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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은 좁은 길을 걸어가고 있는가? / 마 7:13-14

by 【고동엽】 2017. 9. 21.

당신은 좁은 길을 걸어가고 있는가? / 마태복음 7:13,14

 

 

우리 모두는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자주 인생의 교차로를 만납니다. 교차로에서는 어느 길인가를 선택해야 합니다. 그 자리에 오래 머물 수가 없습니다. 반드시 어느 한 길을 선택을 하고, 그 길로 발을 들여놓아야 합니다. 우리는 세상을 살면서 이런 인생의 교차로와 거기에 따른 중요한 결단을 해야 되는 또, 선택을 해야 되는 기로에 자주 섭니다.

 

이런 의미에서 인생은 하나의 선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선택에 따라서 자신의 운명이 좌우되는 것을 우리는 많이 경험하게 됩니다. 예수님은 이 세상에 두 길이 있다고 합니다. 하나는 좁은 길이요, 다른 하나는 넓은 길입니다. 그 길을 들어가는 문이 두 개가 있다고 합니다. 좁은 문이요, 넓은 문입니다. 그리고 그 결과도 두 가지가 있다고 합니다. 영생이 있는가 하면, 멸망이 있다고 합니다. 따라서 세상에서는 이 좁은 길과 넓은 길이 교차되는 곳에서, 어떤 사람들은 넓은 문을 선택하여 그리로 들어가서 넓은 길로 가다가 멸망하고, 또 어떤 사람들은 좁은 문을 선택하고 좁은 길을 가다가 영생을 얻는다고 주님이 말씀하십니다.

 

넓은 문이 무엇입니까? 이것은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하기를 거부하고 그를 믿지 아니하는 사람들이 들어가는 문입니다. 이것이 넓은 문입니다. 그 넓은 문을 들어서면 그 뒤로 뻗어 있는 길이 몹시 넓고 편해서 많은 사람들이 안심하고 걸어갑니다. 그리고 그 길은 매우 재미있는 일들이 많이 있습니다. 즐기면서 걸어갈 수 있는 길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많은 사람이 그 길을 선호한다고 합니다.

 

마치 이 넓은 길은 미국 뉴욕에 있는 브로드웨이와 흡사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누구든지 뉴욕에 가면 브로드웨이를 한번 찾아가고 싶어 합니다. 그리고 그 길을 걸어 다니기도 하고 드라이브도 합니다. 맨하탄에서 시작해서 허드슨 강을 중심으로 알바니까지 이어지는 굉장한 길입니다. 장장 200㎞가 넘는 길입니다. 아마 세계에서 가장 긴 길이요, 넓은 길 중에 하나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브로드웨이'는 말 자체가 넓은 길이란 뜻 아닙니까? 거기에는 세계 금융계의 중심이라고 할 수 있는 월스트리트 가가 있습니다. 그리고 유명한 대학도 있습니다. 그뿐 아니라 사람들이 특별히 그 브로드웨이를 좋아하는 이유는 42번 가에 있는 소위 '타임즈 광장' 때문입니다. 거기에는 음란하고 추악한 스트립 바가 많이 있습니다. 또 포르노 영화를 밤낮없이 상영하는 극장들이 우후죽순격으로 서있습니다. 그리고 이름난 매춘 업이 여기저기 성업 중입니다. 육체의 즐거움, 쾌락, 인생의 재미를 맛보려고 그곳을 찾는 사람은 술과 여자, 마약과 도박 같은 것들로 세월 가는 줄 모르고 즐기고 놀 수 있는 곳이 바로 타임즈 광장입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이 몰립니다. 그야말로 향락의 거리입니다. 거기에는 하나님이 안계십니다. 거기에는 멸망만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주님께서 넓은 문이라고 하실 때 또, 넓은 길이라고 하실 때는, 이런 비슷한 세상 사람들이 좋아하는 인생, 여정을 가리키는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이런 길을 걸어가는 사람들이 우리 주위에 많이 있습니다.

 

반면에 좁은 길은, 좁은 문은 무엇입니까? 좁은 문은,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고백하고, 그 분을 자신의 구주, 자신의 구원자로 받아들이고, 예수님을 믿기로 작정하는 사람들이 발을 들여놓는 곳입니다. 누가복음 13장을 보면, 이 본문 말씀과 비슷한 내용이 나옵니다. 거기에 보면, '좁은 문이 무엇인가?' 하는 것을 이해할 수 있는 배경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예수님에게 와서 이런 질문을 했습니다. "예수님, 구원을 얻을 사람들이 앞으로 많을 것 같습니까? 적을 것 같습니까?" 이 사람은 구원 얻는 자의 숫자에 상당히 관심이 있었나 봅니다. 그 질문을 받으시자 예수님께서 유명한 대답을 하셨습니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들어가기를 구하여도 못하는 자들이 많으리라.'(13:24) 조금 쉽게 바꾸면, '나를 믿으라. 그러나 세상에서는 나를 믿고 싶어도 믿지 못할 사람들이 많을 것이다.'라고 예언하신 말씀입니다. 따라서 좁은 문은 예수님을 믿는 것을 가리킵니다. 많은 사람들이 예수를 믿고 싶어도 믿지 못하고 실패할 확률이 크다는 것을 주님이 경고하고 있습니다.

