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니 / 엡 1:4-6
짧은 한 생을 살면서 우리의 행동 기준이 될 만한 중요한 질문이 있습니다. 이 질문에 어떻게 대답하느냐에 따라 우리의 행동과 삶의 질이 달라지게 됩니다. 그것은 곧 "나는 누구인가? 나는 얼마나 소중한 존재인가?"라는 질문입니다. 바꾸어 말하면 "나는 내 신분을 어떻게 생각하는가?"라는 질문입니다.
"나는 아주 소중한 자야. 나는 정말 소중한 사람이야." 하고 그 말을 믿고 그대로 말하는 사람은 벌써 행동에서 다른 사람과 차이가 납니다. 삶의 질에 있어서도 다릅니다. 그러나 "내가 별 볼일 있나? 이렇게 살다가 가는 거지." 하는 식으로 자기도 모르게 내뱉는 사람들을 보면 행동도 그러합니다. 어떤 면에서는 생활도 질적으로 떨어지게 됩니다. 그러므로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에 어떻게 대답하는가는 굉장히 중요한 문제입니다.
흔히 세상에서는 성공이나 명성, 권력의 소유 여부가 그 사람을 재는 잣대가 됩니다. 그것들을 가지고 있으면 중요한 사람이라고 인정합니다. 왜냐하면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손으로 만지고 판단하는 물질 세계에 우리가 갇혀 있으므로, 자연히 남에게 드러나는 무언가를 보고 그 사람을 평가할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을 보면 우리를 그런 식으로 평가하지 않는다고 말씀합니다. 성공이나 권력, 명성으로 평가하지 않습니다. 내가 나를 누구라 하느냐에 따라 평가하지 않습니다. 반면에 하나님은 자신이 우리를 누구로 보느냐에 따라 우리의 존재가치가 결정된다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이 나를 무엇이라고 생각하시고, 나를 누구로 인정하시며, 얼마나 귀한 존재로 보시는 가에 따라 나의 존재가치가 달라진다고 말씀합니다.
이런 의미에서 온 세상이 나를 중요하게 여긴다 할지라도 하나님께서 나를 그렇게 보시지 않으면 이미 그 사람은 불행한 사람인 것입니다. 온 세상이 알아주는 사람이라도 하나님께서 알아주지 않는 사람이라면 의미가 없는 사람인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말씀을 통해 우리에게 가르쳐주는 아주 중요한 진리입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에서도 그 사실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모두에게 하늘에 속한 신령한 복을 주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복 가운데 첫째가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복입니다. 우리의 신분을 하나님의 아들로 격상시켜 주시는 복을 주신 것입니다.
그러면 본문 말씀을 가지고 몇 가지 핵심적인 용어들을 살피면서 이 사실을 검토해보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5절에 나오는 '예정'이라는 단어를 주목하십시오. '그 깊으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이 말은 하나님의 구원 계획을 말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창세 전부터 인류가운데 어떤 사람들을 구원하여 자기 아들로 삼으시겠다는 계획을 세우셨습니다. 이것이 예정입니다. 단 특별한 기준도 없이 아들로 삼으시는 것이 아니라, 4절 후반절에 있는 말씀처럼 '거룩하고 흠이 없는 아들'로 삼으시겠다고 작정하셨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 자신이 거룩하고 흠이 없기 때문에 아들도 자신을 꼭 닮은 자녀로 작정하셨던 것입니다. 바꾸어 말하면 우리를 예수님을 닮은 하나님의 아들로 삼으시기로 작정하신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하나님의 계획, 곧 '예정'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예수 믿고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은 갑자기 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오래 전부터 마음 속에 두고 있던 계획이 현실로 바뀐 것입니다. 우리가 이 사실을 꼭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두 번째로 중요한 단어는 4절에 있는 '선택'이라는 단어입니다.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곧 하나님께서 예정하신 계획에 따라 창세 전부터 얼마를 자기 아들로 선택해 놓으셨다는 것입니다. 사실 창세 전에 우리를 선택하셨다는 말은 우리가 이해하기도, 설명하기도 어렵습니다.
