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소망은 주께 있나이다 / 시편 39:1~7
누구든지 자기의 인생관을 바꾸기란 결코 쉽지 않습니다. 사람마다 인생관이 처음 어떻게 자리를 잡고 자신의 사고와 감정, 삶의 태도를 결정하게 되었는지는 각각 차이가 있습니다. 그런데 일단 고정된 자신의 인생관을 어느 순간 바꾼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우리는 다윗을 통해 그의 인생관이 바뀌게 되는 대전환을 보게 됩니다. 곧 사고의 전환이 일어난 것입니다. '인생이란 것이 정말 아무것도 아니구나. 무언가 있는 것 같지만 없는 것이나 다름없구나.' '내 손에 있는 재물, 내가 왕으로서 쌓아놓은 부귀와 보화, 사실 이것들이 내 손에 있지만 언제 내 손을 떠날는지 모르는 것들이구나.' 바로 이러한 사실을 다윗이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리고는 이런 결론을 내렸습니다. "주여, 내가 무엇을 바라리요. 나의 소망은 주께 있나이다." 그래서 그의 마음을 세상에서 떼어 하나님께로 돌렸습니다. 그의 마음을 재물에서 떼어 하나님께로 돌렸습니다. 그가 생각을 완전히 바꾸는 대역전을 지금 시도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사고의 전환은 흔히 있는 일이 아닙니다. 또 모든 사람이 이러한 사고의 전환, 인생관을 바꾸는 큰 작업을 할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몰론 대부분의 사람들이 말은 그렇게 합니다. "인생, 그것 볼 것 있습니까? 잠깐 있다가 없어지는 것이지요. 거기에 마음을 두면 안돼요." 그러나 실제로 가만히 보면 말과 다릅니다. 천년 만년 살 것처럼 자신의 인생에 온통 마음을 집중하다가 나중에는 허무 속에서 끝맺는 사람들이 한두 명이 아닙니다. 말로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재물, 아무리 쌓아 둬도 다 내 것입니까? 공수래 공수거죠. 그것 다 소용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실제로 가만히 보면 영원히 자기 손에서 떠나지 않을 것처럼 움켜쥐고 사는 사람이 많습니다. 말은 바뀌어도 생각이나 마음은 안 변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간혹 굉장히 비참한 인생의 최후를 마치는 경우도 종종 봅니다.
다윗처럼 사고의 전환을 통해서 인생관을 바꾸려고 할 때는 어떤 특별한 동기들이 따라오기 마련입니다. 39장을 보면 일단 바울이 이 내용을 하나님 앞에 기도하고 시로 쓸 때에는 나이가 꽤 들었다는 인상을 받습니다. 아마도 나이가 50대나 60대 정도로 보입니다. 그리고 맨 마지막 절을 보면 그가 지금 병상에 누워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내가 없어지기 전에, 내가 죽기 전에 나의 건강을 회복시켜달라고 기도하는 것을 통해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다윗이 병을 앓고 있는 것을 보고는 이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주변에 많았습니다. 다윗은 우리가 잘 아는 바와 같이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의 뜻대로 살고, 하나님의 말씀대로 백성을 다스리려고 한 성군입니다. 그런데 의롭고 바르게 살려고 하는 사람치고 주변에 정적이 없는 사람이 없습니다. 적들은 다윗이 다시 소생할지, 소생하지 못할지 가름할 수 없을 정도로 병색이 깊어지자 은근히 좋아했습니다. 하나같이 원수들은 건강하고 형통하여 다윗을 비웃으며 다녔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그런 소리를 들으면서도 나이는 들고 몸은 병들어 대응할 형편이 안되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잘못하면 하나님을 원망하기 쉬울 것입니다. 또한 사람들을 향해 저주할 수 있는 위험을 안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다윗은 입을 꼭 다물고 참았습니다. 마음 속으로는 '내가 이러다가 죽는 것은 아닐까?' 하는 두려움도 있었습니다. 동시에 '내가 왜 이렇게 되었지? 하나님이 계신다면 내가 왜 이 모양이 되었지?' 하고 자기도 모르게 화가 목에까지 치밀었습니다. 그러나 이런 과정 속에서 그는 다시금 자신의 인생을 돌아보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자기가 소유하고 있는 모든 부를 다시 한번 보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는 '세상의 부는 아무것도 아니야. 내 마음을 줄 것도 못 되고, 내가 의지할 것도 못 되. 하나님, 하나님만이 나의 소망입니다. 하나님만이 내가 의지할 자입니다. 하나님, 나를 받으시옵소서. 나를 붙들어 주옵소서." 하고 마음을 완전히 바꾸는 경험을 하게 된 것입니다.
