교를 하니까 성숙한 사람들이나 알아듣지 웬만한 사람들은 알아듣지 못하는 것이다.

 

질문 : 반틸의 변증학에서 진리는 설명되어질 수 없다고 하는 그것이 변증인가?

 

응답 : 그런 부분이 있다. 많은 사람들이 반틸 변증학을 좋아하지 않고 반감을 가지고 공격을 하는 부분이 그런 것이다. 결국은 그렇다면 아무런 할 말이 없지 않은가 하는 것이다. 그래서 반틸 변증학을 믿음주의(fideism) 이라고, 부정적인 뉘앙스로 부른다. 아무 할 이야기도 없는 것 아니냐고 말한다.

 

그러나 반틸은 이성을 무시하고, 이성을 가치 없는 것으로 여기는 것이 아니다. 그는 성경으로 봤을 때, 인간은 모두 죽었다. 그렇기 때문에 그런 죽은 부분과 대화하려 해서는 문제가 생긴다고 본 것이다.

 

하나님의 절대 주권을 침해하면 안된다. 하나님의 절대 주권으로서만 인간이 구원을 받을 수 있다면 절대 인간에게 의로움을 허용해서는 안된다. 하나님의 절대 주권만이 우리를 구원하신다. 그러기 위해서는 인간에게 요만큼도 선을 인정해서는 안된다. 이 두 가지 만은 절대 양보해서는 안된다는 신념 속에서 변증법을 만들어 냈다. 그랬기 때문에 이런 종류의 공격을 많이 받는다. 그래서 고전적 변증학과 반틸 변증학 사이에 논쟁이 심하다. 우리가 공부하는 낙스 신학교의 경향은 개혁주의 안에서도 다르다.

 

낙스의 R.C.Sproul 이라는 신학자가 있다. 여긴 한번도 안 왔는데, 이 사람은 고전적 변증학을 주장한다.이 고전적 변증학에서는 인간이 이성적으로 볼 때, 죄와 허물 가운데서 죽었다는 것은 인간의 마음이 죽었다. 존재 중심에 있는 마음이 죽었지 이성은 살아있다고 본다. 거기에서 반틸과 차이를 보인다.Westminster 신학교와 Knox 신학교 사이에 이런 측면에서는 이견이 있다. 그러나 반틸이 왜 그런 이야기를 하는지에 대한 이해가 있다면 이해가 되어질 수 있는 것이다. 하나님의 절대 주권은 1%라도 침해될 수 없고, 그렇게 침해되어진다면 모든 것이 다 무너진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너무 고집스럽게 그것을 주장하기 때문에 비난을 많이 받는다.

 

그래서 단수성과 복수성의 문제로 돌아가면, 종말론도 같은 종류의 문제를 가지고 있다. 종말로 나아가는 과정은 매우 다양하다. 이 세상을 보면 믿는 사람은 정말 소수처럼 보이고, 지금이라도 당장 망해도 될 것 같은 생각이 들지만, 하나님은 이 속에서도 그분의 작정대로 역사를 이끌어가신다. 자신이 원하시는 숫자만큼을 채워서 구원하시고, 알곡과 가라지로 나누실 것이다. 그런데, 우리 눈에는 절대 그렇게 보이지 않는다. 악이 판을 치고, 악인들이 세상의 주도권을 잡은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성경은 하나님의 완벽한 계획이 이 역사를 이끌어 가실 것이라는 주장을 한다. 역사는 정말 개판이지만, 그 위에서 하나님은 하나님의 뜻을 완전하게 이끌어 가신다고 주장한다. 말씀이 그렇게 가르치기 대문에 수납하는 것이다. 계속해서 내가 이야기하는 포인트는 결국 계시 의존적으로 논의하지 않을 때, 이 문제는 풀리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불신자들, 철학자들은 이 문제가 풀리지 않은 상황에서 종교, 신에 대해 논하기 때문에 양분되어질 수 밖에 없다.

 

그리스도의 신성과 인성의 교리도 역시 보편성과 개별성의 조화를 이루고 있다는 데서 우리가 신성과 인성의 부분을 말할 수 있다. 어떻게 한 인간 속에 신성과 인성이 함께 존재할 수 있느냐. 어떻게 인간이 참 하나님이시면서 참 인간이실 수가 있는가? 기독론의 문제에 있어서도 보편성과 개별성의 조화 관계가 발생한다. 그러나 어느 한 쪽을 포기했을 경우 기독론의 문제가 생긴다. 신성과 인성의 인위적인 결합이 설명되어지려면 신성과 인성이 한 인격 속에서 같이 공존한다는 우리 논리로서는 설명하기 어려운, 불가능한, 계시에 의거한 결론이 내려지게 된다. 이런 것들이 성경에는 많이 있다. 보편성과 개별성을 믿지 않는다면 우리가 설명할 수 없고, 믿을 수 없는 것들이 많이 있다. 이 대표적인 예가 삼위일체론 이다.

 

초대 교회 교부 시절에 삼위일체론 때문에 많은 논란이 있었다. 이 문제를 놓고 잘못된 의론 들이 양쪽으로 갈라졌다. 하나는 삼위일체를 놓고 그 통일성을 보호하기 위해서 참 인간이라는 개별성을 포기했고, 반대로 참 인간이라는 개별성을 보호하기 위해서 통일성을 보호하는, 이런 문제를 발견하게 된다.

 

삼신론은 뭐가 포기되는 것인가? 어느 부분이 희생당하는가? 단일성이 희생당한다. 그 다음에 만약에 한 신이 세 형태로 변장을 해가지고 나타난다는 양태론으로 가게 되면 그것은 개별성, 복수성, 삼위의 인격이 모두 희생당한다. 한 남편이 남편도, 아들로도 역할을 한다는 역할론이다. 이것도 역시 양태론의 하나이다. modalism 이라고 한다. 하나님이 mode 로 나타난다는 개념이다. 아무리 납득을 하려 해도 이해가 안되니까 납득이 가게 만들려는 것이다. 그렇게 하다 보니까 이런 식으로 밖에 설명이 되어지지 않는다. 이것이 인간 논리의 한계이다. 여기에서도 인간의 이성은 계시를 수납할 수 없다는 것이 나타난다. 한계에 부딪쳤을 때, 그 한계 때문에 하나님의 계시가 필요하다고 느끼면 좋은데, 자신이 조작을 한다. 납득이 가도록.

 

이런 관점에서 단일성과 복수성의 문제가 변증학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이 문제가 선결되어야 하나님과 우주, 창조자이신 하나님과 우주의 관계를 설명할 수 있다. 우주는 정말 다양성의 세계, 우연이 지배하는 세상이다. 그래서 모든 것이 우연의 일치처럼 보인다. 모든 것이 우연에 의해 지배되는 것처럼 보여진다. 우리가 만난 것도 우연이다. 그러나 우연이 아니라 필연적인 하나님의 목적에 의해 만나게 되었다. 이렇게 생각하기 위해서는 폐쇄 체계(closed system) 안에서는 불가능하다. 우연이 지배하기 때문이다. 폐쇄 체계는 by chance 로 지배되는 체계이다. 모든 것이 ‘우연히 그렇게 되었다.’ 혹은, ‘재수 없어서 그렇게 되었다.’라는 식으로 설명이 되어진다.

 

다양성 속의 통일성을 찾기 위해서, 우연성 속의 필연성을 찾기 위해서 이 두 가지 원, 하나님과 피조물 사이에 계시의 고리가 있고, 그 고리에 의해 인간이 반응하는 부분이 있어야만 한다. 우연이 지배하는 이 세상은 결국 하나님이 지배하지 못한다. 그래서 만약 1%라도 하나님의 지배가 약화되고 하나님이 우연을 지배한다면, 하나님이 지배하지 못하게 되는 것이다. 이럴 땐, 하나님의 은혜가 있을 수 없다. 그 1%가 언제 발생할 지 모르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에 전적으로 반응할 수 없게 된다. 그래서 우리가 다시 대수 등식으로 돌아가게 되면 내 의지가 1%일지라도 그 1% 때문에 이 세상은 우연이 지배하는 세상이 된다.

 

1%라도 우리가 우연성을 허용한다면, 그것은 결국, 우연이다. 이런 구도 속에서는 모든 인생이 우연시 된다. 우연의 지배를 받는 다는 것은 다양성의지배를 받는 것이고, 다시 말하자면 포스트 모더니즘의 지배를 받게 되는 것이다. 모든 것이 파편적인 것이다. 의를 찾지 않고, 도덕을 찾지 않고, 목적을 찾지 말고, 그냥 있는 그 대로 살자는 식으로 흘러가서 결국은 회의론적으로 살게 되어진다.

 

고린도전서 1:25~29 의 말씀을 살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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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 1:25 하나님의 미련한 것이 사람보다 지혜 있고 하나님의 약한 것이 사람보다 강하니라 26 형제들아 너희를 부르심을 보라 육체를 따라 지혜 있는 자가 많지 아니하며 능한 자가 많지 아니하며 문벌 좋은 자가 많지 아니하도다 27 그러나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 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 28 하나님께서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 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폐하려 하시나니 29 이는 아무 육체라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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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이 인생에 힘있는 자들을 쓰지 않으시고, 우리 약한 자들을 쓰신다. 세상의 능력 있는 자들을 쓰지 않으시고, 부족한 자들을 쓰신다. 이 말이 변증학적으로도 적용이 될 수 있다. 왜냐하면 세상에서 강한 자들, 힘있고 능력 있는 자들일수록, 이성과 계시의 어느 한 쪽에 고집스럽게 머물게 된다. 어느 한 쪽에 고집스럽게 머물수록 하나님의 관점에서는 문제가 있는 것이다. 그것이 종교적으로 나타나건, 철학적으로 나타나건 어느 한 쪽에 고집스럽게 머무는 것은 문제가 된다. 철저하게 아예 아래쪽에서 합리주의자가 되던지, 아니면 율법 주의자가 되던지 하게 된다. 율법주의자가 되려면 강해야 한다. 약한 사람은 율법주의자가 될 수 없다. 혹은 위층에서 반율법주의자가 되어야 한다. 반율법주의자도 강해야 될 수 있다. 웬만한 사람들은 율법주의로 사는 것도 쉽지 않고, 반율법주의로 사는 것도 쉽지 않다. 이 양자 모두의 경우에 공통적으로 고집이 강하다.

 

바울이 말한 강한 자들은 힘이 센 사람들이다. 변증학적으로 우리가 강한 자를 본다면, 철저하게 자기 고집으로 위층과 아래층 둘 중 한 군데에 머물려는 고집, 집착을 가지는 사람들이다. 이런 사람들일수록 지도자인 경우가 많다. 석가모니, 간디 와 같은 인류의 성인들, 고집이 센 사람들이다. 이런 사람들일수록 사람들이 따르고, 추종한다. 그런데, 하나님의 관점에서 봤을 때 이런 사람들이 가장 문제가 심각한 사람들이다. 오히려 약한 사람들, 율법주의로 살다가 아닌 것 같아서 반율법주의로 가고, 그 사이에서 왔다 갔다 하는 의지가 약하고, 자기 자신의 주장들을 막 펼치지 못하는 사람들이 하나님의 입장에서 보면 오히려 더 가능성이 있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갈등하고 있기 때문에, 이런 인간적 조건이 약한 사람들이 더 쓰임 받을 수 있다는 참으로 아이러니컬 한 결론이다. 하나님이 힘있는 자들을 안쓰시고 약한자들을 사용하시는 것은 이렇게 변증학적으로 설명되어진다. 강한 자일수록 한 쪽에 머무르기 때문에 약해진다. 모더니즘에 입각해서 기계적, 율법주의적, 합리주의적으로 살던지, 아니면 아주 초월해서 해탈의 경지로 가던지, 도덕적으로 반율법주의로 가던지 하면서도 마음에 아무런 거리낌을 느끼지 않는 것이다.

 

이 세상의 종교 지도자들, 사람들이 추종하고, 매력을 많이 느끼는 사람들일수록 훨씬 더 절망적이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약한 자들, 어리석은 자들을 더 많이 사용하시는 것이다. ‘너희를 부르심을 보라 육체를 따라 지혜 있는 자가 많지 아니하며 능한 자가 많지 아니하며 문벌 좋은 자가 많지 아니하도다.‘ 이것이 십자가 신학이다. 루터가 얘기한 십자가 신학. Theology of the Cross. 역설적인 것이다. 십자가는 하나님의 역설이다. 십자가에서 가장 하나님의 역설이 표시된다. 가장 치욕스러운 것, 가장 천하고 모욕적이고 낮은 것을 통해서 가장 영광스럽고 명예로운 하나님의 구원을 이루셨다. 루터는 이 것을 영광의 신학(Theology of Glory)으로 대비시켰다. 그러면서 로만 카톨릭을 이 영광신학의 대표적인 케이스로 얘기했다. 그러니까 교회가 점점 제도화되면서 교회가 커지고, 성직자들의 권위가 올라가고 세상 권세와 성직자의 권세가 분간할 수 없을 정도로 엄청난 존재들이 되었다.

 

그런데 루터가 말한 것은, 하나님은 그렇게 일하시는 분이 아니라는 것이다. 중세 천주교를 보면서 너희는 지금 그렇게 하지 않고 세상에서 능력 좋은 자, 문벌 좋은 자가 되고 세상에서 인정하는 것을 따라간다. 그러나 하나님은 십자가를 통해서 영광을 얻으신다는 것을 말한다. 루터에 의하면 세상에서 강하면 할수록, 그는 하나님의 은혜를 의지하지 않게 된다는 것이다. 그럴수록 인간은 철저하게 반율법주의자가 되던가 율법주의자가 되게 되어있고, 그것을 매력적으로 생각해서 사람들을 따라가게 만들어 진리로 믿게 가르친다. 영광에 가까이 갈수록 2층의 모델이 진리인 것처럼 생각된다. 그러나 십자가에 가까이 갈수록 우리는 ‘함수적 모델’을 따라가게 된다.

 

질문 : 일반은총이 포함될 수 있는데, 일반은총을 통해 하나님이 우주를 보존하신다. 그런데, 일반 은총이 특별은총을 거부하는 이야기인가?

 

응답 : 일반은총의 이야기는 좀 동떨어진 이야기이다.

 

질문 : 강한 자도 일반은총의 영역 가운데 있는 것이 아닌가? 그런데 거부하지 않는가?

 

응답 : 일반은총이 특별은총을 거부하는 것이 아니다.

 

질문 : 강한 자 일수록…?

 

응답 : 일반은총이 거부하는 것이 아니라 부패한 이성이 거부하는 것이다. 부패한 이성으로 헬리콥터도 만들고 핸드폰도 다 만든다. 우리가 그것들을 다 사용한다. 그런 것이 일반은총이다. 부패한 이성을 가지고 좋은 일을 위해 사용한다. humanity를 위해서 그렇게 사용하기도 한다. 그런데 일반은총의 관점에서는 하나님의 창조의 목적을 다하기 위해서 문화를 가꾸고 학문도 하고, 예술도 발전시킨다. 그러나 하나님의 주인 되심을 인정하는 데까지 나아가지는 못한다.

 

질문 : 사람이 강하다는 것을 일반은총을 많이 받은 것이라고 생각하기 쉽지 않은가?

 

응답 : 어떤 부분은 그렇게 생각할 수 있겠지만, 여기서 강하다는 것은 그런 의미에서 강한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그 일반 은총의 의미도 그런 식으로만 이해해서는 안된다. 강하다는 것은 하나님에 대해 거역하는 의미로 동원되는 강함, 지성 등을 말하는 것이다.

 

실제적으로 목회 현장에서 우리가 상당한 경험을 하고 질문을 던질 수 있는 것이다. 강한 것이 은혜 안으로, 함수 안으로 들어왔을 때, 아주 뛰어나게 하나님을 찬양하는 능력으로 드러내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강한 것이 결국은 하나님의 은혜를 약화시키거나 2층적 대수 구도 속에서 오히려 반은혜적인 것들을 더욱더 강화시키고 지원하는 것으로 사용되어진다고 볼 수 있다. 은혜 안으로 들어왔을 때는 강한 것이 놀랍게 사용되어질 수 있는데, 그 안에 들어오지 않았을 때에는 십자가 보다는 영광의 삶으로 나아가기 때문에 은혜를 찬양하기 보다는 은혜를 약화시키는 것을 볼 수 있다.

 

반틸 변증학에 깔린 대전제는 바로 그 은혜이다. 다 은혜로 되면 사람이 할 일이 무엇인가? 그런 질문이 나올 수 있다. 그러나 이 반틸의 시스템이 아주 일관성이 있다. 매우 체계적이고, 공부를 해 본 사람은 놀라게 된다. 복잡한 이론을 파헤치다가 보면 매우 simple 한 결론, ‘그래서 은혜로구나’ 라는 간단한 결론에 다다르게 된다. 그래서 놀라게 된다.

 

 

 

이 그림은 John Frame 이라는 교수가 그린 그림이다. 그래서 Frame’s Frame 이라고 부른다.

 

이 frame 은 좀 simple 한데, 나는 좀 더 발전시켜서 복잡하게 만들었다. 좀 더 응용한 것이다.

 

왼편에 보편 하나님의 주권과 인간의 전적 부패를 전제로 한 세상을 그리고 있고, 오른쪽 세상은 가상의 세상, 죄인이 만들어낸 허상으로서 인간이 인간 주권을 가지고서 전적 타락이 아니라 부분적 타락, 즉 결핍을 전제로 하는 세상이다. 추가적으로 하나님이 더해준 선물로 은혜를 생각하고, 자연은 그대로 남아있는데, 하나님이 은총만 더해주시면 된다고 생각하는, 인간이 가상적으로 만든 세상을 box 로 비교한 것이다.

 

왼편을 보면, 위층은 하나님의 초월성이 있다. 이는 우리에게 불가해성을 의미한다. ‘우리는 근본적으로 창조주 하나님을 알지 못한다’는 것이다. ‘하나님을 우리 머릿속에서 정의 내릴 수 없다.’는 것이다. ‘신존재 증명’이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유신론적 신 존재 증명’은 합리주의가 지배하던 모더니즘에서 나온 것이다. (17, 18세기) 그 ‘유신론적 신 존재 증명’은 사실은 자연신학적 성격을 가지고 있으므로, 특별히 계시의 지원을 받지 않더라도 인간이 자체적으로 얼마든지 신 존재에 대해서 그 존재의 개연성과 영적 세계의 개연성을 증명해 낼 수 있다고 믿었다. 그런 이론을 증명 정리한 것이다.

 

반틸의 입장에서 보면 이것이 우리가 이미 신앙을 가지고서 그것을 사용한다면 가치가 있는 것이지만, 말씀을 제쳐놓고 자연인이 말씀의 지원을 받지 않고서 혼자서 신 존재 증명을 해 낸다는 것은 불가해성을 가질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칸트가 말한 실천적 의미에서의 추상적 신이지 인격성을 가지며 삼위일체적인 신은 아니라는 것이다. 그저 막연하게 그런 존재가 있을 법도 하다는 이야기를 할 따름이다.