우리가 태어나서 역사의 일부가 되기 전부터 이미 우리는 하나님의 가슴 속에서 영원히 존귀한 아들로 존재하고 있었다는 말입니다. 영원무궁 전부터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아들과 딸로 그분의 가슴 속에 존재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부모가 우리를 낳아서 귀여워하기 전에 하나님은 이미 우리를 아시고, 귀여운 아들로 보시고, 또 존귀한 자로 보시면서 사랑 어린 눈길로 주목하고 계셨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창세 전에 우리를 택하셨다는 말입니다.
그러면 왜 하나님이 나 같은 것을 창세 전에 택하셨을까요? 5절 말씀은 그 동기를 한 마디로 요약하고 있습니다.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의 됨됨이가 어떠하든지 전혀 개의치 않으시고 하나님 자신이 좋아서 무조건 우리를 선택하셨다는 것입니다.
또한 우리가 주목해야 될 말씀이 있습니다. 4절에 '그리스도 안에서', 5절에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6절에 '그의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라는 말들입니다. 이것들은 다 동일한 말들입니다. 하나님은 창세 전에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약속을 하셨습니다. "내가 인류가운데서 얼마를 내 아들로 선택할 텐데, 그들을 너에게 맡기겠다." 하나님은 예수님을 통해서 자기 아들을 삼으시기로 계획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성부 하나님과 성자 하나님이 약속을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선택하신 후 그 선택한 자들을 예수님에게 맡기시면, 예수님은 그 선택된 자들을 구원하시기로 서로 약속을 하셨습니다. 따라서 예수님을 떠나서는 아무도 하나님의 아들이 될 수가 없습니다. 예수님 밖에서는 누구도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를 수가 없습니다. 이것이 '그리스도 안에서'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요한복음 17장 2절에서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아버지께서 아들에게 주신 모든 자에게 영생을 주게 하시려고 만민을 다스리는 권세를 아들에게 주셨음이로소이다." 하나님이 예수님을 만유의 주, 온 세상의 구원자로 세우셨습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이 미리 선택해서 예수님에게 주신 사람들을 구원해서 영생을 얻도록 하기 위함이라고 말씀합니다.
요한복음 6장 44절에도 놀라운 말씀이 있습니다. "나를 세상에 보내신 아버지께서 이끌지 아니하면 아무라도 내게 올 수 없으니." 누군가가 예수님에게 오고 싶다고 올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이끄셔야만 올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어떤 사람을 이끄십니까? 창세 전에 선택해 놓은 사람들을 이끄십니다. 여기에서 '이끌다'는 말은 '헬퀴오'(helkuo)라는 헬라어 말인데, 매우 강한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흔히 배가 고프면 나도 모르게 음식이 막 끌리는데 이때 이 단어를 씁니다. 마치 기중기에 스위치를 넣으면, 그것이 자석으로 변해 쇠붙이를 한꺼번에 끌어당기듯이 말입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 택한 사람은 때가 되면 예수님에게 이끌리도록 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예수 믿는 것입니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요1:12) 누구든지 예수님을 나의 구주로 고백하는 그 순간부터 하나님의 자녀가 됩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끌어다가 예수님에게 붙여 준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에 담긴 의미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예수 믿은 것은 우연히 된 것이 아닙니다. 내가 믿고 싶어서 예수 믿게 된 것이 아닙니다. 내가 안 믿을 수가 없어서 믿게 된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우리가 인간적으로 생각하는 이유일 뿐, 신학적으로 영적으로 평가하면 그 뿌리는 무한히 깊습니다.
창세 전부터 하나님이 선택해서 아들로 삼으셨기 때문에 때가 되어 내가 예수를 믿은 것입니다. 하나님이 선택하셨기 때문에, 하나님이 나를 이끌어서 예수님 앞으로 오게 했기 때문에 내가 믿은 것입니다. 그 배후에 엄청난 하나님의 역사와 작용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사실을 믿으면 나도 모르게 전율할 수 밖에 없습니다.
우리 교회 안에 예수 잘 믿는 자매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10년, 20년이 지나도 아직 남편은 믿지 않습니다. 간혹 교회에 한번씩 나오기는 하지만, 믿지는 않습니다. 그래서 그 아내되는 분들은 어떻게든 남편이 예수 믿게 하려고 온갖 수단과 방법을 동원합니다. 아마 이번 대각성전도집회를 앞두고도 안간힘을 쓸 것입니다.
