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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간음하는 자인가? / 마 5: 27-30

by 【고동엽】 2017. 9. 5.

누가 간음하는 자인가?/ 마5: 27-30

 

 

우리가 잘 아는 바와 같이, 최근에 인기가수 백 모양의 외설적인 정사 장면을 몰래 찍어서 상업용 인터넷에 올린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건당 22000원씩 팔아 원하는 사람은 다운로드를 받을 수 있도록 하여 40억을 벌어들였다는 소문도 돌고 있습니다. 40억을 벌어들일 정도로 많은 사람들이 그 정사 장면을 다운로드 시켰다면 아마 18만 명 이상이 거기에 접속했다는 계산이 나옵니다.

 

더욱이 18만 명이 접속하는 것으로 끝난 것이 아니고 다운 로드를 받은 사람이 이제는 자기 홈페이지나 게시판에 그 동영상을 올려 놓고는 공짜로 보라고 선전을 한 것입니다. 그러니 삽시간에 수만 명의 네티즌들과 심지어 성인들까지 그것을 보느라고 정신이 없는 기막힌 현실이 지금 우리 주변에서 일어나고 있습니다.

 

모 대기업에서는 사원들이 대낮에 몰래 그 사이트를 접속해 보느라고 법썩을 떠는 통에 회사의 메인 서버가 다운이 되어 버리는 이런 참 웃지 못할 일들이 벌어졌습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의 현실입니다. 스무 살을 갓 넘긴 인기 여가수가 어떤 남자와 불장난 하는 것을 찍은 것을 보는 사람들의 반응이 무엇입니까? 사생활을 너무 침해하지 않았느냐 하는 것을 가지고 논란이 일어난 것입니다. 사생활은 지켜 주어야 하지 않느냐는 것입니다. 그와 같은 성 행위가 얼마나 악하냐 선하냐 하는 문제는 관심이 별로 없습니다. 사생활을 너무 노출시켰다는 그것만 가지고 문제를 삼는 사람들이 대부분이라는 말입니다. 그리고 익명성을 보장하는 인터넷의 잇점을 살려서 남몰래 그런 그 추잡한 성생활을 은근히 엿보는 것을 즐기고 있는 자기 자신이 얼마나 정신적으로 영적으로 병자인가 하는 것을 깊이 고민하는 사람이 별로 보이지 않습니다. 그만큼 세상이 달라져 버렸습니다. 이것이 오늘날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입니다.

 

우리는 24시간 무차별 섹스 공격, 성 공격을 받고 있습니다. 인터넷에 들어가는 사람마다 한두 명은 포르노를 볼까 말까 하는 망설임으로 고민하는 경우가 대부분이고, 젊은 청소년들은 비판의식도 없이 끌려 들어가는 것이 오늘 우리의 현실입니다. 폰팅이라든지 원조 교제라든지 러브 호텔이라든지 하는 성 이야기로 도배를 한 저 주간지들이나 정말 차마 눈을 뜨고 볼 수 없는 외설 비디오 등이 오늘날 우리 삶 구석구석에, 스며들어갈 수 있는 부분은 모두 다 스며 들어가서 사람들을 못쓰게 만들고 있는 것이 오늘날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입니다.

 

20세기 중반까지만 해도 다시 말하면, 오,육십년 전만 해도 부정한 방법으로 성 행위를 하는 것은 악이라고, 간음이라고 대부분의 사람들이 인정을 했습니다. 그러나 오늘날은 어떻습니까? 소위 인간들의 윤리 규범을 연구하고 있다는 윤리학자들까지도 간음을 악이라고, 죄라고 규정하는 사람은 거의 찾기가 어렵다고 흔히들 말하고 있습니다. 남녀 두 사람이 서로 합의해서 성 행위를 하는 것은 악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합의를 하고 하는데 왜 그것이 악이냐는 말입니다. 낭만적인 사랑을 나눌 수 있는 조건 하에서는 성은 자유이며 누구든지 할 수 있는 일이라는 식의 생각과 의식과 가치관이 지식인들 사이에 팽배해 있고 그것이 점점 일반화되어 가고 있는 것이 오늘날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입니다.

 

엄숙한 결혼 서약을 통해서 한평생 변치 않는 정절을 지키며 서로의 성을 주고 받는 인간다움의 능력조차 상실해 버린 무력한 세대, 이것이 오늘의 우리 세대입니다. 그러므로 간음이 왜 죄인지 아닌지 조차도 분별을 못하는 혼란 속에 빠져 있습니다. 우리가 이 사실을 분명히 직시하고 오늘 말씀을 보아야 하고 현실을 직시해야 합니다.

 

문제는 하나님의 자녀요, 하나님의 말씀으로 날마다 거룩한 교육을 받는다고 하는 사람들도 세상 사람들과 별 차이가 없다는 데 있습니다.

