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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음질을 쉬지 맙시다 / 빌 3:12-14

by 【고동엽】 2017. 9. 20.

빌3:12-14 달음질을 쉬지 맙시다

 

 

벌써 금년 한해의 마지막 주일, 마지막 날이 되었습니다. 묵은 해를 보내고 새해를 맞는 분수령에 서서 각자가 느끼는 것도 다양할 것이고, 또 생각하는 것도 많은 차이가 있으리라고 봅니다. 특별히 여러분 각자가 처한 형편이 어떤가에 따라서 많이 달라집니다. 건강하고 형통한 사람은 밝은 눈으로 새해를 기다리고 묵은 해를 보낼 것입니다. 그러나 병들고 실패하고 좌절감에 빠져 있는 분들은 세월이 흐르는 것이 더없이 처량할 수 밖에 없을 것이고, 또 앞으로 살아갈 일에 대해서 많은 걱정들이 쏟아져 들어오리라고 생각을 합니다.

 

또한 나이로 보아서 어떤 연령에 지금 속해 있느냐에 따라 한 해를 보내고 맞는 감정이 틀립니다. 인생의 의미와 방향이 무엇인가를 놓고 갈등하는 소위 '시련의 20대'에 있는 분들은 생각이 다를 것입니다. 겁 없이 도전하기를 좋아하는 소위 말하는 '캐취 30대'의 분들은 인생을 보는 눈이 훨씬 더 담대하리라고 봅니다. 이미 자기의 한계를 어느 정도 인식하기 시작하는 '데드라인의 40대'라고 하는 계층에 속한 분들은 나름대로 진지하고 성숙한 자세로 송구영신의 순간순간을 깊이 묵상하리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재충전이 필요한 '리프레쉬트(refreshed) 50대', 더 나아가서 인생의 겨울이라고 할 수 있는 60대, 70대에 선 분들은 그 나름대로 매우 진지한 시간시간을 보낼 수 있다고 생각을 합니다. 우리가 어떤 형편에 있든지, 또 어떤 연령층에 속했든지 간에 오늘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보면서 우리 모두가 함께 받을 수 있는 귀한 주님의 음성을 들으며 은혜를 받았으면 좋겠습니다. 주님께서 말씀을 보는 우리 각자에게 말씀하시는 바가 특별히 있다고 확신합니다.

 

빌립보서는 바울이 순교하기 한 5,6년 전쯤 기록을 하지 않았나 추측을 합니다. 그 당시 바울의 나이는 이미 60대에 접어 든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그는 또한 불행하게도 로마 감옥에 수감 되어 있는 신세입니다. 지난 30여년 동안, 예수를 처음 믿은 이후로 그 복음의 열정에 사로잡혀서 소아시아를 누비며 많은 사람을 구원했습니다. 중요한 도시마다 교회가 세워지고 또 아주 건강하게 성장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드디어 로마에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발을 들여 놓았습니다. 그는 기독교가 세계 역사가 되도록 자리 매김 하는데 있어서 영웅적인 업적을 남긴 사람이 되었고, 또 서구 문화를 놓고 볼 때 문명의 물꼬를 바꾸어 놓았다고 할 만한 독보적인 존재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역사가 있는 이상 영원히 그 이름을 기억해야 될 아주 대단한 존재가 되어 있었습니다. 여러분, 이 정도면 누구나 자기의 화려한 업적에 도취되고 만족해서 이제 좀 템포를 늦추고 적당히 살자 하는 생각을 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이제는 이만하면 됐다. 좀 천천히 가자. 여유를 갖자.' 이런 생각을 할 수 있는 충분한 이유가 됩니다.

 

그런데 오늘 바울의 말을 들으면 좀 엉뚱한 데가 있다고 느껴집니다. 13절, 14절을 보십시오. '형제들아,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을 잊어 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좇아 가노라.' 놀라운 말씀입니다. 간단히 요약하면 이렇습니다. '아직 나는 목표에 이르지 못하였습니다. 그래서 뒤돌아보지 않고 앞을 향해 힘을 다해 달려 가고 있습니다.' 바울에게서 이런 말씀을 듣는다는 것은 굉장한 도전입니다. 오늘 우리 모두 송구영신하는 의미 있는 순간에 서 있으면서 이 바울의 말을 통해서 주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는 푯대를 향해서 갈려간다고 합니다. 그가 말하는 푯대가 무엇입니까? 12절 끝 부분에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이라는 말이 나옵니다. 예수 그리스도에게 내가 잡힌 것, 그것이 푯대라는 것입니다. 13절 중간에 가면 '한 일'이라고 합니다. 두 가지 일이 아니고 한 가지 일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앞에 있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에게 잡힌 바 된 그것이 한 가지 일이요, 앞에 있는 일이다.' 그가 푯대라고 말하는 것을 이렇게 정리합니다.