만일 그렇게 해서 남편이 믿으면 '하나님께서 우리 남편을 예수님께로 끌어당기셨구나.' 하고 고백할 수 있지만, 아무리 노력해도 안될 때는 낙심할 필요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아직 끌지 않아서 믿지 않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끌면 끌려오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미 창세 전부터 자신의 아들로 선택한 사람이기 때문에, 때가 되면 반드시 끌게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이 어떤 분이십니까? 그분은 광대하신 분이십니다. 시편 145편 3절입니다. "여호와는 광대하시니 크게 찬양할 것이라. 그의 광대하심을은 측량치 못하리로다." 얼마나 크고 위대한 분이신지 모릅니다. 이런 하나님에 대해 제일 실감나게 표현한 선지자는 이사야입니다. 이사야는 40장 15절에서 이렇게 비유하고 있습니다. "보라! 그에게는 열방은 통의 한 방울 물 같고, 저울의 적은 티끌 같으며, 섬들은 떠오르는 먼지 같으니." 다른 그 어떤 것들도 하나님의 광대하심 앞에서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하나님의 광대하심에 대해 오늘날 현대 천문학도 증명하고 있습니다. 얼마 전 미항공우주국(NASA)에서는 최신 과학기술을 동원해 허블우주망원경(Hubble space telescope)을 만들었습니다. 그 망원경은 150억 광년의 거리에 있는 천체까지도 관측할 수 있다고 합니다. 지구의 일곱 바퀴 반을 도는 빛의 속도로 150억년이라면 우주가 얼마나 광대한지 모릅니다. 그런데 거기에서 끝나지 않고 빛이 150억년 동안 달려가서 도달한 거리 밖까지 계속되는데, 그 우주는 허블우주망원경을 가지고도 볼 수 없다고 합니다. 거기까지는 아직 빛이 도달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빛이 도달하면 그때는 더 넓게 볼 수 있다는 것입니다. 한 마디로 우리의 상상을 뛰어넘는 광대함을 가진 우주입니다.
그런데 이 광대한 우주를 만드신 하나님은 얼마나 광대하실까요? 그런데 그 크시고 위대하신 분이 티끌보다도 못한 나를 창세 전에 선택하시고, 때가 되면 부르셔서 그리스도 안에서 자기 아들이 되게 하셨습니다. 이 얼마나 기가 막힌 사실인지 모릅니다.
우리나라는 땅 넓이로 봐서는 작은 나라에 지나지 않습니다. 남한만 따지면 일본의 5분의 1도 안됩니다. 그런데 이 작은 나라의 대통령 아들이 된 것만도 얼마나 대단한 일인지 요즘 메스컴 보도를 들으면 알 수 있습니다. 또한 대통령도 아닌 대통령 후보의 아들도 얼마나 대단하지 군대 문제를 둘러싸고 정계를 떠들썩하게 만들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만군의 여호와 하나님, 그 광대하신 하나님의 아들이라니 얼마나 대단합니까? 이 사실을 알면 가만히 있지 못합니다. 우리 하나님은 거룩하신 분이십니다. 이사야 57장 15절은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습니다. '지존 무상하며 영원히 거하며 거룩하다 이름하는 자가 이같이 말씀하시되 내가 높고 거룩한 곳에 거하며...' 하나님은 너무나 거룩하셔서 할 수 있는 대로 인간은 하나님과 거리를 둘수록 평안하고 안전합니다. 하나님 앞에 조금이라도 가까이 나아갈수록 인간은 불행해집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절대 거룩자이시기 때문에 죄 많은 인간으로서는 가까이 갈수록 불행한 것입니다. 그만큼 하나님은 접근 불가능할 정도로 거룩하신 분이십니다. 이사야는 환상 중에 하나님의 영광을 보고는 그만 비명을 지르고 말았습니다.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나는 입술이 부족한 사람이요, 입술이 부정한 백성 중에 거하면서 만군의 여호와이신 왕을 뵈었음이로다."(사6:5)
토미 테니 목사님의 글을 읽은 적이 있습니다. 어느 주일날 그 목사님이 자기 친구가 목회하는 미국의 교회를 방문했습니다. 그런데 그날 따라 예배를 드리면서 그 교회당에 하나님께서 임재해 계신다는 강한 느낌이 들었습니다. 마치 구약시대 때 하나님이 임재하실 때성전 안에 연기가 자욱했던 것 것처럼, 하나님의 임재가 온 교회당에 가득 느껴졌습니다. 이윽고 그 교회 담임 목사님이 설교하기 위해 강대상에 올라가셨습니다. 그날 설교제목은 '하나님의 얼굴을 바라라' 였습니다. 그런데 그 말씀을 가지고 설교를 시작하자 마자 갑자기 천둥 소리 같은 큰 소리가 나더니 설교하시려던 목사님이 2-3m 밖으로 내동댕이쳐졌습니다. 그리고는 정신을 잃으셨습니다. 아크릴로 된 강대상은 넘어지면서 두 동강이가 나버렸습니다.