우리가 경험해봤듯이 사람이 병이 들면 세상을 보는 눈도 달라집니다. 인생의 실제를 들여다볼 수 있는 눈이 생기기 때문입니다. 또한 사람이 나이가 들면 세상을 보는 안목도 달라집니다. 왜냐하면 젊었을 때는 눈에 들어오지 않던 것이 나이가 들면 눈에 들어오기 때문입니다. 더 깊은 것을 보게 되고, 그 동안 뒤에 숨겨져 있던 것을 들여다보게 됩니다. 따라서 세상을 보는, 세상을 생각하는 마음이 달라질 수 있습니다. 사람이 실패한다든지 위기를 만날 때도 세상을 보는 안목이 바뀝니다. 특별히 인생의 오후라고 할 수 있는 35세 이후의 삶을 살 때는 더더욱 인생에 대해서 생각할 수 있는 기회를 맞게 되는데, 그 기회 중 하나가 연말입니다. 한 장 남은 달력, 그것을 마지막으로 떼어내는 사람은 세월의 빠름과 인생의 허무함을 어느 때보다도 실감할 수 있는 연말의 우울증을 경험하게 됩니다. 이런 동기들이 우리로 하여금 인생을 반추하게 하고, 세상을 다시 한번 생각하게 하면서 어떤 때는 우리의 심령이 방황할 때 있습니다. 이럴 때 우리는 연말이 주는 우울증의 사로잡혀서 주저앉아 있으면 안됩니다. 다윗처럼 우리의 사고를 전환하고 안목을 바꾸어 우리의 소망을 하나님께 두는 새로운 비상을 체험해야 합니다.
이런 의미에서 이 말씀을 가지고 2가지를 전해드리려고 합니다.
첫째는 "짧은 인생에 소망을 두지 말고, 하나님께 소망을 둡시다."라는 메시지입니다 4절, 5절을 봅니다. "여호와여, 나의 종말과 연한의 어떠함을 알게 하사 나로 나의 연약함을 알게 하소서." 이것은 서론이고 본론은 5절입니다. "주께서 나의 날을 손 넓이만큼 되게 하시매 나의 일생이 주의 앞에는 없는 것 같사오니 사람마다 그 든든히 선 때도 진실로 허사 뿐이니이다." 설명이 필요 없을 정도로 읽으면 벌써 그 의미를 알만한 내용입니다.
다윗이 한 50~60년 살았다고 가정한다면, 그는 지금 앞으로 남은 인생이 몇 년이나 될까 손가락을 세고 있습니다. 그리고는 '도대체 내가 한 생을 살았다고 하는 데 그것이 고작 한 뼘에 불과하구나.'라는 사실을 알았을 때 어처구니 없었습니다. 고대 사회에서 길이를 잴 때 기본 단위는 한 뼘이었습니다.
다윗이 병상에서 새삼스럽게 이 사실을 직감하게 된 것입니다. '이것 아무것도 아니구나!왕이 되어 천하를 호령하면서 굉장한 인생을 산 것 같은데, 나의 생이 얼마 안 남았다고 생각하니 별 것 아니구나. 한 뼘뿐인 인생, 하나님 앞에서는 없는 것과 똑같겠구나.' 다윗은 자신을 정확하게 직시했습니다.
