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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넬리우스 반틸과 변증학

by 【고동엽】 2017. 12. 30.

1. 코넬리우스 반틸(Cornelius Van Til, 1895년 5월 3일 ~ 1987년 4월 17일)

 

1) 개혁파 변증학의 선구자, 반틸
첫째, 우리는 장로교의 신앙 고백이 설명하는 것처럼 기독교가 참되다는 것을 믿습니다.

둘째, 우리는 기독교가 학적인 변증을 환영하며, 그것을 할 수 있다는 것을 믿습니다.
셋째, 우리는 두려움이나 편애 없이 그리고 교회 내에서든지 교회 밖에서든지 기독교가 죽음 가운데 있는 인류를 구원하는 유일한 길임을 반대하는 것이 무엇이든 간에, 그것에 분명히 반대하여 기독교를 선포해야 한다고 믿습니다.

1929년 5월 25일, 구(舊)-프린스턴 신학교의 전통을 계승하고자 설립된 웨스트민스터 신학교 개교 예배를 드리는 가운데 메이천은 웨스트민스터 신학교의 신앙에 대해 위와 같이 선언했다. 이러한 신앙 고백은 웨스트민스터 신학교에서 평생 철저한 개혁파 변증학을 수립하고자 힘썼던 코넬리우스 반틸의 신앙 고백이기도 하다. 그러나 그가 구-프린스턴의 신학적 전통과 신앙 고백을 물려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성서에 입각해 변증 작업을 할 때에는 찰스 핫지나 벤자민 워필드에게서 발견되는 약점들을 지적함에 주저함이 없었다. 전통이 성서를 대신할 수 없기 때문이었다.


그의 변증학은 철저하게 하나님을 전제하고 시작된다. 이러한 전제는 그의 기독교적 실재론이나 인식론, 가치론에 있어서 변함없이 일관되게 작용한다. 모든 존재는 궁극적인 존재인 하나님에게 의존하며, 그로부터 파생된 존재들이다. 그렇기 때문에 참된 지식은 궁극적 존재인 하나님 자신의 온전한 성격과 지식이 전제되지 않고서는 성립할 수 없게 된다. 창조된 세계는 하나님의 완벽한 지식 안에서 완전히 해석된 세계이다. 따라서 사람은 하나님의 생각을 따라서 알고, 생각해야 하며, 하나님의 계시에 대한 지식 없이는 참된 지식을 가졌다고 말할 수 없는 것이다. 모든 참된 가치들 또한 가치의 원천이신 하나님으로부터 나온다. 그래서 반틸은 역사적 개혁파 신조들이 말하는 것처럼, 하나님께서 성경을 통해 그리스도 안에서 선하다고 하신 것만이 선하다고 주장한다.

반틸의 이러한 입장은 가장 철저한 개혁신학과 개혁파 변증학을 전개하는 데 있어 큰 영향을 끼쳤다. 또한 그는 기독교 철학자들과의 대화를 통해 철학이 계시에 기초해 전개될 수 있게 하는 데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그러므로 우리는 저자가 서문에서 “코넬리우스 반틸은 20세기의 가장 철저한 개혁신학자라고 말할 수 있는 신학자”라고 평가한 것에 동의하지 않을 수 없다.


2) 하나님의 말씀의 종, 반틸
반틸을 개혁파 변증학의 선구자로 얘기하면서, 자신과 다른 입장을 가진 이들에게 보인 태도만을 생각할 때, 그를 극한의 이성적 사유를 추구한 철학자로 생각하기 쉽지만, 그는 항상 하나님의 말씀을 섬기는 자(VDM: Verbum Dei Minister)라 불리길 선호했다. 실제로 존 프레임이나 에드먼드 클라우니의 증언에 따르면 그는 아주 수려하고 도전적인 설교를 했으며, 그의 설교가 가르침보다 더 나았다고 한다. 반틸에 대한 비판 중에 철학적 논의를 신학적 입장에서 시작한다는 비판이 있는데, 이는 그가 철저히 하나님의 말씀의 종으로서 그의 모든 사상적 체계를 놓고 시작했기 때문일 것이다.