정말로 하나님께서 그 자리에 임재해 계셨던 것입니다. 2시간 반 만에 그 목사님은 깨어나셨지만 그 모든 장면을 본 교인들은 자기도 모르게 흐느껴 울기 시작했습니다. 눈물을 비오 듯이 쏟으며 하나님 앞에 회개하기 시작했습니다. 거룩하신 하나님이 그 자리에 계시자 아무도 자신의 더러운 것을 숨길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날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교회로 몰려 왔는지 예배를 8차례 드렸습니다. 그 다음 날도 저녁마다 사람들이 몰려와서 회개하고 세례 받고 새 사람이 되는 일들이 한달 동안 계속되었습니다.
하나님은 가끔 어떤 깊은 뜻을 가지고 이런 사건을 일으키실 때가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임재를 느낄 수 있도록 구체적이고 실제적으로 드러내실 때가 있습니다. 그분의 거룩하심 앞에서는 누구도 아무런 반응 없이 버틸 수 없습니다.
그런데 그만큼 거룩하신 하나님이 우리 아버지가 되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티끌 가운데 앉아 있는 더럽고 추악한 우리를 자기 아들로 삼으셨다는 것입니다. 정말 기절할만한 일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이 사실을 적당히 알기 때문에 가만히 앉아 숨을 쉬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있어서 문제는 이런 놀라운 사실을 알되, 너무 피상적으로 알고 믿는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놀라운 진리가 우리 안에 역사하지 못합니다. 우리를 흥분시키지 못합니다. 우리의 모든 존재 구석구석에 이 놀라운 말씀이 주는 능력이 퍼져 나가지 못합니다. 그래서 무덤덤한 것입니다. 내 삶에 어떤 영향도 주지 못하는 것입니다. 기도할 때만 입버릇처럼 '하나님 아버지'라고 부를 뿐입니다. 이것이 오늘날 우리에게 있는 큰 문제점입니다.
한번은 신문에 재미있는 사진이 실렸습니다. 휴가를 마친 부시 대통령이 헬리콥터를 타고 백악관 잔디밭에 내리는데, 그 옆에 부시 대통령의 새까만 애완견 바니가 함께 걸어 나오는 사진이었습니다. 그 사진을 보면서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저 개가 자기 바로 앞에 걸어가는 사람이 누구인지 제대로 알까?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사람, 세계에서 가장 강한 사람, 온 세계를 손 안에 쥐었다 폈다 하는 사람, 엄청난 권력을 가진 절대 강자가 바로 자기 앞에 걸어가는 사람이라는 사실을 저 개가 알까?' 만일 세계 정상들만이 드나드는 백악관으로 자기를 끌고 들어가서 책상 옆에 앉게 한 이 남자가 누군가를 바니가 알았더라면 아마 기절해서 못 일어났을 것입니다.
우리 역시 이 개와 같은 처지에 있습니다. 내가 슬퍼할 때 어깨를 두드리며 내가 너와 함께 한다고 말씀하시는 그분이 바로 하나님 아버지이십니다. 내가 힘들어서 고통 할 때 나의 짐을 대신 져 주시는 그분이 바로 나의 아버지이십니다. 만일 광대하시고 거룩하신 하나님이 진정 내 아버지가 되시고 나는 그분의 아들이라는 것을 내 존재 전체가 알고 전율할 정도면 하나님을 찬송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미'하게 하려고 우리를 자기의 아들로 삼으셨다고 말씀합니다. 이것은 엄청난 사건입니다. 좌절하고 앉아있다가도 벌떡 일어날 수밖에 없는 사건입니다. 아무리 슬픔을 당한 자리라 할지라도 '하나님이 내 아버지, 나는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가슴에 뜨겁게 깨닫는다면 눈물 닦고 일어설 수 밖에 없습니다. 그 사실을 아는 이상 이 세상에서 거드름을 피우는 권력자들, 성공한 사람들, 유명한 사람들 앞에서 기죽지 않습니다.
