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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넬리우스 반틸

by 【고동엽】 2019. 8. 21.

제목 : 기독교 윤리학(코넬리우스반틸)


서 론

기독교 윤리란 무엇인가?

기독교 윤리는 그 주제를 다루는 저자들에 의해 다양하게 정의되어 왔다. 카이저(L.S. Keyset)는 이 학문을 "성서와 이성과 자연의 조명 속에서 옳고 그름에 관한 원칙, 그리소 실천을 다루는 학문" 이라고 저의했고, 에밀 부루너(Emil Btunner)는 기독교 윤리는 "신적(神的)행위에 의해 결정된 바 인간의 행위에 관한 학문"이라고 주장한다. 또한 조지 하크니스(Georgia Harkness)는 기독교 윤리를 "예수에 의해 예증되고 가르쳤으며 제반 문제와 인간 존재의 결단에 적용된 삶의 방법에 관한 조직적인 연구"로서 진술하고 있다.

기독교 윤리는 목적론적 윤리와 의무론적 윤리라는 용어로 나누어 지기도 하며, 목적론적 윤리는 인간의 목표 혹은 종말에 관한 문제와 더불어 시작하고, 의무론적 윤리는 순종의 윤리이다. 또 기독교 윤리는 두 가지 기능을 갖는데 하나는 '최고선'을 정의하는 것이며 다른 하나는 목표를 성취하기 위하여 필요한 인간의 행위의 원칙들을 선언하는 것이다.

윤리학이란 인간의 의지가 선한가 아니면 악한가를 알아 보는 한 기준이며, 이것을 통해서 인간의 선악을 말할 수 있는 표준을 윤리학이라 할 수 있겠다. 우리 기독교인들은 그리스도의 영에 의해서 지배되고, 사랑에 의해서 충동되어 복음안에서 살기 때문에 우리 생활이 기꺼이 하나님의 법에 순종해 드리도록 노력하는 자세를 가져야 한다.

그런 상황에서 하나님의 선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여 실천하는 사람들이 되야 하는데, 그러나 새 실재가된 새 사람들에게 변화된 양심이 하나님의 원하는 그런 기독교인이 되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그렇지 않음이 안타까울 뿐이다.

인간의 최고 목표는 무엇인가? 인간의 최고 목표는 행복인가? 아니면 선인가? 그것을 윤리학적으로 살펴본다면, 그 윤리학의 목적은 기독교적 입장과 비기독교적 입장이 다르고 또 기독교와 천주교의 입장 또한 다르는데 다음의 여러 소재를 통해서 윤리학의 진정한 목표를 찾아 보고자 한다.

 

본 론

반틸 교수에 의하면 윤리는 대개 최고선(summum bonum)이란 표제 아래서 인간의 최고 목표는 행복인가 아니면 선인가? 인간은 보상을 구해야 하는가 아니면 그의 선행에 부수되는 보상이 있든 없든 선해야 하는가? 선 그 자체가 보상인가? 만약 그렇다면 선이란 무엇인가가 윤리학자들에 의해 논의되고 있으며 모든 윤리학은 세가지 문제를 다룬다고 한다.

첫째는 인간 행동의 동기(motive)는 무엇인가?

둘째는 인간 행동의 표준(standeard)은 무엇인가?

셋째는 인간 행동의 목표(end)나 목적(purpose)은 무엇인가? 라고 말하면서 고려해야 할 것은 해석 방법이며, 그것을 보는 관점에 따라 기독교적 윤리와 철학적 윤리로 구분될 수 있다고 말했다.

기독인에게 있어서 신학적 윤리학과 철학적 윤리학의 차이란 단지 모든 도덕 생활을 성경에 비추어 해석해야 하고 의식적으로 그 구별을 무시하며 철학적 신학의 윤리학이나 단순히 기독교적인 윤리학을 말할 것을 제안했다. 또한 윤리학에 대한 기독교의 견해를 로마 카톨릭과 개신교의 윤리학 사이에 차이점이 있음을 말하고 개혁파적 입장에서 해석할 것을 제안하여 철저하게 성경적이며 철저하게 기독교적인 해석으로, 기독교 윤리학의 범위와 전제 조건을 다루고 있다.