 

우리 주변을 보면 그렇지 않습니까? 세상적으로 받아서 누릴만한 것들을 다 받은 사람들이 꽤 많습니다. 건강에서부터 시작해서 장수에 이르기까지, 게다가 자녀의 복, 재물의 복, 명예, 권세 등등 이것저것 다 누리는 사람들 중에도 예수 믿는 것 하나만은 실패하는 분들이 많이 있습니다. 좁은 문을 들어가려고 해도 못 들어가고 포기하는 사람들이 우리 주변에 참 많이 있습니다. 이것을 주님께서 경고하시는 겁니다.

 

사람들이 좁은 문은 점점 기피하고, 넓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좋아하는 세태는 앞으로 아마 더 증가할 것입니다. 세상이 그렇게 돌아가고 있습니다. 흔히 요즘 세태를 일컬어서 개성이 강한 시대, 즉 개성화 시대라는 말을 많이 합니다. 불과 반세기 전만 해도 우리는 시장에 가면 공장에서 대량 생산된 획일적이고 규격화 된 상품을 사야만 했습니다. 좋아하던, 좋아하지 않던 선택의 폭이 거의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요즘 세상이 많이 달라졌습니다. 상품이 많이 다양화되었습니다. 그래서 자기 개성에 맞게 상품을 골라 잡을 수 있습니다. 심지어는 주문생산도 가능하게 되었습니다. 위성TV시대가 개막을 했습니다. 다선 채널을 가진, 선다형 채널을 가진 TV 수상기가 이제 일반화 될 것입니다. 그러면, 100개가 넘는 채널을 자기 맘대로 돌려가면서 원하는 프로그램을 시청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세상이 많이 바뀌었습니다.

 

그런데 이와 같이 개성이 다양하고 강한 중에서 자기가 원하는 것은 골라잡고 싫은 것은 거들떠 보지도 않는 세태가 되자 이것이 우리의 의식 세계에 엄청난 변화를 일으키고 있습니다. 고지식하고, 고집스럽고, 획일적이고, 무언가 하나만을 주장하는 그런 태도를 사람들이 싫어하는 겁니다. 예수님이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는 이 놀라운 복음은 2000여년 동안 끊임없이 이 세상 사람들에게 전해져 왔습니다.

 

그런데 요즘 개성이 강한 사람들이 들을 때는 그것은 너무나 고지식한 주장으로 보입니다. 독선으로 보입니다. '오직 예수'라고 하는 말 자체에 대해서 거부반응을 일으킵니다. '그런 획일화 된 진리를 우리는 좋아하지 않는다.' 하는 식입니다. 그리고는 '어떤 것을 좋아하는가? 모든 종교에 다 진리가 있다. 어떤 종교를 믿던지 간에 그 종교에도 구원이 있다.' 하는 다원주의적인 사상이나 가르침을 선호합니다. 골라잡을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내 구미에 맞게 종교도 선택하고 또, 그렇게 선택했다고 해도 절대로 밑지지 아니하는 구원이 있다고 하니 기분 좋게 선택하는 것입니다. 오늘날 사람들이 그런 식으로 생각을 자꾸 바꾸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넓은 길을 선택하는 사람들은 점점 많아지고 있습니다. 아마 앞으로 넓은 길은 더 확장이 되어서 10차선 하이웨이가 될 가능성이 많습니다. 반면에 예수만이 우리의 구원이라고 주장하는 기독교의 좁은 문에는 발길이 뜸해지고, 나중에는 길이 점점 좁아져서 두 사람이 함께 걷기도 어려운 험로가 될 가능성도 있습니다.

 

참 어려운 시대가 우리 앞에 다가온다고 봅니다. 이런 형편에서 오늘 우리 모두가 예수님을 나의 구주로 고백하고, 그 분을 믿고 따르는 좁은 문을 선택했다는데 대해서 참 얼마나 감사한지 모릅니다. 세상 사람들이 다 가고 있는 그 길을 버리고 예수님만을 나의 구주로 모시는 좁은 문을 선택하고, 좁은 길을 들어섰다는 것만큼 우리에게 큰 축복이 없고 기적이 없습니다.

 