 

물론 성경을 가지고서 그런 증명을 동원할 때는 가치가 있지만, 그런 전제가 없이는 가치가 없는 것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그 아래쪽을 보게 되면 하나님의 내재성, 공유적 속성이 있다. 하나님은 우리 인간을 창조하시고서 어디 멀리 가신 분이 아니다. 하나님은 관여하시고, 내재하시고, 우리와 인격적으로 만나시고, 약정을 맺으시고 우리를 축복하시고, 야단치시며 인격적으로 대하신다. 이것을 하나님의 내재성, 혹은 인격성이라고 한다. 이런 점에서 볼 때, 우리 인간은 하나님을 알도록 되어있다. 서로 지식이 있기 때문에 교제가 가능한 것이다. 앎을 통해서 사랑의 교제가 일어나는 것이다.

 

가해성이라는 것은 인간이 자체적 능력이 있어서 하나님을 아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내재적인 분이시며 인격적인 분이시기 때문에 알 수 있게 된다는 것이다. 모더니즘의 가해성과는 전혀 다른 개념이다. 이 가해성이 주어지는 방법은 하나님의 계시, 특별계시와 일반계시를 통해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이상적인 상태라고 볼 수 있다. 이 상태는 에덴동산에서의 처음 상태도 될 수 있고, 거듭났을 때의 그 상태로 생각해 볼 수도 있다. 그러나 반대쪽으로 오게 되면, 허상이 있다. 인간이 자기 나름대로 설정한 세상이다. 여기에는 인간의 합리주의가 있다. 여기에는 그림을 보지 않고 수 천개의 퍼즐조각을 혼자서 알아 맞추는 것과 같은 식의 접근 방식이다. 그림이 필요 없다고 하는 것이다.

 

불합리주의는 무엇인가? 혼자 그림 조각들을 다 맞추려다 보니까, ‘이것은 불가능하다’라는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그래서 불합리주의로 가게 된다. 그 모든 문제는 계시 부재에 있다. 계시 부재 상태에서 인간은 합리주의의 극단과 포스트 모더니즘의 극단 사이에서 헤매게 된다. 이런 반복이 역사 속에서 계속된다. 또한 이 속에서는 초월과 내재 사이에 논리적 대립이 있다. 그래서 인간이 생각하기에 ‘내가 하나님에 대해 알지 못하고 초현상적 세상에 대해 알지 못하는 것은 계시의 부재 때문이다’라는 생각은 하지 않고, ‘아하, 인간은 본래적으로 현상적인 이 물질세계와 초현상적인 이 세상 사이에서 절대적 대립을 가진다.’라고 생각을 하는 것이다. 영과 육을 나눠서 서로 대립시키는 것이다. 영원히 건널 수 없는 강이 영,육 간에 흐르고 있는 것이다. 인간 안에 대립이 있는데, 이 대립이 도저히 걵널 수 없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안에서 대립을 느끼고, 부족함을 느끼게 된다. 이것이 인간이 이를 수 있는 최선의 한계점이다. 우리는 알 수 업으니까, 부족하다. 그래서 결핍론으로 빠지게 된다.

 

인간이 만든 쪽에선 그런 세상이 있고, 왼쪽에는 또 하나님이 지배하는 세상이 있는데, 모순선이란 무엇인가? 합리주의와 불가해성이란 모순이 된다는 것이다. 합리주의는 계시가 없이도 이해할 수 있다는 것, 불가해성은 하나님이 계시해 주시지 않으시면 알 수가 없다는 것이다. 반대로 불합리주의, ‘어차피 인간은 초월적인 초현상계에 대해서는 말할 수 없다. 직관적 통찰을 통해서만 말할 수 있지 진리를 명제화 시킬 수 없다.’는 것을 말하는 데, 이 불합리주의는 왼쪽의 가해성과 모순이 된다. 가해성에서는 ‘진리는 명제화 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 하나님은 공의로우시다. 인간은 구원이 필요하다. 등이 계시 명제이다. 물론 자유주의에서는 이런 것들을 주관적 신앙고백으로 처리해 버리지만, 우리에게 이것은 계시의 명제이다.

 

조직신학 신론에서 나오는 가해성과 불가해성은 이런 문제를 다룬다. 가해성과 불가해성 사이에서는 대립이 없다. 조화가 있다. 에덴 동산에서 인간은 전혀 그런 대립을 느끼지 않았다. 모르는 것은 모르는 것이고, 아는 것은 하나님이 가르쳐 주셔서 아는 것이고. 단지 그런 것이다. 이것은 은혜가 지배하는 구도이다. 은혜 안에서는 모르면 모르는 만큼 모르는 것이고, 아는 것은 아는 만큼 알면 된다. 하나님이 지배하시기 때문에 갈등을 느끼지 않는다. 그러나 오른 쪽의 영역에서는 갈등을 느낀다. 그래서 도를 쌓고 수도를 해서 영의 세계로 건너가려 노력을 한다. 그러나 실패한다. 모순이 있다. 그러나 모순만 있는 것이 아니다. 이 외에 유사성의 선을 설명해야 한다. 내용적 유사성이 아니라 형식적 유사성을 가지고 있다. 유사성이라는 것은 바로 이 실재와 가상 사이에서 비록, 가상은 진리가 아니고 거짓이고, 조작된 세상이지만, 이 안에도 진리와 유사한 부분이 있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진리를 모방하고 하나님처럼 되려고 했던 것이었기 때문에 유사성이 있다. 진리를 모방한 것이 비진리이다. 그래서 불합리와 불가해 사이에는 형식적 유사성이 있다. 초월이라는 관점에서.

 

인간에게는 하나님을 상대로 했을 때, 하나님은 인간을 초월하는 존재 이시라는 것을 유사하게 가지고 있다. 그리고 아래쪽의 영역에서 합리주의와 가해성은 내재라는 관점에서 볼 때 유사성을 가지고 있다. 오른 쪽의 것은 모조품이다. 그런데, 이 것들을 무조건 나쁘다고만 보지 말고, 우리는 이것들을 통해서 무엇이 진실인지를 거울 삼아 볼 수 있고, 또 진실을 통해서 거짓을 거울삼아 볼 수 있다. 그래서, 인간적으로 잘나고, 능력이 많은 사람일수록 왼쪽에 대해서는 눈을 감고 다른 쪽만 보려고 한다. 모순선이 있다는 것은 그 안에서 갈등을 느끼는 부분이 있다는 것이다. 합리적인 측면에서도 갈등을 느끼게 되는 부분이 있다. 하나님이 보여주시는 그림이 없이는 진리를 맞춰나갈 수 없다는 것을 느끼기 때문에 그림자와 같은 모순선상의 불가해성에 대한 갈등이 있다. 그런 식으로 모순선을 타고서 진리에 대한 갈등과 배고픔이 생겨나게 된다.

 

합리주의자는 모든 것들을 수학적 좌표에 의해서 잴려고 한다. 수학자의 마음 속에서 하나님은 나의 공식에 들어올 수 없고, 하나님은 내 머릿속에 들어오실 수 없다는 하나님을 찬양하는 마음이 생겨나게 된다. 합리주의자가 자꾸 그런 calling 을 받으면 왼쪽으로 가야 하는데, 그쪽으로 가지 못하고 불합리주의 쪽으로 넘어간다. 사실은 불가해한 하나님에 대해 이해하면서 그를 예배해야 하는데도 불구하고. 인간은 피조물이기 때문에 모순선 으로부터 signal 을 받아야 하는데, 그러지 못한다. 오직 거듭난 사람만이 왼편으로 옮아갈 수 있다. 그래서 우리가 예배하는 것이나 합리주의자나 불합리주의자가 하는 일들 사이에 유사성들이 나타날 수 있다. 불합리주의자에게서 예배와 유사한 형태의 행동을 찾아볼 수 있다. 한편, 불합리 주의자에게서도 이런 모순선에 의한 signal 에 반응하는 것들을 발견할 수 있다. 이들은 뭔가 자신들이 믿고 싶은 것을 명제화 하려는 욕구가 있다. 그런데 믿음을 가짐을 통해서 가해성의 영역으로 내려오지 않고 합리주의로 넘어가게 된다.

 

정리하자면, 합리주의자가 불합리주의자가 되었을 때, 그도 신앙을 가지게 된 것이다. 일종의. 뭔가 나와는 다른 실체가 있다는 수준까지는 인정을 한 것이다. 그래서 자유주의 신학을 한 사람들이 바로 성령운동으로 확 바뀌는 경우가 많이 있다. 자유주의를 가지고서는 안된다는 것을 깨닫는 어느 순간, 그는 바른 신학으로 가지 못하고 그냥 jump 해서 이성과 합리를 가지고는 안되니까, 신비의 영역으로 넘어가 버린다. 자유주의 신학을 배워서 성령운동으로 넘어가서 성공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 하나님께서 합력해서 선을 이루신 케이스라고 하겠다.

 

왼쪽의 영역에서는 뛸 이유가 없다. 가해성과 불가해성은 자연스럽게 조화한다. 그러나 오른쪽의 상,하층부는 모순 되기 때문에 항상 뛰어야 한다. 왼쪽 상층부의 하나님주권과 오른쪽 하층부의 인간주권(합리주의)은 모순을 의미한다. 복수주권은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또한 왼쪽 하층부의 참 지식가능성과 오른쪽 상층부의 지식불가능성은 모순을 의미한다. 인간이기 때문에 지식이 불가능한 것이 아니고(결핍론) 하나님을 떠났기 때문에(죄론), 지식이 불가능한 것임을 죄인은 인정하려 들지 않는다. 왼쪽 상층부와 오른쪽 상층부는 형식적 유사성을 갖고 있다. 지식의 불가능성이라는 관점에서 보면 그렇다는 말이다. 왼쪽 하층부와 오른쪽 하층부 역시 형식적 유사성을 갖고 있다. 지식의 가능성 이라는 관점에서 보면 그렇다. 문제는 지식의 가능성이냐 불가능성이냐 그 자체가 아니라 왜 그러냐가 문제이다. 지식의 가능성과 불가능성 양면성은 인간존재의 필연적인 조건이다. 피조물인 인간은 경우에 따라서 알 수도 있고 모를 수도 있다. 존재일반은 지식의 가능성이나 불가능성을 하나님을 떠난 인간의 주권의 관점에서 보는 것이다. 기독교 존재론은 지식의 가능성과 불가능성을 하나님의 주권의 관점에서 보는 것이다. 계시적 존재로 지음 받은 인간은 계시에 의존할 때만 지식이 가능한 것이다.

 

현재적 종말론과 미래적 종말론의 두 관점에서 본 인식론의 변화. 신자는 현재적 종말의 관점에서 보면 원칙적으로 이미 “왼쪽”에 있는 것이다. 그러나 미래적 종말의 관점에서 보면 실제적으로 아직 “오른쪽”에서 존재일반의 전제와 싸움 속에서 사는 것이다. 이미 구원 받은 자는 원칙적으로 왼쪽에 와있지만, 실재적으로는 모순 속에서 살아가고 있는 경우가 많은 것이다. 그러니까, 이미 여기에 와있지만, 아직 오른 쪽에 와있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그래서 성화, 옮겨가는 일을 해야 한다. 불신자가 오른 쪽의 전제를 이탈하지 않고, 변증을 하게 된다거나, 이 전제를 이탈하지 않을 상태에서 신학을 하게 되면, 그 신학이 모순점을 그대로 가지고 있는 상태에서 신학적 체계를 만들어 가게 된다. 불합리와 합리의 비율이 틀릴 수는 있지만, 그 구조를 이탈하게 되지 않게 되는 것이다. 그런 신학은 그런 종류의 신앙을 만들어 낸다. 학교가 좌경화 되어지고 나서는 교단이 좌경화 되어진다. 그래서 대중화 되는 것이다. 그래서 감신 같은 경우는 오래 전에 종교다원주의를 배운 사람들이 신학을 했고, 그것이 그대로 대중에게로 내려오는 것이다. 그런 내용을 배워서 설교할 것이 없어지게 되면, 자기 혼자 영성 개발을 해서 영성 목회를 하게 되는 이중적 방향성이 생겨나게 된다. 그래서 신학이 먼저 있게 되고, 신앙이 그 노선을 따라가게 된다. 그래서 신앙적으로도 이 도표를 가지고서 설명할 수 있다. 오른쪽의 체계를 이탈하지 못하는 신학체계는 그 상층부와 하층부를 오락가락할 뿐, 더 이상 나아지지 못하게 된다.

 

중요한 것은 실재의 세계에서 가상의 세계로 모순선을 통해서 계속해서 signal 을 보낸다는 것을 기억하는 것이다.

 

 

 

 

제 5 장

 

frame 만 그려놓고 얘기를 시작한다.

 

frame 에서 모순선을 따라 움직이는 것은 signal 이다. 이 signal 들이 왼쪽의 세계에서 오른 쪽 세게에 있는 사람들에게 보내는 calling 이다. 결국 바른 신학은 초월성과 내재성 사이에서 진정한 의미에서의 균형과 조화를 이루는 것이 바른 신학이다. 바르지 못한 신학은 초월성과 내재성은 비록 있지만, 이 양자 사이에서 진정한 의미의 조화와 균형이 없는 것을 말한다. 신학, 신앙, 경건 모든 것이 이런 관점에서 평가되어질 수 있다. 문제는 초월적이냐 내재적이냐가 아니라 이 양자가 대립적인가, 조화를 이룰 수 있는 가 하는 것이다. 이 문제는 여러 가지 많은 적용점을 가지고 있다. 오른쪽 편에서 왼편으로 가는 수평선은 진리의 문제로 우리가 정의 내릴 수 있고 수직선은 적용의 문제라고 이해해 볼 수 있다. 수평선의 움직임은 비 진리에서 진리로 움직이는 것이고, 수직선의 문제는 초월과 내제 사이에서 상황에 따라서 움직이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예를 들면 우리가 얼마든지 이 진정한 진리 안에서 진리 편에 있을 때에 진정한 바른 신학 안에 있을 때는 초월과 내재 사이에서의 다양한 적용점들이 있을 수 있다. 예를 들면, 우리가 율법주의와 반율법주의는 분명히 잘못된 것으로 알 수 있다. 그러나 상황에 따라서 어떤 사람은 조금 더 율법적인 성향을 가질 수 있는 사람이 있다. 조금 더 자기가 그렇게 살아야 자기가 편하고, 기질적으로나 모든 상황이 조금 더 규칙을 많이 필요로 하는 사람들이 경우에 따라 있을 수 있다. 어떤 사람은 반대로 규칙보다는 반대로 자유를 좀 더 줘야 하는 상황이 있을 수 있다. 대체로 신앙이 어린 사람들은 율법적인 방향에서 그 사람을 지도하고 교육시켜야 할 필요가 있을 수 있다. 그리고 좀 성숙한 사람에게는 좀 더 자율을 허용해서 은혜 안에서 자율, 자발적으로 순종하도록 유도하고 교육시킬 필요가 있다.

 

그렇다면, 진리 안에서는 우리가 위쪽 상층부로 올라가는 경우도 있고, 조금 아래쪽으로 내려오는 경우도 있을 것이다. 경우에 따라 조금 더 율법적 성향을 띨 수 있고, 반율법주의는 아니지만 반율법적 성향을 가진 사람이 있을 수 있다. 목회를 하다가 보면 그런 상황이 있을 때가 있다. 지식적인 문제도 마찬가지이다. 아래쪽에서는 약간 합리적이고, 위쪽은 좀 더 불합리적인 측면이 있게 되는데, 지식적으로도 많이 배우지 못한 사람의 경우에는 아래쪽에 있을 수 있다. 지나치게 지식적인 가르침을 수용하는 데 어려움이 있기 때문이다. 믿음의 관점에서 믿음을 가르쳐 주고, 지식적이거나 너무 지나치게 이론적인 것들은 피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목회하는 대상이 교육 수준이 좀 낮은 편이라면 그렇다. 반대로 목회하는 상대가 아주 고등 교육을 받은 사람들이라면, 신앙을 상당히 합리적으로 가르치고 설명해 줘야 할 부분들이 있을 수 있다. 그래서 상황에 따라서 우리가 진리에 들어왔을 경우에는 초월성과 내재성의 균형이 조금씩 다 가질 수 있는 것이다. 문제는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넘어가는 것이 문제이다.

 

문제는 조화가 없이 균형을 찾지 못한 상태에서의 초월성과 내재성은 2층 구도이기 때문에 상층부와 하층부의 대립관계 속에 서 있는 오른 쪽에서는 문제가 되는 것이다. 그러나 왼쪽에서는 얼마든지 문제 없이 자유롭게 적용점을 찾을 수 있다. 수평선은 진리의 문제이다. 타협할 수 없는 문제. 그러나 수직선은 적용의 문제이다. 타협할 수 있는 것, 자유로운 것이다. 서양의 사고구조는 상당히 하층부에 있다. 합리적이고 굉장히 구체적이고 조직적이다. 그런 마인드가 서양사람들에게 지배적이다. 동양적인 사고는 상층부에 많이 쏠려 있다. 그래서 약간 초월적인 경향을 가진다. 이것은 문화적 차이이다. 문화적 차이에서 기인한다. 그렇다면 서양식 신학스타일이 진리인가? 아니면 동양스타일의 신앙고백이 진리인가? 이런 질문은 잘못된 것이다. 그것은 이미 진리 안에서 문화적 차이와 상황적 차이에서 오는 진정한 복음의 자유 안에서 필요에 의해 강조점을 어디에 두느냐 하는 것의 문제이지 그것이 서양이 옳거나 동양이 옳다는 식으로 생각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이런 질문을 할 때, 우리는 이미 오른 쪽의 영역으로 넘어와서 모순을 일으키고 있는 것이다. 순전히 이런 문제는 적용의 문제이다.

 

아프리카에 가면 예배 스타일이 완전히 틀리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한국에서는 손을 들고 예배 시간에 찬양하면 마귀라고 했다. 이렇게 했던 시간이 바로 얼마 전이다. 손을 들고 노래를 부르고 하면 얼마 전까지만 해도 마귀라고 불렸었다. 이것은 문화적인 차이이다. 그런데 우리는 또, 나이가 많이 드신 어른들은 그런 스타일의 예배를 좋아하지 않는다. 그런데, 젊은이들이 볼 때, 그것은 복음이 아니다. 자유 해야지 왜 저러고 있느냐고 한다. 그러나 그렇게 말하는 것도 잘못된 것이다. 고상한 것인 진리인가? 아니면 신세대 스타일로 자유롭게 하는 것이 진리인가? 하는 문제를 닥친다면, 이 양자 어느것도 진리가 아니다. 이런 문제는 왼쪽의 영역에서 자유롭게 적용하면서 해답을 찾아나갈 문제이다. 이런 질문을 던지는 순간 오른쪽으로 넘어와서 대결 구도, 모순의 구도로 넘어와서 있게 되는 것이다.