3) 따뜻한 인격의 사람, 반틸
또한 그는 따뜻한 인격의 사람이었다. 존 프레임은 반틸 자신의 책 안에 나타난 반틸은 강하고 대립자에게 가혹하다는 인상을 주지만, 기본적으로 “자애롭고 매력적인 성격”을 가졌다고 말하며, 그레그 반센도 “반틸을 개인적으로 안 사람들은 누구나 반틸이 원칙과 확신의 사람일뿐만 아니라, 따뜻함과 동정심을 지닌 사람임을 증언해 줄 수 있을 것이다”라고 말한다. 학식이 많지 않은 이들과도 오랫동안 즐겁게 이야기를 나눴고, 자주 병원을 찾아 환자들을 돌아보고 기도하였으며,양로원에서 기꺼이 설교하려 했던 반틸. 냉정한 이론가 반틸이 아니라 한 인간 반틸의 모습을 이 책을 통해서 또한 만나 볼 수 있다.


4) 코넬리우스 반틸 소개
진정한 ‘개혁파 변증학(Reformed Apologetics)'을 제시하는데 전 생애를 바친 개혁파 변증학의 선구자, 코넬리우스 반틸은 1895년 5월 3일 네덜란드 흐로닝겐 지역의 흐로우테가스트에서 태어났다.

칼빈 대학(Calvin College)의 전신인 기독교 개혁파 대학(Christian Reformed College)을 졸업 후, 칼빈 신학교(Calvin Theological Seminary)에서 1년을 공부하고서 프린스턴으로 옮겨 프린스턴 대학교와 프린스턴 신학교에서 공부했다. 프린스턴 신학교에서 신학 석사 학위를 받은 후 프린스턴 대학교에서 인격주의적 관념론자 아치볼드 알렌 보우만 교수의 지도 아래 1927년에 철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미시간 주 스프링 레이크에 있는 교회에서 목회하기도 했던 그는 1929년 프린스턴 신학교로부터 교수직을 제안 받았으나 프린스턴 신학교의 신학적 입장이 달라진 것 때문에 수락하지 않았다. 그 후 구 프린스턴 전통을 지키고 정통 신앙과 신학을 보수하고자 설립된 웨스트민스터 신학교(Westminster Theological Seminary)의 교수 초빙을 수락하여 웨스트민스터 신학교의 초대 교수진의 일원이 되었다. 평생을 그 학교의 변증학 교수로 섬기면서 개혁파 변증학, 일명 전제주의적 변증학을 수립하고 가르치는데 심혈을 기울인 그는 칼 바르트로 대표되는 신정통주의 신학에 대하여 초기부터 비판적 입장을 고수했다. 하나님의 말씀을 섬기는 자(Verbum Dei Minister)라는 말을 듣길 가장 좋아했던 그는 은퇴 후에도 도서관에서 끊임없이 공부하는 모습으로 후학들에게 도전을 주다 1987년 4월 17일 주님의 품에 안겼다.

대표적인 저서 중[변증학],[개혁주의 신학 서론](이상 기독교문서선교회),[개혁 신앙과 현대 사상],[기독교 윤리](이상 엠마오) 등이 우리말로 번역되었고, 그 외에도 출간되거나 번역되지 않은 수많은 저작과 저술들이 있다. [인터파크 제공]

 

 

2. 기독교 변증학(코넬리우스 반틸)

 

제1장 기독교 진리의 체계

변증학은 각양 각태의 비 기독교적 생의 철학과 대결하는 기독교적 생의 철학의 변호이다. 변증학 (Apologetics)은 기독교보다 유신론을 더 많이 취급하고 있고 험증학은 유신론보다는 기독교를 더 많이 다루고 있다. 그러나 기독교와 유신론은 상호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다. 기독교 유신론의 변호에는 역사적 면과 철학적 면을 취급하고 있다. 변증학이 주로 철학적인 면을 취급하는데 반하여 험증학은 주로 역사적 면을 다룬다. 각기 자기의 할 일을 갖고 있으며 끊임없이 서로 접촉한다. 기독교 유신론의 진리의 변호는 변증학부에만 맡길 수는 없다. 기독교에 관한 특정한 진리는 선언되자마자 즉시 변호되어야만 한다. 이들 진리 중에 어느 하나도 공격을 받지 않고 그저 설 수 있도록 허용되지 않았다. 그리고 각 분야의 전문가들은 이 진리들을 최선을 다해 변호할 수 있다.

 

조직신학

우리들은 조직신학 속에서 우리들이 변호해야 할 진리의 체계를 갖고 있다. 조직신학은 다음과 같은 여섯 분야로 구분된다. 즉 신론, 인간론, 기독론, 구원론, 교회론, 그리고 종말론이다.