 

우리가 이미 성경을 통해서 잘 아는 바와 같이 바울은 예수님을 혹독하게 핍박했습니다. 미워했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을 살려 두고 싶지 않아서 다메섹으로 가고 있었지 않습니까? 그런데 갑자기 예수님이 나타나셔서 그를 사로 잡으셨습니다. 바울이 주님을 찾은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그를 붙잡은 것입니다. 낚아 챘습니다.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께 잡힌 바 되었다는 말입니다. 자기가 예수님에게 잡혔습니다. 잡히자마자 이제는 바울의 주인이 예수님이 되셨습니다. 바울은 예수님의 종이 되었습니다. 처음에는 얼떨떨했고 '무슨 이런 일이 있나? 왜 내가 이렇게 비참해지나?' 하고 느꼈을지 모르지만, 나중에 예수님이 왜 자기를 갑자기 붙들고, 자기를 손에 꽉 쥐시었는가 하는 것을 알고 나서부터 그의 마음에는 말로 다 할 수 없는 감격이 솟구치기 시작했습니다.

 

예수님을 핍박한 자기를 불쌍히 여기셔서 무조건 용서해 주시고 이 영광스러운 복음을 온 세상에 전할 수 있는 사도로 불러 주셨다는 사실을 생각하면 눈물이 마를 날이 없는 것입니다. 평생 갚아도 갚을 수 없는 은혜라고 그는 생각했습니다. 그러다 보니 그의 마음에 자연스럽게 '나는 이제 이 예수를 위해 살리라. 이 예수를 나의 인생의 최대 목표요, 가장 중요한 목표로 삼고 살리라. 어떻게 하면 예수님의 마음에 드는 사람이 될까? 어떻게 하면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인생을 살아볼까? 예수님의 마음에 들고 예수님의 마음을 기쁘게 하는 사람이 되는 것, 이것이 나의 인생의 유일한 목표요, 내가 달려갈 유일한 푯대다.' 그는 그렇게 정한 것입니다.

 

이렇게 그가 목표를 정한 다음 그는 주님을 더 알기를 심히 원했습니다. 주님을 더 알기를 원했고, 주님처럼 살기를 원했고, 주님처럼 가신 길을 따라가기를 원했습니다. 여러분, 10절, 11절을 한번 보십시오. '내가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여함을 알려 하여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어찌하든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러 하나니' 간단하게 이야기 하면 예수처럼 욕먹고 예수처럼 매맞고 예수처럼 굶주리고 예수처럼 멸시 받고 하는 일을 자청했다는 것입니다. 이유가 무엇입니까? 예수님처럼 되고 싶어서입니다. 예수님이 가신 길을 가고 싶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죽으신 십자가에 자기도 죽고, 예수님이 부활하신 그 능력을 자기도 체험하기를 원했습니다. 그래서 어떻게 하든지 예수님이 기뻐하는 사람, 예수님의 마음에 드는 사람, 예수님을 닮은 사람이 되어 주님을 존귀케 하기를 원했던 것이 바울이 자기의 인생 목표로 설정한 것이었습니다.

 

1장 20절로 가 보십시오. 바울의 기대, 바울의 목표, 바울의 간절한 소원이 무엇인지 보십시오. '나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을 따라 아무 일에든지 부끄럽지 아니하고 오직 전과 같이 이제도 온전히 담대하여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히 되게 하려 하나니' 다시 한번,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히 여김을 받는 것, 이것만이 바울에게 있어서 인생의 유일한 목표였습니다. 이 일을 향해 그가 인생을 살겠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잘 부르는 찬송이 있지 않습니까? '내가 원하는 한 가지/ 주님의 기쁨이 되는 것/ 내가 원하는 한 가지/ 주님의 기쁨이 되는 것' 이 찬송을 부르면 바울의 그 심정을 우리가 알만 합니다.

 

여러분, 우리에게도 이와 같은 인생의 유일무이한 목표가 있는지 우리 모두 한번 자신에게 물어 보는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바울처럼 예수님에게 붙잡힌 자, 예수님의 은혜에 빚진 자, 그래서 사나 죽으나 우리 예수님을 기쁘게 하고 예수님의 마음에 드는 사람, 그리고 예수님을 존귀케 해서 오직 주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사람이 되기를 소원하는 소박한 꿈, 즉 '이것을 놓고 나는 인생을 산다.'고 말할 수 있는 목표가 있는지 한번 살펴 보십시오. 금년을 우리가 그런 목표를 가지고 살아 왔습니까? 내년을 또 그와 같은 목표를 가지고 살기를 원합니까?