 

우리는 보수냐 자유냐의 문제를 많이 부닥친다. 보수냐 자유냐의 문제는 수직 선상에서 찾으면 안된다. 조금 합리적으로 이야기하기 시작하면 그 사람을 자유주의, 조금 안 따지고 무조건 믿어버리고 초월적으로 나아가면 보수주의라는 식으로 따지면 안된다. 문제는 왼쪽의 영역에 와있는 것이 필요하다. 어떤 경우에는 합리적인 훈련이 필요하고, 어떤 경우에는 기도원에 들어가서 경건의 훈련을 해야 할 필요도 있는 것이다.

 

그것을 가장 잘 보여주는 케이스가 바울의 경우이다. 바울은 진리의 문제와 적용의 문제를 아주 정확하게 알고 있었던 사람이다. 바울은 ‘다른 복음을 전한 자들에게는 저주가 있을 지어다’ 라고 말했다. 그것은 진리, 수평선의 문제이다. 그러나 다른 부분에서는 유대인에게는 유대인처럼, 헬라 인에게는 헬라 인처럼, 야만인에게는 야만인처럼…. 복음을 전하겠다고 한다. 이 양자의 조화가 매우 중요하다. 이 두 가지를 어떻게 우리가 분간할 것인가? 한 편에서는 다른 복음을 전하는 자들에게 아주 엄중하게 하면서, 다른 한 편에서는 매우 유연성 있는 태도를 취한다. 내가 목회를 하면서 이미 미국에서 30년이 된 교회에 장로님들이 12 명인 교회에서 목회를 하고 있다. 그 중 대부분이 60대이다. 아무리 그분들에게 ‘유대인에게는 유대인처럼, 헬라 인에게는 헬라 인처럼… ‘ 이야기하면서 설교를 해도 그분들은 절대 받아들이지 못한다. 우리 스타일이 있고, 야만인들이 와서 배우려면 배우라는 것이지, 우리가 야만인, 이방인에게 맞춘다는 것은 이해가 되어지지 않는다.

 

이는 진리의 문제가 아니라 복음을 위해서 그리스도의 사람을 만들기 위해서 그렇게 한다는 것이 어느 정도 굳어진 사람들에게는 아무리 이야기해도 이해가 되어지지 않는다. 그냥 듣고 지나가버리고 말아버린다. 그렇게 하는 것을 복음에 대해 타협하고, 진리에 대해 타협하는 것처럼 생각하는 것이다. 자기들이 와서 우리 스타일로 예배를 드리고, 싫으면 가라는 식이다. 거기에서 요지부동이다. 바울은 이 두 가지를 잘 했다. 그 대표적인 예가 디모데와 디도에게 할례 문제를 가지고 처리했던 일에서 볼 수가 있다. 디모데는 유대인 사역을 같이 하기 위해서 바울이 제자 삼은 사람이다. 그런데 디모데는 할례를 받은 친구였다. 그러나 디도는 할례를 시키지 않았다. 일부러. 이방인 사역을 시키기 위해서. 이방인 사역을 하는데 할례를 시킨다는 것은 이방인 사역에서 장애가 되기 때문이다.

 

두 제자가 있는데, 한 제자는 할례를 시키고, 다른 제자는 할례를 시키지 않았다. 유대 그리스도인들, 히브리 그리스도인들의 입장에서 보면 굉장히 shocking 한 사건이다. 할례를 안 시키고 데리고 다닌다는 것 자체가. 할례를 시켰다. 그것은 율법적 성향의 문제이다. 바울이 복음을 몰라서 할례를 안 시켰는가? 아니다. 그는 복음 외의 것이 걸림돌이 되게 하지 않기 위해 그렇게 한 것이다. 복음, 그 자체만이 걸림돌이 되어야 한다. 복음이 걸림돌이 된 경우는 하나님이 책임을 지신다. 그러나 비 복음적 요소에서 걸림돌이 된다면 우리에게 책임이 있다. 디모데에게 할례를 시킨 것은 율법적인 성향이 보인다. 반대로 디도의 경우에는 할례를 안 시켰다. 이는 반율법적인 성향으로 보인다. 바울이 반율법주의자라서 인가? 아니다. 혹시라도 그 문제 대문에 할례가 복음 사역에 걸림돌이 될까봐 그런 것이다. 여기에서 또 약간 상층 부위로 올라가는 것이다. 이것은 상황윤리가 아니다. 상황윤리라는 것은 기준이 없이 오락가락하는 것이 상황윤리이다. 합리주의로 가다가 안되면 불합리주의로 가고, 불합리주의로 하다가 안되면 합리주의로 가는 것이 상황윤리이다. 그런데, 많은 분들이 아래 위의 문제를 가지고 불필요하게 ‘복음이다’, ‘아니다’ 의 싸움, ‘본질이다,’ ‘비 본질 이다’ 의 싸움을 한다.

 

 

 

질문 : 디모데나 디도의 경우는 복음을 받았으니까 걸림돌이 되지 않았다. 그러나 유대인의 경우에는 할례를 하지 않으면 안되니까 거기서 할례를 받음으로써 아직 예수를 영접하지 않은 유대인의 입장에서는 예수를 믿더라고 할례를 받아야 한다는 입장으로 굳어지지 않겠는가? 유대인들은 아직 믿음이 없다.

 

그렇게 본다면, 처음에 접근은 할례로 접근하지만 나중에는 유대인들도 할례를 받지 않아도 된다는 생각을 가지도록 해야 되는 것이 아닌가?

 

응답 1 : 할례가 이슈가 아니라 복음이 이슈이니까 그렇게 접근하는 것이 아닌가?

 

질문 : 이 일을 통해서 할례 무용성을 드러내야 하는 것이 아닌가? 할례를 통해서 율법과 구원의 사이에 분명한 구분이 있어야 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것이다.

 

응답 : 그것을 말하려 하는 것이 아니라, 바울이 왜 이런 식으로 했는가를 관찰한 결과이다. 내가 말하는 것과는 다른 차원의 것, 성장이라는 차원, 성숙으로 가는 차원에서의 문제이다. 복음과 율법 사이에서 합의점을 찾아서 너무 율법주의적 성향을 가진 사람들은 다소 자유롭게 하고, 너무 방종하는 사람들을 순종하게 하는 문제는 신앙 성숙의 문제이다. 이것은 과정의 문제이므로 어느 시점에 가서는 충분히 양육을 통해 해결되어질 수 있는 문제이다.

 

여하튼, 바울은 진리의 안에서 그 상황을 보고, 사람들을 복음으로 끌어들이는 방법이 무엇인가를 나름대로 판단해서 했다는 것을 우리가 볼 수 있다. 계시의 말씀 속에 나타난 내용이기 때문에 바울이 틀렸다 라는 식으로 말할 수는 없지 않은가. 바울은 진정한 진리 안에서 순종의 범위가 사람마다 다 조금씩 다르다. 신축성을 가진다는 것이다. 결국은 lordship 의 문제로 가야 한다. 최종 목적은 율법적으로 사람을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결국에는 주님을 인정하고,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라가는 데까지.. 자유롭게 나아가도록 사람들을 양육시키는 문제가 남아있다. 이것은 초월과 내재, 합리와 불합리주의 사이에서 발생할 수 있는 하나의 문제로 볼 수 있다.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나이가 많이 드신 세대, 구세대의 경우에 있어서 진리의 문제를 상당히 모더니즘적인 관점에서 바라본다. 그래서 고상하고 점잖고 고전적인 것을 진리의 성향과 동질화 시키는 것이 발견된다. 그러나 신세대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다. 그들은 점잖고 고상한 것들과 진리를 동일화 시키지 않고, 좀 다양하고 구조를 이탈하는 방향으로 진리를 생각한다. 그러니까 이런 문제에서 음악 문제가 대두된다.

 

교회 음악에서 특별히 이런 문제가 많이 대두되는데, 모짜르트의 음악은 가장 합리주의가, 인본주의가 절정에 달했을 때 만들어진 음악이다. 아주 합리적이고 고상한 시대였다. 그러니까 교회에서 모짜르트 음악을 아무리 틀어도 아무 소리 안 한다. 그러나 기타를 치고, 드럼을 치면 마귀 음악이라고 한다. 그런 것은 조금 역사를 아는 사람의 입장에서는 그렇게 보여지지 않는다. 모짜르트의 음악은 가장 인본주의적이고 합리주의적이던 시대에 만들어진 음악이다. 그런데 고상하게 들리니까 좋아하고, 기타를 치고 드럼을 쿵쾅거리며 치는 것을 옳지 않게 보는 것은 오른쪽의 영역에 넘어와 있는 것이다.

 

겉으로 보기에 고상해 보인다고 해서 그것이 영적인가? 클래식 음악이므로 좋은 것이라고 단정짓고 넘어가는 것은 사실 복음적인 것이 아니다. 가장 복음과는 거리가 먼 시대에서 만들어진 문화적 유산을 가지고 복음적인 것처럼 생각하는 그런 부분이 있다. 반대로 젊은 세대들은 정 반대로 간다. ‘복음은 자유다’라고만 이해하려 든다. 이것은 또 잘못된 것이다. 진정한 복음 안에는 질서, 순종, lordship 이 있다 .자유하다고 하면서 순종하지 않고, 구조를 깨뜨리고, 제도를 반대하는 성향도 잘못된 것이다. 우리는 이 양 세대에게 그런 것들을 가르쳐야 한다. 쉬운 일들은 아니다. 아무리 말해도 머리로는 듣지만 마음으로는 깨닫지 못하는 것처럼, 우리의 습성이 그렇게 쉽게 바뀌지 않는다.

 

진리의 문제와 적용의 문제가 수평선과 수직선 사이에 있다.

 

성경해석에서 이런 부분들을 적용할 수 있다. 너무 지나치게 초월적으로 가면 (오른쪽에서) ‘영해’라는 것이 나온다. 알레고리가 도가 지나치면 ‘영해’가 나온다. 알레고리라는 것의 특징은 극히 주관적이라는 것이다. 객관적인 해석 방법을 따라가는 것이 아니라 그 당시의 역사적 상황을 연구하고, 또 헬라어나 히브리어로 쓰여진 계시의 말씀의 문법적 back ground 나 당시의 시대적 상황을 고려해서 저자가 의도한 1차적 의미가 무엇이냐 하는 것을 발견하려는 것보다는 직접적으로 영해를 해버리는 것이다. 내가 다 따지고 그럴듯하게 만들어 버리는 것이다. 이것이 성경 해석에 있어서 합리성을 초월해 버리는 것이다.

 

또 반대로 너무 지나치게 합리적으로 성경을 해석하다 보면, 소위 ‘비신화화’ 의 위험성을 직면하게 된다. 성경에서 신화를 다 빼버린다는 것인데, 성경에서 기적적이고 초자연적인 것들은 다 빼버린다는 것이다.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것들, 자연인들도 들으면 동의할 만한 것들, 도덕적인 것들, 자유주의 신학의 key point 인 윤리만이 남게 된다. 하나님을 아버지로, 인간은 형제로 가르친다. 이렇게 되면 사회 구원이 개인의 구원보다 훨씬 강조되어지게 된다.

 

너무 지나치게 합리적인 쪽으로 나가게 되면 초월적인 것은 다 빼버리게 되는 문제가 생긴다. 알레고리나 영해는 지나치게 신화화시키는 것이므로 결국은 이 양자가 다 위험한 것, 지나친 것이다. 영적으로 일단 한 번 지나치게 올라가 버리면 아래쪽, 합리적 영역에서 support 하지 못한다. 왼편의 구도에서는 아래쪽과 위쪽이 서로 붙잡아주고 지원을 해준다. 진리의 영역에서는 서로 검증, 지원, 증명이 가능하다. 그러나 왼편의 구도에서는 불가능한 것이다.

 

칭의에 있어서는 왼쪽에 들어왔지만 양육, 성화의 관점에서는 오른쪽에 살고 있는 것이 우리의 모순이다.

 

오른 편에서는 상층과 하층이 유기적 관계 없이 대립하기 때문에 해결되지 않는 문제가 있을 때마다 도약을 하게 된다. 영해에서 지나치게 주관적으로 간 것에 대해서 합리적으로 끊어주지 못하고, 또한 지나치게 지식적으로만 나가거나 역사비평적으로만 해서 가르친다면 오른 편에 있게 되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친다는 것이 문학을 연구하는 것도 아니고 이를 통해서 말씀선포의 역사가 나타나야 하는데, 그런 방향성 속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은혜를 끼치지 못하게 된다. 그럴 때 머리만 복잡하고, 부담만 되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영해와 비신화화 등의 문제가 성경 해석상에 있어서 초월과 내재의 문제에 걸린다. 이러한 적용을 우리가 이 box를 통해서 해 볼 수 있다.

 

우리가 상,하층부 문제를 가지고 또 하나 적용해 볼 수 있는 문제는 성령의 열매와 은사의 문제이다. 성령의 열매를 말씀에서 찾아봅시다. 갈라디아서 5:22,23 ‘ 오직 성령의 열매는 ………….. 이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

 

성령의 은사는 금지하는 법이 있다. 때와 용도에 따라서 금지조항이 있다. 어떤 상황에서는 하지 못하게 하고, 또 한다고 하더라도 통역자와 분별하는 자가 있어야만 한다. 그러니까 성령의 은사는 금지조항이 있다. 그것은 필요와 상황에 따라서 쓸 때가 있고, 또한 쓸 때도 어떻게 쓸 수 있는 지 조항이 있다.

 

그런데, 성령의 열매는 금지할 법이 없다. 이것은 많을수록 좋고, 어떤 상황에서도 좋다는 것이다. 전혀 여기에 대해서는 추가조항이 없다. 성령의 열매는 아래층에 속하는 것이다. 인격에 관계된 것이며 품성에 관계된 것이다. 자기 삶, 생활을 통해 나타나는 것이다. 그러나 성령의 은사는 조금 상층부에 속하는 것이다. 약간 초월적인 성격을 보여준다. 그래서 여기에서도 어떤 긴장관계가 생겨난다.

 

기적이라는 것은 책임 있는 삶을 약화시킬 수 있다. 모든 것이 기적적으로다 된다고 한다면 우리의 책임 있는 삶이 약화된다. 하나님이 다 해주시는데, 우리가 인내하고 기다릴 필요가 없는 것이다. 훈련이라는 개념이 다 빠져 버린다. 기적이 상식이 되었을 때, 경건의 연습은 없어진다. 하나님이 다 해주시는데, 굳이 우리가 인내하고, 성령의 열매를 맺어야 할 필요가 없다. 그래서 기적이 일상화 되어버린 기독교라면, 이 말씀에 모순이 생긴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기적이 필요한 때가 있고, 기적이 하나님의 능력과 복음의 능력을 나타내는 관점에서 기적이 있어야 하지만, 항상 성령의 열매라는 긴장 관계 속에 있어야 한다. 너무 지나치게 기적적으로만 나아가려고 하는 것에 대해서는 열매가 붙들어줘야 한다. 그러나 너무 실전적, 윤리적인 것들만 강조하다 보면, 복음의 능력이 나타나야 할 곳에 윤리성만 나타나게 된다. 이런 경우에는 하나님의 초월적인 기적이 나타나야 한다.

 

그래서 성령의 열매와 은사라는 두 가지는 얼마든지 왼쪽의 진리의 영역 속에서는 자유롭게 성령께서 적절히 사용하실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이 오른쪽으로 오게 되면, 문제가 생긴다. 지나치게 윤리적인 기독교로 가버리던가 아니면 은사제일주의로 빠질 수 있다.

 

‘금지할 법이 없다’는 부분이 특별한 의미를 가진다고 생각된다. 이는 성령 임재의 가장 일반적인 표시가 된다고 생각한다. 그 말은, 예수님도 그런 말씀을 하셨지만, 예수님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고 이적을 행하고, 초월적인 사역을 했을지라도 나중에 그 사람을 예수님이 모른다고 하실 수 있는 가능성이 있다.

 

은사는 그런 성격이 있다. 금지 조항이 있기 때문에 그것이 도구이지, 열매가 아니다. 열매는 맺혀지는 것이고, 도구는 사용되어지는 것이다. 맺히는 것은 그 안에 있는 성분에 의해서 자연스럽게 맺혀지는 것이다. 그러나 사용되어지는 것은 그 안의 성분과 상관없이 사용되어질 수 있다. 성령의 임재를 말하는 것은 열매라고 생각되어진다. 그러나 초월적인 은사의 표시, 기적적인 것을 가지고서는 그 사람이 정말 하나님의 자녀인지 아닌지 최종적 판단이 서지 않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귀신을 쫓아내고 기적을 행할 지라도 천국 문 밖에 쫓겨날 가능성이 있다.

 

이것은 또 아주 다른 측면에서의 은혜의 속성을 나타내 준다. 은혜의 속성은 회복이다. 은혜의 속성 이라는 것은 우리에게 힘을 주기 위해서, 우리가 유한적 존재이고 우리 안에 뭔가 결핍되었기 때문에 뭔가를 추가해주는 것이 아니다.

 

대수 구도에서 은혜는 회복적 성격을 갖지 않고 유한성을 더해주는 것이다. 하층부에다 상층부를 더해주는 것이다. 천주교에서 죄라는 것은 무엇인가에 대해 논할 때, 우리가 하나님의 모습은 그대로 가지고 있지만 하나님의 형상은 빼앗겼다고 한다. 그래서 그 형상을 추가하면 된다고 생각한다.

 

그러니까 여기서 은혜의 속성이라고 하는 것이 유한성에다 초월적인 것을 더해주는 모습을 가진다. 그러나 함수적 관계에서는 그렇지 않다. 은혜는 타락한 것을 회복시키는 것을 말한다. 그렇기 때문에 성령론에 있어서도 성령의 열매가 성령의 은사보다 더 윗급이다. 또 말씀이 이를 증명해준다. ‘금지할 법이 없다’ 라고.

 

은사는 이럴 때, 저럴 때에 따라서 사용되는 방법과 제한 조항이 항상 있다. 그러나 열매에는 그런 말씀이 없다. 은혜란 결국 대수가 아니라 함수적인 것이다. 그런 측면이 성령의 열매와 은사라는 주제에 와서도 설명되어지고, 적용되어지는 것이다.

 

대수적인 측면에서 본다면 은혜란, 힘을 실어주는 것이다. 그러나 함수적 측면에서 보게 되면 회복시키는 것이다. 만약 힘의 추가로 본다면 인간은 다시 창세기로 돌아가는 것이다. 인간은 하나님과 같은 힘을 원했기에 하나님과의 언약을 어겼다. 인간이 은혜를 힘으로 간주하고 힘의 획득으로 은혜를 이해한다면 문제가 생긴다. 힘은 결국 도덕성을 무시하게 되어있기 때문이다. 힘의 속성이 그런 것이다.

 

그러니까 절대적 힘이라 하는 것은 오직 절대적 도덕자 에게만 가능한데, 그런 분은 하나님 한 분이시다. 그런데, 절대적 도덕자가 아닌 우리가 힘을 원한다는 것은 동기부터가 잘못 되었다. 고로 대수적 구도에서 우리가 은혜를 받는다는 것은 ‘힘을 받는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 힘이 우리를 변화시키고 나를 그리스도의 형상으로 만들어가고 하나님이 원래 의도하신 피조물로 되기 위해 필요한 것이 아니라, ‘내가 유한한 존재이고 힘이 부족한 존재이니까 힘을 좀 넣어 주십시오’ 라고 기도하게 된다면, 우리는 그 동기가 문제가 있다는 것을 보게 된다.