이것이 얼마나 중요한 겁니까? 내가 믿고 싶다고 믿었습니까? 내 의지가 강해서 믿었습니까? 내가 눈으로 무엇을 보았기 때문에 선택했습니까? 아닙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믿은 것입니다. 하나님이 나를 믿게 만드셨습니다. 믿고 나니 희한하지 않습니까? 그러나 벌써 믿은 걸 어떻게 합니까? 믿고 나서 어떤 때는 후회가 되지 않습니까? '괜히 빨리 믿었다. 늙어서 믿을 걸.' 하고 생각했는데도 믿고 났으니 어떻게 합니까? 나도 모르게 성경 펴서 읽는 사람이 되고, 예배 시간이 되면 교회를 나오고, 찬송하면 기분이 좋고 하지 않습니까? 다 누구의 은혜입니까?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그래서 에베소서 2장 8절의 말씀이 진리입니다. '너희가 그 은혜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오 오직 하나님의 선물이라.'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우리가 이런 놀라운 선물을 값없이 받고 예수님을 마음에 모시는 좁은 길을 선택한 것입니다. 우리가 영원히 하나님을 찬양하고 감사해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 중요한 사실이 하나 있습니다. '좁은 길을 들어섰다고 해서 모두가 좁은 길을 가는가?'라는 문제입니다. 좁은 문을 들어선 사람이 좁은 길을 가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고 상식적인 것인데, 실제로 그렇지 않은 경우가 더 많다는 것, 이것이 문제입니다. 오늘 우리가 이 문제를 검토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가 읽은 마태복음 7장에서 이 사실을 암시 받습니다. 마태복음 7장에서 예수님이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고 말씀하실 때 이 말씀을 받은 대상은 제자들입니다. 산상수훈 전체는 주님이 안 믿는 사람에게 설교하시는 내용이 아닙니다. 예수를 믿고 그분을 따르기 위해서 가정도 버리고 고향도 떠나서 혈혈단신으로 주님 뒤를 좇는 그의 제자들을 앞에 놓고 하시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다 예수 믿은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오, 구주가 되신다고 고백하고 주님 앞에 자기를 던진 사람들입니다. 이런 사람들을 보고 예수님께서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고 하십니다. 그러면 이것은 단순히 '예수를 믿으라.'는 말입니까? 아닙니다. 그 이상의 의미가 그 속에 담겨져 있는 것입니다. 이 말씀의 의미가 무엇입니까? '좁은 길로 걸어가라.'는 이야기입니다. '이미 너희는 나를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하고 믿었으니, 이제는 험하고 고되고 외로운 이 좁은 길, 신앙생활 하는 길을 끝까지 잘 가라.'는 말씀입니다. 어려움이 많을지라도, 고통이 따를지라도, 고독할지라도, 이 길을 끝까지 가라는 이야기입니다.

 

'좁은 문 들어서기'와 '좁은 길 걸어가기'는 원칙상 하나이어야 합니다. 그러나 교회 안에서 보면, 좁은 문으로 들어서기는 했지만, 걸어가야 할 길이 워낙 험하고 좁아 보이기 때문에 그 길을 기피하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좁은 문 들어서기'와 '좁은 길 걸어가기'가 별개의 것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마치 그것이 별개의 것인 것처럼 신앙생활을 하려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예수 믿기'와 '예수 좇아가기'가 일치하지 못하는 것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사람들이 있다는 말입니다. 신앙고백은 신앙생활로 제대로 이어져야 하는데 신앙고백과 신앙생활이 이어지지 아니하는 상황에서 교회를 다니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런 분들은 오늘 이 말씀이 도전이 되기를 바랍니다.

 

좁은 문으로 들어왔습니까? 좁은 문으로 들어온 사람은 좁은 길을 걸어가야 합니다. 그러나 들어와 놓고는 겁이 나서 걸어가기를 싫어합니다. 넓은 길을 기웃기웃 거리면서 그저 적당히 교회만 드나듭니다. 우리가 이런 생활을 하면 안됩니다. 이것은 바른 신앙생활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 결과 반드시 영생을 얻을 수 있다고 아무도 장담을 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지금 좁은 길을 가고 있는 하나님의 자녀입니까? 한번 점검해보시기를 바랍니다. 세 가지 질문을 드리겠습니다. 그 질문에 대해서 여러분이 어떻게 대답하느냐에 좌우가 될 수가 있습니다.

 

첫째로, 세상에서 신앙생활을 하는 것이 정말 어렵다고 생각될 때가 많습니까? '야, 신앙생활 정말 힘들다. 처음에는 예수 믿기만 하면 천국 간다고 해서 너무 쉽다고 생각하고 덥석 믿었는데, 믿고 나니깐 정말 어렵구나!' 이렇게 생각하는 분들이 계십니까? 믿으면 믿을수록 신앙생활 바로 하는 것이 얼마나 피나는 노력을 요하는 것이라 자주 느끼십니까? 그렇다면 여러분은 지금 좁은 문을 가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가끔 보면 예수 믿는 것이 너무 좋은 것으로만 생각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목사님, 너무너무 기쁘고 행복해요. 예수 믿는 것이 이렇게 좋은 줄 몰랐어요. 왜 좀더 빨리 못 믿었는지요." 이러면서 아주 어린애처럼 좋아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것도 정상입니다. 예수 믿으면 기쁩니다. 예수 믿으면 행복합니다. 이 세상에서 예수 믿는 것 만큼 우리의 가슴을 뜨겁게 하는 것이 없습니다. 할렐루야! 믿습니까? 아멘. 이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이렇게 마냥 좋아하고 기뻐하는 것만이 신앙생활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아직도 어린 신앙을 가진 사람입니다.