다윗의 시편을 이런 고백은 여기저기에 나옵니다. 대표적인 몇 가지 구절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우리의 년수가 칠십이요, 강건하면 팔십이라도 그 년수의 자랑은 수고와 슬픔 뿐이요, 신속히 가니 우리가 날아가나이다."(시90:10) "인생은 그 날이 풀과 같으며 그 영화가 들의 꽃과 같도다. 그것은 바람이 지나면 없어지나니 그 곳이 다시 알지 못하거니와."(시103:15-16) "저희는 육체뿐이라. 가고 다시 오지 못하는 바람임을 기억하셨음이로다."(시78:39) 창세기 5장에 보면 고대 사회에 장수했던 우리 선조들의 이름이 나열되고 있습니다. 그 가운데서 가장 장수했던 므두셀라의 기록을 보면, 그의 한 생을 한 문장으로 짤막하게 요약해버렸습니다. "일백 팔십 칠세에 라멕을 낳았고, 라멕을 낳은 후 칠백 팔십 이년을 지내며 자녀를 낳았으며, 그는 구백 구십 육세를 향수하고 죽었더라."(창5:25-27) 10세기 가까이 산 사람의 생을 한 마디로 요약하는 것을 보면 한 뼘도 안됩니다. 따라서 70~80년을 사는 우리들의 경우 인생이 더욱 덧없는 것입니다.
제 나이 정도만 되어도 인생이 손 넓이만큼 짧구나 하는 것을 실감합니다. 한 생을 돌아보면 성경 말씀이 얼마나 진리인가를 소름이 끼칠 정도로 느껴질 때가 있습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이런 말을 했습니다. "내가 울고 있던 어린 시절에는 시간이 마치 기어가는 것처럼 천천히 가더라. 그런데 내가 꿈을 꾸며 이야기하던 소년 시절에는 시간이 빠른 걸음처럼 지나가더라. 내가 청년이 되어 젊음의 아름다움을 자랑할 때에는 시간이 마치 뛰어가는 것처럼 지나가더라. 내가 장년이 되어 힘과 자신감을 가지고 열심히 뛸 때에 시간은 마치 구름처럼 날라가더라. 이제 내 머리에 흰 서리가 앉고 노인이 되자 시간이 이미 나에게서 지나가버린 것을 알았다. 그래서 60이 넘자 1년이 새롭고, 70이 넘자 1달이 새롭고, 80이 넘자 하루하루가 새롭도다." 참 묘한 말 같이 여겨지지만 이것이 진리입니다. 아직 젊은이들은 실감이 안 나겠지만 결혼 생활을 10년, 20년 하신 분은 다 실감이 날 것입니다. 인생이 다 그런 것입니다.
더욱이 오늘 말씀 가운데서 5절 중간을 보면 묘한 뉘앙스를 줍니다. "사람마다 그 든든히 선 때도 진실로 허사 뿐이니이다." 누구에게나 든든하게 서 있는 것 같이 늙지도 않고, 실패하지도 않고, 잘못되지도 않을 것 같은 전성기가 있습니다. 그 때가 든든히 선 때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청춘을 자랑하는 때일 수도 있습니다. 건강을 과시할 때일 수도 있습니다. 성공하여 명성을 떨칠 때일 수도 있습니다. 누구나 이런 때가 한번은 있습니다. 그런 때에 많은 사람들은 무언가 영원한 유산을 남기고 싶어하는 욕망을 갖습니다. 죽은 후에 사람들이 기억해주기를 바라고, 두고두고 자기의 업적을 인정해주기를 바라는 마음을 갖게 됩니다. 그러나 언젠가는 자기가 세운 기록이 깨어지는 날이 오고, 명성도 사라지고, 공로도 잊혀지는 날이 반드시 올 것입니다.
제임스 돕슨(James Dobson)이라고 하는 미국의 유명한 목사님이 계십니다. 특별히 가정 사역을 열심히 하시는 아주 저명한 목사님인데, 이분은 대학 시절 테니스 선수였습니다. 그 당시 야망이 있다면, 대학별 경기에서 테니스 챔피언이 되어 학교 진열장에 트로피를 세워놓는 것이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제임스 돕슨이라고 새겨진 트로피를 몇 개 세워 자기 이름이 그 학교에 영원히 기억되기를 바랬다고 합니다.