그런데 이와 같은 반응이 우리에게 일어나지 않기에 답답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기도해야 합니다. '하나님, 이것이 정상이 아닌 것 같은데, 좀 알게 해주세요.' 그래서 하나님이 내 아버지가 되신다는 생각만 하면 가슴에서 새로운 힘이 솟는 것 같은 은혜가 시시때때로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이 험한 세상을 항상 기뻐하면서 살 수 있는 것입니다.
카톨릭 교회에서는 어떤 사람을 성자로 추대할 때 여러 가지 요건들 중 특별히 중요시하는 것이 있습니다. '이 사람이 험하고 슬픔 많은 세상에서 남달리 기뻐하고 산 흔적이 있느냐?'입니다. 하루, 이틀이 아닌 한 평생 남달리 기뻐했느냐가 성자의 자격 요건인 것입니다. 그 말에도 일리가 있습니다. 하나님이 내 아버지요, 내가 그의 아들이란 사실 하나 만으로도 우리는 이 세상에서 항상 기뻐할 조건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남달리 기뻐하고, 남달리 하나님 앞에 찬양하며 살았다면 그 사람은 성자 될 자격이 있습니다.
우리 모두 이와 같은 은혜를 누릴 수 있도록 기도했으면 합니다. '바울처럼 지혜와 계시의 영을 주사 하나님을 더 알게 해주세요. 하나님이 나를 어떤 자리에 불러주셨는지도 마음을 열어서 깨닫게 해주세요.'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반드시 들으시고, 성령을 통해 그의 아들됨의 영광이 어느 정도인가를 때때로 보게 하시고, 느끼게 하시고, 감격하게 하시고, 찬송하게 하실 것입니다.
이렇게 광대하시고 거룩하신 하나님이 일단 자기 아들로 부르신 사람에 대해서는 엄청난 사랑을 쏟아 주십니다. 우리의 상상을 뛰어넘는 인자와 긍휼을 더하여 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악한 자라도 좋은 것을 자식에게 줄줄 알거든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으로 주시지 않겠느냐?'(마7:11) 악한 부모도 자식만은 버리지 않습니다. 하물며 하나님께서 어떻게 우리를 모른다고 하시겠습니까?
대통령에게 따라다니는 재미있는 말이 있습니다. 바로 '박지원 중독증' 이란 말입니다. 이 말은 김 대통령의 마음에 항상 '박지원'이라는 사람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무슨 중요한 일이 있을 때마다 먼저 그 사람을 불러서 의논하고 싶어하는 마음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 사람이 곁에 있으면 마음이 평안하다는 것입니다. 그 사람의 말이면 다 옳은 말로 들린다는 것입니다.
그 이야기를 보면서, 하나님께서도 우리 아버지가 되시기에 우리에 대해서 약간의 그런 중독증이 있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스바냐 3장 17절에 이처럼 말할 수 있는 근거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놓고 어쩔 줄을 몰라 하십니다. '그가 너로 인하여 기쁨을 이기지 못하여 하시며, 너를 잠잠히 사랑하시며, 너를 인하여 즐거이 부르며 기뻐하시리라.'
하나님은 날마다 우리만 생각하십니다. 우리만 생각하면 기뻐하십니다. 밤낮으로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우리가 멀리 보이기만 해도 좋아서 소리를 지르고 기뻐하십니다. 마치 하나님께서 아들이 된 우리에게 중독증이 걸린 것 같습니다. 하나님은 그만큼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그러므로 날마다 아들 된 우리를 돌보아 주십니다. 위험에서 건져 주십니다. 우리 하나님은 그런 아버지가 되십니다.