 

사람은 누구나 자기 나름의 인생 목표를 다 가지고 있습니다. 목표가 확실한 사람일수록 그 삶은 의욕이 넘치고 또 장애물이 있어도 쉽게 뛰어 넘는 것을 우리가 봅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무슨 목표인가 하는 것입니다. 무슨 목표를 가지고 있느냐가 중요한 것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 바와 같이 삶이란 것은 그 자체가 어려운 것입니다. 쉬운 것이 아닙니다. 골프를 치는 사람이 잘못 치면 공이 엉뚱한 곳으로 날아 갑니다. 한번 공이 엉뚱한 곳으로 가면 그 다음 골프 경기는 대단히 어렵습니다. 마찬가지로 인생도 그렇습니다. 목표가 뚜렷하지 아니하면, 잘못된 목표를 설정하면, 대단히 어려워집니다. 그래서 우리의 삶이 경우에 따라 산만해지기도 합니다. 최신 유행이나 따라 다닙니다. 다니면서 값싸게 얻은 인스턴트 해답이 만고 불변의 진리인양 맹신합니다. 그리고 이 일 하다가 안되면 저 일을 하고, 전략도 없고 목표도 없고 일정한 우선순위도 없어 보이게 행동합니다. 결국은 작은 일을 붙잡으려고 큰 일을 놓쳐 버리는 참 안타까운 인생을 살다가 끝내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렇게 목표가 흐릿하거나 목표가 있어도 잘못된 목표를 가지고 사는 삶을 일컬어서 어떤 사람은 '딸꾹질 하는 삶'이라고 했습니다. 참 재미있는 표현인 것 같습니다. 이런 경우는 내가 어떤 목표를 가지고 있었든지 그 목표는 있으나마나 한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내 인생을 걸 만한 목표인가 하는 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나에게 그 목표가 있느냐가 그것입니다. 바울은 그 목표를 갖고 있었습니다.

 

라틴어로 목표라고 하는 말이 '피니스(finis)' 인데 이것은 종말이라고 하는 말과 같은 의미를 갖습니다. 목표가 무엇입니까? 종말입니다. 목표가 무엇입니까? 끝입니다. 인생의 진짜 목표는 인생 종말과 불가분의 관계를 갖는 것입니다. 끝에 가서 후회하지 아니하는 목표라야 진짜 목표라는 말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세상을 떠나시면서 '다 이루었다.'고 말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인생 목표를 바로 정하고 달려 왔다는 증거입니다. 그 목표가 달성되는 순간 그는 환호하듯이 외친 것이 아닙니까? 바로 이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목표를 정할 바에는 우리가 그런 목표를 정해야 됩니다.

 

우리의 종말에 마지막으로 남게 될 질문이 무엇입니까? '역사가 나를 어떻게 평가할 것인가?' 그것입니까? 물론 중요합니다. '우리 후손이 나를 어떻게 볼 것인가?' 그것입니까? 물론 그것도 무시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이 다 쓸 데 없는 것입니다. 시대가 바뀌고 역사가 흐르면 다 먼지 속에 파묻히고 없어지는 것입니다. 마지막까지 남는 중요한 것이 무엇인가 하면 '예수님이 나를 어떻게 보실까?' 하는 그것입니다. '과연 내가 예수님 앞에 예수님이 기뻐하는 사람으로 설 수 있을까?' 그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역사의 승리자는 예수님입니다. 이 세상은 다 심판 받아 없어집니다. 하늘과 땅의 권세를 가지신 그분이 하늘에 있는 것과 땅에 있는 것을 통일하셔서 영원한 하나님 나라, 흠과 티가 없는 거룩한 백성들이 사는 하늘의 나라를 완성하시고 그분이 영원토록 다스리게 됩니다. 마지막으로 남는 분은 예수님입니다. 마지막으로 우리가 만날 분은 예수님입니다. 그분 앞에서 우리가 어떤 존재가 되느냐가 우리의 인생을 바로 살았느냐 바로 살지 못했느냐를 평가하는 기준이 됩니다. 마지막에 남는 것은 예수님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목표를 정했다면 그 마지막에 가서 큰 소리를 치고 마지막에 가서 찬양할 수 있는 목표라야 하지, 중간에 있다가 없어지는 그런 목표를 가지고 인생을 살 수가 없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와 같은 목표를 갖고 있습니다. 바울은 바로 이런 목표를 푯대로 정해 놓고 지금 살고 있습니다.

 

우리가 현실 생활에서 여러 가지 계획을 세우고 목표를 세우고 있습니다. 가정, 행복, 참 중요한 목표가 아닙니까? 우리의 건강도 중요합니다. 돈도 벌어야 합니다. 예수 믿는 사람은 열심히 일해서 돈도 벌어야 합니다. 멍청하게 주식에 투자해서 다 날리는 그런 짓은 안 해야 합니다. 예수 믿는 사람은 기도하고 돈 쓰고, 기도하고 돈 버는데 왜 갑자기 날립니까? 그러지 말아야 합니다. 욕심이 지나치기 때문에 다 그런 일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돈도 모아야 합니다. 모아서 우리가 주님의 나라와 선한 일을 위해서 써야 합니다. 성공도 할 수 있으면 하는 것이 좋습니다. 날마다 실패자가 될 필요는 없지 않습니까? 여가도 즐겨야 되지 않습니까? 취미 생활도 하면서 인생의 풍요로움과 깊이를 맛 보면서 살아야 되지 않습니까? 다 중요합니다.