 

우리가 7~8살 먹은 어린애들을 데리고 등산을 갈 때가 가끔 있지 않습니까? 애들이 산에 간다고 하면 얼마나 좋아합니까? 그래서 데리고 산 밑에 갔다 놓으면 얼마나 좋아하는지 이리 뛰고 저리 뛰고 야단 법석을 칩니다. 그러다가 조그마한 배낭 짊어지게 하고 한 2시간만 끌고 올라가면 그때는 어떻게 합니까? "나 죽네. 나 죽네." 하고 아우성입니다. '업어달라, 못 가겠다'고 하면서 주저앉아 버리지 않습니까? 이것이 정상입니다. 높고 가파르고 험한 산을 올라가기 때문에 애들이 이렇게 힘들어 하는 것이 정상입니다. 기분 좋아 하던 것은 아직 등산이 뭔지 모를 때 하는 짓이고, 진짜 올라가면 얼마나 힘든 것인지 안다는 말입니다.

 

신앙생활도 마찬가집니다. 처음 시작하면 기쁘고 감사하고 세상이 달라 보입니다. 그러나 신앙생활을 계속 하게 되고, 하나님의 말씀의 의미를 자꾸 깨닫게 되고, 하나님이 우리에게 요구하는 것이 무엇인지 또 우리 자신이 변화된 신분이 얼마나 고상하고 거룩한지 자꾸 깨닫게 되면, 그 때부터 신앙생활 하는 것이 만만치 않다는 것을 느끼게 됩니다. 더욱이 세상이 악해지면 악해질수록 하나님의 자녀로서 사는 것이 얼마나 벅찬가를 깨닫게 됩니다. 이 세상 거짓되고 음란한 사람들이 우리 주변에 많아질수록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답게 신앙생활을 바로하는 것은 피를 튀기는 싸움이나 다름이 없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됩니다.

 

흔히들 신앙생활을 일컬어서 연어가 강물을 거슬러 올라가는 것에 비유합니다. 바다에서 마음대로 돌아다니던 연어가 산란기가 되면 과거에 자기가 떠났던 강으로 다시 돌아옵니다. 떼지어서 돌아옵니다. 그리고는 큰물을 거슬러서 강 상류로 올라갑니다. 아무도 그 기세를 못 막습니다. 웬만한 절벽이 있어도 그냥 뛰어 오르면서 계속 올라갑니다. 미국 같은 경우에는 곰들이 위에서 기다리면서 잡아먹으려고 호시탐탐 노리고 있어도, 연어는 아랑곳하지 않습니다. 잡아 먹히는 놈은 잡아 먹혀도 계속 전진합니다. 신앙생활은 바로 이런 것입니다. 그러나 죽은 연어는 물결을 따라 떠내려갑니다. 신앙생활 하는 사람 중에서 이래도 좋고, 저래도 좋은 사람은 세상 물결 따라서 마음대로 떠다닙니다. 그런 사람에게는 신앙생활이 좋은 것이 아닙니다. 하나도 어렵지 않습니다. 그러나 세상 물결을 거슬러서 올라가기를 각오하고 신앙생활 하는 사람은 신앙생활 하는 것이 참 어렵습니다.

 

마태복음 16장 24절에 보면 이 신앙생활이 좁은 길을 걸어가고, 좁은 길을 오르는 것처럼 힘든 이유를 가르쳐 줍니다. 16장 24절을 잘 기억하십시오.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쫓을 것이니라.' 다시 한번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쫓을 것이니라.'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이것이 바로 좁은 길을 걸어가는 신앙생활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을 따라가는 삶이 신앙 생활입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우선 먼저 중요한 것은 자기를 부인해야 한다고 합니다. 자기를 부인하지 아니하면 주님을 따를 수가 없다고 말합니다. 여러분, 자기를 부인한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예수님을 몰랐을 때 가졌던 욕망을 포기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대신 나 자신을 위해서 내 가슴 속에 품고 있었던 꿈과 야욕을 버리는 것입니다. 우리 속에는 부패한 옛 본성이 아직도 자리잡고 있습니다. 그래서 갓 낚은 갈치가 무섭게 날뛰는 것처럼 우리 안에 옛 자아의 소욕이 그대로 날뛰고 있습니다. 이런 것을 죽이는 것이 자기를 부인하는 것입니다. 나의 옛사람을 십자가에 못박는 것, 이것이 바로 자기를 부인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답게 거룩한 삶을 살기 위해서 무거운 짐을 벗어 던지는 것이 바로 자기를 부인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자기부인을 하려면 세상 사람들이 좋아하는 것들을 우리가 함께 즐길 수 없을 때가 많이 있습니다. 세상 사람들의 가치관을 다 수용하지 못할 때도 많이 있습니다. 세상에 살고 있지만 세상이 속하지 아니한 자들처럼 하나님의 자녀다운 차별성을 드러내기 위해서는 가끔은 혼자 길을 걸어가야 할 때도 많습니다. 고독한 길을 선택해야 할 일들이 자주 일어납니다. 불이익을 감수해야 합니다. 어떤 때는 핍박을 당할 수도 있습니다. 이것이 쉬운 일입니까? 절대로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회 안에서는 신앙생활이 바르고 이와 같은 자기부인을 전제하고 있다는 사실조차도 모르는 분들이 너무 많고 또 이 사실을 안다고 해도 자기부인을 하지 않으려고 하는 분들이 왕왕 눈에 보입니다. 자기 부인하기 보다는 자기 긍정하기에 바쁘고, 자기를 포기하기 보다도 자기의 어떤 생각을 성취하는 데 신앙을 이용하려는 사람이 많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한마디로 좁은 길을 걷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좁은 문은 들어왔을지는 모르지만 좁은 길을 걸어가는 사람은 아닙니다. 여러분, 오늘날 기독교가 상당히 위기에 몰려있다는 것을 잘 아실 것입니다. 이것은 세계적인 추세입니다.