 

 

A. 신론

신학과 변증학의 체계 안에서 신론(the doctrine of God)은 근본적으로 중요하다. 변증학에 있어서 신론은 항상 맨 처음에 공격을 받지 않으면 맨 마지막에 공격을 받는 것이다. 하나님이 어떤 종류의 신인가에 관한 물음은 하나님의 존재의 물음보다 선행되어야 한다.

 

1.하나님의 존재

(1)하나님의 독립성: 하나님께서는 자기 자신의 존재 이외에 어떤 것에 결코 의존하지 않는 것을 의미한다. (요5:26, 행17:25) 그는 자기 자신으로 충분하다..

(2)하나님의 불변성: 그는 어떻게도 변하지 않고 또 변할 수도 없다.(말3:6, 약1:17)

(3)하나님의 통일성: 단일성의 통일성은 수적으로 하나인 것을 가리킨다. 그 단순성의 통일은 하나님은 그보다 먼저 존재하고 있던 어떤 부분들, 또는 사항들로 구성되어 있지 않다는 것을 의미한다.(렘10:10, 요일1:5).

 

2.하나님의 지식

하나님의 지식의 본질에 관한 물음은 변증학에서 가장 중요하다. 하나님께서 아시지 못하는 그의 존재 안에 숨겨진 깊이(hidden depths)는 없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존재 안에서 가능성은 실재성과 일치하며 잠재성은 현실성과 일치한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지식을 더하기 위하여 자기 자신 이외에 다른 것에 향할 필요가 없다. 그리고 사실로 하여금 사실적인 것이 되기 하는 것은 하나님의 계획이요 사실에 관한 하나님의 포괄적인 해석이다.

 

3.하나님의 의지

하나님의 존재와 지식이 있는 그대로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의지도 있는 그대로이다. 하나님은 그의 존재에 있어서 자조적이고 독립적이다. 그러므로 단 한 번의 내면적 행위에 의하여 자기 자신과 모든 피조된 존재들을 안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속성을 영광 중에 유지하시기를 원하신다. 그 자신은 그가 하는 모든 것의 최종적, 또는 최고의 목표이다. 그의 존재, 지식, 또는 의지에 있어서 그는 피조물의 존재, 지식 또는 의지에 의존하지 않는다. 하나님은 절대적이며 자율적이다.

 

4.삼위 일체의 하나님

하나님께서는 자기 자신 속에 삼위일체의 자의식적 능동적 존재로 존재한다. 성부, 성자, 성령은 각기 하나의 인격으로 한데 합쳐 철저한 인격적 하나님이 되신다. 신성의 삼위 사이에는 내적이고 자의식 적이고 영원한 상호적 작용이 있다. 그들은 동질적(Co-Substantial)이다. 각 위는 다른 두 위와 꼭 같이 하나님이시다. 삼위일체를 존재론적으로 기술하는 것이 관례이다. 기독교의 하나님만이 독립적이고 자족적이다.

 

5. 기독교 형이상학

하나님은 한 가지의 종류의 존재, 즉, 무한하고, 영원하고, 불변하고, 완전하게 거룩한 속성을 갖고 있는 존재이다. 기독교의 가장 기본적 구별은 하나님의 존재를 스스로 만족하는 독립적 존재라고 말하고 피조된 존재를 그에게 의존하는 존재라고 말하는 것이다. 기독교는 실재 또는 존재에 관한 이중층의 이론(a two-layer theory of reality or being)을 갖고 있다.

 

6.기독교적 인식론

하나님께서는 스스로 만족하여 독립해 있는 존재이고 그 밖에 모든 다른 존재들은 다 피조된 존재, 즉 하나님으로부터 온 존재인 것과 꼭 같이, 하나님께서는 독립된 지식을 갖고 있으나 인간은 파생된 지식인 이차적 지식(derivtive knowledge)을 갖고 있다. 그러나 이것과 대조적으로 온갖 형태의 비 기독교적 인식론은 먼저 일반적 지식에 대하여 언급하고 그 후에야 신적 지식과 인간의 지식을 구별한다. 그리고 로마 카톨릭교회는 최종적 준 거점(the final reference point)을 하나님 이라기 보다는 인간이다.