 

이 모든 것이 중요하지만, 여러분, 한가지 꼭 알아 두십시오. 이 모든 현실적인 목표나 계획은 이차적인 것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주님을 기쁘게 하는 것, 주님의 마음에 드는 사람, 주님의 길을 따라가는 그의 제자가 된다고 하는 가장 중요한 종말적인 목표에 비해서 내가 현실적으로 갖고 있는 계획이나 목표는 이차적인 것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기쁘게 하겠다는 이 최종적인 목표가 저울추가 되어서 내가 마음에 갖고 있는 여러 가지 소원과 계획을 달아 볼 수 있어야 됩니다. 주님을 기쁘시게 하겠다는, 주의 마음에 드는 삶을 살겠다고 하는 이 목표에 비추어 볼 때, '내가 지금 가정에 대해서 갖고 있는 생각이 얼마만큼 정당한가? 가벼운가 무거운가? 좋은가 나쁜가? 돈을 벌려고 하는 것이 좋은가 나쁜가?' 저울질 해봐야 합니다. 저울질을 해 보고 '안 되겠다. 너무 지나치다.' 싶으면 옆으로 제쳐 놓아야 되고, 나쁘다고 하면 과감하게 집어 던져야 합니다. 이런 삶이 푯대를 두고 사는 사람의 삶입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마음을 비우십시오. 키에르 케골이 말하는 것처럼 마음을 비운다는 것, 마음을 단순하게 갖는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그는 한 가지만 바라보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짧은 인생인데 두 가지, 세 가지 추구할 시간이 없습니다. 한 가지, 가장 중요하다는 것, 생명을 걸어도 후회하지 아니할 수 있는 것, 마지막에 가서 큰 소리 칠 수 있는 것, 하나만 잡아야 합니다. 그것을 잡고 집중해야 합니다. 바울은 그렇게 살았습니다. 한 해를 보내고 한 해를 맞는 시점에서 우리가 이 문제를 진지하게 생각해 본다는 것은 대단히 의미 있는 것입니다.

 

바울은 자기가 세운 이 목표, 푯대를 향해서 좇아 간다는 말을 하고 있습니다. 좇아 간다는 말은 달려 간다는 의미일 것입니다. 이 말은 약간 강한 어감을 갖고 있습니다. 여러분, 시드니 올림픽 경기 장면을 텔레비전을 통해 보셨을 것입니다. 요즘에는 카메라가 워낙 발달해서 자세한 동작까지 다 볼 수 있지 않습니까? 세상에서 가장 빠른 인간탄환을 가리는 100미터 육상경기, 세계에서 내로라 하는 선수들이 마지막 결승전에서 달립니다. 미국의 모리스 그린이라고 하는 사람이 1등을 했는데, 9초87의 기록을 냈습니다. 100미터를 9초87에 뜁니다. 그런데 몇 사람이 앞에 있는 테이프를 향해서 달려 옵니다. 가슴에 누가 그 테이프를 먼저 대느냐에 따라 승자가 결정되는 것입니다. 그 얼굴 표정, 팔 동작, 다리 동작, 그 눈동자 하나 하나를 예전 같으면 못 보지 않습니까? 카메라가 저속으로 하나 하나를 분석해서 보여주지 않기 때문에 실감이 나지 않습니다. '오로록' 하다가 그냥 끝났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얼마나 대단합니까? 그 사람에게 다른 생각이 있겠습니까? 오직 골인 하는 저 지점을 바라보면서 '내가 먼저 가슴을 댄다.'는 생각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0.01초로 판가름이 나 버리지 않습니까? 바로 이와 같이 선수가 마지막 스퍼트를 하는 태도를 일컬어서 좇아 간다는 말을 하는 것입니다. 굉장한 긴장이 있습니다.

 

그 말 속에는 굉장한 힘이 담겨 있습니다. 전심을 다 쏟는 정성이 담겨 있습니다. 여러분, 바울의 형편을 한번 보십시오. 그는 지금 수감되어 있습니다. 갇혀 있습니다. 언제 풀려 나올 지도 모릅니다. 빌립보서를 보면 그는 이미 불길한 죽음을 예감하고 있습니다. 나이도 지금 60에 접어들고 있습니다. 몸에는 여전히 괴롭히는 가시가 있습니다. 남에게는 말하지 못하지만 늘 어떤 통증을 달고 살고, 불편을 느끼면서 사는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이 '육상선수가 마지막 죽을 힘을 다해서 달려 가듯이 인생을 살겠다, 신앙 생활을 하겠다.'고 말하는 것을 우리가 가볍게 들으면 안됩니다. 얼마나 대단합니까? 다 포기하고 그저 앉아 있을 만도 한 처지인데 끝까지 달리겠다는 것입니다. '나는 아직도 그 목표에 이르지 못했다. 나는 끝까지 달리리라.' 하는 그 바울을 우리 마음에 한번 그려 봅시다.