그런데 몇 년 후 어떤 사람이 그 트로피를 자기에게 소포로 보내주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소포에는 이런 작은 편지가 들어 있었습니다. "내가 쓰레기장 옆을 지나가다 보니 트로피가 하나 있어서 우연히 꺼내 보았습니다. 그랬더니 당신의 이름이 적혀 있더군요. 그래서 너무 아까운 것 같아 당신에게 소포로 부칩니다. 학교가 재건축을 하면서 당신 트로피를 전부다 쓰레기통에 집어넣었던 것 같습니다." 그 편지를 읽고 나서 이 목사님이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얼마간 시간이 흐르면 당신 삶의 모든 트로피는 누군가에 의해 버려지게 될 것이다." 따라서 "든든히 선 때도 허사 뿐이니이다."라는 성경 말씀은 절대 과장된 말이 아닙니다.
제가 잘 아는 어떤 분이 미국에 거주하면서 '거라지 세일'(Garage Sale: 가정에서 쓰던 물건을 말 그대로 자기집 Garage, 차고 앞에 내어 놓고 파는 것)하는 곳을 많이 돌아 다녔습니다. 쓸모가 없는 물건들을 모두 펼쳐 놓고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헐값에 파는 세일입니다. 거기에 가면 가끔 값이 나가는 고물들이 있는데, 그분은 그런 것들을 찾아서 수집하곤 했습니다. 한번은 노인이 혼자 살다가 세상을 떠나, 그 집 안에 있는 물건을 몽땅 마당에 내어 놓고 몽땅 세일을 하고 있었습니다. 마침 아주 예쁘게 생긴 박스가 하나 있어 열어 보았더니 훈장이며, 상장이며, 트로피, 게다가 그 고인이 살아 있을 동안 사람들에게 알려진 공적을 기념하는 것들이 많이 들어 있었습니다. 그래서 한번 물어보았습니다. "이 한 상자가 얼마입니까?" 그러자 10불이라고 했습니다. 한 사람이 평생동안 얻은 명성, 공적, 그 모든 것을 기리는 것들이 전부 10불에 지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젊다고 교만하지 마십시오. 건강하다고 천년만년 살 것 같이 거드름 피우지 마십시오. 성공했다고 큰 소리를 치지 마십시오. 이사야 2장 22절에 말씀대로 우리는 숨만 끊어지면 수에 끼일 가치조차, 손으로 헤아릴 가치조차도 없는 존재입니다. "너희는 인생을 의지하지 말라. 그의 호흡은 코에 있나니 수에 칠 가치가 어디 있느뇨?"
흔히 목사는 하나님의 특별한 부름을 받고 한 평생 복음을 위해, 교회를 위해 헌신할 수 있도록 따로 세움을 입은 자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이 세상에 살면서 세상적인 직업을 갖지 않고, 오직 복음을 위해 평생 하나님께서 시키는 일을 하는 사람입니다. 아무래도 일반 평신도보다는 좀더 보람을 느낄 수 있는 자리이긴 합니다. 그러나 이렇게 평생 복음과 교회를 위해서 살다가 가기 때문에 인간적으로 허무하기란 똑같습니다.
저는 위대한 선배 목사님들을 자주 기억합니다. 그분들이 한참 전성기를 구가할 때는 그 설교 한 마디를 들으려고 수천, 수만 명의 사람들이 몰려들었습니다. 박력 있고 영감이 넘치는 설교 말씀 앞에 모든 청중들이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 새 사람이 되는 역사가 있었습니다. 그리고는 그 분을 기념하기 위해서 많은 책들이 나왔고 기념관도 세워졌습니다. 그러나 10년, 20년이 지나고 난 후 과연 무엇이 남아 있습니까? 그 메시지가 어디에 있습니까? 그 메시지를 듣고 감동하던 청중들은 어디에 갔습니까? 그가 남겨놓은 책들은 지금쯤 고서가 있는 곳에 가서 뒤져야 발견할 수 있을는지 모릅니다. 그분을 기념해서 세운 탑, 집, 그것이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나중에는 관리할 사람조차 없어 먼지가 앉는 초라한 모습으로 변할지 모릅니다. 이전 세대를 다음 세대가 기억하지 못한다는 말씀이 맞습니다. 세상의 것은 다 그런 것입니다. 우리가 이 사실을 깊이 인정해야 합니다.