 

7.기독교 윤리

윤리 문제에 관하여, 스스로 자족하여 독립해 있는 하나님의 교리는 하나님의 의지가 어떤 일이 발생하거나 그것을 결정하는 유일한 최종적 힘이라는 것을 암시해 주고 있다. 사물들은 하나님의 계획 때문에 궁극적으로 있는 그대로 존재한다. 피조된 우주 속에 있는 모든 힘은 그 우주를 지지하고 있는 하나님의 능력의 발산과 일치한다. 인간의 의지는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창조적 행위와 만물을 유지시키는 행위에 의존한다. 그러므로 비 기독교적 도덕관에 도전하고 하나님의 의지를 궁극적인 것으로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도덕적 특성에 의무가 없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 기독교 변증학의 임무이다. 로마 카톨릭교회의 윤리는 그의 본성에 호소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의지를 회피하고자 한다. 로마 카톨릭 교회의 교리는 비 기독교적 윤리학자들이 소위 기본 도덕의 본질을 참으로 결정할 수 있다는 것을 용인하는 것이다. 기독교는 우리들이 믿고 있는 하나님이 갖고 있는 것으로 열거되어 있는 모든 속성들을 소유하고 있는 절대적 인격이시며 삼위일체의 하나님을 제시하고 있다. 이 하나님의 개념이 우리들이 소중히 믿고 있는 다른 모든 것들의 기초이다.

 

 

B.인간론

변증학에서 우리들이 취급하는 전체 문제는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관계중의 하나이다. 그러므로 신론 다음으로 인간론은 중요하다.

 

1. 인간 속에 있는 하나님의 형상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되었다. 그러므로 그는 피조물이 하나님을 닮을 수 있는 모든 면에서 하나님을 닮았다. 그는 인격 면에서 하나님을 닮았다. 인간은 그의 도덕적 속성의 우수성에 있어서 하나님을 닮았다는 것을 강조할 때에, 인간이 창조되었을 때에 그는 참다운 지식, 참다운 의, 참다운 거룩함을 갖고 있었다는 것을 첨가한다. 확실히 인간은 하나님을 닮았다. 그러나 그는 항상 피조물의 수준에서 하나님을 닮았다.

 

2.우주와 인간과의 관계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되었으므로 인간이 그의 주위에 있는 우주와 유기적인 관계를 맺고 있다. 그리고 인간은 이 세상에서 하나님 밑에서 예언자와 제사장과 왕이 되도록 되어 있었다. 이 세상의 변화는 인간의 행위에 크게 의존하고 있다. 예언자로서 인간은 하나님의 뜻을 따라 이 세상을 해석해야만 했다. 제사장으로서 그는 이 세상을 하나님께 봉헌해야만 했다. 그리고 왕으로서는 하나님을 위하여 이 세상을 다스리도록 되어 있었다.

 

3. 인간의 타락

인간의 타락은 그의 창조만큼 강조될 필요가 있다. 인간은 태초에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되었고 그 후 곧 타락하여 범죄 하게 되었다. 그러므로 인간이 타락했을 때에 그것은 모든 면에 있어서 하나님 없이 살아보려는 하나의 시도였다. 인간은 죄에 대한 비난을 받기를 원치 않았기 때문에, 죄의 책임을 그의 외적 환경과 내적 환경의 탓으로 돌렸다. 그러나 이 같은 성격적 인간관에 대립하여 비 기독교적 견해는 인간은 피조물도 아니요 죄인도 아니라고 가정하거나 또는 단언한다.

 

 

C. 기독론

죄가 세상에 들어왔기 때문에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격리된 후에 하나님과 인간이 어떻게 다시 화해하고 하나가 되었을 가를 우리들이 볼 수 있을 때까지는 기독교 관점의 전면적인 모습을 볼 수 없다. 하나님과 인간이 화해 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하나님께서 인간을 구원하시고 다시 인간으로 하여금 그 구원 속에서 하나님과 재 연합시켜 주시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신 것은 인간으로 하여금 하나님께 돌아가게 하기 위해서였다. 그는 본질 면에서 완전히 성부와 동일하며 영원 전부터 성부와 함께 존재해 왔다. 그는 성육신(incarnation)에 있어서 인간의 본성을 취하였다. 그러나 이것은 신적 본성과 인적 본성이 혼합되었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그리스도는 참 예언자, 참 제사장, 참 왕이시다

 

 

D.구원론

구원이 우리들 속에서 역시 완전히 이루어지기 전까지는 참다운 구원이 우리들을 위하여 완전히 이루어진 것은 아니다. 죄가 현실적으로 존재하고 있으므로 구원이 우리에게 적용되지 않는다면, 다만 우리 곁에 있는 것은 아무 소용이 없는 것이다. 어떤 분이 실지로 그 구원을 우리에게 줄 때만 소용이 있는 것이다. 만일 인간이 자기 멋대로 복음을 받아들일 수도 거부 할 수도 있다면, 우리들은 영원한 하나님을 인간에게 의존하게 만드는 것이 된다. 그러면 우리들은 하나님의 공유할 수 없는 속성을 부인하는 것이 된다.