 

그래서 감옥에 앉아 있으면서도 자기가 개척한 교회 성도들에게 열심히 편지를 썼습니다. 요사이처럼 볼펜이 있습니까? 종이가 제대로 있습니까? 그 어두 침침한 감옥 속에서 시력도 좋지 않아 고생을 하는 마당에 글을 썼습니다. 장문의 편지를 써서 보내고 그리고는 시간만 나면 차가운 돌 바닥에 무릎을 꿇고 엎드려 눈물을 흘리면서 성도들 하나하나 이름을 불러 가며 밤이고 낮이고 기도했습니다. 찾아 오는 사람들에게 전도했습니다. 경우에 따라서는 유대인들을 앉혀 놓고 말씀을 가르쳤습니다. 감옥에서도 쉴 틈이 없었습니다. 달려 가는 인생을 산 것입니다.

 

여러분, 신앙 생활이라는 것이 무엇입니까? 달려가는 것이 신앙 생활입니다. 어떤 사람은 기는 것처럼 신앙 생활을 합니다. 어떤 사람은 걸어 가듯이 신앙생활을 합니다. 이것은 바울이 말하는 달려가는 신앙 생활이 아닙니다. 푯대를 향하는 신앙 생활이 아닙니다. 신앙 생활의 목표는 예수님을 기쁘게 하는 것입니다. 신앙 생활은 주님의 마음에 드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신앙 생활의 목표는 내가 예수님처럼 살고, 예수님처럼 되기를 원하는 작은 예수의 꿈을 이루는 것입니다. 이 목표와 이상이 너무나 고귀하고 아름다운 것이기에 적당히 걸어갈 그런 일이 아닙니다. 적당히 기어가면서 할 일이 아닙니다. 최선을 다해야 되는 일입니다. 바울처럼 말입니다. 바울이 갇힌 감옥처럼 우리를 둘러 싸고 있는 답답한 환경에서도 우리는 절대로 구애 받을 수가 없습니다. 바울에게 있는 몸의 가시처럼 우리 몸의 연약한 부분 때문에 고통하고 어렵고, 잠 못 자는 때가 있을지라도 그것 때문에 우리가 지장을 받아서는 안됩니다. 거기에 꺾이면 안됩니다. 바울처럼 나이가 들어간다고 해서 나이 타령만 하고 앉아 있는 그런 생활을 해서는 안됩니다. 그 모든 것들을 다 극복하고 큰 목표를 향해 밤낮 없이 마음을 집중해서 달려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신앙 생활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주일마다 공동체 고백을 하지 않습니까? 그 공동체 고백에 나오는 다섯 가지를 위해서 여러분이 얼마나 정성을 다 쏟습니까? 하나님을 예배하기 위해서 얼마만큼 여러분이 전력을 쏟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고 주님 닮아가는 성숙한 인격이 되기 위해서 얼마나 배우려고 합니까? 여러분, 이웃에게 사랑을 베푸는 일에 얼마나 관심을 가지고 삽니까? 성도들과의 아름다운 교제를 위해서 우리가 얼마만큼 시간을 냅니까? 아직도 복음을 듣지 못하고 죽어가는 영혼들을 위해서 얼마나 기도하고 있으며 얼마나 그들을 위해서 전도하고 있습니까? 골인 지점을 향해 달려 가듯이 우리가 이런 일들을 놓고 신앙 생활 하는 것이 바로 바울이 말하는 좇아 가는 삶의 모습입니다.

 

TV 다큐멘터리에 소개된 우리 나라의 인간 문화재 한분이 있었습니다. 박동진 옹이라고 하는 분입니다. 그는 소리꾼입니다. 83세인데, 그가 자기 생활을 공개하면서 이런 말을 했습니다. '이제까지 저는 매일 아침 하루 4시간 이상 소리 연습을 했습니다. 눈이 오나 비가 오나 몸이 아프거나 피곤하거나 하루도 거르지 않고 소리 연습을 했습니다.' 참 놀라운 일입니다. 80이 넘어서도 계속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기자가 너무나 신기해서 물었답니다. '왜 그렇게 삽니까?' 그 질문을 받은 이 박동진 씨의 입에서 놀라운 말이 나왔습니다. '나에게는 소리를 연습 한다는 것은 내가 왜 살아 있는가에 대한 본질을 알게 해주는 것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내가 소리를 연습 한다는 것은 내가 왜 살아 있는가에 대한 본질적인 대답을 해 주는 것이기 때문에 그렇다 그 말입니다. 이것 참 대단한 말입니다. 예술의 높은 경지를 추구하는 사람에게서 나온 대답이기에 그만한 깊이는 있겠지만 대단한 것입니다.

 

여러분, 그렇다면 우리가 주님을 기쁘게 하기를 소원하는 인생 최대의 푯대를 앞에 놓고 신앙 생활을 하는 것이 판소리의 경지를 추구하는 것만큼도 우리에게 왜 살아 있는가에 대한 본질을 깨우쳐 주는 것이 되지 못한다면 얼마나 그 신앙 생활은 부끄러운 것입니까? 우리 스스로 한번 물어 봐야 합니다. 우리에게 있어 신앙 생활이 무엇입니까? 교회 다니는 것입니까? 막연히 그저 신앙 생활의 습관에 젖어서 왔다 갔다 하는 것입니까? 아닙니다. 우리의 삶의 본질을 이야기해 주는 것입니다. 그만큼 중요한 것이 신앙 생활입니다. 지난 한해 동안 어떻게 신앙 생활을 했습니까? 앞으로 어떻게 하실 겁니까? 반성하고 새로운 결단을 해야 되는 중요한 시점입니다.