인간의 유한성은 누구도 부인할 수 없습니다. 어떤 방법으로도 해결할 수 없는 우리 모두의 불만입니다. 시편 89편 47절에 있는 말씀 그대로입니다. "주께서 모든 인생을 어찌 그리 허무하게 창조하셨는지요." 우리에게도 이런 탄식과 원망이 나올 정도로 인간 자체를 보면 너무나 허무합니다. 다윗이 이 사실을 직시한 것입니다. 실존적으로 깨달은 것입니다. 입만 가지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온 영혼이 진동할 정도로 이 사실을 깊이 인식한 것입니다. 흔히 세상 사람들은 인생이 허무하다는 것, 인간의 성공이나 명성이 별 것 아니다라는 것을 인정합니다.
그런데 그와 같은 허무감을 잠깐 동안 잊어버리기 위해서 엉뚱한 데 마음을 쏟는 것을 봅니다. 잠깐 기분전환을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쇼핑에 마음을 빼앗기기도 하고, 영화관을 드나들기도 하고, 스포츠에 열광하기도 하고, 게임, 여행, 오락을 하기도 합니다. 나중에는 사치하고, 음주하고, 탈선하고, 성적으로 문란한 행위를 하면서 어떻게 든 인생의 허무를 잊어버리려고 몸부림을 치는 것을 봅니다. 얼마나 답답한 일인지 모릅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우리 사회를 가리켜 음모집단이라고 말했습니다. 곧 사람들로 하여금 인생의 진실을 보지 못하도록 눈으로 보기에 온갖 화려한 것들로 사람들의 안목을 가려놓고 속인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잠깐 기분전환을 한다고 해서 우리가 인생의 허무를 극복할 수 있습니까? 인생이 아무것도 아니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거부할 수 있습니까? 절대로 거부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유명한 철학자 버틀란드 러셀(Bertrand Russell)은 그 당시 냉전 시대를 살면서 소련으로부터 날라올지 모르는 핵탄두만 생각하면 소름이 끼칠 정도였다고 합니다. 그래서 노년기에 있던 그는 핵탄두가 주는 공포를 잊기 위해 매일 탐정소설 1권씩 읽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탐정소설을 읽을 때는 핵에 대한 공포가 잠깐 사라질는지 모르지만 세상의 모든 허무가 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아무리 우리가 기분전환을 하려고 몸부림을 쳐도 우리의 실존적인 진공상태를 채울 수는 없습니다. 이것이 우리의 현실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다윗처럼 눈을 돌려야 합니다. 세상을 향하던 데서 눈을 돌려 하나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그래서 세상을 보되, 내 입장에서 보지 않고 하나님 편에서 세상을 보는 것입니다. 인생의 초점을 인생에 맞추지 않고 하나님께 초점을 맞춰 세상을 보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여, 나의 소망은 주께 있나이다."를 다음과 같이 옮길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여, 나의 소망은 주께 있나이다. 주님 편에서 세상을 보길 원합니다. 주 안에서 인생의 모든 것을 해석하길 원합니다. 나의 인생관은 주님으로부터 시작해서 주님으로부터 마치기를 원합니다." 우리의 사고를 전환시켜야 합니다. 우리의 마음을 바꾸어야 합니다. 그래서 헛된 세상에 마음을 집중하지 말고, 영원하신 하나님 앞에 우리의 마음을 드려야 합니다. 이럴 때 우리는 허무를 극복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만 영원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저희에게 영생을 주노니 영원히 멸망치 아니할 터이요. 또 저희를 내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요10:28)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요11:25-26) 우리가 영원히 존재하시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면, 덧없는 한 생이 영원과 연결되면 그 영원 속에서 우리의 덧없는 인생은 거듭나게 됩니다. 하나님께 소망을 둔 사람은 하나님 편에서 우리의 덧없는 인생을 다시 재조명하게 됩니다. 그럴 때에 우리는 하루하루의 삶에 새로운 의미가 있음을 발견하게 됩니다. 삶을 살아야 될 이유와 목적과 가치가 있음을 발견하게 됩니다.