 

무언가 보이지 않는 큰 위험이 지금 서서히 다가오고 있다고 하는 불안을 우리가 가끔 느낍니다. 왜 그런지 아십니까? 이제 그 이유를 설명하기 위한 한가지 사례를 여러분에게 말씀 드리겠습니다. 제가 어느 목사님의 강의를 들으면서 아주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종교학에서는 세상에 있는 종교를 고등종교와 하등종교로 나누는데, 그 기준이 '그 종교에 자기를 부인하는 정도가 얼마나 강한가?' 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회교가 고등 종교입니까? 예, 회교는 고등종교에 속합니다. 회교를 믿는 사람들 중에는 진리를 탐구하고 영원한 가치를 추구하기 위해서 무서운 고행을 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이 자기를 부인하는 요소가 많이 있습니다. 불교가 고등 종교입니까? 예, 불교도 마찬가지입니다. 무아의 세계에서 보살이 되기 위하여 평생 산 속에서 벽만 쳐다보고 앉아 있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얼마나 무서운 자기부인을 하는지 모릅니다. 기독교는 어떻습니까? 예수님 말씀에 비추어 볼 때 기독교의 본질은 자기부인에 있습니다. 거기서부터 신앙생활은 출발합니다. 자기부인을 못하고 온갖 욕심을 다 채우려고 하는 마음을 가지고는 절대로 신앙생활을 못합니다. 그러므로 거듭나야 되고, 새사람이 되어야 된다고 말합니다. 이런 의미에서 기독교도 고등종교에 속합니다. 자기를 부인하는 강한 요소가 있습니다. 모든 종교 가운데서 기독교는 가장 강한 요소를 가지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이런 고등 종교들이 타락하기 시작하고, 점점 퇴색하기 시작할 때 나타나는 증세가 있다고 합니다. 이 증세는 어느 종교나 똑같이 나타난다고 합니다. 그 증세는 성직자들이 갑자기 급증을 한다는 것입니다. 성직자가 갑자기 급증해서 너도나도 할 것 없이 신학교로 가고, 수도원으로 가고, 절간으로 들어가는 일들이 일어나면, 이것은 벌써 그 종교가 타락하기 시작하는 징조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갑자기 성직자가 많아지니 종교단체가 자꾸 늘어납니다. 왜냐하면 그 사람들을 다 먹여 살려야 하기 때문입니다. 자꾸 뭔가를 만듭니다. 또, 나중에는 기복신앙이 점점 그 종교에 중요한 메시지가 된다는 것입니다. 그저 세상에서 잘 살고 복 받는 것이 그 종교의 목적처럼 변질이 된다는 것입니다. 왜 그렇게 됩니까? 자기를 부인하는 것을 포기했기 때문에 이런 증세가 일어난다는 것입니다.

 

기독교가 자기부인을 포기하면 신학생들이 갑자기 많아진다는 것입니다. 이유가 간단하지 않습니까? 제가 그 강의에서 이것이 남의 이야기가 아니라는 것을 들었습니다. 한국의 신학생들을 다 모으면 전세계 신학생들을 모은 것보다 더 숫자가 많다는 이야기를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진짜인지 가짜인지는 모르지만. 그리고 미국에 있는 많은 신학교를 먹여 살리는 사람들은 한국에서 간 신학생들이나 이민간 가정에서 신학교 들어간 학생들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한국 학생들이 미국 신학교를 먹여 살린다고 합니다. 어느 정도 과장이 되었을지 모르지만, 벌써 그 속에 어떤 뜻이 있습니다. 갑자기 모두가 신학교에 간다 하고 목사가 된다고 그럽니다. 이유가 무엇일까요? 좋은 이유도 있습니다. 그런데 나쁜 이유도 있습니다. 만약에 오늘날 한국교회 지도자들이 자기부인을 철저히 해서 성직자다운 모습을 보여줬다면 많은 젊은이들이 그렇게 매력을 느꼈을까요? 저는 그렇게 보지 않습니다.

 

티벳의 불교가 타락했을 때 그 나라의 남성 중에 70%가 중이 되었습니다. 로마 제국의 기독교가 왕성해서 암흑기에 접어들 때에 로마의 젊은이들, 똑똑한 젊은이들, 남자들은 거의가 대부분이 수도원으로 갔습니다. 그래서 기본이라는 유명한 역사가는 로마제국이 멸망한 원인 중의 하나가 성직자의 급증이라고 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성직자가 자기를 철저히 부인하면 사람들이 보기에 그렇게 화려하게 보이지 않습니다.