 

 

1. 기독교 윤리의 범위와 전제

⑴ 범위

그는 비기독교 윤리학은 당연히 인류의 경험을 통해서 그 해답을 찾는데 오직 기독교 신학과 윤리학을 해석하는데 필요한 자료를 찾을 수 있는 곳은 오직 성경일 뿐이라는 사실에 주의할 필요가 있으며 기독교 신학 윤리학은 구약 성경과 신약 성경간의 조화를 이루게 되는데 기독교 신학 윤리학은 인간의 최고선(summum bonum)과 인간의 생활 기준과 그리고 인간의 윤리적 동기를 다루며, 성경에서부터 이런 모든 문제들의 실마리를 풀어내고 있다.

 

⑵ 전제

㈎ 기독교 윤리의 인식론적 전제

반틸은 윤리학 분야에서 기독교적인 인식론과 비기독교적 인식론의 차이점을 말할 때 해석 사이의 차이점을 말하는데 이 차이점이 암시하는 가장 포괄적인 방법은 비기독교적인 사고에 따르면, 도덕의식이란 단지 윤리 문제에 대한 직접적이거나 근사한 정보원(source of information)에 불과하며 기독교 윤리학에 있어서는 성경에 나타난 자족적 하나님과 존재론적인 삼위일체의 계시는, 다른 모든 문제뿐 아니라 모든 윤리학에 있어서 궁극적인 참고 점이 되며, 성경의 하나님은 인간 존재의 모든 국면에서 인간을 해석하는 궁극적인 범주(ultimate category)라고 했다. 인간이 유한한 존재이지만 하나님을 완벽하게 본받은 존재로 이 세상에 나타나게 된 것은 논리적으로 당연한 일이다.

특히 윤리적인 면에서 인간의 원초적 완전성은 기독교적 사상의 전체적 체계의 기초에 깔려 있는 하나님에 대한 개념 속에 이미 내포되어 있다. 그러나 인간이 본래 완전한 도덕적 양심을 가지고 있었다고 말할 수 있으나 본래 유한한 존재이기에 그의 도덕적 양심도 유한하기 때문에 그는 계시에 의존하여서 살아가야 하는 존재인 것이다.

그러면 중생한 지각의 윤리 의식은 어떠한가? 중생한 지각은 원칙적으로 그것의 본래적 위치를 회복하며 계시 의존적으로 계속해서 성경에 의하여 검토되어지고 약간의 잘못을 범하기는 하나 성경을 통해서 올바를 가치를 부여하게 되며 지속적인 양육을 받는 중생한 윤리적 지각은 도덕적 문제에 대하여 스스로 해답을 만들어 낼 수 있다(성경에 근거). 그러나 카톨릭의 입장은 아퀴나스의 주장으로 언제나 기독교적 입장과 비기독교적 입장을 종합한 타협적 입장을 취한다. 인간에게 상당한 분량의 자유의지를 부여하고 있으며, 이것은 하나님의 섭리에 대해 완전하게 독립적이어야만 한다는 주장이 된다. 또한 모든 형태의 비기독교적 윤리학과 기독교적 윤리학 사이의 가장 근본적인 차이가 있다면 인간의 유한성이라고 보는 비기독교적 입장과 오히려 문제로 일으켜 하나님께 대항한 피조물인 인간의 불순종이라고 생각하는 기독교적 입장인 것이다.

루이스(C.S. Lewis)는 "죄에 대한 전통적인 개념을 회복하는 것이 기독교에 있어서 매우 중요하다"라고 주장했다.