우리가 하나님에게 소망을 두고 그분 안에서 우리의 인생을 관조하면, 내가 한 때 성공하여 남긴 세상적인 업적 모두가 하나님 앞에 영원한 가치를 갖게 됨을 발견하게 됩니다. 하나님께 소망을 둘 때만 인생의 허무를 극복합니다. 우리의 삶에 의미를 찾습니다. 우리의 목적이 뚜렷해집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 소망을 두어야 합니다. 심지어 누구나 대면하게 될 죽음마저도 절망이 아닌 소망이 될 수 있습니다. 죽음은 영원하신 하나님 앞으로 우리를 인도하는 하나의 과정이지, 끝이 아님을 알게 됩니다.
우리 모두 인생에 소망을 두지 않고 오직 하나님께 소망을 두려 했던 다윗을 보면서 '주여, 나도 그렇게 되기를 원합니다' 하는 기도를 드리길 바랍니다. 그래서 내 안에서 근본적인 새로운 영의 눈을 뜨고 세상을 볼 수 있어야 하고 나를 볼 수 있어야 합니다.
끝으로 재물에 소망을 두지 말고 하나님께 소망을 두어야 합니다. "진실로 각 사람은 그림자 같이 다니고 헛된 일에 분요하며 재물을 쌓으나 누가 취할는지 알지 못하나이다."(6절) 우리가 세상에 살면서 열심히 일해 돈을 버는 것은 하나님께서 주신 축복 중 하나입니다. 돈을 버는 것이 잘못된 것이 아닙니다. 돈을 모으는 것이 잘못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축복하는 사람은 그런 은혜를 받습니다. 재물은 우리가 인간답게 살기 위해 절대로 무시할 수 없는 중요한 요소가 됩니다. 또한 하나님나라를 이 땅에서 펴기 위해서는 재물이 얼마나 필요한지 우리는 일을 하면서 많이 느낍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돈이 필요할 때가 많이 있습니다. 성경에서는 재물과 관련된 성경 구절이 2,300개가 넘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하신 비유 38개 중 16개가 재물과 관련된 비유입니다. 그만큼 돈, 재물, 이것은 우리의 삶에서 떼어낼 수 없는 아주 중요한 위치를 갖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많이 벌길 원합니다. 많이 모으길 원합니다. 금년 초두에 유행했던 유행어가 있습니다. "부자 되세요." 그래서 한때 부자 신드롬까지 유행할 정도였습니다. 사람들이 그런 인사를 들을 때 싫어하는 기색이 없었습니다. 사람들의 심리에 영합한 얄팍한 상술이긴 하지만 사람들이 이를 싫어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도 건전하게 열심히 벌어서 재산을 모을 수 있다면, 그리고 바르게 쓸 수만 있다면 우리 모두가 부자 되길 원하시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돈을 모으는 것은 좋으나 거기에 치명적인 약점이 있음을 꼭 기억해야 합니다. 돈은 모으면 모을수록 마음이 계속 거기에 빠진다는 것입니다.
우리 교회 안에서 헌금 잘하시는 분들은 돈을 모아놓은 분들이 아닙니다. 조금씩 통장에 저금하는 정도의 수준에 있는 평범한 중산층 서민들이 헌금을 잘합니다. 그들은 아직도 내 것이다 하고 쌓아놓은 것이 별로 없습니다. 그러므로 재물에 마음을 빼앗기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필요하면 언제든지 내가 덜 쓰고 라도 주님 앞에 내어 놓습니다.