 

50~70년 전 위대한 선배 목사님들의 삶을 보면 몸서리가 쳐질 정도입니다. 얼마나 가난했는지, 얼마나 세상에서 대우를 못 받았는지 모릅니다. 자식들은 줄줄이 낳아서 정신이 없었습니다. 교인들이 성미라고 갖다 주면 먹고, 떨어지면 아무 말도 못하고서 그저 '주여. 주여.' 하면서 주님의 복음을 위해서 살다가 갔습니다. 오늘날 우리 목사들이 그런 모습을 보여 준다면 신학교 가는 학생이 그렇게 많을까요? 우리 모두가 자기부인을 기피하고 있기 때문에 젊은이들 눈에 목사라는 직업이 너무 화려하게 보이는 것입니다.

 

기독교에 있어서 자기부인이라는 것은 이처럼 중요합니다. 생명과도 같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신앙생활 바로 하기 위해서 얼마나 자기를 부인합니까? 자기를 부인하면서 신앙생활 하기 때문에 몹시 힘듭니다. 그래서 힘들 때 마다 주님의 십자가를 붙들고 기도합니다. '하나님, 도와주세요. 은혜 주세요. 은혜 없으면 나는 도저히 견딜 수가 없습니다.' 하고 부르짖습니다. 이것이 정상입니다. 이런 고통과 어려움을 느낍니까? 땀방울이 떨어집니까? 눈물이 마르지 않습니까? 여러분은 좁은 길을 가는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또 하나 질문합니다. 신앙생활을 바로 하기 위해 무언가 희생을 치르는 것이 있습니까? 희생을 치르는 것이 있다고 하면 여러분은 좁은 길을 가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특별히 희생을 치르는 것이 없다고 생각하면 문제가 있다고 보셔야 합니다. 다시 마태복음 16장 24절의 말씀을 상기하십시오.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쫓을 것이니라.' 십자가를 지는 것이 무엇입니까? 자기 희생입니다. 값을 치루는 삶입니다. 윌리암 버클리가 지적한 것처럼 기독교에는 항상 어떤 십자가가 존재합니다. 왜냐하면 기독교는 십자가의 종교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솔직하게 이 십자가를 숨기려고 하지 않으셨습니다. 사람들의 인기를 염두에 두고 그들이 좋아하는 메시지를 전하기 위해서 신앙생활을 마치 비단에 싸서 보기 좋게 포장하지를 않았어요. 있는 그대로 말씀하셨습니다.

 

마태복음 10장 34절 이하에 보면 너무나 끔찍한 말씀을 하십니다. '너희 집안 식구가 너희 원수가 될 것이다. 아비나 자녀나 아내나, 남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치 아니하고' 얼마나 굉장한 말씀입니까? 무슨 뜻입니까? 좁은 길을 바로 걸어가면서 신앙생활 똑바로 하려면 어떤 때는 인간의 정도 끊고, 주님을 따라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 희생을 각오하지 아니하면 주님을 따를 수 없다는 이야기입니다. 날마다 내 남편, 내 아내, 내 자식하고 집안 식구가 우상이 된 사람은 신앙생활을 정상으로 못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요구합니다.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여 다시 말하면, 우리의 전인격을 다 동원해서 하나님만 사랑하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을 그렇게 사랑하기 위해서 값을 치러야 되는 것이 있다면 주저하지 말고 십자가를 지고 값을 치르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을 이처럼 제일로 사랑할 때, 비로소 아내가 내 눈에 들어옵니다. 남편이 내 눈에 들어옵니다. 자식이 인격으로 내 눈에 들어옵니다. 하나님을 이처럼 사랑하지 못하는 자의 눈에 들어오는 아내, 자식, 부모는 자기에게 유익하기 때문에 사랑하는 상대적인 존재에 지나지 않습니다. 경우에 따라서는 우리는 주님을 따라가기 위해서 목숨도 희생해야 될 때가 있습니다. 극단적인 예지만 얼마든지 있을 수 있는 일입니다. 북한에서는 목숨 걸고 예수님 좇아가는 지하의 성도들이 많이 있습니다.

 

피셔라고 하는 웨일즈 출신의 금발머리 소녀가 하나 있었습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아프리카에서 가장 가난한 나라 중에 하나인 짐바브웨의 선교사로 떠났습니다. 그곳에 가서 아직 복음을 듣지 못하고 영양실조로 죽어가는 어린 아이들을 도와주면서 복음을 전한다는 것이 그의 꿈이었습니다. 그래서 짐바브웨에 있는 미션스쿨에 들어가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었습니다. 78년도 7월 달에 무장공비가 그 학교에 습격을 했습니다. 그리고는 교사나 학생들이나 차별하지 아니하고 총으로 난사했습니다. 피셔도 그 가운데 한 사람으로 희생 당했습니다. 그 후에 그녀의 가방에서 그의 음성이 녹음된 테이프가 그대로 발견되었는데 그 테이프에서 그는 이런 말을 하고 있었습니다. '내게 사는 것은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라. 주의 손을 잡고 주가 허락하신 좁은 길을 걸어가리라. 주의 뜻대로 걷는 것만이 평화와 기쁨과 감격이라네.' 어떤 때는 목숨도 내 놓아야 합니다. 이것이 신앙 생활입니다.