 

 

E.교회론

“무형적 교회, 또는 보편적 교회는 택함을 받은 모든 회원으로 구성되어 있고, 그들은 그것의 머리이신 그리스도 밑에서 하나로 모였고, 지금도 모여들고, 앞으로도 모여들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모든 것을 충만케 하시는 그의 배우자요, 몸이요, 충만이시다” 이것은 웨스트 민스트 신앙고백의 교회의 정의이다. 인간의 구원을 결정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다. 교회, 즉 보편적 교회(the universal church)는 “택정함을 받은 모든 사람들"이다. 이것은 인간의 책임을 배제시키지 않는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택정 하셨다는 것 속에 명백히 표현된 것과 같은 하나님의 절대성이 우리에게 용기를 주어 복음을 전하게 하신다.

 

 

F. 종말론

하나님께서 자기의 장래를 맡긴 모든 크리스천은 하나님께서 장래를 지배하신다는 것을 믿는다. 이는 하나님께서 장래를 해석했다는 것을 믿는 것이다. 만약 하나님께서 장래를 지배하시지 않는다면, 우리들의 영원한 구원에 관한 하나님의 약속을 믿는 것은 의미가 없다.

 

 

2장 기독교 생의 철학

기독교 신학을 변호하기 전에 우리들은 기독교와 철학과의 관계에 관하여 논하지 않으면 안 된다. 철학은 실재론과 인식론과 윤리론을 취급한다. 즉, 철학은 대개 현재의 인생관과 세계관을 다룬다. 철학은 기독교 신학이 하나님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을 취급하고, 기독교 신학은 반면에 하나님뿐만 아니라 세상도 다룬다. 참다운 신학이 본래의 모습을 보존하기 위하여, 적어도 넓은 의미에서, 기독교 변증가는 철학과 과학의 분야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 기독교 변증학은 존재론적 삼위일체의 교리, 창조의 교리, 인간의 타락과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의 교리를, 그것의 전제와 암시와 그것의 공개적 단어에 의하여, 거부하는 철학체계와 과학의 체계에 대하여 무관심할 수 없다. 참다운 프로테스탄트 신학을 옹호하고 변증하는 것은 적어도 참다운 프로테스탄트 철학의 기본적 원리를 옹호하고 변증하는 것을 요청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프로테스탄트의 철학과 과학의 전체 활동에 기초가 되는 것은 언약의 개념이다. 가장 중요한 점은 성경 속에 나타난 계시를 우리들의 출발점으로 삼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이다. 오직 성경 교리의 빛에서만 자연 속에 나타난 하나님의 계시에 관한 프로테스탄트의 교리를 얻을 수 있다.

 

1.역사 철학

가장 낮은 존재라고 할지라도 피조된 존재의 모든 차원은 신과 인간 사이의 철저한 인격적 관계의 형태 속에 포함되어있다. 처음서부터 존재는 성격 면에서 언약 적이다. 인간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자연 계시는 시간이 흘러감에 따라 일어나는 구분의 과정(the process of diferentiation)을 위한 운동자의 구실을 하도록 되어있었다. 아담, 노아, 예언자, 제사장 등의 활동 속에서 잘 표현되고 있다. 이 역사 철학 속에서 자연계시와 성경 속의 계시를 한데 묶어서 서로 관련이 있는 것으로 고려치 않으면 무의미하고 아무 유익이 없다.

 

2. 자연 계시의 필요성

자연 계시의 필요성에 관하여 먼저 말하면서 우리들은 인간이 언약의 인격(covenant personality)으로 만들어 졌다는 것을 회상하지 않으면 안 된다. 아담이 언약을 지키지 않고 불복종했기 때문에 성경이 필요하게 되었다. 이 언약을 지키지 않은 불순종은 하나님께서 선악과의 나무에 대하여 주신 초자연적 적극적 계시와의 관계 속에 발생하였다. 그 명령이 초자연적인 것으로 나타나기 위해서는 자연적인 것은 자연적인 것으로 나타나지 않으면 안 되었을 것이다. 인간의 타락 이전에는 단순히 규칙적인 것으로서 자연적인 것은 구속적으로 언약 적인 것으로서 초자연의 전제였다.