 

결국은 인격에다가 신격을 더해 주는 것이다. 인격과 신격이 동화되게 되면 거기에서 power 를 얻게 된다는 것이다. 이는 뭔가 은혜론이 힘과 연결되어져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결국 이것이 힘을 과시하고 싶어하고 힘에게 끌리는, 힘의 종교, 힘의 신학, 힘의 철학으로 점점 발전해 갈 수 있게 된다.

 

기독교는 과연 힘의 종교인가? 아니면 은혜의 종교인가? 미묘한 차이가 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능력이 있으신 절대자이시기 때문에 하나님이 원하신다면 언제나 힘을 동원하실 수 있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의 힘을 가지고 하나님처럼 힘을 쓸 수는 없는 것이고, 그래서도 안 되는 것이다. 우리는 그 은혜를 통해서 하나님 창조의 본래 목적에 부합하는 존재로 회복되는 것에 목적이 있는 것이지 우리가 신격화 하고 힘을 추구한다면 그것은 문제가 있는 것이다.

 

기복신앙에 대한 이야기도 많이 하고 기독교인들이 교회가 폭발적인 부흥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거기에 따른 도덕성이 따라주지 않는다는 지적을 받고 뜨거움에 비해서 열매, 실천 이런 것들이 따라주지 않는다는 것에 대해 왜 그런 현상이 있을까에 대해 우리가 대충은 알고 있지만, 이론적으로 한번 진단해볼 수 있을 것이다. 어디에서 이런 문제가 발생하는지를.

 

우리들은 가르치는 자들로서 은혜의 함수적인 측면에 대한 확고한 인식이 있어야 하겠고, 그럴 때 우리가 은혜 안에 있기 때문에 조금 율법적인 내용을 가르치더라도 전혀 부담이 없다. 그리고 성도들이 그런 인식을 공유하고 있는 사람들이라고 할 때, 순종을 가르치고, 율법을 가르치는 것은 별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러나 율법적인 성향의 사람들에게 율법을 가르친다면 그것은 문제가 될 수 있다.

 

우리는 사역에 있어서 은사들이 많이 필요하다. 그러나 성경이 우리에게 사역적 측면보다도 더 강조하는 것은 하나님의 자녀로서 성령의 열매를 맺는 데까지 나아가는 것이다. 그러나 성경은 그 부분만 강조하는 것이 아니다. 이것만 추구하게 되면 인격의 성장만 추구하게 되면 안 되는 것이다. 은사도 역시 필요한 것이다. 하지만 성령의 열매의 경우처럼 ‘금지할 법이 없다’는 말을 은사에 대해서도 성경이 해주고 있지는 않다. 성령의 열매와 은사라고 하는 이 양자의 측면에 대해서 우리는 긴장감을 늦추지 않고 balance 를 유지해야 할 것이다.

 

 

 

 

제6장 – 하나님의 주권과 은총

 

과연 죄와 허물 가운데서 죽은 사람을 어떻게 살려낼 것인가? 아주 simple 한 답은 성령께서 말씀을 통해 역사하심으로 가능하다는 것이다. 이미 답은 우리가 가지고 있다고 생각한다. 죽은 사람을 어떻게 우리가 말로 살려낼 것인가? 우리의 말로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이 선포되어짐을 통해서 살린다.

 

그렇기 때문에 일단, 말씀이 선포되는 것이 선행되어야 한다. 성령은 분명하게 선포되어지는 말씀을 통해 역사하신다. 그래서 우리가 아무리 변증을 잘 하더라도 우리의 말로 그 사람이 살려지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변증을 통해 선포된 말씀 속에서 성령께서 역사하셨을 때, 그 사람이 살아난다.

 

그런데, 반틸이 변증학을 하나의 학문으로 발전시키는 상대, 대상이 누구인가? 주된 상대는 이성주의자였다. 이성주의 철학, 이성주의 신학, 자연 신학이었다. 말하자면, 토마스 아퀴나스, 그리고 데카르트 이후에 합리주의 신학이 발전되면서 계몽주의 때, 이신론, 자연신론 등이 발전되었는데, 이런 흐름에 대항하는 것이 반틸의 변증학이다.

 

인간의 이성이 절대성을 가지는 철학의 전통 속에서 반틸이 변증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점들은 우리와 약간 다르다. 상층부와 하층부로 볼 때, 반틸은 하층부에서 주로 신학을 발전시킨다. 헬라 문화 속에서 헬라 철학의 영향을 받은 서양의 철학과 기독교는 싫든 좋든 헬라 철학 속에서 발전해 왔다.

 

그리고 지상명령인 선교가 이루어지기 이전까지(17,8세기 전) 기독교는 서양 사람들과 함께 자랐다. 그렇기 때문에 이 하층부에서 기독교는 계속 뿌리를 내리고 줄리를 뻗어 자라다가 동양으로 복음이 뻗어지게 되었다. 반틸이 상대를 하는 사람들은 주로 이 하층부에서 이성에 대한 자신감과 논리에 대한 자신감을 가지고 기독교를 변증하려고 하는 자들이었다. 이들 중 지배적인 것이 천주교였다. 사실 16세기까지는 천주교의 세상이었다. 그래서 천주교 스타일의 변증법, 자연이성에 대해, 인간이성에 대해 자율성을 많이 부여하는 스타일로 발전된 변증가들이 반틸 변증학의 상대자들이다. 이런 부분을 알게 되면 반틸의 변증학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내가 동아시아 선교회 미주 후원이사인데, 어제 거기 사무실을 다녀왔는데, 거기에서 어제 양화진을 갔었다. 약 400여명의 선교사들이 거기에 묻혀있는데 그 중 50명 정도가 미국 선교사였다. 매우 감동적이었다. 언더우드 일가도 거기에 다 묻혀있다. 언더우드 목사의 유해가 1999년에 가족들에 의해 거기로 옮겨 왔다. 알렌 같은 사람의 유해도 거기 있고, 아펜젤러의 무덤도 유해는 없지만, 거기에 있었다. 그리고 거기에 선교사네 아이들의 무덤도 거기에 있었다. 그런데, 보면 19세기에 온 사람들이다. 그 때가 서구에서 동양으로 선교의 역사가 폭발적으로 되어지던 때였다. 그 이전에는 기독교는 서양에서만 있었던 것이다.

 

그러니까, 동양으로 기독교가 넘어오기 전에 거의 2000년이란 세월을 기독교는 서양에서 발전되었다. 서양문화는 헬라 문화 이다. 헬라 철학과 함께 형성되어진 문화를 가지고 있다. 그것을 상대로 반틸은 변증을 하고 있다. 그래서 반틸 변증학은 이성의 문제를 아주 심각하게 다룬다. 지금도 그렇지만 서양의 문화는 아주 합리적이고 이성적, 과학적이다. 우리는 이런 부분들을 뒤따라가고 있는 실정에 있다.

 

모든 문화, 정치, 산업, 기술, 스포츠 등이 다 과학적이다. 과학적으로 분석해서 data를 뽑아서 과학적으로 행한다. 이런 토대 위에서 신학이 발전되고, 조직신학과 변증학이 발전되었다. 그러다 보니까 지나치게 이성이 주도적 역할을 하게 되었다. 그래서 이성이 모든 결정권을 가지게 되었는데, 특별히 자유주의 신학이 19세기에 대두하게 되었다. 그 때에 프린스턴이 좌경화 되면서 웨스트민스터 신학교가 설립되기에 이르렀다. 자유주의 신학은 즉, 이성주의를 말한다. 지금까지 믿어왔던 성경을 모두 조각을 내는 흐름이 생겨났다. 이런 배경 속에서 반틸이 이성주의를 공격하는 것이다.

 

반틸이 이성에 대해 왜 이렇게 많은 지면을 할애하고 다루는가? 우리는 별로 이성에 관심이 없다고 말할 수도 있겠지만, 우리는 역사를 무시할 수 업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거의 2000년이란 세월을 서양 문화에서 발전을 시키셔서 선교를 통해 전 세계로 보급하신 그 섭리의 목적이 무엇인지도 우리는 고려해 볼 필요가 있는 것이다. 왜 헬라 문화권에서 발전된 다음에 동양으로 전파되게 하셨는가 하는 문제에 대해서.

 

어거스틴이 이런 말을 했다. 인간의 자유의지와 관련해서 ‘창조 시대에는 인간은 죄를 지을 수 있다.’ (가능성 – able to sin) , ‘타락 후에는 죄를 안 지을 수 없다’ 고 했다. 타락 시대를 대표하는 문구를 대조적으로 이야기하자면, ‘not able, not to sin’ 이라고 할 수 있다. 자유 의지를 놓고 구속 받은 상태에서는 죄를 ‘안 지을 수 있다.’는 것이 구속 상태를 다룬다. (able not to sin) 그리고 영광의 때에 이르게 되면, ‘죄를 지을 수 없다.’ (not able to sin)

 

펠라기우스와 자유의지의 문제를 가지고 논쟁을 벌였는데, 어거스틴이 인간의지에 대한 논의를 아주 은혜적인 관점에서 일목요연하게 정리했다. 창조에서는 인간이 죄를 지을 수 있는 상태이고, 타락해서는 더 이상 죄를 안지을 수 없는 상태이고, 구속에 와서는 죄를 안 지을 수 있는 상태, 영광 속에서는 죄를 지을 수 없는 상태에 이르게 된다. 다 비슷한 것 같지만, 강조점이 다르다.

 

타락의 부분을 보게 되면 자유의지에 대한 어거스틴 노선의 신학적 입장을 알 수 있다. 우리가 보통, 바울 -> 어거스틴 -> 칼빈 식으로 이야기를 하는데. 죄를 안 지을 수 없는 것이 타락한 사람의 모습이다. 짓고도 싶어서 짓는 것은 당연한 것이고, 안 짓고 싶어도 안 지을 수 없다는 것이 타락후의 인간 상태이다.

 

이를 토대로 해서 웨스트민스터 대,소요리 문답에서 자유의지에 대한 정의를 내린다. 인간의 의지라는 것은 본래 두 가지 요소를 가지고 있었다. 하나는 자발성(liberty) 이고, 다른 하나는 능력(ability)이다. 자발성 뿐 아니라 선을 결정하고 따라갈 수 있는 능력이 의지 속에 있다. 그런데, 죄를 짓고 나서 이 타락의 시대에 들어와서 우리 인간은 자발성은 그대로 가지고 있지만, 더 이상 선을 결정할 수 있는 능력이 없다. 그래서 ability 를 상실했다. liberty 는 가지고 있지만 ability 를 가지고 있지 않다.

 

모든 인간이 자발적으로 선택하면서 살아간다. 그러나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진 죄인은 비록 자발적으로 살아가지만, 그 자발성을 통해서 선을 향해 따라갈 수 있는 능력은 상실했다. 그래서 항상 생각하는 것이 하나님 뜻에 거역하고 반대하는 결정을 하고 살아가는 것, 불의로 의를 막는 존재로 살아갈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이것이 어거스틴이 말한 것, ‘not able, not to sin’ 의 상태이다. 어거스틴 이래, 우리 장로교는 이러한 신학의 노선에서 가르치고 있다. 지금까지 자유의지에 대한 이론이 그다지 많이 변하지 않았다. 우리는 이 노선을 그대로 따라가고 있다.

 

펠라기우스는 어거스틴의 이러한 주장을 반박했다. 인간은 ‘able not to sin ‘이라고 했다. 자연인은 타락은 했지만, 그럼에도 ability 가 조금 남아있다고 주장했다. 그 다음에 에라스무스와 루터가 논쟁을 벌였다. 에라스무스도 인간에게 자발성 뿐만 아니라 ability 도 조금 있다고 했다. 그리고 루터는 아니라고 했다. 내가 초록 매실을 마실 것인가 알로에를 마실 것인지는 내가 결정할 수 있지만, 내가 예수님을 믿을 것인지 아닌지는 결정할 수 없다.

 

나중에 칼빈주의자들과 알미니안 주의자들 사이에 이런 문제로 논쟁을 했고, 지금도 신학교에서 이 문제를 가지고 논쟁이 계속 되어지고 있다. 자유의지에 대한 문제가 지금까지 신학적으로 화두가 되어왔었다. 자유의지와 더불어 이성의 문제도 함께 논쟁의 대상이 되어왔다. 결국 이성과 의지는 같이 가는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생각은 자유롭게 할 수 있지만, 그 생각을 가지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사고를 할 수 있는 것인가? 하는 문제가 있다. 어거스틴이 내린 결론은, 인간은 언제나 불의로 의로운 것을 막았다는 것이다. 우리가 이야기하는 노선도 이런 부분이다.

 

그래서 접점의 문제가 서양신학, 서양의 기독교 전통에서는 아주 심각한 문제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어느 부분과 대화할 것인가?’ 라는 문제가 대두되는 것이다. 햄버거 그림을 보면, 상층부와 하층부, 아래층과 위층이 잘라져 있다. 상층부는 접선인데, 상층부는 하층부와 대립의 관계에 있다. 그리고 자유의지의 문제에 있어서는 천주교를 따라가는 신학에서는 하층부는 살아있는 것이다. 하층부는 그 안에서 인간의 의지가 살아있고, 상층부는 하나님께서 은혜로 추가해 주시면 된다. 그래서 이 관점에서 은혜는 추가적 선물이다. 위의 것은 하나님의 형상이고, 아래에 남은 것은 하나님의 모습이다. 죄를 지은 이후 하나님의 형상은 상실했지만, 우리는 하나님의 모습, 의지와 이성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어느 정도까지는 우리에게 구원이 필요하다는 것을 인식할 수 있다. 이렇게 2층 구조를 주장했다. 이 그림을 햄버거라고 부르자. 이 햄버거에서 사실은 위쪽 접선 부분은 빠져있는 것이다. 그 부분이 결핍된 부분이라고 보는 것이다. 그래서 이 햄버거 모델을 따라가면 인간은 ‘유한적 존재’로 설명되어질 수 있다. ‘타락한 죄인’이 아니라 ‘상층부를 갖지 못한 자’, 혹은 ‘유한자’로 설명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과연 접촉점이 어디인가? 신앙과 불신앙은 어디에서 만날 수 있는가? 다른 부분이 있을 수 없다. 남아있는 것은 하층부, 즉 이성이고 자유의지일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자연이성과 자유의지가 접촉점이 된다. 이 도식에서는. 이 부분을 반틸이 문제로 삼고 있는 것이다. 이는 어거스틴의 자유의지론과는 상충되며 칼빈의 자유의지론과도 다른 것이다. 왜냐하면 이 그림을 따라갔을 때, 어거스틴이 말한 인간에게 자유의지는 있지만, 능력은 없다고 하는 것에서 벗어나는 것, 모순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많은 개신교 신학자들이 이러한 천주교 스타일의 모델을 극복하지 못하고 그대로 수용해서 사용했었다.

 

이 도식에서는 하층부의 이성과 자유의지 왜에는 접촉점이 없는 것이다. 반틸이 제시하는 개념의 그림은 이와는 다른 것이다. 한 개의 층이 존재한다. (이성과 의지), 그리고 그 밑에 또 다른 층이 있다는 것이다. 겹층적 존재라고 한다. 나는 이 그림을 호떡이라고 부르겠다. 호떡에는 절단선이 없다. 한 층에서는 이성과 의지가 있는데, 이것이 죄에 의해서 다 덮였다는 것이다. 그래서 덮임으로 인해서, 어거스틴의 자유의지론에 보면 ‘인간은 자유의지로 선택한다. 그러나 자발적으로 선택하는 그 의지가 하나님의 뜻대로 선택하는가’ 하는 것은 별개의 문제이다라고 말한다. 자발적으로 생각하지만, 그 내용이 하나님의 뜻에 맞게 생각하는 것일 수는 없다고 말한다. 인간의 이성과 의지는 덮여져 있다.

 

그래서 이 덮여 있는 것을 볼 때, 결국 신앙과 불신앙, 신자와 불신자 사이에 복음의 문제를 놓고 접촉이 될 수 있는 부분은 바로 그 밑에 있는 층이라는 것이다. 이것은 바로, 인간 안에 있는 ‘신지식’이다. 하나님을 알만한 것들이라고 설명한다.

 

롬 1:18 하나님의 진노가 불의로 진리를 막는 사람들의 모든 경건치 않음과 불의에 대하여 하늘로 좇아 나타나나니 19 이는 하나님을 알만한 것이 저희 속에 보임이라 하나님께서 이를 저희에게 보이셨느니라

 

하나님의 진노가 불의로 진리를 막는 사람들의 모든 경건치 않음과 불의 에 대하여 하늘로 좇아 나타난다. 불의로 진리를 막는 다. 반틸, 루터, 어거스틴, 바울의 시각에서 바라보면, 이성과 의지가 진리를 막는다. 그런데, 하나님을 알만한 것들을 주셨다고 말한다. 하나님께서 은혜를 주시면 햄버거 모델에서는 유한자의 결핍된 부분을 더해주시는 것, 채워주시는 것인데, 호떡 모델에서는 은혜가 주어지면 죽어있던 이성과 의지가 살아나서 하나님을 알고, 계시를 수납하게 된다. 접촉점이 어디에 있는가? 햄버거에서는 아래층에 접촉점이 있을 수 밖에 없다. 그러나 반틸은 동그라미를 두 층으로 나누지 않고, 한 층으로 보았다. 그러나 그 뒤에 존재하는 겹층에서 하나님을 알 수 있는, 핑계하지 못하게 하는 영역이 있다고 보았다.

 

인간의 이중적 측면이 여기에서 나타나는데, 인간에게 자발성은 있다. 자발성은 있지만, 진정한 의미에서의 자유의지는 없다. 그러나 그 안에 하나님을 알 만한 것들이 있고, 하나님께 반응하는 부분이 살아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핑계하지 못한다. 숨지 못하도록 해 놓은 것이다.

 

그림을 다시 볼 때, 과연 문제가 어디에서 발생하는가? 햄버거 모델은 이성적인 것과 초월적인 것을, 이성과 의지의 차원과 초이성적 부분을 상층과 하층으로 나눈데서 문제가 발생했다. 그러나 호떡모델에서 보면, 이성적인 층과 직관적 신지식의 층이 상,하가 아니라 다른 층에서 서로 활동하고 있다. 그래서 측면을 보면 단층이다. 상,하로 볼 때는 단층이다. 그러나 호떡 그림을 보면 상,하로 볼 때는 단층이지만, 측면을 보면 겹층 임을 볼 수 있다. 전면의 층이 가려져 있다는 것이다. 그것이 불의로 진리를 막는 부분이라는 것이며,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그 부분이 벗겨지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그래서 여기에서는 가리워진 이성과 의지가 그 다른 겹층인 신지식과 갈등하는 것이다.