 

지난 주 수요일 사랑의교회 평신도 훈련 수료식이 있었습니다. 제가 마음에 얼마나 큰 감동을 받았는지 모릅니다. 얼마나 제 마음이 다시 한번 힘을 얻었는지 모릅니다. 아마 우리 예수님도 그러셨으리라고 생각합니다. 2년 동안 소그룹에서 교역자들로부터 철저하게 훈련 받은 사람들, 사역 훈련을 마친 사람 282명, 1년 동안 교역자와 함께 영적으로 훈련 받은 제자훈련 수료생 314명, 1년 동안 몇 개월씩 둘씩 둘씩 짝을 지어 전도를 다니면서 전도폭발을 실습하며 훈련 받은 사람들 526명, 그래서 신앙 생활 똑바로 해 보고 싶어서 주님을 기쁘시게 하고 주님의 마음에 드는 사람, 주님처럼 살고 주님처럼 죽기를 원하는 아름다운 푯대를 향해 달려 가기 위해 시간과 정성을 바치고 세상에 여러 가지 하고 싶은 것들을 다 옆으로 제쳐 놓고 힘을 다해 수고한 사람들 1122명이 이 자리에 가득하게 앉아 있었습니다. '이런 분들이 사랑의교회에 있는 이상, 이 교회는 소망이 있다. 주님은 영광을 받으실 것이다.' 하는 생각을 저는 했습니다.

 

그 중에 벌써 나이가 60이 넘었는데, 젊었을 때 신앙 생활을 제대로 못한 것을 너무나 안타깝게 생각하고 실버 제자훈련을 받은 분이 계셨습니다. 67세인가 68세인가 하는 부부가 나와서 로마서 8장을 암송했습니다. 참으로 대단했습니다. 남편과 아내가 양 쪽에 같이 서서 '그런즉 이 일에 대하여 우리가 무슨 말을 하리요...' 하면서 암송을 하는데, 눈에서 불꽃이 튀는 것 같았습니다.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어 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은사로 주시지 않겠느냐' 가만히 보니 '참 대단하다. 한 30년 전에만 저렇게 불이 붙었으면 세계가 달라졌을 텐데.'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얼마나 대단한 겁니까? 우리는 신앙 생활을 그런 자세를 가지고 해야 됩니다.

 

바울은 자기 앞에 있는 푯대를 향해 달려가는데 방해를 받지 않기 위해서 두 가지를 포기 했습니다. 첫째가 무엇인지 압니까? 12절을 봅니다.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그 다음 13절에 가서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한다.'고 했습니다. 온전히 이루었다고 생각하지 않고 잡은 줄로 여기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쉽게 말하면 현재에 만족하고 안주하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자신의 현재 상황이 아무리 만족스러운 것이라도 거기에 마음을 두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마음은 미래에 있습니다. 앞에 있는 푯대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현재에 안주하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놀라운 말입니다. 바울은 이미 어느 경지까지 올라간 사람입니다. 그만큼 예수님을 기쁘게 하고 예수님을 닮기 위해서 평생을 투자한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그래서 그는 자주자주 사람들을 만날 때마다 나를 본받으라고 했습니다. 여러분, 옥 목사하고 20년 동안 이 교회에 살면서 옥 목사 입에서 '나를 본 받으십시오.' 하는 말을 한번이라도 들어본 적 있습니까? 저는 죽었다 깨어나도 그 말을 못합니다. 그러나 바울은 자기를 본 받으라고 했습니다. 그 말은 그만큼 그는 어떤 경지에 이르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엇이라고 합니까? '나는 내가 이루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나는 현재에 만족하기를 원치 않는다.' 그래서 현재에 안주하기를 거부했습니다. 현재에 안주하면 비만증에 걸리기 때문에 달리는데 지장이 있지 않습니까? 그러므로 모든 것을 다 뿌리치고 앞만 쳐다 보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에게도 이와 같은 자세가 있어야 합니다. 사랑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여러분이 지금 어떤 형편에 와 있던지, 여러분의 신앙이 얼마만큼 성숙했든지, 여러분이 교회 안에서 얼만큼 인정 받는 사람이 되었든지, 여러분의 믿음이 얼마만큼 자라서 놀라운 일들이 여기저기에서 일어났든지 간에 현재에 안주하지 마십시오. 현재에 안주하면 영적으로 비만증에 걸립니다. 몸이 무거워지면 달리지를 못합니다. 포기하셔야 됩니다. 앞만 쳐다 보셔야 됩니다. 2000년은 2000년으로 접어 두고 2001년은 앞을 내다 보고 뛰어야 합니다.