 

ASAP라고 하는 미국의 어떤 연구 기관의 보고에 의하면 성범죄를 어떻게 보느냐 하는 데 대한 기독교인의 의식, 이혼을 어떻게 보느냐 하는 데 대한 기독교인들의 일반적인 생각, 그리고 실제로 성 범죄를 하느냐 안 하느냐에 대한 구체적인 내용들을 살펴보니 결론이 이것입니다. 안 믿는 사람하고 별 차이가 없다는 것입니다. 목사나 평신도나 다 한데 묶어서 안 믿는 사람하고 비교해 보니 별 차이가 없더라는 것입니다. 다 비슷하게 생각하고 비슷하게 받아 들이고 비슷하게 죄를 범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와 같이 돌아가는 세상에 익숙해지다 보니 둔감해져 버리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웬만한 성문란을 보아도 이제는 너무나 둔감해져서 놀라지도 않습니다. 감동도 없습니다. 예전 같으면 기절을 할 사람들이 눈만 껌뻑이고 있습니다. 그만큼 우리도 모르게 우리 자신이 둔감해져 버린 것입니다. 예수 믿는 우리까지 그렇게 되어 버렸습니다. 이와 같이 우리는 대단한 영적 위기를 만나고 있습니다.

 

성 범죄는 하나님이 대단히 엄하게 다루시는 것이라는 것을 우리는 말씀을 통해 알 수 있습니다. 히브리서 13장 4절에서 '음란하는 자나 간음하는 자는 하나님이 심판하시리라.'고 말씀하십니다. 하필 꼭 음란하는 자, 간음하는 자를 하나님이 심판한다고 고집을 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모든 죄는 하나님이 심판하시는데 말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음란하는 자 간음하는 자는 하나님이 심판하신다고 분명히 못을 박아 놓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말씀에 비추어서 우리가 성경 역사를 조금이라도 일별해 보면 어렵지 않은 결론을 내릴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해 놓고 심히 후회하는 장면이 창세기 6장에 나옵니다. 왜 그랬습니까? 성문란입니다. 그 당시에 사람들이 너무나 성적으로 타락했기 때문에 더 이상 두고 볼 수가 없어서 노아 가족을 남겨 놓고는 물로 전부 심판해버렸지 않습니까?

 

소돔 고모라 성을 하나님이 왜 갑자기 유황불로 뒤집어 엎어 완전히 역사 속에서 사라져 버리게 만들었습니까? 성경의 앞뒤를 잘 읽어서 그 내막을 살펴 보십시오. 성적 타락입니다. 이것이 주 원인입니다.

 

이런 두 가지 사건을 보아도 하나님이 성문란, 성적 타락에 대해서 굉장히 엄하게 다루신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오늘 이처럼 성적으로 문란해진 세상을 하나님이 얼마나 오래 두실까요? 우리는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수 있을까요? 이와 같은 위기 의식을 가지고 오늘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본문을 진지하게 마음에 담고 묵상하면서 성령의 깨달음과 성령의 책망하심과 성령의 치유하심을 기대해야 할 것입니다.

 

십계명 가운데 제 칠계명이 있습니다. 흔히 말하는 칠계입니다. 간음하지 말라는 내용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명령을 엄하게 주셨습니다. 간음하지 말라는 이 칠계명을 연구하고 가르치던 당시 유대인의 지도자들은 어떻게 생각했느냐 하면 육체적으로 이성간에 부정한 행동을 하지 아니하면 칠계명은 범하지 않는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므로 남녀가 선을 넘어서 부정한 행동을 하지 아니한 이상 칠계명하고 나하고는 관계가 없다고 생각했고, 이것 때문에 그들은 항상 자신이 의롭다고 늘 자부했습니다. 따라서 어떤 바리새인들이 성전에 들어와 기도할 때 두 손 들고 이렇게 기도했지 않습니까? "하나님이여 나는 저 옆에 있는 세리처럼 간음하지 아니한 것을 감사합니다." 이것은 육체적으로 어떤 죄를 범하지 않았다 하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나 이 계명을 허락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계명 속에 담겨 있는 진짜 의미가 무엇인가를 밝혀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간음하지 말라고 명령하신 이 계명 속에 담아 두신 새로운 표준, 하나님이 원하시는 새로운 기준이 무엇인가를 예수님이 드디어 밝혀 주셨는데 그것이 무엇입니까?

 

마음으로 음욕을 품는 자는 간음했다고 하셨습니다. 행동 이전에 마음에 음란한 생각을 담고 있습니까? 더러운 감정을 가지고 사람을 봅니까? 그러면 벌써 그 자체가 칠계명을 범했다 이것입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해석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행동 보다도 마음에 있는 동기를 먼저 보시기 때문입니다. 동기가 나쁜데 어떻게 행동은 선하다고 할 수 있습니까? 마음이 벌써 잘못됐는데 아무리 행동이 선하다고 해도 하나님이 그 선한 행동을 인정할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은 그렇게 안 하신다는 것입니다.