 

불의가 진리를 막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진리는 계속해서 불합리주의에 대해 signal 을 보낸다. 그런데 어두워진 이성은 죽었기 때문에 어쩔 수 없다. 그런데, 그 뒤에 있는 신지식의 층에서 signal 을 보낸다. 그러면 죽은 이성의 층은 거부를 한다. 그러면서 갈등이 생긴다. 불의로 진리를 막는데, 계속해서 자기 안에 내적 갈등이 있게 된다. 하나님이 없다 하는데 계속해서 신을 찾고, 천국은 없다고 생각하는데,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이 있고, 누군지는 모르는데 제사를 하고, 우상을 만들고 제사를 지낸다. 성경적으로 본다면, 자기를 창조하신 이가 야훼 하나님이신데, 그 하나님은 거절하지만, 바위에게는 절을 한다. 이것이 바로, 이 접촉점의 문제이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가 어디에다 접촉점을 설정할 것인가? 이성에다가 설정할 것인가? 아니면, 인간의 잠재의식에 깔려있는 신지식에 반응 가능한 영역으로 설정할 것인가? 모순적으로 인간은 한편으론 하나님을 예배하고 싶지만, 야훼 하나님은 거절하고, 종교를 갖지만 자기를 창조하신 구속의 예수 그리스도는 거절하고 있다. 이 모순을 공략하는 것이 바로 기독교 변증이 되겠다. 어떤 종류의 설교, 복음 전도이든지 바로 이것을 이해하고 전도하는 것, 변증하는 것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 반틸의 주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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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 회당에서는 유대인과 경건한 사람들과 또 저자에서는 날마다 만나는 사람들과 변론하니 18 어떤 에비구레오와 스도이고 철학자들도 바울과 쟁론할새 혹은 이르되 이 말장이가 무슨 말을 하고자 하느뇨 하고 혹은 이르되 이방신들을 전하는 사람인가보다 하니 이는 바울이 예수와 또 몸의 부활 전함을 인함이러라 19 붙들어 가지고 아레오바고로 가며 말하기를 우리가 너의 말하는 이 새 교가 무엇인지 알 수 있겠느냐 … 22 바울이 아레오바고 가운데 서서 말하되 아덴 사람들아 너희를 보니 범사에 종교성이 많도다 23 내가 두루 다니며 너희의 위하는 것들을 보다가 알지 못하는 신에게라고 새긴 단도 보았으니 그런즉 너희가 알지 못하고 위하는 그것을 내가 너희에게 알게 하리라 … 30 알지 못하던 시대에는 하나님이 허물치 아니하셨거니와 이제는 어디든지 사람을 다 명하사 회개하라 하셨으니 (사도행전 17:17-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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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행전에서 바울은 아테네 사람들에게 변증할 때, 아테네 사람들이 범사에 종교성이 많다는 점을 그들이 ‘알지 못하는 신에게’ 바친 제단의 이야기를 들어서 하고, 이에서 접촉점을 찾아, 그들에게 회개를 촉구했다.

 

그래서 거기에서 은혜의 필요성을 말한다. 종교성만 가지고는 되지 않는다. 종교성만 가지고서는 알지 못한다고 했다. ‘알지 못하는 신’을 섬긴다는 것. 너희가 모르니까 참 신을 가르쳐 주겠다고 하는데, 먼저 회개하라고 한다. 그 말은 은혜가 없이는 참 신이 누구인지를 모른다는 것이다. 아무리 가르쳐 주더라도, 회개하지 않으면 너희는 모르는 신을 회개할 수 밖에 없다.

 

햄버거 모델에서는 회개할 필요가 없다. 왜냐하면 이성이 살아있으니까.

 

예수님이 니고데모와 대화를 하시면서, 그 내용을 보면 예수님의 포인트는 ‘네가 거듭나지 않으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다.’는 데있다. 나는 이 것이 대표적인 케이스라고 생각하는데, 예수님은 니고데모와 대화하면서 접촉점을 종교성에서 찾지 않았다. ‘네가 거듭나지 않으면 아무것도 할 수 없다.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않으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다’ 는 말씀을 하신다. 예수님이 니고데모에게 종교성이 많다고 하시면서, ‘네가 이제 하나님 나라를 알 준비가 되었다고 하지 않으신다. 네가 지금까지 종교적 전통 속에서 준비해 온 것과 훈련 받은 것들이 이제 하나님 나라를 알 준비가 되었다.’ 라고 말씀하지 않으신다.

 

예수님은 전적으로 햄버거 모델을 거부하셨다. ‘신존재증명’ 같은 식의 증명이 가능한 것이 아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네가 거듭나지 않으면 아무것도 알 수 없다.’는 것이다. 이 말씀이 전도집회 같은 때에 아주 많이 쓰이는 말씀인데, 예수님은 니고데모를 전면적으로 부정하고 계신다. 육에서 난 것은 다 육이라고 하시고, 그것 가지고는 알 수 없다고 하신다. 그리고 이것 가지고 알 수 있고, 발견할 수 있는 신이라는 것은, 그저 바울이 말한 것과 같은 ‘알지 못하는 신’에게 제사지내는 정도 밖에 안되는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반틸은 햄버거 모델에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말하는 것이다.

 

좋은 질문이 나왔는데, 사역을 하다가 천주교인과 대화하고 접촉점을 찾아야 할 때가 있는데, 그들은 자신들이 구제사역이나 윤리적 측면에서 개신교보다 더 앞서 있다고 생각하는 상황에서 교리적으로 충돌을 일으키면 더 반발을 일으키게 된다. 그렇다면, 하층부에서 접촉점을 찾아야 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햄버거 모델을 따라야 하는가? 그렇지 않다. 우리가 진리의 측면에 서서 우리의 상대에 따라 얼마든지 그런 접촉점의 설정, 적용에 있어서는 자유스러울 수 있는 것이다. 신학적 측면에서 원칙적, 체계적 측면을 이야기하는 것이지, 현장, 사역의 context 에서 있는 환경에 따라서 얼마든지 조절하면서 적용할 수 있다. 그러나 예수님도 니고데모와 대화하면서 얼마든지 유대교에도 접촉점을 찾을 만한 부분들이 많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아주 강하게, 전면적으로 말씀하셨다. 아주 직접적으로 ‘너는 거듭나지 않았다’ 라는 식으로 직구 승부를 하신다. 예수님이 하신 방법을 반틸이 따라 한 것이다.

 

사마리아 여인과 대화를 하실 때에는 약간 다른 방식으로 대화하셨다. 니고데모에게는 아주 직접적으로 하셨는데, 그녀에게는 다른 스타일로 접근하셨다. 그러나 그 포인트는 같은 것이다. 접근 방법은 틀린 데, 그 접촉점은 ‘사마리아 여인의 목마름’에 접촉점이 있었다. 그 여인이 참 종교적으로 많은 지식을 가지고 있었다. 사마리아 여인은 니고데모 바로 다음에 나오는데, (니고데모는 3장, 사마리아 여인은 4장) 이 여자도 종교적 지식이 많았었다. 예배에 대한 문제, 유대인과 사마리아인의 종교적 인식을 알고 있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 접촉점을 종교적 지식에 맞추지 않고, ‘목마름’에 맞추고 있었다. 그러니까 교리적인 측면이 아니라 목마름에 맞췄다. 그리고 ‘네가 내가 누구인지 알았더면…’이라고 말씀하신다. 즉, 그 여인은 종교적 지식은 가지고 있었지만, 예수님이 누구인지 알지 못하고, ‘너희는 알지 못하는 것을 예배했다’는 말씀을 하신다. 예수님도 자연이성에 호소하지 않으시는 것이다. 그러면서 접촉점을 찾으실 때에는 ‘목마름’, ‘종교심’에서 찾으셨다. 그 두 가지를 병행하시면서도 햄버거의 하층이 아니라 호떡의 겹층에서 하나님을 알만한 지식에다 말씀하셨다.

 

토마스 아퀴나스는 ‘대이교도론’에서 햄버거 모델을 제시한 것이다. 접촉점을 햄버거의 하부에서 찾아서 어느 정도 경지에 도달하면 합일점을 찾아서 은혜를 받게 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천주교에서는 구원론 조차도 공로와 은혜가 같이 갈 수 밖에 없다. 그래서 ‘믿음으로 구원 받는 다고 하는 자에게 저주가 있을찌어다’라는 말이 천주교 신앙 교리서에 나와있다. 1560년도에 나온 교리서에 이런 부분이 실렸다. 이 말은 루터가 주장하는 것을 반박하는 조항에서 그렇게 말한다. 그들은 믿음만이 아니라 믿음과 행위가 같이 병행되어야 한다고 하는 것이다.

 

문제는 우리가 이 호떡을 전제로 하고 나서 하층부를 접촉점으로 삼는 것은 있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천주교인들을 상대함에 있어서, 그들은 행위에 자부심을 가진 사람들인데, 그들에게 교리적으로 직접 충돌하면 반발할 수 있다. 그들에게는 교리적인 측면보다는 개신교의 못한 점에서 접촉점을 찾아서 교회 안으로 이끌어온 뒤에 복음을 전하는 것이 좋다. 끌어온 다음에 접촉점을 찾는 것은 전혀 문제가 없다고 본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양쪽 모델 사이의 명백한 차이점을 아는 것, 그리고 우리가 옳다고 믿는 변증의 방법에 대해 마음 속에 충분히 이해하고, 기억하면서 적용하는 것이다.

 

신학자이면서 변증학자인 오스 귀네스라는 사람이 있다. 그는 천주교적 왜곡, 개신교적 왜곡이라는 말을 한다. 천주교적 왜곡은 성과 속을 완전히 분리시키는 것이다. 그것이 천주교적 왜곡이다. 성직과 비성직을 완전히 나누는 것이 천주교에서 발생한 것이다. 이것을 천주교적 왜곡이라고 한다. 이런 것이 햄버거 모델의 구도에서 이해가 간다. 복음 안에서 통합시켜야 할 것인데, 완전히 분리해 버리고, 나눠버린 것이다.

 

개신교적 왜곡이란 무엇인가? 천주교의 역반응으로 성과 속을 완전히 섞어버린 것이다. 개신교에서는 목회자와 평신도의 구분이 완전히 사라진 것과 같은 왜곡이 개신교에서도 나타난다. 항상 역반응이란 것이 문제이다. 호떡을 전제로 해서 접촉점을 찾는 것은 문제가 되지 않는데, 역반응으로 나가는 것이 문제다. 반틸은 이성주의자들과 합리주의 사조에 대한 반응으로서 이런 변증학을 발전시켰다. 그러면 우리 한국 사람들은 상층부의 성향이 강한데, 이것이 한국사람들 상대로는 맞지 않는 것인가? ‘반틸은 하층부위 사람들을 상대로, 이성주의자들을 상대로 대안을 내놓은 것인데, 우리와 같은 사람들에게는 맞지 않는 것인가?’ 하는 질문이 나올 수 있다.

 

반틸의 변증학적 방법론은 자연인의 본성을 거스르는 방법이다. 인간의 전적 부패함에 따라 인간의 이성은 불의로 진리를 막는 성격을 가진다. 그러나 방법론 적으로는 사람들을 기분 좋게 할 수도 있고, 어떤 사람은 기질적으로 도전적으로 할 수 있다. 그러한 방법론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 방법론 적으로는 햄버거적 모양새를 취하는 부분도 있을 수 있다. 그러나 근본적으로는 예수님과 같이 ‘목마름’에 대해 접근하시면서 은혜 가운데 들어가게 하는 것과 같은 접근 방식으로 들어가야 한다.

 

선교지로부터의 보고에 따르면 100명이 결신하면 2년 안에 그 중 85명이 믿음에서 떠난다. 처음에 햄버거 스타일로 접근한 다음에 후속조치가 없으면 나중에 다 떠나버리는 것이다. 그냥 ‘기독교도 괜찮은 하나의 종교인가 보다’라는 식의 인식만 주고 말씀에 뿌리를 내리지 않게 되면 아무런 소용없는 짓이 되는 것이다. 대수적 방법론의 현실을 여지 없이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절대적으로 은혜가 필요한 현실의 상황이 해결되어서, 내가 배가 좀 부르고 먹고 살만한 형편이 되면, 그냥 돌아가 버린다. 그런 것이 대수적 도식이다. 그러나 f(x) 의 개념 속에서 하나님께 절대적으로 의존해야만 살아갈 수 있다는 도식이 된다면 안 떠난다. 떠날 수가 없다. 그런데, 그렇게 하지 못했기 때문에 떠나는 것이다.

 

예수님의 경우를 예로 들었었지만, 니고데모의 문제에 대해서는 아주 직접적으로 ‘거듭나야 함’을 말씀하셨지만, 사마리아 여인들에게는 남편의 문제와 목마름의 문제를 가지고 얘기하셨지만, 결국에는 ‘너는 모른다’ 라는 이야기로 끌고 가셨다. 너무 방법론적 측면에서 흑백논리를 취할 필요는 없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바울의 경우에도 둘 다 할례를 시키던지, 아무도 할례를 시키지 말던지 했어야 할 것 같은데, 그 부분에 있어서 바울도, 예수님도 결론 부분에 가서는 양보하지 않았다. 하지만, 방법론적으로 접촉점을 찾는 부분에서는 자유스러웠다.

 

 

목회자들은 나름대로 자기 설교들을 분석한다. 내가 너무 한 방향으로 치우치는 것이 아닌지 스스로 진단을 하고 분석을 한다. 나는 한 편의 설교 안에서도 햄버거로 시작해서 결론은 호떡으로 끝나야 한다고 생각한다. 햄버거에서 시작해서 햄버거로 끝나면 그것은 틀린 것이라고 생각한다. 분명하게 한 단락 안에서 결론을 지어줘야 한다. 예수님도 수가성의 여인에게 가셔서 목마름의 문제와 남편의 문제로 접촉을 하셨지만, 그 다음에는 자신이 누구이신지를 여인이 모른다는 이야기를 하시면서 복음을 제시한다. 기복신앙에서 예수 믿으면 복 받는다는 식으로 전도하면 사람들이 좋아한다. 그러나 여기에서 일단락을 지어버리면, 그것으로 끝나고 만다. 사람들이 은혜는 많이 받겠지만.

 

이 말은 50:50으로 햄버거와 호떡이 될 수 있다는 것이 아니다. 아는 사람들은 자신이 알고 있다. 자신의 설교가 햄버거가 되었는지, 호떡이 되었는지. 햄버거에서 접촉을 해서는 호떡으로 와야 한다. 호떡의 겹층 뒷면에 도전하고 자극을 주는 부분을 햄버거적으로 쉽게 설명한 것이다. 접촉점을 설교에 말하자면 도입이라고 말하는 것이 좋을 것 같다. y=g+x 에서 시작을 하더라도 본론에서부터는 f(x)로 들어가는 모습이 되어야 반틸리즘에 입각한 설교를 하는 것이다. 그래서 반틸은 이런 이야기를 한다. ‘신자와 불신자 사이에, 신앙과 불신자 사이에 ‘의지와 이성의 층’에서는 절대적 대립이 있다.’ 그러니까 의지와 이성의 층에서 도입으로는 절대 만날 수 없다는 것이다. 불신자는 이것이 왜곡된 상태이고, 신자는 하나님의 은혜로 깨끗하게 청소된 상태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호떡의 표면층과 뒷면의 층이 처음에는 서로 갈등이 있었지만, 일단 거듭나고 은혜를 받으면 이 두 층 사이에 갈등이 없다. 그렇기 때문에 햄버거와 호떡 그림은 절대적 대립(absolute anti-thesis) 관계이다. 그러나 인간으로서 하나님의 피조물로서는 신앙과 불신앙 사이에 절대적 대립이 없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피조물로서는 뒷면의 층이 있기 때문에, 이 층의 관점에서 봤을 때는 대립이 있을 수 없다. 그러므로 여기에서 선교의 가능성과 전도의 가능성, 그리고 변증의 가능성을 가질 수 있다. 이 호떡 뒷면의 층은 인간에게 보편적인 층이 될 수 있는 것이다.

 

반틸은 학문, 예술 등의 모든 활동의 영역을 이 영역 안에 넣어둔다. 하나님은 피조물을 통해서도 영광을 받으시지만, 창조를 통해서도 영광을 받으신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죄인일지라도 그 죄인이 한 인간으로서 창작활동을 하고, 문화활동을 하는 것들을 통해서 영광을 받으신다. 그런 활동들이 모든 인간을 하나의 보편적 원리로 묶어주는 토대가 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영광을 받으신다. 그렇기 때문에 불신자가 예술활동, 문화활동, 창작활동을 할 수 있는 것이다. 불신자가 정말 멋있는 음악을 창작한다면, 그가 의지와 이성적 측면에서는 하나님을 위해 작곡하지 않았지만, 하나님은 영광을 받으신다.

 

예를 들어 모짜르트라는 작곡가가 자기의 천부적 재능을 발휘해서 멋진 곡을 작곡을 했다. 모짜르트는 의지와 이성의 층에서는 하나님에 대해 관심이 전혀 없이 작곡했다. 그러나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모짜르트가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그는 피조물로서 행한 창작을 통해 하나님은 영광을 받으신다. 그러니까 하나님은 죄인으로부터도 하나님의 영광을 받으시고 취하신다. 이것이 하나님의 전적 주권이다.

 

꼭 모짜르트를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분야의 인간 활동, 과학, 문화, 학문 등 모든 영역에서 인간의 죄로 인해 더럽혀져 있기는 하지만, 호떡 뒷면의 영역에서는 어쩔 수 없이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게 되는 부분이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인간이 잘나서 그런 것이 아니라 이런 활동을 통해서 창조 시에 하나님의 영광이 당연히 드러나게 된다는 것, 하나님이 그 안에 남겨두신 하나님의 형상이 나타나게 된 작용이 그러한 창작 활동, 인간의 업적을 통해 드러나게 된다는 것이다. 이런 부분에서 불신자가 영광을 조금이라도 취한다면, 하나님의 받으실 영광이 삭감되게 된다. 그렇게 보기 시작한다면 하나님의 전적 주권에 침해가 일어난다. 이런 부분을 정확하게 봐야 한다.

 

인간에게 남겨진 하나님께 반응할만한 영역은 하나님 앞에서 인간이 가지는 책임의 영역이다. 비록 죄인들이 불의로 진리를 막는 짓들을 하고 있지만, 하나님의 주권의 관점을 통해서 본다면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는 부분들이 있다. 그 부분이 바로 이 겹층구조의 뒷면이다. 그래서 인간은 법을 만들 수 있고, 스스로 그 법을 지킬 수도 있다. 비록 타락으로 인해 그것이 부패되어 있지만. 실제로 불신자들이 신자들보다 더 법을 잘 지킬 수도 있다. 접촉점의 문제에서 일반은총과 특별은총의 넘어간다. 우리는 겹층구조의 뒷면, 칼빈의 용어로 ‘신지식(sense of deity)’ 이라고 부르는 이것을 일반은총의 영역이라고 부른다. 일반은총에서 자연이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는 것, 자연계시와 우리 안에 있는 하나님을 알만한 지식이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는 것이 있다.