얼마 전 어떤 목사님의 글을 읽게 되었습니다. 평범한 이야기이지만 뭔가 의미를 던져주는 이야기였습니다. 어느 날 한참 곤하게 자고 있는데, 다섯 살 된 아들이 와서 아빠의 이마를 손가락으로 톡톡 치며 말했습니다. "아빠. 나 화장실 가고 싶어요." 그래서 자다가 깨서 시계를 보니 새벽 2시 45분이었습니다. "그래. 갔다 와. 저기 화장실이 있지 않니?" 화장실은 좁고 어두컴컴한 복도 끝에 있었습니다. 그러자 아이는 "그럼 갔다 올께요." 하고는 화장실을 갑니다. 좁고 어두운 복도는 그 다섯 살짜리 아들에게는 아마 십 리 길처럼 느껴졌을 것입니다. 아마 양쪽에 붙어 있는 컴컴한 방에서는 갑자기 괴물이라도 뛰어 나올 것 같은 두려운 마음도 있었을 것입니다. 아이는 혼자 화장실을 가다가 중간에 되돌아 왔습니다. 그리고는 아빠 옆에 와서 "아빠. 아빠 같이 가. 아빠 같이 가." "너 혼자 가면 안되니?" "아냐. 아빠하고 같이 가면 좋겠어요." "그래. 그러면 같이 가자." 그리고는 자리에서 일어나 아들 손을 잡고 긴 복도를 건너 화장실을 갔다 왔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그분이 이런 말을 덧붙였습니다. "우리 중 지금 어떤 길고 어두운 복도를 걷고 있는 사람들이 있을지 모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인생을 살면서 길고 어두운 복도를 걸어갈 때가 있습니다. 아마 어떤 사람은 이제 새로운 사업을 시작하려고 계획을 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예금한 돈이며, 집이 날라갈 위험도 감수하면서 사업을 시작합니다. 분명히 어둡고 긴 복도를 지금 걸어가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몸이 좀 이상해서 병원에 가서 몇 가지 검사를 하고는 진단 결과를 1, 2주 동안 기다리면서 초조해 하는 사람들도 있을 것입니다. 아마도 어두운 복도를 혼자 걷는 사람일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딸을 결혼시켰는데, 몇 년 안되어 부부 사이에 심각한 문제가 일어나서 지금 밤잠을 설치는 지도 모릅니다. 그렇다면 어두운 복도를 지금 걸어가고 있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실직, 어떤 사람은 남으로부터 말로 다 할 수 없는 고통과 아픔을 당하는 지도 모릅니다. 우리는 이런 모든 일들을 세상에 살면서 다 경험하게 됩니다.
몇 일 전 우리 교회 마당에 유난히 눈에 띄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교회 나오는 사람이 별로 없던 날이라 그 남자분이 교회에 왔을 때 유달리 제 눈에 들어왔습니다. 넥타이를 매지 않은 와이셔츠에 양복바지를 입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곁에는 3살 정도 되는 사내아이와 5살 정도로 보이는 사내아이가 벤치에 앉아 있었습니다. 아버지 되시는 분은 성경을 펴 놓고 읽다가, 그 다음엔 노트에 무언가를 한참 쓰다가, 또 애들하고 이야기를 하곤 했습니다. 그것도 오전 내내 그렇게 보내더니 점심 시간에 자리를 떴다가 오후가 되어 다시 아이 둘을 데리고 나타났습니다. 그래서 이상하게 생각되어 내려가 물어보았습니다. "어디서 오셨어요?" "예. 저는 시골에서 왔습니다." "그런데 기거할 때가 별로 없나 봐요?" "예. 지방에서 왔는데 몇 달 전 하던 사업을 다 날려버렸어요. 그리고 아내가 지금 병원에 입원하고 있습니다. 제 형님 집이 이 근방에 있기 때문에 애들을 데리고 잠깐 왔어요." "아내가 지금 많이 아픈가요? 못 고칠 병인가요?" "예. 못 고칠 병인가 봐요." 그 다음날 아침에도 7시가 못 되서 셋이 마당에 와 있었습니다. 인생의 어둡고 긴 복도를 걸어가고 있는 한 가장이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어떤 통로를 지나든지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것이 무엇인가를 생각하십시오. 그것은 내 곁에 있어주는 사람입니다. 내가 복도로 지나갈 때 나와 함께 하는 사람입니다. 5살 짜리 어린 아들 옆에 아빠가 있으면 그 복도가 좁고 어둡고 길어도 문제가 안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 곁에 계십니다. 도와주시는 우리 아버지가 곁에 계십니다.