 

'여자를 보고 마음에 음욕을 품는 자는 간음함이니라.' 이 말씀은 자연스런 성 본능이 악하다는 말이 아닙니다. 오해를 하면 안됩니다. 젊은이들이 이성에 대해서 관심을 가지거나 성적인 충동을 받는 것이 악이라는 말이 아닙니다. 부부간에 성적 매력을 느끼는 것을 죄라고 하는 것도 아닙니다. 여자가 남자를 보면서 남자가 여자를 보면서 마음에 금지된 정욕을 허용하는 것이 간음이라는 이야기입니다. 금지된 정욕을 허용하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좋은 예가 있습니다. 구약에 보면 다윗이라는 위대한 사람이 나옵니다. 얼마나 하나님 앞에 사랑받고, 또 그의 칠십 평생을 보면 얼마나 어려서부터 성실하고 깨끗하고 하나님을 찬양하는 아름다운 사람이었는지 우리가 볼 때마다 부러워하지 않습니까? 그래서 자기 이름을 다윗이라고 애명을 붙이는 사람들이 많이 있지 않습니까? 그런데 그 사람의 옥의 티가 있었다면 한번 성적으로 크게 범죄했다는 것입니다.

 

어느날 낮잠을 자고 오후에 옥상에 올라가서 한가롭게 거닐고 있었습니다. 유대 나라의 주택 구조가 정확하게 어떤 것인지 일일이 조사를 해보지는 않았지만 대충 알고 있는 바로는, 유대나라 주택은 옥상에서 활동을 많이 할 수 있도록 지어져 있다고 합니다. 따라서 그 당시 다윗의 궁전이 그리 신통치는 않았겠지만 일반 주택보다는 높았을 것이 아닙니까? 그래서 옥상에 올라가면 예루살렘이 한눈에 쫙 내려다보입니다. 그런대로 멀리서도 보일 수 있는 그런 옥상이었습니다. 해가 서쪽으로 기우는 시간입니다. 그 시간에는 햇살 마저 황금빛을 띱니다. 추한 것도 아름답게 보이도록 만드는 아주 매력적인 시간입니다. 무슨 여자가 그 시간에 남이 보든 말든 목욕을 합니까? 아마 집안에서 목욕을 하기가 불편하니까 설마 누가 보는 사람이 있으랴 하고 주변을 두리번거리다가 사람이 안 보이자 옷을 벗고 더운 몸을 씻었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그 시간에 하필이면 다윗이 그것을 보았습니다. 따스한 오후 햇살을 받고서 그의 눈에 들어오는 그 젊은 여성의 육체미는 아마 삼차원의 육체미였을 것입니다. 굉장히 매혹적이었을 것입니다. 거리가 멀리 있을수록 더 매력적으로 보일 것입니다. 그 여자는 다윗에게 있어서는 자신이 아무리 왕이지만 금지된 영역의 성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어쩌다가 봐도 눈을 빨리 돌리고 안 봐야 합니다. 그런 다음 집안으로 들어가 버려야 합니다. 그리고 더 이상 생각하지 말아야 합니다. 자기에게는 아내만 해도 지금 열 명이 넘는데 무얼 쳐다봅니까? 그런데 망하려고 하니 한참 쳐다보면서 감상을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벌써 마음이 잘못 되어가는 것 아닙니까? 그리고 자꾸 관심을 더 가집니다. '누굴까? 참 예쁘다.' 이러다가 신하를 불러서 한번 가 보고 누군지 알아보라고 시킵니다. 이것이 망조입니다. 이제 점점 발을 들여 놓아서는 안 될 자리에 발을 들여 놓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때만 해도 다윗은 여자를 불러 들여서 무슨 나쁜 짓을 하지 않았습니다. 따라서 서기관들이나 바리새인들이 제 칠계명을 해석하는 바에 의하면 다윗은 아직도 간음죄를 범하지 아니한 사람입니다. 의로운 사람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가르쳐주시는 표준에 의하면 다윗은 이미 칠계명을 범한 죄인입니다. 베드로후서 2장 14절에 있는 말씀대로 음심이 가득한 눈을 가지고 마음으로 범죄하기를 쉬지 않은 사람이 되어 버렸습니다. 그러므로 그 사람은 이미 여자를 궁으로 불러 들이기 몇 시간 전에 벌써 간음한 죄를 범한 사람입니다.

 

마음으로 간음하는 사람은 적절한 상황만 주어지면 행동에 옮기는 것은 시간 문제입니다. 여러분 도둑은 기회만 있으면 쉽게 훔칩니다. 왜냐하면 밤낮없이 생각하는 것이 훔치는 생각이기 때문에 기회만 주어졌다 하면 훔치는 것입니다. 마음으로 음란한 생각을 하고 있다든지 부정한 생각을 하고 있는 사람은 그런 생각을 늘 갖고 있기 때문에 기회만 주어지면 행동에 옮기는 것은 그렇게 어렵지 않습니다. 따라서 주님이 이렇게 보시는 것입니다. 마음으로 이미 잘못된 것은 벌써 계명을 범한 것이라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주님의 표준에 맞추어서 간음을 범하지 않기 위해서는 마음을 지키는 데 총력을 기울여야 합니다. 밤이면 문단속을 합니다. 좀 예민한 사람들은 문을 잠가놓고 들어왔다가 불안해서 행여나 문이 열렸나 하고 또 한번 가봅니다. 너무나 세상이 독해지고 악하니까 그럴 수 있습니다. 문 단속만 잘 하면 안됩니다. 거룩하게 살기를 원하는 사람은 마음 단속을 철저하게 해야 합니다.