 

3.자연 계시의 권위

낙원에서 하나님께서는 생명나무에 관하여 사람과 직접적으로 그리고 적극적으로 교통하셨다. 이 계시는 권위적인 것이었다. 그것의 전체의 내용은 무조건 순종을 요구하는 명령이었다. 이와 같은 방법으로 인간에게 임한 것과 같은 권위의 말씀은 자연 속에 있는 사물을 통하여 하나님의 동일한 음성으로 그의 명령을 말씀하셨다는 사실을 예증하는 것이었다.

 

4.자연 계시의 충분성

자연 계시는 본래부터 하나의 제한된 생각이다. 그것은 초자연적으로 전달되는 커뮤니케이션과 관계된 언약적 인격으로서 인간 편에서의 역사적 행위의 전제에 불과하다. 그러나 그러한 특수한 목적을 위하여 그것은 완전히 충분하였다. 하나님의 자연 계시는 하나님을 섬기고자 하는 사람들과 하나님을 섬기지 않으려는 사람들과의 사이의 구별의 과정을 위한 운동장과 같은 구실을 하기 위한 그것의 목적을 위해 충분한 것이다.

 

5.자연 계시의 명료성

하나님의 자연 계시의 명료성의 의미는 그 자연 계시가 스스로 만족한 가운데 독립하여 계신 하나님의 전적으로 자발적인 계시의 한 국면이라는 사실에 의존하고 있다. 피조된 인간이 하나도 남김없이 철저하게 볼 수는 없어도 분명하게 계시된 것을 분명하게 볼 수는 있을 것이다. 인간은 참으로 확실하게 알기 위하여 철저하게 모든 것을 다 알 필요는 없다.

 

3장 접촉점

기독교를 변증하기 위해서 우리는 먼저 접촉점을 생각해야 한다. 기독교 변증가는 기독교를 받아들이도록 제시하여야 할 일반 사람은 그가 자기 자신에 대해 생각하고 있는 종류의 존재와는 완전히 다르다는 것을 알지 않으면 안된다. 그러므로 신자와 불신자가 동의할 수 있는 것이 있는가? 를 고려해야 한다. 기독교는 인간의 경험, 그리고 무엇보다도 인간 자신의 본성의 사실들을 있는 그대로 적나라하게 드러내는 빛으로 자체를 제시하지 않으면 안된다.

 

1. 출발점에 관한 로마 카톨릭의 교리

로마 카톨릭교회의 인간론을 보면 피조된 인간의 본성과 인간의 본성에 들어온 죄의 결과에 대하여 결함이 있는 교리를 갖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들의 이론에 따르면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혼과 몸을 창조하셨다. 그리고 이 두 요소 사이에 조화를 보존하고 또 육을 영에게 적당하게 복종시킬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는 인간에게 원의의 초자연적 선물을 주셨다. 인간은 그의 타락에 위하여 이 원의의 초자연적 선물을 상실하게 되었다. 그러나 프로테스탄트는 원의는 자연적인 것이었다고 주장한다. 또한 그들의 신학은 하나님과 관계없이 인간이 자기 자신과 세계의 사물들에 관한 인간의 의식은 이해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인간이 죄인이 되었을 때 그는 하나님 대신에 자기 자신을 궁극적 또는 최종적 준거점으로 만들었다. 그들의 신학은 모든 발생하는 일을 그의 섭리로 지배하는 하나님을 원치 않는다. 출발점에 있어서 우리들이 참으로 기독교적 인간론을 갖는다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그러나 카톨릭 교회의 교리는 이같은 인간론을 갖고 있지 않다!

 

2.비칼뱅주의적 프로테스탄티즘

칼빈주의는 구원은 오직 하나님께로만 임한다고 일관성 있게 표현해 왔다. 그러나 비칼빈주의는 최후의 결정권의 여지를 개인에게 남겨두기 위하여 하나님의 활동을 보편 구원설의 각도에서 생각해 왔다. 또한 하나님에 관한 의식 없이도 인간의 자의식과 사물에 관한 의식이 어느 정도 이해될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있다. 이러한 신학은 모두 자연주의의 기초가 되고 있는 요소들에 의해 물들어 있다.

 

3.일관성이 좀 덜 있는 칼뱅주의

그들은 이성의 역할에 있어서 하지의 입장을 취한다. 곧 이성은 계시를 받아들이는 도구로써 필요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성은 계시의 증거를 판단하지 않으면 안 된다.