 

바울이 또 하나 포기하기를 작정한 것이 있습니다. 13절을 보세요. '형제들아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을 잊어 버리고' 뒤에 있는 것, 지나간 것, 과거를 돌아보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과거를 돌아보면 자기의 아름답지 못한 경력이 있다는 것을 압니다. 핍박자요, 훼방자요, 포행자였습니다. 용서 받을 수 없는 과거의 경력이 있습니다. 전과가 있습니다. 그것을 다 이제는 돌아보지 않기로 마음 먹었습니다. 예수님이 이미 다 용서 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사실 바울은 실수도 여러 번 했습니다. 동역자인 바나바와 알력이 심해 서로 나누어 지면서 평생 지울 수 없는 마음의 상처를 받았습니다. 이처럼 이런 저런 실수들이 있었지만, 바울은 그 모든 것을 돌아보지 않기로 결정했습니다. 실수가 있었다면 주님이 그것을 다 덮어 주실 것이라고 확신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오직 앞만 내다 보고 달려 가기를 원했습니다.

 

그는 과거 30여 동안 엄청난 업적을 쌓은 사람입니다. 전 세계를 하나님의 나라로 바꾸어 놓을 만큼 놀라운 선교의 업적을 쌓았습니다. 그러나 그 과거의 업적에 매달리기를 원치 아니했습니다. 그 업적을 놓고 나팔 불면서 살기를 원치 않았습니다. 그 모든 것을 다 잊어 버리고 앞을 향해 달려 가기를 원했습니다.

 

여러분, 우리도 그래야 합니다. 과거에서 자유해야 합니다. 여러분, 과거에 은혜를 많이 받은 경험이 있습니까? 과거에 여러분이 교회를 위해 많이 봉사한 일이 있습니까? 헌금을 많이 했습니까? 다 잊어 버리십시오. 그런 것을 가지고 자꾸 돌아보면 안됩니다. 거기에 매이면 절대 앞으로 나가지 못합니다. 그리고 여러분 가운데서 실패하고 상처 입고 원한을 갖고 한때의 잘못된 판단 때문에 지금까지 고생하는 분들이 있습니까? 얼마나 생각하면 분통이 터집니까? 아픕니까? 고통스럽습니까? 원망스럽습니까? 그러나 여러분, 이런 과거는 파괴적인 힘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현재를 무력화 시키고 앞으로 달려 가는 일을 철저하게 방해합니다. 그러므로 돌아보지 마십시오. 잊어 버리십시오. 예수 안에서 다 잊어 버리십시오.

 

닐 엔더슨이라고 하는 사람의 글을 보니 이런 말이 있었습니다. 아주 믿음 좋은 젊은 부부가 선교사가 되기로 결심 했습니다. 그리고 선교 훈련을 받는 중에, 어느 날 저녁에, 아내가 성폭행을 당했습니다. 기가 막힌 이야기가 아닙니까? 너무나 견디기 힘들어 살던 집에서 이사를 갔습니다. 이사를 갔는데도 문제 해결이 안됩니다. 끔찍한 기억과 상처로부터 벗어날 수가 없었습니다. 하루는 닐 엔더슨의 강의실에 그 부인이 찾아 왔습니다. 그리고는 그를 개인적으로 만나 하소연을 했습니다. "하나님은 모든 그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합력하여 선을 이루게 하신다고 약속하셨는데 왜 나에게 이와 같은 일이 일어나야 합니까? 나는 도무지 견딜 수가 없습니다. 내가 선교사로서 헌신하려고 하는데 왜 하나님이 이런 일을 용납하십니까?"

 

그러자 닐 엔더슨이 말했습니다. "잠깐. 하나님이 당신에게 허락하신 것이 아닙니다. 당신은 피해를 본 것입니다. 세상에 살다 보면 피해를 당하는 때가 있지 않습니까? 그러나 하나님은 그런 피해를 통해서도 당신을 성숙한 사람으로 만들고 선을 이루게 하신다는 것을 믿어야 됩니다." "목사님 도무지 그런 것이 믿어지지 않고 계속 갈등만 일어나니 어떻게 합니까?" "자, 그러면 다시 한번 이야기합시다. 당신이 성폭행을 당해도 신분이 바뀐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당신이 성폭행을 당했다고 해서 사랑 받는 하나님의 자녀라는 신분이 날아가 버렸습니까? 아니지 않습니까? 신분은 그대로 남아 있지 않습니까? 그러므로 이제 당신이 선택하기 나름입니다. 평생 '나는 성폭행 희생자다.' 하는 것만 늘 생각하면서 살든지, 아니면 그것을 아예 잊어 버리고 '나는 사랑 받는 하나님의 자녀다.' 하고 고백하면서 살든지 둘 중에 하나를 선택하십시오. 그래야만 당신은 좌로 가든 우로 가든 될 것입니다."