 

잠언 4장 23절입니다 '무릇 지킬만한 것보다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 이 세상에 지켜야 될 가치가 있는 것들이 많이 있지만 그 가운데서 특별히 마음을 지켜야 하는데, 생명의 근원이 거기에서 나오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마음을 지키는 것이 이렇게 중요하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29절, 30절에서 얼마나 과격한 말씀을 하시는지 모릅니다. '만일 네 오른 눈이 너를 실족케 하거든.' 실족케 한다는 말은 유혹한다는 말입니다. 이 실족이라는 말은 원래 낚시에 미끼를 걸어서 물 속에 던져 놓고 그 낚싯대를 잡고 살금살금 유인하면서 흔드는 손을 말합니다. '네 오른쪽 눈이 이렇게 살금살금 너를 유인하는 미끼가 된다면' 하는 뜻입니다. '너로 하여금 간음죄를 범하게 하는 미끼 역할을 한다면' 어떻게 하라고 했습니까? '빼어 버리라. 두 눈 가지고 지옥에 들어가는 것보다 차라리 애꾸눈을 가지고 천국에 들어가는 게 낫다.' '만일 네 오른손이 너로 실족케 하거든 찍어버려라. 네 백체 중에 차라리 오른손 없이 천국 들어가는 것이 두손 들고 지옥 들어가는 것보다 낫다.'는 이야기입니다. 얼마나 과격한 말씀입니까?

 

우리가 이 말씀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합니까? 마음을 지키기를 원하는 사람은, 마음의 빗장을 열고 음란한 생각을 받아들일 수 있도록 하는 것이라면 손이라도 찍어 버리고 눈이라도 빼 버리라는 이야기입니다. 얼마나 대단한 말씀입니까?

 

아무리 다 뽑아봐야 두 번밖에 더 뽑겠습니까? 찍어 버릴려고 해도 두 번밖에 더 있겠습니까? 그래서 두 눈을 다 뽑았다고 합시다. 안 본다고 간음죄를 안 범합니까? 눈에 안 보인다고 마음으로 항상 거룩한 생각만 합니까? 아니지 않습니까? 두 손 없다고 해서 마음으로 간음죄를 안 범하겠습니까? 다 범합니다. 별 수 없는 것입니다. 마가복음 7장 21절에 있는 말씀대로, 사람의 마음 속에 악한 것이 있습니다. 그 악한 것 중에 대표적인 것이 간음이요 음란이요 음탕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모든 성적인 부정한 생각들, 감정들이 속에서부터 치밀어 올라 오르는데 손을 잘랐다고 해서 해결됩니까? 눈을 뽑았다고 해결됩니까? 안 된다는 것입니다.

 

초대 교회에 성 안토니라고 하는 유명한 성자가 있었습니다. 그분이 젊은 나이에 어떻게 하면 거룩하게 살아볼까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런데 사회 생활을 하다 보니 보는 것이 죄요, 느끼는 것이 죄요, 듣는 것이 죄임을 깨달았습니다. 이래서는 도무지 주님이 원하는 거룩한 생활을 할 수 없다고 판단한 그는 모든 것을 다 뒤로 하고 사막으로 들어갔습니다. 사막으로 들어가서 35년 동안 고행을 했습니다. 그분이 고행 한 기록들이 역사에 남아 있는데 처절한 몸부림이었습니다. 안 본다고 해서 죄를 범하지 않았으면 아마 그는 지상천국을 살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보지 않는 그 자리에 더 무서운 유혹이 있다는 것을 그는 알았습니다. 밤마다 마귀에게 시달렸습니다. 정욕 때문에 몸부림을 치고 씨름을 했습니다. 엎치락 뒤치락 하기를 35년, 그가 고행하고 나서 결론적으로 하는 말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35년 동안 시달렸다는 것입니다. 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말씀을 글자 그대로 해석하면 안됩니다. 그럼 무슨 뜻입니까? 마음을 단속하기 위해서 최선의 노력을 다하라는 것입니다. 눈을 뽑을 사람처럼 비장한 결심을 가지고, 팔을 찍으려고 하는 사람처럼 비장한 결심을 가지고 마음을 지키라는 말입니다.

 

우리는 경험적으로 잘 알고 있습니다. 무엇에 한번 씌워서 마음이 달려가기 시작하면 그 달려가는 마음을 붙들기 위해서 문을 걸어 잠근다는 것이 거의 불가능하다는 것을 말입니다. 생각 안 하려고 애쓰면 애쓸수록 더 생각하게 됩니다. 이래서는 안 된다고 몸부림칠수록 더 집착합니다. 얼마나 무서운 것인지 모릅니다. 그러므로 이렇게 마음이 완전히 굴레를 벗어 버리고 달려가기 전에 먼저 지켜야 되는데, 먼저 지키려면 눈을 뽑듯이 팔을 찍듯이 결단을 하고 마음을 지켜야 된다는 것입니다.

 

저는 우리 교회 수많은 청소년들을 생각합니다. 중고등부 학생들, 대학부, 청년부 등 만 명이 넘는 이 젊은이들을 마음에 두고 걱정을 할 때도 많고, 기도를 할 때도 많습니다.