 

며칠 후면 OM선교회에 소속된 둘로스 선이 포항과 인천과 군산과 부산을 방문할 예정입니다. 2개월 동안 이 4항구를 중심으로 다니면서 선교활동을 하는 것입니다. 그 배에는 120여 개국에서 모인 350명 가까운 선교사들이 타고 있습니다. 저 남쪽 열대지방에서 그 배를 타고 선교한다는 것은 순교정신을 갖지 아니하면 안됩니다. 24시간 엔진소리에서 그들은 자유하지 않습니다. 멀미를 해야 합니다. 그 배를 운영하기 위해서 엄청난 중노동을 아침부터 밤까지 해야 합니다. 구슬 땀을 흘리면서 하루종일 일해야 합니다. 그러면서 항구에 도착하면 복음을 전하기 위해 육지에 상륙하여 사람들을 만나서 복음을 전합니다. 미국이나 영국이나 스웨덴이나 저 독일 같은 그렇게 살기 좋은 나라에서 자라난 사람들입니다. 그 좋은 환경을 다 내버리고 젊은 나이에 그 배에 와서 고생하는 사람들이 주는 메시지가 무엇입니까? 주님을 따라가기 위해서 좁은 길을 선택한 사람이요, 좁은 길을 선택해서 걸어가기 위해 그와 같은 희생도 십자가도 감수해야 된다는 것을 철저하게 믿고 인식한 사람들이 거기에 모인 것입니다. 신앙생활은 바로 이와 같이 엄청난 값을 지불할 수가 있습니다.

 

여러분, 주님을 따라 좁은 길을 가기 위해 무슨 값이든지 치르고 있습니까? 주일날 예배에 나와서 하나님을 경배하는 것도 제대로 하지 못해서 주일을 지켰다가 빼먹었다가, 산으로 들로 갔다가 교회 갔다가 제 맘대로 하는 사람이 정말로 값을 치르는 신앙 생활을 한다고 할 수 있을까요? 그 사람의 수입이나 생활환경에 비하면 너무나 초라한 헌금을 내면서, 하나님을 위하여 무슨 희생을 한다고 생각합니까?

 

우리 주변에는 예수를 알지 못해서 조금 지나면 그 넓은 길이 끝나는 자리에 영원한 멸망이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모른 채 가고 있는 수많은 영혼들이 있는데, 일년이 가도 그들을 붙들고, 모욕을 당하고, 욕을 먹어가면서 전도 한번 못하면서 무슨 값을 치른다는 말을 합니까? 우리 주변에는 어두운 그늘에서 인생을 너무나 힘들게 사는 불행한 자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런 자들을 보면서 내가 가진 것을 함께 나누며 그들에게 사랑의 위로라도 하기 위해 찾아가는 일이 1년에 한번도 없이, 아니 5년이 지나도 한번도 없이 살면서 자가지고 주님 따라간다고 말할 수 있습니까?

 

다시 여러분 자신에게 질문하십시오. 무슨 대가를 지불합니까? 지불하고 있다면, 여러분은 좁은 길을 가는 사람입니다. 지불하는 것이 아무 것도 생각나지 않습니까? 여러분, 오늘부터 자세를 바꾸어야 합니다.

 

세 번째로, 또 하나 질문을 드리겠습니다. '하나님 나라에 소망이 주는 기쁨이 있는가?' 하는 질문입니다. 그 기쁨이 있다면 좁은 길을 걸어가는 사람입니다. 하나님 나라를 생각만 하면 문득문득 기쁨이 내 가슴에 차오르는 것입니다. 주님의 나라에서의 우리의 영광을 생각하면 내 마음에 갑자기 은혜의 강수가 흐르는 것과 같은 기쁨과 감격을 느끼는 것입니다. 이것이 있으면 좁은 길을 걸어가는 사람입니다.

 

우리가 오르기 힘든 산을 등산할 때가 있지 않습니까? 한 두세 시간 힘들게 산을 올랐는데 아직도 정산이 안보입니다. 그러면 지칩니다. 이럴 때 위에서 먼저 갔다가 정상에서 내려오는 사람들이 있으면 제일 먼저 묻는 말이 무엇입니까? "얼마나 더 가면 되지요?" 그러면, 어떤 사람은 한 30분 남은 거리인데도 불구하고 "한 5분밖에 안돼요. 힘내세요. 한 5분만 가면 돼요." 하고 내려갑니다. 그러면 그 말이 진짜인줄 알고 믿고는 기분이 좋아서 배낭을 짊어지고 "한 5분만 가면 된대." 하면서 올라가지 않습니까? 땀 흘리고, 그 다음에 힘이 지날 때까지 높은 산을 오르는 사람에게 있어서 '정상이 다가온다.'는 것만큼 기쁜 것이 없습니다. 정상에 대한 어떤 꿈을 가지고 그것을 생각하면서 기뻐하는 사람이면 그 사람은 틀림없이 험하고 높은 길을 올라가는 사람입니다.