 

일반계시에는 몇 가지 목적이 있다. 먼저는 전적으로 부패한 인간이 극도로 부패하지 않도록 막는 기능이 있다. 그래서 자연인도 도덕과 윤리를 가지고 규칙을 만들어서 사회에 어떤 조직을 만들고 집단을 만들어서 어느 정도 상대적인 수준에서의 지식을 가지고 살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칼빈 주의에서 전적 부패라는 말은 극도 부패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범위, 지정의의 영역을 말하는 것이지 부패의 깊이, 정도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물론 아주 극악한 범죄가 있지만, 그러나 보편은총으로 인해서 극도로 악해지는 것을 막아주는 역할을 한다. 또 다른 것은, 지식과 학문, 예술 등의 인간 전반의 창작 활동을 통해서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한다. 단순히 자연세계만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 안에 있는 하나님의 형상도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한다.

 

이 시대의 가장 위대한 감독이라고 불리는 스티븐 스필버그도 이렇게 말한다. “위대한 작품의 가늠자는 작품을 본 사람이 자신 스스로를 보잘것없는 존재라고 느낄 때, 그것이 위대한 작품이다.”라는 말을 했다. 그래서 우리가 위대한 영화를 본다거나 위대한 예술 작품 앞에서 내가 왠지 작다는 느낌을 가질 때, 그런 것이다. 그러나 사실은 하나님의 피조물로서 우리가 하나님의 위대하심 앞에 섰을 때, 우리가 아주 작은 존재임을 느끼고 그 앞에서 입이 벌어지게 되는 것이다. 스티븐 스필버그는 신자는 아니지만, 자연적으로 그가 알게 된 것이다.

 

하나님은 creator, 창작자이시다. 하나님은 창작을 하시고, 그 창작을 통해서 흐뭇해 하셨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도 창작을 한다. 예술에는 영광이 있게 되는 것이다. 어떨 때는 슬픈 것이 예수님을 모르는 예술인도 그 영광 속에 빠지면 그 영광 속에 정말 깊이 몰두한다. 그런데, 예수님을 믿는 다고 하는 사람들이 하나님의 영광 앞에 서 본 경험이 없이 신앙생활을 하는 경우가 많이 보이는 것이 정말 안타까운 것이다. 예술에는 영광이 있는데, 신앙에는 영광이 없다는 것이 모순이다. 그러나 예술에 나타나는 영광도 사실은 하나님의 영광을 모방한 것이다. 그 예술을 통해서, 자신의 평생을 바쳐서 단 몇 분의 영광에 들어가기 위해서 예술인들은 예술을 한다.

 

모세가 가시떨기 앞에서 하나님의 영광 앞에 섰던 것만큼은 아닐지라도 우리가 하나님의 영광 앞에 서 볼 필요가 있다. 하나님의 영광 앞에 서 보았던 사람, 하나님 앞에서 떨어 봤던 사람이 밖에 나가서는 떨지 않는다. 교회에서는 하나님 앞에서 좀 떨고, 밖에 나가서는 떨지 말아야 하는데, 이런 것들이 반대가 되어있다. 세 번째 일반은총의 역할은 ‘구속’이다. 하나님은 끊임없이 인간에게 갈등을 주신다. ‘내가 이렇게 살면 안 되는데’, ‘내 인생의 목적이 무엇인가?’, ‘내가 어디로 가고 있는 건가?’ 하는 허무감을 주게 만드는 것, 이런 것들이 signal 을 보내는 요소이다. 그래서 이러한 signal 들이 보내지는 속에서 말씀이 선포되어질 때, 성령께서 그 말씀을 통해서 그 사람을 변화시키신다.

 

이렇게 일반은총은 세가지 역할을 한다고 조직신학에서 정리하고 있다.

 

 

 

 

제 7 장

 

일반은총을 통해서 하나님께서는 아직도 하나님이 control 할 수 있는 부분을 인간 안에 남겨 두셨다. 하나님이 명령할 수 있는 부분, 하나님이 지시할 수 있는 영역을 남겨두신 것이다. 일반은총의 정의가 그러한 것이다. 죄와 허물로 죽었지만, 하나님이 지시하실 수 있고, 명령하실 수 있고, 그렇기 때문에 인간이 책임져야 하며, 핑계대지 못하고, 하나님 앞에서 책임 있는 존재로 하나님 오실 때까지 살아가야 하는 것이다. 지금은 창조와 종말의 중간 시대이다.

 

타락 후에 종말이 오기까지, 이 중간기에 하나님께서 계속해서 역사를 인도하시고 주도하시고 역사 속에서 구원하시는 것, 그러면서 인간은 인간으로서 계속해서 인간답게 살아갈 수 있는 틈을 하나님께서 마련해 주셨다. 일반 은총이 없었다면 인간은 짐승과 같아졌을 테지만, 인간다운 모습을 갖추어 가면서 살아갈 수 있도록 역사가 흘러왔다. 하나님이 일반은총을 통해서 하나님이 인간으로 하여금 극도로 타락하지는 않게 만드시면서 지금까지 흘러왔다. 일반은총도 하나님의 은혜이다.

 

일반은총도 은혜, 은총이라는 측면을 잊어버리게 되면, 인간 안에 선한 것이 있어서 불신자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고 생각을 하면서 오해를 하게 된다. 절대 칼빈이나 반틸은 인간에게 조금이라도 영광을 나누어 주기 위해서 그런 말을 한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절대 주권에 돌아오게 하기 위해서 그렇게 이야기 한 것이다. 근본적으로 햄버거 모델과 호떡 모델 사이의 차이는 햄버거는 상,하층, 호떡은 겹층으로 되어있다는 fundamental 한 차이가 있다는 것이다. 호떡에서 하나님은 뒷 층으로 말씀하신다. 그래서 겹층이 갈등한다. 그런데, 햄버거에서는 갈등이 없다. 그래서 이 모델은 모순이 있다. 반틸에 의하면 인간을 인간답지 못하게 만들고, 인간을 인간 이하의 존재로 전락시키는 모델이라고 보았다. 왜냐하면 여기에는 상층부라는 것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반쪽 인간밖에 되지 않기 때문이며, 모순을 느끼지 않고, 불의로 진리를 막는 부분과 하나님을 느끼며 반응하는 그런 갈등이 있어야 믿음을 가지도록 유도될 수 있는데, 햄버거에서는 사실은 모순을 느끼면서도 그 사실을 인정하도록 되지 않기 대문에 이는 모순된 모델이다.

 

그래서 ‘비존재’라는 표현을 쓴다. 이 말은 ‘인간 이하의 존재’라는 말이다. 하나님께 반응하지 않을 수 있는, 자기 혼자서 모든 것을 판단하고, 자기 의지와 이성으로 하나님을 혼자 찾아가야 하는, 그러나 찾을 수 없는 존재. 그것이 불가능하다고 느끼는 존재. 그는 하나님처럼 되기를 원하지만, 사실은 인간 이하의 존재가 되어버렸고, 하나님을 찾아가기 원하지만 signal 을 받을 수 없는 모델이다. 그러나 호떡 모델은 죽었지만, 하나님과 소통할 수 있는 모델이다. 그러나 햄버거 모델은 반쪽이기 때문에 불안정한 모델이다. 하나님은 사람을 지으실 때, 온전하게 지으셨다. 온전하게 만들었는데 타락한 것이 인간이다. 그런데 햄버거 식으로 설명을 하면, ‘하나님이 은혜를 위에다 주었다가 죄 때문에 다시 빼았았다’ 는 것이다. 그렇다면, 처음부터 인간은 불완전한 존재로 취급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본래 창조된 모델은 겹층 존재, 이 층과 저 층에서 인간이 하나님께 반응할 수 있는 것인데, 그런 오해를 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햄버거 모델로 설명을 하다가 보면, 죄의 문제도 결국은 타락이 아니라 결핍으로 정의되어지게 된다. 실제로 죄에 대한 일반 종교들의 개념이 다 이런 것이다. 그래서 죄에 대해 설명할 때, 유한성으로 간다. 하나님은 infinite 하다. 그런데, 우리는 유한하다라는 식으로 개념 정의를 한다. 그래서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를 무한자와 유한자의 관계로 정의 내려버린다. 의로우신 하나님과 죄인인 우리로 정의하지 않고, 죄 때문에 결핍된 반쪽만 남았다는 식의 변태적인 인간상을 그려낸다.

 

햄버거 모델에서는 죄인이 빠져나올 수가 없다. 그러나 호떡 모델에서는 하나님을 알만한 것들, 하나님이 부르실 수 있는 것들, 하나님께 영광 돌릴 수 있는 것들이 남아있기 때문에 죄에서 빠져나올 수 있다. 사실, 근본적으로는 햄버거 모델은 변태적 인간형을 그려내고 있는 것이다. 햄버거 모델에서는 특별은총이 필요가 없다. 특별 은총이 필요하기 위해서는 호떡의 모델이 필요하다. 특별은총이 필요하기 위해서는 은혜를 회복으로 봐야만 하는데, 햄버거에서는 결핍에 대한 더함으로 보기 때문에 특별은총이 없다. 또한 하부층이 살아있기 때문에 일반은총도 필요 없다. 일반 은총이 있을 이유가 없다. 완전 변질된 인간론이다. 특수은총도 없고, 일반은총도 없다. 그래서 이것을 ‘비존재’라고 한다. 인간을 완전히 잘못 정의 내려 놓은 것이라고 한다.

 

 

이러한 관점에 의하면 사람들 사이에는 지식에 관한 참된 공통성이 존재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개개인이 각기 비존재 속으로 빠져 들어갈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신자 중 어느 누구도 불신자가 신자와 불신자 모두 가 하나님에 대해 견지하고 있는 공통적 관계에 대하여 반드시 그에게 반응해 올 것이라는 점을 알고 불신자에게 접근할 수 없게 한다. 마찬가지로 공통적 지식을 위한 아무런 참된 기반이 없다면, 과학을 위한 어떤 참된 기반도 존재하지 않는다. 하나님께서 세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을 관장하시며, 모든 사람은 하나의 사람으로서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자들이라는 것을 주장하는 개신교적 사상, 특히 개혁주의적 사상에 있어서만 과학의4) 통일성이 존재한다... 그리하여 모든 사람이 과학의 진보에 기여할 수 있게 된다. 또 모든 사람이 마땅히 그것에 기여해야만 한다. 그것은 인간이 마땅히 해야만 할 일이기 때문이다. 더욱이 인간은 심지어 그의 의지에 거슬려 그렇게 할지언정 그의 사명을 성취할 도리밖에 없는 것이다. (변증학 , 202쪽).

 

 

쉬운 말을 매우 어렵게 써놓았다. 설명하자면, 우리가 전도할 때, 내가 전도하기 전에 이미 그 사람이 신지식을 가지고 하나님께 반응한다는 확신이 안 든다면, 결국 내 말로 그 사람을 설득해야 한다는 부담감을 가지고 전도를 해야 하는 것이다. 이런 부분에서의 공통기반이 없다면 신자가 불신자에게 접근해서 전도하는 일이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우리가 부흥 집회 때 결신시키거나 할 때, 매우 조심스럽다. 내가 말을 잘 해서 사람들이 많이 일어서야 할 텐데, 내가 말을 잘 못해서 사람들이 많이 일어나지 않는다고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확신을 가져야 한다. 하나님이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이시고, 사람들을 일어나게 하고 결신하게 한다는 확신을 가지고 접근해야 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목적에 죄인들도 자신도 모르면서 포함되어서 하나님의 일을 이루어 나간다. 자기가 그것을 거절할 수가 없다는 것이다. 아주 악랄한 죄인일지라도 하나님의 뜻 밖에서 독단적으로 자기가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우는 일을 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어떤 식으로 건 하나님에 의해 사용되어지게 되어있다. 위의 문장은 지나치게 영어를 직역을 하다가 보니까 어렵게 나온 문장인 것 같다. 그러나 뜻은 통할 수 있다. 어려워서 그렇지만.

 

칼빈주의 사상은 이 세상을 긍정하면서 동시에 부정한다. 그것이 다른 신학들과 우리 사이의 차이점이라고 할 수 있다. 세상을 긍정하기 때문에 이 모든 만물을 하나의 통합적 시각으로 바라볼 수 있다. 하나님이 지으신 위대한 작품을 긍정하면서도 그 작품이 죄로 인해 타락하고 어두워져 있기 때문에 부정하는 것이다. 세상 자체가 부정한 것이 아니라 세상을 타락하게 만든 죄를 부정하다고 하는 것이다. 세상 자체는 하나님의 영광을 담고 있는 것이다. 바울이 야만에게 왜 빚진 자라고 말하는가? 야만인들이 문화인들에게 빚을 졌으면 졌지, 왜 문화인이 빚을 졌는가? 아쉬운 사람더러 오라고 하지 않고 직접 가서 복음을 전한다. 이것은 세상을 긍정하는 관점이 아니면 절대로 할 수 없는 것이다. 선교 자체는 세상을 긍정하는 사람만이 그 빚진 마음을 가지고서 할 수 있는 것이다.

 

모든 창조 속에 하나님의 형상이 들어있다는 것, 단순히 일반은총의 차원에서 뿐만 아니라 구속적 차원에서도 연결된다. 창조 속에 있는 가치를 봐야 구속의 가치를 느끼는 것이지, 창조 속에 있는 가치를 부정한다면 왜 구속의 가치를 느끼겠는가? 창조 시에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다고 하는 가치를 느껴야 어둠으로부터 구원을 할 가치를 느끼는 것이다. 그렇기에 야만인에게도 빚을 진 심정이 드는 것이다. 그래서 일반은총 자체로는 구속이 되지 않지만, 구속에의 동기유발이 될 수는 있다.

 

카이퍼와 바빙크가 공히 과학의 기본적 통일성을 주장한 것은 이러한 기반 위에서 였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에 관한 그이 목적을 틀림없이 달성하신다. 하나님께서는 사단의 면전에서 인간들로 하여금 당신께서 이 우주 안에 저장해 놓으신 잠재성들을 발전시켜 열매 맺게 하신다. 모든 인간들과 심지어는 사단까지도 의지적이든지 아니든지 간에 그리고 는에 띄든지 눈에 두드러지지 않든지 간에 인간과 인간의 우주를 향하신 하나님의 목적을 실현시킴에 기여하고 잇다. 구속 받은 자들의 최상이자 최종적 찬양은 창조의 노래이며 창조의 영광스러운 완성의 노래이다(계 4:11). (변증학, 202-3쪽)

 

사단이 어둡게 만들고 비틀어 놓은 것을 하나님은 사단의 면전에서 그것을 가지고서도 하나님의 목적을 위해 사용하시고, 그 목적을 달성하신다. 이는 절대 주권중의 주권이다. 모든 인간들과 심지어 사단까지도 의지적이건 아니건, 눈에 띠건 안 띠건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구속을 실현시켜 나가고 있다. 결국 구속은 창조의 회복이며 완성이다. 따라서 구원은 창조를 무시하는 것이 아니라, 창조를 회복하고 완성하는 것이다. 그래야 창조가 구속사에 연결이 되고, 연속성을 가지게 된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것을 다 버리시고 구속을 준비하시는 것이 아니라 바로 창조 때에 하나님이 의도하신 것들을 다 완성시키시는 것이다. 그런데, 햄버거 모델에서는 하나님의 은총을 모두 거절하기 때문에 존재론적 결함을 가지고 있게 된다. 그래서 신자와 불신자는 문화대명령에 같이 동참할 수 있는 이유가 있다. 지상대명령에는 동참할 수가 없지만. 왜냐하면 불신자 안에 있는 하나님의 형상 때문에 그렇다. 그래서 땅을 정복하고, 개발하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쓸 수 있도록 하는 것, 문화 대혁명(cultural )에 동참하게 한다.

 

지상대명령은 복음이다. 그리고 문화대명령은 창세기 1 : 28 에 있다.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그들에게 이르시되…..’ 이 명령이 아직도 효과가 있는 것이다. 우리 믿는 사람들이 사실은 지상대명령을 통해서 지금 우리가 이루고 있지만, 그 속에서 우리가 문화대명령에도 기여할 수 있는 재능과 책임이 우리에게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Westminster 신학교에 가면 변증학 교수님이 Jazz 음악을 굉장히 잘 한다. 음악회에도 가고, 불신자들도 초청해서 함께 음악회를 열기도 한다. 그렇게 복음을 전하기도 한다.

 

종말까지의 시간이 연장되는 것은 지상대명령 때문 이다. 절대로 이것과 문화대명령을 같은 수준에서 볼 수는 없다. 그러나 예수께서 재림하시기 까지는 문화대명령도 효과가 있는 것이다. 우리가 이 명령을 지키는 것은 우리가 세상을 사랑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이 지으신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이 지으신 것 안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부정하지 않는 것이다. 여기에서 칼빈 신학과 근본주의 신학과의 차이가 있다. 근본주의 신학은 세상을 부정하고 무조건 종말만을 기다린다. 물론 종말을 기다리는 것은 좋은 것이다. 그러나 문화대명령을 거부하고 종말만 기다리는 것, 세상 자체를 무조건 부정해버리는 것은 좀 틀리다. 세상의 것을 조금만 긍정해도 마귀적인 것으로 생각하고, 세상에 속해 있는 것과 혼합하는 행위로 규정하는 것, 이런 것을 우리가 fundamentalism 이라고 규정하는데, 이것과 개혁주의 신학과는 이런 점에서 다른 것이다.

 

이런 부분에서 교회가 지상대명령 뿐만 아니라 문화대명령적인 부분까지도 touch 해 줄 수 있어야 한다. 그래서 복음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전하는 그 안에서 아직도 이 세상 속에 잠재되어있는 하나님의 영광과 형상까지 사랑할 수 있는 것이 진정한 복음으로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는 복음이 될 것이다. 이 부분이 지금까지 많이 missing 되어왔다. 일반은총을 높이는 것처럼 지금 얘기가 들린다. 그렇게 들으면 불신자들도 뭔가 할 수 있는 것이 있다고 생각하게 되기 쉽다. 그러나 반틸은 absolute-antithesis 를 포기하지 않았다. 종말적으로 그들에게는 하나님을 찾지 않는 한 희망이 없다는 것이다. 그러면서도 일반은총을 포기할 수 없는 이유는 일반은총이 맡은 역할이 너무나 크고, 그 할 일이 너무나 많기 때문이다. 이 일반은총을 우리가 무시하고 신학을 하게 된다면 햄버거 모델의 모순 속으로 빠질 수 밖에 없다. 이런 점에서 반틸의 변증 체계는 정말 놀라운 system 이다. 결국은 창조와 구속을 통합시킬 수 있는 system 이다.