 

그들은 모두 N세대들입니다. '컴퓨터 앞에 앉을 때마다 포르노 사이트를 보고 싶은 유혹을 그들이 어떻게 참을까? 어쩌다가 한번 보았다고 하면 그 다음부터는 안 보고는 못 배길 텐데, 그 젊고 혈기 방장한 젊은이들이 어떻게 그 유혹을 피할까? 어떻게 손이 거기에 가지 않도록 할까? 어떻게 눈이 그것을 보지 않도록 할까? 하나님 도와주십시오. 성에 관한 잡다한 더러운 이야기를 가지고 도배질을 하고 있는, 저 길가 가판대의 주간지들을 보면서 피할 수 있는 우리 젊은이들이 되어야 하는데 주여 도와주십시오. 수능 성적이 나쁘고 어쩌다가 대학까지 낙방을 해서 마음 둘 곳이 없이 밤 거리를 텅 빈 마음으로 돌아다닐 때에 이들을 향해서 오만가지 성적 유혹이 자극을 할 텐데, 이 젊은이들을 도와주십시오. 어떻게 해야 합니까? 어떻게 하면 이들이 마음을 지킬 수 있을까요?' 걱정도 되고 기도도 합니다. 잘 모르기는 하지만 그들 중에는 아마 성중독증에 빠져있는 젊은이들도 없지 않아 있을 것입니다. 남이 모르지만 성적으로 나쁜 습관을 가지고 거기서 헤어나지 못하고 밤낮없이 씨름하고 고통하는 자들이 있을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을 생각하면 기도하지 아니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여러분들도 기도해야 합니다.

 

저는 우리 교회 성도들 가운데 결혼 생활에 이미 권태를 느끼고 사는 분들이 더러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저는 이분들을 걱정합니다. 이분들을 위해서 기도합니다. 왜냐하면 이미 그들은 성적으로 유혹을 받을 수 있는 길목에 서 있기 때문입니다. 배우자를 향해서 꺼지지 않는 불만을 마음에 품고 사는 남자와 여자들, 대단히 위험한 자리에 서 있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평소에 많은 이성들이 둘러 쌓여 있는 곳에서 하루 종일 직장 생활을 해야 하는 우리 젊은이들에게 상당히 어려운 시험들이 자주 일어날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해야 합니다. 성공했습니까? 쌓을 만큼 쌓았습니까? 이제 자기도 모르게 긴장이 풀리면서 '늙기 전에 좀더 재미있게 살 수는 없을까? 이렇게 따분하게 내 인생을 보내고 말 것인가?' 하는 은근한 생각이 가슴에 슬금슬금 기어 들어오시는 분들, 여러분들은 지금 대단히 위험한 벼랑에 서 있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미국의 예를 보아도 1년 수입이 2만 불이면 그저 빠듯하게 사는 생활입니다. 중류층보다도 못합니다. 그런 정도의 수입을 가지고 사는 사람 가운데서도 혼외 정사를 하는 사람이 열명 중의 세 명입니다. 통계적으로 보면 그만큼 가정 생활에 문제가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그 사람들이 돈을 더 벌게 되어 연 6만 불 이상 고봉을 받는 자리에 서게 되면, 그 정도 수입을 가진 사람들은 남편 몰래 아내 몰래 혼외 정사를 어느 정도 하는지 아십니까? 열 명 중에 일곱 명입니다. 무엇을 의미합니까? 마음에 긴장이 풀어지고 살만하다 싶으면 즐기고 싶고, 그러다가 보면 마음을 풀어버리는 것입니다. 오만가지 나쁜 것을 다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저나 여러분이나 전혀 차이가 없습니다. 목사라고 더 경건한 것도 아니고 평신도라고 덜 경건한 것도 아닙니다. 젊다고 이런 면에서 더 위험하고, 늙었다고 이런 면에서 안전한 것도 아닙니다. 오늘날과 같은 상황에서는 아무도 안심할 수 없고 아무도 장담할 수 없는 문제입니다.

 

어떻게 해야 합니까? 가장 우선에 두고 할 일은 일단 우리 자신의 의를 포기하는 것입니다. '나는 그래도 간음하지 않았어. 나는 그런 추악한 짓은 평생 생각도 안 해봤어.' 하면서 스스로 의로운 체 하지 말라는 말입니다. 예수님의 표준에 맞추어 보면 마음으로 간음하지 아니한 사람이 누굽니까? 한번 나와 보십시오.

 

현장에서 남녀끼리 나쁜 짓을 하다가 붙잡혀 온 여자가 하나 있었습니다. 예수님 앞에 끌고 와서 그 여자를 율법대로 돌로 쳐서 죽여야 하는지 물었을 때 예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쳐라.' 이 말은 '너희 중에 간음하지 아니한 사람 있으면 돌로 쳐라.'는 의미입니다. 예수님은 그들의 마음을 전부 읽고 있었습니다. 그들의 과거를 다 알고 있습니다. 한 사람도 자유할 사람이 없습니다. 예수님의 눈에는 모두가 다 죄인들이요 간음한 사람들입니다. 그 예수님의 불꽃 같은 눈초리를 느끼면서 "나는 그런 일을 한 일이 없습니다." 하고 돌멩이를 들고 칠 사람이 누가 있습니까? 자기도 모르게 돌멩이를 다 내려 놓고 슬금슬금 도망가고 말았습니다.