㈏ 기독교 윤리학의 형이상학적 전제

기독교적 윤리와 비기독교적 윤리의 차이는 궁극적으로 그들이 가지고 있는 서로 다른 하나님에 대한 관념 때문이다. 비기독교적 윤리는 하나님에 대한 관념이 모든 윤리적 결정에 대한 자살 행위라고 말한다. 그들에게는 하나님이 존재하지 않는다. 그들은 인간의 의지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의지도 배경을 갖는다는 것을 당연한 것으로 여긴다 그리고 그들의 최종적인 권위로서는 성경이 필요 없다고 주장한다. 결국 그들은 혼자의 힘으로 옳고 그름을 판단 결정해야 하는 것이다. 비유신론은 불확실한 실재를 가정하면서 출발한다. 그들의 표명은 행동주의이다. 그러나 기독교적 윤리에서는 하나님은 절대적인 합리성이며 절대적인 의지이시기도 하시다. 하나님께서는 선하게 될 필요성이 없다. 하나님은 그 자신이 거룩하시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피조물로서 인간이 무엇이 옳고 그른가를 하나님께 여쭈어 보아야 한다.

기독교 윤리학과 비기독교 윤리학 사이를 구분하는 근본적인 차이점은 하나님의 거룩함을 전제 하느냐 그렇지 않느냐에 차이가 있다고 하겠다.

 

 

 

2. 인간의 지고선(至高善)(summum bonum)

⑴ 비기독교적 지고선 (summum bonum)

현재 있는 그대로의 존재를 정상적인 것으로 아무런 의심 없이 받아들인다는 것이 기독교적인 시각과 다른 점이다. 비기독교적 윤리학에 따르면 완전한 세계란 이전에도 없었고 이후에도 존재하지 않는다. 이러한 하나님께 대한 거부는 현재의 경험을 우리의 판단 기준으로 삼아야 한다는, 편이 하고도 순진하게 들리는 표어 아래 숨겨져 있다. 그들은 말하기를 인간들의 악이 영원한 것으로 우주 안에 침투해 들어왔다는 결과를 취하고 있으며 비기독교 윤리학자들에 따르면 관념론(idealism)과 실용주의(pragmatism)로 해석하는데, 관념론적인 사고 형태를 '부드러운 마음(tender-minded)라고 불렀고 실용주의적인 사고 형태를 '거친 마음'(tough-minded)라고 명명했다. 그들은 인간의 인격성은 우선 하나의 완성품인데 그것은 아직 전혀 완성되지 못했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기독교인의 최고선을 비기독교적인 최고선과 구별할 수 있는데 낙관주의와 염세주의. 주지주의적 윤리학과 염세주의적 윤리학, 세계주의적 윤리학과 개인적 윤리학, 사회 윤리학과 국가 윤리학, 이기주의적 윤리학과 이타주의적 윤리학, 행복과 선. 실리성과 덕성 등으로 하나님과 인간이 대등한 상호 연관 관계 속에서 움직인다는 가정을 기초로 한 허구임을 지적한다.

⑵ 성경적 지고선(至高善)(summum bonum)

신.구약 성경은 인간이 하나님의 뜻을 온전히 행할 수 있는 능력을 지니도록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되었다고 본다. 구약 성경에는 불복종에 대한 위협이 나타나며, 신약 성경에서는 복종에 대한 보상이 하나님 앞에서 영생을 사는 삶인 것이 명백히 나타난다.

성경적인 지고선은 절대적이다. 그것은 사람에게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을 정도로 보다 포괄적인 계획을 제시하며, 그의 작업은 하나님의 전 포괄적인 계획의 형태를 띠게 된다. 구약 성경과 신약 성경을 제외한 다른 곳에서는 완벽한 인간의 완전성에 대한 개념을 찾아 볼 수가 전혀 없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이 타락한 후에도 인간들이 그것을 행하려고 노력만 해야 할 그런 무엇이 아닌 절대적 완전에 대한 이상을 주셨다. 하나님의 전 나라가 인간에 대한 자유 은총의 은사이며 따라서 지고선은 인간에 대한 자유 은사인 것이다.