 

4.로마 카톨릭 교회의 딜레마

로마 카톨릭에 의하면 자연인은 이미 진리를 소유하고 있다. 그는 자연 계시에 관해서만 진리를 소유하고 있다고 한다. 그러나 만일 자연인이 본질적으로 바른 방법으로 자연 계시를 해석 할 수 잇고 또 그렇게 할 수 있다면 기독교를 참으로 해석하기 위하여 초자연적 도움을 필요로 할 이유가 없다. 그러나 다른 한편에서는, 자연인은 자연 계시를 충분히 정확하게 해석하지 못한다고 말할 수 있다. 그리고 인간 안에 있는 하나님의 형상에 관해서도 그들은 인간이 본래 타락하기 전에도 초자연적 도움 없이도 어떤 사물을 완전히 알 수 없었다는 것을 암시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5. 개혁주의자의 입장

개혁주의 신학의 입장은 인간의 정신은 파생적인 것이라고 주장한다. 인간의 정신은 자기 자체의 조성을 의식하지 않고는 자기 자체를 자연스럽게 의식할 수 없다. 왜냐하면 인간의 자아의식은 하나님-의식을 전제로 하기 때문이다. 칼빈은 이것을 피할 수 없는 신 의식이라고 말한다.

하나님의 자연계시는 인간의 주위에 있었을 뿐만 아니라 인간의 내면에도 있었다. 이 자연계시 그 자체는 불완전하다. 자연계시는 처음부터 인간의 미래에 관한 초자연적 계시로 보충 될 필요가 있었다. 인간은 아직 모든 진리를 소유하고 있지 못하면서 그의 본래의 조직에 의하여 진리와 접촉하게 되었다고 말 할 수 있다. 또한 아무 인간도 하나님을 아는 지식은 어떤 사물을 인식하는 그의 능력 속에 지울 수 없도록 관여되어 있다.

 

복음을 위한 접촉점을 자연인 속에서 찾지 않으면 안된다. 모든 사람들은 그의 마음속 깊은 곳에서 그가 하나님의 피조물로 하나님께 종속되어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모든 사람은 마음속으로 그가 약속을 지키지 못하고 위반한자라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러나 모든 사람은 마치 그렇지 않은 것처럼 행동하고 말한다. 로마 카톨릭교회는 인간의 마음속에 있으나 모든 사람들이 억제하고 있는 것에 호소하는 것에 실패함으로써 사실상 자연인이 자기 자신에 관하여 갖고 있는 견해의 합법성을 인정하는 것이 된다. 참다운 성경적 견해는 모든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았고 그리고 그에게는 하나님의 법이 새겨져 있다는 사실 속에서 접촉점을 찾으려고 한다. 그 사실은 항상 인간으로 하여금 하나님께 접근시키고 있기 때문이다.

 

4. 방법의 문제

개혁주의적 변증학의 방법은 기독교 본래의 모습대로의 개혁주의적 인생관과 세계관을 옹호하지 않으면 안된다. 그러나 개혁주의 변증가는 자연인의 방법론에 전혀 동의할 수 없다.

 

1.전제에 의한 추론

개혁주의 변증가는 그의 방법론은 기독교 유신론의 진리(the truth of Christian theism)를 전제한다는 것을 솔직히 인정할 것이다. 기독교 유신론의 모든 교리의 기초는 독립적인 하나님의 교리. 즉, 존재론적 삼위 일체의 교리이다. 그것은 피조물의 세계 안에 만물이 통제되고 있는 하나님의 계획의 개념이다. 비 기독교적 방법론의 본질은 결론으로 인도될 것을 미리 결정할 수 없다는 것을 주장하는 것이다. 기독교 변증가로서 마땅히 주장해야 하는 방법론의 결론은 비록 비 기독교적 입장에서 볼지라도, 기독교 유신론의 진리는 권위주의의 가장 명백한 증거라고 단언하는 것이다. 개혁주의 변증가는 비기독교적 방법의 본질에 관심조차 가져서는 안된다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정반대로 그는 그것을 비평적으로 분석해야 한다. 그는 하나님의 성령의 도움을 받아 진리를 꿰뚫어 보는데 접근할 수 있다.