 

우리 모두 똑같습니다. 죄 없는 사람 누구입니까? 남에게 돌로 칠 사람이 누굽니까? 아무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 하나님 앞에 "주여, 죄인입니다." 하고 철저하게 회개할 필요가 있습니다. 스스로 '나는 이런 일을 범하지 않았기 때문에 의롭다.' 하는 자기 의를 다 포기하십시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붙드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다 죄인이기 때문에 주님이 십자가에 죽으셨습니다. 우리가 다 간음죄를 범할 수 있는 사람이요 실제로 범한 사람들이기 때문에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피를 흘리셨습니다. 오늘도 그는 십자가에서 우리를 맞이하고 계십니다. 누구든지 자기 죄를 가지고 주님 앞에 달려가는 사람은 주님이 그를 피 묻은 손으로 끌어 안으시고 그 모든 죄를 마음에서부터 씻어주십니다. 회개하고 깨끗함을 받아야 합니다. 자기를 의롭다고 생각지 마십시오. 성인 여러분 중에 포르노 안 본 사람이 몇 명이나 됩니까? 외국에 나가 호텔에서 보지 않는 사람이 몇 명이나 됩니까?

 

우리 모두가 하나님의 말씀을 기준으로 놓고 볼 때는 여자하고 부정한 일은 하지 않았다 할 지라도 마음으로 이미 벌써 세상 사람하고 비슷하게 닮아가는 상황 속에서 어떻게 해야 합니까? 먼저, 마음에 있는 악을 주님 앞에 회개해야 됩니다. '주여 나를 구원해 주옵소서. 나를 고쳐 주옵소서.' 그리고 주님이 여인을 보고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너는 가서 죄를 범치 말라.' 하신 음성을 우리가 들어야 됩니다. 우리 모든 죄가 용서 받아야 합니다.

 

또 한가지 우리의 마음을 지키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 합니까? 성령의 적극적인 도움을 기다려야 됩니다. 성령은 거룩한 영입니다. 그는 악한 자들로부터 우리를 지켜 주십니다. 금지된 이성에게 마음을 빼앗기고 더러운 공상에 빠지는 것을 막아 주십니다. 그래서 우리 마음에 슬금슬금 일어나는 간음에 대해서, 더러운 감정에 대해서 "아니요!"라고 단호하게 말할 수 있는 용기와 힘을 주십니다. 그러나 단 하나, 소극적인 자세로 그저 앉아서 '성령이여 도와 주십시오.' 하는 식으로는 안됩니다. 그런 잠꼬대 같은 소리를 하면서 '성령님 도와 주세요.' 해서는 안됩니다. 다시 말씀 드립니다. 눈을 뽑으려고 작정한 사람처럼, 손을 잘라 버리려고 정말 비장한 각오를 한 사람처럼 성령에게 매달려야 합니다. 이것이 적극적인 태도입니다. '성령님 도와 주십시오. 내가 내 육체를 쳐서 복종케 하기를 원합니다. 내가 성령의 영으로 내 몸을 쳐서 죽이려고 합니다. 주여 나를 도와 주십시오.' 이러한 적극적인 자세를 가지고 주님 앞에 매달리는 자를 성령이 도와 주십니다.

 

우리가 이와 같이 적극적인 성령의 도움을 구하기를 원하면, 또 실제로 받기를 원하면 매일 경건의 훈련을 게을리 하면 안됩니다. 경건의 훈련입니다. 잘 기억하십시오.

 

디모데후서 4장 7절에서 경건에 이르기를 연습하라고 하시지 않습니까? '연습하라.'의 원어의 의미는 옛날 헬라의 스포츠 맨들이 땀을 뻘뻘 흘리면서 훈련하는 장면을 이야기는 것입니다. 그때 복장들이 다 거추장스럽지 않았습니까? 운동을 하려고 하면 요사이처럼 몸에 딱 붙는 옷을 입으면 좋을 텐데 그때야 그럴 수가 없지 않았습니까? 우리 나라만 해도 띠를 가지고 매고 이랬으니 얼마나 거추장스러웠습니까? 그러므로 헬라 선수들이 정말로 최선을 다해서 연습을 하려면 선택이 하나 밖에 없었습니다. 옷을 홀랑 벗어버리는 것입니다. 벌거벗고 연습하는 것입니다. 벌거벗고 땀을 뻘뻘 흘리면서 남보다도 좀더 나은 기량을 쌓기 위해서 체력을 단련하기 위해서 죽을 고생을 하고 자기 수련을 하는 것을 여기서 '연습하라.' 하는 단어로 표현이 된 것입니다.

 

우리가 경건한 생활을 하기 위해서는 옷을 벗어 던지고 땀을 흘리며 연습하는 사람들처럼 훈련을 해야 합니다. 날마다 훈련해야 합니다. 그래서 성령께서 우리의 생각과 우리의 마음을 완전히 장악할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이것이 마음을 지키는 비결입니다.