그러나 우리 교회에서 정말 헌금을 잘 안 하시는 분들은 부자들입니다. 숨겨놓은 재산이 많은데도 형식적으로 체면치레할 정도 밖에 드리지 않습니다. 그 쌓아놓은 것, 움켜쥐고 있는 것을 어떻게 하려는지 알 수 없습니다. 재물을 쌓으면 쌓을수록 거기에 마음을 빼앗겨 버리고 맙니다. 이것이 우리의 약점이요, 무서운 위험이요, 유혹이요, 덫입니다.
또 한 가지 취약점은 일단 내 손에 들어오면 내 것이라고 착각하게 만든다는 것입니다. 영원히 내 손에서 떠나지 않을 것 같은 착각을 하게 만듭니다. 많은 사람들이 여기에 속아 그렇게 열심히 벌어 놓은 돈을 보람되게 한번 쓰지 못하고 다 놔두고 가버립니다. 결국 자식들에게 그 돈을 다 줘서 자식도 별볼일 없게 만들거니와 3년, 5년도 채 안되어 그 돈이 누구에게 가버렸는지 모르는 허황된 인생을 살고 끝냅니다. 다윗이 살던 시대에도, 오늘 우리 시대에서 주변에 이런 사람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유명한 소설가 오 헨리(O. Henry)가 쓴 단편 소설에 보면 '돈이 우리를 만족시킬 수 있는 것은 우리 인생의 1/12 밖에 되지 않는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가난하게 살다가 갑자기 막대한 유산을 물려받게 되었습니다. 한꺼번에 돈이 들어오자 쓰고 싶은 대로 돈을 썼는데, 한달 동안 실컷 쓰고 나자 그 다음에 따라오는 허무감을 감당하지 못해 결국 자살하고 말았다는 내용의 소설입니다. 1년 열두 달 중 한 달은 실컷 쓰기 위해 돈이 필요하고, 나머지 열한 달은 돈이 별로 의미가 없다는 이야기입니다. 사실 이것은 진리입니다. 물론 돈이 있을 때 좋은 점도 있지만 인생 전체로 놓고 볼 때는 지극히 한 부분에 지나지 않습니다. 돈이 우리를 만족시킬 수 있는 것은 한 부분에 불과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돈에 마음을 빼앗겨선 안되며, 돈이 영원히 내 것인 것처럼 착각해도 안 됩니다. 돈을 보는 눈이 달라져야 합니다. 이후에 누가 취할는지 알지 못합니다. 우리는 다윗처럼 고백할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 이제 재물에 내 마음을 빼앗기기를 원치 않습니다. 재물에 소망을 두기를 원치 않습니다. 주여, 나의 소망은 주께 있나이다." 그러면 마태복음 6장 19절 이하에 나오는 "오직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하늘에 쌓아두라."는 말씀을 이해하게 될 것입니다.
교부 오리겐이 한 아주 재미있는 말이 있습니다. "예수 믿는 사람은 땅에 재물을 취하여서 하늘의 통화로 바꾸는 환전상과 같다." 우리가 공항에 내려서 돈을 쓰려면, 가지고 간 돈을 그 나라의 화폐로 바꿉니다. 마찬가지로 예수 믿는 사람은 하나님 앞에서 재물을 축복으로 받았습니다. 이제 그 재물을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한 뼘도 안 되는 짧은 인생을 살면서 그 돈을 다 쓸 생각입니까? 우리에게는 영원한 나라가 기다리고 있습니다. 따라서 잠깐 있다가 가는 세상에서 얻은 재물은 영원한 나라에서 영원히 쓸 수 있는 돈으로 바꾸어야 합니다. 하나님나라에서 영원히 보화가 되어 광채가 나는 보물로 바꾸어야 합니다. 그것이 곧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쓰는 것입니다. 선한 일을 위해서 쓰는 것입니다. 사회에 기부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큰 뜻을 발견하면 그것을 위해서 나의 것을 드리는 것입니다. 바로만 쓰면 잠깐 있다가 없어지는 값없는 세상의 재물이 영원한 나라에서 영원히 통용되는 영원한 나라의 화폐로 바뀌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에게 소망을 두면 우리의 물질도 이렇게 아름답고 가치 있게 쓸 수가 있습니다.