현대 주의에서는 지고선의 영역을 도덕 생활로 국한시켰다. 성경적인 최고선은 개개인 속에 깊숙이 존재하는 악과 사회를 내재하는 죄와 악을 근원적으로 멸절해야 할 것을 요구한다. 그리고 이 악을 멸절시키는 이 목표와 연관된 우리의 임무는 단순하지 안고 성령의 역사로써만 이룩할 수 있다. 자기 희생적인 사랑이 필요하며 적극적인 선을 행해야 된다. 또한 성경적 윤리의 궁극적인 소망을 생각해야 한다.

소망적 윤리란 우주가 하나님께서 정하신 그 날에 완전히 회복될 수 있으며 또 실제로 그렇게 될 수 있으리라는 확신 가운데 살아가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은 우리에게 희망을 주며 우리의 사랑도 하나님 나라 안에서 완성될 것이다.

㈎ 구약 성경의 지고선

구약 성경은 구속적인 최고선(redemptive summum bonum)의 한 특수 형태라는 것은 말할 것도 없다. 하나의 구속적인 지고선에 여러 가지 형태가 존재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그 이유는 구속 자체가 하나의 역사 과정(an historical process)이기 때문이다. 구약 성경의 윤리적인 지고선을 직접 살펴보면 그 윤리적인 지고선은 신정 정치였다.

하나님은 자신이 인간의 절대적이 통치자라는 사실을 인간에게 점차적으로 실현해 나갔다. 인간은 역사의 과정을 통해서 하나님은 왕중 왕이요 주중의 주라는 사실을 배워야 했으며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직접 다스리는 통치자였다. 하나님은 개인과 국가를 훈련시킴에 있어 반복하는 엄격성을 보이셨으며 구약 성경의 엄격성이 윤리 이상의 절대성을 확립시켰다. 신정 정치 그 자체는 보다 높은 신정 정치에의 디딤돌에 불과하다. 구약 성경은 이스라엘 민족이 여호와께 순종하기만 하면 젖과 꿀이 흐르는 땅 뿐만 아니라 생명과 건강의 만복을 약속 받았다는 사실에서 민족적인 규모로 작용함을 알 수 있다.

 

㈏ 신약 성경의 지고선

신약 성경의 절대적 이상 즉 지고선은 예수 그리스도이다. 그러므로 구약 성경의 신자들보다 신약 성경의 신자들이 윤리의 원리에 대해서 명확한 통찰력을 갖고 모든 사물들의 진정한 관계를 보다 명확히 알 수 있다. 신약 시대는 구약 시대의 신자보다 죄를 훨씬 깊이 인식하고 있다. 신약 시대 신자는 하나님의 진정한 아들로서 창조 기사에 접근하며 신약의 신자는 자신의 완전성이란 것이 대속적이란 사실을 명확히 알고 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가 우리의 모범이며 윤리 이상의 근본이고 목표이다.

예수 그리스도가 모범이란 개념은, 첫째 창조 기사를 믿는 기반 위에 있어야 하며, 인간 타락을 전제로 하며, 그의 대리적인 속죄를 전제한다. 인간이 완전했기 때문에 죄라는 것은 너무나 엄청난 것이며, 인간을 완전히 무기력하게 만들었고 자신을 회복하는 방향으로 한 발자국도 나갈 수 없다. 이 전적 타락이야 말로 자신의 노력이나 공로로 구원 얻는 것은 불가능했기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친히 성육신 하셔서 고난과 율법으로부터 세상의 택한 죄인을 구속하셨다.

예수 그리스도로 인하여 우리가 구속 함을 얻었으니 이 우리는 에덴동산의 원위치로 신분상으로는 바뀌어 졌으며, 이제 원위치로 돌아선 우리의 전 도덕적인 생활은 하나님의 영원한 영광의 복사물이어야 한다. 그러기에 하나님의 형상인 우리 피조물들은 하나님께 바로 반사해야 하는데 이것을 신학적으로 모든 영광을 하나님께 돌린다고 말한다.