 

여러분 삶의 모든 영역을 보면 어느 영역에나 뛰어난 사람들, 남보다 앞서는 사람들, 기록을 갱신하는 사람들은 다 피땀 흘리는 훈련들을 한 사람들입니다. 예술계를 보십시오. 체육계를 보십시오. 소위 비즈니스 세계를 보십시오. 훈련 없는 사람이 승리하는 것을 보셨습니까? 훈련 안 한 사람이 앞서는 것을 보셨습니까? 없습니다. 피땀 흘리는 훈련을 합니다.

 

영어권에서 영어의 표현에 새로운 혁명을 일으켰다는 칭찬을 받은 헤밍웨이 같은 대문호도 그의 일생을 돌이켜보면 엄청난 자기 훈련을 한 사람이라는 것을 우리가 알 수 있습니다. 그가 말년에 가서는 방종한 생활을 해서 그의 삶이 몹시 흐트러져 있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매일 아침 여섯시 반이면 일어나서 책상에 앉아 편안한 옷을 입고는 원고지를 앞에 놓고 펜을 들고 글을 쓰는 연습을 했다고 합니다. 말년에도 그 훈련을 게을리하지 않았습니다. 여섯 시 반에 시작해서 열두 시까지 앉아서 글 쓰는 훈련을 했는데, 한 단어 한 단어를 찾아내며 그 단어의 의미를 생각하고 적절하게 문장을 만드는 그 훈련이 얼마나 대단하겠습니까? 그렇게 다섯 시간이 넘도록 훈련해서 겨우 쓴 원고가 두 장, 단어수로 말하면 오백 단어도 되지 않았다고 합니다. 피눈물 나는 자기훈련을 하기 때문에 그런 문호가 되는 것 아닙니까?

 

영적 생활에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런데 일반 사회 다른 영역에서는 문호가 되는 사람은 선천적으로 타고난 무엇이 있습니다. 예술가들은 문학적인 감각이 뛰어나다든지 음악을 듣는 특별한 청각을 소유한다든지 무엇인가 있지 않습니까? 그런데 경건 운동을 하는 우리들은 타고난 것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모든 인간은 선한 것이 하나도 없이 타고 났기 때문입니다. 다 부패한 본성을 갖고 태어났기 때문에 타고난 무엇을 의지하고는 잘 될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별 수 없이 할 수 있는 것은 죽기를 각오하고 훈련하는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여러분, 정기적으로 성경을 읽는 훈련을 하십시오. 마음을 지키기를 원하면 성경 읽으십시오. 하나님의 말씀을 가까이 놓고 그 말씀에 여러분의 마음을 맡기십시오.

 

시편 119편 97절 이하입니다. '내가 주의 법을 어찌 그리 사랑하는지요.' 이 말은 '내가 주의 말씀을 얼마나 그렇게 사랑하는지요.' 하는 뜻입니다. '내가 종일 그것을 묵상하나이다.' 너무나 사랑하기 때문에 마음에서 잊어버릴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을 내 마음에 담고 즐거워하고 묵상하는 것입니다. 그랬더니 어떤 일이 일어났습니까? '주의 계명이 항상 나와 함께 함으로 그것이 나로 원수보다 지혜롭게 하였나이다.'고 했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하나님의 말씀을 마음에 담고 묵상하면 그 말씀을 항상 가까이 가지고 살게 됩니다. 그러면 그 말씀 때문에 원수보다 더 지혜롭게 됩니다. 나로 음란한 생각을 하게 만드는 마귀보다도 한 수 더 뜨고 더 지혜롭게 대처할 수 있게 만듭니다. 나를 유혹하는 세상적인 문화가 많이 있지만 환경 따라서 상황 따라서 어떻게 처신해야 할 것인가를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준비된 사람은 그 때 그 때 하나님이 주시는 지혜를 가지고 대처할 수 있습니다. 마음을 지킬 수 있습니다. 마음의 빗장을 열지 않고 지킬 수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정규적으로 읽고 묵상하고 듣고 사랑하십시오. 그 말씀에 여러분의 마음을 맡기십시오. 하루 종일 있으면서 주님의 말씀 한 마디 제대로 마음에 담을 생각도 하지 않고, 형식적으로 읽고 나서 금방 다 까먹어버리고, 그 말씀을 마음에 묵상하는 경건한 공간을 가지는 것조차도 허용하지 않고 하루를 살면 무슨 잡다한 생각이 우리 마음에 들어와 자리를 잡을지 누가 압니까? 그러다 잘못 하면 끌려가는 것입니다. 그렇게 믿었던 남편, 그렇게 믿었던 아내, 그렇게 믿었던 자식이 끌려가는 것입니다. 끌려간 다음에는 구제하지 못합니다.