 

제가 이번에 LA에 가서 세미나를 인도하고 잠깐 쉬는 사이에 가까운 국립공원에 들렀습니다. 그 국립공원에는 암벽이 많습니다. 높이가 아마 300~400m정도는 될 겁니다. 엄청난 암벽들이 있습니다. 그 암벽 중앙에 잔디밭들이 있습니다. 거기에 가서 앉아 있는데, 주변에 방문객들이 암벽을 향해서 쳐다보고 있는 겁니다. 어떤 사람은 서서 보고, 어떤 사람은 앉아서 보고, 어떤 사람은 쌍안경으로 보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뭐가 있나 하고 봤는데 아무것도 안 보이는 것입니다. 까마득한 그 암벽만 보일 뿐 아무것도 안 보였습니다. 그래도 뭐가 있기에 사람들이 보는 것 아니겠습니까? 나중에 망원 렌즈를 꺼내 가지고 암벽을 살펴보았더니, 세상에 그 암벽에 사람이 매달려 있는 게 아닙니까? 아래쪽에도 있고, 중앙에도 있었습니다. 너무 신기해서 '별난 놈들도 다 있구나!' 하고는 구경을 했습니다. 그러다가 해가 지고, 날이 좀 어두워지는데, 깜짝 놀랬습니다. 날이 좀 어두워지니까 그 암벽을 타는 클라이머들이 차고 있는 램프에서 불이 반짝반짝 하는데, 그 높은 암벽에 열 몇 개가 걸려있는 것이었습니다. 불을 밝히며 암벽을 타고 올라가는 것이었습니다. 도대체 어쩌자고 저러는지 몰라 '아. 별놈들 다 있다.' 하고 생각할 뿐이었습니다.

 

그 다음날 와 봤더니 그 암벽 밑에 자동차를 줄지어 주차해 놓고 암벽을 오르려고 준비하는 사람, 올라갔다 내려온 사람들이 있길래 어떤 청년을 붙들고 물었습니다. 피부가 새까맣게 탔습니다. 분명히 암벽을 타고 내려온 사람 같아서 물었습니다. 이 암벽을 올라가려면 얼마나 걸리는지 물었더니 "아주 잘 타는 베테랑은 24시간이면 올라갑니다. 그리고 조금 서툴면 3일, 진짜 서툰 사람이 올라가면 일주일도 걸립니다." 하는 것이었습니다. 3일 동안 올라간다고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그 자일에 몸을 달고 올라가는 겁니다. 올라가다가 밤이 되면 거기서 잡니다. 날씨가 좋으면 그래도 괜찮습니다. 그런데 가끔 비바람이 쏟아질 때도 있고, 온도가 급강하 할 때도 있습니다. 높은 지대기 때문입니다. 생명을 걸고 올라가는 겁니다. 그래서 왜 그렇게 올라가려고 하는지 또 물었습니다. 그랬더니 그 암벽 꼭대기, 아무도 서보지 아니한 곳에 올라가 서는 기분을 말로는 못한다는 것입니다.

 

제가 깨달은 게 있습니다. 생명 걸고 구슬땀을 흘리며 배를 곯아가면서 그 암벽을 기어 올라가는 사람만이 그 암벽 꼭대기에 올라가서 두 손을 높이 들고 천하를 내려다보는 황홀감을 아는 것입니다. 기쁨을 아는 것입니다. 거기에 올라가지 아니하는 사람은 절대로 그 기쁨을 모릅니다. 신앙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엄청난 자기부인을 하는 자만이, 무거운 십자가를 지고 주님이 걸어가신 그 길을 부지런히 땀 흘리고 올라가는 자만이 자기 앞에 천국이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생각할 때마다 황홀한 감정이 드는 것입니다. 기쁨이 찾아 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에게 이 기쁨이 있습니까? 그러면 여러분은 지금 험한 길, 좁은 길을 올라가는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이라고 믿으시기 바랍니다. 로마서 5장 2절에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보고 우리는 즐거워하느니라.'고 했습니다. 올라가는 자, 좁은 길을 가는 자는 그 영광을 바라볼 때마다 즐거워합니다.

 

찬송가 544장을 보면 C.H. 가브리엘이라고 하는 분이 쓴 가사가 있습니다. 4절 가사가 이런 것입니다.

 

 

 

한숨 가시고 죽음 없는 날 사모하며 기다리니

 

내가 그리던 주를 뵈올 때 나의 기쁨 넘치리라.

 

열린 천국 문 내가 들어가 세상 짐을 내려놓고

 

빛난 면류관 받아 쓰고서 주와 함께 다스리리(544장 4절 찬양)

 

 

 

주님의 나라를 생각할 때마다 여러분의 마음에 이런 놀라운 황홀감 같은 기쁨이 있으면 여러분은 하나님 나라를 위하여 좁은 길을 가는 성도입니다.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여러분이 자기를 철저히 부인하면서 힘들지만 신앙생활을 바로 하기를 원합니까? 분명 여러분은 좁은 길에 서 있는 사람입니다. 주님이 우리 모두에게 영생을 선물로 주실 것입니다. 여러분이 비록 무겁지만 십자가를 지고 주님 따라가기를 기뻐합니까? 그렇다면 여러분은 영광스런 주님의 제자입니다. 주님이 여러분에게 영생을 주실 것입니다. 그날이 오기까지 절대로 포기하지 말고, 이 좁은 길을 함께 걸어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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