 

창조를 통해 영광 돌리는 것도 구속 안에 포함되어지는 system 이다. 우리 보수교인들이 종교적 활동에만 관심이 있고, 세상에는 관심을 가지지 않는다면, 결국 우리가 왕으로서 세상을 다스리고 선지자적 역할을 다하고, 제사장으로서 하나님을 예배하는 본래의 역할과 의무를 포기하는 것이다. 그런 본래의 모습을 회복하는 것을 포기하는 것이다. 복음 안에서 세상을 일관성 있게 통합시킬 수 있는 system 을 가질 수 있다. 칼빈주의 신학이 시행착오도 많았고, 역사적으로 잘못한 일도 많지만, 이 system 자체는 정말 하나님의 주권을 높이는 system 이다. 그리고 인간을 본래 있는 그 위치에서 하강 시키지고 비상시키지도 않고, 긍정만 하지도, 부정만 하지도 않고 그 모습 있는 그대로를 드러내는 system 이다.

 

다른 사상을 포용하지도 못하고, 자기와 생각이 다르면 사람을 죽이기도 하고 편협한 마음을 가지기도 하고 여러 가지 잘못도 있었지만, 그 system 으로 봤을 때는 정말 일관성 있는 system 이다. 이런 관점에서 반틸 변증학을 발전시켜 나가야 하겠다.

 

 

 

 

제 8 장

 

지금까지 강의한 것은 많지만, key point 는 몇 개 되지 않는다. 이 것들을 다 연결하면 해답이 나온다. 변증에서의 결론은 아주 simple 하다. 딱 두 가지이다. 하나님의 절대 주권, 창조자 하나님과 피조물인 인간의 절대적 구분, 그리고 다른 하나는 인간의 전적 부패이다. 이 두 가지에 기둥을 세워놓고 집을 지은 것이 반틸의 변증학이다. 이것이 바로 칼빈 신학이다. (좀 무리한 표현일 수 있지만) 그런 눈을 가지고 우리가 성경을 풀어나가기 시작하면 아주 성경이 복잡 다양한 부분이 많지만, 그렇다고 해서 파헤칠 수 없는 mysterious 한 책이 아니라는 것을 이해하게 된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이해할 수 없는 책을 주셨다는 것은 말이 안된다. 결론은 simple 하다. simple 하지 않다는 것은 두 가지이다. 가르치는 사람이 제대로 가르치지 못했던가, 아니면 배우는 사람이 준비가 되지 않았던가 하는 것이다. 이제 본격적으로 강의를 시작하겠다.

 

 

‘모든 논리는 결국 순환적이다.‘ 라는 말이 있다. 그 말은 모든 논리는 결론적으로는 믿음이라는 말이다. 이 말이 아주 중요하다. 이 말의 뜻은 결국 모든 논리는 믿음을 전제한다는 것이다. 어떤 종류의 믿음이든 그 믿음을 전제로 한다는 것이다. 믿음이 선행된다는 것이다. 순환논리; circular reason 이라는 말은 전제와 방법과 결과가 하나의 circle 을 만든다는 것이다. 이 자체적인 circle 속에서 논리가 형성된다는 것이다. 이 논리는 무언가 다른 논리를 전제로 하고 있다는 것이다.

 

다른 논리에서는 또 다른 방식의 circle 이 나올 수 있다는 것이다. 전제하고 그 전제에 의해 방법을 동원하고 그 방법에 의해 결과를 끄집어내면 그 결과는 처음에 내가 전제한 것을 입증해 준다. 이것이 순환논리이다. 논리적으로는 아주 자체적인 논리가 있지만, 그것은 전제라는 것을 밑에 깔고 있기 때문에 믿음을 가지고 시작하는 것이다. 불신앙도 신앙이다. 불신앙은 논리가 아니다. 다른 종류의 신앙이다. 불신앙이 신앙으로 가려면 논리 가지고 안된다. 사실은 jump 가 필요하다. 그래서 이런 말을 한다. ‘성경은 진리다. 왜 진리인가? 성경이 그렇게 말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다른 것보다 우리가 성경을 연구해야 한다.’ 이말을 한번 잘 생각해 보라.

 

성경은 진리다

 

성경이 그렇게 말하고 있다.

 

성경을 연구해라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고 성경이 그렇게 말하기 때문이다.)1.

 

 

이것이 순환논리인가 아닌가? 순환논리이다. 다른 외부적 잣대를 도입해서 성경이 진리인지 아닌지를 판가름하는 것이 아니고, 성경이 진리가 아닌가를 여러 가지 방법을 동원해서 조사해보지 않는다. 우리는 그럴만한 인간적 잣대와 방법론이 없다고 믿기 때문에 우리는 그렇게 하는 것이다. 성경만이 유일하고 절대적인 진리라고 보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 증명하기 위해서 우리는 성경을 들이댈 수 밖에 없다. 왜냐? 하나님 말씀이기 때문이다. 하나님 말씀보다 더 크고 위대한 증명이 없다. 그래서 우리는 전혀 부끄럽게 생각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우리가 가진 전제가 절대 부끄러운 전제가 아니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절대 주권자이시고, 하나님이 우주 만물 위에 계시고, 하나님이 이 우주에 대해 해석하시고 말씀하시고 우주의 존재 의미와 존재 목적을 하나님이 결정해 주신다고 믿기 때문에 전혀 이런 생각에 대해 부끄럽게 생각하지 않는다. 순환논증임에도 불구하고. 그러나 믿지 않는 자들은 이를 증명해보기 위해 온갖 방법론들을 다 동원한다. 그러나 우리는 그 방법론을 인정하지 않는다. 그러니까 방법도 여기에서 결정이 되는 것이다. 우리는 ‘성경을 연구해서 진리여부를 입증하는’ 방식을 취한다. 그리고 이 방법에 대해 부끄러워하지 않는다. 물론 불신자들은 이런 논리를 인정하지 않는다. 이것을 순환논리라고 말한다. 자기들이 전제를 만들어 놓고 그 전제를 입증하기 위한 논리를 펼쳐나갈 뿐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불합리라고 말한다. 그러나 우리는 이것을 불합리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우리는 합리주의로 성경에 접근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계시가 있지 않으면 합리주의에서 출발해서 불합리주의에 빠질 수 밖에 없다는 것을 우리는 알기 때문에 이 사실에 대해서 있는 그대로 이야기 한다.

 

우리에게 이 신념이 순환논리이기 때문에 불합리하다고 말하는 그 불신자들은 합리적인가? 결코 그렇지 않다. 그들도 불신앙이라는 신앙을 가지고 산다. 반틸이 이야기하는 것은 우리는 최소한 일관성이 있다는 것이다. 비록 성경을 합리적으로 검증할 방법은 없지만, 우리가 하나님 위에 올라가서 이를 검증하고 판단할 수는 없지만, 이 부분에 대해서 우리는 인간이기 때문에 이 믿음에서 시작한다는 데 대해서 절대 부끄럽지 않다. 우리는 모든 것이 make sense 할 수 있다. 우리가 모든 것을 알지는 못하지만, 아는 한도 내에서는 make sense 할 수 있다. 우리는 절대로 불합리주의로 넘어가지 않는다.

 

이 make sense 라는 것이 참 중요하다. 어린아이들이 얼마나 행복한가? 그런데, 사실은 어린아이들은 어른들보다 아는 것이 적다. 어른들은 아는 것이 많아질수록 점점 생각이 복잡해지고, 아이들처럼 생각이 단순해지지 않는다. 그렇다고 아는 것이 많아서 행복한가? 행복은 아는 것에 분량이 있는 것이 아니라 만족하는 데에서 행복하다. 아이들은 부모님의 사랑을 받고, 부모님의 품 속에 있을 때에는 아무리 바깥 세상이 험할 지라도 부모님의 품 안에서는 make sense 하다. 행복하다. 모든 것을 알지는 않지만 세상에 대해서 make sense 하다. 이런 것이 인간의 존재론적인 측면에서 key point 라고 생각한다. 하나님이 우리를 만드실 때, 모든 것을 알아야 행복한 존재가 아니라 내가 아는 것에 만족할 때 행복한 존재로 만드셨다. 오히려 부끄럽게 생각해야 하는 것은 불신자들이 말하는 전제, 하나님을 없애놓고, 묻는 질문에 대해 아무도 답변할 사람이 없는 것, 어느 방향으로 물어도 퍼즐이 그림을 보지 않고 맞추기 때문에 대답이 나올 수 없는 것, 이런 것이 부끄러운 것이다.

 

불신자도 자기 나름대로 전제를 가지고 있다. 우리 쪽에서는 하나님 주권이다. 그런데, 불신자들은 ‘인간주권’이다. 자기가 하나님처럼 될 때에 라는 전제를 둔다. 그런데 인간이 절대적 존재라는 것이 입증이 되는가? 그것이 입증이 되어야 말이 된다. 그것이 입증이 된다면, 이 두 시스템은 서로 경쟁하는 시스템이 될 것이다. 그 방법론을 전개해서 성경이 다 거짓말이다. 그리고 하나님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이런 결과를 입증해 줄 수 있다면, 그것이 신앙이다. 사실 이렇게 되면 이 양자의 시스템에 모두 논리성이 있다. 그러나 반틸이 볼 때, 인간은 결과적으로 회의와 파멸, 절망, 비존재로 떨어진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하나님처럼 될 수 있다는 전제로 시작했는데, 나중에 방법과 결과가 그것을 뒷받침해주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인간 이하의 존재로 떨어지는 것이 바로 불신앙의 모습이라는 것이다.

 

결국, 불신앙도 순환논리이다. 전제를 가지고 시작한다. 그래서 그 전제를 입증하려는 삶을 살아간다. 마귀도 도와주고, 사람도 도와주고 해서 그런 삶을 살아간다. 처음부터 마귀의 유혹은 하나님처럼 될 수 있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모든 방법을 동원해서 인간이 하나님처럼 될 수 있는 것처럼 착각하고 살아가게 만든다. 그렇게 되면 이상해진다. 모든 것을 내 머리로 알 수 있다고 생각했고, 신의 존재도 증명할 수 있다고 생각했는데 왜 내가 이꼴이 되었는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칼 바르트의 가장 대표적인 책 중의 하나가 ‘로마서 강해’이다. 그런데, 이 로마서 강해를 놓고 신학자들이 어떻게 평했냐 하면, 신학자들의 놀이터에 떨어진 폭탄이다’라고 했다. 그런데, 그 로마서는 1차 세계 대전의 직후에 나왔다. 그를 논할 때, 단순히 그의 신학적 측면만 봐서는 안된다. 우리가 그를 볼 때는 왜 그 사람이 그런 신학을 발전시켰는가 하는 것을 봐야 한다.

 

그는 인간성에 대한 자포자기에서부터, 인간성에 대한 절망에 의해서, 그런 관점에 의해서 출발하게 된 것이다. 결국 칼 바르트는 자유주의 신학에 대해서 반발을 한 것이다. 자유주의 신학의 인간의지와 이성, 합리주의에 대한 자신감, 합리주의 신학에 대한 자신감에 대한 반발이었다. 도대체 그 자신감의 결과가 무엇인가? 하는 질문을 던지며 반발한 것이었다. 인간이 지금까지 만들어온 신학에 대한 전면적 부정을 한 것이 바로 ‘로마서 강해’였다. 그래서 그런 평을 얻은 것이다. 그런 시대적 측면을 고려한다면 바르트의 신학에 대해서 좀 더 점수를 줄 수 있다. 그의 시스템이 성경적이냐 아니냐에 대한 것은 별개의 문제이지만. 위에서 말한 문제, 인간의 자신감에 대해 그 허실을 폭로한 것이 바르트의 신학이었다. 그래서 그는 그 이전의 신학, 자유주의건 보수주의건 전면 부정했다. 하나님은 ‘절대 타자’이다. 고로 누구든지 하나님을 아는 척 하지 말아라. 자유주의건 보수주의건 하나님에 대해 아는 척 하던 신학은 모두 물러가라는 식이었다. 보수주의도 계시에 의존하기 때문에 그런 신학을 발전시켜 왔다.

 

바르트는 보수주의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라고 했다. 하나님에 대해 너무 아는 척을 많이 했다는 것이었다. 하나님이 계시를 주시면 아는 것이고, 안 주시면 모르는 것이다라는 것이었다. 그래서 변증법적 신학이라는 것을 만들었는데, 이것도 자체적으로 모순점이 있었다. 그렇다면 자기는 2000년 동안 내려온 신학을 다 버렸는데, 하나님을 아는 방법이 무엇인가를 말해야 한다. 그런데, 우리가 하나님을 모르는가? 모든 문자적 계시가 부정되어진다면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을 이해할 수 있다는 말인가? 그런 질문을 던질 수 밖에 없다. 바르트의 심정은 이해가 가지만, 그의 신학적 system 은 인정할 수 없다. 그래서, 바르트 신학은 그냥 갑자기 튀어나온 것이 아니다. 시대적 context 에서 그 시대의 전통에 대해 반발하는 형식으로 튀어나온 것이다. 경건주의는 사-정통주의에 반발해서 나온 것이다. 여기서 key point 는, 모든 논리는 순환적 논리를 가지고 있다는 것, 그리고 불신앙들도 순환적 논리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불신앙은 그 출발지점으로 돌아가지 않는 순환논리이다. 돌아가다가 밑으로 떨어져 버리는 순환논리이다.

 

종교에만 순환논리가 적용되는 것이 아니라 일반 학문에도 적용된다는 것을 아주 웅변적으로 입증해준 케이스가 있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이 가진 선입관이 ‘종교는 순환논리이고, 학문은 순환논리가 아니다.’라는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는 종교인들을 우물 안의 개구리처럼 취급한다. 그에 반해 일반 학문은 아주 중립적인 위치에서 전제를 만들어내지 않고 아주 순도 100% 귀납법적으로 data 를 추출해서 논리를 세운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순환논리가 아니라 직선의 논리를 가지고 있다고 주장을 한다. 그런 선입관들이 보통의 사람들에게 일반화 되어져 있다.

 

그런데, 그렇지 않다는 것을 아주 대표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토마스 쿤 이라는 M.I.T. 의 물리학자가 쓴 저서 『과학혁명의 구조(Structures of Scientific Revolutions)』라는 책에서 밝혀준다. 이 사람의 주장은 굉장히 단순하다. 이 사람이 처음으로 Paradigm shift 라는 말을 만들어 낸 사람이다. 그의 주장은, 과학에서도 새로운 이론이 나올 때, 절대적으로 객관적으로 나오지 않는다는 것이다. 가설을 세워놓고, 그 가설을 입증해 나가는 방식으로 나온다는 것이다. 한 단계, 한 단계를 올라갈 때는 아주 객관적인 과정을 거쳐서 발전하는 것이 아니라 가설을 세워놓고 그것을 입증해 나가는 식으로 발전한다는 것이다. 모든 논리는 순환논리라는 명제를 입증해 주는 것이다. 이 사람은 일종의 폭탄 선언을 한 것이다. 모든 논리는, 종교적, 신학적, 학문적, 과학적 논리는 순환적 논리라는 것을 폭로한 것이다. 이 사람은 신자도 아니다.

 

물리학에서 전자가 움직일 때, 전자가 직선으로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파장으로 움직인다. 지금까지 고전 물리학에서는 직선으로 움직인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아인슈타인이 나오면서 전자는 wave, 파장으로 움직인다고 한 것이다. 여기에서 E=mc2 가 여기에서 나온 것이다. 이는 불신자들의 편견이 얼마나 불합리한지를 불신자 중에서 나와서 입증해 준 것이다. 그 말은 모든 말은 믿음에서, 가설에서 시작한다는 것을 증명한 것이다. 인간의 학문이 다 그런 식으로 전개되어 간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인간에게는 어떤 전제 없이 전제를 사용하지 않은 상태에서 인간이 자체적 능력을 가지고 이 우주 만물에 대해서 가치를 메기고 또, 이론을 설정하는 그런 능력이 인간에게는 없다는 것이다. 그것을 자기들 중에서 토마스 쿤 이라는 사람이 폭로해 버린다. 과학이 절대 객관적이지 않다는 것이다.

 

가설 (hyper-thesis)을 만들어 놓고, 그 가설에 맞는 방법을 연구한다. 모든 연구실의 시설은 그 가설에 맞는 방법으로 실험을 하는 것이다. 그래서 그 결과가 그 가설에 맞는 대로 나오면 하는 것이고, 안 나오면 집어치우는 것이다. 인간의 모든 학문들이 경험적으로 ‘되나 안되나’를 보는 것이지 절대 객관적인 것이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토마스 쿤은 변증학적으로도 아주 중요한 사람이다. 반틸의 영향력에도 한계가 있는데, 토마스 쿤이 나와서, 불신자 중에서 나와서 그런 말을 했기 때문이다. 문제는 논리가 순환논리인가 아닌가 하는 것이 문제가 아니다. 모든 논리는 순환적 성격을 가질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인간은 하나님이 아니기 때문에 미리 알고 하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 다만 가설을 설정해 놓고, 그것이 긴가 아닌가를 입증하는 방식으로 방법을 취해 나가는 것일 뿐인 것이다. 이제 우리는 불신자들과 아주 공정한 위치에서 말할 수 있는 발판이 마련된 것이다.

 

운동경기를 할 때 영어에서 그런 용어가 있는데, ‘field 의 balance 가 맞았다’고 하는 것이다. 지금까지 우리는 아래쪽에서 공격하는 상황이었다. 우리는 계속해서 순환논리라는 이유 때문에 자신들의 객관성을 주장하는 불신자들에 의해 몰리고 있었다. 그런 측면에서 기독교에 대해 말하는데, 불신자들은 절대적 편견을 가지고 들어오니까 말이 될 여지가 없는 것이다. 언제나 불리하고 마음에 꿀리는 것을 가지고 얘기할 수 밖에 없는 마음의 부담감을 가졌던 것이다. 그런데 반틸이 그것을 깨트리고, 토마스 쿤 이 깨트린 것이다. 인간은 모두 순환논리를 가지고 있는데, 우리는 전제에서 방법으로 가서 그것을 논리적으로 입증하지는 못하지만, 일관성 있게 처음과 끝이 분명해진다. 그래서 하나님 말씀을 보니까 창세기에서 요한계시록까지 일관성이 있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관점에서 만물을 보니까 make sense 하다는 것이다. 그래서 최소한 당신들이 우리 입장에 서서 이 논리가 make sense 한지 안 한지를 보라는 말을 할 수 있게 되었다.

 

물론 보더라도 불의로 진리를 막기 때문에 인정하지 않는다. 그 기저에서 신지식이 반응을 하기는 하지만, 결국은 인정을 하지 않는다. 그래서 반틸의 이야기는 ‘Switch Please’ 이다. 자리를 한 번 바꿔보라는 것이다. 우리 생각에는 불신자들이 인정할 것 같은데, 불신자들은 이것을 보더라도 인정하지 않는다. 이것이 죄의 불합리성이다. 은혜로 거듭나기 전에는 절대 인정할 수가 없다. 죄가 가리우기 때문에 절대 계시를 깨달을 수가 없다. 그들의 순환논리는 결국, 떨어지게 된다. 그들의 존경하는 학자가 증명한 바를 갖다 대고, 그들의 논리가 불신앙에서 시작할 수 밖에 없다는 것을 아주 통쾌하게 선포하는 것이다. 이런 말들도 굉장히 이성적인 이야기이다. 이성적인 이야기로서의 한계점을 가진다. 결과적으로는 말씀이 선포되어지고, 성령이 말씀을 통해서 선포되어질 때에만 변화가 일어난다. 결국은 이런 골자가 설교의 메시지로 바뀌어져서 선포되어질 필요가 있다.