 

기도하는 훈련을 하십시오.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있어 기도하라고 했습니다. 저는 가끔 낮 시간에 머리를 식혀야겠다는 생각이 들든지 또 기도를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면 본당에 내려옵니다. 그리고 사람들이 잘 안 보이는 기둥 어느 구석에 앉아 있습니다. 그러면 가끔 젊은이들이 한명 두 명씩 들어와서 이층에 앉아 한참 기도하고 가는 모습을 봅니다. 얼마나 흐뭇한지 모릅니다. 어떤 때는 나이 드신 부부 두 사람이 손을 잡고 내려와서 저쪽에 앉아 한참 둘이서 엎드려 기도하고 갑니다. 어떤 때는 부인이 내려오기도 합니다. 제가 그 모습을 보면서 그래도 저렇게 기도하기를 힘쓰는 사람은 승리할 수 있고 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여러분, 기도하는 훈련을 가지십시오. 유다서 20절입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성령으로 기도하라.' 기도하는 사람을 감히 음란한 마귀가 와서 빗장을 열고 시험하지 못합니다.

 

그리고 또 하나 부탁합니다. 가치 있는 일에 몰두하는 훈련을 하시기 바랍니다. 여러분, 우리 가운데 할 일이 너무 없다는 사람이 있습니까? 그대로 있으면 안됩니다. 날마다 눈 뜨고 나면 시간이 남아 돌아서 오늘 무엇을 할까 하고 고민하는 사람이 있습니까? 여러분 위험합니다. 사는 것이 너무 따분하다는 생각에 날마다 끌려 다니는 분이 있습니까? 여러분 위험합니다. 그렇게 가만히 있으면 큰일 납니다.

 

아주 가치 있고 땀 흘릴 필요가 있다는 일을 잡으십시오. 그리고 거기에 여러분의 시간을 바치십시오. 여러분의 돈을 쓰십시오. 여러분의 모든 갖고 있는 아름다운 지성과 마음을 헌신하십시오.

 

교회는 음란한 마귀가 와서 우리의 마음을 휘젓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서 너무나 거룩하고 아름다운 좋은 사역과 프로그램을 많이 준비하고 있습니다. 사랑의교회에 들어와서 교회가 크니까 모두가 똑 같은 것 같이 보이지 않습니까? 조금만 관심을 가지고 자세히 보십시오. 인쇄물 하나라도 자세히 보십시오. 주보 하나라도 여러분이 꼼꼼히 한번 보십시오. 시간이 남아 돕니까? 얼마든지 와서 헌신하고 기쁘게 하루를 보낼 수 있는 프로그램과 사역들이 준비되어 있습니다. 중보기도 하는 곳도 있습니다. 전도하는 곳도 있습니다. 장애인을 위해서 봉사할 수 있는 곳도 있습니다. 성경공부 하는 프로그램도 있습니다. 얼마든지 있습니다. 그런 가치있고 보람된 일에 몰두하십시오. 그러면 마귀는 도망갑니다. 하다 못해 포에버 성가대라도 들어가서 일주일에 한 몇 번씩 그저 잘 안 나오는 소리지만 힘있게 찬송이라도 열심히 부르십시오. 이렇게 내 자신이 거룩한 일에 집중하면 마귀가 내 마음을 지배하지 못합니다. 할렐루야.

 

소돔 고모라에 이런 우화가 전해졌다고 합니다. 이미 들은 이야기이지만 잘 들어 보십시오. 어떤 노인이 소돔 고모라 성에 서서 아침부터 저녁까지 외쳤답니다. "이 성은 망합니다. 여러분 회개하세요. 이렇게 음란하면 안됩니다. 회개하세요." 그런데 아무도 듣지 않았습니다. 누군가가 찾아가서 물었답니다. "할아버지, 왜 그렇게 아무도 듣지도 않는데 혼자서 소리를 지르고 날마다 고생을 하십니까?" 할아버지의 대답이 이것입니다. "내가 이 소돔 고모라 사람처럼 되지 않기 위해서 날마다 와서 외치는 것입니다. 내가 입을 열지 않고 입을 다물어 버리면 나도 모르는 사이에 이 사람들처럼 되어 버릴까 두려워서 나는 날마다 외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여러분이 하나님의 말씀을 붙들고 묵상하기를 쉬지 아니하면, 절대 세상 사람처럼 되지 않습니다. 우리가 무릎 꿇고 기도하기를 노력하면 절대로 세상 사람처럼 되지 않습니다. 우리가 거룩한 일, 보람 있는 일에 시간을 바치고 우리의 정성을 바치고 하루를 보내려고 노력하면 아무리 세상이 음란하고 더러워도 우리는 그들과 같이 되지 않습니다. 할렐루야. 우리는 마음을 지킬 수 있습니다. 거룩한 하나님의 백성이 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 세상을 보고 오늘 슬퍼하고 계실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 믿는 우리들까지 세상과 비슷하게 닮아가면 하나님이 얼마나 탄식하시겠습니까? 누가 이 땅에 하나님의 거룩한 복음을 전하고 이 세상을 구원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까지 세상 사람처럼 되어 버리면 이 땅에 하나님 나라를 세우고자 하시는 그 원대하고 그 거룩한 꿈을 누가 이루어 주겠습니까?

 

그러므로 우리의 마음을 지킵시다. 예수 믿는 여러분, 우리 자신을 지킵시다. 교회를 지킵시다. 이 세상을 구원하는 하나님의 거룩한 자녀가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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