 

2.성경

개혁주의 변증가는 성경을 인간에게 주신 하나님의 절대 무오한 최종적으로 영감된 계시로 확고하게 믿는다. 죄인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절대적으로 확실하게 영감된 계시인 성경은 그것에 의하여 피조 된 우주의 모든 사실들이 해석되어야 할 빛으로서 우리 앞에 있다. 자연적이거나 구원적인 모든 유한한 존재는 하나님의 마음속에 있는 모든 것을 내포하는 하나의 계획과 관련 속에서 작용한다. 기독교 변증학에 있어서 성경의 위치는 성경 자체가 자기 자체의 권위에 대하여 말하고 있는 대로 성경을 받아들인다는 것을 긍정해야한다. 또한 하나님의 존재 혹은 비 존재를 연구함에 있어서 성경을 참조하지 않고 이성의 사용에 의하는 비기독교와는 동조할 수 없는 것이다. 로마 카톨릭은 인간 지식을 그 출발점으로 하는데 있어서 크게 자연인들과 동의한다. 로마 카톨릭과 알미니안주의자들은 신학적으로 이질적인 견해를 가진 채 타협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들의 변증법은 자기-패배적인 것이다.

 

3.브로크하우스 방법론

우리는 프로테스탄트의 변증학의 적절한 방법은 직접적인 접근 방법이 아니라 전제의 방법이라는 것을 살펴보았다. 그러나 로마 카톨릭 신학자들과 알미니안 신학자들은 반드시 직접적 접근 방법으로 타협한다. 프로테스탄트의 참다운 추리 방법은 기독교 유신론의 모든 부분 또는 국면의 의미는 하나의 통일된 단위로서 기독교 유신론에 의존하고 있다는 사실을 강조하는 것을 내포하고 있다. 기독교 유신론의 진리의 전제 없이는 아무 사실도 다른 사실로부터 구별할 수 없다. 우리는 전제의 방법에 의하지 않고는, 오로지 내재적 범주(immanentistic categories)에 의한 해석 또는 자기-충족적 하나님(self-sufficient God)이라는 용어에 의한 해석이 중심적 차이점(central point of difference)에서 만날 수 없을 것이다.

 

5장 권위와 이성

로마 카톨릭에서 교회의 권위, 특별히 교황의 권위로서 말하는 것은 궁극적이다. 그러나 프로테스탄테에게 있어서 성경은 교회와 교회의 교사들의 모든 선언 위에 있다. 권위와 이성에 관한 알미니안 주의는 로마 카톨릭의 개념과 유사하다. 알미니안 신학은 개혁주의의 선택의 교리가 인간의 책임의 가치를 정당하게 평가하지 못한다고 주장한다. 개혁주의 변증가들이 자연인에게 제시할 주요한 사실들은 첫째, 스스로 독립하여 계신 하나님의 존재의 사실이 있다. 둘째, 일반 창조와 하나님의 형상으로 인간을 지으신 특수 창조의 사실이 있다. 셋째, 우주 안에 있는 모든 것에 대한 하나님의 포괄적인 계획과 섭리의 사실이 있다. 그 다음에 인간의 타락과 그 결과로 발생한 죄의 사실이 있다. 이 사실들과의 관계에 있어서만 그리스도의 구속 사업과 관련되어 있는 다른 모든 사실들이 있는 그대로의 사실들이다.

 

성경의 문제에 관해서도 만일 어떤 사람이 참다운 프로테스탄티즘이 전체로서의 인간의 삶과 경험에 관한 권위 있는 해석이라고 말하고 있는 성경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아무 것에서도 의미를 찾아낼 수 없다는 것을 그는 보여주지 않으면 안된다. 이 전제를 항상 마음속에 명심하고 있을 때에만 성경의 현상에 관한 문제와 하나님과 인간과의 관계에 대하여 성경이 가르치고 있는 것에 관한 효과적인 논의가 가능하다.

 

이 책에 관한 독서 보고서를 마치면서 먼저 반틸박사의 기독교 변증학을 대할 수 있게 되어서 매우 감사하게 생각한다. 반틸박사님의 책이 좀 어렵다고 하는 말들을 많이 들어왔기에 어느 정도 예상은 하고 있었지만 막상 금번에 기독교 변증학을 대하고 보니 생각했던 것보다도 훨씬 더 어렵다는 느낌을 갖게 하였다. 처음 목차를 보았을 때는 별로 어렵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조금 읽어 내려가다 보니 참으로 어렵고 이해가 안되는 부분이 너무나 많아서 고민을 하곤 하였다. 혹시 번역상의 문제가 아닌가 의심이 갈 정도였다. 그러면서도 이 책을 끝까지 읽을 수 잇게 되어서 매우 기쁘며 다시 한번 기독교 변증의 중요성과 그 기본 개념들, 또한 기독교와 다른 여러 입장들과 그 방법들에 대해서 고찰할 수 있는 아주 좋은 계기였다고 생각한다.

 

출처 : ReturnBible / 개혁신앙

글쓴이 : returnbible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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