 

설교 메시지에 이것을, 밥을 아주 잘 지어서 맛있는 밥으로 먹인다면, 효과가 있는 것이다. 똑 같은 설교이지만 어떤 설교는 성령님께서 강하게 역사하시고, 어떤 설교는 그렇지 않은 것이 사실이다. 같은 설교라도 복음의 본질에 맞게 잘 준비해서 설교를 한다면, 하나님께서 역사하실 것이다. 물론 그런 것이 아니더라도 하나님께서는 역사하셔서 사람을 구원하신다. 그러나 우리가 논의한 인간의 죄된 본성에 대한 모순성을 설교에 드러나지 않게 잘 지어 넣는, 그런 요소가 있을 수 있다면, 좋은 설교가 되어질 수 있다. 일부러 의식적으로 이런 메시지들이 드러나서는 안된다. 무의식 속에서 자연스럽게 모락모락 김으로 나오듯이 나와야 한다. 뼈대가 보이면 절대로 안된다. 잘하는 설교는, 내 경험상, 아주 멋있는 뼈대가 그 안에 있으면서도 듣는 사람은 그 뼈대를 눈치채지 못하고, 은혜를 받는 설교, 그런 것이 중요하다. 그러나 그 설교자가 설교를 준비할 때에는 매우 훌륭한 뼈대를 준비하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조직신학자들도 이런 뼈대 작업을 할 때, 무엇을 하는 것인지 질문을 던질 수 있다. 그런데, 이런 뼈대가 김이 모락모락 나듯이 밑에서 작업이 이루어져서 설교에 녹아날 때, 좋은 설교가 나올 수 있는 것이다. 내 관점에서 설교는 논리성이 크게 없다. 한국 교회는 상층부를 지향하는 관점이 강하기 때문에, 초월적이고 느낌적인 부분을 잘 해야 영향력이 있다. 내 경우에 어려웠던 점이 이런 부분이었다. 모든 신학을 서양에서 배웠기 때문에 모든 메시지가 논리성만을 추구했다. 그런데, 아무리 미국에 사는 한국 사람들이지만, 메시지가 회중들과 잘 맞지 않는 부분들이 있었다. 솔직히 논리가 없으면 은혜가 되질 않는다. 논리만 있어서는 안되지만, 논리가 충분 조건은 아니지만, 필요조건이다. 논리가 없이도 은혜스럽게 잘 하는 부분들도 있기는 하지만 말이다.

 

 

마지막 총정리하는 시간을 가진 후에 질문 시간을 가지겠다. 질문이 많이 나와야 하는데, 질문이 많이 나오지 않는 것은 문제가 있다.

 

빈틸은 참 희한한 케이스인데, 그가 공격을 받을 때는 반틸을 이성주의자로 공격하는 사람도 있었고, 반이성주의자라고 공격하는 사람도 있었다. 참 특이한 케이스이다. 양쪽에서 다 공격을 받았다. 그렇다면, 지금까지 우리가 공격 받는 것은 반이성주의자라고 공격을 받는 것은 납득이 좀 간다. 반이성주의는 영어로 fideism 이라고 한다. 이것이 ‘믿음주의’라는 것이다. Fide 라는 것이 라틴어로 ‘믿음’이다.

 

그런데, 왜 반틸을 ‘이성주의자’라고 공격을 했을까? 그 부분은 좀 납득이 가지 않는 부분이다. 그 이유는 반틸이 지나치게 이성에 집착했기 때문이다. 이성에 자신감을 가지는 사람들로부터, 합리주의 철학과 신학에 대해 반발했기 때문에, 그 보다는 전제가 중요하다고, 믿음으로 시작해야 그 믿음 안에서 이성이 올바른 방법을 사용할 수 있다는 그의 주장 대문에 그의 주장을 fideism 이라고 공격했다는 사람들이 많은데, 그를 이성주의자라고 공격하는 것은, 그가 합리주의를 반박하기 위해서 너무 지나치게 합리적으로 설명했다는 것이다. 지나치게 이성에 대해 많은 지면을 할애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렇기 때문에 나는 이 역설에서 반틸의 천재가 있다고 본다. 반틸을 이성주의자라고 비난할 것이 아니라, 합리주의를 무너뜨리기 위해서 합리성을 동원했다는 것이 그의 천재성이지 어떻게 그 반대로 이해할 수 있는 것인가 하는 생각이다. 반틸은 합리주의 신학과 방법론에 대해서 반박하는 변증학을 시도했다고 한다면, 프랜시스 쉐이퍼는 조금 다른 입장에서 상대를 불합리주의자들을 상대로 삼았다. 그래서 쉐이퍼를 읽을 때에는 그 대상이 누구인가를 염두에 두고 읽어야 한다. 반틸은 합리주의자들을 상대로 글을 썼고, 쉐이퍼는 불합리주의자들, 포스트 모더니스트들을 상대로 변증을 전개한 사람이다. 그래서 쉐이퍼는 정,반,합의 문제를 다룬다. 쉐이퍼가 볼 때에는, 반틸의 변증학에서는 임마누엘 칸트가 기점이다. 왜냐하면 칸트에 의해 상층부와 하층부가 분리되었기 때문이다. 그 때부터 순수이성의 독주가 시작되었던 것이다.

 

그런데, 쉐이퍼는 헤겔을 기점으로 삼는다. 왜냐하면 그에게서 정,반,합이 나오기 때문이다. 쉐이퍼의 입장에서 재미있는 부분은, 합리주의 시대를 그래도 괜찮은 시대로 본다. 어떤 시대로 규명 하냐 하면, 논리학에서 ‘모순율’이라는 것이 있다. Law of non-contradiction 이라고 한다. ‘A는 절대로 비 A 가 될 수 없다’ 는 것이다. 그의 입장에서 볼 때는, 합리주의 시대에서는 진리가 비진리가 될 수 없고 비진리가 진리가 될 수 없다는 명제 정도는 있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진리와 비진리의 본질적 구별이 분명하던 시대였다는 것이다. 물론 합리주의라는 전제에 있어서는 문제가 있지만, 처음에 합리주의자들은 이 명제를 가지고 시작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헤겔에서부터 이것이 깨어지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그에게서부터 정,반,합이라는 논리가 나타나면서 ‘A’가 논리, ‘비 A’가 ‘–A’라고 보았을 때 A 와 -A 의 합은 ‘A prime’ 이라는 것이다. 이는 역사가 진행되면서 진리도 진화가 된다는 것이다. 쉐이퍼는 포스트 모더니즘의 문제는 바로 여기에서 발생된다고 보았던 것이다. 합리주의가 헤겔 전에는 그래도 합리주의가 지배했던 시대에 합리주의 라는 철학 자체는 문제가 비록 있는 것이지만, 진리에 대해서 만은 모순 률에 근거한 절대적 진리가 있었다는 것이다. 그의 입장에서는 모더니즘 보다, 포스트 모더니즘이 문제가 더 심각하다고 보았다. 왜냐하면 빛과 어두움이 합쳐져서 또 다른 형태의 빛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그러니까 세상에 나쁜 것 아무것도 없고, 모든 것이 좋은 것이다. 선과 악의 개념이 없어져 버린 것이다. 그러니까 포스트 모던 세대는 반도덕이 아니다. 무도덕이다. 도덕을 반대하는 것이 아니라 도덕이 없는 것이다.

 

도덕은 moral 이라고 한다. 부도덕은 immoral 이다. 모더니즘의 시대에는 이 양자가 있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포스트모더니즘 시대에 와서는 이 둘이 합쳐져서 A moral 이 생겨났다. 그래서 도덕 자체에 반대하는 것이 아니라 도덕 자체를 초월해 버린다. 아예 무시를 해버리는 것이다. A moral 에 오면 도덕 자체에 관심이 없어진다. 상대주의에 빠지게 된다. 쉐이퍼는 같은 변증가이지만 이런 점에서 반틸과 다르고, 대상이 다르다. 그리고 좀 더 대중적인 측면에서 작업을 했다. 어떻게 정,반,합의 문화가 대중의 문화에서 나타나는가를 자세히 살폈다. 히피들, 락앤록, 비틀즈, 마약 등을 통해 분석한 사람이다. 반틸은 훨씬 더 순수이론가이고 범위가 방대하며 어려운 반면, 쉐이퍼는 좀 더 읽기는 쉽고, 우리 현실에 가깝고 대중적이다. 그러나 아무튼 이 두사람이 어떤 사람들을 대상으로 어던 변증을 펼쳐 나갔는지를 안다면 우리에게 도움이 될 것 같다.

 

우리가 조직신학과 성경신학의 차이가 무엇인가를 이야기 한다. 조직신학은 결국 퍼즐에 그림을 그려주는 신학이다. 성경신학은 퍼즐 맞추기이다. 말하자면 조직신학이라는 것은 전제적 성격을 가지고 있다. 왜냐하면 퍼즐의 그림을 그려주는 것이기 때문이다. 조직신학을 전제적으로 하지 않을 수 없는 이유가 그것이다. 그 다음에 성경신학은 그 그림을 가지고 퍼즐을 맞춰나가는 것이다. 역할이 좀 틀리다. 지금 신학계 에서는 조직신학과 성경신학 사이에 갈등이 있다. 점점 포스트모던 시대로 나아가는 것이 보인다. 그렇기 때문에 지금은 신학 계에서는 성경신학이 우위를 차지하고 있다. 지나간 시대, 박형룡 박사 정도 때의 시대, 지금부터 반세기 전에는 조직신학이 우위를 차지하고 있었다. 지금은 성경신학이 훨씬 우위를 차지하고 있다. 유학 가는 사람들도 점점 성경신학이 많아지고 조직신학이 점점 무시를 당한다.

 

그런데, 이런 현상은 실제로 굉장히 위험하다고 생각한다. 그림을 그려주는 사람이 없기 때문에 서로 다른 그림을 그리면서 자기가 맞다고 생각하게 되고, 조직신학자가 그림을 그려주려고 하면 거부하게 된다. 그런 위험성이 있고, 그러나 이런 것은 시대적 흐름을 타기 때문에 포스트 모던으로 갔다가 다시 모던으로 돌아올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니까 성경신학이 우위를 차지했다가 얼마 후에 다시 조직신학이 우위를 차지하는 때가 다시 올 것이다. 시계추가 다시 오기 때문이다.

 

개신원에서 가르쳤던 학생이 하나 있다. 개신원에서 1년 공부하고 웨스트민스터로 갔는데, 지금 졸업반이다. 그런데 거의 M.div 성적이 1,2등 하는 친구이다. 처음에 갈 때, 조직신학을 하겠다고 갔다. 그런데, 지금 졸업반인데, 구약신학을 하겠다고 한다. 지금 웨스트민스터 신학교에서도 존 머레이나 반틸이 있을 때에 조직신학이 우위를 차지했지 지금은 성경신학이 우위를 가지고 있다. 그런데, 조직신학과 성경신학이 함께 공존해야 한다. 전제만 외쳐서도 안된다. 당위성만 가지고 외쳐서는 안된다. 실제로 성경을 봤을 때, 그 당위성을 증명하는, 신학적 전제를 증명하는 logic 이 발견되어야만 한다. 그런데, 조직신학 자체는 약점이 있다. 당위성만 가지고는 안되기 때문에, 그 세부적인 내용이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어떤 전제를 가진 상황에서 그 방법론적 역할을 성경신학이 해 줘야 한다. 시대적 상황을 읽고 조직신학의 입장에서 설명을 해주는 사람이 있어야 한다.

 

시대적 흐름에 따라 ‘이론학문’이 약화가 된다. 이유는 이론학문이 즉각적으로 돌아오는 것이 없기 때문에 그렇다. 이론학문을 하는 사람들에게 보장되는 것이 없다. 이론에 투자하고 R&D 에 투자하는 것이 없는 때에, 그 집단은 미래가 보장되지 않는다. 서양의 어던 기업은 R&D 에만 수입의 50%를 투자한다. 그런 상황에서 우리는 계속 서양에서 개발한 물건들을 가져와서 응용만 잘한다. 그래서 돈을 버는데, 문제는 계속해서 따라가기만 하게 되고, 현실적으로 눈앞의 수익만 생각을 하다가 보니까 이론학문을 포기하게 되고 장래가 흔들리게 된다. 나는 성경 본문에 있는 그대로 말했다고 말한다면, 그 문제는 논리적으로 문제가 생길 수 밖에 없다. 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조직신학과 성경신학이 협력하는 수 밖에 없다. 지금은 협력하는 관계로 나아가지 않고, 양분되는 경향을 보인다.

 

이 양자는 서로 동반자 역할을 해야 한다. 그런데, 동반자 역할을 할 때, 미묘한 부분이 있다면, 조직신학은 전체적 그림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지시하는 경향, ‘이렇게 해석해라’, ‘저렇게 해석해라’하는 경향이 있다. 본문 안에서는 그 자체의 logic 을 찾아내되 해석은 이렇게 하라는 지시를 하니까 성경신학자들의 거부감을 자아내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모델을 설정하는 작업이다. 모델이 없을 수는 없다. 모델을 설정하지 않는 것도 하나의 모델이다. 모델을 설정하지 않음으로 인해서 가지게 되는 갈등과 모순은 어쩔 수 없는 것이다.

 

개신원에서 강의를 할 때, 마지막 날 한 학생이 아주 도발적으로 질문을 했다. 지금까지 강의를 들어봤는데 교수님은 다른 폭 넓은 신학적 방법론들은 소개를 해주지 않고 오로지 칼빈의 신학에만 입각해서 우리에게 주입시킨다는 것이었다. 아마, 그 핵생은 자기에게 선택의 자유, 영역이 주어지지 않았다는 것에 대해 불쾌하게 생각했던 것 같다. 그래서 솔직하게 인정하고, 나는 거기에 대해 아무런 부끄러움이 없다고 말했다. 나는 그렇게 강의하기 위해 있는 사람이므로. 반틸에게 재미난 습관이 하나 있었다. 그는 언제나 교실에 들어오면 제일 먼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칠판에다 그림을 하나 그렸다. 원을 두 개를 그렸다. 항상. 아무것도 없는 칠판에다가 동그라미를 두개 그렸다. 학생들은 그 의미가 무엇인지 다 알았다. 하나의 원은 하나님이고, 다른 하나의 원은 인간이었다. 이 두 개의 그림은 하나님과 인간의 절대적 구별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하나님과 피조물의 절대적인 존재론적 구별. 여기에서부터 모든 것을 만들어 나간다. 반틸은 그 그림 하나로 모든 시스템이 설명되었다.

 

그런데 어느 날 반틸이 수업시간에 좀 늦게 들어왔다. 그런데 한 학생이 좀 짓궂게 그림을 하나 그려놓았다. 반틸이 들어와서 그리려고 보니까 동그라미가 하나밖에 없었다. 그래가지고 화를 벌컥 냈다고 한다. 도대체 어떤 놈이 동그라미를 하나만 그렸냐면서 하나를 더 그렸다고 한다. 동그라미 하나는 이 폐쇄 체계 안에 하나님과 인간을 모두 넣고 출발한다는 의미였다. 이것은 자신에 대한 모욕이고, 하나님에 대한 모욕이고 그 변증학 자체에 대한 모욕이라면서 동그라미 하나를 더 그리고 다같이 웃었다는 일화가 있다.

 

반틸 변증학의 핵심을 보여주는 이야기이다.

 

 

결론적으로, 믿음이라는 것은 초월적 접근과 내재적 접근을 같이 해야 한다. 이는 조직신학과 성경신학을 함께 해나가야 한다는 말과 같은 말인데, 전제와 함께 그 내부적 논리성을 같이 입증해 나가는 그런 방식을 우리가 취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것이 신학이든 설교이든 간에 우리가 어떤 방식으로 믿음을 가르칠 때, 항상 전제적인 부분과 합리적인 부분에 대한 동시적 접근이 필요하다. 당위성 외에 사람들의 그 당위성에 대한 근거와 논리에 대한 의문을 풀어주는 일이 수반되어야만 효과적일 수 있다. 실제로 그 당위성을 뒷받침해 주는 성경적 logic 이 있어야만 한다.

 

성경 무오성에 대해 말할 때,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이 성경이 무오 하다고 하니까, 우리는 말씀이 무오 하다고 믿는다. 이렇게 말만 하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우리는 계시 안에서 드러나는 logic 을 구체적으로 제시해 내지 않으면 우리는 fideism 으로 나가게 된다. fide 는 좋은 것이지만, fideism 은 당위성만 주장하고 외치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조직신학만으로 되지 않는다. 성경신학에서 텍스트 속으로 들어가서, 말씀 자체가 구체적으로 상당한 logic 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 주해이고, 구속사적 설교인 것이다. 구속사적으로 풀지 않으면 알레고리로 넘어가지 않을 수 없는 부분이 너무나 많이 있다. 구약과 신약 사이에서 구속사적으로 연결 짓지 않으면 그 연결성을 찾기가 너무나 어려울 때가 많다. 같은 하나님인지가 의심스러운 경우도 너무나 많다. 그런 종류의 문제에 봉착했을 때, 준비가 안된 사람들은 영해, 알레고리로 가버린다. 그렇게 하면 쉽다. 그냥 추월해 버리면 되니까. 그러나 그렇게 하게 되면 성경은 유기적 계시가 아니라, 교훈적 신앙 백과사전이 되어버린다.

 

 

모든 인간은 순환논리이다. 자기가 가설을 세우고 그것을 입증해 나가는 것이다. 우리가 믿음이 순환논리라는 점을 부끄러워할 필요는 없다. 그러나 논리성에 있어서 뒤져서는 안된다.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것을 뒤집어 엎는 논리를 전개해 나가야 한다. 그것이 효과적인 변증이고, 설교이다. 설교를 잘 하시는 분들은 선천적으로 이런 부분들을 잘 하는 사람들이다. 사람들이 어떤 전제를 가지고 있는지를 알고서, 그 전제에 맞춰나가다가, 그 전제가 결과에 의해 지원을 받지 못한다는 이야기를 하면서 마지막에 가서 반전을 한다. 그렇게 되면 듣는 사람들이 깜짝 놀라게 된다. 배워서 하게 된다. 이런 것이 전제적 변증, 설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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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아퀴나스 때만 하더라도 성경이 계시의 영역으로 들어갔었다. 그러나 임마누엘 칸트, 계몽주의 시대에 와서 부터는 상층부 개념은 무조건 이성으로 이해되지 않는 개념들을 집어넣는 장소가 되었다. 종교는 이성이 배제되고 믿음만을 강조하는 형태로 남아있게 되었다.

 

2) 죄는 완전에 대한 결핍이라고 보는 이론이다.

 

3) 불가해성과 불가지론은 절대적으로 구분되어야 하는 개념이다.

 

4) ‘지식의’라고 바꿀 수 있다.

 

 

 

 

 

출처 : 비교적 젊은 개혁주의자들의 아지트!

글쓴이 : 하늘형상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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