지금 수재로 인해 고통 하는 사람들 중 예수 믿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비록 그들이 절망적인 형편에 놓여 주저 앉아 눈물을 흘리지만 한 가지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이 어둡고 답답한 골목길에서 나와 함께하시는 분이 계신다. 그분은 바로 내 아버지, 내 아버지 하나님이시다'라는 고백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그와 함께 하시고 도와주십니다. "두려워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니라. 놀라지 말라. 나는 네 하나님이 됨이니라. 내가 너를 굳세게 하리라. 참으로 너를 도와 주리라. 참으로 나의 의로운 오른손으로 너를 붙들리라."(사41:10) 이 하나님이 내 아버지가 되어 함께 계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이 우리 아버지가 되신다는 것이 얼마나 좋은 소식입니까? 그러나 이 소식을 우리만 알고 있으면 안됩니다. 하나님에게서 점점 멀어지고 있는 우리 이웃들에게 전해야 합니다. 그들은 하나님 없는 세상을 더 선호하고 있습니다. 자기들이 가는 길이 영원한 죽음을 의미하는 곳인지도 모르고 들어가고 있습니다. 그래서 아비 없는 자식처럼 제 맘대로 살다가 나중에는 하나님이 정해 놓으신 무서운 심판을 받게 됩니다. 우리는 그들에게 하나님이 우리 아버지가 되시는 구원의 길을 가르쳐주어야 됩니다.
제니스 조플린은 27살에 요절한 미국의 전설적인 로큰롤 가수입니다. 하루는 그녀가 잠을 자다가 잠이 든 채 문을 열더니 집 밖으로 나가는 것이었습니다. 어머니가 너무 놀라 "제니스. 너 어디 가니? 뭐 하니?" 하고 소리 쳤습니다. 그러나 그 딸은 아무 말도 안하고 그대로 걸어가는 것이었습니다. "너 어디 가니?" 하고 어머니가 재차 묻었습니다. 그러자 한참 있다가 "난 집으로 가고 있어요. 집으로 가고 있어요." 하고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바로 몽유병에 걸린 것입니다.
이것이 오늘날 세상 사람들의 모습입니다. 세상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의 품을 떠나 아버지 되신 그분을 반역하고 멀리 멀리 가면서도 속으로는 하나님께로 간다고 생각합니다. 이런 사람들에게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해야 합니다. 그리하여 그들로 하여금 발걸음을 돌리게 만들어야 합니다. 나 같은 것을 아들로 삼으신 그 좋으신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도록 만들어야 합니다.
우리 하나님은 아들 한두 명으로 만족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할 수 있으면 이 세상의 모든 인류를 다 하나님의 아들로 부르시기를 원하십니다. 이 하나님 아버지의 소원을 이루어 드릴 자가 누구입니까? 먼저 예수 믿고 하나님의 자녀가 된 우리들입니다. 그러므로 이웃들에게 복음을 전해서 하나님이 우리 아버지시고, 우리는 그의 자녀 된 것을 그들에게 알려주어야 합니다. 이럴 때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시고 우리 모두의 기도를 들어주실 것입니다. 이와 같은 큰 은혜가 우리 모두에게 항상 충만하게 임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다같이 기도합시다.
"영광 중에 계시는 하나님 아버지, 감사합니다. 티끌만도 못하고 비천한 자리에 앉아 날마다 죄만 짓는 우리들인데, 우리를 창세 전에 하나님의 아들로 선택하시고,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부르사 거룩하고 흠이 없는 하나님의 아들로 삼아 하나님나라에서 영원토록 찬송하며 살 수 있도록 구원해주신 것 감사합니다. 이 놀라운 은혜가 날마다 우리에게 감격으로 다가오게 하시고, 이 감격이 우리의 존재 전부를 불질러서, 불길이 활활 타오르는 삶을 살 수 있도록 축복해 주시옵소서. 우리 주변에 하나님이 아버지 되심을 모르는 불쌍한 탕자와도 같은 자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이번 대각성전도집회를 통해서 그들을 주님 앞으로 인도할 수 있도록 우리가 그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귀한 은혜를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간절히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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