WEC(Worldwide Evangelization for Christ) 선교회를 창설한 C. T. 스터드라고 하는 유명한 선교사가 있습니다. 그는 영국의 옥스포드 출신으로 재벌가 집안의 자녀였습니다. 그런데 그가 예수를 믿자 평생 복음을 위해 살기로 작심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중국과 아프리카에서 평생을 선교사로 살았고, 나중에는 자기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유산을 주님의 복음을 위해서 다 써버렸습니다. 이제 그가 나이가 들어 임종을 눈 앞에 두고 이런 말을 했습니다. "내가 세상을 떠날 날이 가까워 온 것 같다. 이제 돌아보니 즐거웠던 몇 가지 일이 생각나는구나. 하나님이 나를 중국에 가라고 말씀하셨을 때, 우리 가족들은 다 반대했다. 그런데도 하나님의 명령이기에 결단하고 중국으로 건너간 것, 지금 생각하면 얼마나 기분 좋은 일인지, 즐거운 추억인지 모른다. 그리고 그 때 하나님이 나에게 명령하신 것이 있다. 부자 청년에게 주님이 말씀하신 그대로 '네가 가진 것을 가난한 자에게 다 나눠주고 나를 좇으라.'고 나에게도 말씀하셨다. 그래서 내가 유산 받은 것을 선교를 위해서, 가난한 자를 위해서 다 흩어주었는데, 지금 생각하면 얼마나 유쾌한 추억인지,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 그 앞에 펼쳐질 하나님나라의 영광을 바라보는 사람만이 할 수 있는 말입니다. 두고 가는 것이 아까워서 눈을 못 감는 사람에 비해 얼마나 영광스러운 모습입니까? 하나님께 소망을 두는 사람은 재물도 바로 씁니다.
오늘 말씀의 요점은 2가지입니다. 우리 인생은 짧고 아무것도 아닙니다. 거기에 마음을 두지 말고, 하나님께 소망을 두십시오. 그러면 우리 인생은 의미를 갖게 될 것입니다. 목표를 갖게 될 것입니다. 세상의 재물, 내 손에 있지만 내 것이 아닙니다. 거기에 마음을 두지 말고 하나님께 소망을 두십시오. 그러면 이 재물이 영원한 나라에서 영원토록 가치를 발하는 보물이 될 것입니다. 이런 축복을 우리가 다시 한번 마음에 새기길 바랍니다. 지난 한해 동안 어떻게 살았습니까? 어떤 인생관을 가지고 살았습니까? 어떤 재물관을 가지고 살았습니까? 말씀에 비추어 내가 잘못 생각하고 있었던 부분이 있다면, 이 해가 가기 전에 하나님 앞에 회개할 필요가 있고, 만약 바로 살았으면 하나님 앞에 감사하시길 바랍니다. 그리고 새해도 그렇게 살겠다고 하나님 앞에 약속하고 힘찬 발걸음을 내딛는 연말이 될 수 있길 바랍니다.
다같이 기도합시다.
"아버지 하나님, 감사합니다. 다윗을 통해서 연말을 맞은 우리에게 새로운 교훈을 주시니 감사합니다. 주님, 인생은 손으로 한 뼘 잴 정도 밖에 되지 않으며, 주님 앞에는 없는 것 같다고 고백한 것을 그대로 받아들이고 공감합니다. 그러므로 이 덧없는 세상에 우리의 마음을 빼앗기지 않고, 우리 소망을 하나님께 둘 수 있도록 은혜 주심을 감사합니다. 하나님, 내 손에 있는 재물도 내 것이 아님을 분명히 믿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 소망을 두고 바로 쓰는 자가 되고, 영원히 남는 것으로 쓰길 원합니다. 이와 같은 결심을 다시 한번 할 수 있도록 축복해 주신 것 감사합니다. 성령이여, 이 시간에 임재하셔서 우리의 마음을 열어주시고, 우리의 인생관을 하나님의 말씀대로 바로 정립하게 하시고, 우리의 재물관을 바로 정립해서 나중에 후회 없는 생을 마칠 수 있도록 축복해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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