 

옳은 말이 아닙니까? 내가 과거에 어떤 어려움을 당했다 할지라도 다 잊어야 됩니다. 그 상처, 그 고통을 자꾸 돌아 보면서 과거의 일들만 자꾸 마음에 담고 맴돌면 아무 것도 안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바울이 자신은 뒤의 것을 잊어 버리겠다고 한 것입니다.

 

사랑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예수님을 기쁘게 하고 예수님의 마음에 드는 사람, 그래서 오직 주님만을 나의 생애 최고의 기쁨으로 놓고 인생을 사는 사람이 되기 위해서 신앙 생활을 달려 가는 선수들처럼 해보고 싶다고 마음에 결정을 하셨으면 그 다음에 끝으로 하나 물어 봅시다. 내가 이렇게 예수님만을 위해 살고 예수님을 내 마음에 최고의 사랑으로 놓고 산다면, 이런 나를 보시고 주님은 어떻게 하실까요? 주님은 구경만 하시면서 고개만 끄덕끄덕 하고 '잘 한다.' 그러실까요? 아니죠.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요한복음 14장 21절 보면 '나를 사랑하는 자는 내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임이요. 나도 그를 사랑하여 그에게 나를 나타내리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독특한 은혜를 주님이 주십니다. 우리가 주님을 인생의 제일 큰 기쁨과 목표로 정해 놓고 살려고 하는데 예수님께서 나를 적당히 보시겠습니까? 아닙니다. 우리는 경주하는 선수들을 놓고 항상 제일 앞에 뛰는 사람에게 주목합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도 많은 성도들이 있지만, 자기를 기쁘게 하고 자기가 원하는 사람이 되기를 위하여 남보다 먼저 뛰는 사람을 주목합니다. 주목한 다음에 어떻게 하시는지 아십니까? 자기가 해 줄 수 있는 모든 일을 다 해 주십니다. 엄청난 은혜를 부어 주십니다.

 

여러분, 바울이 감옥에 앉아 있는데도 빌립보서에서 감옥 밖에 있는 사람들에게 기뻐하라는 소리를 9번 이상이나 하고 있는 것을 아십니까? 도대체 그 힘이 어디서 나오는 것입니까? 그 기쁨이 어디서 솟는 것입니까? 푯대를 분명히 하고 달려가는 삶을 살기로 바울이 작심하고 있는 것을 보시고 주님이 매일매일 은혜를 주시는 것입니다. 여러분, 날마다 은혜를 주십니다. 그러므로 감옥이라는 환경도 바울을 꺾지 못했습니다. 나이도 꺾지 못했습니다. 그 몸에 있는 병도 꺾지 못했습니다. 다가오는 죽음의 불길한 예감도 그를 기죽지 못하게 했습니다. 날마다 새로운 힘이 솟았습니다. 무거운 십자가라도 지고 달려갈 수 있는 새 힘이 솟았습니다. 어떤 환경에서도 절망하지 아니하는 새로운 은혜를 그가 맛보고 살았습니다. 바울을 이길 사람이 없었습니다. 네로가 이겼습니까? 로마 제국이 이겼습니까? 아무도 바울을 이긴 사람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주님이 그를 도와 주셨기 때문입니다. 그에게 은혜를 주셨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경제가 휘청거린다고 합니다. 정부를 믿을 수가 없고, 정치하는 사람들의 말을 신뢰할 수가 없습니다. 온 세상이 도무지 믿을 수 없는 불신의 덩어리로 화해 가고 있습니다. 젊은이들은 젊은이들대로 미칠 듯이 제 갈 길을 가고 있습니다. 도대체 우리 앞에는 무언가 밝은 미래를 점칠 수가 없는 답답한 환경만이 놓여 있지만 그러나 감옥과 같은 이런 환경도 우리를 절대 꺾지 못할 줄 믿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우리가 푯대를 향해 바로 달려 가기만 하면 주님이 이 모든 어려움을 극복할 수 있는 힘을 주시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에게 병이 있습니까? 여러분, 남이 모르는 개인의 상처와 고통이 있습니까? 여러분에게 무거운 십자가의 짐이 있습니까? 걱정하지 마십시오. 내가 주님을 기쁘시게 하겠다는 푯대를 향해서 끊임없이 달려 가기만 하면 주님은 그 모든 것들을 이기고도 남은 새 힘을 날마다 주십니다.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을 수 있습니까? 바울이 말하지 않았습니까?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핍박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기록된 바 내가 종일 주를 위하여 죽음을 당케 되며 도살할 양 같이 여김을 받았나이다. 그러나 나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내가 넉넉히 이기느니라.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일이나 장래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아무 다른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느니라.'(롬8:35-39) 할렐루야!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에 붙들려 있는 거룩한 존재들입니다. 누가 우리를 꺾습니까? 누가 우리를 주저 앉힙니까? 푯대만 분명하다면, 달려 가는 일만 제대로 한다면, 어디 우리의 발목을 붙들고 늘어질 세력이 있고 권세가 있고 고통이 있습니까? 바울이 승리한 것처럼 우리도 승리할 수 있을 줄 믿습니다. 할렐루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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