우리가 예수를 닮은 것은 결국 하나님을 닮는 것이다. 하나님은 추상적인 개념인 반면 예수는 우리들 가운데 직접 보여주심으로 하나님의 형상을 자연적으로 드러내 주셨다.

신 의식이란 시간의 흐름에 따라 인간에게 점점 더 뚜렷해져서 죄와 구원의 꼬불꼬불한 길을 예수의 성육신과 고난의 삶과 대속의 죽음과 부활에 따라 일어난 것들이며 하나님을 인간에게 더욱 가깝게 가져다주는 두드러진 수단이 되었다.

예수의 모범이 우리에게 무슨 의미를 주는가에 대한 문제를 생각할 때는 하나님 나라에 있어서 중재자의 입장이다. 삼위일체 제2위로서의 그는 물론 성부, 성령과 더불어 인간에게 그 나라를 인간의 최고선으로 제시해 주는 자이다. 인간의 최고 관심사는 하나님의 만족이어야 한다는 점을 신약 성경은 강조한다.

개신교의 구원론에서 중요한 것은 율법에 의해서가 아니라 은혜에 의해서 구원받는다는 사실이다. 신자들은 예수님에 의해서 받은 구원에 대한 하나님께 감사를 표하기 위해 결과적으로 선행을 해야 한다. 또한 중요한 것은 악의 파괴가 하나님 나라의 완전한 이상을 실현하기 위한 조건이라는 것이다.

중생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기 위한 조건이며 회심은 그리스도의 대속적인 죽음이 기초임에 틀림없는 것으로, 기독교적인 윤리 행위의 주관적인 조건임에 틀림없음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일부 신학자들에 의하여 회심과 중생은 강조하지 않고 사회 윤리적인 활동만 강조하는 것이 문제시 된다고 하겠다.

 

 

결 론

이제 우리는 하나님의 기준에 맞는 도덕과 윤리를 갖고 하나님 안에서 진정한 도덕을 추구해야 할 것이다. 그래서 이 땅에 하나님 나라를 건설하여(하나님의 완벽한 통치가 임하는 즉 우리의 삶이 하나님의 말씀대로 사는 것)나가야 할 것이다.

작금의 한국 기독교는 상황윤리로 교회를 운영하며, 그것을 은혜로 돌리며 자기 함리화 하여 지기 정당화 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상황윤리자들은 그 상황에 따라서 윤리의 규범이 달라지는데 그렇게 되면 성경이 하나님의 계시로서의 권위를 유지 할 수가 없게 된다.

기독교 윤리란 하나님의 계명을 그 상황의 표준으로 삼았는데 그 계명을 상황윤리로 돌리게 되면 기독교의 독특성과 하나님의 절대성은 사라지게 되는 것이다.

사실 하나님의 계명을 그 상황의 표준으로 삼았는데 그 계명이 없으니까 완전히 방임주의가 되고 주관주의가 된다. 선악과 정의의 판단을 하나님에게서 자기에게로 가져오는 것이다. 그러니 선한 표준은 없어지고 자기 생각이 표준이 되어 버린다. 이런 경우 선악의 바른 판단을 할 수가 없고 또 그 계율에 얽매어 사는 것과 그 계율대로 자원하여 사는 것과는 차원이 다르다. 기독교의 법은 그리스도의 사랑이 강권함으로 자원하여 순종한다.

루터는 말하기를 인간의 이성은 창녀라고 표현하고 있다. 그러니 인간은 그 속에 구속하는 은혜가 없이는 그 사람은 바른 선택을 할 수 없다. 그러므로 이제 우리는 진정한 기독교 윤리 를 만들어 나가야 하겠다.

즉 하나님의 뜻이 하늘에서 온전히 이룬 것 같이 이 땅에서도 온전히 이루어지기를 항상 기도하고 실천하여, 이 땅에 참된 기독교 문화를 이루며 사는 것이, 바로 기독교적 윤리라 할 수 있으며, 그것이 바로 진정한 기독인의 자세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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